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102권 25년 11월 24일 (을해) 001 / 인수부 윤 강주가 배분하지 않고 죽은 노비를 수양딸이 아닌 첩 보배에게 주도록 하다
처음에 인수부윤(仁壽府尹) 강주(姜籌)가 함녕군(諴寧君) 이인(李裀)의 아내 최씨(崔氏)를 양녀(養女)로 삼았는데, 뒤에 양녀(良女) 보배(寶背)로 첩을 삼아 아들 강대생(姜帶生), 강세생(姜洗生)을 낳았다. 주(籌)가 이인(李裀)의 처에게 노비(奴婢) 1백 50구, 보배에게 2백 구, 대생에게 2백 구, 세생에게 1백 50구를 주고, 또 주의 적처(嫡妻) 이씨(李氏,*1)는 주에게 노비 20구를 주고, 이인의 처에게 18구를 주었다. 주가 죽으매, 주(籌)가 빠뜨리고 나누어 주지 않은 노비 80구와 이씨가 주에게 준 노비를 이인(李?)이 모두 다 독차지로 빼앗고, 또 주의 자산과 미곡을 독차지하여 보배에게 주지 않고는, 차지한 노비 50구의 이름을 종이에 열록(列錄)하고 사위 윤오(尹塢)를 시켜 보배에게 이르게 하기를,
“네가 따로 내게 이 노비를 주면 네 자산을 돌려주겠다.”
하매, 보배가 20구를 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보배가 고소하니, 도관(都官)이 핵실하여 아뢰기를,
“보배가 이인에게 준 노비는 이인이 먼저 점유하고 침핍(侵逼)하여 취한 것이니, 실은 보배의 뜻이 아니고, 이씨가 주에게 준 노비의 문권(文券)에도 쓰기를, ‘자손이 전하여 가지라.’ 하였으니, 이인(李裀)이 수양 여서(修養女壻)로서 다투어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가 빠뜨린 노비는 주가 이미 두 아들을 낳았고, 이인에게도 노비 1백 50구를 이미 주었은즉, 빠뜨린 노비도 다툴 것이 못됩니다. 《속형전(續刑典)》을 보면 이르기를, ‘적실(嫡室)에 자식이 없으면 양첩(良妾)의 자식으로 하여금 공평하게 나누게 하고, 승중(承重,*2)한 자는 10분의 1을 더 준다.’ 하였으니, 청하건대, 이 노비를 모두 보배에게 주어서 두 아들에게 전하여 주게 하소서.”
하니, 이에 이인(李裀)이 상언(上言)하기를,
“신의 처가 낳은 지 7일만에 주(籌)의 부처가 수양(收養)하였고, 신으로 사위를 삼아 오래 동거하였는데, 주가 첩을 얻어서 자식을 낳은 뒤에도 조금도 정의가 박하지 않고 처음과 같이 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가 죽으매 상장(喪葬)과 제사를 한결같이 친부모의 예에 의하여 생전과 사후에 은의(恩義)를 모두 다하였습니다. 대저 노비와 재물은 한 집의 물건이기 때문에, 비록 적실(嫡室)에 자식이 있는 사람이라도 만일 수양한자가 은의가 있으면 또한 모두 전하여 얻게 되고, 세상의 풍속이 다 그러합니다. 하물며 신의 처의 양부모는 적실에 자식이 없는데, 지금 도관(都官)이 모두 다 첩의 자식에게 주려 하니 다른 예(例)에 어떻겠습니까. 또 자식 없는 사람이 일찍이 수양(收養)을 정하고서 첩을 얻어 아들을 낳았으면, 전에 맺은 수양을 끊어버리라는 교지(敎旨)가 없었으니, 청하옵건대, 개정하여 주소서.”
하매,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이르기를,
“지금 도관의 판결한 시비는 어떠한가. 세 살 전에 버린 어린아이는 곧 자기 자식과 같다는 것이 《육전(六典)》에도 실려 있는데, 가령 강주(姜籌)가 생시에 이인에게 노비를 전연 주지 않았다면 사후에 이인이 문권이 없다 하여 다툴 수 없는 것인가.”
하고, 드디어 우부승지 박이창(朴以昌)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黃喜), 우의정 신개(申槪), 좌찬성 하연(河演), 우찬성 황보인(黃甫仁), 좌참찬 권제(權踶)의 집에 가서 의논하게 하니, 황희, 하연, 권제는 의논하기를,
“내버린 작은 아이를 곧 자기 자식과 같다고 말한 것은 무후(無後)한 사람을 위하여 말한 것입니다. 이인의 아내는 비록 강주의 세 살 전 수양딸이기는 하나, 주가 양첩(良妾)을 맞아 두 아들을 낳아 승중(承重)하였은즉, 주가 빠뜨린 노비를 나누지 아니한 것은 친자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양딸로서 친자식과 재물을 나누기를 다투는 그런 예(例)는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생전에 노비 1백 50구를 받은 것이겠습니까. 이씨가 준 문권 안에, ‘자손이 전하여 가지라.’고 한 것은 그 뜻이 어찌 수양딸에게 있는 것이겠습니까. 또 이씨의 제사가 장차 이 자식에게 의지할 것이니, 이씨의 노비는 더욱 다툴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이인이 노비 50구를 써서 그 사위에게 주어 보배에게 보내서 그 허급을 요구하였으니, 그 침핍(侵逼)하여 강제로 취한 정상이 소연합니다. 보배가, 주가 자기와 두 아들에게 준 노비를 이인에게 준 것은 한때의 사세에 부닥쳐 그리한 것이니, 지금 회수하여 돌려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입니까. 이것으로 참상(參詳)한다면 도관의 판결이 거의 사리에 합하옵니다.”
하고, 신개는 의논하기를,
“주가 나누어 주지 않은 노비와 이씨의 노비는 도관의 판결에 의하게 하고, 보배가 준 노비만은 비록 이인이 침핍하여 빼앗았다 하더라도, 보배가 오늘에도 상대하여 소송을 하는데, 어찌 그 때에는 위엄을 두려워해서 빼앗겼겠습니까. 그 뜻이 대개 의뢰하여 성사(成事)하고자 한 것이니, 지금 환수하고자 하는 것은 심히 불가하니 그대로 이인에게 주는 것이 편합니다.”
하고, 황보인은 의논하기를,
“버린 아이를 거두어 기르면 곧 자기 자식과 같다는 것이 영전(令典)에 실려 있으니, 이인의 처는 곧 주의 적실의 딸입니다. 또 첩이 자식을 낳은 뒤에도 일찍이 끊지 않았고 은의의 도타운 것이 시종 한결같았음은 여러 사람이 아는 것이니, 그 나누지 않은 노비와 이씨의 노비를 어찌 첩의 자식이 오로지 차지하고 적실의 딸은 도리어 차지하지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보배가 이인(李?)에게 노비를 주었은즉, 이인이 받은 것이나 보배가 준 것이나 모두 비리(非理)이오니, 윗항의 노비는 관가가 재주(財主)가 되어 《육전(六典)》에 의하여 차등 있게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으나, 마침내 도관의 판결에 따랐다.
첫댓글 *1 주(籌)의 적처(嫡妻) 이씨(李氏)...정부인 수안李씨. 아쉽게도 자손은 낳지 못했다.
*2 승중(承重)... '중요한 것을 이어받는다'는 뜻으로 곧 조상의 제사를 말하는데, 이 때는 제사를 맏아들이 독점하는 게아니고, 아들, 딸 구별없이 한번씩 돌아가며 지냈으며, 또는 생전에 부모가 제사를 특정아들에게 지정하기도 했다.
그래요 예날이나 지금이나 똑 같이 지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출가외인이라는 말은 기껏 100년남짓빡에 안되는 걸로 압니다. 이전에는 딸이든 아들이든 공평정대하게 재산분배가 이루워 졌다합니다. 19세기에 강하게 대두된 출가외인 한데 정말 출가하면 성이 바꿔버리니 죽어서도 어느어느성씨만 나열됩니다. 이름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름만큼은 차별을 뒀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