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 채륜 편: 제4회 위대한 발명가 음독자살하다
(사진설명: 채륜의 무덤)
제4회 위대한 발명가 음독자살하다
채륜지는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제지업도 각지에서 빠르게 발전해 이곳 저곳에서 여러 가지 종이가 대량으로 만들어 졌다. 종이의 이름도 망지(网紙)니 포지(布紙)니 마지(麻紙), 저지(楮紙), 죽지(竹紙), 초지(草紙) 등으로 다양했으며 종이의 이름에서 다양한 원자재를 볼 수 있었고 이와 동시에 종이의 원자재가 아주 풍부하다는 것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종이를 만들려면 복잡한 공법과 과정을 거쳐야 했고 많은 인력과 재력을 필요로 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종이를 아주 아껴 썼다. 중국인들은 창힐이 창제한 한자를 소중히 여기고 채륜이 발명한 종이를 소중히 아낀다는 차원에서 예로부터 폐지도 소중히 여겼다. 그리하여 과거에는 글자가 씌어진 종이를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의 ‘경석자지(敬惜字紙)’라는 글자가 새겨진 정로(亭爐)에 폐지를 전문 소각했고 전담인원도 두었다.
채륜은 인력과 재력을 아끼는 차원에서 환혼지(還魂紙)라는 새로운 종이도 발명했다. 환혼지란 오늘말로 하면 헌 종이를 녹여서 다시 떠 만든 종이, 즉 재생지를 말한다. 사용한 종이나 헌 종이는 낡은 옷이나 헌 끈에 비해 더 쉽게 종이를 만들 수 있었다. 폐지는 녹여서 표백시키면 바로 새 종이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었다! 채륜은 또 한 번 쓸모 없는 물건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신묘함을 보여주었다!
채륜은 채후지로 인해 온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사람이 태어나서 이런 큰 일을 한 건 했다는 것으로 인해 채륜은 인생에 유감이 없었다. 그럼에도 금상첨화의 좋은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채륜을 찾아왔다. 한화제의 황명으로 그는 중국의 문명사에서 또 다시 눈부신 진보를 이룩한 것이다. 그는 황명으로 황실의 서적을 정리하는 기회를 빌어 많은 죽간 서적을 종이 서적으로 바꾸었다. 채륜의 이 시책 하나로 인해 많은 종이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제지업은 당시 융성발전하게 되었다. 또 채륜의 이 시책으로 많은 고서의 보존이 더 용이하게 되어 더 오랫동안 전해지며 중국의 문명이 더 좋고 더 빨리 전승되고 발전되게 되었다. 채륜은 그 공로가 천 년 동안 이어지는 큰 일을 한 것이다! 당시 채륜은 자신이 한 이런 일들이 인류의 문명사에서, 중국의 문화사에서 모두 독보적인 큰 기여를 했음을 몰랐을 것이다.
좋은 일에는 좋은 결과가 따르고 나쁜 일에는 나쁜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단지 때가 있을 뿐이다. 채륜이 한창 잘 나가고 있을 때 엄청난 재앙이 소리 없이 그를 찾아왔다. 한화제가 붕어한 후 태어난 지 100일이 되는 등 태후의 아들 유융(劉隆)이 1년 간 보위를 지키다가 요절했다. 등 태후는 하는 수 없이 청하 왕 유경의 아들 유호(劉祜)를 불러다 황위를 잇게 했으니 그가 바로 한안제(漢安帝)이다. 한안제가 보위에 오르자 채륜은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18살 때 핍박에 의해 저지른 범죄의 대가를 치를 때가 온 것이었다.
채륜은 줄곧 선 태자 유경이 재기하는 악몽 속에서 살았다. 그런데 오늘 유경의 아들이 황제가 되었으니 유경이 재기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채륜의 악몽이 현실이 된 것이었다. 그 날 한안제는 과거 채륜의 위증으로 대왕대비 송 귀인을 살해하고 황부(皇父) 유경의 태자직을 박탈한 죄를 묻는다는 어명을 내렸다. 채륜은 자신이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임을 알았다. 그는 형을 받는 모욕을 당하기 싫어 향을 피우고 목욕을 한 후 음독자살을 선택했다. 중국 제일의 발명가는 자신의 완벽하지 않지만 위대한 삶을 이렇게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