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제호 선체 사진 입수후 기록 발굴 노력
총세무사 브라운이 남긴 '전보문' 발견
'대한제국 해관' 건조과정 감독 사실로
허리티지교육센터서 자료 무더기 나와
간절히 찾던 갑판 평면도 등 눈앞에
광제호, 인천항 1905년 6월8일쯤 도착
1906년 증기기정 예인…1차 임무 마쳐
필자는 오랫동안 대한제국해관(세관)이 일본 카와사키 조선소에 신조발주해 인수한 해관순시선 '광제'를 추적해 왔다. 20년 전 한국해양대학교 겸임교수였던 고 김재승 박사를 만나 '광제'호의 선체사진 2점을 입수한 이래, 관련 기록들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해 온 결과 유의미한 보고서와 신문기사 등을 전보문 등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광제'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들은 검증되지 않은 것들이 많았을 뿐 아니라 그동안 만들어진 모형들은 이 사진에 나타난 외형과 약간의 제원만을 가지고 흉내를 낸 소위 '짝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설계도가 없던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김박사는 생전에 필자에게 그 설계도를 찾기 위해 그 배를 지은 카와사키 조선소(지금의 카와사키 중공업) 측과 접촉했으나 허사였다고 털어놓았다. 오히려 카와사키로부터 소장하고 있는 관련 사진이라도 좀 제공해 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을 받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자료를 주었노라고 했다.
대한제국에서 강점기로 이어지는 가운데 자료가 제대로 관리가 되지 못했고 일제가 패망 후 이 선박을 돌려주지 않은 상태에서 운항하다 침몰했기에 영영 사라져 버렸다. 또 카와사키 조선소에 보관하고 있었을 설계도조차 2차대전의 와중에서 소실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료 추적을 거진 포기하려던 때에 만난 대한제국 해관총세무사 브라운(McLeavy Brown)이 남긴 총세무사 전보문(Telegrams Despached, 1902~1905)은 필자에게 비밀의 문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건네줬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행운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전보문 중에서 필자는 브라운이 '광제'를 발주하고 선박 건조일체를 조선소 측에 일임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확인했다.
이 문서에는 설계과정에서부터 완공까지 공정을 총 감독하는 감독자가 임명됐고 수시로 해관의 세무사(세관장)급을 현장으로 보내 공정 진행상황을 점검하고 보고를 하나하나 챙겨왔다는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비슷한 선박을 운용한 경험이 있는 청나라해관 소속의 항해사와 기관사뿐 아니라 해관의 수석 건축설계사였던 하딩(J. R. Harding)에게도 부탁해 컨설팅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브라운이 애정을 갖고 '광제'에 공을 들였는지를 알 수 있는 증거가 된다. 명실공히 대한제국 해관이 선주의 자격으로 사실상 광제호의 건조과정을 완전 장악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만한 부분이다.
이런 내용을 알게 되자 필자는 감독관이 혹 영국 로이드선급협회 소속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인명록을 뒤져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그렇다면 그가 '광제'에 관련해서 어떤 형식이든 로이드선급협회에 관련 자료를 보냈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지 않겠는가? 이제 로이드선급협회 아카이브에서 해당 자료가 존재하는지 알아볼 차례이다.
'광제'의 영문 선명은 이미 20년 전 찾은 사진에 희미하게 쓰여 있는 'KWANGCHEI' 였으나 전보문을 통해 역시 동일한 선박명이 있는 것이 발견했던 터라 자신 있었다. 이제 이 키워드를 가지고 로이드선급협회를 찾아갔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원하던 자료는 이곳에는 없었다. 그렇지만 추적의 단서 하나를 얻었고 로이드선급협회재단 허리티지교육센터 (Llyods Register Foundation Heritage & Education Centre) 라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카이브 라이브러리 (Archive & Library)를 발견, 서둘러 버튼을 눌렀다. 선박도면과 서베이 레포트 메뉴가 눈에 들어왔다. 'KWANGCHEI'를 입력하고 화면을 응시한 순간 7개의 문서가 동시에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아! 소리를 지르고 자세히 살펴보니 맞긴 한데 설계도면이 없다! 어떻게 된 일일까? 골똘히 생각하던 필자는 감독관 엘러턴(J. Ellerton)의 이름으로 한 번 더 검색해 보았다. 찾았다! 있었다! 엘러턴은 'KWANGCHEI' 이전에 'QUANGCHEI'로 썼던 것이다.
어쨌든 화면에는 도면 등 직전에 없던 서류까지 포함해 총 20개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야말로 '대박'을 친 것이었다. 그렇게 간절히 찾던 도면은 총 4장이 나왔는데 보일러 (Steel Boiler, 1903년 3월 9일 완성), 갑판 평면도 (Steel Deck Plan), 횡단면도(Construction Pofile), 종단면도(Midship Section Plan, 1903년 5월15일 완성)로 구성돼 있었다.
'광제'의 계약 서명식은 1902년 12월10일, 서울 모처에서 당사자인 총세무사 브라운과 카와사키 조선소 사장 마츠카타, 그리고 일본공사 하야시의 배석하에 서명됐다. 대가는 총 33만8800달러에 달한다. 카와사키 조선소에서는 핵심 설비인 증기엔진은 영국에 의뢰하고 기타 선체설계와 제작은 자체에서 진행했다. 엘러턴은 1903년 5월 17일 현장 입회를 처음 실시했고 1년2개월 만에 선체를 완성해 진수에 들어가 성공한 것이 1904년 6월 15일이었다.
총세무사 브라운은 이날 한국해관 대표로 부산해관 서리세무사였던 오스본(William McC Osborne)을 현장을 보내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 선박이 거의 완공된 시점에서 브라운은 1904년 10월 12일 조선소 측에 요구해 선박에 무장을 하도록 요청했다. 별도로 주문한 무기는 3파운더 호치키스 건 2문(중속사포), 포탄 100파운드, 최신식 소총과 권총 실탄 등이었다. 이 포의 장착이 광제호가 군함이라는 소문이 나돌게 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친 '광제'의 완공일은 04년 11월8일이었으나 대한매일신보 기사에서 같이 브라운은 이 선박을 곧바로 인수하지는 않았다. 당시는 러일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러시아 측에 선박이 나포되는 위험을 굳이 감수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 한국 해관에 '광제'를 인도하기 위해 일본 코베항을 출항한 것은 1905년 6월6일이었고 이틀 후에 부산항에 도착함으로서 공식적으로 인도됐다. '광제'를 인수해 온 사람은 청나라해관 순시선 '리우싱(流星)' 1항해사였던 루서퍼드(Rutherfurd),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된 바로 그 사람이었고 기관장은 선장과 한 배에서 일했던 맥베인(Mcbain)이었을 것이다. 모항인 인천항에 도착한 것은 6월 8월경쯤으로 보인다. 브라운은 선박대금중 마지막 잔금을 선박 인수 후 2개월 후인 1905년 8월31일 조선소 측에 지급했다. '광제'는 그러나 인천항에 계류된 거의 그대로 상태로 있었고 임무에 투입하지는 않았다. 당시는 통감부가 들어서기 직전으로 총세무사가 브라운에서 재정고문 일본인 메가타(目賀田)로 교체되는 시점이어서 경황이 없었던데다 무엇보다 이 선박을 운항할 자체 인력이 없었던 탓이다.
'광제'는 1906년 3월22일 오후 2시 인천항을 떠나 동해 북단 수원단까지 항해하고 일본에 들러 수리를 받고 한국해관에서 추가 주문한 증기기정 4척을 예인해 인천항에 입항하면서 공식적인 1차 항해임무를 무사히 마쳤다.
김성수 인천광교관세사무소 관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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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신기하네요. 대한제국이 현대식 순시선을 갖고 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