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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두 번째 장편 소설 《생은 다른 곳
에》(까치, 1988, 안정효 역)는 그가 1970년 체
코 공산당에서 추방당하기 전에 쓴 두 편의 소설
중 하나다. '생은 다른 곳에'(La vie est ailleur
s)란 말은 랭보가 했던 말로 전해지는데,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을 거쳐 1968년 5
월, 혁명의 중심 파리에 도착한다. 쿤데라는 이
말을 빌려 혁명과 젊음에 대해 쓰고자 한다. 그
현현이라고 할 수 있는 시인의 삶을 통해 말이다.
시인의 탄생과 성장
시인 야로밀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시인의
아버지는 야로밀을 갖게 된 걸 한 순간의 사고로
치부해버리고, 무책임하게 떠나버린다. 거의 등
장과 함께 사라진 아버지의 목소리는 소설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시인의 어머니는 남편에
게 받지 못한 사랑까지 더해 어린 야로밀에게 쏟
아부으며 함께 살아간다. 한편 어린 야로밀은 예
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다. 시인의 어머니는 어
느 날 야로밀이 그린 그림 <개머리 달린 사람>을
보고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우연히 만난 한 화가
에게 그 그림을 보여주는데, 화가는 야로밀의 재
능을 알아채고 그의 스승이 된다. 이제 야로밀은
화가 밑에서 예술을 배워가기 시작한다.
야로밀을 시인으로 발돋움시킨 건, 그의 삶에 찾
아온 여성들이다. 야로밀은 어린 시절 하녀 마그
다에게 처음으로 성적 호기심을 갖게 되는 데, 마
그다를 위해 시를 지으며 처음으로 시적 경험을
한다. 그 후 자라면서 욕정과 '남자다움'에 대해
탐구해간다. 대학생이 되어 찾아간 정치모임에서
한 여학생을 만나지만 여러 차례 시도에도 불구
하고 실패하고, 우연히 만난 (소설에서는 못생겼
다고 표현되는) 붉은 머리 점원을 만나면서 비로
소 '남자다움'을 느끼며 시를 쓴다. 자기 손아귀
에서 벗어나려는 야로밀에게 어머니는 질투를 느
끼지만, 그럴수록 야로밀은 더욱 멀어질 뿐이다.
청년 야로밀은 내면에서 솟아나는 시를 널리 알
리고 싶었지만 그 시가 실릴 곳은 별로 없었다.
그러던 중 체코에 공산주의 혁명의 바람이 불고,
야로밀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인으로 거듭난다.
바야흐로 "처형자와 시인이 나란히 앉아 통치한"
시대에 그 시인이 된 것이다. 야로밀이 처음부터
그 길을 걷고자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화가와
함께 예술은 그 자체로서 추구되어야 한다는 반
대편에 서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스승이 그 친
구들과 순수예술과 참여예술을 두고 논쟁을 벌일
때, 야로밀은 순전히 반항하고자 하는 마음에 반
기를 든다.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 존재감
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여하튼 이제 야로
밀은 혁명의 기수가 되어 잘 나가는 시인이 된다.
그는 드디어 참된 생('참된 생'이라고 야로밀이
이해했던 것은 행진하는 군중과, 육체적인 사랑
과, 혁명의 구호가 소용돌이치는 세계였다)의 영
역에 이르렀고,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이
새로운 삶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고 그 삶의 바이올린 현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시적인 정신이 마음속에 가득하다고 느꼈으
며, 붉은 머리의 아가씨가 좋아할 만한 시를 쓰려
고 노력했다.
그러나 생은 다른 곳에
바라던 시인이 되어 야로밀은 행복했을까? 성공
한 체제의 시인이 된 야로밀은 우연히 어린 시절
친구, '관리인의 아들'을 만난다. 친구는 안정적
인 직장에 들어가 가정까지 꾸려 살고 있는 평범
한 직장인이었는데, 시인이 된 야로밀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친구는 야로밀의 시를 액자에 넣어
사무실에 걸어놓을 정도로 야로밀을 우러러 보고
있었다. 허나 그런 친구를 보며 야로밀은 부러움
을 느낀다. '참된 생이 바로 저기에 있었구나' 느
끼며 말이다.
그는 야로밀의 존재를 끊임없이 능가하는 험악한
아름다움을 가진 친구의 '참된 생'이 부러웠다.
나이가 같은 친구와 얼굴을 마주 대하고 그는 또
다시 자신이 아직 참된 생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
음을 깨닫고 마음이 아팠다.
시인의 파멸
그런 야로밀을 파멸로 이끈 건, 나르시시즘의 환
영이었다. 혁명 정신에 도취된 야로밀은 오해에
서 비롯된 일로 여자친구인 붉은 머리의 오빠를
혁명의 적으로 당국에 고발하기에 이른다. 오빠
대신 붉은 머리가 구속되어도 야로밀은 자기 잘
못을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순수혁명의 이상
에 대한 시를 짓고, 최고의 시라고 평한다. 더 이
상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걸까. 말미에 이르
러 야로밀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불같은 혁
명의 시기, 야로밀은 불의 죽음을 꿈꿨지만 끝에
이르러 마주한 건 차가운 물의 죽음이었다.
자유를 꿈꾸는 젊음은 언제나 시대와 불화하기
마련이고, 그 젊음은 단지 나이의 문제는 아닐 것
이다. 혁명과 젊음의 현현인 야로밀의 삶은 그 자
유를 포기했을 때, 그러니까 참된 생이 다른 곳에
있을 거란 사실을 망각했을 때 이미 끝나버린 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시인이 자유를 억압하는
혁명가 옆에 서서 그 심판에 동조하며 찬양하는
순간에 말이다.
소설의 시작에서 끝까지 야로밀의 생애가 그려지
는데, 중간중간 난데없이 시점을 달리하는 대목
이 끼어 있다. 그건 때로는 야로밀의 또 다른 자
아이기도 하고, 레르몬토프나 랭보 같은 시인의
시점이기도 하다. 쿤데라는 서문에서 이 책의 창
작에 대해 "시의 비평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시
가 될 수 있는 소설"을 쓰고자 했다고 밝히는데,
그 기법의 일환으로 보아야 할까? 그 시도가 얼마
나 성공을 거두었을까 평할 재간은 없지만 한 가
지 확실한 건, 젊음을 꿈꾸는 한 이 책은 여전히
유효할 거란 사실이다.
*이 책은 1988년 안정효 작가가 영역본을 번역
한 책이다. 당시엔 우리나라에서 밀란 쿤데라가
별로 유명하지 않아서 안정효 작가가 출판사에
직접 의뢰해서 번역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쿤데
라 전집까지 나오니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생
은 다른 곳에》도 민음사에서 방미경 선생이 프
랑스어판을 번역해놓았다. 밀란 쿤데라는 체코어
로 발행한 작품까지 스스로 프랑스어로 번역한
뒤 프랑스어본만이 원본이라고 말한 바 있다. 프
랑스어판만 번역한 작품만 인정하고 그 외엔 엉
터리라고도 한 적이 있는데, 이걸 보고 어떻게 생
각할지 모르겠다. 이 책은 발간된 지 30년이 넘었
고, 그 후로도 개정된 바 없지만 안정효 작가의
문장력이 좋아서 낡은 느낌은 들지 않고 읽는 데
전혀 문제는 없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ace&logNo=60125720421&proxyReferer=
[밑줄치기]
o '봄을 사랑하는 남자' 뿐 아니라 '봄의 사랑을 받는 남자'라는 의미도 되는 야로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로 결정했다
o 지능과 완력은 기막힌 동반관계를 이룰 수 있다. 바이런은 나약한 주인에게 온갖 운동을 열심히 훈련시키던 권투선수 잭슨에게 따뜻한 애정을 느끼지 않았던가?
o 세계를 획기적으로 변형시키기 전에 있는 그대로 의 세계를 먼저 봐야만 하지
o 몰락으로부터의 도피는 위로 향하는 것밖에는 없다!
o 평범한 단어들은 의사 전달의 순간에만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에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그 존재가 사라질 따름이며, 사물에 종속된 어휘들이란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시라는 수단에 의해서 어휘들은 대상 그 자체로 변형되고 더 이상 무엇에도 종속이 되지 않는다. 시어들은 순간적으로 기호 노릇을 하고 금방 없어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 특성이 있다
o 그대는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과거는 끝났으며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오, 아니다. 과거는 여러 빛갈의 비단옷을 걸치고 있고, 우리들은 그것을 볼 때마다 다른 빛깔을 보게 된다
o 그는 그의 영혼을 여는 열쇠인 펜을 세상의 문을 여는 열쇠인 권총과 바꾸었다. 그 까닭은 만일 우리들이 다른 인간의 가슴에 총알을 하나 박는다면 그것은 우리들 자신이 그 가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다른 인간의 가슴- 그것은 세계이기 때문이다
o 목수는 다른 목수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을 위해서 의자를 만드니까요
o 문학은 연약하고 핏기가 없는 손을 그에게 내밀기를 주저했었지만, 생(生) 그 자체의 거칠고 단단한 손은 이제 그를 꽉 움켜잡았다
o 그러나 역사가 문을 두드리고 우리들의 이야기로 들어온다. 그것은 비밀경찰의 모습이나 갑작스러운 혁명의 모습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역사라고 해서 항상 극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더러운 구정물처럼 일상생활을 서서히 스며들기도 한다. 우리들의 이야기에서는 역사가 속옷의 형태를 취하고 등장한다
o 눈물이란 그에게는 인간조건으로부터의 해방과 초월을 가져다주는 마술적인 만병통치약을 의미해서, 눈물은 모든 신체적인 한계성들을 제거해서 무한성과의 결합을 창조했다
o 의무의 숭고함이란 깨져서 피투성이가 된 사랑의 머리에서 자라는 것이다
서정시는 어떤 진술도 당장 진리가 되는 그런
영역이다. 시인이 어제는 '인생은 눈물의 골짜
기'라고 하고, 오늘은 '인생은 미소의 땅'이라
고 하더라도, 두 경우 모두 그는 옳다. 서정시
인은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유일한 증
거는 시인 자신이 가진 감정의 강렬할 뿐이다.
서정시인의 천재성은 경험 부족의 천재성이
다. 〈p.243〉
그렇지만 모든 인간은 다른 삶들도 살아 볼 수
가 없기 때문에 후회한다. 그대 또한 그대가
실헌해보지 못한 모든 잠재성들을, 그대의 모
든 가능한 삶을 다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p.296>
그러나 기억하는 자는 반드시 증언을 해야 하
니, 그것은 공포의 시대일 뿐 아니라 처형자와
시인이 나란히 앉아 통치한 서정시의 시대이기
도 했다. <p.311〉
[지식인 서재 추천사 :은희경] 은희경의 서재는 먼나라의 공항이다
밀란 쿤데라는 제가 처음에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굉장히 중요한 가르침을 주었는데요. 소설을 쓴다고 했을 때 좀 막연했어요. 그런데 제가 이 책을 보고 ‘아, 이렇게 쓰면 되겠구나. 이런 경지까지는 안되더라도 이런 방식으로 쓰면 되겠구나’라는 저한테 맞는 어떤 걸 발견한 느낌이었어요. 사실 제가 처음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봤을 때는 너무 어려워서 들어오질 않아서 겨우 읽었어요. 그래서 별로 저한테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책을 보고서, 다시 봤을 때는 이 사람의 문법에 익숙해져서 쉽게 다가갈 수가 있었어요. 그런 점에서 이 <생은 다른 곳에>는 역시 이 책들하고 맥락을 같이 해서, 시니컬한 분석과 야유, 이 세상이 비뚤어진 것에 대한 더한 짙은 비틂, 이런 것이 저한테 ‘이런 방식을 배워보고 싶다, 나는 사람에 대해서 이런 방식으로 말해보고 싶다’ 그런 것을 배웠어요. 이 세 권의 책이 제 인생에 영향을 끼친 책이에요.[소설가 은희경의 서재 中]
[기사모음]
[세상사는 이야기] 쿤데라가 들려준 일화
기사입력 2009.03.20 15:08:16
프라하의 한 엔지니어가 런던에서 열린 학술토론회에 참석하고 프라하로 돌아갔다. 몇 시간이 지난 후 그는 당 기관지에서 런던 학술대회에 파견되었던 한 체코인 엔지니어가 서방 신문들을 상대로 당을 비방하는 성명을 발표하고는 서방 세계에 남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읽는다. 그 엔지니어는 바로 자기 이야기라는 걸 깨닫는다. 그의 비서가 사무실에 있는 그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엔지니어는 비서의 눈에서 공포를 본다. 그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그 기사를 실은 신문사 편집국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한다. 편집장은 진심으로 미안해 한다. 그러면서도 자기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 기사 내용이 내무부에서 직접 전달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엔지니어는 내무부를 찾아간다. 내무부 사람들 역시 착오로 인해 생긴 일이 분명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어떤 조치를 취하지 못한다. 런던 주재 대사관의 비밀 정보원에게서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조용히 살 수 있을 거라고 안심시킨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걸 곧 눈치챈다. 그는 불안 때문에 잠도 잘 수 없게 된다. 악몽에 시달리던 그는 불법적으로 조국을 떠나려는 시도를 하게 되고, 마침내 진짜 망명자가 된다.
프랑스에 살고 있는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가 들려준 일화다. 카프카적인 이야기라고 이름붙인 이 실화를 통해 쿤데라는 예언적 선고의 부정적 위력에 대해 경고하려고 한다. 명백히 사실이 아닌 그 기사가 예언적 능력을 발휘한다. 경험 혹은 사건이 말과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말과 이야기가 거꾸로 경험과 사건을 이끌어낸 사례이다. 쿤데라는 이 현상을 분석하면서 선고를 받은 사람이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드는 기계를 작동시키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이 사례와 대조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있다. 로버트 로젠탈이라는 학자가 미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했다는 실험이다. 그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지능검사를 한 후 검사 결과와 상관없이 반에서 20% 정도 학생을 무작위로 뽑았다. 그리고 교사에게 명단을 주면서 지적능력이 높은 학생들이라고 믿게 했다. 8개월 후 지능 검사를 다시 실시했는데, 그 학생들 평균 점수가 전보다 높게 나왔고 학교 성적도 크게 향상되었다고 한다. 명단에 오른 학생들에 대한 교사의 기대와 격려가 중요한 요인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피그말리온 효과라고도 말하는 이 현상에도 실은 쿤데라가 전해준 이야기 속의 원리와 동일한 것이 작동한다. 여기에서도 말이나 이야기가 사건과 경험을 이끌어내고 있다. 다만 예언적 선고가 부정적이지 않고 긍정적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인간이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사는 것이 인간이지만, 또한 환경을 개조하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다. 빈곤의 원인을 순응에서 찾은 경제학자도 있지 않은가. 물론 순응이 대중들이 빈곤한 원인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불평등한 구조나 공정하지 않은 정책 같은 것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늘 이랬으니까, 우리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이렇게 살았으니까, 이렇게 사는 게 내 팔자니까 하는 식으로 주어진 조건에 쉽게 굴복해 버린 정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식의 순응하는 말과 태도가 예언적 선언이 되어 삶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가 어렵다고 한다.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가진 위기설도 나돈다. 물론 현실을 회피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불안하고 위험하고 부정적인 말을 되풀이함으로써 오히려 더 불안하고 더 위험하고 더 부정적인 현실을 불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드는 기계를 작동시킬 필요는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과 열정의 말을 더 많이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전부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말이 예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승우 소설가ㆍ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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