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말과 1900년초 한반도는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고종과 민비 그리고 흥선대원군까지 이전투구를 이어가고 있었고 이들이 불러들인 청나라 러시아 그리고 일본의 세력들은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면서 그들의 야욕을 채워가고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1890년부터 1900년도 초까지 한반도에 불어닥친 외세의 바람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고종은 고종대로 민비는 민비대로 흥선군은 흥선군대로 청러일의 세력을 잡고 자신만의 한반도 통치만을 회책한 결과 생긴 필연의 흑역사였을 지도 모릅니다. 우물안 개구리신세의 한반도 조선 권력자들은 청러일의 계략에 속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혼란속에 놓였습니다. 그러던 중 1884년 김옥균을 중심으로 급진 개화파가 청나라로부터 자주 행정을 목표로 일으킨 갑신정변이 있었고 1896년 일제의 힘을 빌린 개화파가 추진한 이른바 갑오경장도 있었습니다. 외세를 등에 업은 개혁이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을사늑약을 거쳐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한반도 역사속 가장 치욕적인 날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후 한반도는 36년동안 일제 식민지시대를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의 한국을 포함한 한반도 정세와 그 시절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그러다면 그 시절 한반도 즉 조선의 백성과 조금 교육을 받았다는 지식인들은 어떤 생각과 행동을 했고 그들의 생활은 어떠했을 것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일 합방 당시인 1910년대에는 독립신문이 있었습니다. 1896년에 창간한 독립신문은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입니다. 주 3회 300부 발행했습니다. 1904년 영국인 기자 베델선생 등이 만든 대한매일신보가 그 후임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신문들은 당시 경성 그러니까 서울지역 지식인들을 대상으로한 소식지였을 것입니다. 서울 종로일대에서 움직이던 조선의 지식인들이 이런 저런 신문과 해외유학생들이 가져온 정보 등을 통해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소식을 나누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당시 조선의 유력 집안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일본이나 영국 프랑스 미국 등에 자녀들을 유학시키려 했습니다. 일단 일제 강점기가 어느 정도 갈 것인가를 가늠하기 힘들고 당시의 막강했던 일제의 광기를 감안하면 족히 수백년은 간다고 스스로 판단해볼 때 자식들에게 선진문물을 배우게 하고 그 끈으로 이 한반도에서 세력을 영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일본 등에 유학간 당시 지식인층은 현지 일본에서 새로운 문물을 접합니다. 서방의 정치 사회 예술과 문화 그리고 강력한 제국시스템을 갖춘 일본과 영국과 유럽지역의 파워를 듣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강성해지는 일제의 광기를 파악한 뒤 방학때 등 조선에 올 때 마다 지인들에게 전파했을 것입니다. 일본의 힘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더욱 강성해질 것이다 그러니 일본말 열심히 배우고 창씨개명 그런 것에 불만가지지 말고 따를 것을 훈계했을 것입니다. 각 가정에서도 일본에 유학한 이웃집 도련님이 전한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한반도의 독립은 요원할 것이라는 판단까지 내립니다. 일시적인 지배였으면 대충했을 조선인 순사들도 열과 성을 다해 조선인들을 억압하고 탄압했습니다. 몇년안에 끝난다면 대충하려 했지만 식민지가 고착화된다니 더욱 강하게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리라 다짐했을 것이 아닙니까.
일제 점령 중반기부터 서울 종로통과 명동통에 만들어진 샤롱과 당시 근대식 술집들은 한국 식자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독립정신을 교환하는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자포자기심정으로 그냥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며 일제 찬양의 불길을 태우던 것이 당시 대부분 식자층의 태도였습니다. 극히 일부 저항적인 독립정신속 지식인들은 조선인 순사들의 압박에 짐을 싸고 상하이나 간도 연해주로 피신하는 것이 일반적인 행태였습니다. 그런 종로통 술집 등지에서 주먹으로 먹고 살았던 김두한 같은 조선 협객들이 유일한 조선내의 희망이었을 정도였습니다.
1930년대말 이후 한반도에서 독립적인 정신을 소지한 식자층들의 활동은 아마도 보기 힘들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물론 암암리에 종로경찰서 등을 습격하는 일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철저하고 악랄한 감시하에 몸을 숨기거나 이름을 감춘 채 은둔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진주만 습격사건을 일으키면서 한반도 지식인들의 성향은 상당히 친일로 돌아선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몇년만 더 참았으면 친일파라는 오명을 갖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지금 친일파라고 파악되는 홍난파 이광수 최남선 서정주 등도 거의 이때 태도 전향을 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한반도는 독립될 수 없다는 확고한 판단이 내려진 것에 따른 것입니다. 영원히 지속될 일제의 통치에 이제 두손 두발 들고 찬양이나 해서 밥줄을 유지하겠다는 의지가 한반도에 존재했던 지식인들의 거의 공통된 사고였을 것으로 파악됩니다. 조선안에서 발버둥쳐봐도 독립은 커녕 하루하루 호구지책도 안되는 답답한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을 겁니다. 친일세력들은 호의호식했지만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헐벗고 굶주린 처참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조선의 독립은 조선인 스스로가 이뤄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자포자기하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갖는 지식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물론 일제에 짓밟힌 더러운 당시 경성이 싫어 경기도나 충청 경상 전라지역으로 낙향한 식자층들도 상당합니다. 그들은 일본이나 서구에 유학할 경제적 여유가 없고 그런 행위가 부질없는 짓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경성에서 일본인들과 조선 친일파들의 요상한 짓거리를 보거나 듣게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 세력이 아닌가 보입니다. 밭을 갈고 논을 일구면서 한스런 식민지 처지를 한탄하고 또 한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세상 돌아가는 것은 알 수 있는 방법은 경성에 다녀온 이웃이 전하는 이야기와 오래된 신문에 의존해야 했기에 아예 나라안팎의 일에 관심을 끊고 살았던 상황이었습니다. 속이 숯처럼 타들어가는 속에서도 세월을 흐르고 죽지 못하고 하루하루 버티는 심정으로 그 험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어렵고 힘들게 담근 막걸리나 동동주 한 잔에 시름을 잊고 살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이 나라 국민들의 대부분이 그런 세월을 사셨던 조상의 후손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지속에서도 세계의 뉴스를 다 듣고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괜찮지만 피곤하고 말도 안되는 소식은 그야말로 진저리가 칠 정도입니다. 요즘 오지의 마을에서 요즘 유튜브도 가능하다니 오염은 참 많이 됐습니다. 가짜뉴스가 범람하고 근거도 없는 국뽕 아이템도 부지기수입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던 그 시절이 웬지 오늘 궁금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 시절이 그 백년전보다 그다지 낫다고 판단할 수 없는 시절이기에 그렇습니다.
2025년 2월 8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