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45
10월16일[연중 제28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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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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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4Q4Xpm4j28?si=uHPYYOyLwi-epcOB
[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민용 도미니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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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공생활 기간 동안 드러난 예수님의 언행은 그야말로 세상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잃고 망연자실 슬퍼하는 과부의 모습에 예수님의 손은 저절로 들썩이는 과부의 어깨를 어루만집니다. 아들의 관을 쓰다듬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 “울지 마라. 내가 살려주겠다.”
어리디어린 나이에 절명한 회당장 딸의 처지가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외치십니다. “탈리타 쿰!”
오랜 나병으로 온몸이 종기투성이인 나병 환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하루하루 연명하다가,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뿐인 나병 환자를 마주한 예수님 눈에서 자동으로 연민의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상처와 진물이 흐르는 그의 환부에 손을 대시며 속삭이십니다. “깨끗하게 되어라!”
가난하고 고통받은 백성을 향해서는 더없이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셨지만, 반대로 상대가 위선적으로 이중적일 때, 완고하고 사악할 때,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 예수님의 태도는 돌변하십니다.
던지시는 말씀이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습니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날이 서 있습니다. 강력한 경고 말씀이요, 강력한 철퇴 같은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매료된 군중의 수효는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구름 군중이 몰려온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그 모습에 기분이 우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몰려온 군중에게 감사의 표현을 먼저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까지 오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많이 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먼길 마다하지 않은 여러분을 아버지 하느님께서 기꺼이 여기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웬걸, 말씀이 날카로운 가시 같습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다.”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 말씀 이면에는 당신을 향한 믿음이나 신앙 고백은 조금도 없이 그저 당신이 행하시는 기적과 치유 활동에만 연연해하는 군중의 불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저 기적의 도구로 전락시킨 군중의 초보 신앙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이스라엘 군중과도 같은 호기심의 대상, 사주 관상을 잘 보는 무속인으로 전락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될 때 우리 역시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 말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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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8qMX50w9QQ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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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바라볼 자격: 역행자 되기>
오늘 복음은 믿기 위해 표징만을 요구하는 악한 세대에 대한 질타가 이어집니다. 지금 우리에게 표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성사’입니다. 성사는 인간을 믿게 하기 위한 하느님의 피 흘리심입니다. 그런데 이 표징을 이해하게 만드는 힘은 ‘말씀’에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성체 성사 전에 말씀의 전례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죽으면 성사를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자꾸 표징만을 요구한다면 이는 악한 세대일 수밖에 없습니다.
개신교는 세례 성사만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성사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에만 집중합니다. 코로나 이전에 개신교는 주일 예배 참석률이 80%가 넘었습니다. 천주교는 주일 미사 참례율이 20%에 불과했습니다. 지금은 더 낮아졌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저는 개신교가 천주교보다 믿기 쉬운 이유는 성사보다 말씀에 집중하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합니다. 물론 더 큰 이유는 시스템의 차이에 있습니다. 개신교는 소외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누가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단체에 들지 않았다면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소속감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이 시스템적인 문제가 가장 큽니다.
그다음이 말씀보다 성사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남방 여왕의 예를 드십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남방 여왕은 에티오피아 여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먼 곳에서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 지혜를 배우러 예루살렘까지 올라온 것입니다. 만약 지혜를 배우려는 노력이 부족하면 ‘회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회개한 사람만이 눈이 열려 성사에서 표징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회개도 하지 않으면서 표징만 찾는 이들은 악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또 이런 예도 말씀하십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말씀 설교를 통해 얻는 지혜는 회개에 이르게 합니다. 회개 먼저 하고 성사로 나아와야 합니다. 말씀이 죽으면 성체도 죽습니다. 그래서 성체를 왜 영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미사 때 사실 성사보다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사가 보이고 냉담하거나 신자들이 성체 성사가 없는 타 종교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혜를 얻어 회개했다는 증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바로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미워하여 십자가에 못 박고 싶지 않으면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좋은 책이나 영화, 연설 등은 다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022년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있다면 자청(일명 ‘자수성가한 청년’)의 『역행자』입니다. 젊은 청년 자청은 엄청난 인플루언서입니다. 그가 유튜브에 책 소개만 하면 알 팔리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절판 된 책이 다시 서점에 꽂힙니다. 학교에서는 맨날 꼴찌만 하고 게임만 즐기며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청년이 어떻게 10년 월 몇 억씩 벌어 들이는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을까요?
사람을 알기 위해 책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체험을 이 책에 7단계로 썼습니다. 이 책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1단계: 자의식 해체 – 내 안에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동물적 생존본능인 자의식을 믿지 않게 됨; 이는 우리로서 ‘회개’에 해당하고 이를 위해 이미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책을 읽는 과정이 필수적임.
2단계: 정체성 만들기 –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음; 이는 ‘세례’와 같음.
3단계: 유전자 오작동 극복 – 정체성을 방해하는 자아의 방해와 싸워야 함; 이는 ‘견진’과 같음.
4단계: 뇌 자동화 –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견진 과정의 연속으로 예를 들면 “2년간 2시간씩 읽고 글쓰기 하라” 등의 규칙을 세움; 이는 영혼의 성 2궁방에 해당하듯,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정하는 것과 같음.
5단계: 역행자의 지식 –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 위해 주는 사람이 되라는 것. 이를 위해 타이탄의 도구들을 모으라 조언함; 이는 견진에서 자기를 이기는 과정을 위해 ‘묵상기도’를 하라는 것과 같음.
6단계: 경제적 자유를 얻는 구체적 루트 – 자기와 싸워 고생하는 이유는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함. 의미 없는 싸움은 의미 없음; 자기와의 싸움이 결국 이웃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가르침과 같음.
7단계: 역행자의 쳇바퀴 – 자기를 극복하고 실력을 키워 이웃에게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한다는 것; 우리로서는 ‘회개-세례-견진-성체’의 과정을 계속 되풀이해야 한다는 것과 같음.
세상이 말하는 대부분의 지혜가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결국 이웃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기 위해 성사를 알아볼 수 있는 표징을 얻으려면 자의식, 곧 자아를 해체해야만 하는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를 미워할 줄 알게 되었다면 이미 회개를 한 것이고 그만이 표징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픈 한 발’이란 삽화가 있습니다. 엄마 늑대가 수십 발의 화살을 맞고 피를 흘리며 한 발을 맞고 쓰러져 있는 새끼 늑대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그림입니다. 만약 새끼 늑대가 자기 아픈 것 만을 생각한다면 자기를 보호해주기 위해 맞은 엄마의 수십 발의 화살의 아픔은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나를 위해 흘린 피의 의미, 곧 표징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 표징을 알아볼 수 없다면 나도 엄마와 같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자기를 미워하고 잊고 버리는 것으로부터 표징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얻습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표징만 요구하니 악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체를 이해하기 위해 말씀이 지혜로 충만해져야 성체에서 떠나지 않는 신자들이 더 많이 탄생하게 되고 그러면 냉담하는 신자가 줄어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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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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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29-32: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유대인들은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참 메시아임을 입증할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한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표징을 보여주지 않으신다. 그것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고,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져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요나라는 표징밖에는 받지 못할 것이라 하신다. 요나의 표징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요나의 표징은 니네베 사람들에게 두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그들이 요나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요나처럼 산 채로 저승으로 갔겠지만, 요나의 예언을 믿고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처럼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날 수 있었다. 예수님도 사람들은 그분의 돌아가심을 통해 살거나 그분의 돌아가심을 통해 멸망하기도 한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31절) 남방 여왕은 교회의 모습이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에게 왔듯이, 교회도 주님께 왔고, 남방 여왕이 이 세대를 단죄하듯 교회도 그럴 것이다. 지나가고 마는 지혜와 죽을 수밖에 없는 임금을 보고자 왔던 남방 여왕이 그 세대를 단죄한다면, 지혜 자체이신 임금을 사모하는 교회는 어떻겠는가?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지혜, 요나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표징을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베푸셨는데도, 다른 어느 세대, 어느 백성에게도 베풀지 않은 특전을 베풀었는데도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자기 고집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지 20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지혜와 삶을 통해서 체험하고 소화해 전해준 신앙과 교회의 가르침, 성경 등 우리는 하고자 하면 더더욱 하느님을 가까이 모시고 더욱 의욕적인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 큰 특전이 내린 때다. 잘 안된다면 우리도 성경 말씀대로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나태하기 쉬운 우리 자신을 채찍질해야 할 것이다.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현세적인 이익만을 위해 기적을 요구하듯이 우리 자신이 하느님을 부르면서도 세상의 이익만을 찾음으로써 하느님의 뜻과는 먼 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경계하고 깨어있어야 하겠다. 가장 큰 기적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다. 내가 변화되지 않으면 아무리 큰 기적도 나의 눈에는 기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눈이 변화될 때 참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생명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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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표징>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29-32)
여기서 ‘악한 세대’ 라는 말은, 믿으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표징 같은 것이나 요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오늘날의 안 믿는 사람들도 가리키는 말입니다. 믿고 싶어서 표징을 요청하는 것과 믿기 싫어서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구약성경에 있는 판관 기드온의 이야기는 믿고 싶어서 표징을 요청한 일의 좋은 예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겠다. 그리하여 너는 마치 한 사람을 치듯 미디안 족을 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기드온이 또 말하였다. ‘참으로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신다면, 저와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이 당신이시라는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판관 6,16-17)
주님께서는 기드온이 청한 대로 그에게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판관 6,20-2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5-18)
마르코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
기드온의 경우는, “표징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확신을 심어 주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마르코복음서가 전하는 제자들의 경우는, “표징이란 믿는 사람들의 믿음과 일을 확증해 주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에 있는 ‘카나의 혼인 잔치’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여기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라는 말은, 안 믿고 있던 제자들이 기적을 본 다음에 비로소 믿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기적(표징)을 보게 되면 믿음이 더욱 강해집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 저자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알고 있었던 일꾼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믿게 되는 경우가 있긴 한데,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기적을 보아도 믿지 않고 그 기적이 표징이라는 것을 부정합니다. 예수님께서 ‘악한 세대’ 라고 꾸짖으신 사람들은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고, 표징을 보여 주어도 그것이 표징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것은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믿기 싫어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가짜 메시아로 생각한 자들이고, 가짜 메시아이기 때문에 표징을 보여 줄 수 없다고 생각해서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당신이 진짜 메시아라면, 표징을 통해서 그것을 증명해 보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유대인들은 바로 그렇게 요구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마르 15,31-32)
만일에 예수님께서 그들이 요구한 대로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을 또다시 죽이려고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믿으려고 하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보여 줄 표징은 없다.”라는 말씀이고, 동시에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표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도, 믿는 사람들과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만 표징이 될 뿐입니다. 부활 자체를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표징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남방 여왕과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이 세대 사람들은 유죄”라고 증언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 요나보다 더 큰 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솔로몬이나 요나 같은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위대하신 분’, 즉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분’으로서(요한 14,6), 당신이 직접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예수님의 복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고, 요나는 멸망을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구원의 길로 인도한 예언자였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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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는 기적을 보고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한 군중에게(11,16 참조) 응답하십니다.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냈다면서 당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지적하시고(11,17-23 참조), 예수님 자신과 그의 어머니를 칭송한 여인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11,27-28 참조)
군중이 표징을 요구한 이유는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표징을 요구한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답변은 명료하였습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요나의 표징’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요나가 하느님께 구원되어 요나 자신이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었듯이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 구원되어 이 세대의 표징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로는, 요나가 니네베로 가서 회개를 선포한 예언자였듯이 예수님의 회개 선포는 이 세대의 유일한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구원을 받았지만(요나 1―2장 참조), 이 세대가 예수님의 설교를 듣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니네베 사람들과 대조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분을 비판하거나 그 밖의 다른 것을 기대하는 이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의 임금인 솔로몬이나 예언자인 요나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보아야 하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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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표징 이야기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루카 11,29)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일갈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더 확실하고 더 많은 표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으려 하기보다, 표징을 일으켜 자기들이 믿게 해 보라고 예수님을 재촉하지요.
하지만 감각적인 표징에 집착하는 이들은 대개 사람이나 사건 안에서 의미를 캐내는데 게으릅니다. 표징은 저 심저에 있는데 말이지요.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30)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보내진 표징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표징이지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은 굳이 예언자를 보내실 것도 없이 그냥 죄악이 만연한 도시 니네베를 단번에 싹 쓸어버리시면 그만이었을 겁니다.
요나가 니네베의 타락과 하느님의 진노에 대해 전하자 니네베 사람들이 곧 회개했고 하느님도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요나는 아무리 죄인이라도 끝까지 기회를 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 죄인이 돌아서면 당신도 당장 돌아설 준비가 되어 있는 하느님 자비의 표징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30) 하느님은 인류와 화해하시기 위해 당신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성자께서는 기꺼이 순명하시고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로 오셨고 제단 위에 당신을 스스로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 하느님을 떠올립니다. 예수님이 곧 하느님의 완전한 모상이시고 하느님 자비의 표징이시니까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제1독서는 우리가 받은 부르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에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로마 1,6)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가 로마의 모든 신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는 자체가 참 위험한 시대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사랑하기에 죽기까지 따를 결단을 내린 이들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지요.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분과 동반했던 사도들에게서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길에 들어선 이들에게로 확장됩니다.
이들은 각자 또는 공동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삶의 길에 숨겨진 표징들을 따라가면서 영적 여정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그들 자신이 사도가 됩니다.
"이는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로마 1,5)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이들은 자기가 있는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표징이 됩니다. 그의 존재가 곧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표징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사도들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토록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표징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과 말과 사건에서 그 안에 심겨진 표징을 알아보고, 지금 여기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향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바로 그 표징들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따라가다보면 언젠가 표징이 가리키는 분, 주님을 만나게 되지요. 아무리 세상이 각박하고 이기적으로 돌아간다 해도, 주님의 자비와 사랑의 표징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하고 사람들 안에는 여전히 선한 힘이 흐르지요. 게다가 더 멋진 사실은 우리 자신이 바로 선하고 자애로우신 주님의 표징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바로 주님 사랑의 표징입니다!
각자 자신의 역사에서, 지금 머무르는 삶의 자리에서 주님 사랑의 표징을 찾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 사랑의 표징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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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왜관수도원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악한 세대로 규정하시면서, 그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 예언자는 고대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니네베로 가라는 소명을 받았으나, 순명하지 않고 도망을 가다가, 바다에 던져져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 낮과 밤을 지냈고, 결국 니네베로 가서 하느님 명령대로 회개를 선포하였던 예언자입니다.
요나 예언자는 생명을 되찾은 사람으로서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위한 표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께서도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그 세대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십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뿐만이 아니라 예수님 인격 자체가 사람들에게 표징이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요나 예언자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보낸 것을 예수님께서 저승에 가셔서 사흘 동안 머무신 것을 미리 보여 준 예표로 여겼습니다.
이 표징 이야기의 핵심에는 회개가 있습니다. 남방의 여왕이나 니네베 시민들은 다 같이 이방인들이었지만, 그들은 현자였던 솔로몬의 지혜와 요나 예언자의 선포를 경청하였습니다.
반면에 예수님 당시의 유다인들은 그들보다 더 탁월한 현자요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지혜와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상대로 엄한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메시지는 예수님 당시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주님의 요구이며 요청입니다. 회개하여 은총을 받는 것이 아니라, 회개는 그 자체로 이미 은총입니다. 회개를 통해서만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과 화해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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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지난주 금요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을 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이야기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루카 복음 11장 15절-16절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표징을 요구하는 이 세대가 악하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을 앞의 내용과 연결해서 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안에서 표징을 읽어 내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표징은 무엇일까요? 표징은 단순히 기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표징은 하느님의 약속을 보증해 주는 사건입니다.
유다인들이 표징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안에서 하느님 구원 약속의 성취를 읽지 못하였고, 예수님께서 그들이 간절히 기다렸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그저 일종의 구마 행위로 바라보았음을 알려 줍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예언서 3장 4절)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이 한마디만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고 그저 요나 예언자의 이 한마디면 충분하였습니다.
요나 예언자가 선포한 뒤에,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는 큰 성읍 니네베의 모든 사람이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고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단 한마디의 선포로 회개합니다.
이방 민족인 니네베 사람들도 요나의 한마디를 통하여 회개하는데, 자칭 하느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유다인들은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고 들었음에도 그것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을 직접 모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오고, 말씀 자체이신 분께서 우리에게 빵이 되어 오십니다.
이 만남 안에서 우리 또한 유다인들처럼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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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을 열고 말씀을 새겨야 한다>
저는 학생 때 자취생활도 오래 했고 신부가 되어서도 특수 사목에 종사하느라 밥은 물론 빨래도 혼자 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빨래 걱정, 밥 걱정하지 않습니다. 뜻한 바가 있어서 세탁기도 사용하지 않고 손빨래했고 짤순이를 이용했습니다. 빨래하고 다림질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양말 한 짝도 빨지 않습니다. 그런데 음식 준비를 하고 세탁하던 시간만큼 시간이 남아야 할 텐데 그렇지를 않습니다. 더러움을 씻겨내면서 내 마음의 더러움도 깨끗이 정화되기를 희망했고, 다림질하면서 내 마음이 반듯해지기를 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식사 도우미께서 다 해 주니까 그런 생각을 할 기회도 많이 놓쳤습니다.
분명한 것은 다른 이가 나를 정화 시켜 주지는 못합니다. 겉은 깨끗하게 해 줄 수 있을지언정 속을 거룩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옷이 더러워지는 것보다도 내 마음이 더 빨리 더러워지는데도 세탁하는 것에는 민감하면서도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에는 소홀합니다. 구두를 반짝반짝 윤이 나게 하면서도 내 마음을 빛나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간직합니다. 외적인 매무새에 매달리지 말고 마음을 가꾸고 다스리는 일에 다시금 정성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군중을 보시고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30)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음의 쇄신을 갖지 않은 이상 어떤 것을 보여줘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려는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표징을 알아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징이 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단죄의 표징이 됩니다.
요나 예언자가 회개의 삶을 가르쳤을 때 삶을 바꾼 사람은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살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거부하는 사람은 생명을 누리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체가 벌이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말씀을 마음에 고이 간직하여 실행하는 데서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일상을 하느님의 손길이 주어지는 자리로 인정할 때 매 순간 접하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마음의 변화 없이는 주님의 손길이 매 순간 주어져도 결코 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주어진 모두를 주님께서 주신 일이라고 받아들여 보십시오. 어떤 일을 하든지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쁘게 하면 주님께서 나를 도구 삼아 일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감사하십시오. 내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녀 줄리아르는 말합니다. “정력적으로 온 힘을 다해서 일하되 법석을 피우지 마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가?” 하시며 성찰하게 합니다. 조용한 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표징의 자리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일상 안에서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갖는 만큼 삶이 바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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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세기에 가장 전설적인 연설가이자 작가인 짐 론(Jim Rohn)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 다섯 명의 평균 모습이 바로 당신이다.”
인간은 놀라울 정도로 환경에 빨리 적응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간직하면서 지금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들어간 뒤, 여러 친구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그렇게 기도 시간을 즐거워하지는 않았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신학교 생활하면서 어느 순간에 기도 시간이 즐거워졌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자주 보면서 저 역시 그런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환경에 빨리 적응하기에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다른 이에게 어떤 사람으로 옆에 있는지도 떠올려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주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신앙생활 자체를 멀리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다면 어떨까요? 자신도 신앙생활에서 멀리 떠날 확률이 커집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열심’을 주변 사람에게 보여 준다면 어떨까요? 저의 ‘열심’을 보고서 함께 신앙생활 하는 경우가 늘어납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향해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아무런 표징을 보여 주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기적을 통해 하느님의 표징을 보여 주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표징을 요구하지요. 시선을 사로잡는 표징만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을 이야기하시지요.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 예언자 말을 믿고서 모두 회개했던 것처럼, 믿음을 갖고 회개하는 것이 가장 큰 표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인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회개했던 것은 굳게 믿고 회개의 모범을 보여 준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이 모여 모두가 하느님 뜻에 맞게 믿고 회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직접 말씀을 듣고, 놀라운 표징도 직접 보았던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 불신앙 역시 주변 사람에게 전달되어서 모두가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내 곁에는 어떤 사람이 있나요? 또 나는 내 주변 사람에게 어떤 사람으로 서 있습니까? 과연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믿음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의 은총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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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다 주셨는데 더 내어놓으라는 악>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세대가 악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세대만 악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그 세대가 악하다면 우리 세대도 분명 악할 겁니다.
그런데 악하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이웃에게 악한 짓을 하는 것입니까?
그런 면에서도 악한 것 분명하지만 오늘 주님 말씀의 맥락은 다릅니다.
하늘을 향해 악한 것입니다. 하늘의 표징은 보지 못하고 하늘에게 표징을 요구하는 악입니다.
비유하자면 형제에 대한 패악질보다 더한 부모에 대한 패악질입니다. 낳아 주신 부모에게 당신 누군지 모른다고 하는 패악질이요, 키워주신 부모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냐고 하는 패악질이요, 다 주었는데 더 내놓으라고 하는 패악질이고, 다 보여주었는데 더 보여달라고 하는 패악질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하는 패악질도 이것을 똑 닮았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보여주실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실 것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더 보여주실 것이 이젠 더 없는데 뭘 더 보여주시겠습니까?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하실 것이고, 굳이 보여주신다면 회개의 기적을 당신이 보여주실 겁니다. 요나가 고래뱃속에서 삼 주야를 있었던 것처럼 당신도 죽었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회개의 기적을.
아무튼, 다 주셨는데 더 내놓으라고 패악질하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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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 방향, 예수님 중심의 삶>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주님을 찬미하라 좋으신 하느님을, 그 이름 노래하라 꽃다우신 이름을."(시편135,3)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시편34,11).
주님을 찬미하는 사람이요 사람의 참된 부는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가을은 기도의 계절이자 수확의 계절입니다. 제 성소는 '간절함'입니다. 오늘 역시 기상하여 집무실에 들어오자 마자, 간절한 마음, 평화를 비는 마음으로 ‘가톨릭 기도서’ 순서대로 성호경, 주모경(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후 만세육창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여러분은 여섯 번째는 “우리 가정 만세!”로 하면 좋겠습니다. 어제 주일 미사시 퇴장성가 61장의 여운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
이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도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 크옵신 사랑이여
세상 즐거움 다버리고
세상 명예 다버렸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
세상 어떤 것과도”
작금의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삶의 중심을 잃어버린 세상 현실에서 예수님 방향, 예수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는 성가입니다. 참으로 제자리에서 제대로 제정신으로 제역할을 다함은 얼마나 중요한지요! 말그대로 믿는 이들의 삶은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겸손하고 온유한 참나의 실현입니다. 그러니 예닮의 여정은 성화의 여정이자 믿는 이들 모두의 소명이기도 합니다.
주변에서 좋은 머리로 평생 참 열심히 살았는데 제대로의 방향을 잃고 잘못된 신념, 잘못된 이념, 잘못된 생각, 잘못된 역사관, 잘못된 인생관, 잘못된 가치관으로, 또 자기 중심대로 살아온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이런 것이 지나쳐 중독이 되어 확신이, 광신이 될 때는 답이 없습니다.
때로는 열심히들 살았는데 헛살았다는 생각도 들고 계속 내적으로 부패 변질되다 보니 불치의 괴물들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결국 이렇게 살다가 끝내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인생 허무하게 끝내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회개를 통해 겸손한 참나를 찾아 제길을 걸어 제대로 살아 가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요.
오늘부터 제1독서는 로마서의 시작입니다. 4주간 계속될 것입니다. 서기 57년 경에 쓰여졌으니 복음서보다도 훨씬 빠르며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예수님 방향, 예수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확고한지 믿는 이들의 모범이 됩니다. 예수님의 신원은 물론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오늘 독서의 끝부분은 당시의 로마 신자들만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에게 그대로 해당됩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로마의 모든 신자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새롭게 확인하는 진리입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내리는 은혜로운 미사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자 동시에 하느님의 사람, 교회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가가 우리의 최대 관심사요 과제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가 분명히 드러남으로 우리의 신원을 확고히 하는데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예나 이제나 악한 세대같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때로는 문명의 야만과 같은 참혹한 전쟁을 보면서 무지와 탐욕의 인간들에게 과연 진보가, 변화가 가능한지 회의할 때도 많습니다. 결국은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정말 영적혁명과 같은 참된 회개가 절박합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온 이방의 남방여왕의 열성을 본받으라는 것이며,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온 니네베 이방인들을 상기하여 분발하라는 것입니다. 남방 여왕과 니네베 사람들 모두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열려 있는 회개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복음의 결론같은 말씀이 우리의 예수님 방향, 예수님 중심의 삶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솔로몬보다 더 큰 현자가, 요나보다 더 큰 예언자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우리가 자나깨나 생각해야 할 평생화두요 평생공부가 되는 말씀입니다. 사실 오늘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자체가 하늘 나라의 빛나는 표징이자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인데 새삼 무슨 표징이 필요하겠는지요. 이 주님의 거룩한 미사자체 역시 하늘 나라의 빛나는 표징이자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 인데 새삼 무슨 표징이 필요하겠는지요!
사실 눈만 열리면 주님의 표징들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저에겐 주렁주렁 둥글둥글 탐스렇게 익어가는 가을 배밭 배열매들이 주님의 기적이요 하늘 나라의 표징들입니다. 아주 예전에 가을 배밭, 익어가는 배열매들을 보며 써넣은 '원숙'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가을 열매들은 태양의 자식들
배, 사과 감, 호박...
태양을 닮아 둥글둥글 환하다
사람도 사랑으로 익어 열매되면
얼굴도, 마음도, 글도, 말도, 행동도, 하느님 닮아
둥글둥글 환하다"-1998.9.10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은 예닮의 여정이자 성화의 여정이요 회개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불림 받은 복된 존재들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닮아감으로 주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평생과제요, 평생공부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늘 고백해도 늘 새로운 예수님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평화,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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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11,29)
<회개!>
오늘 복음(루카11,29-32)은 '요나의 표징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나'가 하나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요나의 회개'가 하나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요나의 설교'가 하나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요나는 첫 번째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부르심에 순명하지 않고 타르시스로 도망갔습니다. 그 벌로 삼일 동안 큰 물고기의 뱃속에 갇히는 벌을 받게 되고, 그 속에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르심을 받고, 주님의 뜻에 순명하여 니네베로 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요나 예언자의 이 설교를 듣고 니네베 사람 모두가 회개합니다. 그 결과 니네베 사람들이 죽음에서 생명의 길로 나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표징은 바로 회개이며, 회개하지 않는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리고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것은 하느니의 나라이고, 하느님의 나라는, 회개한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 교만한 사람들, 하느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회개한 이들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타락한 니네베 사람들, 그래서 주님의 큰 분노를 가져온 니네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요나의 설교를 듣고 그들이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참 쉽지 않습니다. 나의 자손심이 회개를 가로막습니다. 나의 잘남이, 나의 똑똑함이, 나의 우쭐함이, 나의 교만이 우리 회개의 결정적 장애물입니다.
그 끝은 '죽음'입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이제와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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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tcR5eQeEoq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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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 32)
생명에
감사하는
가을 아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보다 더 큰
표징이란
있을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예수님보다
앞설 순 없다.
예수님께선
친히 회개의
모든 것이
되신다.
진실한 회개가
복음의
참기쁨이다.
복음을 믿고
복음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끝내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큰 이를
보게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내적인 변화로
이끄신다.
사람은 표징을
요구하고
주님은 참된
회개를
바라신다.
회개는
모든 이에게
적용된다.
회개와 표징을
이어주시는
예수님께서
여기에 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그 사랑이
회개이다.
우리의 일상을
되살아나게 하시는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참된 감사와
참된 회개로
우리의 일상을
곱게 물들이신다.
회개는
일상의
기쁜 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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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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