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이지대에서의 산책 외 2편
김영수
2018년 『창작 21』. 등단.
키 높이로 우거져 마른 갈대 숲 사이
깃 접고 숨은 물새 놀라 날아갈까
개울은 소리 죽여 호수로 흘러들고
바다를 건너 온 바람도 숨을 고르지
안도와 불안 사이
침묵과 소란이 뒤섞여 아우성치는
이수지대(離水地帶)를 걷다 보면
갈대 숲 너머로 이어지는 내밀한 침묵 속
실핏줄처럼 조붓한 길 하나
그 길에 들어서면
선한 눈 떠지는 백색 주술에 걸려들지
그 길 위에 서면
어제의 나를 용서하게 되지
그 길 끝에 서면
슬픔은 어느새 중력이 사라져
환한 웃음이 되어 있지
먼 산등성에
어둠 내려 샛별 돋을 때
길은 하루를 지우고 눈을 감지
길이 사라져 길 아닌 곳 없는
우주 지붕 아래서
길은 내일을 걸어갈 누군가를 밤새 기다리지.
바다 너머
길 끝에
바다가 있었다
언제, 어디서 떠나 와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의 흔적은 어느새 지워졌지만
분명,
초여름 달리아 환한 뜨락의 훈향이
그 시작이었다는 믿음만은 잔상 끝에 매달려 있다
걸으며 흩어지지 않으려 마음 졸였던
두 발자국의 흔들린 궤적은 내 것이 아닌 양
삶의 리트머스 종이 위에서 사라진 지 오래지만
벗겨지지 않은 낡은 신발만은 남아
여기,
바다가 보이는 숲길에 앉아 잔숨 고르며
바람꽃 하나 꺾어 손에 쥐고
바다 너머 길을 꿈꾸듯 바라보고 있다
오늘 밤,
겨울비처럼 흩뿌리는 별무리 우러르며
푸른 것은 푸르게, 아픈 것은 아프게
여기까지
죽은 듯, 산 듯 걸어 왔다고
나에게 고백하면서.
황태덕장에서
치욕적인 삶보다 차라리 할복(割腹)을 택한
사무라이도 아닌데
한겨울 설원(雪原)에서
죽어서도 교수형을 받고 있다
쓸개, 간을 떼어내고도 인간은 실없이 살아내지만
너희들은
생의 알집과 끊어진 창자까지 모두 내어 주고
겨우내 눈보라 속에서 얼었다 녹으며
이집트 파라오의 허망한 꿈 속
미라가 되어 간다
전생에 무슨 업보 있어
몇 점 남은 살점마저 갈가리 찢겨질 때도
퀭한 눈 선하게 뜨고
막막했던 삶의 끝 언저리를 마주하고 있다
누가 그 긴 항해의 시간을 기억하겠나
더 이상 아파하지 않는 바다는
푸른 지느러미로 오늘을 파도치는데
부화를 기다리는 아가미들은
너희들을 복제할 어둠 속에서
저마다의 눈알을 완성하고 있는데.
출구 없는 방황의 기록
오늘도 산은 학사평(鶴沙坪) 너머 바람을 안은 채 잊히어 가는 우울한 종교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다. 흔들리는 호수가 푸른 지느러미로 파도를 가르며 붉은 아가미로 숨 쉬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담수와 염수 사이에서의 삶이 속초의 정체성이다. 아주 가끔씩 마음 안쪽에서 노을에 젖은 갈대숲이 물그림자로 일렁인다. 안도와 불안 사이의 이수지대에서, 침묵과 소란의 점이지대에서, 부서진 기표와 의미 없는 기의 사이에서, 결코 끝나지 않을 출구 없는 방황이 계속되고 있다.
그래도 본능인 양, 아니 집행유예의 천형인 양, 주변과 중심 그 경계에 흩뿌려 부러진 음표를 선천성 음치의 목울대로 탁한 소리를 질러 본다. 빛바랜 오선지는 여전히 텅 빈 다섯줄로 남아 있지만.
산, 바다, 호수 그리고 하늘과 사람이 악보 없는 무한의 노래인 줄을 나는 아직 모른다. 초보 어부의 어설픈 그물질이 건져내는 건 늘 허망뿐이다. 손바닥만 한 양지를 찾아 쪼그려 앉아서 해진 그물코를 꿰맨다. 미련일까. 아니면 오기일까. 황금빛 비늘 반짝이는 한 편의 시가 걸려들길 소망하는 나날들이 쌓이고 쌓여 허허로운 백사장을 이루었다.
오늘도 눈높이로 떠오른 수평선을 바라보며 새로운 출어의 시간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