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산 금봉암 마당에 선 고우스님. “불교에는 경쟁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다 함께 ‘무한 향상’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며 “나와 너, 좋고 나쁨, 있고 없음 같은 분별심과 이기심만 버리면 자신과 주변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금봉암(봉화)/박재
-‘이기심 버리면 ‘날마다 좋은날’- 태백·소백산 ‘양백지간’의 경북 봉화 문수산. 지역 특산인 금봉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밭길을 지나니 거기, 금봉암이 있었다. 고우(古愚·70) 스님이 반갑게 맞아줬다. 스님이 명당터라고 자랑하는 암자는 첩첩 준령 문수산 중턱에 시원하게 탁 트인 전망을 갖췄다. 스님은 법당 불사 마무리 작업을 지휘하느라 바쁘게 공사현장을 오가고 있었다. 문수산 가을은 깊고 사과밭을 지나온 바람은 달디 달았다.
# 무한경쟁 하지 말고 무한향상하라 올해 초 스님이 이끈 중국 선종사찰순례에 동행했다. 당시 스님은 “변함없는 지혜(반야·般若)는 마치 세탁기와 같아서 이기심, 갈등, 대립, 투쟁, 집착을 세탁해 구름이 걷혀 저절로 해가 비치는 것처럼 마음의 평화를 준다”며 선(禪)을 세탁기에 비유해 설명했다. 그 세탁기 얘기를 다시 꺼냈다.
“세탁기는 무아(無我)이자 공(空)의 세계죠. 이 세탁기에만 들어가면 나와 너, 좋고 나쁨, 있고 없음 같은 분별심이 깨끗이 세탁됩니다. 세탁된 마음에서 서로서로 인정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가 생깁니다.”
고우스님은 선승의 서릿발 같은 위엄 대신 나직나직 해서 듣기 좋은 목소리와 푸근한 미소를 지녔다. 온화한 얼굴에 성성하게 꿈틀거리는 굵고 흰 눈썹이 인상적이었다. 스님이 손수 사과를 깎고 차를 따랐다. 스님은 불교를 일상의 언어로 쉽고 명쾌하게 설명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렵고 추상적인 선불교는 그에게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언어가 된다.
법당 불사로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의 암자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스님은 “불교에는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며 한 가지 예를 들었다.
몇년 전 영주에서 식당을 하는 보살이 스님을 찾아와 하소연했다고 한다. “장사가 너무 안됩니다.” 스님은 “손님이 오면 돈으로 보지 말고 은인이라고 생각하라”고 권했다. 지금 그 식당은 종업원 열 명이 일할 정도로 성업중이다.
“이기심으로 식당을 하면 손님이 돈으로 보일 수 있어요. 무아에서 장사를 하면 손님이 내 생활에 보탬을 주는 ‘은인’으로 보입니다.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왔는데 얼마나 잘 해주겠습니까.”
스님은 “불교는 바른 견해에 눈뜨는 것(정견·正見)”이라며 “식당 주인처럼 불교를 생활화하고 사회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지어져(연기·緣起) 그 가치와 의미를 드러낸다”며 “불교 공부는 시각을 바꾸는 ‘생각의 혁명’”이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가 부처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미 완벽한 존재라는 거죠. 그걸 모르니까 좀스런 인생을 사는 겁니다. 위대한 존재답게 위대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선입니다. 부처님이 발견한 ‘본질’은 연기, 공, 무아, 중도(中道)입니다. 말만 다를 뿐 모두 같은 맥락입니다. 불교는 그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겁니다.”
스님은 “내가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기만 해도 세상살이의 세탁기를 갖는 것”이라며 “‘나’에 집착하는 이기심을 버리고 양변(극단)을 여읜 중도로서 조화롭게 판단하고 행동하면 삶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수행을 해서 깨닫지 못하더라도 이해만 하면 생활이 달라집니다. 시각만 바꿔 어떤 고정관념과 주관, 객관을 부수기만 하면 따로 수행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날의 사회생활, 직장생활에서는 경쟁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기심을 버리면 무한경쟁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 수 있어요. 너와 나를 가르지 않는 거지요. 그것을 나는 ‘무한향상’이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면 귀천(貴賤), 고하(高下)도 없는 겁니다. 여기에 상대를 위하는 마음이 쌓이면 지혜가 생기고 인격이 형성됩니다. 그것이 경쟁을 벗어나 무한향상 하는 길입니다.”
스님은 ‘무한향상’을 거듭 강조했다. 스님은 “시각을 바꾸면 생활 속에서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도 단순 명쾌하게 해결해 자신과 주변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며 “화나고 짜증나는 일이 줄어들어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런 마음을 계속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그러니까 시각을 확고하게 바꿔야지요. 가정과 직장은 훌륭한 선방입니다. 똥 푸는 일을 수행이라고 여기면 수행입니다. 생활 속에서 나를 앞세우지 않으면 유연해집니다. 분노와 미움, 투쟁심 대신 자비와 연민의 마음이 됩니다.”
-결국은 자기 희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불교는 자기 희생이 아니라 자기 사랑입니다. 남을 돕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겁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은 자기 학대지요.”
스님은 부처님 당시의 수달다 장자 이야기를 꺼냈다. 부처님은 부자이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많은 보시를 하는 수달다에게 “너는 더 가져도 좋다”고 했다. 스님은 “이기심이 없으면 많이 가져도 무소유”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좋은 법을 공부하는 스님들이 왜 시끄럽게 다툽니까.
“일부 스님들이 승복을 입고도 세속의 가치를 추구하니 문제가 생깁니다. 수행과 생활이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진정한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없지요.”
# ‘나’가 없으니 갈등도 없다
고우 스님은 젊은 날 폐결핵에 걸려 요양차 산사를 찾았다가 그 길로 출가했다.
스님은 평생을 선방에서 참선수행으로 일관했다. 현재 조계종 선승들의 특별선원인 경북 문경 봉암사 선원을 재건하는 데도 스님의 공이 컸다. 1968년 10여명의 도반과 함께 성철스님 등이 시작한 ‘봉암사 결사’를 마무리 하기로 결의하고 봉암사에 들어갔다. 스님은 그후 각화사 태백선원장을 맡아 수좌들을 지도하면서 17년 동안 각화사 암자인 서암에 머물렀다. 토굴 같은 암자에서 홀로 지내며 손수 밥하고 빨래하는 생활을 했다. 2년 전 금봉암으로 수행처를 옮겼다. 지금도 시봉하는 상좌는 따로 없다.
-요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이 갈등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기심 때문에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대통령이란 크게 하나로 통합해서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라도 다 안고 갈 수 있는 포용력이 있어야 합니다.”
-정치인들도 자주 중도를 말하는데요.
“정치인들은 황새 다리 잘라 뱁새다리에 붙이는 식으로 중도를 말합니다. 긴 것은 자르고 ●은 것은 늘이는 절충은 중도가 아닙니다. 중도는 양변과 중간까지도 모두 초월하는 겁니다. 진정한 중도에는 갈등이 없습니다.”
-불교가 갈등 해결의 대안이 될 수 있습니까.
“다른 종교는 모두 창조주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불교는 연기설(緣起說)을 말하기 때문에 창조주가 모든 존재에 보편돼 있습니다. 그 본질을 이해하면 인종갈등, 이데올로기갈등, 민족갈등, 종교갈등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불교는 세상의 갈등과 대립을 치유하는 훌륭한 처방전입니다.”
-틱낫한이나 달라이라마 같은 스님이 세계적으로 불교 붐을 일으켰지요.
“그들은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좋은 과보를 받는다’는 단순한 인과법문을 합니다.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일입니다. 그런 가르침은 독풀을 돌로 누지르는(누르는) 것과 같아서 뿌리를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아집을 키웁니다. 본질과 가치를 이해하고 매순간 좋은 생을 살아야 근본이 변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선불교는 훨씬 심오하고 근본적입니다.”
-그래도 신도들은 전생의 업과 윤회를 믿는데요.
“업은 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죄의식이지요. 본질을 이해하는 순간 업은 없어지고 모든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죠. 업은 실재가 아니라 허구이자 착각의 세계입니다. 다른 종교는 원죄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불교는 업도 없고 죄도 없는 것입니다.”
스님은 “한국 선불교의 특징을 살린 국제적인 ‘선센터’를 만들어 참선을 지도하면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한국 간화선(화두를 들고 하는 참선)을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우스님은 요즘 간화선 강의에 열심이다. 조계종 중앙신도회 등을 통해 선의 교과서격인 ‘선요’ ‘서장’ ‘금강경’ 등을 지도하고 있다. 최근들어 간화선이 일반인들에게까지 바람을 일으킨데는 그의 역할이 컸다. 일반 신도 뿐 아니라 스님들에게도 그의 강의 녹음테이프는 인기가 높다. 간화선 수행법을 정리한 ‘조계종 수행의 길-간화선’ 편찬도 스님이 주도했다.
스님은 불교의 ‘공’과 ‘연기’가 현대 물리학에서도 입증돼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세계 물리학자들이 소립자인 힉스가 어떤 에너지를 만나 물질화한다는 가설을 세워놓고 그것을 찾기 위해 연구중”이라며 “이 소립자가 발견되면 존재의 형상 뿐 아니라 본질도 있다는 불교의 공 개념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스님과 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날이 저물고, 다시 날이 밝았다. 스님은 아침 공양 후 차를 따르며 한마디 더 당부했다. “정(正)과 사(邪)를 구별하면 이기심을 놓을 수 있어요. 사는 유무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집착과 이기심을 버리면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 될 것입니다.” 금봉암 외길을 돌아나오는 동안 ‘구름이 걷히니 태양이 절로 나왔다’(雲開日出). 문수산 숲에 단풍들고, 산새 짖고, 바람 지나가는 가을 법문이 가득했다.
▲ 고우스님은?
1937년 경북 고령에서 났다. 25살 때인 1961년 김천 청암사 수도암 법희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관응스님으로부터 ‘기신론’을, 고봉스님으로부터 ‘금강경’을, 혼해스님으로부터 ‘원각경’을 배웠다. 봉암사 묘관음사 축서사 금영사 용주사 각화사 등 선원에서 정진했다. 1968년 문경 봉암사 선원을 재건해 종립특별선원의 기틀을 다졌다. 1980년 10·27법난 수습을 위해 수좌회의 결의로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맡았다. 전국선원수좌회 공동 대표, 각화사 태백선원장 등을 지냈다. 현재 조계종 원로의원.
***그런 수행을 합시다***
- 고우스님 초청법회 /2005년 8월
지난 21일 쌍문동의 공생선원(02-900-2248)에서는 고우스님의
법회가 열렸다. 주제는 ‘재가자의 참선수행법’.
현재 한국 참선계의 정신적인 지주로 통하는 고우 스님은
수행에 대한 사부대중의 갈증에 명명백백한 답변을 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해박한 지식과 체험에서 우러나온 명쾌한
설법은 재가자들의 수행 길잡이가 된다. 따라서 이번 호에는
고우스님의 설법을 통해 한국정통 불교수행의 대중화에 대한
지침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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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가 한국불교의 전통입니다.
그렇다면 선불교는 어떤 가르침이며, 우리 삶과 어떤 연관이 있으며
또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일까요.
훌륭한 법당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불교 정신을 함양하고
보급도 중요합니다. 또 그 가르침이 일상생활에서 도움도 줘야 하구요.
불교의 생활화는 참 중요합니다.
틈만 나면 불자님들에게 이 점을 강조합니다. 내가 아는 것은
별로 없어도 조금이나마 도움 드릴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야기가 부족해도 듣는 분이 잘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선은 뭐냐. 사실 이 질문은 우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선입니다. 우리 자신이 선이다 그 말이예요.
그러니 선을 말하겠다고, 또 듣겠다고 이러는 건 사실
고운 살결을 긁어 부스럼을 내는 거 같다 이런 이야깁니다.
무슨 이야기냐.
내가 중국 선종 사찰만 대략 70-80여 곳을 배낭여행으로
돌아보았습니다. 왠만한 선사 유적지 다 돌아본 셈이지요.
중국은 문화혁명으로 불교가 완전 실종됐습니다.
일본불교는 선불교를 사량분별해 이치나 이론을 따져 말합니다.
선이 학설로 전락한 게지요. 불교 원형이 전통으로 남아 있는 건
한국 뿐이라는 말입니다. 우린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선불교가 도대체 뭐냐.
한마디로 말해 우리 개개인이 선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부처님이다는 말입니다.
부처님도 깨닫기 전에는 뭔가 깨달을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깨닫고 보니 깨달을게 따로 있는게 아니라 이미 모든게
다 완성돼 있더라는 겁니다. 그건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다 위대한 존재인데 그걸 모르고 하잘것없는
인생을 살아간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존재니 위대한 삶을 살자. 이게 선입니다.
왜 우리는 우리가 위대하다는 걸 못보느냐. 왜 하잘것없는 삶 사는가.
사실 직업별로는 정치인 중에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권력 그것 잡으려고 야단입니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소위 지도자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습니다. 결국 우리 사회에는 제 노릇을 제대로 하는 어른이
없다 이겁니다. 어른이 없기는 종교계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보기엔 이런 악순환이 개선될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이걸 고쳐나가지 않으면 이 사회가 건전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이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는 선의 역할이나 사명감을
무척 필요로 하고 있으나 사실 승가가 제 구실을 못하고 있습니다.
나 스스로도 반성할 문젭니다. 선을 함께 이야기하며 우리가 얼마나
하찮게 살고 있는가를 뼈저리게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이 원래 생긴 존재대로만 살면 평화롭고 자유로운 좋은 사회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위대한 인간이 왜 하찮게 사느냐.
정치가 엉망이라서, 경제가 흔들려서, 사회가 불안해서 못사는 게
아닙니다. 그건 지엽적인 겁니다. 근본 이유는 우리가 우리
존재 원리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에 있습니다. 존재 원리을 아는 것,
이것만 풀리면 다 풀립니다.
이걸 풀어낸 불교는 그래서 도깨비 방망이보다 더 신통하고 위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 존재 원리를, 자신이 위대하다는 걸 못보나.
우리가 겉만 보기에 그렇습니다. 자기도 타인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합니다. 요즘 애들이 말하는 얼짱 몸짱이 바로 겉만 본 것입니다.
이 겉모습을 '나'라 생각하고 집착한다 이런 말입니다.
겉모습에만 집착하면 이기심이 일어납니다.
부모자식 부부 사이도 이해관계로만 바라보게 됩니다.
요새 이혼율이 높아지는 것도 다 이런 탓입니다.
겉만 보고 '나'라 하는 것 말입니다. 겉만 보면 남과 자꾸 비교하게
됩니다. 앞집 차는 그랜저인데 우리는 왜 티코냐.
우리 집은 몇평인데 뭐가 어떠니 저떠니 하고 떠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남 탓만 합니다. 이런 맘을 내는 바로 그 순간,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학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이걸 모릅니다.
자기를 학대하는 그 마음은 곧바로 옆사람에게 확산됩니다.
오늘 불자 여러분은 이것만은 분명히 알고 가세요.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방법, 그 방법을 부처님께서 일러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선입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자기를 학대하고 나아가 남을 학대하면 갈등밖에
더 있습니까.
그럼 부처님은 겉모습 아닌 뭘 보셨느냐. 바로 반야심경 핵심
네 글자입니다. 오온개공(五蘊皆空).
정신 몸뚱이 그게 모두 공이라는 말입니다.
절에 다니며 반야심경을 수백번도 독송하셨지요.
모든 게 공하다는 걸 아십니까. 어째서 모든 게 공입니까.
지금 우리가 분명히 듣고 보고 만지고 하는데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불교가 좀 어려워집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조금이라도 '아 그럴 수도 있구나' 하면 좋겠습니다.
현대물리학에서 이 공을 증명합니다.
물질을 쪼개고 쪼개면 분자와 원자로 나뉩니다. 이걸 또 쪼개면 핵이 나오고
또 쪼개면 쿼크가 됩니다. 이 쿼크는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 줍니다.
서로 연관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물질 어디에서도 이웃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제 홀로 독립적인 인자는
발견 못했습니다. 즉 공하다는 겁니다.
지금 과학 선진국에서는 힉스입자를 연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입자는 우주공간의 기운이나 질량을 이루는 기본 입자라는 가설입니다.
수 킬로미터 되는 입자 가속기로 이 입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5년후에는 힉스입자가 증명되리라 합니다.
입자와 기운이 결합되어 있음을 밝히는 게지요.
이것도 결국 이 세상에 단일 독립 물체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겁니다. 결국 존재하는 모든 건 공하다는 이야기지요.
이해하기 쉽게 짚을 예로 들어보지요.
짚으로는 가마니 새끼 덕석등을 만듭니다. 다 그 재료는 짚입니다.
결국은 다 같은 것이지요. 가마니 새끼 덕석 이런 건 본질에 있어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짚을 못보고 만들어진 물건만 보고
서로 가마니가 좋다,덕석이 좋다,이게좋다, 저게 좋다 다툽니다.
분열 대립합니다.
부처님은 이 짚을 보신 겝니다. 이 짚을 못보니 갈등 푸는 것도
힘으로만 하려 합니다. 미국 대통령 부시를 보십시오.
부시가 나빠서가 아니라 겉만 보니 그렇게 푸는 법 밖에 몰라 그런 겁니다.
부모자식, 부부도 힘으로만 풀려 합니다.
가족도 힘으로 풀려한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 인생살이고 우리가 살아온 역사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가 문제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무지가 문제입니다.
공입니다. 이 세상에는 저 홀로 존재하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연기(緣起)로서 존재합니다.
연기란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얘깁니다. 형상 있는 것이나,
형상 없는 것이나 다 연기로서만 존재합니다.
이 법당 안에 모든 존재가 다 연기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금강경에는 이를 아홉가지로 나눕니다.
태란습화등등 들어 보셨죠. 이처럼 다양하게 존재해도 다 연기로
존재합니다. 이것과 저것이 결합되어야만 존재한다는 겁니다.
생명까지도 그렇습니다. 예를 또 들어보지요.
큰 바다가 있습니다. 잔잔한 바다에 바람이 붑니다.
파도 일어납니다.
수천수만 파도가 일지만 똑같은 건 하나도 없습니다.
이 파도를 불경에서는 법성이라 부릅니다.
이 법성이 모인 우주 삼라만상을 법계라 하지요.
파도마다 다 물이 있습니다.
저 산 짐승 사람 하나하나에 다 물, 즉 법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파도를 구성하는 그 물은 바다와 다른 물입니까.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바다의 물, 파도의 물 그걸 자성이라 합니다.
부처님이 이 원리를 발견하고는 사람도 귀천 장애 학력등등
모든 걸 넘어, 겉모습 아닌 차원에서 보면, 즉 모든 걸 물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조금도 차별없이 하나다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우리는 그걸 못보니.
자성자리 법성자리는 차별없이 하나입니다.
뱁새와 황새는 다리 길이가 다릅니다.
겉만 보면 서로 잘났다 좋다 나쁘다로 갈등합니다.
그러나 모든 자성이 물이고 짚이고 공인줄 알면 삼라만상이 같은
것입니다. 갈등 대립 없어집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가족 구성원들이 겉만 보고 이기심을 내면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오온개공, 즉 물은 똑같은 물이라는 걸 알면 어떤 맘이 일어나느냐.
경험 안하면 모릅니다. 상대에게 뭘 바라기보다는 고마움이 먼저 일고,
나 개인보다는 전체를 생각하고 그런 맘이 듭니다.
나만 좋으려는 맘 말고 .
분열된 의식이 통합된 의식으로 승화되고 눈이 열립니다.
크게 전체를 보는 눈. 불교에서 보면 모든 이가 왕입니다.
개인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상대에게 끝없이 요구하는 것,
이게 부끄럽기 시작합니다.
서로 고마움을 느낍니다. 이런 맘이 확대돼 사회전체가 불국토가 됩니다.
삶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일을 하든 재미와 보람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돈 때문에만 일한다면 불행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직장인 80%가 불행한 직장생활을 한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는 자기 생각 잘못에서 기인합니다.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면 일이 재미있어집니다.
재미 있으니 열심히 하게 됩니다. 열심히 하니 전문가가 됩니다.
그러니 자연 돈과 명예가 따라 옵니다.
그러나 돈과 명예보다 더 중요한 건, 이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좋은 인격이 형성된다는 사실입니다. 돈만 보고들 일하니까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게 된 겁니다. 어른이 어른 구실을 못하니 젊은이들에게
무시당합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다 내가 만든 것입니다.
오온개공을 알면 모든 잘못된 생각이 하루아침에 고쳐집니다.
삶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참선에 대해 봅시다.
모든 게 공하고 연기로서만 존재한다는 존재원리를 설명했습니다.
참선은 오온개공을 체험하는 게 참선입니다.
우리 존재 원리가 선입니다. 이걸 체험하면 선을 한 것입니다.
겉만 보고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입니다.
이걸 안믿으면 내일부터 법당 올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건 엄청난 착각입니다. 그 피해 또한 큽니다.
존재에 대한 무지. 이것만 깨트리면 안 풀릴 일 없습니다.
남북 문제도 그러합니다. 물질적 도움만 준다고 뭐가 됩니까.
그들에게 공산주의 이념이 있는 한 절대 안됩니다.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연기이기에 개공입니다. 내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중국의 문필가 임어당이나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는 불교를 잘못
이해했습니다. 불교는 비관주의나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모든 게 공하다는 개공, 어렵긴 합니다다. 그러나 공은 허망이 아닙니다.
오늘같이 구름이 꽉 낀 하늘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구름이란 원래 공한 것입니다. 공은 이 먹구름입니다.
먹구름이 공인 줄 알면 다 안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나옵니다.
구름만 없어진다면 허망할지 모르지만, 구름이 걷히면 자동적으로 해가
비칩니다. 구름이 없는 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없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착각을 없애면, 구름이 걷히고 해가 저절로 비칩니다.
우리 일상이 대부분 착각이다 라고 말한다 해서 허망해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착각만 없애면 기쁨이 절로 생깁니다. 원래 모든 게 없다는 걸
아는 걸 적적(寂寂)이라 하고, 해가 나오는 걸 성성(惺惺)이라 합니다.
이 둘은 분리되는 게 아니라 같은 걸 다르게 이야기 한 것입니다.
적적을 알면 곧 성성이요, 성성을 알면 적적임을 알게 됩니다.
이걸 체험 하는 걸 선이라 부릅니다.
이걸 알려면 간화선에 대해 조금 아셔야 합니다. 달마 1조부터
5조까지는 간화선과 조금 다릅니다. 초조부터 5조까지는 공을 먼저
이야기 합니다.적적을 먼저 이야기 한다는 말입니다.
6조 혜능대사부터는 진짜 간화선입니다. 6조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악도 없다. 선악도 없으면 절대 선으로 간다. 대장부가 된다.
그때 너 본래 모습이 뭐냐. 깨달아라. 그 어떤 것도 이분법적으로 생각마라.
이분법적 사고를 파쇄하는 게 선이다"
구름 걷기가 아니라 해를 먼저 이야기 합니다. 해가 보입니다.
조사들이 어려운 선문답들, 거기엔 한없는 자비심이 담겨 잇습니다.
다 깨어지고 나면 본래 면목이 나오는 법입니다.
불성이니 자성이니 하는 것도 다 이름일 뿐입니다. 이름만 갖고는
뭘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게 무슨 물건인지 의심하다가 깨닫는 것입니다.
상근기는 의심 과정없이 즉석에서 그대로 깨닫지만 하근기는 의심을 통해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공부하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순간순간이라도 진정으로 의심하는 습관을 지니십시오.
폼이 아닙니다. 참선은 시간과 장소 폼에 상관없이 늘 '이뭣고'를 지니고
사는 삶입니다. 오온개공입니다. 겉만 보지 말고 진면목을 보려는
자세입니다. 화두는 의심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깨치라고 준 것입니다.
남 의식 안하고 스스로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참선을 하든 안하든,
출가를 했든 안했든 우리나라 현재 불교계를 보며 가장 맘 아픈 건
수행과 생활이 따로 논다는 겁니다.
달라이 라마나 틱낫한스님이 인기가 많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나도 만나 봤지만, 이 분들의 법문은 인과법문입니다.
그래서 쉽습니다. '왜 착한 이가 고난을 받나'라는 근본 질문에 이들은
'착한 이는 결국 천상에 태어나 행복하게 산다'는 인과법문을 합니다.
대승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승 최초 경전이 반야심경입니다.
여기서는 부처님 법문의 핵심중의 핵심인 오온개공을 이야기합니다.
염불을 하든 참선을 하든, 봉사를 하든 이 공이 기본입니다.
내가 있고 오온개공이란 어불성설입니다.
공을 말하면서 아상을 놓지 못하는 건 동으로 가면서 서로 간다고
우기는 아둔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게 한국 불교 현실입니다.
한국 선불교는 인과법문보다 더 심오한 법문입니다.
틱낫한이나 달라이 라마는 달을 가리키는 방편인 손가락을 말하는
불교입니다. 그 분들이 몰라서가 아니라 그 불교는 그런 불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의 불교는 손가락 불교에도 못미치는 세속 불교가
너무 많습니다. 손가락 불교만 해도 낫겠습니다.
대부분 수행과 생활이 따로 노는 세속 불교이니 이 무슨 시간 낭비입니까.
오온개공을 아는 정견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선불교는 그럼 뭘 믿나. 오온개공 연기법, 이것 뿐입니다.
헛된 믿음은 자기 시간만 아니라 다른 이 시간까지 낭비하게 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이런 세속불교는 한국뿐입니다.
말로는 오만가지 좋은 말들을 늘여놓지만, 실제는 엉망입니다.
이런 불교 하려면 아예 하지 마십시오.
지옥에는 신앙인들의 몸만 잔뜩 있고, 천당에는 혀만 가득 있더라는
우스개 소리가 전혀 빈말은 아닙니다.
중노릇 45년을 사심 아닌 공심 이야기로 일관했습니다.
내가 소장이던 시절 조계종에는 '사상이 좋다'는 말이 있엇습니다.
이젠 사라졌지만 말입니다.
매사 공심으로 공심으로 살아가는 걸 말합니다.
우린 정말 보배를 두고도 보밴 줄 모르고 살아가니 안타깝습니다.
인류가 뭘 제대로 바꿔 보겠다고 겉만 붙잡고 몇천년을 시험했지만
근본 문제는 여전히 묘연합니다. 존재에 대한 무지, 이것 때문에
인류 역사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제 서양은 동양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서양은 아직도 제도 수단등을 바꾸는 것으로 공심을 이야기하지만
우리 동양은 존재 원리에 입각해 진심으로 해왔습니다.
겉말고 진짜, 각자 자신에게서 이걸 확인합시다.
실천이 아직 잘 안되면 이해라도 하고 삽시다. 그것만 해도 삶이 달라집니다.
그걸 알면 인생이 너무 즐겁습니다. 모르면 인생이 지겹기만 합니다.
사는 게 즐거우니 맘 속 지꺼기도 정화됩니다. 오온개공. 중도연기.
이겁니다.
부처님 뭐라 하셨는지 알아야 삶에 도움이 됩니다. 내가 기거하던
경북 영주에 식당을 운영하는 한 보살님이 계셧습니다.
정견이 있으면 삶이 바뀐다는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이 보살님께 하루는 식당 일을 하면서 도닦는 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하고
말했습니다. 스님, 그런 것도 있습니까.
"예. 이제부터는 식당손님이 들어오면 겉만 보지 말고 돈으로도 보지 말고
은인으로 보십시오. 제대로 보면 모든 이가 은인입니다.
고맙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살면 사람들도 좋아합니다.
돈도 많이 벌릴 겁니다. 은인. 사람을 수단으로 말고 은인으로 대하십시오"
그 보살이 한 달 후 환한 얼굴로 장사 정말 잘 된다고 말을 하더군요.
불교 이치를 실천한 거죠. 얼핏 손해보는 짓 같아도 절대 손해 안봅니다.
수행은 고행이 아닙니다. 이 이치만 알면 얼마나 줄겁게 수행할 수 있는지
아십니까. 깨달음은 이보다 더 즐거운 것입니다. 재미와 보람이 한껏 있습니다.
왜 저리 좀스럽게들 살고 있는지 하는 생각도 들 겝니다.
더불어 함께 잘 사는 길이 얼마든지 있는데 말입니다.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운 맘이 일어납니다.
법문 예정 시간이 좀 지났군요. 내 별명이 '고(GO)-법문 한 번 했다
하면 세시간'인데.(웃음)
부처님 법은 위대한 법입니다. 하나님 브라만 알라는 모두 창조를
이야기 합니다. 부처님만이 물리학과 일치하는 진실법을 말씁하셨습니다.
부처가 부처가 아니니 부처입니다. 부처님만이 이걸 아셨습니다.
금강경 보십시오. 부처가 부처가 아니니 부처인 것입니다.
불교를 믿기만 아니 이해만 해도 달라집니다.
우리 사회 가정을 이리 만들자는 원력으로 사십시오. 이게 불교입니다.
다 제도하고도 한사람도 제도한 적이 없다고 하는 것,
이런 '마음 항복받기'를 하는 게 부처님 제자입니다.
깨닫고 보니 본래 그런 것인데 내가 따로 제도하고 말고 한 게 뭐있나.
혼자 하지 말고 더불어 합시다. 그런 수행을 합시다.
첫댓글 우와.. 길다.. 나를 비우는길이 이렇게 어려울줄은,,,,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