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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왕국 여로보암의 종교정책
왕상 12:25-33
25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26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
31 그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32 여덟째 달 곧 그 달 열다섯째 날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제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지은 산당의 제사장을 벧엘에서 세웠더라
33 그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여덟째 달 열다섯째 날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제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왕상 12:25-33 / [여로보암의 종교 정책과 배교] 여로보암은 에브라임의 산간지대에 있는 성읍 세겜을 보수하여 요새화시킨 뒤에 수도로 삼았다. 그후 애굽의 시삭왕이 이곳으로 원정해 오자, 그는 요단강 동쪽의 길르앗으로 도피해 얍복 강가의 브니엘을 수도로 삼아 다시 요새화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얼마간을 머물다가 다시 떠나 세겜보다 더 안전한 북쪽의 디르사를 수도로 택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26 그러고 나서 이제 그는 종교적인 배려에서 이렇게 생각하였다. `우리 나라에는 여호와를 모실 성전이 없는데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성전을 지어 주지 않으면 이 나라를 다시 다윗의 후손에게 빼앗길 것이다. 27) 이 백성이 절기 때마다 규칙적으로 예루살렘 성지를 찾아 순례 여행을 하고 주님의 성전에 제물을 바친다면 그들의 마음이 르호보암에게로 기울어져 그를 다시 자기들의 왕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나를 죽이고 말 것이다.' 28) 그래서 그는 금송아지 두 마리를 만들어 놓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와같이 말하였다. `이제 여러분은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준 하나님이 여기 계십니다.' 29) 그리고 그는 백성이 순례하기에 편리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을 끌어들이기에 유리하도록 금송아지 하나는 서남단의 벧엘에 세워 놓고, 또 하나는 최북단의 성읍 단에 세워 놓았다. 30) 이로써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죄의 길로 인도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장엄한 행렬을 이루며 금송아지를 모시고 단에까지 가서 제단을 쌓았기 때문이다. 31) 여로보암은 또한 전국 각처에 풍요의 신을 섬기는 산당들을 세워 놓고, 레위 자손이 아닌 일반 백성으로 하여금 제사장을 삼았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여로보암의 혼합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남왕국 유다로 떠났기 때문이다. 32) 왕이 제사의 축제일을 정해 놓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임의로 8월 15일을 매년 성소 순례의 축제일로 정하여 예루살렘의 장막절 축제일과 비슷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때가 태양력으로는 10-11월에 해당되며, 가을에 신년을 맞이하던 고대 이스라엘의 신년 축제에 해당되었다. 매년 이때에는 여로보암이 직접 벧엘로 가서 제단으로 올라가 금송아지 앞에 제물을 바치고, 그가 세워 놓은 제사장들과 더불어 제사를 드릴 작정이었다. 11왕상 12:33 여로보암이 이 제멋대로 제사의 축제일을 정해 놓은 뒤 제단으로 올라가 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여호와께 제물을 바치려 할 때였다.
여로보암은 북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됐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가지 계책을 생각했습니다.
부느엘을 건축하고(25) 여로보암은 세겜을 수도로 삼고 그곳을 요새화했습니다. 그리고 북동쪽이나 동쪽에서 쳐들어오는 적들로부터 길르앗을 보호하기 위해 얍복 강변의 부느엘에 성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방비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께서 울타리가 되어 주시도록 신앙을 굳건히 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이 너무 깊어지면 신앙이 약화될 수 있습니다. 먼저 기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26-27) 여로보암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는 한 자신을 왕으로 추대한 이스라엘 열 지파가 언제든 자신을 죽이고 르호보암에게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절기 때마다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대이동하는 모습은 상상하기도 싫었을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보다 자신의 왕권 유지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했거나 자격이 있어서 왕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징계의 수단으로 자신을 선택하신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28-33) 여로보암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북 이스라엘의 최남단 벧엘과 최북단 단에 산당을 세우고(신 12:13-14), 십계명을 무시한 채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곳에 두었습니다(출 20:4-5). 게다가 레위 자손이 아닌 사람을 제사장으로 삼았으며(신 18:1-8), 자기 마음대로 7월 15일에 지켜야 할 초막절을 8월 15일로 변경하여 지키게 했습니다(레 23:34-36). 이제 여로보암에게는 절대 순종의 대상인 살아계신 하나님은 없고 정권 유지를 위해 자신이 조종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고안한 하나님만 있게 되었습니다.
적용: 오늘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못하고 자기 생각, 자기 판단, 자기 노력으로 살려고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노력, 사람의 열심은 실패할 뿐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식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끊어지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인생이 어려운 것은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마음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에서 승리하는 삶은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영과 연결되어 복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도 역사할 수 있지만 죄와 사망을 주는 마귀도 역사합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마귀에게 문을 열어주어 결국 죄를 짓고 사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의 생명줄이 하나님과 연결 될 때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 설 교 >
자기 자신만을 위한 두 왕
열왕기상 12:21~33
오늘 본문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두 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두 왕의 공동분모는 둘 다 자기만을 위해서 왕의 자리를 지키려 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에게 왕의 자리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말씀에 따라 백성들을 잘 통치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왕권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여해준 권위요, 권력입니다. 이 힘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섬기는 자세로 백성들을 돌보고 보호하고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윗 왕이 보여준 Model Case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두 왕은 다윗의 길을 가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의 힘을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보호하는데 사용합니다.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정권유지를 위해서 이용하려 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르호보암의 죄는 무엇이며 여로보암의 죄는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1.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남에게서 찾는 르호보암의 어리석음입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르호보암을 왕으로 인정하기 전에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 왕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의 현명한 원로들이 제시한 ‘백성을 섬기는 리더십을 가지라’는 의견을 버리고 자기 또래집단이 제시한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는 말로 답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북이스라엘은 이 어리석은 대답을 듣자 마자 우리는 다윗과 상관이 없다고 선포하고 새로운 나라를 새우겠다고 선포하고 맙니다.
르호보암은 이스라엘의 상태가 이렇게까지 심각한지 두 가지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맙니다. 첫 번째로는 부역 감독관 아도니람을 북이스라엘의 관리자로 보낸 일입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역 감독관 아도니람은 돌로 쳐죽이고 심지어 왕까지도 죽이려 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이제야 깨달은 르호보암은 죽음을 힘을 다해서 예루살렘으로 도망쳤습니다. 성난 군중을 피해 겨우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르호보암은 자신의 통치에 도전하고 국토를 분리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운 북이스라엘 지파들을 향해 분을 삭이지 못합니다. 결국 그는 두 번째로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맙니다. 그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북 이스라엘 지파의 반역에 있다고 보고 유다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 18만 명을 징집해 내전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무모한 통치에 의해 내란이 야기되었음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상실된 통치 영역을 되찾고자 자기 백성을 동족 살육전쟁으로 내 몰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스마야 선지자를 보내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24절)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나뉘어진 것은 선왕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우상숭배의 길로 갔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한 심판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깨닫지 못하고 아버지 솔로몬이 걸었던 길로 끝까지 가고자 한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르호보암 왕은 분열왕국이 북이스라엘 10지파들의 교만함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분열의 원인이 자신의 아버지 솔로몬 왕과 자신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민족끼리 전쟁을 일으키려 한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이 명분 없는 전쟁을 막고자 선지자 스마야를 보내 하나님의 뜻을 알립니다. 유다 백성들은 르호보암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할 마음도 없고 동족 간의 전쟁을 원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선지자의 말을 듣고 흩어집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자신부터 살펴보면서 문제 해결의 답을 찾아가야한다는 영적 방적식의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말씀합니다. 어떤 문제가 생길 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자신의 마음부터 먼저 점검하면서 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해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대개 문제의 원인 제공은 나에게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상대방이 악한 의도를 사건을 일으켜서 나를 곤경에 빠뜨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탓하기에 앞서서 내게 문제는 없는지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 할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끊을 것이 있으면 끊고 돌이킬 것이 있으면 돌이켜야 합니다. 보편적으로 나의 내면에서부터 문제의 원인을 찾아갈 때 우리는 크나큰 영적 성장을 경험하게 되고 그 사건을 축복의 문을 여는 통로로 쓰임받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을 나의 부족함이나 나의 허물에서 찾지 않고 무조건 다른 사람을 탓하면서 원망과 분노하는 마음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아가면 100% 실패합니다. 남의 탓, 환경 탓, 운명 탓으로 돌리면서 문제의 해결점을 찾는다면 성장도 없고 문제의 해결도 끝까지 못합니다.
만약 르호보암이 북이스라엘의 10지파가 자신을 배신하고 떨어져 나간 사건을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찾았다면 그는 먼저 아버지 솔로몬의 죄부터 회개하면서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을 깊이 깨닫고 통곡하면서 돌이켰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 왕이 왜 축복 받았는지를 배우면서 그는 현군으로 자랐을 것입니다.
우리가 끝없이 문제의 해결점을 자신에게 들고 나아가 자신 안에서 찾고자 해야 합니다. 나에게 무엇이 문제인가?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일까요? 내가 어떤 부분에서 부족한가? 나는 어떤 부분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자라고 성장해야 하는가? 이렇게 자신에게서 사건의 해결점을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마음가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자기중심성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저에게서도 동일합니다. 그러나 제가 깊이 깨닫는 것은 목회 현장에서 벌어지는 거의 대부분의 문제는 목회자의 허물과 약점에서부터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결코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내 탓입니다’를 우리가 선포하고 먼저 자신부터 채찍질 하는 자세를 보인다면 우리는 놀라운 사건의 해결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처럼 자신의 허물과 죄는 생각해 보지 않고 모든 원인을 상대방의 탓으로 돌린다면 그 인생은 희망이 없습니다. 성숙도 성장도 없습니다. 남의 탓으로 환경 탓으로 돌리면 어떤 사람의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왜? 여로보암이 이 전쟁을 포기합니까?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백성들이 듣고 정의를 상실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상대방만 탓하면서 전쟁을 일으키고 싸움을 일으키고 문제를 일으키면 하나님이 그것을 패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없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승리합니까? 하나님의 함께하지 않는 도전은 실패하고 열매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셔야 하고 하나님의 축복해 주셔야 하며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 말입니다.
2.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서 하나님마저도 이용해 버리는 여로보암의 죄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에게도 하나님께 대한 순종여부가 복의 관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야 선지자를 통하여 여로보암에게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지파를 주겠다고 하면서 분명히 조건을 달았습니다.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성읍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경배하며 그의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내 법도와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함이니라....네가 만일 내가 명령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이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열왕기상 11:32~33, 38)
그러나 여로보암은 자신의 왕권 보장에 대한 선지자의 예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왕권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했습니다. 그는 먼저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세겜을 수도로 정하고 그 곳에 궁궐을 세우고 방어를 위한 외성을 쌓았습니다. 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성읍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은 또한 수도 세겜을 방어하기 위해서 세겜의 맞은편에 부느엘 성을 요세화 시켰습니다. 이렇게 세겜을 정치적 구심점으로 삼고, 세겜과 부느엘을 요세화하는 것은 잘한 일입니다. 한 국가를 창건할 때 이 정도는 누구나 반드시 해야 할 기본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여로보암의 그 다음 행보가 문제였습니다.
1. 첫 번째 잘못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숭배 길로 이끈 일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이래로 30년 이상 예루살렘의 성전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의 중심지로 자리매김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졌습니다. 그럴지라도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는 하나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나라가 양분되었어도 북쪽 백성들은 1년에 3번(유월절, 맥추절, 장막절)은 절기를 지키러 중앙성소인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신 12:13-14) 즉 예배는 인간의 마음대로 편한 대로 아무렇게나 드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성격을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꾸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다가 그들의 마음이 르호보암에게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10지파에 대한 통치권을 주고 왕으로 세워주셨다면 자신의 왕권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리라는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꼼수를 부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대신할 제단을 벧엘과 단에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대신할 금송아지를 만들고 백성들에게 수고스럽게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가 없이 가까운 벧엘과 단에 가서 예배드리라고 했습니다. 금송아지나 언약궤나 별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당장 급하고 편하니까 그렇게 약식으로라도 예배를 드리자는 것이었습니다.
2. 두 번째 잘못은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습니다.
31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또 산당을 짓고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제단을 쌓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하는 것만으로 부족했는지 한 술 더 떠서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습니다. 율법에는 레위 자손만이 제사장으로 섬길 수 있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이를 무시해 버리고 자기 맘대로 임명해버렸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여러보암의 악한 종교 정책에 오랫동안 말씀과 기도로 살아온 레위 자손들이 크게 반발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제대로 공부하고 예배를 섬겨온 레위인들이 여로보암의 악한 요구를 호락호락 들어줄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역대하 11장 13~ 15절을 보겠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지방에서부터 르호보암에게 돌아오되 / 레위 사람들이 자기들의 마을들과 산업을 떠나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렀으니 이는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들이 그들을 해임하여 여호와께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숫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친히 제사장들을 세움이라” 여로보암과 그의 집안이 너무나 큰 죄를 조금도 망설임없이 담대하게 짓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정권을 지키기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제사장까지도 임으로 물갈이를 해 버린 것입니다.
3. 세 번째 잘못은 예배를 드리는 절기마저도 자기 마음대로 정해버린 일입니다.
32~33절을 보겠습니다. “여덟째 달 곧 그 달 열다섯째 날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제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지은 산당의 제사장을 벧엘에서 세웠더라 / 그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여덟째 달 열다섯째 날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제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여로보암은 8월 15일을 북이스라엘의 절기로 선포했습니다. 8월은 오늘날의 태양력으로 계산하면 10월과 11월에 걸쳐 있는 달로, 유다의 정식절기인 7월 1일 신년 나팔절과 7월 15일부터 시작되는 초막절을 경축하던 예루살렘 주요 절기의 한 달 뒤입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예배의 절기마저도 자기 마음대로 정한 것입니다. 그것도 유다 절기와 ‘비슷하게’ 정했습니다. 가짜는 항상 진짜와 ‘비슷하게’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비슷하게 해도 가짜가 진짜가 될 수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5절에 보면 말세에 일어날 징조중의 하나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의 모양을 갖추고 기도의 모습을 갖추고 예배의 경건을 흉내를 내도 그 안에 진실한 믿음 곧 순종과 헌신이 없으면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습니다.
여로보암의 죄가 무엇입니까? 그는 신앙의 편의주의를 표방했습니다.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악한 동기를 감추고 남유다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신앙의 상호교류를 막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백성을 성전으로부터 분리해 왕권 아래 예속시키고, 자신의 정치적 계산에 따라 산당을 만들고 임의로 제사장을 백성들 가운데서 원하는 자들을 임명했습니다. 더불어서 새로운 절기를 정했습니다. 백성의 원시적 종교심리를 이용해 참 종교를 가나안 종교와 혼합시켰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술수는 일시적으로 정치적 안정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을 자초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나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신앙을 이용했던 경험은 없습니까? 현실적인 유익보다 참된 진리를 더 소중하게 여깁니까?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깊이 생각 해 보아야 합니다. 편한 것의 유혹, 급한 것의 충동을 조심하십시오. 사탄은 항상 편한 것, 급한 것을 통해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예배를 안드리는게 문제가 아니라 나 중심의 예배, 나를 만족시켜 줄 예배를 드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신앙의 절대기준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 배우게 됩니다. 이것만은 무너질 수 없다는 말씀 중심의 신앙말입니다. 한 번 신앙의 편의주의에 빠지면 우리의 신앙이 한 순간에 변색되고 타락합니다. 편의주의적인 신앙의 생각을 우리가 경계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제직들은 할 수 만 있으면 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자신이 섬기는 본교회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말입니다. 본교회를 섬기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야 합니다. 또한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규칙적인 기도생활도 중요합니다. 또 하나는 여로보암의 죄도 있지만 북이스라엘 백성들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 가운데 신앙의 편리주의에 빠져 있었고 하나님 중심의 신앙에 대한 갈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항거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집에 대해서는 그렇게 열심히 항거하고 대적하고 난을 일으키더니 여로보암의 잘못된 우상숭배의 정책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열대하 11장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은 목숨걸고 남쪽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맹목적적으로 신앙생활하면 안 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나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잘 못 말하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면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한 기준을 따라 나는 가겠다고 때로는 항거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서야 합니다.
내 신앙의 양심을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말씀 중심을 따라서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평신도들도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편에 서서 하나님을 섬기는 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