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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교회와 한국 교회의 기도
서론
본 논문에서 필자는 먼저 서양 교회 특히 개혁교회에서 기도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으며 어 떻게 실행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양 교회의 특징 중 하나를 이 루는 침묵기도에 대해 비중을 두고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나서 성경에서는 기도에 대해 어 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특히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기도를 어떻게 행하였는지 를 관심 있게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에서는 기도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국 교회의 특징인 새벽기도와 통성기도와 즉흥기도에 대해 살펴보고, 이것이 교회사적으로 가지 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기도에 대한 연구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1)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관심을 가지는 문제에 대한 연구는 아직 희소한 실정이다. 특히 서양 교회와 개혁교회에서 중요시여기는 침묵기도에 대해 그 근원을 살펴보고, 이와 관련하여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이며 초대 교회는 어떻게 기도 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와 함께 한국 교회가 보편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바 새벽기도와 통성기도와 및 즉흥기도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의 실제 신앙과 교회 생활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1) 예를 들면, E. F. von der Goltz, Das Gebet in der ältesten Christenheit. Eine geschichtliche Untersuchung, Leipzig: J. C. Hinrich, 1901; O. Cullmann, Das Gebet im Neuen Testament: Zugleich Versuch einer vom Neuen Testament aus zu Antwort auf heutige Fragen, 2. Aufl., Tübingen: J. C. B. Mohr (Paul Siebeck), 1997 (1. Aufl. 1994); Cullmann, O., Prayer in the New Testament, tr. by J. Bowden,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5; R. N. Longenecker (ed.), Into God's Presence. Prayer i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2001; J. P. Versteeg, Het gebed volgens het Nieuwe Testament, Amsterdam: Buijten & Schipperheijn, 1976; C. Trimp (red.), De biddende kerk. Een bundel studies over het gebed aangeboden bij gelegenheid van het 125-jarig bestaan van de Theologische Hogeschool te Kampen, Groningen: De Vuurbaak, 1979 등.
I. 서양 개혁교회의 기도
1. 베르코프의 주장
종교개혁 이후 서양 신학에서 기도가 소홀히 다루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레이던의 헨드리쿠스 베르코프(Hendrikus Berkhof)는 “기도는 신앙 교리에서 무시된 주제였다.”고 말하였다.2) 물론 칼빈은 기도에 대해 무려 52개의 파라그라프를 가진 한 장 (章)을 할애하고 있지만(Inst. III,20) 그 후에는 거의 무시되었다고 말한다.
1625년에 레이던에 서 나온 Synopsis purioris theologiae에서는 52개의 논쟁점들에 대해 다루면서도 기도에 대한 것은 없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는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에 대하여”(Vom Gebet im Namen Jesus)라는 제목으로 조금 다루고 있다고 한다(CG §146 s.). 바빙크에게 있어서는 독립된 주제로 다루는 것은 전혀 없고 다만 하나님의 작정이란 주제를 다룰 때 지나 가면서 논의한다고 한다. 트릴하스(Trillhaas)에게는 주제 색인에 ‘기도’란 단어 자체가 없다고 한다. 프렌터(Prenter, SE p.460 s.)에게서는 약간 낫다고 한다. 브룬너(Brunner)는 ‘기도의 신학’(Theologie des Gebetes)이란 제목으로 따로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고 한다 (pp.364-376). 틸리히(Tillich)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지나가면서 다루지만 반복적으로 기도에 대해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칼 바르트(Karl Barth)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기도를 교의학의 주제로 만들었다고 한다.3)
베르코프는 이러한 기도 무시의 이유로 확실하지는 않다고 하면서 다음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경시인데 이것은 예정론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개혁주의 스콜라주의(gereformeerde scholastiek)와 관련되며, 둘째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경시인데 이것은 19세기의 현대주의(modernisme)와 20세기의 실존주의(existentialisme)와 관계된다고본다.4)
2) H. Berkhof, Christelijk geloof, 2e dr. (Nijkerk: G. F. Callenbach, 1974), 517.
3) Berkhof, Christelijk geloof, 517f.
4) Berkhof, Christelijk geloof, 518.
2. 두꺼스 교수의 비판적 검토
그러나 캄펀의 교의학 교수였던 두꺼스(L. Doekes)는 베르코프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비판 적으로 검토하는 논문을 써서 발표하였다. 이 논문의 제목은 “칼빈 이후 개혁주의 교의학에서 의 기도”인데, 캄펀신학교 설립 125주년을 기념하여 출판한 『기도하는 교회』(De biddende kerk)라는 책에 기고한 것이다.5) 이 논문에서 그는 “기도는 신앙 교리에서 무시된 주제이다” 라는 베르코프의 주장이 과연 그러한지 칼빈 이후 개혁신학자들의 문헌을 통해 자세히 검토하 였다. 물론 이런 주장은 그 전에도 있었는데, 1968년에 한스 숄(Hans Scholl)도 위 베르코프 와 같은 주장을 하였다고 한다.6) 1976년에 로트하이전(G. Th. Rothuizen)도 위 베르코프의 주장에 대해 약간의 비판과 함께 동조하였다.7) 그러나 두꺼스 교수는 칼빈 이후 개혁주의 교 의학에서 과연 기도에 대해 독립적으로, 충분히 다루고 있는지를 검토하였다.
그는 먼저 16세기의 올레비아누스(Olevianus)8)와 우르시누스(Ursinus)9)와 유니우스(Franciscus Junius)10)의 작품에서 기도에 대해 많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소개한다. 그래서 그는 칼빈의 사망 연도(1564)에서부터 1625년에 이르기까지 기도라는 주제가 무시되지 않았 다고 결론 내린다.11) 1625년은 그 후 개혁신학의 표준 자료가 된 Synopsis purioris theologiae가 출판된 연도이다.
그러면 17세기 초 탁월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편집된 이 책에서는 과연 기도에 대해 다루고 있는가? 이 책의 36번째 논의는 “De Cultu Invocationis”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cultus를 정확하게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는 논란이 되지만, 어쨌든 기도 가운데 하 나님을 부르는 것에 대해 독립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12) 따라서 기도에 관한 개 혁주의 교의학의 결함이라는 지어낸 동화(童話)는 쉽게 지워버릴 수 있다고 한다.13) 그러면서 Synopsis가 기도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는 주요 내용을 자세히 소개해 준다.14)Synopsis는 먼저 기도를 ‘의존감정’이나 ‘인간의 필요’에서 시작하지 않고, 언약의 구조 안에 서 기도는 ‘우리의 주요한 의무’에 속하며 또한 ‘하나님의 은덕에 참여하는 중요한 수단들 중 의 하나’라고 본다.15) 그리고 나서 Synopsis는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며, 누구를 통해 기도해야 하며, 어떻게 기도해야 하며, 참된 기도의 내용과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한다. 이에 대해 두꺼스 교수는 비교적 소상하게 소개해 주고 있으나16) 여기서는 지면상 생략하도록 하겠다.
Synopsis가 출판된 그 무렵과 그 후에도 개혁신학에서 기도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었다. 17 세기에 기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저술한 몇몇 학자들의 이름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Johannes Wollebius(1626), Guilemus Bucanus(1651), G. Amesius(1623), James Ussher(1656 화란어 번역), G. Voetius(1667), Johannes Hoornbeek(1689), Johannes Coccejus(1662), Herm. Witsius(1681), Johannes à Marck(1686), P. van Maastricht(1655), 제네바의 Bened. Pictet(1695-1696), W. à Brakel(1700), Johannes Braunius(1694), Franc. Burmannus(1681), Johannes Maccovius(2판: 1650), Bernh. de Moor(1768) 등. 따라서 칼빈 이후에 개혁주의 교의학은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기도라는 주제 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 두꺼스 교수의 결론이다.17)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상황은 달라졌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교의학에는 ‘기도’에 대한 독립된 장(章)이나 섹션(파라그라프)이 없지만,18) 아마도 그들은 이것을 윤리학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19) 그리고 클라스 스킬더도 따 로 교의학 책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의 다른 책들과 설교 원고에서 기도에 대한 관심을 볼 수 있다.20)
그리하여 두꺼스 교수의 결론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기도 주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H. 베르코프의 주장은 근거 없는 것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배척한다. 예정론이 기도의 의미를 약화시켰다는 주장도 근거 없는 오류라고 지적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에 대한 고백이 기도의 큰 의미에 대한 관심을 결코 약화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도르트 신경에서도 마찬가지다(I,13; V,2).21)
5) L. Doekes, “Het gebed in de gereformeerde dogmatiek na Calvijn,” in De biddende kerk,43-83.
6) Hans Scholl, Der Dienst des Gebetes nach Johannes Calvin, 1968, 9: “Das Gebet, seine Bedeutung und Stellung, fällt gerade im Protestantimus am wenigsten ins Auge ... Ist da das Gebet verstummt oder im Verstummen begriffen? ... Dass Ausführungen übers Gebet in der protestantischen Dogmatik bald einmal spärlich wurden, ja versiegten, ist eine Tatsache.”(Doekes, “Het gebed,” 43 n.2에서 재인용)
7) G. Th. Rothuizen, Ethiek en gebed, 1976.
8) Olevianus, De substantia foederis gratuiti unter Deum et electos, itemque de mediis quibus ea substantia nobis communicatur, 1585.
9) Zach. Ursinus, Catechesis, summa theologiae per quaestiones et responsiones exposita(Catechismus Major).
10) Franciscus Junius, Theses Theologicae Leidenses, 1592.
11) Doekes, “Het gebed,” 52.
12) Doekes, “Het gebed,” 53.
13) Doekes, “Het gebed,” 53.
14) Doekes, “Het gebed,” 54-65.
15) Doekes, “Het gebed,” 55.
16) Doekes, “Het gebed,” 55-65.
17) Doekes, “Het gebed,” 79.
18) 물론 Abraham Kuyper가 직접 교의학 책을 쓰지는 않았지만,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듣고 출판한 Dictaten Dogmatiek, 5권(2판, Kampen: J. H. Kok, 1910)이 있다. 여기서는 ‘기도’에 대해 따로 다루는 부분이 없다.
19) Doekes, “Het gebed,” 80.
20) Doekes, “Het gebed,” 80f.
21) Doekes, “Het gebed,” 82f
3. 필자의 평가
두꺼스 교수의 비판적 검토와 평가는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는 칼빈 이후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책에서 ‘기도’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들을 상당히 많이 개관해 주고 있다. 직접 그 들의 책들을 통해, 그들이 ‘기도’에 다루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논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이 칼빈 이후로 기도를 소홀히 했다는 주장은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꺼스 교수가 살핀 자료들은 다 칼빈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책들이다. 주로 교의학 책들에서 ‘기도’에 대해 독립적 장(章)이나 단원이 있는가 그리고 어떤 내용으로 다루고 있는가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책들이 기도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사실 이 개혁교회가 기도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어느 정도 알게 해 주기는 하지 만, 그것이 개혁교회의 기도생활에 대한 실상을 알려 주는 것은 아니다. 교리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책에 기술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힘쓰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신앙이 주지주 의적 경향으로 흘렀다면 책에서는 잘 논했다 할지라도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약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교의학 책에서 많이 논의한다는 사실은 실제 신앙생활에서의 관심을 어느 정도 또는 상당히 반영한다고 볼 수 있지만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칼빈 이후의 개혁신학에서 과연 ‘기도’에 대해 충분하게 다루어졌는가 하는 것 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물론 칼빈이 기도에 대해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상당히 많은 분 량에 걸쳐 다루고 있으며 또 그의 생활에 있어서 기도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에 대 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17세기와 18세기의 개혁신학자들이 기도에 대해 상당히 관심을 가 지고 있었다는 것을 두꺼스 교수의 논문을 통해 잘 알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서는 기도에 대한 관심이 약해지고 다른 교리적 주제에 밀려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비록 아브라 함 카이퍼가 기도에 대해 쓴 글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의 신학이 전체적으로 합리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또한 헤르만 바빙크도 비록 개인적으로는 경건 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개혁 교의학』에서는 기도에 대해 따로 다루는 것이 없다.
이러한 것은 클라스 스킬더에게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개혁교회의 전반적인 관심은 언약론, 교회 론, 문화론 등에 관한 교리 논쟁에 있었기 때문이다. 두꺼스 교수의 이 논문이 나온 후 10여 년 후에 출판된 판 헨더런과 펠러마 교수의 『간결한 개혁 교의학』에서도 기도에 대한 별도의 항목은 없다.22) 남아공화국의 헤인스 교수가 저술한 교의학 교과서인 『교의학』에도 기도에 관 한 항목은 없다.23)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 신학』에서도 ‘기도’(Prayer)에 대해 다루는 항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책 말미의 인덱스에도 없다. 이런 것들은 아마도 ‘기도’는 교의학의 주제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은 오늘날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서 문제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와는 분명히 다르며 17 세기, 18세기의 개혁신학과도 다른 것이다.
이러한 것은 실제 설교와 글에서도 나타난다. 필자가 1985년부터 1992년까지 7년간 개혁교 회에 소속하여 들은 설교는 거의 대부분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등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필자가 읽은 개혁신학의 글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말씀’ 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때마다 필자가 가진 의문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 는가?”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개혁신학은 그 올바른 교리에도 불구하고 미완성으로 끝 나고 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부족한 것’, ‘미완성’은 바로 ‘기도’이다. 물론 ‘기도’ 만이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보여야 할 반응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 중 매우 중요 한 한 요소인 것은 분명하다. 이 반응들 속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주권을 인정하고 고백하 는 것, 그의 은혜에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 그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낮추고 겸비하게 되 는 것, 그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 등이 포함되지만,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힘입는 것으로서의 ‘기도’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가 어 려울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입어 하나님께 순 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는 것이 비록 불완전하지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 보다도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하며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 의 사랑과 보호를 매순간 받게 된다. 물론 이런 것이 개혁교회 성도들과 신학자들에게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신약 교회 성도들과 비교할 때 그리고 한국 교회 성도들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관심과 강조와 실천이 적었다고 생각된다.
22) J. van Genderen-W. H. Velema, Beknopte Gereformeerde Dogmatiek, Kampen; J. H. Kok,1992.
23) J. A. Heyns, Dogmatiek, Pretoria: N. G. Kerkboekhandel Transvaal, 1978, 1984(3e dr.).
II. 침묵기도의 문제
그러면 서양 교회 기도의 특징 또는 문제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단지 종교개혁 이 후의 개혁교회나 루터파 교회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중세 가톨릭교회를 포함해서 서양 교회의 기도의 특징 또는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칼빈 이후 개혁 신학자들의 ‘책’에서 기도에 대해 얼마나 다루고 있는가 하는 것보다 훨씬 근원적인 문제이다. 이를 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양 교회 전반에 대한 거시적 통찰이 필요하며 서양 교회 자체를 객관화 해서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 점에 있어서는 동양 문화권에 속한 한국 교회의 성도에 게 유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단순히 문화적 차이가 올바른 이해에 이점을 주는 것은 아니며 성경에 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말씀 앞에서 동양 교회와 서 양 교회 모두를 객관화하고 자기 자신의 생각마저도 객관화할 수 있는 정직과 겸손이 필요하 다. 이에 필자는 서양 교회 기도의 중요한 특징 또는 문제점으로 침묵기도를 지적하고자 한 다. 그래서 서양 교회에 침묵기도가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 왜 그것이 강조되었는지에 대 해 살펴보고자 한다.
1. 개혁교회와 침묵기도
서양 교회 특히 개혁교회에서는 침묵기도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 말은 물론 서양 교회 가 항상 침묵기도만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서양 개혁교회는 대부분 소리 내어 기도하며 분명한 말로 기도한다. 예배 중에는 대개 목사가 대표로 기도한다. 가정에서는 식사 전과 후에 아버지 또는 어머니 또는 가족 중 한 명이 대표로 기도한다. 그러나 서양 교회에서는 침묵기 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에 필자가 참석한 화란기독개혁교회 소속의 한 교 회에서는 예배 시작 무렵에 다함께 침묵기도를 하는 순서가 있었다. 한 30초 정도 아무 소리 도 나지 않는 절대 정적(靜寂)의 시간이 있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도 예배를 시작할 때 ‘묵상기도’(Silent Prayer)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이 전통은 아마도 130여년 전에 서양 선교 사들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침묵기도’가 과연 옳은 것인가? 이것은 도대체 어디서 들어온 것일까? 화란 개혁교회에서는 - 아마 다른 서양 교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합심해서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찾아보 기 힘들다. 다함께 기도할 때는 침묵기도하는 것뿐이다. 서양 사람들은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특히 기도할 때는 조용하게 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20세기의 오순절 교회의 기도 는 이에 대한 예외적 현상으로 여겨지며, 전통적으로는 침묵기도 또는 조용한 기도를 당연하 게 여긴다.
2. 고대 사회의 침묵기도
그러면 침묵기도는 어디서 왔을까? 이에 대해 P. W. van der Horst가 “고대 사회의 침묵 기도”란 제목으로 발표한 논문이 있다.24) 이것은 침묵기도가 고대 사회에 어떻게 시행되었으 며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연구한 흥미로운 논문이다. 이 논문의 첫 문장은 “고대 사람 들은 소리 내어 기도했다”(The ancients said their prayers out loud)는 것이다.25) 고대 세계의 일반적인 관습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었다.26) 침묵기도(silent prayer)는 대부분, 적어도 기독교 이전의 헬라 로마 문헌에서는, 분명히 비정상적인 것 (anomaly)으로 여겨졌다.27)
물론 침묵으로 또는 소리 내어 기도할 수 없는 특별한 경우들이 있었다. 원수들이 듣지 못 하도록 하기 위한 경우, 초자연적 능력들이나 신들의 이름을 부르면 안 되는 경우(이름을 부 르면 진노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기도하는 내용에 대해 기도자가 부끄러움(당황)을 느끼는 경우, 간구의 내용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 또는 범죄적인 경우, 마술을 행하는 경우 등이 다.28) 마지막으로 말없이 기도해야 하는 전혀 새로운 근거가 생겨났는데, 그것은 신들의 본질 에 관한 개념의 변화와 관련된다. 특히 후기 플라톤주의자들의 사상 곧 순수히 비물질적이고 이성적인 신적 세계와 그리고 특히 부정적 신학(theologia negativa)에 대한 개념이 침묵기도 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유일한 합당한 수단으로 보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29) 예를 들 면, 신플라톤주의의 대표 철학자 중 하나인 주후 3세기의 플로티누스(Plotinus)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먼저 신 자신을 부르는데 큰 소리로써가 아니라 항상 우리의 능력 안에 있 는 그런 기도의 방식으로 부른다. 곧, 홀로이신 분에게 외로이 영혼으로 그를 향하여 갈망하 는 것이다.”(Ennead V 1, 6)30) 그의 제자인 포르피리(Porphyry)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합당한 방식으로 희생 제사를 드리자. 곧, 다른 능력들에게 다른 희생 제사를 드리자. 만물 위에 계신 신에게는, 어떤 현자(賢者)가 말했듯이, 감각의 세계에 속한 어떤 것으로도 제물을 드리 지도 말고 바치지도 말자. 왜냐하면 비물질적인 본성에 비추어 볼 때 즉각적으로 부정(不淨)하 지 않은 어떤 물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신에게는 목소리도 내적 언어도 합당하 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의 충동에 의해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수한 영혼과 신에 대한 순수한 개념들을 가지고 심오한 침묵으로 그를 경배해야 한다.”(De abstinentia II,34,2)31) 포르피리는 또 다른 곳에서 “현자(賢者)는 또한 침묵으로 신을 경배한다”(sofo;" ga;r ajnh;r kai; sigw'n qeo;n tima')/ 고 말하였다(Ad Marcellam 16).32) 그는 또 신들은 ‘말할 수 없는 부름’(ineffable callings, klhvsesin ajfqevgktoi")으로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33) 그리고 고 대 이집트의 지혜는 말하기를, 신들의 신은 “오직 침묵에 의해서만 경배된다”고 한다(cf. Iamblichus, De Mysteriis VIII, 3).34) 후기 신플라톤주의 저술가인 프로클루스(Proclus)는 우리의 온 육체적 감각을 침묵함으로써만 신들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35)
이런 것은 스토아 철학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신성(神性)이 온 우주에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도 스며든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에 기여하였다. 세네카(Seneca)의 다 음 말은 자주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손을 하늘을 향하여 올릴 필요가 없 다. 또는 우리가 우상의 귀에 가까이 가도록 - 마치 이렇게 해야만 우리 기도가 더 잘 응답될 수 있는 것처럼 - 성전 문지기에게 구걸할 필요가 없다. 신은 너희 가까이 있다. 그는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 안에 있다.”(Epistula XLI 1)36) 스토아 철학자들은, 너희 안에 있는 신과 교통하기 위해서는 말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37)
플라톤주의가 기독교의 기도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미친 것은 주후 200년경의 알렉산드리 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의 경우에 분명하다. 그는 그의 Stromateis란 책의 한 장(章) 전체를 기도에 관한 문제들에 할애하고 있는데, 그 중 몇몇 문장들을 인용하면 다음 과 같다.38) “하나님은 듣기 위해 인간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생 각하듯이 감각들 특히 청각과 시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없으면 하나님이 무엇 을 지각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VII 7,37,1) “목소리는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하고 공중에서 땅으로 떨어지지만, 성자의 생각은 공중과 온 세상에 나아간다.”(VII 7,37,3) “기도는, 좀 더 대담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입을 열지 않고 끊임없이 속삭이지만 우리는 침묵 가운데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속으로 부르짖는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의 내적 대화를 들 으시기 때문이다.”(VII 7,39,6)
24) P.W.van der Horst,“Silent Prayer in Antiquity," in Hellenism-Judaism-Christianity(Leuven: Peeters, 1998), 293-315.
25)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293.
26)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293.
27)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293f.
28)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294-302. 29)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02f.
30) 영어 번역과 헬라어 본문은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03f.에 있다.
31) 영어 번역과 헬라어 본문은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04에 있다.
32) 영어 번역과 헬라어 본문은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04에 있다. Van der
Horst는 여기서 sigw'n 앞의 kaiv를 번역하지 않았으나 필자는 ‘또한’으로 번역하여 추가하였다. 33) 영어 번역과 헬라어 본문은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04에 있다. 34) Cf.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04f.
35) Cf.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05.
36) Cf.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03.
37) Cf.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03.
38) 아래 인용문들은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11f.에서 취하여 번역하였다.
3. 중세 교회의 침묵기도
이러한 침묵기도 강조의 경향은 주후 5세기 초 존 카시안(John Cassian)의 경우에 분명하다. 그는 수도승은 완전한 침묵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Conlatio IX 35).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기도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 우리의 원수들(아마도 마귀들을 가리키는 듯함)이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는지 알지 못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기도는 오직 침묵으로 행해질 수 있다.39) 또다른 수도승인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Evagrius Ponticus)는 그의 『기도에 대하여』(De oratione)란 책에서, 기도는 모든 생각을 완전히 내쫓아 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침묵과 심지어 무의식적 기도를 찬양한다.40) 그리하여 중세 교회에서 침묵기도가 보편화되고 서양 교회 기도의 중요한 한 특성을 이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41)
서양 교회의 이러한 경향은 결국 참 신은 순수한 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더러운 육체로 나 아가기보다는 영혼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본 헬라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곧, 영 (靈)은 선하고 육(肉)은 악하다고 보는 영지주의(靈知主義)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중세 교회는 입으로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보다도, 그런 것이 없이 고요히 영혼이 하나님을 바라보 는 것을 최고의 경지로 본 것이다.42)
39) Cf.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14.
40) Cf.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14.
41) Cf.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15.
42) 침묵기도에 대해서는 또한 필자가 크리스챤 Q&A 2017년 10월 13일에 기고한 “침묵기도에 대하여”를 보라.
III. 성경에서의 기도
1. 구약에서의 기도
그러나 성경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주 위에 사람들이 있어서 부득이한 경우에 조용히 속으로 기도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왕 앞에 선 느헤미야가 그러하였으며(느 2:4), 또 한나처럼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곤란하거나 사적인 내용인 경우에도 속으로 조용히 기도하였다(삼상 1장). 그러나 한나는 아무 말도 안 한 것이 아니라 속으로 말하였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삼상 1:13). 즉, 한나는 침묵한 것이 아니라 속으로 기도한 것이다.43) 따라서 아무 말도 없는 절대 침묵과는 다르다.
시편에 보면 다윗은 종종 큰 소리로 기도했다고 나온다. 특별히 환난 때에는 부르짖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시편 18편에 보면, 3절에서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 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고 하였다. 여기서 ‘아뢰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에크라’(ar;q]a),인데 ‘부르다, 부르짖다’(call upon, cry)를 뜻하는 동사 ‘카라’(ar;q);의 미완료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과거에 한 번 부르짖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적으로 부르짖 는 것 곧 일상적 원리로서 부르짖는 기도에 대해 말한 것이다. 다윗은 과거에도 그러하였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러할 것인 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위기 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따라서 다윗이 말하는 ‘아뢰다’는 것은 침묵기도가 아니라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6절에 보면 이것이 더욱 분명하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여기서 ‘아뢰며’(ar;q]a),와 ‘부르짖었더니’(['WEv'a)}란 동사와 ‘부르짖음’(h[;w]v)'이란 명사가 우리의 주목을 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들의 원형은 ‘카라’(ar;q);와 ‘십바’([W"v)i인데, 후 자의 것은 사용되지 않은 칼(Qal)형 ‘샤바’([w"v); 의 피엘(Piʽel)형이다. 피엘형 ‘십바’의 뜻은 ‘도움을 청하다, 도움을 탄원하다’(to ask for aid, to implore help)이다.44) 명사형 ‘샤브아’의 뜻은 ‘부르짖음, 도움을 위해 부르짖음’(outcry, cry for help)이다.45) KJV에서는 여기의 동사 와 명사를 “cried”와 “cry”로 번역하였다. NIV와 ESV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다윗은 수많은 환난을 당하였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환난을 벗어나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 을 드린 것을 알 수 있다(49절). 즉, 다윗의 승리의 비결은 그의 ‘부르짖는 기도’에 있었다. 시 편 3:4에서도 다윗은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 다”고 말한다. 여기의 ‘부르짖다’는 말도 ‘카라’이다. 그 외에도 다윗이 부르짖어 기도했다는 말은 많이 있다(시 5:2; 16:2; 17:1; 27:7; 34:6; 40:1 등).
이것은 아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삽의 시’라고 표제가 붙어 있는 시편 50:15에서도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한다. 여기에 사용된 ‘부르다’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카라’(to cry)이다. 따라서 환난 날에는 하나님께 소리 내어 ‘부르는, 부르짖는’ 기도가 중요함을 알 수 있다.
43)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삼상 1:13의 “속으로 말하매”는 “그의 마음으로 말하매”이다. 따라서 가만히 침묵하고 있은 것이 아니라 속으로, 들리지 않게 기도한 것이다.
44) Gesenius, Hebrew-Chaldee Lexicon, s.v.
45) Gesenius, Hebrew-Chaldee Lexicon, s.v.
2. 예수님의 기도
이처럼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라 일반적인 경우에는 소리 내어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대개 ‘한적한 곳’에 가서 따로 기도 하셨는데(막 1:35; 눅 4:42; 5:16; 9:18 등), 이것은 방해 받지 않고 기도하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또한 예수께서 평소에 소리 내어 기도하셨다는 사실과 관련될 것이다.
특히 잡히시기 전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는 분명히 소리 내어 하신 기도였다. 소 리 내어 기도하셨기 때문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졸고 있던 세 제자들이 이 기도를 들었으며 그래서 복음서에 기록된 것이다(마 26:36-46; 막 14:32-42; 눅 22:39-46). 마가는 예수님이 이때 하나님을 부를 때 아람어로 ‘아바’(Abba)라고 불렀다는 것도 기록하고 있다.46) 그리고 누가는 이때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였다고 말하며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다고 한다(눅 22:43-44).
히브리 서에서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말한다(히 5:7).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전체에 대해 다 해당될 수도 있지만 특별히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예수님은 침묵기도로 하신 것이 아니라 또는 신음이나 탄식만 하신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서, 아마도 큰 소리로 간절히 기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도 소리 내어 기도하신 것이지 침묵기도가 아니다. 1 절에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말씀하셨다(ei\pen).”고 한다. 그리고 18:1에서 도 “이것들을 말씀하시고서”(tau'ta eijpwvn)라고 한다. 따라서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소리 내어 서 분명한 문장으로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다.
46) ‘아바 아버지’(!Abba oJ pathvr)는 아람어 ‘아바’는 곧 헬라어로 ‘아버지!’라는 뜻임을 말해 준다. 문법
적으로 ‘아바’와 ‘아버지’는 동격이며, 아람어 ‘압바’는 강세형으로 하나님을 부를 때 호격(呼格)으로 사용되었다(주후 1세기에는 히브리어의 ‘압비’를 대체하여 사용되었음). ‘호 파테르’(oJ pathvr)도 호격 ‘파테르’(pavter)을 대신하여 사용되었다. 개역개정판의 ‘아빠 아버지’는 아람어 Abba를 잘못 음역한 것이다. 바로 음역하자면 ‘압바’가 될 것이다(cf. 랍비). 뿐만 아니라 요아킴 예레미아스의 잘못된 주 장이 배후에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변종길, “아바 아버지인가? 아빠 아버지인가?”, 『선지동산』 63호 (천안: 고려신학대학원, 2012), 신약 난제 해설(5), 18-19를 참조하라.
3. 초대 교회의 기도
이것은 초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서 열흘 동안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하였다(행 1:12-14). 원문의 표현에 의하면 “이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다”(ou|toi pavnte" h\san proskarterou'nte" oJmoqumado;n th'/ proseuch')/ 가 된다. 이들의 기도는 유대교 회당에서와 마찬가지로 각자 동시에 소리 내어 기도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47) 유대인들의 기도는 대개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었으며 조용히 기 도하는 것은 후에 들어온 것이다.48) 샌더스의 연구에 의하면, 유대 회당에서의 기도는 미리 적어 놓은 기도문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주제들을 가지고 자유롭게 기도하였다고 한 다.49) 따라서 여기에 모인 120명쯤 되는 제자들도 정해진 기도문 없이 각자 자유롭게 그리고 소리 내어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소리 내어 기도했다는 것은 사도행전 4장의 기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사도들이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 갔다가 풀려났을 때 그들은 동료들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서기 관들의 말을 다 알렸다. 그러자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oJmoqumado;n h\ran fwnh;n pro;" to;n qeovn) 기도하였다(행 4:24). ‘소리를 높였다’는 것은 목소리를 높여, 크게 소리 내어서 기도했다는 뜻이다. 흐로쉐이드는 이렇게 설명한다. Ai[rein fwnhvn(목소리를 높이 다)는 것은 “잘 알려진 셈족어적 표현인데(창 39:15 등), 말이 입에서 바깥으로 나와서 공중으 로 또는 하늘로 간다는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50)
사도 바울도 유대인으로서 초대 교회의 관습을 따라 소리 내어 기도하였다. 바울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라고 하였다(롬 1:9; cf. 엡 1:16; 빌 1:4; 골 1:9; 살전 1:2; 딤후 1:3; 몬 1:4). 여기서 ‘너희를 말하다’(mneivan uJmw'n poiou'mai)란 표현은 ‘너희를 기억 하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언급하다’는 의미이다.51) 디모데에 대해서는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 하나님께 감사하고”라고 말한다(딤후 1:3). 여기 서 ‘너를 생각한다’(e[cw th;n peri; sou' mneivan)는 것은 직역하면 ‘너를 위한 기억/언급을 가진 다’인데, 이것은 기도 중에 디모데를 하나님께 말한다는 뜻이다. 즉, 바울은 디모데를 위해 쉬 지 않고 중보기도한다는 뜻이다. 빌레몬에 대해서도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이라고 한다(4절). 여기서 ‘너를 말한다’(mneivan sou poiouvmeno")는 것도 ‘너 를 기억한다, 너를 언급한다’는 뜻이다. 즉, 바울은 그의 기도 중에 빌레몬을 하나님 앞에 언급하였다는 말이다. 곧, 중보기도 중에 빌레몬을 언급하였다는 뜻이다. 이처럼 기도 중에 누구 를 생각하고 그의 이름을 하나님 앞에 언급한 것은 바울의 기도의 큰 특징이다.52)
바울은 또한 디모데에게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고 말한 다(딤전 2:1). 여기서 ‘도고(禱告)’(ejnteuvxei")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이에 서서 다른 사람 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곧 ‘중보기도’를 말한다(cf. 롬 8:26, 34; 히 7:25).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 성도들의 이름을 많이 기억하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롬 16장), 그가 평소에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롬 1:9).
빌립보서 4:6에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 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한다. 여기서 ‘아뢰라’(gnwrizevsqw)는 것은 ‘알려지게 하 라’(make known)는 뜻이다. 우리에게 있는 근심과 걱정, 염려거리를 마음속에 가지고 있지 말고 입을 열어 하나님께 알려 드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모르 시기 때문이 아니라(cf. 마 6:8, 32), 우리의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하 여야 한다는 뜻이다(cf. 벧전 5:7).53) 이런 뜻에서 ‘하나님께 알려 드리는 것’은 가만히 침묵하 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입을 열어 하나님께 아룀으로써 하는 것이다(cf. 시 32:5; 62:8).
사도 바울이 소리 내어 기도하였다는 것은 사도행전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빌립보에서 복 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을 때 바울과 실라는 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는데, 그때 “죄수들이 들었다”고 한다(행 16:25). 이것은 그들이 소리 내어 기도하고 찬송했기 때문에 가 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주후 1세기 유대인들과 초대교회의 관습을 따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리 내어 기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47) J. van Eck, Handelingen (Kampen: Kok, 2003), 44.
48) Van Eck, Handelingen, 44. Van Eck는 여기서 그 근거로 Van der Horst의 위 논문을 제시한다.
49)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7), 220f.
50) F. W. Grosheide, De handelingen der apostelen, I (Amsterdam: H. A. van Bottenburg, 1942), 142.
51) Cf. Zerwick-Grosvenor, Grammatical Analysis, 458 (ad Rom. 1:9).
52) C. Bouma, De brieven van den apostel Paulus aan Timotheus en Titus (Amsterdam: H. A. van Bottenburg, 1942), 241f. (딤후 1:3 주석 중): “그의 기도는 또한 항상 중보기도였다”(Zijn bidden is steeds ook voorbidden geweest).
53) P. T. O’Brien, The Epistle to the Philippians (NIGTC; Grand Rapids: Eerdmans, 1991), 493.
4. 결론
이처럼 초대 교회 성도들은 당시 유대인들과 예수님과 사도들의 기도 관습을 따라 소리 내 어 기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경우에 따라 큰 소리일 수도 있고 작은 소리일 수도 있 지만, 어쨌든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 초대 교회의 기도 관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침묵기도 는 신플라톤주의와 스토아 철학의 영향으로 후대에 들어온 이교적 관습이었다. 그 배후에는 영(靈)은 선하지만 육(肉)은 악하다는 이원론적 헬라 철학이 자리 잡고 있다. 부정한 입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낮고 천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도 창조하셨다(창 2:7). 사람이 타락했을 때 영혼만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함께 타락하였다(창 3:16-19; 롬 3:23; 5:12; 고 전 15:22; 갈 5:19-21; 롬 1:26-3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에도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라 영과 육을 함께 곧 전인(全人)을 구원해 주셨다(롬 8:1-2; 히 2:14-18; 살전 5:23). 이 말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당장 우리의 죄가 실제로 다 없어지고 천사처럼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법적으로 죄 사함을 받아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롬 3:24-25; 4:3-8). 그리고 우리는 신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롬 8:14-15; 요 1:12; 요일 3:1-2).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자신의 실제적 인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 정결한 자가 되었다(법적으로).
그의 영혼만 정결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다 정결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함을 받은 성도들의 찬송을 기뻐 받으신다(계 14:1-5; 15:3-4; 엡 5:19; 골 3:16).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 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말한다(13:15). 이와 마 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된 우리의 입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 으며 또 드려야 하는 것이다(롬 5:2; 엡 3:12; 히 4:14-16; 10:20).
IV. 몇 가지 오해
기도와 관련하여 서양의 개혁 교회와 한국 교회가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이 중 에서 중요한 세 가지를 여기서 살펴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기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는데 굳이 기도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것과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알 고 계시지만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와 고해야 하는 것이다. 칼빈은 위와 같이 주장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목적에 주의하지 않는다고 말 한다. 그것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원하고 얻고자 기 도하는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우리가 인정함으로써 그에게 합당한 의가 주어질 것을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드리는 기도의 유익은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온다.54)
그리고 나서 칼빈은 우리가 꾸준히 기도함으로 얻는 유익에 대해 다음 다섯 가지로 말한다. 1) 우리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을 찾고 사랑하고 섬기고자 하는 욕망으로 불타오르도록 하기 위해; 2) 하나님 앞에 알려지기에 부끄러운 어떤 욕구나 욕망도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3) 그가 주시는 은혜를 참된 감사로 받을 준비를 하도록 하기 위해; 4) 우리가 구 한 것을 받고 난 후에 우리가 더욱 그의 은혜를 사모하며 또한 우리의 기도로 얻은 축복을 더 욱 기뻐하도록 하기 위해; 5) 자기 백성을 도우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하도록 하 기 위해.55)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결코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지만 우리가 게 으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구하고 간구하도록 우리를 훈련시키신다. 따라서 하나님이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로 졸라대는 것은 헛되다고 하면서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 은 어리석은 일이다.56) 칼빈은 또한, 주께서 즐겨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들에 대해 기도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는 시시콜콜한 주장에 대해, 하나님의 관대하심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주어진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그의 기뻐하시는 바라고 답하였다.57)
예수님은 마태복음 6:8에서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어서 7:7-9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 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심으로써 기도할 것을 촉구하셨다. 마태복음 6:33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 라(zhtei'te).”는 말씀은 우리의 일상적인 것들을 구하지(aijtevw) 말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삶 의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 에게 가르치신 기도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마 6:11). 구약의 에스겔서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지만 그 래도 구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 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 36:36-37) 여기의 ‘구하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잇다레쉬’(vreD;a)i인데, ‘다라 쉬’(vr'D);의 니팔(Niphal) 미완료형이다. 니팔은 대개 ‘재귀태’ 또는 ‘수동태’로 번역된다. “내가 구하여진다, 내가 구함을 받을 것이다”는 말이다. KJV에서는 “I will be ... inquired of by the house of Israel. ...”라고 직역하고 있다. ESV에서는 “I will let the house of Israel ask me ...”라고 번역하고 있다. 화란 자유대학의 구약학 교수였던 알더르스(Aalders) 는 이것을 ‘허용형’(tolerativum)이라고 말한다.58) 곧, 구하도록 허용한다, 이스라엘 족속이 구하도록 (하나님이) 허용한다, 구하도록 한다, 구하게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기도하도록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내가 ...”). 이스라엘 백성이 기도해야 하는데, 그렇게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뜻대로 운행하시지만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명령하셨 다. 그리고 구하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따라서 기도는 의무이자 약속이며 또한 하 나님의 자녀의 특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지만, 그래도 우리 는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주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님의 은덕을 받는 통로이며 수단이다. 물론 우리는 기도를 복을 받는 마력적 수단으로 생 각하면 안 된다. 우리의 삶이 유리된, 그저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면 안 된다. 우리가 기 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참된 믿음으로 구해야 하며(약 5:15; 1:6; 마 21:21-22; 막 11:22-24 등),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바로 되어야 하며(약 5:16; 요 15:7; 요일 3:22; 대하 7:14; 욘 3:10 등),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한다(요 14:13-14; 15:16; 요일 5:14 등).
54) Calvin, Inst. III,xx,3.
55) Calvin, Inst. III,xx,3.
56) Calvin, Inst. III,xx,3.
57) Calvin, Inst. III,xx,3.
2. 골방 기도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고 있는 말씀 중 하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는 말씀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혼자서 조용히 기도하라 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키케로(Cicero) 주석가인 아더 스탠리 피스(Arthur Stanely Pease)는, 침묵기도가 기독교 안에서 많이 통용되게 된 것은 아마도 마태복음 6:6과 같은 본문의 영향일 것으로 보았다.59)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골방’60)에 들어가서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 들에게 보이려고(1, 5절),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얻으려고(2절) 기도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칭찬만 기대하며 기도한다면 사람이 모인 곳에서 기 도하더라도 ‘골방기도’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 후에 예루살렘 다락방에 다 같 이 모여서 기도하였다(행 1:12-14). 그 외에도 초대 교회 성도들은 개인기도뿐만 아니라 또한 모여서 기도하기를 힘썼다(행 2:42; 3:1; 4:24-31 등). 따라서 마태복음 6:6은 개인기도 또는 침묵기도에 대한 지지구절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판 데르 호르스트가 지적한 대로, 혼자 있는 장소로 물러가야 한다는 사실이 곧 그 사람의 기도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아야 한다 는 것을 시사한다. 곧, 그가 크게 소리 내어(spoken out loud) 기도했다는 것을 뜻한다.61)
58) G. Ch. Aalders, Ezechiël, II (Kampen: J. H. Kok, 1957), 192.
59) A. S. Pease (ed.), M. Tulli Ciceronis de divitatione libri duo (Darmstadt, 1963), 326 (Van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10에서 재인용).
60) ‘골방’(tamei'on)은 원래 귀중한 물건을 보관하는 장소 곧 ‘보관실’(storeroom)을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집의 내부에 있는 방 곧 ‘안 방’(inner room)을 가리킨다(Bauer, Lexicon, s.v.).
61) Van der Horst, “Silent Prayer in Antiquity,” 311.
3. 중언부언
또 하나 많이 오해하고 있는 말씀은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重言復言)하지 말라”고 하셨다(마 6:7). 어떤 사람은 이것을 우 리가 기도할 때에 같은 말을 반복하면 안 된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언부언하다’는 말의 원어 ‘밧따로게오’(battalogevw)는 의성어(擬聲語)로서 ‘말을 더듬는 사람의 발성 양식과 같은 모습으로 말하는 것’(to speak in a way that images the kind of speech pattern one who stammers)을 의미한다.62) 리델-스코트(Liddell-Scott)는 이 단어에 대해 ‘더듬거리 며 말하다, 같은 것을 계속 반복해서 말하다’(speak stammeringly, say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gain)로 설명한다.63) 이것은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들에게 하듯이 그들의 일 을 장황하게 늘어놓음으로써 신들에게서 은혜를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에서 나온 것이 다. 그들의 잘못은 그들의 긴 기도문에 마력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 데 있다.64) 따라서 이 것은 단지 기도를 길게 하거나 반복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신 것처럼 “이방인 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미신적으로, 주술적으로 기도한 것을 말한다. 곧,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한 것”이다(마 6:8). 그들은 우리의 모든 형편을 미리 다 알고 계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인간적인 노력으로 그들의 신에 게서 무엇을 얻어내려고 한 것이다.
따라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바로 믿고 그 하나님께 바르게 기도할 때에는 같은 내용을 반복 해서 말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같은 내용을 ‘세 번’ 반복해서 기도하셨다(마 26:39-44).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완전히 동일 한 말씀을 반복하신 것이 아니라 조금씩 변화가 있다. 처음에는 인성(人性)적 차원에서 자신의 소원을 솔직히 하나님께 아뢰는 것에 초점이 있었으나, 두 번째와 세 번째 기도에서는 더욱 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물론 첫 번째 기도에서도 “그러나 나의 뜻대 로 하지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있다. 그렇지만 크게 보면 ‘같은 말씀’을 세 번 기도하셨는데, 이것은 ‘중언부언’과는 다르다.
예수님은 천지만물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마 5:45-6:26, 28-30; 10:29; 요 19:11) 를 굳게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자기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 을 올리셨다(히 5:7; 눅 22:44). 이것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며 또한 우리 인간을 위한 교훈으로서 모범을 보여 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격적인 하나님 을 확실히 믿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같은 내용의 기도를 몇 번 반복하는 것은 잘못이 아 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예수님의 기도는 한 문장을 하고 나서 또 다시 같은 문장을 반복하 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의 기도를 드린 후에 좀 쉬었다가 두 번째 기도와 세 번째 기도를 하셨 는데, 그때 같은 내용의 기도를 하셨다는 것이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mivan w{ran)도 이 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40절)는 말씀을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의 한 번의 기도는 대략 한 시간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65) 따라서 한 번의 기도에 수많은 문장과 내용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런 한 시간 동안의 기도들이 모여서 한 번의 기도가 되었으니 이방인들이 주문 외 우듯이 하는 중언부언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자기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使者)’가 떠나가도록 세 번 기도하였다(고후 12:8). 여기서 ‘세 번’ 기도한 것은 중언부언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육체의 가시가 떠나도록 하나님께 세 번 기도했다는 말이다. 바울이 ‘한 번’ 기도한 것은 그냥 한 마 디 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 기도제목을 가지고 특별히 기도한 것을 가리킨다. 아마도 밤에 몇 시간 동안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그런 기도를 바울은 세 번이나 했는데, 주께서 말씀하시 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셨다(고후 12:9). 여기서 우리는 그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기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응답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66) 어쨌든 우리가 어떤 기도제목을 가지고 여러 번 기도하는 것은 잘못 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과 바울이 모범을 보인 기도임을 알 수 있다.
62)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s. v.
63) H. G. Liddell-R. Scott, A Greek-English Lexicon (Oxford: Clarendon Press, 1968), s. v. battologevw.
64) J. Keulers, Het evangelie volgens Mattheüs (Roermond en Maaseik: J. J. Romen & Zonen, 1950), 88.
65) 물론 오늘날처럼 정확한 1시간(= 60분)은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한 시간 전후로 생각할 수 있다. 여 기서 w{ra를 단순히 ‘때’(time)로 보기보다는 ‘시간’(時間, an hour)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W. Bauer도 이 구절의 w{ra에 대해 하루의 구분으로서의 ‘시간’(hour)로 설명하고 있다(Lexicon, s. v. 2 a). 예수님이 이런 ‘한 시간’의 기도를 세 번 하셨으니 중간의 휴식 시간을 포함해서 대충 서 너 시간 정도 흘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가룟 유다 일행이 예수님을 잡으러 온 시간을 밤 3, 4시경으 로 보면, 유월절 식사 후에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에 기도하신 시간과 맞아 떨어진다.
66) 신약 성경에서 ‘기도 응답과 불응답’에 대해 연구한 보리스 파스커(Boris Paschke) 사도 바울의 이 기도에 대해 응답되지 않은 기도로 본다. Cf. B. Paschke, “Gebed, gebedsverhoring en onverhoorde gebeden,” in A. Baum & R. van Houwelingen, Theologie van het Nieuwe Testament in twintig thema's (Utrecht: KokBoekencentrum, 2019), 345-64 (특히 357). 그러나 Oscar Cullmann은 사도 바울은 “응답되지 않음 가운데서 응답됨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곧, ‘높은 차원에서의 응답’이라고 말한다(위 논문 357에서 재인용). 물론 우리는 Paschke처럼 ‘응답되지 않았 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단순히 응답되지 않은 기도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의 기도가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응답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결국 ‘응답’을 어떻게 정의(定義)하느 냐에 달려 있다. 내가 기도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응답’으로 보면 응답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 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응답’으로 보면 응답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자는 인간 중심의 생각이고, 뒤의 것은 하나님의 중심의 생각이다.
V. 한국 교회의 기도
그러면 한국 교회는 기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실행해 왔는가?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단순히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든가, 어떻게 해야 응답을 받는 다든가, 또는 기도의 축복이 무엇인가 등에 대한 실제적 이슈들뿐만 아니라, 서양 교회의 기 도와 비교하여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고 특징이 있는지, 그리고 성경과 초대 교회의 기도와의 관계는 어떠한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이러한 연구는 한국 교회의 기도를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며, 나아가서 한국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이에 필자는 과거 100여년 동안 한국 교회의 기도의 특징 중 다음 세 가지를 간단히 지적하고 자 한다.
1. 새벽기도회
새벽기도회는 한국 교회의 특징이며 자랑이다. 또한 한국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며 한국 교 회 성도의 신앙과 생활의 능력이다. 이 새벽기도회는 1906년 가을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 선주 장로가 박치록 장로와 함께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7) 그러나 정확한 시작 연도는 알기 어려우며,68) 그 전에도 간헐적으로 새벽기도 모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69) 그러나 박 용규 교수가 The Korea Mission Field 1909년 11월호(p.182)에 실린 W. L. Swallen의 “A Story of Korean Prayer”에서 “길선주 목사가 장로 한 사람(박치록)과 같이 기도했다”고 하 는 말에 근거해서, “만약 길선주가 평양대부흥운동 이전에 이 일이 있었다면 그의 신분은 장 로이지 목사가 아니었다. 길선주의 새벽기도 사건은 1907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1909년 에 일어난 사건이다.”고 결론지은 것70)은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1907년 이전에 길선주의 신분 이 ‘장로’(또한 助師)이었다 할지라도 그 후의 직분을 따라 ‘목사’로 부르는 것은 흔히 있는 일 이기 때문이다. 장대현교회의 새벽기도가 1907년 평양대부흥의 상당히 중요한 동력(動力)이 되었기 때문에 바로 그 전 해에 새벽기도회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71)
물론 처음에는 길선주 장로가 박치록 장로와 함께 국가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을 걱 정하여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였다. 이에 여러 교인들이 호응하여 같이 기도하기 시작하 였는데, 얼마 후에는 수백 명의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길 장로는 당회의 정식 허 가를 얻어 공식적으로 새벽기도회를 시작하게 되었다.72) 물론 그 전에도 특별한 경우에 여기 저기서 간헐적으로 하는 새벽기도 모임이 있었지만, 정기적인 교회 모임으로 시작한 것은 1906년 가을의 평양 장대현교회라고 볼 수 있다.
길선주 장로와 박치록 장로는 처음에 새벽 4시에73) 모여 기도하였으나 얼마 가지 않아 교 회에서 공적으로 광고할 때에는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새벽 4시 반에 교회에 모이라고 하였 다.74) 그런데 이 새벽기도회는 율법적인 의무사항으로 부과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한 것이었다. 길진경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새벽기도회는 대중적으로 매일 계속한 것이 아니었고 개인의 실천은 그 개인 자유에 일임했고, 교회의 특수 사정이 있을 때 마다 그 필요에 의해 집단적으로 새벽기도회를 가졌다.”75) 이 새벽기도회는 1907년 1월 6일 부터 시작된 장대현교회 집회 시 대부흥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76) 그래서 방위량 선교사 는 이 사건을 ‘한국의 오순절’(The Korean Pentecost)이라고 불렀다.77) 길선주 목사는 부흥 회에 초청을 받으면 성령의 역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1910년 9월 18일 에 모인 제4회 노회에서 부노회장이면서 전도국장인 길선주 목사는 백만구령운동의 일환으로 “각 교회가 1주일 동안 새벽기도회를 할 일(10월 24일부터 향후 한 주일)”을 보고하였다.78)이를 통해 새벽기도회가 한국 교회 전체로 점차 보급되어 간 것을 알 수 있는데, 처음에는 이 것이 교회 부흥을 위한 특별기도의 한 방편으로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제5회 노회에 보고 된 바에 따르면 각 대리회는 기도 면에서 “가정 예배, 정일(定日) 기도, 특별 기도, 개인끼리 의 동맹 기도, 직원들끼리의 특별 기도, 금식 기도, 특히 남전라 대리회 보고에는 1월-4월 순 회 가정 예배 등을 가졌다.”고 한다.79)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새벽기도회는 한국 교회에 정착되었는데, 이처럼 기도 중심의 교회 공식 모임으로 정착한 것은 아마 한국 교회가 최초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고대 교회가 아 침 일찍 모임을 가진 것은 알려져 있으나,80) 그것이 한국 교회에서처럼 기도회 중심이었는지 는 알 수 없다. 중세 가톨릭교회에서는 의식적인 미사가 행해졌으며, 가톨릭의 수도원에서는 기도문을 외우는 정도의 기도회가 있을 따름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제네바 교회가 아침에 모 임을 가졌으나 아마도 설교 중심으로 생각된다. 존 웨슬리가 새벽 5시에 새벽기도회를 가졌는 데, 이것은 그가 동료들과 함께 가진 기도회였다. 찰스 피니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몇 시간 씩 기도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개인적으로 한 기도였다. 따라서 한국 교회에서처럼 전 교회적으로 모여서 기도 중심의 새벽기도회를 가진 것은 아마도 한국 교회가 사실상 최초라고 생각 된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하는 건전한 기도회였다. 평양 대 부흥이 일어난 것도 그 전부터 한국 교회가 가져온 사경회가 그 바탕이었다. 한국 교회는 처 음부터 성경을 사랑하였으며 성경을 배우기를 힘썼다. 초기 선교사들은 정기적으로 사경회를 가졌으며, 이를 위해 많이 준비하고 기도를 하였다. 길선주 목사도 매일 한 시간씩 성경을 읽 고 외웠으며, 성경 연구와 집필에 하루 세 시간씩 보내었다고 한다.81) 이처럼 한국 교회의 초기 대부흥은 기도와 말씀에 기초한 성경적인 것이었다.
어쨌든 새벽기도회는 한국 교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한국 교회 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신앙생활의 힘을 공급받게 되었다. 특히 과거 한국의 교역자들은 새벽기도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한상동 목사는 기도 중심 의 목회를 하였는데, 특히 새벽기도회 인도만큼은 부교역자에게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담 당하였다고 한다. 새벽기도회 인도를 마치고 나서도 오랫동안 기도하였는데, 교인들이 다 돌 아가고 난 후에도 해가 솟을 때까지 기도하였다고 한다.82) 그는 1931년 하동 진교에서 개척 교회를 할 때 산 기도와 철야 기도에 힘을 써서 교회가 크게 부흥하는 체험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목회 철학은 기도 중심의 목회가 되었다.83) 주남선 목사도 새벽기도에 힘썼는데, 그는 새벽 4시에 교회로 나가 아침 9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 그의 기도 자리는 항상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흘러 마루가 얼룩졌다고 한다.84)
67)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4), 169.
68) 길진경, 『靈溪 吉善宙』 (서울: 종로서적, 1980), 121, 183. 여기에서는 길선주 장로가 박치록 장로와
함께 새벽기도를 시작한 연도가 1905년인지 1906년인지 알 수 없다. 183쪽에 보면, “선생의 1922년 일기책을 보면 친필로 ‘1906년 동기 대사경회 때에 성신 강림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 나 여기의 “1906년 동기 대사경회”가 오늘날 서력으로 1907년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1906년을 의미 하는지 불분명하다. 1907년 1월도 음력으로는 1906년이며 설 이전이기 때문에 1906년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해가 바뀌면 관행상 지난해 연도를 그대로 표기하는 오류를 자주 범한다. 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출판국, 2002), 112에 보면, “새벽기도는 그 가 이미 1905년에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같은 책 193쪽에 보면, 길선주 목사의 장례식에서 한 조객의 조사를 인용하는데 거기에 “先生이 基督敎에 改宗하심에 朝鮮敎會의 基礎가 서고, 先生이 1906년에 새벽기도를 시작하심에 世界에 새벽 祈禱會가 始作되고, ...”라고 하였다(金麟瑞, 韓國敎會 殉敎史와 그 說敎集, pp.74-75).
69) Cf.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1784-1910)』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928f. 각주 19.
70) 위 책 같은 곳.
71) 김인서(金麟瑞)는 1936년 1월호 『신앙생활』 (평양 신앙생활사 발행), 28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생은 자기 혼자만 기도할 뿐 아니라 새벽기도회는 선생이 처음으로 창시하였다. 1906년 가을에 장대현교회 조사 시무할 때에 박치록 장로와 함께 새벽기도를 시작한 지 한 달 남짓에 크게 은혜됨으 로 이를 당회에 청한 지 수차만에 당회 결의로 전 교회가 새벽기도회를 계속할새 교인들이 새벽 종소 리만 들어도 울면서 예배당에 나왔다. 이리하여 시작한 새벽기도가 1907년 대부흥에 준비기도가 되었 던 것이니 전 세계에 새벽기도회는 선생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필자가 현대어로 고침. 여기서 선생 은 길선주 장로/목사를 말함) 또한 위 잡지 같은 호의 “고 영계 선생을 애도함”이란 글에서도(8쪽) 이렇게 말한다. “선생이 나시매 근세조선에 위자(偉者)가 있고 선생이 기독교에 개종하시매 조선교회 의 기초가 서고 선생이 1906년에 새벽기도를 시작하시매 세계에 새벽기도가 시작되고 선생이 1907년 에 성신(聖神)의 불을 들매 천하에 부흥이 일어나고 선생이 목사 되시매 조선에 노회가 조직되었고 선생이 묵시록을 만독(萬讀)하시매 무궁세계의 길이 만세 앞에 밝아지도다.” 따라서 그의 1906년 기록은 오기(誤記)라 보기 어렵다.
72)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사』, 160.
73) 정확하게는 새벽 4시 조금 지나서이다. Cf. W. L. Swallen, “A Story of Korean Prayer”, The
Korea Mission Field, V (Seoul, 15th Nov. 1909, No. 11), 182: “These two men with humble trustful faith, thus continued in prayer every morning at a little after four for about two months ...”,
74)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928-29.
75) 길진경, 『靈溪 吉善宙』, 121f.
76) 물론 당시에 ‘새벽기도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전부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특별한 기회에 ‘저
녁기도회’를 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1907년 1월 2일부터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평양 도사경회 때에 선교사들은 ‘정오기도회’를 하고 있었다. Cf. 옥성득, 『한반도 대부흥』 (서울: 홍성사, 2009), 231 (여기에 사경회 일정표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 전에 1906년 연말에 선교사들은 친목 회 대신에 곧 있을 사경회를 위해 ‘저녁기도회’를 가졌다. 1월 2일에 사경회가 시작되지 이 저녁기도 회는 정오기도회로 바뀌어서 계속 열리게 되었으며 평양 대부흥을 예비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Cf.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856.
77) W. N. Blair and B. F. Hunt, The Korean Pentecost and The Sufferings Which Followed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7), 71-74; W. 블래어 • B. 헌트, 『한국의 오순절과 그 후의 박해』, 김태곤 옮김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5), 85-89.
78) 길진경, 『靈溪 吉善宙』, 232f.
79) 길진경, 『靈溪 吉善宙』, 233f.
80)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 등의 아침 설교 원고가 전해 내려온다.
81) 길진경, 『靈溪 吉善宙』, 181.
82) 심군식 외 5인 공저, 『한상동 목사의 삶과 신학』 (부산: 고신대학교 출판부, 2006), 34f. 83) 앞의 책, 34.
84) 심군식, 『해와 같이 빛나리. 주남선 목사 전기』 (서울: 성광문화사, 1976), 420.
2. 통성기도
한국 교회 기도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소리 내어 기도하는 통성기도라는 사실이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겠지만 서양 교회의 기도를 생각하면 이것은 결코 당연하 지 않다. 한국 교회에서 통성기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통성기도는 평양대 부흥운동 이전에는 보기 힘든 매우 낯선 기도 방식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06년 가을에 한국을 방문한 하워드 애그뉴 존슨 박사에 의해서였다. 그는 1906년 웨일즈의 부흥 소식을 전하면서 “웨일스의 부흥회에서는 공적 기도를 인도하는 인도자만 기도하지 않 고, 각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은 채 큰 소리로 통성기도를 하였다.”고 알려 주었 다.85) 따라서 통성기도는 1907년 이전에 먼저 웨일즈에서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초기 한 국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도 통성기도에 대해 어느 정도는 열려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1907년 1월 14일 월요일 저녁에 설교 후 기도회를 인도한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가 교 인들 가운데 누구든지 대표로 기도하라고 했는데, 그때 기도하려고 나서는 사람이 너무 많아 다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도록 했기 때문이다.86) 그 다음날 화요일 저녁에는 길선주 장로가 설 교했는데 이때 더욱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회개와 통성기도가 있었다. 박용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통성기도는 존스톤이 1906년 가을에 한국에 와서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에게 웨일즈 부흥운동이 통성기도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준 후 시작되었고, 통성기도가 한국 교회에 구체적으로 적용된 것은 평양 대부흥 훈동 때이다.”87) 1907년의 평양 대부흥 때에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말미암아 자기의 죄를 공중 앞에 고백하였으며 그때 참석자들은 자기의 죄를 뉘우치며 슬퍼하는 통성기도를 하였다. 여기서 ‘통성(痛聲) 기도’라는 말이 나왔으며, 이 것은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었고 생활의 변화가 있는 참된 회개였다.88) 이런 통성기도는 한 국 교회의 하나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89)
이와 함께 평양 대부흥 기간 동안에 또한 철야기도가 시작되었다. 저녁 집회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으므로 멀리서 온 교인들이 집에 돌아가지 않고 교회에 남아 철야하면서 기도하고, 다음날 새벽기도회에 참석함으로 철야기도라는 새로운 형태의 기도가 시작된 것이다.90) 이러 한 새벽기도회와 철야기도와 통성기도와 같은 한국 교회의 특징적 모습들은 “기독교가 더 이 상 서양의 종교가 아닌 것으로 묘사될 수 있었다.”고 한다.91)
어쨌든 한국 교회의 기도는 소리 내어 하는 통성기도가 주를 이루게 되었으며 새벽기도회와 함께 한국 교회 경건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이것은 성경적 기도의 회복이며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이 일에는 당시의 헌신된 선교사들과 소박한 한국 사람들이 사용되었지 만 그 중심인물은 길선주 목사(당시에는 장로이며 조사)였다. 그는 1907년의 대부흥 이전에 박치록 장로와 함께 개인적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고 이어서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하였는 데, 이 모든 것은 성령의 감동과 인도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이에는 또한 당시 선교사들의 간절한 기도와 노고가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기도할 때 대개 조그만 소리로 대화하듯이 기도하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큰 소리로 기도하기도 한다. 이럴 때에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있을 경우에는 그들에게 방해를 주 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가 기도 소리를 절제하고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체질적으로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기도회 시간에는 아예 소리를 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되면 오래 기도하지 못하고 조금 있다가 자리를 뜨게 된다. 그런 교회는 냉랭하게 되고 은혜가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오늘날 함께 기도할 때 다른 사람에게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음악을 틀어 주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은 아마도 1990년대에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를 통해 들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혹은 그 전에 이미 한국 교회에서 시도한 일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기도회 시 음악 사용 은 통성기도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것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이때 사용하 는 음악이 기도에 방해가 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실제 경험에 의 하면 새벽기도회 시에 음악 소리가 조금 클수록 참석자들이 편하게 기도하고 더 열심히, 더 오랫동안 기도한다는 사실이다.
85)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 2판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7), 234.
86) 김영재, 『되돌아보는 한국 기독교』 (수원: 합신대학원출판부, 2008), 98.
87)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865 각주 30. 여기의 ‘존스톤’은 ‘존슨’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김인수 교수의 책에 그의 이름은 H. A. Johnson로 되어 있다(『韓國基督敎會史』, 168). 김영재 교수의 책에 는 Rev. Howard Agnew Johnson이라고 되어 있다. 김영재, 『한국 교회사』, 개정3판 (수원: 합동신 학대학원 출판부, 2009), 145. 앞에서 소개한 The Korean Pentecost and The Sufferings Which Followed, 68에는 Dr Howard Agnew Johnson이라고 되어 있다.
88) 이에 대해 김양선(金良善)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 때의 회개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하는 것 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고 남에게 손해 끼친 것을 모두 보상해 주어 회개를 행동으로 표시하였다. 이러한 회개운동은 뒤에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교회에 퍼져 신도들과 선교사들은 평화•사랑•기쁨•능 력의 사람으로 변하였다. 길선주 목사의 증언과 같이 만일 이러한 부흥이 없었더라면 한국 교회는 양 적 팽창은 있었어도 질적 향상은 없었을 것이다.”(『한국기독교사연구』, 서울: 기독교문사, 1971, 87f.) 곽안전 박사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개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 라, 남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들은 그 손해를 배상함으로써 피차 화목을 이루게 되었다. 사람들은 각 기 성 안의 자기가 일찌기 손해를 끼친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상처를 내준 사람들에게는 사과 를 하고 과거에 남의 재물이나 돈을 훔친 사람들은 그것을 갚아 주었는데 그것은 비단 교인들에게뿐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다. 그렇게 되니 온 성 안은 소문이 자자하였다. 이 때에 어느 중 국 상인은 어떤 교인이 과거에 옳지 못하게 받은 돈이라고 하면서 많은 돈을 갖다 주는 것을 받으면 서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놀랬다는 말도 있다.”(『한국교회사』, 개정증보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3, 128)
89) 김인수, 『韓國基督敎會史』, 177f.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부흥운동은 이렇게 통성기도라는 한국 특유 의 기도방법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어 새벽기도와 함께 부흥운동의 결과로 남아 오늘까지 한국 교회 안에서 통용되는 주요 기도방식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178)
90) 김인수, 『韓國基督敎會史』, 178.
91) K. M. Wells, New God, New Nation, Protestants and Self-Reconstruction Nationalism in Korea, 1896-1937 (Hononulu: University of Hawaii, 1990), 37 (김인수, 『韓國基督敎會史』, 178 에서 재인용).
3. 즉흥기도
한국 교회의 기도의 주요한 특징 하나를 더 지적하자면 기도문에 의한 기도가 아니라 즉흥 기도란 점이다. 성경에서 구약과 신약의 기도는 기도문에 의하지 않고 자유롭게 하는 즉흥기도였다. 예수님 당시 유대 회당에서의 기도도 정해진 의식문이 없이 즉석으로 하는 기도였다 는 것은 이미 말하였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도 즉흥기도였고 사도 바울의 기도도 즉흥 기도였다. 한국 교회의 기도도 대부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유롭게 하는 즉흥기도였다.
물론 공예배 시간에 대표기도 할 때 문장을 적어서 할 수도 있다. 그럴 때의 장점은 중언부 언하지 않고 필요한 요점을 깔끔하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점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라기보다도 인간적인 독백처럼 들릴 수 있으며 간절성과 생동감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단점을 피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기도 제목을 적은 메모 용지를 사용하는 방법이 다. 또는 기도문을 적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라는 점을 생각해 서 그런 기도의 언어로 적을 것과 또 적은 후에 많이 읽어서 거의 외워서 하는 것이다.
1625년에 나온 Synopsis에서는 사람이 공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기도할 때 기도의식문 (gebedsformulieren)을 사용하는 것이 허용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해 Synopsis는 그것은 단지 허용될 뿐만 아니라 또한 매우 유익하다고 답한다.92) 그러면서 구약 에서 제사장들의 축복문(민 6:24)과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기도(마 27:46)를 예로 든다. 그러나 제사장들의 축복문을 기도의식문의 하나로 보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신 것은 물론 시편 22:1의 인용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 씀을 기도 시에 사용한 것이고 기도의식문을 따라 기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Synopsis 는 또 주기도를 예로 드는데, 물론 주기도가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의 모범인 것은 사실이 지만 우리가 항상 이 기도문을 따라 기도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기도하라고 하셨지 ‘이것을’ 기도하라고 하시지는 않으셨다.93) 따라서 우리는 주기도문을 때로는 그대로 사용하지만 ‘항상’ 이것대로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 이 그렇게 기도하지 아니하셨고 시간과 장소와 형편에 따라 그에 맞는 기도를 자유롭게 하셨 다(요 17장; 12:27-28; 마 11:25-30; 26:39, 42; 눅 23:34, 46). 이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이 고 초대 예루살렘 교회도 마찬가지였다(행 4:24-30; 7:60; 엡 1:17-19; 빌 1:9-11; 살전 3:11-13; 요삼 2절 등).
오늘날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찬송가 책 뒤에 보면 특별한 경우에 드리는 기도문이 더러 제 시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의식문을 따라 기도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주일예배 시에는 대개 목사가 종이에 적어 와서 기도하고 또는 즉석에서 자유롭게 기도하는 경우 도 있다. 그러나 일반 회중이 예배 중에 스스로 기도 드리는 기회가 없다는 점이 아쉽다. 성도들은 주로 가정에서 식탁기도와 개인기도를 하며 교회 예배 시에는 잠깐 침묵기도 시간만 주어질 따름이다.
92) Doekes, “Het gebed,” 60.
93) 이에 대해서는 변종길, 『산상보훈』 (대구: 말씀사, 2011), 216을 보라.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서양 교회에서의 기도와 한국 교회에서의 기도를 성경의 기도와의 관점에서 비교하면서 살펴보았다.
서양 교회의 기도는 개혁 교회를 포함하여 조용히 기도하는 전통이 있으며 때로는 침묵기도를 하며 또 그것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성경에 나타난 기도의 모습이 아니며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도 아니다. 그런 것은 다분히 신플라톤주의와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육체를 부정하게 여기는 영지주의의 영향 을 받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칼빈 이후의 개혁 교회는 물론 많은 부분에서 성경적으로 돌아 오고 기도를 강조하기는 했지만, 실제 기도생활에서는 이러한 서양 철학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 대표적인 하나의 예가 침묵기도이다.
이에 비해 한국 교회는 1907년의 대부흥을 거치면서 성경적 기도의 모습을 회복하게 되었다. 새벽기도회와 통성기도와 철야기도와 즉흥기도 등은 한국 교회의 특징적 모습을 이루게 되었으며, 초대 교회의 기도생활을 회복한 것이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서양 교회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고 부분적으로, 간헐적으로 조금 있기는 하였으나 한국 교회에서처럼 교회적으로, 집단적으로, 지속적으로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1907년 평양 대부흥은 한국 교회의 초석을 놓은 사건일 뿐만 아니라 또한 동양 교회의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1907년 이전에도 한국의 여기저기서 성령의 임재와 부흥의 역사가 있었다.94)
이런 성령의 역사가 1907년 1월 평양에서 강력하게 분출하여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엇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 많은 세월이 지나면 세계 교회사는 1907년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서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1907년 평양 대부흥은 근 2천년 가까이 잊혀져 왔던 성경 적 경건과 초대 교회의 신앙을 회복한 사건이요 동양 교회의 출발을 온 세상에 알리는 사건이 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한국 교회의 오순절일 뿐만 아니라 또한 동양 교회의 오순절이라 고도 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과 성경의 진리를 알지 못하고 그저 서양 교회를 좇고 개혁 교회를 그대로 흉내 내려고 하는 것은 한국 교회를 해치는 것이다. 그 중의 한 예가 침묵기도를 가장 경건한 기도인 것처럼 생각하고 기도 시간에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 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소리 내지 못하게 막고 있다. 그리하여 자기도 기도하 지 아니하고 기도하는 다른 사람도 막고 있다.
물론 소리만 크게 낸다고 올바른 기도는 아니다. 참된 기도는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을 확실 히 믿고(마 21:21-22; 막 11:23; 약 1:6-8; 5:15 등),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며(마 6:14; 18:25; 막 11:25),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의롭게 살며(약 5:16; 요 15:7; 잠 15:29), 하나님 의 뜻에 맞게(요일 5:14; 요 14:14), 낙심하지 말고 끈질기게(눅 18:1; 11:8) 기도해야 한다. 대개는 대화하듯이 조용한 소리로 기도하지만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는 모세와 다윗처럼 하 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시 50:15; 18:3, 6; 출 15:25; 17:14; 행 4:24 등).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입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다. 헬라 철학과 영지주의에서는 인 간의 육체를 부정(不淨)하게 보고서 우리의 입으로 기도하는 것을 부적절하게 보지만,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의 입은 하나님의 지으신 것이며 원래는 선한 것이다. 아담이 죄를 지어 타락했을 때에는 육체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함께 전 인간이 타락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를 죄에서 건져 주시고 의롭다고 해 주 셨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실제로는’ 허물과 죄가 많지만 ‘법적으로’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고 ‘신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그래서 우리의 입으로 드리는 찬송과 기도를 하나 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고 깨끗케 하신 입으로 하나님께 기 도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입술의 열매’이며(히 13:15), 마땅히 해야 할 성도의 ‘의무’이며 ‘특권’인 것이다(마 7:7-11).
94) 1907년 이전의 한국 교회 부흥에 대해서는 박용규, 『평양 대부흥 운동』, 148-218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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