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영혼의 중앙역 / 박정대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하네 / 박정대
가을 저녁寺 / 박정대
아무르 강가에서 / 박정대
앵두꽃을 찾아서/ 박정대
앵두꽃을 보러 나, 바다에 갔었네 바다는 앵두꽃을 닮은 몇 척의 흰 돛단배를 보여주고는 서둘러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으므로 나, 사라져 가는 것들의 뒷모습을 아쉽게 바라보다가 후회처럼 소주 몇 잔을 들이켰네 소주이거나 항주이거나 나, 편지처럼 그리워져 몇 개의 강을 건너 앵두꽃을 찾아 산으로 갔으나 산은 또한 나뭇잎들의 시퍼런 고독을 보여주고는 이파리에 듣는 빗방울들의 서늘한 비가를 들려주었네 남악에서 들려오는 비가를 들으며 나, 또 다시 앵두꽃이 피는 항산을 찾아 떠났으나 내 발걸음 비장했음은, 내 마음속으로 이미 떨어져 휘날리는 꽃잎의 숫자 많았음에랴 그리고 나, 문지방에 앉아 문득문득 앵두꽃에 관하여 생각할 때마다 가보지 않은 이 세상의 가장 후미진 아름다운 구석을 떠올리겠지만 앵두꽃을 보기에 그대만한 장소가 이 세상 또 어디에 있으랴 이제사 고요히 철들어 나, 앵두꽃을 보러 그대에게로 가노니, 하늘 아래 새로운 사실은 없고 그 사실 앞에서 앵두꽃이 피지 않는 곳 또한 없음에랴
하얀 돛배 / 박정대
창밖엔 눈이 내렸네, 하루 종일 눈이 내렸네, 어디에서 부턴가 눈물의 경계를 지난 눈들의 육체, 영혼도 나무들을 떠나는 이 시각에 저 눈들은 다 뭐란 말인가, 물방울이 되지 못한,눈물이 되지 못한 딱딱한 눈들이 쳐들어오는 동안, 산골짜기에서는 어린 나뭇가지들이 뚝뚝 부러졌네, 산짐승들 굴 속에서 폭설이 멎길 기다렸네, 나는, 가스불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또다시 물이 끓기를 기다렸네, 눈이 내렸네, 주전자 속에서 폭풍우가 치고 하루 종일 마음이 고요하게 들끓는 동안, 눈은 진눈깨비가 되어 퍼붓다가, 멎고, 하면서 집요하게 애인처럼 내렸네, 이미 초토화된 내 추억의, 삶의 공터 위로.....하루 종일 하얀 돛배가
해적 방송 / 박정대
긴 방파제를 따라 파도가 치지
파도에 밀려 저녁이 오면 나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방송을 시작해
당신은 듣고 있을까, 오로지 당신을 위해, 긴 긴 말레콘을 따라가며 부서지는 파도치는 말레콘 해적 방송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면 찬찬이라는 음악과 함께파도치는 말레콘의 풍경이 나오지
그런 말레콘을 따라 오래도록 당신과 함께 걷고 싶었어
아바나의 밤하늘엔 노란색 별들이 떠 있고 우리는 가난한 건물들 사이를 아무 걱정도 없이 걸어가겠지
베로니카, 삶이 가난한 것은 건물들 때문이 아니야
우리는 지금 저녁의 한적한 카페에 들어가 한 잔의 술을 마실 수도 있고 말레콘에 부서지는 파도의 음악 소리를 들을 수도 있잖아
거리에는 가난한 악사들이 그들의 영혼을 연주하지
선풍기가 없어도 밤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우리의 가슴을 식혀줘, 겨울에도 우리는 춥지 않아, 베로니카, 당신의 따스한 가슴에 묻혀 잠들 수 있으니까
저녁이 오면 낡고 오래된 말레콘에 앉아서 지나간 혁명이 찬란했다고 말하지는 말자, 삶은 결국 지나갈 테니까, 지나간 삶은 그래서 찬란할 테니까
베로니카, 아직 따스한 내 손을 잡아줘, 당신 안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나를, 나의 혁명을 추억이라고 말하지 말아줘
아직 내 마음의 말레콘에는 파도가 치고 별빛이 빛나고, 당신과 나는 작은 손전등 하나를 들고도 우리의 낡은 침낭 속으로 스며들 수 있으니까 침낭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것을 볼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베로니카,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그냥 우리에게 망명해 버리자
나는 지금부터 당신의 말레콘이야
카리브해의 파도를 음악으로 바꿔 밤새도록 당신을 위한 단 하나의 해적방송을 할 테야
당신만 들어주면 돼, 그러면 돼, 나는 밤새도록 당신의 귓가에서 파도치며 출렁일 테니 당신만이 꿈의 주파수로 날 들어주면 돼
베로니카 그러니까 기억해야 해, 꿈속에서도 잊으면 안 돼
사랑해, 그래 여기는 파도치는 말레콘 해적방송이야
馬頭琴 켜는 밤 / 박정대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몽골의 악사는 악기를 껴안고 말을 타듯 연주를 시작한다 장대한 기골의 악사가 연주하는 섬세한 음률, 장대함과 섬세함 사이에서 울려나오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 모닥불 저 너머로 전생의 기억들이 바람처럼 달려가고, 연애는 말발굽처럼 아프게 온다
내 生의 첫휴가를 나는 몽골로 왔다, 폭죽처럼 화안하게 별빛을 매달고 있는 하늘 전생에서부터 나를 따라오던 시간이 지금 여기에 와서 멈추어 있다
풀잎의 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풀결이 인다, 풀잎들의 숨결이 음악처럼 번진다 고요가 고요를 불러 또 다른 음악을 연주하는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내 그토록 오래 꿈꾸던 사랑에 복무할 수 있다
대청산 자락 너머 시라무런 초원에 밤이 찾아왔다, 한 무리의 隊商들처럼 어둠은 검푸른 초원의 말뚝 위에 고요와 별빛을 메어두고는 끝없이 이어지던 대낮의 백양나무 가로수와 구절초와 민들레의 시간을 밤의 마구간에 감춘다, 은밀히 감추어지는 生들
나도 한때는 武川을 꿈꾸지 않았던가, 오래된 해방구 우추안 고단한 꿈의 게릴라들을 이끌고 이 地上의 언덕을 넘어가서는 은밀히 쉬어가던 내 영혼의 비트 우추안
몽골 초원에 밤이 찾아와 내 걸어가는 길들이란 길들 모두 몽골리안 루트가 되는 시간 꿈은 바람에 젖어 펄럭이고 펄럭이는 꿈의 갈피마다에 지상의 음유 시인들은 그들의 고독한 노래를 악보로 적어 놓는다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밤은 깊을 대로 깊어, 몸골의 밤하늘엔 별이 한없이 빛나는데 그리운 것들은 모두 어둠에 묻혀버렸는데 모닥불 너머 음악소리가 가져다주던 그 아득한 옛날 아, 그 아득한 옛날에도 난 누군가를 사랑했던 걸까 그 어떤 음악을 연주했던 걸까
그러나 지금은 두꺼운 밤의 가죽 부대에 흠집 같은 별들이 돋는 시간 地上의 서러운 풀밭 위를 오래도록 헤매던 상처들도 이제는 돌아와 눕는 밤
파오의 천장 너머론 맑고 푸른 밤이 시냇물처럼 흘러와 걸리는데 이 갈증처럼 멀리서 빛나는 사랑이여, 이곳에 와서도 너를 향해 목마른 내 숨결은 밤새 고요히 마두금을 켠다
몇 개의 전구 같은 추억을 별빛으로 밝혀놓고 홀로 마두금 켜는 밤 밤새 내 마음의 말발굽처럼 달려가 아침이면 연애처럼 사라질 아득한 몽골리안 루트
* 마두금 악기의 끝을 말 머리 모양으로 만든, 두 개의 현을 가진 몽골의 전통 현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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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詩의 향기 / poem & photo 원문보기 글쓴이: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