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비 오고 바람 부는 쌀쌀한 새벽입니다.
유난히 변덕이 심한 봄날을 대하며 종잡을 수 없는 인생살이를 생각합니다.
인생들의 희노애락은 변화무쌍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은 한결같습니다.
세상의 바람을 타지 않고, 한결같으신 주님의 뜻 안에서 십자가 붙들고 묵묵히 걸어가게 하옵소서.
오늘의 교제를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오늘도 주님의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영과 정직한 마음을 허락하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본문 주해)
17~18절 : 가뭄으로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과부와 과부의 아들이 기적 속에 살아간다. 그것은 통의 가루가 끊어지지 아니하고 기름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이었다.
그런데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어버린다.
그러자 여인은 그 아들의 죽음을 보면서 자기의 죄를 생각나게 한 엘리야를 원망한다.
차라리 엘리야가 자기에게 오지 않았다면 굶어 죽어서 이런 꼴을 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여인은 엘리야를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았고, 아이의 질병과 죽음이 자신의 죄로 인한 것으로 생각한다.
19~23절 : 이에 엘리야가 아이를 품에 안고 자기 방 침대에 누이고,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다.
죽은 아이와 몸과 몸을 맞춘 엘리야의 행동은 살아있는 자의 생기가 죽은 자에게 전수되기를 바라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죽은 아이가 살아나고 엘리야는 아이를 그 어미에게 돌려준다.
24절 : “그 여인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제야 저는, 어른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시라는 것과, 어른이 하시는 말씀은 참으로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새번역)
여인은 죽은 아이가 살아난 기적을 통하여 신앙의 본질적 의미를 알게 되고, 그것을 고백한 것이다.
여인은 죽었다가 살아난 아이에게 주목하지 않고, 아이를 살린 엘리야에게 주목한다. 그리고 엘리야가 참 하나님의 사람이고, 그가 한 말이 진리라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예수님께서도 죽은 자를 살리셨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을 베푸시고, 표적을 나타내신 것은 단순히 인생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위로해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나의 묵상)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의 말에 순종함으로 매일 기적 속에 사는 체험을 하였다. 그것은 그 집에 양식-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 일을 통해 여인은 자신이 엘리야를 믿었고 또 엘리야의 하나님을 굳게 믿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가장 소중한 아들이 병들어 죽고 만다.
그러자 여인의 생각이 달라진다. 이럴 바엔 차라리 양식이 떨어져 죽기로 결심했을 때, 그냥 죽게 두지, 왜 양식을 주어 살게 했을까 하며 엘리야를 원망하는 것이다.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체험하며 ‘하나님’을 생각했던 여인이 이제 자기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아들이 죽어버리자, 믿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원망만 남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신 것일까?
사르밧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어 진짜 믿음을 선물하시고자 한 것이다.
여인은 아들의 소생을 통해 하나님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여인의 고백은 신앙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 여인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제야 저는, 어른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시라는 것과, 어른이 하시는 말씀은 참으로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24절, 새번역)
나는, 육의 양식을 있게 하여 목숨을 살려준 엘리야를 믿은 과부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믿었었다.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감사가 넘치고(물론 그 감사가 거짓은 아니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나의 무슨 죄 때문인가?’ 하며 불안해 했다. 그래서 그것을 만회(?)하려고 ‘헌금을 더 많이 해야 하나? 새벽 기도를 작정해야 하나? 교회의 일에 더 충성해야 하나?....’를 생각하며 실천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와 같은 생각과 행동은 신앙의 본질을 몰랐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앙의 본질을 몰랐던 것이다.
그저 ‘예수를 믿음으로 잘 되는 것’에 온통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기적인 것은, 다시 아들을 찾은 과부의 눈이 드디어 하나님을 주목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손에서 아들이 떨어지고, 하나님을 붙들게 된 것이다. 물론 그녀는 여전히 아들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크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내게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물질과 내 가족과 내 교회....만을 소중히 생각하던 자에게 복음이 들려지고, 생명의 삶을 살게 하시니, 내게 과부의 아들과 같이 소중히 여기던 그런 것들에 대한 사랑, 땅에 붙은 마음으로 하는 그 사랑을 그치게 된다.
십자가를 두 손으로 꼭 붙드니 다른 것을 잡을 손이 없다.
그리고 사르밧 과부의 고백과 같은 고백을 하는 것이다.
‘이제야 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습니다.’
이 고백을 올려드리며 주님께 시선을 두는 자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구약의 말씀이 오늘도 너무너무 달콤하다!
(묵상 기도)
주님,
사르밧 과부에게 베푸신 은혜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저 마지막 양식을 먹고 죽으려고 했던 여인에게 육의 양식을 공급하여 주시고
또 영원한 생명의 양식까지 주신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을 수많은 무리들이 따랐지만
생명의 양식 이야기를 하니 다 떠나고 맙니다.
너도나도 주님 곁에 있고 싶어할 줄 알았는데 참 의외입니다.
생명의 이야기는 오직 택한 백성에게만 들리는 말씀인 것을 알게 됩니다.
아이를 다시 안은 여인이 영원한 생명에 눈을 뜬 것처럼
제게도 복음을 들려주시고, 영생의 삶에 눈을 뜨게 하시니 감사만 넘칩니다.
남은 삶 동안 많은 사르밧 과부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들에게 복음과 생명을 풍성하게 전하는 인생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