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나투스 CONATUS
스스로 지식생태학자로 변신했다 하며, 공고에서 용접하던 기능공에서 파란만장한 경험의 삶으로 체험이 아닌 경험을 강조하는, 유영만 선생의 두 번째 책을 읽었다. 그는 30년간 100권의 책을 저술했다는데 내 눈에 띈 것은 그의 100번째의 책이다. 코나투스는 ‘노력하다’ 뜻의 라틴어 ‘conor’에서 유래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단순한 노력을 넘어, 존재를 유지하고 실존을 이어가려는 근본적 욕망이다. 코나투스는 자기 존재를 지속하려는 관성일 뿐만 아니라 자기 존재를 긍정하고 그것을 확장하려는 경향성이다. 모든 존재는 불안전하기에 부족하거나 결여된 부분을 보완하거나 채워서 보다 완전한 존재로 거듭나려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코나투스는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는 마주침을 강화하려고 하고,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는 마주침은 강화하려고 하고, 자기 보존에 위협적으로 작용하는 마주침에 대해서는 저항한다. 좌절을 부르는 SNS의 평균 올려치기는 “대학 안 가도 인생 안 망함. 돈 없는데 애 낳아도 인생 안 망함. 나이 많은데 뭔가 시작해도 인생 안 망함. 대신에, 인터넷에서 남들 사는 거랑 비교하면, 내 정신은 반드시 망함.” 윗글은 의외로 많은 사람이 모르는 삶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SNS에 유행했다. 글쓴이 말처럼 인생은 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비교다. 상류층의 삶이 우리 사회의 평균인 것처럼 현실을 왜곡하는 문화가 생겼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기만 평균에 못 미치는 삶을 산다는 생각은 좌절과 열등감으로 이어지고 심하게는 자기혐오나 우울감을 불러온다.
살아가는 이치를 이해하는 이상. 이용준은 이치/이론은 분자인 이치의 값이 크고 분모인 이론값이 작을수록 전체 값은 커진다. 사물의 적당한 조리 또는 도리에 맞는 취지가 이치다. 무지란 그냥 모르는 상태 아니라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으로 한결같이 노력해 온 결과다. 독서도 책을 읽지 않는 습관은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읽지 않으려는 노력의 결과다. 감탄은 머리에서 나오지만, 감동은 가슴에서 나온다. 논리적으로 편집된 작품은 감탄을 자아내지만, 경험을 담은 이야기는 가슴을 울린다. 일생 이론은 영원한 미완성이기에 외부적 비판을 감내해야 하는 운명이다. 과학적 사고를 만드는 일생 이론 구축의 네 단계가 있다. 첫 번째는 현실을 관찰해서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하는 단계이다. 두 번째는 기록된 자료를 일정한 체계나 구조로 조직화하여 정보로 만드는 단계다. 세 번째는 정립된 정보를 토대로 지식을 쌓는 단계다. 네 번째는 지식을 자기만의 지혜로 완성하는 단계다. 원칙은 규칙이지만 원리는 이치다. 법칙은 흩어진 자료를 체계적으로 관찰한 다음 궁리와 고찰을 통하여 일반화를 얻어낸 귀납적 결론이다. 일생 이론을 개론하는 사람은 남이 만든 규칙에 의존하지 않는다. 고속 정장은 가능하지만, 고속 성숙은 불가능하다. 겉절이는 고속으로 만들 수 있지만 묵은지는 절대로 고속으로 만들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지렁이를 잡아먹는 도요새; 관찰과 고찰, 통찰과 성찰의 관계. 도요새는 지렁이를 먹고 산다. 비가 오면 지렁이가 땅 위로 나온다. 빗방울이 땅을 두드리면 지렁이는 피부로 진동을 감지 비가 오는 줄 알고 땅 위로 나온다. 그러면 도요새가 포식하는 날이다. 비가 오지 않아도 도요새는 부리로 땅을 콕콕 찍고 돌아다닌다. 빗방울이 만들어 낸 진동이 아님을 알 수 없는 지렁이는 평소처럼 땅 위로 올라온다. 어떻게 도요새는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관찰이 고찰로 이어져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관찰이 부재한 사고는 공허하다. 전문가의 병폐나 역기능 약점의 문제점을 일정한 패턴으로 구분하면 첫 번째가 멍때리기 전문가다. 이들은 정해진 규율, 기존의 제도와 관행과 절차만 따를 뿐 상황대처 능력이 떨어진다.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내는 무사안일 전문가다. 두 번째는 자기 분야 외는 전혀 모르는 답답한 전문가가. 한 분야만 파다 매몰된 전문가다. 세 번째는 무늬만 전문가 즉 사이비 전문가다. 전문가에 따르면 이라는 말을 따라가다 보면 전문가 아닌 무늬만 전문가를 자주 만난다. 넷째는 능력은 있으나 인성이 부족한 안하무인형 전문가다. 따듯한 가슴이 없고 측은지심이 없다.
그릇된 경험도 반전시키는 성장 방정식, 괴테는 “내 곁에 있는 사람, 내가 자주 가는 곳, 내가 읽은 책들이 나를 말해준다.”라고 했다. 한 사람이 구축하는 일생 이론 역시 그 사람의 경험과 읽은 책과 인간관계의 합작품이다. 한 사람의 삶이 인간적이고 지적으로 마주침과 어우러질 때 깨우침이 찾아오고 이론이 개발된다. 야성은 야성에서 자란다. “남보다 잘하려고 하지 말고 전보다 잘하라”라는 말은 오늘의 나를 어제의 나와 얼마나 다른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지를 성찰해 보자는 취지다. 필자는 예로 오리와 토기와 참새가 동물학교에 입학했다. 수영 과목에서 토끼가 오리를 이기려고 괌으로 전지훈련을 갔다 와도, 오리처럼 잘할 수 없었다. 다음은 눈 오는 날 등산하기다. 오리는 스트레스를 받아 알래스카로 전지훈련을 갔다. 그러나 남은 것은 찢어진 물갈퀴와 동상에 걸린 발, 그리고 관절염과 디스크만 남았다. 달리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행복한 동화가 된다. 토끼는 수영할 필요가 없고, 오리는 산등성이를 올라갈 필요가 없으며 참새는 노래만 하면서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교육학적 논리를 가르치는 학자는 많지만, 교육 현장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실천적 안목과 혜안을 가진 학자는 많지 않다. 이유는 앎으로 삶을 평가하는 공부가 아닌 삶으로 앎을 만들어 가는 실천에서 찾을 수 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절대로 쓰지 마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잘할 수 없는 일에 매달려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이다. 그런 때는 빨리 포기하고 다른 일을 시도해야 한다.
가장 안전한 보험은 위험을 무릅쓴 경험이다. 위험하지 않으면 위대한 결실도 없다.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보유하고 있는 지식은 무수한 시행착오와 우여곡절 끝에 온몸으로 깨달은 체험적 지혜이다.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만 공부하는 사람이 쌓은 지식에는 그 사람 특유의 신념과 열정과 용기가 없다. 경험은 소중한 스승이지만 늘 좋은 역할만 하지는 않는다. 자기 경험을 과신하면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는 고리타분한 사람이 되기 쉽다. 과거의 경험은 우리를 안주하려고 유혹한다. 가능성을 열어두고 부단히 성찰하지 않으면 경험은 삶을 고양하는 통찰이 되지 못한다.
딴 세상을 보려면 딴 길로 가야 한다. 인사이트 insight는 안 in에서 다르게 보는 sight 능력이다. 세상을 보는 능력은 내 안에 축적된 체험적 깨달음과 지식, 그동안의 생각이 융복합되어 결정된다. 딴 세상은 別天地이고 딴 길은 別路이다. 딴 길을 가는 사람을 별 볼 일이 없다거나 별꼴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이 된 사람은 없다. 頂上에 오른 사람치고 正常인 사람 없듯이 위대한 업적이나 성취를 이룬 사람은 모두 평범한 길을 거부한 이들이다. ‘기고만장’한 법칙이 있다. 기고는 GIGO garbage in garbage를 의미한다. 즉 쓰레기를 입력하면 쓰레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평범한 재료를 입력하고 뛰어난 결과를 얻으려 한다. 그럴 수 없다. 아이디어는 두 가지 이상이 연결되어 생긴다. 무에서 유를 떠올리는 것이 발상이 아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조합하면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언어는 불완전하다. 어떤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다 담을 수 없다. 같은 말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언어와 현실 사이는 틈새가 존재한다. 작가들은 정확한 언어 사이에서 분투한다. 치열하게 언어를 벼리고 벼러서 날 선 언어로 만들고자 애쓴다. 사랑을 추상명사로만 이해하는 사람은 사람을 모른다. 사람은 관념이 아님을 타인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지극한 배려가 만드는 동사임을 필자는 사막을 뛰면서 알게 되었단다. 추상은 몸과 만나지 않으면 관념으로 전락한다. 몸을 관통한 개념만이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된다. 모래사장에 빠진 발을 앞으로 내디뎌야 뜨거워진 체온과 땀에 젖은 얼굴만이 그때의 체험을 설명할 수 있단다. 法은 한자로 풀이하면 물이 낮은 곳에 멈춘다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의 법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삶은 씨줄과 날줄로 직조된 텍스트다. 텍스트는 해답을 기다린다. 해석은 정답을 말해주기보다 해답을 찾아준다. 정답은 남이 제기한 문제에 남이 내놓은 한 가지 답이다. 정답은 해석 금지 대상이다. 해석할수록 정답은 정답이 아니라 오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공한 재일교포 사업가 손정의는 무일푼으로 시작했다. 시한부 만성감염 진단을 받고 필사적으로 책과 논문을 읽으며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다 변방의 대체 의학자를 만나 기사회생한다. 목숨을 걸면 길을 찾을 수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내 전부를 걸고 도전해 본 적이 있는가? 변방의 바닥은 좌절한 사람의 피난처가 아니다. 오히려 실패한 사람들이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는 터전이다. 바닥을 알아야 인생의 진수를 알 수 있고, 올라갈 수 있는 기반을 다질 수 있다. 올해의 발걸음이 내년의 밑거름으로 쓰이고 오늘의 평범한 보행이 내일의 비범한 행보로 역전되는 앓음다운 시간으로 충전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는 필자의 새해맞이 덕담을 인용하면서 마친다.
2024.08.11.
코나투스
유영만 지음
행성 B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