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桂林) 여행
인천공항에서 밤에 비행기 타고 떠나면서 이태백의 장진주(將進酒)란 시를 떠올려 보았다.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황하의 물이 천상에서 내려와, 세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러 다시는 돌아오지 못함을. 또 보지 못하는가. 높은 집 사람이 거울 속 백발을 슬퍼함을. 아침에 푸른 실 같던 머리카락이 저녁에는 눈 같이 희어졌네. 인생은 모름지기 뜻을 얻었을 때 기쁨을 함께 누려야 할지니, 친구인 잠부자 단구생이여! 잔을 올리니 그대는 부디 거절하지 마시라.' 칠순 기념으로 고교 동창들이 단체 계림 여행에 나선 것이다.
계림에 가면 무엇을 보아야 하나? 첫째는 산수(山水)요, 둘째는 골동품이다. 중국은 가는 곳 마다 도자기와 그림 천지다. 골동품과 도자기는 알면 보물이고, 모르면 비지떡이다. 거사는 아침에 호텔 로비의 대형 도자기부터 살펴보았다.
거기 암봉에 폭포가 걸려있고, 냇물에 다리가 놓여있다. 다리 위에는 숨은 은자가 보이고, 초옥에는 파초가 자라고 있다. 정원에 나가보니, 정원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돌로 조각한 연꽃 발판이고, 연못 속에는 비단잉어가 헤엄치고 있다.
계수나무 많다고 계림(桂林)이다. 가로수가 모두 보랏빛 흰빛의 꽃을 단 계수나무다. 꽃은 만리향 꽃과 비슷하다. 그 꽃으로 향수를 만들거나 술을 담는다고 한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 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를 노래한 윤극영 선생께서 계수나무 아래서 토깽이가 떡방아 찧는 여길 와보셨는지 모르겠다.
첫날은 배 타고 리강(漓江)을 유람했다. 시내 곳곳 지류가 많아, '이강(漓江)이 저 강이고, 저 강이 이강(漓江)이다'란 우스갯말 있다. 계림에서 양삭(陽朔)까지 가는 83km 뱃길에는 인수봉이나 마이산 같은 산이 강변에 우뚝우뚝 서 있는데, 모두 구름 스카프를 둘렀다. 이런 그림 같은 봉우리 숫자가 자그만치 3만 5천 개라 한다. 여기에 밤에 달이 뜨면 어떤 모습일까. 가냘픈 몸매의 장족(壮族) 아가씨와 달빛 아래서 동굴에서 3년 숙성시킨 계수나무 꽃으로 담근 삼화주(三花酒) 마셔봐야 그 몽환적인 분위기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는 베트남 하롱베이와 지맥이 이어져있다. 여름 날씨 40도라 시멘트 바닥에 계란을 놓으면 익는데, 다행히 년중 300일은 흐린다고 한다. 대나무와 계수나무 많고, 비파와 유자 과수원 많은데, 벼농사는 일 년 3 모작이다.
다음날 비단을 첩첩히 쌓아놓은 것 같다는 첩채산(疊綵山)에 올랐다. 바위에 뭔가 새겨져 있다. '願作桂林人 不願作神仙'이란 글귀다. '계림 사람 되기가 소원이지, 신선이 되기는 바라지 않은다'는 뜻이다. 신선이 부럽지 않는 모양이다. 계림이 얼마나 살기 좋으면 이런 글을 새겼을까. 자부심이 느껴졌다. 여긴 과일의 여왕이라는 듀리안을 비롯하여 망고와 비파, 무공해 채소와 신선한 물고기 천지다. 산 위에서 계림 시내를 내려다 보니 호수 속에 집도 있고, 7층 탑도 있다.
우리들은 계림의 우산공원, 천산공원, 서양인들이 모이는 양삭(陽朔) 재래시장과 동굴 안에서 케이블카와 배가 다니는 관암 동굴을 구경했다. 그러나 거사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세외 도원(世外桃園)이다.
세외 도원은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현실 속에 만들어놓은 곳이다. 동굴 속을 배가 지나가니, 3월이면 도화꽃이 만발하여 도원경 이룬다는 복숭아 숲 나온다. 거긴 황금색 유차화(油茶花)와 눈처럼 흰 여채화(茹菜花)와 자홍색 홍화초가 땅을 수놓았다. 꽃도 곱거니와 물도 투명하여 바닥이 환히 보인다. 하얀 회칠한 민박집 두어채가 있는데, 집마다 제비가 들어와서 살라고 벽에 구멍을 몇 개씩 뚫어놓았다. 여기가 강남 제비의 고향인가. 호수 이름은 제비 연(燕), 연자호라 한다. 언제 여기 와서 민박 얻어놓고 글이나 몇 편 쓰면 좋겠다.
마지막 날 밤 유람선 타고 구경한 호수 야경이 시적인 운치가 있다. 우리가 탄 유람선은 불 밝힌 정자와 누각과 화려한 조명이 비치는 호텔을 지나가는데, 유람선이 통과하는 다리 화강암에는 유려한 필치의 한시와 산수화가 그려져 있다. 글씨와 그림은 평범한 솜씨가 아니다. 조명 아래 불상과 7층 탑은 신비로운 한문 문화권 깊이를 보여준다. 밤인데도 호반에 산책하는 사람이 많다. 거기 두 강이 만나서 네 개의 호수를 이룬 곳에서 어부는 불을 밝히고 가마우지로 고기 잡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가마우지는 고기를 입에 물고 날개를 퍼득이며 배에 올라오고, 그때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카메라 후랏쉬를 터트렸다.
배가 호수를 반쯤 돌았을 때다. 누가 뱃머리에서 부드러운 해금을 탄다. 은은한 그 소리는 천상에서 내려온 듯, 별빛 따라 달빛 따라 흐른다. 곡목은 아리랑에서 시작하더니, 심심산천 백도라지, 푸른 하늘 은하수를 거쳐, 뷰티풀드림머와 올드 랭 사인으로 끝을 맺는다. 그 밤의 결정타는 은은한 해금 소리였다. 우리들은 곡마다 험잉을 하면서, 곡 하나하나 끝날 때마다 부라보! 만장의 박수를 보내면서 얼마씩 돈을 주었다.
그런데 여행의 끝장면이 너무 아쉬웠다. 여행사는 밤 12시 40분까지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면서, 비행기 출발 시간 맞춘다고 감미로운 음악과 감흥에 젖어있는 우리를 갑자기 무조건 버스에 태우더니 공항으로 달린다. 세상에 이런 법도 있나? 거사는 연인을 이별한 듯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참 시선을 창 밖으로 고정시키다가 왔다.(2014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