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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래/겨울바다
일본사 편수회-일본의 뿌리를 찾아서
영산강 유역의 마한 지역은 일본 농경의 시작인 죠몬과 야요이 문화를 이끌어 일본 문화가 시작될 수 있도록 했다. 일본과 마한 지역의 관계는 이후 백제와 일본 왕실의 관계까지 이어진다. 일본고대의 ‘야요이 시대’(BC3~AD3)를 전후하여 벼농사와 거석, 청동기, 철기 문화 등이 주로 마한(馬韓, BC3~4)에서 일본 큐슈(九州)로 전파되었다. 영산강 유역에서 발전한 조선기술로 고대 한일해협을 건널 수 있었던 마한 사람들이 큐슈 지역에 집단으로 이주했다.
한반도로부터 철제 농기구가 건너가기 전, “일본에 살던 사람들은 원시적인 생활을 했다. 논농사도 지었다지만 처음에는 골짜기의 물을 막아서 썼다. 농사는 나무로 만든 괭이나 삽으로 밭을 갈고 벼가 익으면 손이나 돌로 만든 칼로 벼이삭을 땄다”(교토대의 카도와키 테이지 교수, 1957). 목제 농기구며 돌칼 역시 한반도 남부로부터 큐슈 지역으로 옮겨갔다. 그 이전 일본인은 경작 농업 없이 맨손이나 나무 꼬챙이로 바닷가의 조개를 캐거나 나무 열매를 따먹는 채집으로 식생활을 해결했다.
“벼농사는 북큐슈에서 시작해 세토내해(瀨戶內海, 일본 열도 서쪽의 길고 큰 내륙 안쪽 바다)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여 야요이 문화를 낳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무렵 북큐슈와 남한은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남한은 최근에도 그렇듯이 쌀농사의 최적지이며, 2천년 전부터 일본과 벼농사가 서로 이어졌다.”(도쿄대의 야와타 이찌로 교수,1953)
일본 고대의 각종 기구에는 마한 등에서 건너 왔다는 뜻인 한(韓)자들이 잇따라 붙여졌다. 고대일본 문헌에 보면 대장간을 카라카누치(韓鍛冶/한단야)로, 무쇠로 만든 삽을 카라사비(韓?/한조)라고 불렀다. 카라사비의 “사비(?)는 조선어의 ‘삽’과 동계어(同系語)이다”(카나자와 쇼사브로, 國學院大學 교수). 소가 끄는 ‘철제 쟁기’는 ‘카라스키’(韓鋤)라 했고 농작물을 타작할 때의 ‘도리깨’도 역시 ‘한’(韓)자를 머리에 붙여 ‘카라사오’(韓竿)라고 불렀다. 나무로 만든 목제 농기구 역시 ‘한’(韓)자를 붙여 써왔다. (* 한반도 남한지역이 韓지역임을 알 수 있다)
야요이 시대 북큐슈 등 서(西)일본에서는 주로 마한 등 남한 도래인들이 정착해 선주민들과 혼혈을 이루었다. “서일본의 야요이 전기의 인골에는 키가 작은 죠몬인과 평균 신장 163cm의 키가 큰 남성 인골이 있다. 한국 남부로부터 건너 온 도래인의 피를 받아서 비로소 야요이인이 생겼다고 본다”(靑木美智男外, 1993). 키가 작고 왜소한 선주민인 죠몬인들이 살고 있던 곳으로 벼농사와 철기문화를 가진 키가 큰 마한인 등이 건너 가서 야요이 문화를 일으켰다.
농사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몸이 크고 키가 큰 한국인이, 키가 작은 선주민(아이누족/백인계 수렵족=흉노)들을 지배하며 부락을 이루고 부락의 수장(首長)들은 이웃 지역 수장들과 손잡고 야요이 문화를 이끌었다. 수장들이 죽으면 마한에서처럼 장엄한 장례식을 거행하고 시신을 항아리 속에 넣어 고인돌에다 장사 지냈다. 항아리를 묻은 묘지를 일컬어 옹관묘(甕棺墓)라고 부른다. 관 속에는 구리거울(銅鏡)이며 구리칼(銅劍) 등을 함께 넣었다. 옹관 대신 돌로 만든 석관도 썼다. 석관은 돌로 만든 지석묘 밑에 모셨다. 북큐슈에서는 그와 같은 옹관묘며 지석묘가 많이 발견되었다.
고인돌이 많은 영산강 일대의 고대 마한은 일본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고 죠몬, 야요이 문화는 즉 북큐슈에서 세도 내해를 거쳐 일본 서부 지역으로 널리 퍼져 오늘의 오사카는 물론 나라, 쿄우토 등으로 빠르게 퍼져갔다. 시간이 흘러 야요이 중기에 이르면 야요이 문화는 오늘의 도쿄(東京) 등 동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카나가와(神奈川), 시즈오카(靜岡), 치바(千葉) 등등 태평양 연안 일대로도 펴졌고 야요이 후기에는 일본의 토호쿠(東北) 지방인 아오모리 (靑森), 미야기(宮城), 야마가타(山形), 후쿠시마(福島)까지 널리 전파되었다. 이것이 모두 영산강 유역 마한 문화의 역동성이라고 할 수 있다.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영산강 지역의 대형 왕급 무덤군/열도를 지배하고 동아시아 바다를 장악했던 왕들의 무덤
열도의 전방후원분의 주인은 영산강중심의 한반도 해양세력이다.
키가 작아 왜소했던 아이누족(왜노/백인계 수렵족=흉노)을
북부지역으로 밀어 버리고 열도의 야요이 문명을 건설한 주역은
영산강 중심의 한반도 남부세력으로 중국인들이 왜로 기록한 한반도 해양세력으로
열도의 전방후원분들의 주역이다. 1만년 전에는 열도와 대륙이 하나로 이어져
하나의 단일공동체였으나, 1만년 이후 지금처럼 바다로 갈라지게 되자,
유럽에서 동진해 온 백인계 수렵족인 아이누족의 수렵지역이였으나,
단군3한국의 붕괴 이후 북방의 기마세력의 유입으로
한반도 남부지역의 토착세력이 열도로 대거 이주하여
지금의 일본문명의 토대가 되는 농경.토기 등
영산강 문화인 야요이 문명을 건설하게 되었다.
현대 일본인들의 유골구조가 영산강 사람들의 유골구조와 같고
유전학적으로도 가장 유사한 것으로 밝혀 졌다.
이러한 고대사의 진실을 일본 국민에게 열심히 가르쳐 줘야 하고
일본인들도 선조의 뿌리가 되는 영산강 지역에 와서
제사도 지내야 한다.
줄기차게 ‘한반도 기원설’을 주창해온 강인구 교수는 “원분(둥그런 무덤)과 방분(네모난 무덤)의 결합으로, 그리고 원분과 제단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그 원류는 우리나라”라고 보았다.
기원설과 관련, 일본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를 살펴보자. 일본학계는 분구묘(墳丘墓), 즉 네모나고 주위에 구덩이 시설을 갖춘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의 돌출부가 환경에 따라 변화하여 이른바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했다면서 일본자생설을 주장했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들어 우리나라 전라도 지방에서 기원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주구묘(묘 주변에 구덩이 시설을 두른 묘)가 잇달아 발굴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본측 주장대로 주구묘가 ‘전방후원분’의 전신이라면 한반도 기원설이 설득력을 얻게 되는 셈이다. 한반도 주구묘의 잇단 발견은 일본학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다.
열도 전방후원분의 주인은 영산강중심의 한반도 해양세력이다
백인계 수렵족 아이누족이 살고 있던 열도는 고대 영산강중심의 한반도 해양세력이 이주하여 지배하는 왜노국(왜의 노예국)이였다.그 증거가 열도 전역의 전방후원분이다..일향국에서 출발하는 일본도 왜의 소국들 중에 하나다..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했던 왜의 중심지는 전라도 영산강 지역으로 왜는 고대 단군한국의 해양세력을 총칭하는 말로 광개토태왕 남정이후 열도를 의미하는 용어가 되었다.
[고고학 자료:전방후원분 분석]
1972년 7월17일, 모 일간지에 당시 고려대 박물관 주임으로 근무하고 있던 윤세영이 ‘한국속의 전방후원분’이란 제목으로 기고문을 실었다. 당시 경희대학교 고 황용훈 교수와 윤세영 등이 충남 부여 규암면 합송리의 오목산, 구봉면 구룡리의 와우산 등 평야지대에 있는 구릉 4곳을 공동 조사한 결과였다.
그런데 윤세영 등이 이 구릉들을 이른바 장고분(전방후원분)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후 30여년이 흐른 지금, 일본보다 축조 시기가 200년이나 늦은 이 한반도 남부의 전방후원분 논쟁은 한·일 고고학계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동시에 그 누구도 다루기 힘든 ‘뜨거운 감자’이다. 과연 이 일본식 무덤이 어떻게 한반도에서 나와 논란을 일으켰으며 또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일본인일까, 아니면 한국인일까. 2회에 걸쳐 그 뜨거운 논쟁 속으로 빠져본다.
◇“한국에서 발견된 일본식 고분”=윤세영 등의 주장으로 고고학계는 벌집을 쑤셔 놓은듯 아수라장이 되었다. 긴급히 문화재위원회가 열렸다. 장고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장고분은 일본 용어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뒤에는 둥근 원형의 봉토분, 앞에는 네모난 방형의 제단형태가 마련되어 있는 모습인데 마치 열쇠구멍 혹은 장고 형태를 보이고 있다.
서기 3세기 중엽~6세기 후반에 걸친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에 조성된 독특한 형태의 무덤. 당시 최고권력자인 왕이나 지역의 유력자인 수장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전역에 2,000여기가 넘게 분포하고 있다.
일본 역대 일왕의 무덤은 모두 이 형태이다. 가장 유명한 게 ‘인덕천황릉(仁德天皇陵)’이다. 그는 서기 398년에 죽었으며 해자로 둘러싸인, 거대한 구릉같은 무덤(길이 1㎞)은 오사카(大坂)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강점기인 1938년 전남 나주 반남면 신촌리 6호분·덕산리 2호분이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유사하다고 보고된 적이 있다. 하지만 광복 후에는 아무도 그 주장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고대 일본의 전형적인 무덤인 장고분이 존재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중견학자인 윤세영 등이 그 존재를 주장하게 되었으니 고고학계가 자지러진 것이다.
◇“발굴할 필요없다”=그해 7월 하순 문화재위원회는 황교수와 윤주임 두 사람의 조사내용을 들었다. 이들은 고분의 위치가 산이나 구릉이 아닌 평야지대에 축조된 점과 분구(墳丘)의 외형적 형태와 규모, 그리고 당시 농경지 소로와의 관련 등 입지조건이 일본의 이른바 ‘전방후원분’과 동일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과학적인 규명을 위해서는 발굴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필자는 문화재연구실의 학예연구사로 근무하면서 설명회 자리에 참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화재위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한마디로 수긍할 수 없다고 일축했고 발굴조사의 필요성도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당시 발표한 두 사람의 당혹감이란….
당시 고고학적인 학문의 분위기는 우리나라에 일본의 무덤형태인 ‘전방후원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11년 후 수면 밑에 잠겨있던 ‘장고분 문제’가 다시 떠올랐다.
◇일본에서 큰 반향 일으킨 한국의 ‘장고형 고분’=강인구 영남대학교 교수는 1983년 6월 영남대학신문에 ‘함안-고성지방 전방후원분의 발견과 의의’의 논문을 발표했다. 강교수가 소개한 대표적인 장고분은 경남 고성의 무기산 고분, 전남 나주의 신촌리 6호분, 경남 함안의 말이산 16·22호분, 경북 고령의 본관동 고분이었다. 그런데 그는 일본 고유형식으로 알려져 있는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건너가 발전한 것이란 주장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고고학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이 발표를 본 일본에서 오히려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고대사에 있어서 한·일관계는 근본적으로 한국이 일본에 앞선 문화의 전수자로서 부동의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늘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쪽이 일본이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기정사실화했던 것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토(大和)정권이 4세기 후반~6세기까지 약 2세기 동안 한반도 남부지방을 식민지로 지배했다는 설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그릇된 식민사관을 광복 후부터는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에만 존재하고 있는 이른바 ‘전방후원분’이 한국에도 있다는 주장이 발표되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 전방후원분이 가야지역에서 확인됨으로써 일본의 문화가 한국에 전해졌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됨과 동시에 신임나일본부설이 되살아 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일본의 전방후원분 연구자들은 강인구 교수를 일본에 초대하는 한편, 우리나라 고성·함안지방의 장고분을 관찰하기 위해 뻔질나게 경상도 지방을 찾았다.
◇한국은 묵살, 일본은 찬반논쟁 치열=그런데 우리나라 경남의 고성과 함안 등지를 방문하여 발표된 ‘장고분’들을 관찰한 일본의 연구자들도 찬반의 견해가 갈렸다. 특히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고성 무기산 고분이었다. 무기산 고분은 고성 송학동에 분포하고 있는 가야시대 무덤들 가운데 제1호분. 비록 외형이 정확한 형태의 일본식 ‘전방후원분’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한쪽이 높고 낮은 한쪽이 비교적 평탄한 지형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매우 닮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니 보는 사람마다 무덤 둘이 붙은 쌍분으로 느낄 수도 있고 ‘전방후원분’으로도 느낄 수 있는 소지가 많았던 것이다.
이러한 찬반논란의 와중에 심봉근 동아대학교 교수가 구설에 올랐다. 일본의 한 원로학자가 송학동 고분을 방문했을 때 함께 현장을 둘러보고 여담삼아 한 말이 일본인 학자에 의해 잘못 인용되었던 것이다.
“내 고향이 고성이라 어린 소년시절에 여기(송학동 제1호분 위)에 올라와서 정월 보름날 달집 태우기 놀이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심봉근). 일본인 학자는 이 무기산 고분이 “전방후원분이 아니다”라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그 일본학자는 한국인들이 한쪽의 둥근 봉분을 평탄하게 만들어 그곳에서 불놀이했다는 식으로 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두개의 무덤이 모두 원형의 봉분, 즉 쌍분이며 따라서 한쪽은 높고 한쪽은 평평한, 일반적인 장고분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이는 이 고성동 고분이 장고형 고분이라는 강인구 교수의 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주장이었다.
이에 강인구 교수는 심봉근 교수에게 곧바로 확인했다. 심봉근은 “불놀이로 평탄작업을 한 일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강인구는 또 현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현재의 모습이 원래의 모습 그대로인데 일본의 원로학자가 자기 주장에 맞게 왜곡했다”고 반박했던 것이다. 아무튼 일본 학자들 가운데 원로 학자들은 고성 송학동 고분이 전방후원분이란 주장을 부정하는 쪽이며 젊은 학자들은 긍정하는 편이었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송학동 제1호분이 ‘장고분’이라는 강인구 교수의 주장을 묵살했지만 일본인 연구자 사이에서 찬반논쟁은 더욱 깊어갔다.
-무덤의 주인공은?
충남 부여(1972년)에서 시작되어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83년)으로 이어진 일본식 무덤(장고형 고분) 논쟁은 90년대 들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엉뚱하게 전남지역으로 번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일본의 젊은 학자들은 ‘신임나일본부설’을 혹 거론할 수 있지 않을까 귀를 쫑긋 하며 ‘한반도 장고형 고분의 존재’를 긍정했다. 그러나 한국 연구자들은 전면 부정했다.
◇전남지역에만 존재한 ‘장고형 고분’=그런 가운데 ‘나홀로 연구’에 몰두하던 강인구 교수는 85년 전남 해남 장고봉 고분·용두리 말무덤 고분 측량 조사결과 분명한 형태의 장고형 고분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한국학계는 여전히 “외형만 전방후원일 뿐 실상은 자연구릉”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던 90년 전남 함평 신덕고분이 도굴꾼에 의해 유린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긴급조사를 벌인 국립광주박물관은 이 신덕고분이 일본의 ‘전방후원분’ 같은 방법으로 조성됐음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했다. 하지만 (上)편에서 밝혔듯 발굴보고서도 내지 않았고, 종합조사도 ‘쉬쉬’하며 이뤄지지 않았다. 아직 ‘한반도에 홀연히 나타난 일본식 무덤’이라는 이 ‘뜨거운 감자’를 쥐고 연구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후 전남 영암 자라봉 고분을 필두로 함평 장고산 고분, 영광 월산리 고분, 광주 월계동·명화동 고분 등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이 장고형 고분이 속속 발견되었다.
반면 80년대 ‘장고분’ 논쟁을 주도했던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은 99년부터 3차례에 걸쳐 실시된 동아대 박물관 발굴결과 ‘장고형이 아님’이라는 최종 판정을 받았다. 이미 70년대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충남 부여 고분은 자연구릉으로 밝혀진 바 있다. 장고형 고분은 결국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일본식 묘제’인 것이다.
◇일본식 무덤의 기원은 한반도 주구묘?=이제 ‘장고형 고분’에 대한 연구는 피할 수 없게 됐다. 문제는 두가지였다. 이 무덤의 기원(起源)이 한반도냐, 아니면 일본이냐는 것과 그렇다면 무덤을 쌓은 사람은 일본인(왜인)이냐, 한국인(마한의 토착세력)이냐 하는 것이었다. 향후 한·일 고대사 문제에서도 반드시 풀어야 할 수수께끼인 것이다. 몇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이 무덤이 한반도에서는 서기 5세기 전반~6세기 전반, 즉 약 100년도 채 안되는 기간 동안 ‘반짝’하고 등장했다가 사라져 버린 묘제라는 점. 또 영산강 유역에서 겨우 13기만이 조사됐다. 반면 일본엔 2,000여기나 확인 조사됐고 조성시기도 3세기 중반~6세기 후반까지다. 결국 이 장고형 고분은 조사된 무덤의 수나, 조성시기를 살펴보면 일본 쪽이 앞선다는 뜻이다.
그런 전제 아래 장고형 고분의 기원문제를 살펴보자. 82년 김원룡 교수는 “고대 경상도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가 고향의 집자리 지형, 즉 전방과 후원으로 생긴 구릉을 골라 나무곽을 배치해서 만든 묘제”라고 주장했다. 90년 북한의 리정남은 “압록강 유역의 적석총 가운데 원형의 적석부에 네모난 형태의 제단형태 석축단이 조성된 것에서 비롯됐다”고 고구려 기원설을 폈다.
줄기차게 ‘한반도 기원설’을 주창해온 강인구 교수는 “원분(둥그런 무덤)과 방분(네모난 무덤)의 결합으로, 그리고 원분과 제단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그 원류는 우리나라”라고 보았다.
기원설과 관련, 일본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를 살펴보자. 일본학계는 분구묘(墳丘墓), 즉 네모나고 주위에 구덩이 시설을 갖춘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의 돌출부가 환경에 따라 변화하여 이른바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했다면서 일본자생설을 주장했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들어 우리나라 전라도 지방에서 기원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주구묘(묘 주변에 구덩이 시설을 두른 묘)가 잇달아 발굴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본측 주장대로 주구묘가 ‘전방후원분’의 전신이라면 한반도 기원설이 설득력을 얻게 되는 셈이다. 한반도 주구묘의 잇단 발견은 일본학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다.
◇무덤 주인공은 한국인이냐, 일본인이냐=그렇다면 한반도 장고형 고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이 문제는 ‘정서상’ ‘민족감정상’ 한·일 학계를 뜨겁게 달구었고 앞으로도 달굴, 숙명의 논쟁거리이다. 그런데 먼저 고대사회에서 이같은 민족감정이나 국경의 개념을 논하는 게 무의미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 전제 아래 갖가지 주장들을 검토해보자.
▲우선 한국인이라는 설 이는 무덤의 주인공이 당시 영산강 유역에서 살았던 마한 토착세력의 수장이라는 것이다. 이 ‘토착세력설’ 주장도 여러가지이다. ①먼저 당시 마한지역은 백제의 완전한 세력권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을 유의해보자. 이런 상황에서 마한은 백제·신라·가야·왜(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편다. 그런데 이 영산강 유역 수장들이 왜(일본 규슈지방)와의 교류를 강화하면서 왜의 무덤인 장고분을 썼다는 주장이 있다. ②또 하나는 마한세력이 백제의 영향권 밖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규슈지방도 일본의 중앙세력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가정을 해보자. 이 상황에서 영산강 유역의 호족세력이 이런 규슈세력과 교류하면서 규슈의 묘제인 장고분을 썼다는 설도 있다. ③다른 견해도 있다. 백제가 영역을 넓히는 가운데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을 압박한다. 그런 상황에서 그동안 왜와의 왕래를 통해 ‘전방후원분’을 본 마한세력이 백제의 남하에 어필하는 의미에서 왜의 묘제를 썼다는 주장인 것이다.
▲일본인이라는 설 ①영산강 유역에 왜의 무역센터 같은 곳이 있었다. 이곳에서 종사하는 유력한 왜의 상사 주재원이 고향의 무덤인 ‘전방후원분’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②일본 연구자들 가운데는 왜 계통의 사람들이 영산강 유역에서 살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중 일부가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백제의 중앙귀족으로 진출한 사람들이 있었다. 결국 이 무덤은 백제귀족으로 편입된 왜계 백제관료라는 주장이다.
▲마한의 망명객이라는 설 이와 관련, 임영진 전남대 교수는 독특한 학설을 편다. 당시 일본열도에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마한 등에서 넘어간 한반도계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왜와 가야사람들이 뭉쳐 야마토 정권을 세운다. 그 격변기에서 북규슈에 자리잡고 있던 마한의 이주민들이 망명객의 신분으로 다시 고향인 전남지방으로 건너왔으며 이때 일본의 장고형 고분을 썼다는 것이다.
◇“무덤 주인공은 일본에서 귀환한 ‘마한인’의 것”=모든 주장이 나름대로의 논리와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한반도에서 주구묘를 썼던 전남지방의 마한세력 중 일부가 왜로 이주했다. 그런데 왜로 넘어간 마한 이주민의 후예들이 다시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걸쳐 원래의 고향인 영산강 유역으로 돌아온다. 이 무덤은 그때 쓰여진 것이 아닐까.
이들의 귀환은 당대 한반도 정세와 무관하지 않다. 서기 475년 한성백제는 고구려의 침공으로 수도를 공주로 옮긴다. 대격변기였던 것이다. 백제의 지배구조가 바뀌고 약해졌다. 그 틈을 타 왜로 이주한 마한세력 중 일부가 대한해협을 건너 돌아왔다는 가설이다. 아무튼 이 무덤에 대한 수수께끼는 아직도 명쾌하게 풀린 건 아니다. 문헌사학자들과의 공동연구가 필요하다. 그래야 실체에 접근할 터이다. 〈조유전/고고학자〉
영산강지역에서 일본으로 간 농업및 철기문화
영산강 유역의 마한 지역은 일본 농경의 시작인 죠몬과 야요이 문화를 이끌어 일본 문화가 시작될 수 있도록 했다. 일본과 마한 지역의 관계는 이후 백제와 일본 왕실의 관계까지 이어진다.
일본고대의 ‘야요이 시대’(BC3~AD3)를 전후하여 벼농사와 거석, 청동기, 철기 문화 등이 주로 마한(馬韓, BC3~4)에서 일본 큐슈(九州)로 전파되었다. 영산강 유역에서 발전한 조선기술로 고대 한일해협을 건널 수 있었던 마한 사람들이 큐슈 지역에 집단으로 이주했다.
“2000년 전 한국에서 ‘야요이인(彌生人)’이며 ‘고분인(古墳人)’들이 새로운 개를 데리고 왔다. 그 이후로 인간이 혼혈(混血)하여 현재의 일본인이 된 것처럼 이 때 혼혈한 개들이 현재 대다수의 일본 견종이 되었다.”. 타나베 유이치 교수(아자후대학 수의학과)가 필자에게 보내준 ‘개로부터 찾아내는 일본인의 수수께끼’란 논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건너 갈 때 개도 함께 간 것이다.
일본에서 ‘야요이인’은 서기전 3세기(BC.3) 이전부터 한국 남부에서 일본으로 건너 간 한국인을 가리키고 ‘고분인’은 서기 3세기(AD.3) 이후 도래인을 말한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 간 사람들과 일본 선주민(先住民)이 혼혈한 것처럼 한국개도 건너 가서 혼혈했다는 연구는 꽤 실감나는 내용이다. 그러나 고대 한국인은 개만 데리고 일본으로 간 것은 아니다.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큐슈에 전해진 한국제 괭이, 삽, 낫, 칼 등의 농기구를 일본 북큐슈 요시노가리(吉野ケ里)유적(사가현 동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가야 지역도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큐슈 남부의 사이토바르(石原, 지금의 미야자키현 사이토시) 유적이며 쿠레이시바르(礫石原) 유적, 하라야마(原山) 유적(역시 나가사키현 시마바라반도) 등에서도 그 흔적이 있다.
고대 한국의 농기구와 쇠로 만든 생활 도구며 대장간 시설까지 마한(馬韓)을 중심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는 큐슈 지역을 일본 농업 문화의 모체로 만들었다.
일본 고대의 각종 기구에는 마한 등에서 건너 왔다는 뜻인 한(韓)자들이 잇따라 붙여졌다. 고대일본 문헌에 보면 대장간을 카라카누치(韓鍛冶/한단야)로, 무쇠로 만든 삽을 카라사비(韓?/한조)라고 불렀다. 카라사비의 “사비(?)는 조선어의 ‘삽’과 동계어(同系語)이다”(카나자와 쇼사브로, 國學院大學 교수). 소가 끄는 ‘철제 쟁기’는 ‘카라스키’(韓鋤)라 했고 농작물을 타작할 때의 ‘도리깨’도 역시 ‘한’(韓)자를 머리에 붙여 ‘카라사오’(韓竿)라고 불렀다. 나무로 만든 목제 농기구 역시 ‘한’(韓)자를 붙여 써왔다.
한반도로부터 철제 농기구가 건너가기 전, “일본에 살던 사람들은 원시적인 생활을 했다. 논농사도 지었다지만 처음에는 골짜기의 물을 막아서 썼다. 농사는 나무로 만든 괭이나 삽으로 밭을 갈고 벼가 익으면 손이나 돌로 만든 칼로 벼이삭을 땄다”(교토대의 카도와키 테이지 교수, 1957). 목제 농기구며 돌칼 역시 한반도 남부로부터 큐슈 지역으로 옮겨갔다. 그 이전 일본인은 경작 농업 없이 맨손이나 나무 꼬챙이로 바닷가의 조개를 캐거나 나무 열매를 따먹는 채집으로 식생활을 해결했다.
“벼농사는 북큐슈에서 시작해 세토내해(瀨戶內海, 일본 열도 서쪽의 길고 큰 내륙 안쪽 바다)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여 야요이 문화를 낳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무렵 북큐슈와 남한은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남한은 최근에도 그렇듯이 쌀농사의 최적지이며, 2천년 전부터 일본과 벼농사가 서로 이어졌다.”(도쿄대의 야와타 이찌로 교수,1953) 여기서 구체적으로 마한 지역 농경 문화의 일본 북큐슈 지역 전파에 관하여 살펴보자.
지금부터 약 2300년 전 마한 등 한반도로부터 일본 큐슈 등지로 ‘벼농사법’이 건너 간 것에 대해 카도와키 테이지 교수는 고고학적인 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남한 특유의 바둑판형 고인돌이 북큐슈의 조몬시대(BC 3세기 이전의 고대) 말부터 야요이 시대(BC3~AD3) 전기(前期)에 만들어진 것과, 남조선의 지석묘에도 들어있는 마제 석기가 북큐슈의 야요이시대 전기 유적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1967).
“야요이 문화는 한국과 중국에서 들어왔다. 벼농사는 한반도 남부로부터 북큐슈로 전파되었다. 일본 열도에 많아 자포니카라 불리우는 벼 품종은 중국 장강 하류 유역을 거쳐 조선 남부로부터 들어 온 것이다.”(교토대의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 1976) 중국을 경유하여 한반도 남부 로부터 큐슈의 야요이 문화는 큰 영향을 받았다.
“벼농사를 비롯하여 철기문화며 마제석기에 이르기까지 마한의 문화는 큐슈땅에 넘쳐왔다”(요시노가리 유적 현장에서 큐슈대의 니시타니 타다시(西谷 正)교수의 말, KBS-TV, 2004.9)
일본과 마한 땅의 인연은 백제로 이어졌다. “일본 왕실은 5세기 후반부터 완벽한 백제 왕가(百濟王家)”(水野 裕, 1978)로서 백제인 오진왕(應神王, 5C 후반)의4왕자인 닌토쿠왕(仁德王, 5~6C)은 스승이며 왕실의 정무장관(西文首)이었던 왕인(王仁)이 와카(和歌, [難波津歌])를 지어 왕위를 권유해 등극했다.
박사 왕인이 마한땅의 영산강을 떠나 대마도를 거쳐 북큐슈의 사가현 동부로 상륙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현재 이곳에는 왕인천만궁(王仁天滿宮) 사당이 이어져 오며 ‘왕인석이상’(王仁石人像)도 보존되어 있다. 왕인이 공부했다는 전남 영암 월출산(月出山) 석굴 앞의 석인상(石人像)과도 매우 흡사하다.
교토시립예대 우메하라 타케시 교수는 “니니기노미코토(일본 역사 신화의 일본 개국신/필자 주)가 이끄는 천손족(天孫族)이 한반도에서 건너와 큐슈 남부에 상륙했다. 벼농사 기술을 가진 이 집단은 차츰 그 세력을 사이토바르(石原)에 까지 펼쳤다”(2002)며 영산강 유역의 마한인이 북큐슈로 상륙한 일본 정복의 ‘신화 민족’이라 말한다.
“이 사이토바르 유적지 고분군에서는 선박 모형(길이 101cm)의 ‘하니와’(왕릉 등 큰 무덤 매장자의 사후 호위를 위해 찰흙으로 구워 만든 부장품)가 발굴되었다(도쿄대 오오바야시 타료 교수, 1986).” 10여명이 탈 수 있는 형태의 이 선박의 원형은 마한 등 일찍부터 조선술이 발달한 영산강 일대에서 바다를 왕래했다. 일본에서는 4백 년 후인7세기에도 조선술이 크게 뒤져 당나라로 공부하려 가는 승려 등이 배편을 구할 수 없었다.
7세기 일본에서는 사신과 학승을 신라와 당나라로 보낼 때 ‘신라배’의 신세를 져야 했다. “서기 622년에 신라배를 얻어 타고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학생이며 학승이 야마토 조정에다 보고하기를 <지금 당나라에 체류중인 일본 학승과 학생들은 모두 공부가 끝나서 빨리 귀국할 수 있도록 마중하여 달라고들 합니다>라고 진언했다. 당나라로부터 돌아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신라의 당나라 사신이 타고 오는 배를 얻어 탔다”(큐슈대의 다무라 엔쵸 교수, 1989).
야요이 시대 북큐슈 등 서(西)일본에서는 주로 마한 등 남한 도래인들이 정착해 선주민들과 혼혈을 이루었다. “서일본의 야요이 전기의 인골에는 키가 작은 죠몬인과 평균 신장 163cm의 키가 큰 남성 인골이 있다. 한국 남부로부터 건너 온 도래인의 피를 받아서 비로소 야요이인이 생겼다고 본다”(靑木美智男外, 1993). 키가 작고 왜소한 선주민인 죠몬인들이 살고 있던 곳으로 벼농사와 철기문화를 가진 키가 큰 마한인 등이 건너 가서 야요이 문화를 일으켰다.
농사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몸이 크고 키가 큰 한국인이, 키가 작은 선주민들을 지배하며 부락을 이루고 부락의 수장(首長)들은 이웃 지역 수장들과 손잡고 야요이 문화를 이끌었다. 수장들이 죽으면 마한에서처럼 장엄한 장례식을 거행하고 시신을 항아리 속에 넣어 고인돌에다 장사 지냈다. 항아리를 묻은 묘지를 일컬어 옹관묘(甕棺墓)라고 부른다. 관 속에는 구리거울(銅鏡)이며 구리칼(銅劍) 등을 함께 넣었다. 옹관 대신 돌로 만든 석관도 썼다. 석관은 돌로 만든 지석묘 밑에 모셨다. 북큐슈에서는 그와 같은 옹관묘며 지석묘가 많이 발견되었다.
고인돌이 많은 영산강 일대의 고대 마한은 일본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고 죠몬, 야요이 문화는 즉 북큐슈에서 세도 내해를 거쳐 일본 서부 지역으로 널리 퍼져 오늘의 오사카는 물론 나라, 쿄우토 등으로 빠르게 퍼져갔다. 시간이 흘러 야요이 중기에 이르면 야요이 문화는 오늘의 도쿄(東京) 등 동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카나가와(神奈川), 시즈오카(靜岡), 치바(千葉) 등등 태평양 연안 일대로도 펴졌고 야요이 후기에는 일본의 토호쿠(東北) 지방인 아오모리 (靑森), 미야기(宮城), 야마가타(山形), 후쿠시마(福島)까지 널리 전파되었다. 이것이 모두 영산강 유역 마한 문화의 역동성이라고 할 수 있다.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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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니네조상은 왜 일본으로 안건너가고 너를 탄생시켜 셀프욕을 쳐먹고있냐 ㅋ
몇번을 말하냐..이 코리아대칸은 전형적인 북방몽골로이드라고....마고성 서남해에서 태어난 건 우리 해민족의 뿌리를 말해 주기 위함이라니까...서남해 마고성에서 모두 만나게 되는 거야..
@대한민국 코리아 궐한님은 너를 봤을때 서남아 스타일이라 하던데? ㅋㅋ
열도를 왜노국이라고 기록된 것은 마한(마조선)의 해상세력인 영산강왜왕조(반남고분의 주인들)의 노예국이였다는 의미..즉, 열도로 건너간 영산강사람들이 백인계 수렵족인 아이누족(흉노/키 작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문명을 전하며 살았다는 의미..왜구.왜노는 왜지역의 노예.오랑캐라는 의미로 해양무역이나 해양활동에 종사했던 왜세력의 노예생활을 하거나 도적질하는 세력으로 신라.가야에서 소외된 북방흉노선비세력을 의미한다.왜구들의 머리스타일이 북방초원세력의 머리스타일이다.
그래서 니가 왜구맞잖아 니가 스스로 북방몽골로이드라고 했는데 걔네들은 북방초원세력아니냐? 이 왜구야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