안막이 유치장에서 풀려난 직후 1932년 7월 31일 최승희는 장녀를 낳았다. 이름은 ’勝子‘라고 지었다. 안막의 신변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던 탓에 정확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이 무렵 잡지에 게재된 최승희의 인터뷰에 따르면, 안막은 미처 다 끝내기 못한 학업을 마치기 위해서, 그리고 최승희는 무용공부를 더 해보려는 목적으로 도쿄로 떠날 계획을 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출산 직후 최승희가 급성 늑막염에 걸린 탓에 일본행이 점점 미뤄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시이 바쿠에게 최승희를 다시 받아주겠다는 승낙을 얻게 되면서 최승희는 딸 승자와 제자 김민자를 동반하여 먼저 간 안막을 따라 도쿄로 떠났다. 1933년 3월 그녀가 23살이 되던 해였다. 당시 최승희와 가깝게 지냈던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시이 바쿠는 공산주의자인 안막에게 정치활동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가 작가 생활을 지속하기보다는 최승희가 무용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조언했다고 한다. 그리고 최승희에게는 자신의 승낙 없이 또다시 이시이 바쿠 무용소를 떠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최승일의 소개로 안막이 근무했던 일본 가이조샤의 사장 야마모토 역시 “최승희가 춤을 못 추게 하든지 아니면 안막이 문단에 나서는 것을 포기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조언했다. 이렇게 해서 1929년 조선에 귀국했던 최승희는 약 4년 만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바쿠와 함께 무용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 안막과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무용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던 최승희 부부는 자신들을 둘러싼 곤란한 상황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정으로 인해 1933년 12월 이후 안막은 조선 문단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1933년 5월 10일 최승희는 잡지사가 추죄한 여류무용대회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첫 무대에 올랐다. 이때 처음 선을 보인 작품 ’에헤라 노아라‘는 최초의 조선무용으로서 최승희가 일본 무용계에 입지를 굳히게 된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이후 그녀의 대표작으로 남게 되었다. 당시 이 공연에 대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평가는 최승희의 이미지를 더욱 격상시키면서 ’일본 제일의 신인 무용가‘로서 일본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최승희를 일본 제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는 훌륭한 체구와 그녀의 춤의 크기와 힘이다. 거기다 춤을 추기에 한창 좋은 나이이다 또 그녀 한 사람에게 두드러진 민족의 향기이다.
이 여세를 몰아 혹독한 훈련에 들어간 최승희는 1934년 9월 20일 신인 무용가로서는 처음으로 도쿄에서 무용작품 발표회를 개최했다. 당시의 신문과 잡지에서 일본의 저명한 지식인들의 감상평이 쇄도했던 사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발표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때의 성공은 이후 최승희가 무용뿐만 아니라 영화배우, 광고모델, 가수로 이어지는 만능 엔터테이너로 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면서 또 다른 운명으로 이끄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시이 바쿠는 식민지 조선인이 일본 대중을 관객으로 마주할 때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운위에 대한 염려와 회의가 엿보인다.
최승희의 제1회 무용작품 발표회는 의외로 무용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 같다. 그 증거는 동경의 신문, 잡지에서 최승희의 사진과 기사가 크게 보도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조선 출신으로 최초의 무용가라는 점인 것 같으나 또 하나는 신진 무용가들의 신작 발표회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의 육체적 조건이 다른 일본인에서는 볼 수 없어서 그 일거일동은 다른 사람의 두 배 이상의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민족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극적 요소를 필요로 하는 춤이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풍의 춤이 갈채를 받은 것은 사실이나 단순히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사람을 즐겁게 한다는 것과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장애를 넘어가기 위한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