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고대철학 『니코마코스 윤리학』요약정리
200931368 철학과 조하나
『니코마코스 윤리학』5권
정의란 무엇인가. 품성의 탁월성을 규정할 때, 한쪽이 하나 이상의 방식으로 이야기되는 경우, 짝이 되는 다른 한 쪽 역시 하나 이상의 방식으로 이야기된다. 부정의한 사람은 말해지는 방식이 두 가지 있다. 법을 어기는 사람과 공정하지 않은 사람. 그러므로 정의로운 사람은 법을 지키고 공정한 사람일 것이다. 법을 지키는 일은 타인들과 관련된 정의이고 공정성은 개별적 정의이다. 하지만 법을 준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불공정한 사람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개별적인 품성의 탁월성으로 정립하고, 이 탁월성을 다시 2종류로 구분한다. 이것은 분배적 정의와 형사적 정의이다. 분배적 정의는 자신들의 공적에 비례해서 재화를 받는 것이다. 무엇을 가치 있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분배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고려치 않았다. 형사적 정의는 자발적인 거래와 비자발적인 거래 둘 다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형사적 정의는 사람들의 가치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는다. 손실을 원상복구 시켜 줄 뿐이다. 물론 원상회복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범죄 예방 효과는 미미할 것이다. 그리고 정의는 다른 품성의 탁월성들의 특징들을 포함할 수는 있지만 정의가 마땅하게 조절할 수 있는 어떤 특수한 감정이나 욕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니코마코스 윤리학』6권
여기에서는 올바른 이성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품성의 탁월성과 사유의 탁월성을 모두 포함하는 완벽한 탁월성을 이해하기 위해 사유의 탁월성에 대해 고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과 이성적인 부분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성적인 부분 중 하나는 필연적 사건과 관계하며, 다른 하나는 우연적 사건과 관계한다. 전자가 학문적 인식의 부분이고 후자가 계산의 부분이다.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의 기능은 진리를 파악하는 일이며, 그 중 학문적 인식의 부분은 참과 거짓을 입증하고, 계산하는 부분은 실천적 진리를 목표로 한다. 이 실천적 진리란 올바른 욕구와 올바른 이성의 일치를 의미한다. 실천적 진리는 탁월성을 갖춘 선택을 통해서 규정된다. 실천적 지혜는 주어진 일련의 상황들에서 실행해야 될 최상의 행동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영혼의 능력이다. 그리고 사유 그 자체는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합리적 선택은 욕구와 결합된 이성이거나 사유와 결합된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실천적 지혜와 학문적 인식과 구별하는 이유는 그 주제와 그것이 교육방식에 있다. 학문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다르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적 인식의 주제는 수학, 신학, 자연학 등의 우리가 필연적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은 학습될 수 있다. 하지만 실천적 지혜는 학습될 수 없다.
기예는 영혼의 계산하는 부분에 속하는 또 다른 탁월성이다. 실천적 지혜는 행동과 관련되어 있고 기예는 제작과 관련되어 있다. 만일 S가 제작과 관련된 올바른 이성을 동반하는 품성 상태일 때, 제작의 원리가 제작자 안에 들어 있을 때 S가 기예라고 주장한다. 기예와 실천적 지혜의 차이는 그 자체와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 수행된 것들과 그 자체를 위해서 수행된 것들 사이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기예는 지향점이 고귀한 것이라는 가정을 반드시 함의할 필요는 없다. 기예에서 자발적으로 실수를 범하는 사람들은 비자발적으로 실수하는 사람보다 우월하지만 실천적 지혜에서는 그 반대이다.
직관적 이성이라는 누스는 탁월성은 제일원리들을 파악한다.
철학적 지혜는 누스와 학문적 인식의 결함이다. 철학적 지혜는 제일원리들의 진리를 파악하면서 올바른 추론을 이끌어 가는 능력이다. 이것이 가장 훌륭한 인식이며, 가장 고귀한 품성 상태이다. 왜냐하면 품성상태의 가치는 대상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되며, 철학적 지혜의 내용은 항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철학적 지혜는 보편적, 필연적 진리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실천적 지혜가 보편자들을 공유하고 있을지라도 개별자들과 관계한다는 면에서 다르다.
훌륭한 심사숙고는 학문적 인식도 아니고 잘 짐작함도 아니고 의견도 아니다. 심사숙고는 가장 최선의 행동을 찾기 위해서 그 상황들의 가치나 상대적인 중요성에 관한 고찰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하지만 실천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떤 좋음의 도달 또는 획득에 대해 심사숙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개념을 소유하고 있는지, 어떻게 그런 개념을 획득할 수 있는지, 그런 개념의 내용은 무엇인지? 하는 문제가 있다.
누스의 역할은 무엇일까. 누스는 제일 명제에도 관련하고 최종적인 명제에도 관련한다.
여기서 첫 번째로 지적하는 것은 사유의 탁월성들의 가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찰이다. 철학적 지혜는 인간의 에우다이모니아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실천적 지혜는 에우다이모니아에 관한 것이지만 사람들에게 쓸모없는 것처럼 보인다. 두 번째로 지적하는 것은 탁월성 안에서 실천적 이성의 역할이다.
품성은 모든 사람이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자마자 품성의 탁월성을 획득하지 않는다. 이것은 실천적 지혜가 빠져있는 품성상태를 의미한다. 완전한 탁월성은 품성의 탁월성과 사유의 탁월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실천적 지혜를 요구한다. 탁월성의 조화 이론은 실천적 지혜라는 하나의 탁월성아래 구체적 사례들의 탁월성이 존재한다.
☞ 정의와 실천. 이 단원은 두 가지로 정의내리고 끝내고 싶다. 처음에는 쉬울 줄만 알았던 이 책은 역시 나의 멍청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줬다. 세상에 쉬운 철학책은 없다. 차라리 요약된 니코마코스 윤리학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통째로 읽는 편이 더 쉬웠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이건 뭐랄까, 개념학습도 없이 심화학습 문제를 푸는 느낌?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어도 이해를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이미 누군가에 의해 생략되고 평가되어 있는 책을 보니 아무 생각도 없이 이리저리 휘둘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옳다더라, 아니라더라, 그래도 나쁘지 않다.....그래서 나는 지금 여러 가지 의미에서 몹시 나쁘다. 순수한 감상이다. 정의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호하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이 책을 쓴 크리스토퍼 원이나 말이 어렵기는 막상막하일 것 같다. 아니 내용이 어려운 건가. 그냥 정의라고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을 생각하면 그다지 어렵지도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또 법을 지키는 것과 공정한 것이라고 한다. 법을 지키는 것은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공정함은 품성이 뛰어난 것이다. 사람이 공정하기란 참 쉽지 않은데 말이다. 팔은 괜히 안으로 굽는다고 했을까. 실천적 지혜 역시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참, 알면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거기다 지금까지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최고 좋음이라는 것은 좋은 것들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좋은 것들만 있기 때문에 나쁜 것은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다들 품성의 탁월성과 사유의 탁월성을 갖게 되고 최고 좋음의 지경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일까. 하지만 그 중에 안 되는 사람은 계속 안 된다. 중용의 상태가 아니라 지나치거나 모자란 상태의 사람도 있고, 억지로 다른 순수하지 않은 목적으로 그럴싸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책에서 논하고 싶은 대상이 아닌 듯하다. 분명 사회 모든 구성원이 저런 이상적인 보편적 진리를 탐구해나갈 수는 없을 것이고, 서양 철학 대부분이 그러하듯 기득권의 옹호의 냄새가 난다. 아니 윤리학인데? 너무 과한 해석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리스는 민주주의 국가였으니, 시민의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다. 농부도 성인남자사람이라면 시민이었을 테지만 농부와 시인과 철학자는 엄연히 다른 사람들이었을 테니까. 이해 수준이 떨어지니 마땅히 어떤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냥 순수한 감정을 투척하고 있는 감상문이랄까. 이것이 카타르시스?!라기 에는 나는 마음이 아직 정화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