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6323838504
부조리하다. 생각보다 이 단어를 들어본 사람은 많다. 군대에서 지겹도록 들으니까. 하지만 정확한 뜻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은 거의 없다. 그냥 뭔가 불합리하거나 도덕적이지 않은 무언가라고 생각하고 만다. 그래서 우리가 문학에서 부조리 문학이라고 부르는 책들을 보면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 부조리는 무슨 뜻일까?
부조리 문학의 대가인 카뮈는 삶을 시지프 신화에 비교했다. 신에게 벌을 받아 영원히 산 위로 거대한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시지프처럼, 우리의 삶도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일상의 반복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사실에 절망해서 자살을 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오히려 카뮈는 시지프처럼 자신의 삶이 끝없는 고통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삶의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에 맞서며 역설적인 행복과 자유를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여기까지가 대충 부조리 문학이 깔고 가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이 논리를 기억하면서 오늘 추천 목록을 다시 본다면 전처럼 이상해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왜. 명? 시리즈의 3번째인 부조리 문학을 소개하겠다.
이방인 - 알베르 카뮈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방인의 첫 문장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유명하지만, 주인공인 뫼르소의 심리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는 어머니가 죽었음에도 별 감흥이 없고, 애인과 있을 때도 무덤덤하며, 아랍인을 죽였을 때도 '햇빛 때문'이라고 말해서 비난을 받고 결국 사형 선고를 받는다. 이 문장들을 보면 알겠지만, 뫼르소는 참 싸이코패스 같은 인물처럼 묘사된다. 그렇지만 그의 캐릭터성을 파보면 카뮈의 진짜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뫼르소는 사람을 죽였음에도 전혀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았고, 그는 어머니가 죽었음에도 슬퍼하지 않는 냉혈한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결국 그는 살인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 텍스트만 봤을 때, 사형 선고는 꽤 합당해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선, 어머니가 가까운 존재이긴 하지만, 죽음에 대해 꼭 울면서 슬퍼해야 하는가? 작품을 보면 생각보다 뫼르소가 어머니를 떠올리는 부분이 많다. 그는 그의 방법대로 혹은 표현이 서툴러서 그렇지 나름대로 어머니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일반적인 사회의 반응처럼 슬퍼하지 않았다고 그를 냉혈한으로 규정하는 게 과연 정당한가?
그리고 아랍인 살해도 마찬가지다. 당시 시대 배경은 알제리가 프랑스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프랑스인이 알제리 사람을 죽여도 변명만 잘하면 낮은 형량만 받을 수 있었다(마치 일제 시대에 일본인이 한국인을 죽여도 형벌을 쎄게 받지 않았던 것처럼). 따라서 뫼르소 또한 낮은 형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이해를 하지 못할 이유를 말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이게 더 부조리하지 않은가? 만약 뫼르소가 살인을 하고 뉘우치는 척을 했다면 형량을 줄일 수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한마디로, 그는 보편적인 시각대로 움직이지 않고, '이방인'처럼 행동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는 부조리한 현실을 직면했다.
하지만 소설이 단순히 부조리함을 보여주기만 하고 끝나지는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 부조리 안에서 행복과 자유를 느끼는 모습을 보인다. 이 소설에서 뫼르소가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시점은 그가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다. 그는 죽음을 대면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어머니를 이해하고, 미치도록 살고 싶어한다. 죽음을 직면했기 때문에 '이방인'에서 벗어나 세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는 세계와 연결됨에 행복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에 사형 집행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을 그에게 퍼부으며 자신을 기억하길 바란다. 정말 완벽한 부조리를 담아낸 소설이다. 관심이 생겼다면, 카뮈의 세계를 함께 탐구해보는 건 어떤가?
고도를 기다리며 - 사무엘 베켓
-지금 뭐하고 있는거지?
-고도를 기다리고 있지.
-참 그렇지.
고도를 기다리며는 참 난해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솔직히 나도 고등학생 때 읽었을 때, 뭐 이런 작품이 명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나 싶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인생에 대한 고찰을 잘 담아낸 작품이다. 솔직히 줄거리는 별 거 없다.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라는 두 인물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면서 벌어지는 내용이다. 기다리면서 둘은 실없는 대화를 계속하고, 결국 고도는 연극의 마지막까지 나타나지 않은 채 막을 내린다. 이렇게 보면 참 형편없는 연극이지만 부조리 문학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관점이 상당히 달라진다.
생각해보자. 과연 우리의 인생에는 특별한 날이 많았을까 아니면 지루한 날들이 많았을까? 기억에 남는 건 즐거운 일들이겠지만, 당연히 우리의 인생은 디디와 고고의 쓸데없는 이야기의 연속처럼 지루한 일상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처럼 고도를 계속 기다리는 그들의 모습은 전반적으로 볼 때 지루한 우리의 인생을 형상화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들 이외에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여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반복적인 루틴을 가지고 있는 인생에 몇 번 정도 있는 일종의 이벤트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고도란 존재는 또 어떠한가! 작가인 사무엘 베켓 자신도 고도가 뭐지 모르겠다고 했다. 직무유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는 고도란 존재를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왜 인생을 사는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대답이 터져 나온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사는 이유는 다 다르니까. 우리는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만의 목표를 정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 산다. 그게 곧 고도다. 디디와 고고는 언제 올지도 모르는 고도를 위하여 계속 그 자리에 기다리고 있다. 그들처럼 우리도 행복, 성공, 애인, 아이 등등.... 수많은 각자의 목표를 위하여 그게 나에게 올 때까지 살아가고 있다. 어떤가? 이제는 한번 고도를 위하여의 책장을 넘겨볼 용기가 생기지 않는가?
변신 - 프란츠 카프카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내가 만약 바퀴벌레로 변하면 어떻게 할 거야?" 올 초에 유행한 일명 '바퀴벌레 논쟁'이다. 그런데 왜 하필 바퀴벌레일까? 그건 바로 이 질문을 유행시킨 사람이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바퀴벌레(벌레라고 하지만 생김새 묘사를 보면 영락없는 바선생이다)로 변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진짜 부조리의 끝이다. 3명의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그레고르 잠자는 하루 아침에 벌레로 변해버리고, 가족들은 그런 그의 존재를 경멸한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동화처럼(개구리 왕자) 어려움을 겪고, 인간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변신은 다르다. 그레고르 잠자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 벌레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럼 가족들은 참교육을 당했나?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곤란한 존재가 사라진 가족들은 새로운 미래를 그리며 이사를 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아마 스토리 라인을 보고 불쾌함을 느꼈다면, 정상이다. 그게 부조리 문학이니까. 그렇다면 카프카는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장면을 생각해보자. 이전까지 그레고르가 가족들에게 대우를 받았던 이유는 순전히 경제적 능력 덕분이다. 이를 상실하자마자 그레고르는 찬밥 신세가 되고, 더 나아가서는 애물단지와도 같은 존재로 '변신'한다. 당시 자본주의 사회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맥락을 생각해본다면 카프카는 '과연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력이 없는 인간은 가치 있는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간관계의 가장 원초적인 단위인 가족이 그레고르에게 등을 돌리는 모습으로 인간을 경제적인 의미로만 생각하는 당시 시대의 심각성을 부각시켰다.
또한, 다른 부조리 문학들처럼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레고르는 결국 벌레로 죽음을 맞이하고, 기억 속에서도 잊혀간다. 불쌍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의 죽음도 마찬가지 아닌가? 3023년이 되면 우리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때 그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1000년 전에 죽은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듯이, 그들은 우리의 죽음을 자신이 며칠 전에 죽였다가 까먹은 모기의 죽음처럼 여길 것이다. 이는 시간이 계속 가는 한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똑같다. 그레고르 잠자도 악한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면서 가족들을 부양했던 존경 받아 마땅한 인물이었지 않은가. 씁쓸한 이야기이지만, 카프카는 이 짧은 중편 소설에 이외에도 수많은 생각들을 담아냈다. 그러니 그냥 이상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넘어갔다면, 다시 한번 페이지를 넘겨보는게 어떨까.
모래의 여자 - 아베 코보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
주로 부조리 문학은 서양에서 유명하긴 하지만, 동양의 유명 부조리 문학도 소개해보면 좋을 것 같아 선정하였다. 이 작품의 작가인 아베 코보는 '일본의 카프카'라는 별명이 있으며,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던 훌륭한 작가였다. 이 소설 모래의 여자 줄거리도 앞에 소개한 작품들처럼 굉장히 골 때린다. 주인공은 곤충 채집을 취미로 가지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에게는 이름을 알리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었고, 학계에서 발견하지 못한 희귀한 곤충을 채집하기 위해 휴가로 사막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러다가 모래 구덩이 속에 위치한 마을을 발견해서 신세를 지는데, 사실 이 마을은 여행자들을 노예로 만들어 마을로 떨어지는 모래를 퍼내게 만드는 곳이었다. 구덩이 속에는 이미 노예가 되어버린 여자가 있었다. 남자는 처음에 도망치려고 계속 시도하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여자와 관계를 가지는 등 점차 노예 생활에 적응한다. 마지막에 그는 도망을 칠 기회를 잡지만, 구덩이 속에서 유수 장치를 발견한다. 문득 그는 자신의 발견을 자랑하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그리고 소설은 남자의 실종을 알리는 문구로 끝이 난다.
이 작품이 진짜 잘 썼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부조리의 철학이 완벽하게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하루 종일 모래를 퍼내야 하는 남자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하루 종일 돌을 산 꼭대기로 옮기는 시지프와 닮지 않았는가? 사실 남자는 모래를 퍼내는 노예가 되기 전에도 시지프와 같은 반복된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직장에서 반복되는 삶에 별 의미를 찾지 못해서 곤충을 채집하러 간거니까. 단지 장소가 옮겨지면서 더 직관적으로 변했을 뿐이다. 이처럼 이야기의 설정부터 이 소설이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를 할 거라는 뉘앙스를 깔고 들어가는 부분이 훌륭했다.
그리고 엔딩과 첫 문장이 부조리의 사상으로 이어진다는 점도 미쳤다고 생각한다.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 남자가 갇혀있는 것처럼 인간의 삶은 부조리하다. 그렇다고 인생에 재미가 없진 않다. 마치 남자가 유수 장치를 발견한 소소한 행복처럼 말이다. 그가 도망치지 않는 이유는 사실 도망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도망칠 수 있다는 자유와 희망을 가지면서 나름대로 인생의 재미를 찾아낸 것이다. 마치 우리가 항상 인생에서 언젠가 일이 잘 풀릴 거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며 인생의 재미를 느끼는 것처럼 남자는 부조리한 모래 구덩이라는 벌에서 재미를 찾아낸 것이다. 국내 인지도는 아쉽지만, 모래 속에 숨겨진 이 걸작을 읽어보는 건 어떤가?
댓펌
캐치22도 부조리?문학으로 볼 수 있으려나요
캐치 22도 부조리 문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작품 내에 있는 캐치 22 조항이 말이 안되니까요. 하지만 워낙 반전 소설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그쪽 카테고리가 더 강력한 소설이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삶에 대한 소설들은 항상 수수께끼 같죠. 워낙 삶 자체가 정의하기가 힘드니까요. 그래도 읽으면서 의미를 파악해나가시면 재밌게 읽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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