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목)
* 시작 기도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그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 같이 여겨 말씀을 따라 아내와 동거할 것은 그에게도 똑같은 은혜인 참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벧전 3:7).
주님...
나는 과연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며 존중했는지요?
이런 관계의 근본은 만물 위 곧 창세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의 관계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는 곧 복종과 사랑의 존재법에 의한 것임을 압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철저하게 복종하는 사랑을 하셨고 아버지는 그 복종을 받아 자기 자신을 다 내어주는 사랑을 하셨습니다.
어느 것 하나 착취하거나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은 오직 아버지 말씀에 복종하되 심지어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나 역시 이런 삶을 살아야 함에도, 나는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그런 복종과 사랑을 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런 나는 마땅히 지옥의 아랫목에 들어가야 할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이 죄인을 진멸하지 않으시고 창세전 언약에 따라 징계를 통하여 내게도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생명으로 오늘을 영위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연약한 자를 주의 보혈로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나 또한 주님 앞에서는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입니다.
하여 주의 품에 거하여 그 어떤 거센 풍파도 나를 해치지 못하도록 지켜주소서.
새 날을 주신 주님과 연합하여 동행하는 하루가 되어 거룩한 불구자로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상 17:17-24
제목 : 내가 이제야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 나의 묵상
엘리야는 17절의 ‘이 일 후에’ 사르밧 과부의 집에 머무는 동안 뜻하지 않은 일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이 일’이란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은 일로서 이로 인하여 엘리야와 과부의 가족이 여러 날 먹은 일을 가리킨다.
바로 이 일이 있은 후에 사르밧 과부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병들어 죽게 된 것이다.
과부의 아들이 죽게 된 것은 사실 엘리야와는 무관하게 발생한 것이다.
설령 그러할지라도 엘리야가 그 집에 머무는 동안 발생했기 때문에 엘리야로서는 적이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사르밧 과부가 자기 아들의 죽음을 엘리야와 연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엘리야는 그 일을 회피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가 자신의 죄를 생각나게 하기 위하여 자기에게 왔으며 그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그녀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비롯한 모든 신은 인간의 잘못을 트집잡아 재앙을 내리는 존재로 여겨졌으며 자신의 아들의 죽음도 그러한 결과라고 여긴 것이다.
어찌되었든 과부에게 있어서 아들의 죽음은 모든 소망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편도 없는데다 외아들까지 죽었으니 그의 슬픔과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이에 엘리야는 과부에게서 죽은 아들의 시체를 받아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으로 올라간다.
자신의 침상에 누이고 그 위에 자신의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린 후에 하나님께 아이의 혼이 그 몸에 다시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 때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이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시고 자비의 아버지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
구약 시대의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것이다.
오늘 17장에서만 사르밧 과부가 두 번에 걸쳐 하나님의 살아계시는 기적을 보았다.
이를 통하여 그녀는 24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며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이는 이방 여인인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 그에게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이 함께 있다 할지라도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하여 눈에 보이는 기적을 일으키게 하셨고 그 기적은 보는 이들의 오감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게 한 것이다.
엘리야는 그냥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가 행하는 일은 단지 죽은 자를 살려 목숨을 구하는 차원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하신 많은 일들 중에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그 일을 통하여 생명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믿게 하려 하심이다.
무엇보다 육신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참 생명 곧 아들의 생명인 영생을 얻게 하심이 하나님 아버지의 진정한 뜻이다.
오늘 본문 21절 이하에 보면 죽은 아이의 몸에 그의 혼이 다시 돌아와 살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 주심에 대한 상징성을 가진다.
‘혼’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네페쉬’는 육신의 목숨이다.
이 네페쉬가 있는 자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살아서 움직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 네페쉬를 가지고 있는 모든 동물을 가리켜 성경은 살았다고 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살았다고 말할 때는 네페쉬가 아니라 ‘조에’ 곧 아들의 생명을 가진 자를 가리킨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이 바로 그 아들을 믿으므로 영원한 생명인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사르밧 과부의 고백처럼 그런 일련의 기적들을 보고 믿는 것도 참으로 귀하다.
보고 믿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진짜 믿음이라고 하기가 좀 그렇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인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 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나 역시 구약 시대 사람들처럼 보고 믿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그러한 기적이 주는 신비함이나 신기함 등을 더 즐겨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님만 보면 표적을 보여달라고 채근하기도 했다.
그런 그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일갈하셨다(마 12:38-39).
예수께서 진짜 보여주기 원하신 표적은 요나의 표적으로 그것은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3일 동안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사흘 동안 땅속 곧 무덤에 있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마 12:40).
나 역시 사르밧 과부의 보고 믿는 믿음이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표적을 통해서 신기함과 신비함을 즐기는 자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그것을 본다 할지라도 자신 안에 있는 욕구를 채우는 것 그 이상을 얻을 수 없다.
다만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죽음으로 이끄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아들의 죽음은 곧 엄마의 죽음이다.
남편도 없이 아들 하나 보고 사는 엄마인데 그 아들이 죽었으니 엄마도 함께 죽은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죽은 아들이 육신의 혼이 돌아와서 살아났다.
그 순간 아들과 함께 죽었던 엄마도 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그 여인의 고백이 이것이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안다.
나는 그녀가 진짜 구원을 받았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진짜 보여주기 원하시는 무덤의 표적을 통하여 나 또한 네페쉬가 아니라 조에 곧 영생을 얻었음을 확신한다.
이제는 보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육신의 눈으로 보지 않고도 믿는 참 믿음의 소유자로 살기를 소망한다.
사도 요한의 공동체가 바로 그러했다.
(요일 1:1-3)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사도 요한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지 못한 자들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은 더더욱 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사도 요한을 통하여 들은 그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들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말씀을 듣고 보았으며 손으로 직접 만진 것처럼 믿은 것이다.
그것이 진짜 믿음이며 이를 가리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간증이라 하는데 이 말의 실제는 ‘견증(見證)’이다.
주의 말씀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끈다.
그 말씀이 곧 복음이다.
베드로 사도 역시 자신의 공동체에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곧 복음이었음을 고백한다.
(벧전 1:23-25)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창세전 언약인 영생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인함이다.
그것을 믿는 것이 진짜 믿음이다.
이는 우리가 창세전의 언약을 직접 듣지 않았고 보지 못했지만 그 언약이 마지막 때 주님이 재림 시에 완전히 성취될 것을 믿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진짜라고 믿었던 어리석은 자가 여기 있습니다.
사실 눈으로 보는 것들만큼 헛된 것이 없는데 말입니다.
크고 높은 빌딩을 가진 자는 그것을 믿고 세상을 떵떵거리며 이제 부러울 것이 없다고 하면서 살겠지요.
하지만 불이 나서 다 타버리면 재가 될 것인데 말입니다.
그것은 풀과 같이 마르고 풀의 꽃처럼 떨어지는 헛된 영광에 지나지 않음을 나 또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나에게도 마르고 떨어지는 풀의 꽃의 신세가 임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보이지 않아도 참 것의 세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세계를 지금 영안을 열어 봅니다.
오직 주님이 계신 그 곳, 영원한 생명이 항상 있는 그 나라를 소망합니다.
땅에 있는 만물 안의 세계에 더 이상 치심하지 않고 소망 가운데 그 나라를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