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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16) 안동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제5일)] * 제6구간(안동→ 풍산)
▶ 2021년 11월 10일 (토요일) [별도 탐방] ① 송야천 수계- 안동 서후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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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등산(天燈山) 봉정사(鳳停寺)
봉정사 가는 길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봉정사(鳳停寺) 탐방이다.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위치한 천등산 봉정사(鳳停寺)는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이래로 안동을 대표하는 고찰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도 손꼽히는 오랜 역사와 귀중한 문화재를 지니고 있는 유서 깊은 가람이다. 특히 1962년 국보 제15호로 지정된 극락전(極樂殿)은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이어받은 고려시대의 건물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그 가치가 높다. 봉정사는, 일찍이 태조 왕건이 다녀가고 공민왕도 다녀가기도 했다. 1999년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다녀간 뒤로는 전국적인, 아니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봉정사 영산암은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 성곡리 능골의 권태사 묘역을 둘러보고 난 뒤, 다시 924번 도로를 타고 북후(면) 방향으로 고개를 넘어가서, 서후면 태장리(台庄里)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조금 올라가 봉정사 입구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매표소 앞에서 일주문을 지나 경내의 주차장까지 차가 올라갈 수 있으나, 우리는 장대한 소나무가 울창한 수림을 이루고 있는 산사의 길을 걷기로 했다. 그리고 차를 타고 가면 ‘숨어 있는 절경’을 지나칠 수 있다고 족손 정택이 말했다. 오늘 따라 맑고 신선한 공기가 온몸을 감싼다.
명옥대(鳴玉臺)
맑은 하늘에서 밝은 햇살이 울창한 송림 사이로 내리는 가을날 오후, 쾌적하기 그지없다. 완만한 경사의 도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서 왼쪽의 계곡에 작은 폭포(瀑布)가 있고 그 건너편에 오래된 정자가 있다. 바로 명옥대(鳴玉臺)이다. 명옥대는 원래 건물 형태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천연으로 형성된 바위를 이른 말이다. 예전에는 ‘낙수대’라 불리어지다가 떨어지는 폭포수가 옥이 굴러가는 듯한 아름다운 소리를 자아낸다고 하여 퇴계 이황이 ‘명옥대’라 개명한 것이다. 정자의 처마에는 힘차고 날렵하게 쓴 초서로 ‘蒼巖精舍’(창암정사) 현판이 걸려있고, 그 앞에 ‘鳴玉臺事蹟碑’(명옥대사적비)가 서 있다.
명옥대의 유래(由來)에 대해서는, ‘창암정사에 걸려있는 퇴계의 명옥대 서문과 시’를 바탕으로 하여 쓴 안동대 황만기 교수의 글 〈퇴계가 개명한 명옥대〉에서 그 내력을 자상하게 밝히고 있다.
‘… 퇴계 이황(1501~1570)은 나이 16세에 그의 종제(從弟) 이수령(李壽苓, 1502~1539)과 함께 봉정사에서 독서를 하였다. 이수령은 퇴계의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의 아들이다. 봉정사에서 공부하던 퇴계는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자주 자연경관이 빼어난 봉정사 골짝을 찾았는데, 이곳이 바로 명옥대이다. 이때 퇴계를 종유하여 함께한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권민의(權敏義)와 강한(姜翰)이다. 이들은 자연과의 호흡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고 내면을 수양하였다. 퇴계가 학업을 마치고 봉정사를 떠난 이후로 다시 이곳에 올 기회가 없었다. ― 그러다가 50년 뒤인 1566년(66세)에 다시 봉정사를 찾게 되었다. 퇴계가 봉정사로 오게 된 연유는 그해 1월에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가다가 영주에 도착하자 갑자기 병이 났다. 이에 사직소를 올리고 풍기에 가서 왕명을 기다렸으나 사직이 윤허되지 않았다. …(중략)… 사직소를 올린 퇴계는 미편한 심기로 50년 전에 유상하던 명옥대 골짝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그때 함께 했던 공생 권민의와 강한, 그리고 종제 이수령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에 슬픈 감정을 칠언시 두 수에 담아 표출하였다.
此地經遊五十年 차지경유오십년 오십 년 전 이곳에 노닐 때에는
韶顔春醉百花前 소안춘취백화전 젊은이들이 온갖 봄꽃에 취했었지
只今攜手人何處 지금휴수인하처 손잡고 놀던 이들 지금 어디에 있는가
依舊蒼巖白水懸 의구창암백수현 예전처럼 푸른 바위에 폭포만 걸렸네
이 시에서 퇴계는 50년 전 봄날에 이수령, 권민의, 강한 일행과 함께 명옥대 골짝을 찾은 일을 회상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함께 했던 네 사람 중 남아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를 슬프게 한다. 그러나 사람은 떠났어도 바위 위로 쏟아지는 폭포만은 유구한 세월에도 여전히 흘러내리고 있다.
명옥대의 옛 이름은 낙수대(落水臺)였는데 퇴계가 이를 ‘명옥대(鳴玉臺)’로 개칭한 것이다. 퇴계가 일찍이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인 주자(朱子)의 〈운곡기(雲谷記)〉를 읽다가, 주자가 경치 좋은 곳을 얻어 육기(陸機)의 〈초은시(招隱詩)〉 “폭포가 떨어져 맑은 옥 소리 울리네(飛泉嗽鳴玉)”라는 구절에서 취하여 ‘鳴玉臺’로 명명하려다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에 기인한 것이다.
명옥대(鳴玉臺)는 퇴계 이황이 봉정사에 머물렀을 때의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 1666년(현종6년) 사림들이 건립한 누각형태의 정자이다. 자연석 초석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우고 누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정면 2칸, 측면 2칸의 평면에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두르고 있으며 4면을 모두 개방하여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 좋게 하였다. 1920년경에 고쳐지었다고 한다. 정자의 이름을 ‘蒼巖’(창암)이라 한 것은 퇴계의 마지막 시구 ‘依舊蒼巖白水懸’에서 ‘蒼巖’ 두 글자를 취한 것이다. 당시 퇴계가 이곳에 읊은 칠언절구 2수와 봉정사 서루에서 읊은 율시 1수를 새겨서 걸었다고 하는데, 현재 봉정사 서루에서 읊은 시는 게판되어 있지 않다.
‘蒼巖精舍’(창암정사) 현판과 나란히 편액 되어있는 ‘鳴玉臺’(명옥대) 글씨는 퇴계의 친필로 창암정사가 완성된 1666년에 처음 편액한 것으로 보인다. 명옥대 편액이 창암정사와 함께 편액된 것으로 인해 이 건물은 자연스레 ‘명옥대’가 된 것이다. 명옥대는 1666년 창건된 이후 1743년, 1787년, 1863년 등 여러 차례의 중수과정을 통해 보수하고 중창하였으나 안타깝게도 1866년에 편액 2점과 각자한 퇴계시를 모두 분실하여 1881년에 새롭게 새겨 게판한 것이다. 명옥대는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4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요한 솦 속 정자에 앉아 있노라면 폭포에 떨어지는 물소리가 마치 옥이 굴러 떨어져 울리는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오늘은 물이 귀한 가을, 폭포의 수량은 많지 않고 주변에는 온통 낙엽이 쌓여 깊어가는 계절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봉정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주차장이 있는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완만한 경사의 포장도로를 걸어서 올라간다. 길 주위에는 잎이 진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이 조용히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경내의 주차장에 이르렀다. 그 가장자리에 ‘세계유산 /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봉정사’를 새긴 커다란 자연석 표지석이 있다.
2018년 6월에 봉정사(鳳停寺)는,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사찰은 양산 통도사(通度寺), 영주 부석사(浮石寺), 안동 봉정사(鳳停寺), 보은 법주사(法住寺), 공주 마곡사(麻谷寺), 순천 선암사(仙巖寺), 해남 대흥사 등 7곳이다. 2018년 6월 30일 바레인에서 열린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결정되었다. 대한민국 13번째 세계유산이다.
천등산(天燈山)
천등산(天燈山)은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과 북후면에 걸쳐있는 해발 574m의 산이다. 안동의 진산인 학가산 줄기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 산세는 전반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저산성 구릉지형으로 북쪽은 불로봉, 남서쪽은 상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형성되어 있다. 식생은 능선부의 소나무 침엽수림과 계곡부의 참나무림 및 활엽수림을 이루는데, 주로 소나무들이 많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大望山)이라 불렀는데, 봉정사의 창건설화에 의하면, 의상대사의 제자 능인대사가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道)를 닦고 있던 중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그 굴을 ‘천등굴(天燈窟)’이라고 하고 산 이름은 ‘천등산(天燈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능인스님은 의상대사의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봉정사
봉정사(鳳停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682년(신문왕 2) 의상(義湘)이 창건한 절로 알려져 왔으나, 1972년 극락전에서 상량문이 발견됨으로써 672년(문무왕 12) 능인대사(能仁大師)가 창건했음이 밝혀졌다. 천등굴에서 수도하던 능인대사가 도력으로 종이로 봉(鳳)을 만들어 날렸는데, 이 봉이 머물러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鳳停寺)’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창건 후 능인은 이 절에 화엄강당(華嚴講堂)을 짓고 제자들에게 전법(傳法)하였다. 창건 이후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參禪道場)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 때는 인민군이 이곳에 머무르면서, 절에 있던 경전(經典)과 사지(寺誌) 등을 모두 불태워,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없다.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永嘉志)』에, ‘부(府)의 서쪽 30 리에 천등산이 있다.’고 하였으며, 1566년(명종 21) 퇴계 이황(李滉)이 시를 지어 절의 계곡에 있는 명옥대(明玉臺)에 붙였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에서도 계속 존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 보수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 조선시대 초에 팔만대장경을 보유하였고, 500여 결(結)의 논밭을 지녔으며, 당우(堂宇)도 전체 75칸이나 되었던 대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1999년 4월 21일에 봉정사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 길가에 천 년 고찰을 지키는 노송 한 그루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듯 쇠기둥 지지대에 의지하여 비스듬히 서 있다. 이 소나무는 봉정사에서 가장 오래된 소나무로 수령이 200년이 넘는다. 이 소나무는 그 품새와 수세가 양호하여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봉정사 만세루
☆… 경사진 산록에 높이 올려다 보이는 2층의 문루가 시선을 잡아당긴다.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인 만세루(萬歲樓)다. 긴 돌계단을 올라가서 문루 아래를 통하여 경내로 들어갔다. 부석사에서 무량수전으로 올라가기 위해 안양문을 지나가는 것과 같은 구조다. 만세루 전면에서 보면 처마 밑에는 ‘天燈山鳳停寺’(천등산봉정사) 현판이 걸려 있고 그 안쪽에는 굵은 글씨로 ‘南無阿彌陀佛’(남무아미타불) 현판이 있다. 경내로 들어가면 문루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봉정사 대웅전이 마주 보인다. 이 문루의 다락 안쪽에 ‘萬歲樓’ 현판이 보인다. 만세루 가장자리에 법고(法鼓)와 목어(木魚)가 설치되어 있다.
만세루(萬歲樓)는 대웅전 맞은편 2층 누각형태를 한 건물로, 경내에서는 바로 다락에 오를 수 있으며, 그 아래는 사찰의 출입문의 역할을 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형의 경사를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앞면은 2층이나 뒷면은 단층으로 처리하였다. 만세루에 오르면 좌우로 천등산 산줄기 옹위하는 탁 트인 산골짜기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만세루는 17세기 후반(1680, 숙종 6년)의 건실하고 당당한 건축의 수법이 잘 나타난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가치가 있다. 처음 이름은 덕휘루(德輝樓)였는데 언제 만세루로 바뀌게 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 봉정사(鳳停寺)는 참으로 유서 깊은 천 년 고찰이다. 봉정사 사우(寺宇) 하나하나가 모두 귀중한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이 절에는,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는 국보 제15호인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하여, 국보 제311호 ‘봉정사 대웅전’, 보물 제448호인 ‘봉정사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봉정사 고금당(古今堂)’ 등을 비롯하여 무량해회(無量海會, 승방), 만세루(萬歲樓), 영산암 우화루(雨花樓)·요사채 등 기념문화재가 있다.
봉정사 대웅전
봉정사(鳳停寺)는 천등산 산록 아래 동서로 긴 대지 위에 대웅전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영역이 구분되어 있다. 만세루 아래로 들어서면 바로 대웅전 영역에 이르게 된다. 대웅전은 만세루와 직선상에 배치되어 있으며, 대웅전 앞마당을 향하여 좌우로 화엄강당과 종무소[無量海會]가 마주보고 서 있다. 대웅전의 서쪽에는 극락전, 삼층석탑, 고금당이 별도의 영역을 이루고 있다.
2009년 보물에서 국보(國寶)로 승격된 봉정사 ‘대웅전(大雄殿)’은 봉정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일반적인 팔작집과 달리 측면 기둥과 대들보를 연결하는 충량을 사용하지 않은 점이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1999년 대웅전 해체공사를 하면서 1435년에 쓴 〈법당중창기(法堂重創記)〉 등 4종의 묵서(墨書)가 새롭게 발견되었다. 이로 하여 1963년 보물 제55호로 지정되었던 대웅전이 2009년에 국보 제311호로 승격되었다.
대웅전의 국보 승격의 이유는, 건물의 공포(栱包)는 힘 있고 가식 없는 수법을 가지고 있으며, 건물의 가구형식(架構形式)과 세부기법은 단조로우면서 견실한 공법(工法)으로 전형적인 초기 다포양식(多包樣式)의 특징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단청(丹靑) 또한 고려시대의 경향을 잘 지니고 있어 창건(創建)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보존상태 또한 양호하다. 그리고 봉정사 대웅전은 건축양식과 단청 등에서도 조선 초기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어 국가지정문화재(국보)로서의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1997년에는 영산회상(靈山會上) 벽화(보물 제1614호)가 발견되었는데 그림의 표현기법이나 색조가 고려 불화의 특징을 잘 지니고 있다.
봉정사 극락전
국보 15호로 지정된 ‘극락전(極樂殿)’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 건축물로 평가된다. 1363년(공민왕 12년)에 세워진 고려 후기의 목조 건물로 통일신라시대의 건축 기술을 계승하였다. 앞면 3칸, 옆면 4칸의 단층으로 된 맞배지붕, 주심포(柱心包)와 배흘림기둥이라는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정면 가운데에 널빤지로 판장문을 달고 양 옆에는 창을 내었으며, 나머지 벽면은 흙벽으로 막았다. 기둥 위에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창방을 두르고 기둥머리를 얹은 다음, 공포를 짜 올린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다.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이른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72년에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은 1625년(인조 3)에 1363년(공민왕 12)에 고쳐지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늦어도 13세기에는 이 건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량문은 건물을 새로 짓거나 고쳐 지을 때 건물의 내력 등을 적어둔 글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주심포계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건물이다.
‘극락전’(국보15호)의 ‘목조관세음보살좌상’(木造觀世音菩薩坐像, 보물1620호)은 ‘대웅전관음개금현판(大雄殿觀音槪金懸板)’ 및 1753년 ‘중수원문(重修願文)’에 의하면, 1199년(고려 신종2년)에 처음 조성되어 1364년과 1754년에 중수되었다. 양식적으로도 이 관음보살상은 중국 남송대의 불상이나 12말에서 13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이나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과 비교된다. 따라서 이 보살좌상은 1199년, 승안(承安) 4년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평가된다.
극락전 앞뜰에 있는 봉정사 ‘삼층석탑(三層石塔)’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높이는 3.18m이다. 탑 기단부의 이루가 약간 파손되었으며 상륜부의 일부가 남아있지 않으나 거의 온전한 석탑이다. 이 탑은 봉정사 극락전과 건립 연대가 같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대의 다른 석탑과 비교하여 특이한 점이나 미적으로 뛰어난 점은 없으나 무게가 느껴지는 고려 중엽의 석탑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봉정사 화엄강당
보물 제448호 ‘화엄강당(華嚴講堂)’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단층 건물로, 맞배지붕이다. 대웅전과 극락전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앞면은 대웅전 앞마당을 향하고 있다. 1969년에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1588년(선조 21)에 손질하여 고쳤다고 한다.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는 긴 널돌로 만든 낮은 기단이 놓여 있는데, 건물은 그 위에 주춧돌을 깔고서 세웠다. 가구(架構)는 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柱心包)계 양식이지만 새 날개 모양의 첨차(檐遮)를 끼운 익공(翼工)계로 변해가는 절충 양식이 나타나 있다. 아래 기둥의 윗몸에 헛 첨차(檐遮)를 짜서 기둥머리 위에서 나온 1출목(出目)의 첨차를 받치게 하였는데, 이 첨차가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바치고, 외목도리가 지붕 서까래를 차례대로 받치도록 짰다.
건물 앞면의 왼쪽 1칸은 빗살무늬의 교살[交箭]창을 단 부엌이고, 나머지 2칸은 방으로 3곳에 띠 모양의 살과 함께 궁판을 둔 4분 합문(四分閤門)이 칸 마다 달려 있다. 건물의 옆면에는 가운데에 단면이 네모난 기둥을 두어 대들보를 받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대들보 위에는 짧은 동자기둥을 얹고서 마루보를 놓은 다음 덩굴무늬를 새긴 대공(臺工)으로 마루도리를 받치게 하였다. 대들보와 마루보 사이에는 조그만 살창이 있어 특이하다.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기둥의 간격이 넓은 반면 기둥은 굵고 짧으며, 공포(栱包) 부재도 높고 굵은 편이다. 하지만 벽면과 지붕의 비례는 1:1에 가까울 정도로 균형감을 보이고 있다.
봉정사 고금당
보물 제449호 봉정사 ‘고금당(古金堂)’은 극락전 앞에 동향(東向)으로 서 있으며 원래 불상을 모시는 부속 건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은 승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1969년 해체·복원공사 당시 발견한 기록에 광해군 8년(1616)에 고쳐 지은 것을 알 수 있을 뿐 확실하게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복원 전에는 북쪽 지붕 모양도 달랐고 방 앞쪽에 쪽마루가 있었으며 칸마다 외짝문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앞면 3칸에 2짝 여닫이문을 달았고 옆면과 뒷면은 벽으로 막아 놓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비록 건물은 작지만 다양한 건축기법을 사용하여 구조가 꼼꼼히 짜인 건축물로 주목 받고 있는 문화재이다.
봉정사 영산암
무량해회(無量海會)는 봉정사 동쪽에 있는 건물로 종무소와 승방(僧房)으로 쓰인다. 무량해회의 너른 뒷마당을 지나면, 저 만큼 경사가 급한 계단 위에 오래된 한옥이 보인다. 봉정사 영산암(靈山庵)이다. 영산암(靈山庵)은 퇴락한 고색(古色)이 지나쳐 초라하기까지 한 작은 산내암자이다. ‘영산(靈山)’은 원래 석가모니가 법화경(法華經)을 설하시던 인도 왕사성 근방에 있는 ‘영축산’을 말한다. 법화경을 설하실 때의 그 모임을 일러 ‘영산회상(靈山會相)’이라 한다. ‘영산회상도’는 법당의 후불탱화로 많이 봉안된다.
봉정사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만세루를 통하여 경내에 들어와 대웅전과 극락전을 둘러보고, 대부분 이곳 영산암을 찾지 못하고 돌아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고요한 마음으로 순수한 자연에 동화되고 싶거나 산사의 고즈넉한 멋을 느끼고 싶은 사람은 영산암 계단을 찾아 오른다.
영산암 문루 — 우화루
영산암 문루(門樓) 앞에 섰다. 거침없이 초서(草書)로 써내려간 현판의 글씨가 멋스럽기는 하지만, 루(樓)자 한 자를 빼고 나머지 두 자는 (초서를 공부하지 않은 필자로서는)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한참을 주시하며 어떻게든 읽어보려고 했지만 난공불락이었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지고 강렬한 호기심이 일어났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안내판을 발견했다. … ‘雨花樓’(우화루)!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처음 설법을 하실 때 ‘하늘에서 꽃비를 내렸다’고 한 것에서 유래한 말이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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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암 경내로 들어가는 문루인 우화루(雨花樓)를 지나면 암자의 안마당에 들어선다. 영산암은 봉정사 나한전(羅漢殿)으로, 염화실, 송암당, 관심당, 삼성각, 우화루 등 5개의 당우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전체는 ‘ㅁ’자형 구조로 이 지역 사찰의 전통적, 기본적인 모습이다. 지형의 높이를 이용한 3단의 구성과 문루인 우화루의 벽채를 없애고 송암당과 누마루로 연결하여 공간의 활용도를 높였다. 또 우화루와 송암당의 구조미와 삼성각 앞의 노송 등 자연미를 살림으로써 우리 고건축의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영산암 응진전
영산암의 중심은 ‘응진전(應眞殿)’이다. 응진전 법당에 모셔진 16나한들은 모두 익살스런 모습들이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 말이다. 세상의 존경을 받고, 공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존자(尊者)라는 뜻에서 ‘응공(應供)’이라고도 한다. 번뇌를 끊고 더 이상 생사윤회를 거듭하지 않는 성자로서 최고의 깨달음을 이룬 자이므로 진리에 상응한다는 뜻에서 ‘응진(應眞)’이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우침을 얻은 성문들을 네 단계로 나누는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에 이어 그 마지막 단계가 '아라한‘(나한)인 것이다. 아라한은 6가지 신통력과 8가지 해탈법을 갖추어 번뇌를 아주 떠난 부처에 버금가는 성자이다. 부처와 이들 아라한을 함께 모신 전각을, 붓다 당시의 회상을 이루었다는 뜻에서 응진전(應眞殿)이라 하고, 혹은 나한전(羅漢澱)이라고도 한다.
오래된 암자의 아름다움
영산암 안마당은 자연 공간을 내부로 끌어들여 그대로 암자의 분위기를 자연(自然)에 동화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불교의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보다는 마치 유가(儒家) 선비들의 생활공간 가까이에 만든 정자에 있는 기분이다. 영산암 경내는 건물의 툇마루와 누마루가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준다. 전면의 우화루(雨花樓)를 비롯하여 사방에 지어진 고건축의 정교한 짜임은 물론,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과 다양하게 꾸며진 정원의 모습이 산사의 정취에 젖게 한다.
뜰 가장자리에 돌들을 옮겨놓은 자그마한 동산에는 세월에 휘어진 향나무 고목과 관상수, 그리고 다양하게 자리를 잡은 꽃과 나무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주지실(主持室)인 ‘송암당(松岩堂)’ 앞에는 온갖 풍상을 이기고 시퍼렇게 살아있는 노송이 서 있다. 그 자태를 보노라면 천 년이 하루 같은 분위기에 젖는다. 특히 마당 안에서 바라보는 ‘우화루’의 확 트여진 공간은 카메라의 프레임처럼 바깥의 풍경과 밝은 햇살을 끌어들인다. 송암당 맞으편 승방(僧房)인 ‘관심당(觀心堂)’ 툇마루는 문득 어릴 적 외갓집에 온 듯한 정감이 들기도 한다.
봉정사 영산암 마당의 멋스러움을,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건축가 승효상의 문화칼럼 《내 마음의 문화유산 셋》의 기사를 인용하고 있다. … “우리의 전통음악에서는 음과 음 사이, 전통회화에서는 여백을 더욱 소중하게 여겼던 것처럼 전통건축에서는 건물 자체가 아니라 방과 방 사이, 건물과 건물 사이가 더욱 중요한 공간이었다. 즉 단일 건물보다는 집합으로서의 건축적 조화가 우선이었던 까닭에 그 집합의 중심에 놓이는 비워진 공간인 마당은 우리 건축의 가장 기본적이 요소이며 개념이 된다. 이 마당은, 서양인들이 집과 대립적 요소로 사용한 정원과도 다르며 관상의 대상으로 이용되는 일본의 정원과는 차원이 다르다”
봉정사는 전체 경내에는 세 개의 마당이 있다. 대웅전 앞의 마당이 엄숙한 분위기이라면, 극락전 앞의 마당은 정겨운 마당으로 열려져 있고, 영산암의 마당은 아담하고 고즈넉한 한옥의 분위기로 편안한 정감이 든다. 그래서 산사를 찾는 나그네가 그 툇마루나 우화루 다락에 앉아 경내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차(茶) 한 잔을 마시게 되면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안식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산암을 나오며
영산암은 6개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그것도 크지 않는 대지 위에 자리잡고 있다. 영산암을 돌아보고 나서, 꾸미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산암은 지금의 모습, 있는 그대로의 현재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다. 계절이 바뀌고, 무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깊게 패인 주름처럼, 순수한 자연과 어울린 고색창연한 모습이 더욱 깊고 아름답다. 비록 퇴락한 건물이지만 서로 어울려 자연스럽게 ‘흐름과 비움의 공간’을 연출해 냄으로써 포근하면서도 주변 자연과 일체감으로 느끼게 한다. 영산암은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텅 비어있는 공간 속에 바깥세상을 아낌없이 끌어들인다. 비움으로 인해 채워지는 불교의 진리를 묵연히 일깨워 해 준다.
봉정사 영산암은 자연스러우며, 소박한 절집이다. 세월의 풍상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고풍스러움, 일부러 꾸미지 않아서 더욱 순수한 모습으로, 가슴에 젖어든다. 건축의 완성은 개별 건물의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건물과 그것이 주변 자연과 하나가 되는 조화가 아닐까.
[에필로그] — ‘안동(安東), 대한민국 정신문화의 수도’
오늘은 안동 서후면 일대의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나의 낙동강 1300리 종주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지역이다. 안동을 ‘대한민국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말한다. 그만큼 역사적으로 고절한 학문(學問)과 정신(精神)이 온축되어 있고, 아름다운 전통(傳統)이 살아있으며, 역사에서 빛을 발하는 인물(人物)들이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안동의 낙동강 상류 예안의 퇴계 이황선생을 정점으로 풍산 하회의 서애 유성룡, 서후 검제의 학봉 김성일을 통하여, 서후면 경당 장흥효로 이어지는 학통은 낙동강 흐름만큼이나 도도하다. 그 학맥을 이은 수많은 후예들이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어 가히 이 나라의 학문과 의리의 표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결한 선비정신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결연히 나아가 기꺼이 신명을 다했다. 안동의 도처에 임진왜란 때나 구한말, 일제 강점기에 구국활동에 앞장선 의인(義人)과 지사(志士)들이다. … 심지어 종가의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군에게 몰래 자금을 보낸 것은 바로 고절한 학문의 실천이었다.
무엇보다 안동(安東)은 오늘날에도 역사의 뿌리를 느끼게 하는 수많은 선인들의 유적(遺跡)들이 온존(溫存)하고 그것을 지켜온 사람들의 자부심(自負心)이 살아있는 곳이다. 그리하여 안동을 본향으로 일어난 삼태사 이야기가 아직도 살아 있고,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을 지니고 있는 천등산 봉정사는 천 년의 세월을 지나서도 더욱 빛을 발하는 사적이 되었다. …
그렇게 안동시 서후면 일대는 그 역사의 깊이와 인물의 발자취가 시공을 뛰어넘어 오늘날에까지 전해지는 정신문화의 고향이다. 나는 오는 그 역사의 현장을 직접 둘러보았다. 유적지 하나하나를 살펴보면서 무한한 감회와 전율을 느꼈다.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짧은 가을 햇살이 너무나 아쉬운 하루였다. 끝으로, 오늘 기꺼이 탐방의 길목을 열어준 족손 정택과 규택의 동행에 뜨거운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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