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화)
* 시작 기도
주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창세전부터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로 작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금이나 은 같은 썩어질 것이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을 씨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썩어 없어질 것들에 치심하지 않고 영원히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소망에 온 마음을 쏟기를 원합니다.
풀이나 풀의 꽃처럼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이 오직 산 소망이오니 나에게 주신 그 복음 곧 말씀을 꼭 붙들고 이 하루를 살게 하소서(벧전 1:20-25).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말씀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십자가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케 하시고 주만 바라보는 신부로 세워주소서.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영적 하루살이로 살기 원합니다.
나를 강하게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상 16:29-34
제목 :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29 유다의 아사 왕 제 38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2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32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33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34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 나의 묵상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북이스라엘의 왕위에 있을 때 시므리가 반역을 일으켜 엘라를 죽이고 7일 동안 왕이 되었다.
그 후에 오므리가 왕이 되어 12년을 다스렸다.
한편 유다 왕 아사 38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22년 동안 다스렸다.
그런데 아합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더 많이 행하였고 그 앞서 있던 선대 왕들보다 더 악하게 행동하였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가볍게 여겼다.
그런 그가 행한 악은 이방 여인 시돈 사람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함께 가서 바알을 섬기며 그를 예배하였다.
나아가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한 제단을 쌓았다.
또한 아세라 상을 만들었는데 그 일은 이전의 모든 왕들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 노엽게 하는 일이었다.
아합의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다.
히엘은 여리고 성을 쌓기 시작하면서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다.
그리고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다.
이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 본문 34절은 아합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하신 말씀은 이러하다.
(수 6:26)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여호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선포한 때로부터 무려 5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땅에서 500년이라 함은 우리나라의 조선 시대의 기간과 맘먹는 시간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70년으로 봤을 때 500년은 거의 열 배에 가까운 시간이 아닌가?
참으로 유구한 세월이 아닐 수 없다.
남유다의 왕인 아사가 통치하는 41년 어간에만 해도 북이스라엘은 4개의 왕조가 지나갔으며 6명의 왕이 교체되는 심각한 혼란을 겪었다.
41년도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인데 무려 500년 만에 여호수아를 통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공중에 흩어지지 않고 말씀 그대로 완벽하게 성취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그 말씀 앞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삼상 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당신의 아들에게 생명을 주어 낳으셨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하나님 아버지는 그 아들과 함께 언약을 맺으셨다.
이는 우리(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가 사람을 만들어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주자는 것이다.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창세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이 약속은 창조 후에 하신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 묵시 속에서 하신 약속이다.
그런데 그 언약은 지금까지 유효하며 이어진다.
물론 우리 인간들은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여로보암 왕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여로보암 왕은 온갖 악행과 우상숭배를 저질렀지만 우리 인간들은 그런 죄에 또 다른 죄를 추가해서 ‘짓고 또 짓고’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패역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마땅히 죽임당해야만 한다.
또한 나야 말로 지금 당장 지옥의 아랫목으로 던져넣는다 해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자가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은 실로 거짓이 없으며 영원한 언약이다.
사람이 약속했다면 그 약속은 불과 얼마 가지 않아서 깨지고 파기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신실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역시 만물 안에 속해서 쇠락의 법칙에 적용을 받기 때문이다.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이 세상 만물 안에 있는 것들은 항상성이 없다.
언제 변하고 쇠할지 모르는 무상성에 속한 존재물들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아들의 언약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의 신실함이 우리의 악함까지도 아우르며 이끄신다.
구약 시대에는 백성들의 행동으로 그 결과가 결정 났다면 신약 시대에는 그 악함까지도 덮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으로 우리를 영생으로 이끌어 가신다.
그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의 결정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헬, 피스튜오) 의로우사(헬, 디카이오스)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물론 우리가 죄를 범하면 그것을 깨달을 때 바로 자백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자백으로 인하여 죄를 사함 받거나 깨끗하게 되는 것 이전에 나를 향하신 우리 주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으로 인하여 정결케 되는 것임을 믿어야 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못하고 나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였다.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내 생각 안에 가둬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나의 믿음이라는 것도 만물 안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이 땅에 속한 것이며 저 높은 하늘로 올라가는 믿음을 갖는다 한들 그 역시 만물 안에 속한 것임을 나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땅에 속한 것들에 매여 살면서 내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렇지 않으면 원망과 불평이 주를 이루었다.
이런 나에게 공의의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
나에게 임한 그 심판이 나를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게 하였다.
나는 그 고통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고통을 주신 하나님께 매달렸다.
나를 보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까?
철이 없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자가 아닌가?
이런 차에 나에게 복음이 들어왔고 그 복음, 특히 장사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내게 은혜의 무덤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이제 내게 임한 고난을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고난의 무덤 안에서 먼저 찾아와 계시는 주님의 품에 안겨 주님과 말씀으로 교제할 뿐이다.
비록 상황은 변하지 않고 여전히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속에서 참된 평안을 누린다.
그것이야 말로 집채를 날리는 태풍 속에 고요한 태풍의 눈이다.
내게 임한 고난까지도 배려하시고 영생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온 맘 다해 찬양을 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하나님을 사람이 생각하는 차원으로 낮추어 보고 판단했던 미련하고 악한 죄인이 여기 있습니다.
그런 죄인이 지금 여기에 살아 있음은 오직 주님의 은혜이오니 그 은혜 앞에 나의 두 손으로 입을 가릴 뿐입니다.
욥이 그러했던 것처럼 티끌과 재 가운데 앉아 회개합니다.
내가 당한 고난의 무덤을 그대로 수용하며 그 안에서 주님과 함께 연합하오니 나를 붙잡아 주옵소서.
고난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크고 작은 고난의 태풍은 무덤과도 같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불어 닥칩니다.
나의 영안을 여시어 주님의 은혜의 손길을 보게 하소서.
세상의 유구한 역사를 넘어 영원한 시간에서 영원토록 한결 같은 주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을 믿습니다.
나 같은 죄인의 시선이 아닌 우리 주님의 시선으로 그 나라를 보게 하옵소서.
변함없이 창세전 언약을 이끄시고 지키시는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