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 때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 95년도에는 1년 전속계약을 했다. 그래서 최신곡 150곡을 받아서 내 스타일대로 전부 다 디스코로 했다. 그래서 대박이 났다. 갑자기 CF 들어오고 뮤직비디오도 찍고 했다.
콘서트를 하는데, 팬들이 내가 노래하는 한국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팬들이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어 학원을 다니고 했다.
2000년도에 우리나라 오면서 몽키 매직, 영맨을 가져왔다. 그때 I.M.F가 왔다. 테크노 '몽키매직'이라는 노래가 나오니깐 신비로운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전체 게임방, 주요 신문사 등에서 매일 나왔다. TV CF도 3개씩 매일 돌아갔다. 그러면서 뜨기 시작했다.
나를 가장 빨리 알리게 된 것이 딱 하나 있다. 인터넷이 들어온 것이다. 인터넷에 뜨다 보니까 자동으로 섭외가 되고, I.M.F때 내가 테크노를 불러줘서 힘을 불어줬지.
해외에서는 어떻게 활동하시게 된 건가요?
→ 1989년 4월 30일, '신바람 이박사 메들리 테이프'를 냈는데, 한 3개월만에 천만장이 나갔다. 밤무대도 여러군데에서 했다.
어느 날, 관광객이 남대문에 갔다가 신기한 음악을 들었더라. 근데 그 관광객이 소니 레코드 직원이었고, 하나 샀대나봐. 그래서 얘기가 되서 자기들이 회의를 해서 내가 섭외가 되었다.
그때 당시 100억 정도 버셨다고 들었는데..?
→ 벌면 100억은 더 벌었지. 노래 한 곡 천만원이야. 하루에 3곡이면 3천만원이야. 그렇게 되면 1달에 1억, 1년이면 10억이야. 또 CF 돌아가면 돈 나와. 전부 돈이니까… 따져보면 100억도 넘겠다.
그래서 레코드 회사를 하나 차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한 3개월 정도 되니까 다리가 다쳐서 부러졌다. 이제 다쳤으니 활동을 못 하는데, 내가 스타가 되니까 1~2년 행사가 싹 매진이었던 거지. 그러니깐 돈 다 물어줘야 될 거 아니야. 대부분 위약금 줘야되고.
노래 한 곡씩 천만원씩 받을 때는 백댄서가 열명, 코디가 두 명 있고, 매니저가 있고, 스타니깐 뒤에 따라 붙는 사람도 기본이고. 행사하러 20명씩 다녔다. 그런데 다리가 부러지니 그걸 전부 정리해야 했다. 정리도 해야하고, 거기다가 가정도 실패해서 이혼도 해야했다. 그렇게 되었다.
돈을 나쁜 쪽으로 잃었던 것은 아니셨네요?
→ 아니지. 도박 그런거 할 줄도 모르고, 이제 남한테 빌려준 것도 못 받고, 그렇게 되었다.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들었다.
→ 지금은 그냥 남양주에서 월세로 살고 있다. 은행에 대출이자도 내야지, 생활비 나가지. 월세 살면 됐지 뭘. 열심히 살면.
이사를 30여번 다녔다고 하시던데?
→ 6월 28일까지 43번째가 되었다. 앞으로 2번, 3번 더 가야한다. 왜 그러냐면 직장 따라서 옮기는 경우도 있고, 어디 행사하러 가면 1년씩 하고, 집세가 올라서 그런 것도 있다.
뽕짝을 폄하하는 시선도 있는데 어떠신지?
→ 원래 한국 음악은 뽕짝이야. 원 제목이 뽕짝이고 트로트라고 하잖아. 뽕짝은 저속한 거 같고 트로트는 유식한 거 같잖아. 안 그래.
요즘은 좀 서글프지 않는가?
→ 다 서글프고 그런 것도 있겠지. 그런거 따져서 뭐해? 인생은 서글프 때고 있고, 괴로울 때도 있고, 즐거울 때도 있고 그래. 내가 아는 인생 철학은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