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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떻게 우리 죄를 씻을 수 있는가 |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낸 죄
저는
여러 해 동안 교회생활하면서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고 난 뒤에
변화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병이 낫거나 술이 끊어지거나
더러운 생활이 정결해지거나
하는 그런 간증을 일일이 하려고 하면
밤새도록 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만일 주님이 우리 마음 안에
이러한 역사를 하시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아 놓았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사 59:1)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조그마한 거리낌이
가로막혀 있어도 서먹한 법인데
우리 죄는 산더미 같을 텐데
하나님 사이가 부드러울 리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으면
모든 죄가 눈처럼 희게 씻어져서
거듭나게 되어 한평생 예수님과 같이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된다.
지난 날 이론적으로만 듣던
모든 이야기가
실제로 우리의 것이 되고
기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누가복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재미있는 사실의 하나는
병들고 방탕하고 추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주님이 더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는 역설적인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예수를 믿으려면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한다,
예수를 믿으려면 주일을 지켜야 한다 하는 관념의 짐들을
사람들의 마음에 잔뜩 얹어 놓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추하고 악한 죄인을 더 사랑하신다.
성경에는 추하고 더러운 죄인들이 나와서
구원 받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그 당시 신앙 생활 잘 한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와서
구원받는 얘기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오늘날 한국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를 믿으려면 죄도 짓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관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죄가 많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그 사람이 예수님과 더 가까운 위치에 있는데도,
참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 난 뒤에는
주님 앞에 나오기를 두려워하며
어두움 속에서 헤매고 있다.
병원에는 어떤 사람이 가는가.
병자가 집에서
병을 고치기 위해서 고생하다가
다 낫고 난 뒤에 병원에 가는 일은 없다.
십일조 좀 잘 내고 기도 잘 하며 주님 앞에 충성스러워지고
구제도 좀 하고 난 후에 주님 앞에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다.
죄 있는 그대로 더러운 그대로, 부족한 그대로,
악한 그대로, 부끄러운 그대로 나와야 한다.
성경을 읽어보면,
추한 그대로, 악한 그대로,
부끄럽고 부족한 그대로
예수님 앞에 나아와야 한다고 되어 있다.
만족을 모르는 삭개오 세리장
여리고에 있는 삭개오라는 사람은
누구보다 추하고 탐욕스러웠으며 누구보다 악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 한 사람이
삭개오의 집에 갔다고 하자.
세리장님,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하면
어디서 왔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예수님의 제자인데
전도하러 왔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서 이제 당신이
누구에게 토색한 것 있으면 다 갚고,
담배도 끊고, 술도 끊고, 도둑질도 하지 말고,
착하게 되면 예수 믿는 겁니다." 고 얘기했다면
삭개오는 그 얘기 듣는 순간에
'나는 안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먼저 들 것이다.
나는 안 됩니다 하는 마음으로
아예 마음을 닫아 버릴 것이다.
문제는 내가 달라진 뒤에 믿느냐,
믿고 나면 주님이 나를 바꾸어 주느냐 그 차이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려고 노력하고, 기도하려고 애를 쓰고,
신앙 생활 잘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진정한 믿음은 성령으로부터 온 믿음과 감사가
내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서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네 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지 않았다.
토색한 것 있으면
사 배나 갚으라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그렇게 하라는 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먼저 삭개오의 마음속에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셨다.
거기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고 나면,
우리 마음속에
성령님께서 들어오셔서 기도하고 싶고,
성경을 읽고 싶고, 찬송을 하고 싶고,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시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삭개오야, 재산이 얼마나 되지?
얼마나 토색(討索)했지?
솔직하게 나한테만 얘기해?
내가 다 비밀로 해 줄께." 그걸 어떻게 할거야?
재산 반을 팔아 갚지? 안 그러면 지옥 간다.
안 그러면 사업 망해. 십일조 안 내?"
삭개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삭개오가 부담이 되어
예수님 괜히 모셨다고 생각하게 되며 괴로울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담스러워 한다.
사랑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공갈하고 협박하는 하나님인 것이다.
주님을 만나기 전의 삭개오는
마음에 참된 만족이 없었고 기쁨이 없었다.
그는 돈이 없어서 불행한 줄 알고 그래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남이 뭐라고 하든지 상관이 없었다.
삭개오에게 돈이 하나님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는데
삭개오는 로마에 붙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세금을 착취해서
로마에 상납하는 매국노였다.
그래서 삭개오는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받았으며 세리라고 멸시를 받았다.
그래도 삭개오는 너희들 멸시해라.
나는 돈이 있다며 자위를 했다.
삭개오에게는 돈이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돈을 위해서는 멸시도 기꺼이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돈 때문에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했고,
돈 때문에 그는 세리가 되었다.
삭개오의 하나님은 돈이었다.
어느 날 삭개오는,
자기가 믿어 왔던 하나님에 대하여 회의가 왔다
.
돈을 많이 가지면 그 돈이 자기에게
행복을 주리라고 생각을 했는데,
돈을 잘 섬겨서 금고 안에 돈은 많아졌지만,
이상하게도 돈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공허해지는 것이었다.
돈이 참된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삭개오는 돈에 대해서 회의가 생겼다.
돈이라는 하나님, 하나님처럼 섬기던 돈에 회의를 가지고
이제 다른 하나님을 찾고 싶었다.
그렇다. 이 세상에는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우리의 참 하나님이 되실 분은 아무도 없다.
어떤 사람은 돈을 하나님으로 삼고,
어떤 사람은 자기의 주먹을 하나님으로 삼고,
어떤 사람은 지위를 하나님으로 삼고,
어떤 사람들은 서울대학교를 하나님으로 삼고 산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듯이,
세상 사람들은 허무한 것, 썩어질 것, 거짓된 것에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투자하며
섬기고 있는지 모른다.
국회의원이나 박사라는 우상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있다.
그것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은,
자기 생각 속의 하나님,
자기 욕망의 하나님이 자기를 만족하게 해줄 줄 알지만,
막상 그것을 가져보면 그것이 너무나 허무한 것임을 알게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참 맛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채
썩어질 욕망의 종이 되고,
탐욕의 종이 되고, 정욕의 종이 되어 있다.
삭개오도 역시 돈에 매여 있었지만
거기에는
참된 만족이 없음을 깨달았다.
뽕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
삭개오는 평안이 없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런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었다.
자기가 갖지 않은 무엇을
갖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께 가면 무엇인가를
얻을 것 같았고 만나고 싶었다.
달려가 보았으나 예수님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키가 작은 삭개오가 볼 수가 없어
뽕나무 위에 올라갔다.
그것은 삭개오가 참으로 목말라 있음을 가리킨다.
참으로 영혼의 기갈을 느끼는 삭개오의 모습,
생수를 갈구하는
삭개오의 초상화이다.
참으로 진리에 대해 기갈을 느끼게 되면,
체면이나 자존심, 주위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삭개오는
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보았다.
예수님은 나무 위에 있는 그에게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십일조를 내라, 주일을 지키라, 집을 팔아라,
재산을 바쳐라,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그냥 만나길 원하셨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찾고 계셨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이 시대의 삭개오를 찾고 계신다.
영혼이 참으로 갈급해 있는 삭개오,
만족 없는 삭개오,
심령이 허전한 삭개오를
주님은 찾고 계신다.
주님 주위에는 키가 크고, 똑똑하고, 잘난 사람도 있었지만,
주님의 시선은 거기 머물지 않았다.
사람들의 마음이 삭개오처럼 갈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의 시선은 여러분 곁을 많이 지나갔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우리 마음이 삭개오처럼 갈급하다면,
주님의 시선은 이런분들에게 머물게 될 것이다.
주님은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바라보셨고,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는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가 좀 뒤바뀌고 좀 잘못된 것 같다.
그렇다. 주님은 내려오라고 말씀하셨다.
내려 오너라. 너무 높다는 말이다.
삭개오는 내려왔다.
자기가 예수님보다 높아선 안 되겠기에
예수님이 자기를 올려다 보셔선 안 되겠기에 내려 왔다.
주님이 우리를 우러러보셔야 할 만큼
높은 위치에 계시는 분은 곤란하다.
주님께서 내려다보실 수 있는 상태,
우리 심령이 주님을 우러러볼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주님과 삭개오는 그 날 저녁에 같이 음식을 나누면서
하룻저녁을 보냈으리라고 생각된다.
행복한 저녁, 삭개오의 일생에 일찌기 없었던 놀라운 날,
평강의 왕과 만난 날이 삭개오에게 있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도
그런 날이 있어야 한다.
주님을 만난 그 날,
우리의 죄가 씻어졌던 그 날,
주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셨던 그 날,
주님이 우리를 감싸주신 행복한 그 날이
여러분에게도 있었는가 묻고 싶다.
이제 삭개오는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은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평안함으로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삭개오는 전부터 예수님을 사귀지도 않았고
모태 교인도 아니었으며
예수님을 믿으려고
애를 쓴 사람도 아니었다.
주님을 만나자마자
그 때부터 그의 마음과 삶이 변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이다.
믿음은 많은 연륜이 쌓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몇십 년씩 믿어온 사람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은 정작 예수님을 대적했다.
성경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은
어쩌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하루아침에 변해 버린 사람들이다.
눈 먼 소경이 눈을 뜨고,
어쩌다 예수님을 만나가지고 주님이 따라 오라 하시면 따라가고,
또 고기 잡으러 갔다가 하루아침에
예수님을 만나서 주님과 같이 가게 된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바꾸시면 하루아침에 우리는 달라지는 것이다.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
우리의 모든 죄를
어떻게 눈과 같이 깨끗하게 씻을 수 있을까?
죄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큰 복음은 없을 것이다.
창세기 40장에 있는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애굽왕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 두 사람이 죄를 지어서
요셉이 갇혀 있는 감옥에 들어왔다.
창세기 40장 1절을 보자.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 주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창세기 40장 1절에 두 사람 즉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나온다.
바로는 큰 왕이었기 때문에 병거를 맡은 자,
말을 맡은 자, 의복을 맡은 자,
술을 맡은 자, 떡을 맡은 자 등…
갖가지 책임을 맡은 장관들이 많았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 두 장관이 죄를 지고
요셉이 갇친 감옥에 들어왔다.
누가 죄를 더 많이 지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누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모르지만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왔다.
성경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두 사람이 똑같이 죄를 지었는 데,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한 사람은 멸망을 받는 이야기로 창세기 40장이 끝난다.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멸망을 받았는지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이다.
똑같이 죄를 지었는데 어째서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한 사람은 멸망을 받았는지 생각해볼 문제이다.
하늘 나라는
죄 있는 자가 가는 곳이 아니다.
똑같이 죄를 지었지만 구원을 받을 자가 있고,
멸망을 받을 자가 있다.
죄가 많아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며
죄가 적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똑같이 죄를 지은 강도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하나는 구원을 받고
하나는 멸망을 받았다.
하나님이 창세기 40장을
우리에게 기록해 주신 이유가 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
이 두 사람은 이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 것이다.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들은 멸망을 받는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기 위하여,
창세기 40장이 기록되었다.
여러분도 다 죄를 지었다.
그러면 여러분이 죄를 지었는데,
내가 구원을 받을는지
멸망을 받을는지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 앞에 가 봐야 아는가? 그렇지 않다.
지금 여러분의 믿음을 시험해 보아,
만일 여러분의 믿음이 술 맡은 관원장과 같다면
구원받을 것 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하여,
또 만일 여러분의 믿음이
떡 굽는 관원장과 같다면
멸망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기록하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
구원을 받기 위해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의 힘으로 구원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 당신 스스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사람을 제일 나중에 사람을 만드셨다.
만약, 하나님이 사람을 먼저 만들어 놓고
천지를 창조하셨다면,
사람이 간섭하고 싶어
못 견뎠을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넓은 지혜를 다 모른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의 좁은 생각, 자기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거스려 나갈 때가 참 많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려고 해도,
내 생각과 내 방법을 가지고
자꾸 하나님의 뜻을
불평하면서 막아버리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일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셨다.
사람이 창조되어 눈을 떠 보니까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하나님은 일이 끝나 쉬고 계셨다.
그때부터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안식이 있었다.
그 행복한 안식이 언제 깨어졌는지?
인간이 만족하지 못하고 좀더 잘 되어 보려고,
눈 좀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되어 보려고
덤벙대다가 선악과를 따먹자,
그때부터 안식이 깨어지고
그때부터 불행이 오고 고통이 왔다.
지금도 우리가 자꾸 덤벙대며
뭘 좀 해 보려고 해서 구원을 못 받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많은 은혜를 베풀고 축복을 하셨는데,
아무나 예수님 앞에 나와서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잘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대적하고 반대하고
원망하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
앞에서 말한 간음한 여자, 사마리아 여자,
삼십팔 년 된 병자, 문둥병자와 같은 사람들은
다 예수님 앞에
은혜를 받고 복을 받았다.
여러분이 무엇을 못해서
죄 사함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잘해서 못 받는 것이다.
여러분이 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하실 기회를 드리지 않고 내가 애쓰고 있어서 그렇다.
여러분 가운데 주님에게 힘이 겹도록 연보한 분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죄를 씻지 않고 연보한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교회를 위하여 금식하고 철야기도 한 사람들은 많은데,
죄를 씻음 받은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안타깝게 하는 일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말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0-15)
이사야서는 구약 어느 성경보다도
죄 사함에 관한 이야기를 명백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사야 44장 22절, 53장 등
여러 곳에서 죄를 씻는 이야기를 하는데,
죄를 씻기 전에 십일조 내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사 59:1-2)
구약에서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흠 있는 것이나 절뚝발이나 버짐 있는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안 받으신다.
그것은 죄 있는 자에게서
제물이나 예배를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먼저 죄를 씻으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우리 중에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껍데기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속에는 죄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이 정말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는가?
술 맡은 관원장의 믿음
창세기 40장 1절에는
두 사람이 다 죄를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마지막 부분에 가면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한 사람은 멸망을 받는다.
그렇다면 40장 1절과 그 마지막 절 사이에
술 맡은 관원장은 왜 구원을 받고
떡 굽는 관원장은 왜 멸망을 받았는지
그 해답이 나타나 있다. 40장 2절을 보면,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그들을
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의 갇힌 곳이라.
시위대장이
요셉으로
그들에게
수종하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수일이라.”
우리는 여기서 지금
술 맡은 관원장은
왜 구원을 받았는지
그 이유를 찾아내어야 한다.
그 다음에 또 떡 굽는 관원장이
멸망을 받는 까닭을 찾아내야 한다.
성경을 한 번 찾아보자.
술 맡은 관원장은 왜 구원을 받았는가?
술맡은 관원장이 죄를 괴로워 하고
슬퍼하며 눈물 흘렸다는 이야기가 없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술 맡은 관원장의 구원을 통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을 기록했다.
구원을 받으려면 열심으로 기도해야 하고,
전도해야 하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고, 해야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원하신다면
틀림없이 술 맡은 관원장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을 것이고,
그 기록이 들어가야 했을 것이다.
이치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술 맡은 관원장이
회개했다는 말씀이 전혀 없다.
술 맡은 관원장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며
애통해했다는 얘기는 성경에 한 마디도 없다.
그럼 회개할 필요가 없고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며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 이야기는 아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고,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문제는
그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멸망을 받은 떡 굽는 관원장과
구원을 받은 술 맡은 관원장의 차이는
꿈을 다르게 꾼 것 밖에는 차이가 없다.
요셉이 그날 아침에 가 보니까
술 맡은 관원장도 시무룩하고,
떡 굽는 관원장도 시무룩하였다.
“우리가 꿈을 꾸었는데
꿈을 도무지 해석할 수가 없다.” 는 것뿐이었다.
술 맡은 관원장은
“밤에 꿈을 꾸었지.
내가 임금님의 술을 맡고 있으니까,
임금님 앞에 술을 가지고 가야 하는데 보니까
내 잔이 비어 있더군.
빈 잔을 가지고 왕 앞에 나아갈 수가 없어서 두리번두리번 하는데,
마침 내 앞에 있는 포도나무에서 가지 셋이 나오더니,
싹이 나서 잎이 피고,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금방 익어 버렸어.”
술 맡은 관원장이 왕 앞에 나아가
드릴 술이 없어 고민하고 있다가
포도나무를 보았을 때
얼마나 기뻤겠는가?
“얼른 포도를 따서 터뜨려 이기고 짜서
그 즙을 가지고 왕 앞에 갖다 드렸지.”
요셉이 그 꿈을 듣더니
참 좋은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어리둥절해서 어째서 그렇느냐고 물었다.
“세 가지는 사흘을 가리키는데,
사흘 안에 당신은
틀림없이 복직해서 구원을 받아
왕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 꿈이 어째서 구원을 받는 꿈인지
그걸 또 찾아야한다.
포도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는 우리의 생명의 참 포도나무이다.
왕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술 맡은 관원장이
손에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왜 가져갈 것이 없겠는까마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만히 보니까
포도나무가 있는데 열매가 맺혀서 익었다.
그래서 그걸 짰더니 포도가 터져서
그 포도즙이 흘러나왔단 말이다.
그것은 생명의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그 몸을 찢기시고
피를 흘려주신 것을 말한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은,
“하나님! 나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데,
하나님 앞에 내놓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보혈만을 믿고 나아가오니,
이 보혈을 보시고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하는 우리 믿음의 고백이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외에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갈 만한 것이 있으면 안 된다.
십일조 한 것, 40일 금식기도 한 것,
남을 구제한 것, 그것으로 구원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을 의지하느냐.’
하는 것만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긴 하지만
거기에다 무얼 좀 섞는다.
예수님의 보혈에다 자기 잘한 것을 20% 섞기도 하고,
40% 섞기도 하고, 아주 훌륭하니까 60% 섞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리신 보혈에다
자기 잘한 것을 1% 섞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안 된다.
내 행위, 내가 잘한 것이 조금이라도 보태어지면 구원이 안 된다.
다만,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만을 의지하고 나아가야 한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이
바로 그것이다.
왕 앞에 나아가야 하는데, 잔은 비어 있고
어떻게 해야 할지 얼마나 걱정이 되겠는가?
그런 가운데 있을 때
포도나무를 봤으니 얼마나 반갑겠는가?
금방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 포도송이가 익었다.
그것을 따서
즙을 만들어 갔다.
우리 스스로 하늘나라에 가려고 하니
갈 자신이 없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서
죄를 씻은 것을 바라보고
얼른 기쁨으로 나가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이
술 맡은 관원장의 신앙이다.
그런 은혜를 입는 것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 은혜를 입지 못하는 이유는
산수도 못하면서 예수님의 보혈에다
자꾸 더하기를 하려고 하는 것 때문이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요셉이 해석했다.
“이건 정말 길몽입니다!
세 가지는 사흘을 의미하는데,
사흘 안에 틀림없이 석방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게 되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떡 굽는 관원장의 믿음
옆에 떡 굽는 관원장이
꿈을 듣고 있다가 빙그레 웃으며,
“나도 꿈을 꾸었는데 이 사람과 비슷한 꿈이오.
꿈에 보니까 내가 흰 떡 세 광주리를 이고 가는데
제일 위에는 갖가지 구운 식물들이 놓여 있었지.
그런데 공중에 새들이 그걸 쪼아 먹더구만….”
“이것은 좋은 꿈이 아니요!”
요셉은 이렇게 말한다.
“역시 세 광주리는 사흘을 의미하는데,
사흘 후에 바로가 당신의 목을 끊고 나무에 매다는데,
공중의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먹을 것입니다.”
흉칙한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그 흰 떡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우리가 성찬식을 할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성찬식을 한다.
생명의 떡 되신 예수님!
이 사람이 나아갈 때 떡만 가지고 가야 하는데,
떡 위에 자꾸 무엇을 올려 놓아서 문제이다.
공중의 새는 사단을 가리킨다.
성경에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 부분들이 많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어린 양이라고 말할 때가 있고,
성도를 양이라고 할 때가 있다.
공중의 새도 그렇다.
어떤 곳에서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나타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새는
길 가에 뿌린 씨를 새가 주워먹었을 때처럼
마귀를 의미한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떡 되신 주님만 의지해야 하는데
거기다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자꾸 보태니까,
하나님은 받으실 수 없어서 멸망을 당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이야기에서
그들이 왜 구원을 받고, 멸망을 받았는지 살펴보았다.
술 맡은 관원장은
“내가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만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내 모든 죄가 씻어진 것을 보시고
나를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마음을 가진 자를
나타내는 것이다.
떡 굽는 관원장은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지만,
그래도 내가 무엇무엇을 열심히 하여
더 보태려고 하는 자를 가리키고 있는다.
떡 굽는 관원장과 같은 신앙은 멸망을 받는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깨우쳐주 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열심으로 잘 믿는다는 사람들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모두 죄인들
-간음한 여자, 사마리아 여자, 문둥병자 이런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잘 한다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가 많다.
우리가 정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면
주님이 대신해 주신다.
우리의 죄를 우리가 해결할 수 없으면
주님이 해결해 주시지만,
내가 하려고 하는 동안에는
주님은 아무것도 하실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똥이 더러운 것이지만
화장실에 똥이 있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그 곳은 똥이 있는 곳이니까.
그러나 똥이 밥상 위에 올라오면 문제가 된다.
죄악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
죄인들이 있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하늘 나라에 갈 때에는
죄를 가지고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늘 나라 가기 전에
이 세상에서 죄를 씻어야 한다.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연보하고
주님을 위하여 희생하기 전에
먼저 죄를
씻음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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