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hind War:주코프]
위기에 빠진 모스크바
히틀러와 스탈린의 운명을 뒤바꿔 놓은 전투
8월 중순 경, 독일군이 레닌그라드 초입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그런데 도시 진입을 서둘던 독일 북부집단군이 히틀러의 명령으로 진격을 중지하면서 상황은 묘하게 흘러갔다. 남부의 키예프에서 벌어진 전투로 인하여 전선 중앙을 책임지던 독일 중부집단군의 주력 부대들이 대거 키예프로 이동하여 들어가면서 전선 곳곳에 공백이 발생하자 북부집단군의 단독 진격이 위험하다고 본 것이었다. 키예프는 66만의 소련군이 포위 섬멸당하는 대참사의 무대가 되었다. 비록 소련이 이런 희생을 원하였던 것은 아니지만 이 전투의 결과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남부를 제외한 1,500킬로미터에 이르는 나머지 전선이 일시적으로 소강상태가 되었고 이렇게 얻게 된 약 한 달은 소련이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천금 같은 시간이 되었다. 덕분에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는 살아날 수 있었다.
간신히 목을 축이는 키예프 전투 당시 생포된 소련군 포로. 소련은 무려 66만 여명이 궤멸되는 역사상 최대의 참패를 당하였는데 이로 인해 얻은 한 달이라는 시간은 모스크바를 지켜낸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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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9월 13일, 주코프가 레닌그라드 현지에 부임하였을 때 소련군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군기를 잡으려 휘하 장군들을 들들볶았다. 사실 주코프는 부하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던 인물은 아니었다. 어쨌든 총살까지도 불사하며 보인 강력한 리더십은 도시를 수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독일도 이렇게 형성된 레닌그라드의 단단한 방어망이 앞으로 900여일 가까이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하게 될 줄은 당시에는 몰랐다. 독일군 자체의 문제도 있었지만 풍전등화의 레닌그라드를 수호한 주코프가 스탈린의 눈에 다시 들어온 것은 당연하였고 두 달도 되지 않아 모스크바로 소환하였다. 당시 키예프를 점령한 독일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새로운 공세를 재개하였는데 목표는 모스크바였다. 주코프는 모스크바 방위에 관한 전권을 부여받고 서부전선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민간을 동원하여 모스크바로 향하는 요소요소에 거대한 방어물을 구축하였다. 다행히도 독일군의 공세는 때마침 가을 우기와 함께 닥쳐 온 라스푸티차에 걸려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추위가 시작되며 땅이 단단히 얼자 옴짝달싹 못하던 독일군 전차들이 다시 시동을 걸었다. 독일이 11월 24일 모스크바의 출입구인 클린을 점령하자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모스크바 방어가 가능한지 솔직하게 답하라고 물었다. 주코프는 가능은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예비대가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레닌그라드에서 긴급히 소환된 주코프가 지도를 보며 방어전을 구상하고 있다. 그는 독일도 지쳐있기 때문에 누가 더 빨리 예비대를 동원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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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을 구하다 주코프는 독일군의 소모도 만만치 않음을 알았고 결국 누가 더 많은 예비대를 적시에 투입하는가에 따라 모스크바의 앞날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11월 28일 독일군 선도부대가 망원경으로 모스크바 교회의 첨탑이 보이는 30킬로미터까지 다가왔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바로 이때 러시아의 매서운 겨울 혹한이 다가왔다. 이는 소련에게 축복이었고 독일에게는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깨닫게 만든 결정타였다. 마침내 주코프는 은밀히 준비하여 공격 위치에 배치하여 놓은 120만의 병력에게 명령을 내렸다. 독일군은 모스크바로부터 100~200킬로미터를 밀려났고 소련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1942년 1월 7일 소련은 독소전쟁 최초의 전략적 승리를 거머쥐었다. 스탈린은 주코프를 실질적으로 자신의 다음 자리이자 명목상으로 군부 최고의 위치인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혹은 총부사령관이라고도 해석함)에 임명하였다.
소련의 강력한 저항과 겨울 혹한에 막힌 독일군이 항복하고 있다. 대부분의 독일군들은 그때까지 동계 전투용 피복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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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연속 된 패배로 조금씩 자신의 과오를 깨달아가던 스탈린이 모스크바 전투에서 승리를 맛보자 기고만장해졌다. 단지 지도에 그려진 전선만 보던 그의 눈에 르제프 돌출부가 보였다. 그는 즉시 대반격을 실시하여 이곳에 몰려있는 독일군을 완전히 격퇴시키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주코프는 간신히 모스크바를 사수한 소련군의 능력을 벗어난 명령이어서 반대하였지만 결국 1월 8일 공세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련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진격 한 달 만에 제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장장 100여 일간 계속된 공세에도 불구하고 르제프에 고립되었던 독일군은 히틀러의 엄명에 따라 현지를 사수하는데 성공하였고 이제 급해진 것은 소련이었다. 주코프는 공세 중단을 스탈린에게 요청하였지만 거부당하였다. 결국 전세는 역전되었고 4월 들어 독일이 반격을 개시하자 소련군은 궤멸되었다. 이 전투에서 소련은 무려 50여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모스크바 전투와 연이어 계속된 르제프 전투는 스탈린과 히틀러 모두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세에 나섰던 스탈린은 자신감을 완전히 잃고 군부의 작전에 더 이상 깊게 관여를 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반면 히틀러는 자신의 현지 사수 명령이 결국 옳은 것이었다며 더욱 더 군부를 무시하고 작전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독소전쟁을 넘어 제2차 대전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르제프역에서 장비를 하역하는 독일군. 히틀러의 후퇴불가 엄명에 도시를 사수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이때의 경험은 이후 독일에게 그다지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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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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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