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부인과 의사의 고뇌를 벗어 던지며
저자: 송윤희 마리아, 성신 소아과 의원 원장
원고를 청탁받고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이제 겨우 새 살이 돋아 난 상흔을 밖으로 드러내 보여야 하고 20년이란 세월의 아픈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수치심과 민망스러움이 엄습해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배 의사 선생님들이 나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가슴 켜켜이 쟁여 있던 응어리를 용기내어 이야기 하여야만 하겠습니다.
산부인과에서는 분만의 고통을 보상해 주듯 새 생명의 신비스런 음향을 들을 수 있는 기쁨이 있는가 하면, 바로 그 옆자리에는 컴컴한 일면이 그림자같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수술을 받지 않으면 죽음을 택할 길밖에 없다는 미혼 여성의 수태, 맺을 수 없는 인연인 남녀의 임신 사례 등 시린 가슴에 고드름이 맺힌다는 딱한 사정이 미처 선택의 여지도 없이 산부인과 의사의 손을 묶어버립니다. 다음으로 현금의 유혹이 발목을 잡아당겨서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게끔 됩니다.
그래서인지 가톨릭 신자 집안에서 의과 대학에 다니는 자녀를 가졌을 경우 아예 산부인과와 거리가 먼 임상 과목을 택하도록 권유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미리 막아주는 일이 있는데 참으로 현명한 처사로 여겨집니다.
첫째 단추를 잘못 끼우면 끝까지 잘못 끼우게 되고 수정하려면 번거로운 절차에 못지 않게 시간도 소요되듯이, 이미 들어선 길에서 빠져 나오는 데 2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경제적 문제가 워낙 컸었고, 부채를 갚은 후 곧 청산하리라 맹세했었지만 매번 계속되어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수 있는 시간에 와서야 겨우 종지부를 찍었으니 말입니다.
인공 임신 중절 수술이란 생명을 제거하는 일이니만큼 머리 속 아주 먼곳까지 우뢰처럼 번져 가는 침묵의 절규가 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기계를 잡는 분이 신자가 아닐지라도 꿈자리가 사납고 임신 중반기부터의 수술인 경우는 강도가 더욱 짙어집니다. 탄식의 외마디가 끊임없이 귓전을 울리고 질펀한 흔적이 망막에 머무르면서 역겨움이 목젖까지 올라올 지경이어서 술이라도 한잔 마셔야 잠들 수 있겠다는 얘기를 가끔 듣게 됩니다. 하물며 신자인 입장이야 어떻겠습니까? 나 역시 수술을 하는 동안 안절부절 겁먹은 사슴 모양 목을 길게 뽑으면서 가슴 조였고 꿈에도 오장 육부가 뒤틀리는 시달림에 몸부림쳤었습니다. 가슴 한복판에 근조(謹弔)의 리본을 깊이 묻고 외출을 삼가고 여행이나 오락과 거리가 먼 죄인의 자세로 생활을 하였습니다. 앞 가슴에 'A'자를 달고 다닌 「주홍 글씨」의 여인같은 수치심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차를 타면 교통 사고를 당할 것 같았고 비행기를 타도 추락할 것 같아 진땀을 흘리곤 하였습니다. 수술을 하는 중엔 푸드덕거리는 가엾은 생명의 날갯짓을 의식하면서도 왜 그 자리에 머물러야 했는지! 마음으로는 시술을 중단하고 회개한 연후에 죽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쉽게 융단을 내리지 못했던 기간을 나는 심한 홍역을 앓았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고열로 숨이 헐떡거리고 결막염이 동반된 눈은 충혈로 시야를 가리고 영과 육이 중한 증세로 흉한꼴을 하며 신음해야 했습니다. 이 병의 후유증도 심각하여 가장 깊고 캄캄한 절망의 기억으로 이따금씩 꿈틀대며 무의식 중에 기어올라오곤 합니다. 내가 지은 죄가 그토록 무거워 가까운 이웃이나 가족에게 여파가 미치지 않나 하는 압박감도 적지 않았습니다.
어떤 생명은 여아이기 때문에, 또는 부모가 원치 않아서 숨져 가는 모습이 단지 유태인이란 이유로 처형당했던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연상하게 했습니다. 어두운 뜨락을 배회하면서 사지가 오그라드는 듯 전율을 느끼면서도 칼로 자르듯 결단을 내리지 못한 이유는 시간이 깊어 가면서 아픔은 무디어지고 자기 합리화의 덮개가 양심의 눈을 가리는 죄의 속성이 그러하듯 무서운 견인력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두 손바닥에 살점이 에이도록 죄인의 화인을 새기고 영혼의 맑은 외침을 외면했던 많은 날들을 지금은 몹시 후회합니다.
나와는 달리 불혹의 나이에 하루 아침에 수술을 중단한 용기 있는 선생님이 계십니다. 그 동기는 마리아 수녀회에서 배포한 비디오 테이프 "생명 구출 운동'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태아의 팔과 다리가 기계로 인해 찢겨 나오고 팔딱팔딱 뛰는 심장이 그대로 나오는 화면을 보았고, 4개월 된 태아가 죽지 않으려고 수술 도구를 피해 구석진 곳으로 쫓기는 영상을 보고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 잘려 나간 수천 수만의 손이 허공 속에서 내젓는 환상에 시달렸던 모양입니다.
또 어떤 분은 부인의 간곡한 권유로 그만두었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임신 중절 수술을 하던 어느 날, 수술 도구인 감자의 끝 부분의 둥근 꼭지가 우연히 부러져 자궁안에 삽입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황급히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기를 자궁 내에 들어간 기계가 무사히 빠져 나오면 다시는 낙태 수술을 않을 것이니, 한번만 봐달라고 보이지 않는 그분께 생전 처음으로 간곡히 청했답니다. 수분 후 잘린 기계가 나오자 안도의 숨을 쉬면서 자신의 지금까지의 생활을 청산하고 신자로 입교했답니다. 그 당시 그분은 밥줄을 끊는 기분으로 기도를 드렸는데 그 후부터 가족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설계를 다시 꾸몄답니다. 고생은 되었지만 성가정을 이루는 큰 축복을 받았다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말하곤 합니다.
자기 호주머니 속의 적은 돈은 남의 주머니 속의 큰 돈보다 낫다는 세르반테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돈이 귀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경제적인 책임을 양어깨에 짊어진 가장이 그런 융단을 내리기까지 부인의 숨은 기도가 뒷받침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너도 나도 한밑천 잡으려는 이 시대에 부동산 투기나 그 밖에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단시일 내에 재벌이 된 사람이 있음을 감안할 때, 몸과 마음을 철저히 연소시키는 산부인과 의사들이 안쓰럽게 느껴집니다. 더군다나 수술을 시행하지 않으면 일정 수입이 대폭 축소되므로 가난하게 살겠다는 용기와 물질 만능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한걸음 물러서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합니다.
먹이를 구하다 덫에 걸린 새앙쥐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늦게나마 산부인과 간판을 내렸던 10년 전의 일이 내게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가장 큰 배려였다고 생각합니다. 그전에도 신부님의 강론을 들은 후 한 달, 꾸르실료를 다녀와서 두 달, 프랑스 루르드 성체대회를 다녀와서 세 달 정도를 손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한 일이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떨리는 손을 가누면서 임신 중절 수술을 다시 시작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2년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외화를 중간부터 보았습니다. 큰 은행을 털기 위한 모의를 세운 은행 갱단의 부두목이 자기 아들을 앉혀 놓고, 이번일만 성공하면 다시는 도둑질하지 않고 살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중노인인 그가 그 나이 들도록 나쁜 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이 애처롭게만 보였습니다. 결국 실패하여, 손 털고 가서 살려던 카나나는 가보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현금의 유혹과 환자들의 절박한 사정에 못 이겨, 내일로만 미루다가는 그 중노인처럼 되고 말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산부인과의 무거운 닻을 내리고 소아과를 단일과목으로 진료하니 총수입이 10분의 1 이하로 줄어들어서 며칠간은 시답지 않았고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조바심도 생겼었습니다.그러나 며칠이 지난 후 적은 수입에 익숙해졌습니다. 물론 각오한 바도 있었지만이 같은 빠른 속도록 작은 수입에 적응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자랑스러웠습니다.
다행히 걸프전은 종전이 되었지만 전쟁을 생각해 봅니다. 아주 훌륭한 저택에 살던 사람이 전쟁이 터지면 피난지로 가서 비좁은 단칸방에 모든 식구가 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는 자신의 환경에 놀랍도록 잘 적응하는 힘이 있습니다. 디오게네스는 세상의 명리는 자신을 묶는 쇠사슬이라면서 통 하나만을 가지고도 만족하면서 살았던 거지 철인입니다. 한없는 인간의 욕심을 그의 철학으로 풀어 가면 쉽게 해답을 구할 것입니다.
밀어젖힌 무게보다 더 커다란 환희와 감사가 찾아오던 날, 뒤숭숭하게 헝클어진 그 자리에 은혜로운 햇살이 풍성했습니다. 이젠 번개가 쳐도, 어디를 가더라도 홀가분하고 편안한 자세를 취할 수 있습니다. 성당에 나가서도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내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신 많은 분들 중에서, 20년을 하루같이 공들여 기도하신 왜관의 수사님, 정릉의 수녀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시술을 중단하던 그때 환한 등불이 내 앞에 달려 있는 기분이었고 누군가 멀리서 환영과 기쁨의 텔레파시를 보내는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죄인에게도 은총이…."라고 베르나노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 같아 곧장 성당으로 향하여 조용히 주님께 무릎을 끓었습니다. 생의 나머지 시간을 후박하게 나누면서 살기로 깊이 다짐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들 모두를 위해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