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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7: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7: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8: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8: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8: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8: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 주해
1. 성령으로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을 전한 사도들, 박해에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을 이어 스데반이 담대히 복음을 전한다.
1) 하나님은 신실하게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어 가셨다.
2)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칠 만큼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고, 요셉은 입애굽을, 모세는 출애굽과 생명을 주는 말씀을 주는 일에 신실하였다.
3) 그러나 언약의 조상들은 요셉과 모세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선지자들 중에 박해하지 아니한 선지자가 없었다.
2. 스데반은 공회에 있는 자들이 조상들처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여 항상 성령을 거스른다”고 하면서 율법(생명을 주는 말씀)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다고 고발한다.
1) 스데반은 공회에 있는 자들의 완악함이 곧 그들의 조상들과 같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2) 스데반은 베드로처럼 구약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을 성령으로 전하며 그들의 죄를 드러내었다.
3) 베드로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 2:36)라고 복음을 전했을 때,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고!”라고 하며 회개했다.
3. 그런데 “마음이 찔렸던” 공회원들은 회개 대신 “분노와 적개심”으로 반응한다.
행 7: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1) 찔려(디아프리오): 조각 조각으로 톱질하다.
- 마음을 조각 조각 자르다(도려내다)라는 뜻으로 본문은 수동태로 '격분하다, 화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2) 스데반의 말은 살아 있고 운동력 있는 말씀처럼 그들의 마음을 조각조각 톱질하였다.
3) 그로 인하여 그들은 스데반을 향하여 격분하며 이를 갈았다(54절).
4) 대개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지만 그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 격분한다. 처음에는 변명하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어지면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도리어 화를 내고 공격한다.
4. 복음을 전하여 마음이 찔렸는데 격분하여 이를 가는 자들과 성령충만한 스데반은 너무나 대조된다.
행 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1) 공회원들과 거짓 증언자들이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 때, 스데반은 그들의 완악함에 대하여 같이 분개하지 않는다.
2) 도리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55절).
3) 그 충만한 영광을 본 스데반은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라고 하였다.
5. 마음이 조각조각 나서 이를 갈고 있던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더욱 격분하여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달려들어 스데반을 죽인다.
행 7: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1) 공회원들이 더욱 격분한 이유는 스데반이 “인자”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다고 했기 때문이다.
2) 전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재판할 때도 그들은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있다”는 예수님의 말을 신성모독으로 여겨 십자가 죽음에 넘겼다.
마 26: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마 26: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3) “인자”는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인자다. 인자는 종말의 때에 모든 나라를 다스릴 권세를 받은 그리스도를 말한다.
단 7: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6. 스데반은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자신이 본대로 증거한 것이다.
1)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임을 보았다고 하자, 더 이상 자신들의 마음을 톱질하는 말씀을 듣지 않겠다는 의지로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며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친다.
2) 율법에서 신성모독의 죄는 돌로 쳐 죽이는 형벌에 처하였다(레 24:14-16).
7. 증인들은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58절).
1)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은 복음을 전하는 스데반을 신성모독죄로 돌로 쳐서 죽이는 장면이다.
2) 바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주동자로 참여하고, 스데반의 순교 후에도 교회를 진멸하려는데 앞장을 선다.
8.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보지 못하였다. 대신 바울은 스데반이 순교하는 모습을 보았다.
1) 12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본 것이 후에 충격적인 영향을 미쳤듯이, 바울에게는 순교하는 스데반의 모습을 본 것이 후에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2) 왜냐하면 스데반과 예수님은 동일하게 공회에서 억울한 재판을 받았고, “인자가 보좌 우편에 있다”는 같은 말로 죽음에 넘겨진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모습과 스데반의 순교하는 모습은 너무나 흡사하다.
행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9. 스데반이 십자가 복음을 얼마나 깊이 알고 믿고 누렸을까? 얼마나 십자가에 못 박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면 돌에 맞아 죽는 그 순간에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1)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으나 관리들은 “그리스도이면 자신을 구원하라”고 조롱하였다.
2) 예수님은 죄가 되어 아버지께 버림받은 그 순간에도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면서 파레시아를 준행하였다.
3) 스데반이 동일하게 돌에 맞아 죽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주 예수께 드린다.” 그리고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대신에 자신을 돌로 죽이는 그들에게 이 죄를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한다.
10. 문자 그대로 스데반과 예수 그리스도는 연합되었고, 스데반을 통해 그리스도가 사신다.
1) 후에 바울은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알았을 것이다.
2) 스데반의 복음 증거와 순교하는 모습은 복음을 통해 예수 생명으로 사는 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어디까지 그리스도의 생명을 드러낼 수 있는지, 어느 정도로 그리스도가 사는 삶이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11. 사도들과 스데반만 이런 믿음을 가졌는가? 이후의 모습은 사도들과 스데반의 믿음이 초대 교회에 보편화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1) 그날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 그래서 사도들 이외에는 모두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야 했다(1절).
2) 교회를 박해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울이었다.
행 8:3 그런데 사울은 교회를 없애려고 날뛰었다. 그는 집집마다 찾아 들어가서,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끌어내서, 감옥에 넘겼다.
12. 박해로 흩어진 성도들은 숨는 대신에 두루 다니며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에 복음을 전했다.
행 8:4 그런데 흩어진 사람들은 두루 돌아다니면서 말씀을 전하였다.
1) 그들은 예루살렘과 가까운 지역인 유다뿐 아니라 북쪽으로 사마리아인들의 땅까지, 그리고 결국 이방인 땅이었던 베니게(페니키아), 구브로(키프로스)와 안디옥(안티오키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11:19).
13. 많은 성도들이 복음을 전했으며, 그 대표적인 예로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빌립의 이야기가 나온다.
행 8:5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행 8:6 무리는 빌립이 행하는 표징을 듣고 보면서, 그가 하는 말에 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행 8:7 그것은, 귀신들린 많은 사람에게서 악한 귀신들이 큰 소리를 지르면서 나갔고, 많은 중풍병 환자와 지체장애인이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행 8:8 그래서 그 성에는 큰 기쁨이 넘쳤다.
1) 요한복음에서는 사마리아의 복음화가 시작된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다(요 4:4-42).
2) 그러나 전반적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메시아를 대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했는데, 모세 오경에는 메시아 도래 사상이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3) 빌립의 사역은 한 마디로 예수님과 같고, 사도들과 같고, 스데반과 같다.
-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사도들의 사역은 특정 그리스도인의 영역이 아님이 계속 증거된다.
14. 빌립은 그리스도를 전하였고, 수많은 귀신들을 나가게 하고,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을 고쳤다.
1) 그로 인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은 한 마음으로 빌립의 말을 따르며,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
2)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었으나, 빌립을 통하여서는 성 전체가 복음에 반응하며 기뻐하는 일이 일어났다.
15. 박해로 흩어진 성도들과 빌립은 복음을 전하다가 스데반이 순교한 것을 너무나 잘 안다.
1) 그러나 숨고 위축되기 보다는 스데반과 동일하게 복음을 전하고 표적을 행한다.
2) 즉 스데반처럼 복음을 전하다가 스데반처럼 순교를 할지라도 복음을 전하겠다는 믿음이 있었다.
16. 그들은 이렇게 예수님이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였다.
1) 순교해도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쉽지만 실제는 대단히 어렵다.
- 아프칸에서 샘물교회 선교팀이 피랍되어 순교했을 때, 한국 교회의 단기선교는 위축되었다. 코로나로 인하여 모이지 못하자 복음전파도 위축되었다.
2)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고, 예수 생명이 밝히 드러나면 모든 성도들은 사도행전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 나의 묵상
하나님은 사도행전을 통해 오랜 고정관념을 깨뜨리라고 하신다. 사도들의 삶과 사역은 특정인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택한 사람들이나 특별한 사람들만이 가능한 삶이라는 고정관념에 나는 깊이 잡혀있다. 사도들, 스데반, 빌립, 바울의 삶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지금도 가능하지만 특별한 사람들에게 한정되었다는 사단의 거짓말이 내 마음 깊이 박혀 있다. 사단의 거짓말은 나의 경험을 통해 더 고착화 되었다. 조금이라도 사도행전의 삶을 흉내내 보았지만 그 결과는 자기주장의지와 번아웃으로 인한 실패였다. 내가 얼마나 연약한지, 인간들이 얼마나 죄인들인지, 이 세상이 얼마나 각박한지를 실감하면서 사단의 거짓말은 내 마음을 설득해 냈다. 지금도 생명으로 사는 삶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렇게 살 수 없구나”라는 불신이 자리를 잡았다.
스데반의 순교 장면은 현실이어야 하고, 나의 삶이어야 하지만 너무나 거리가 먼 전설 같다. 이해는 된다. 믿음의 신비는 연합에 있다. 복음을 알면 알수록 복음의 신비는 연합에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나도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도 장사되고 나도 부활한다. 그 연합은 계속되어져서 주님은 내 안에서 사시고, 나는 주님 안에서 산다. 주님이 나의 생명이 되시고, 부활의 주가 되셔서 나를 통해 사신다. 내 안에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임으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사실 스데반의 믿음과 순교는 이 복음 그대로다. 이 복음 이상의 신앙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스데반에게는 당연한 삶이다.
예수님과의 연합은 믿는 자 모두에게 너무나 당연하고, 반드시 실제가 되어야 하는 진리다. 특출한 믿음이 있는 자가 아니라 모든 신자가 믿고 누려야 할 필수적인 진리다. 그런데, 이 당연한 진리가 왜 이렇게 실제가 되지 않는지 모른다. 이 연합의 믿음은 세례 받는 자의 믿음이다. 세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세례를 집례하면서도 세례의 믿음이 없는 비참함과 완악함이 드러난다. 나는 ‘어찌할꼬’하며 회개하는 자인가? 아니면 ‘어찌할꼬’하며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자인가? 안타까운 것은 그 중간에 있는 것이다. 엘리야가 지적한 백성들처럼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는 자다. 중간이 없음에도 중간에 있으려고 고집을 부린다.
그 악랄한 인간 중에 바울이 있었다는 것이 도리어 소망이 된다. 그 악랄한 인간, 마음에 찔림을 도리어 분개로 표현한 자, 교회를 진멸하려고 날뛰던 자를 주님이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그를 만나주시며, 그에게 계시를 통하여 스데반같이 생명으로 살게 하셨다. 바울의 신앙고백은 스데반의 삶과 동일했다. 그러기에 악독한 나를 주님께 드리며, 긍휼로 찾아와 주시기를 기도한다.
공회원들처럼 마음에 찔려도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완악함으로 버티는 죄인, 십자가의 주님께로 나아간다. 나의 죄를 위하여 기도하신 주님께 나아가 죄사함을 받고, 그 긍휼로 인하여 완악한 마음이 녹아지며, 그 사랑으로 인하여 부드러운 마음이 되기를 원한다. 십자가의 용납으로 나를 용납하신 주님은 여전히 내 안에 거하시며, 내 생명이 되신다. 내 안의 사망을 도말하시고, 부활의 주로 통치하신다. 주님이 찔림으로 나의 허물이 사함을 받고, 주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평화를 누리고, 주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 이런 나를 영접하시고, 내 안에 사시는 주님의 인자와 신실함을 찬양한다. 그 사랑이 상한 갈대와 같은 나를 붙드시며, 그 사랑이 생명으로 이끄신다. 주의 긍휼로 나의 도움되시는 하늘 아버지, 그 은혜의 보좌로 나아간다.
◈ 묵상 기도
주님, 사단의 거짓말, 현실 세계의 각박함, 전적으로 타락한 인생들의 실체와 저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옵소서. 사단의 머리를 밟으시고, 죄는 사하시고, 사망을 폐하신 부활의 주, 생명의 주를 믿고 그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공회원들이 이를 갈아도 하나님의 영광과 인자를 본 스데반의 성령충만함을 부어 주십시오.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그 믿음과 연합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초대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이런 믿음이 있었으니, 이 완악한 종도 이 믿음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고백 그대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이 초대교회가 저희 교회, 모든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더 아파하시고 눈물 흘리시듯이 지금의 저와 교회는 상하고 터지고 병들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사랑과 성령의 기름으로 고치시고, 성령께서 복음을 증거하여 생명을 주십시오. 고난 더할수록, 박해가 더할수록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생명의 역사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뜻을 이루십시오. 다음세대와 교사들, 셀장들과 목회자들에게 성령충만함으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