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여자남편의 무감동하고 관성적 행위가 끝나자,여자는 천천히 일어나 침대를 빠져나왔다. 전에는 눈을 뻔히 뜨고 누워 그녀의 남편이 잠들기를 기다렸었다. 여자는 왜 남편처럼 관성적이 되지 못하는지,어째서 아직도,번번이 폭행당했다는 기분과 배설구가 되었다는 비참한 분노가 치미는지 알 수가 없다.
여자는 주방으로 나가 냉장고의 찬물을 단숨에 들이킨다. 그리곤 헛헛한 기분인 채,
큰잔에 얼음을 가득 채워 컴푸러 앞으로 가 앉는다.
파워를 켜자 사각 모니터에서 푸른빛이 화~하게 뿜어져 나와 여자의 얼굴에 반사된다.
컴푸러 안에는 여자가 키우는 딸,장미가 있다. "프린세스 메이커"란 게임이다. 컴푸러안의 딸년 조차도 여자의 의도대로는 커주지 않는다. 여자가 왕자에게 시집보내려 시간과 머리를 짜서 기껏 키워 놓으면 딸년은 유치원 교사가 되거나 수녀가 된다.
너무 엄격하게 키워서 그런가 하여 이번에는 호프집에 두 번,카페에 두 번 보내줬더니 그저껜 창녀가 되고 말았다. 컴푸러 안에서도 육아와 교육은 역시 머리만 아프고 남는게 없다.
현실의 여자의 딸은 스무살,공대 건축가 2학년이다. 고 3때,공대에 가려는 딸에게 네 적성이 아니라고 극구 말렸지만 딸년은 기어이 건축을 하겠노라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던 딸은 그저께 아무래도 건축이 제 적성이 아닌 것 같다고 두다리를 뻗고 울부짖었다.
장미는(컴푸러 안의 딸이름이다)16살에 키가 160,몸무게가 47킬로그램이다. 이번엔 잘하면 미스 코리아까진 성공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자의 목적은 어떻게든 왕자와 결혼시키는 일이다.
여자는 삼십분 쯤 장미를 데리고 놀다가 성장을 메모리시킨 다음 게임을 빠져나왔다.
게임을 빠져나온 여자는 곧장 유령세계에 접속을 시도한다. 여자는 한동안 이곳에 오지 못했다. "천재"때문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의 두려움을 알게한 젊은이다.
지이익~ 끄륵. 끄르르르륵...
유령계에 접속하는 회선 01410은 이미 너무 오래,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부려먹어서 여자를 그곳으로 진입시키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가까스로 덜컥 접속에 성공하고 나면,그때부터 컴푸러는 고도의 합리적이고 방정식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 원하는 번호/약부호/상품코드를 입력하십시오.-
쉐도우 랜드,엔터. 스르르 화면이 바뀌고,
- 쉐도우 랜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쉐도우 랜드.
그곳은 유령들의 세계다. 모니터와 손가락으로만 생존이 가능한 세계.
서늘한 푸른빛의 모니터 저 안쪽,캄캄한 저 너머에 전국의 수많은 유령들이 외로움에 치를 떨며 이 밤,누군가와의 교신을 위해 이리저리 안타깝게 떠돌고 있다. 그 유령들은 몹시 외롭고 너무나 고독하여 잠잘 수 없는 유령들이 대부분이었다.
여자는 기억한다.
여자가 처음 통신을 알게되었을 때,눈앞에서 확~하고 일시에 열리던 그 신천지의 감동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가히 컬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에 버금가는 감동이었다.
가상의 세계. 말로만 듣던 사이버의 세계는 상상 이상이었다. 상상의 세계란 얼마나 근사한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의 여행은 또 얼마나 설레임이던가. 그녀가 접한 통신은 매일매일이 흥분과 호기심의 천국이었다. 여자는 단숨에 빠져들었다.
여자 인생에서 이렇게 단숨에 한곳으로 미친 듯이 빠져들었던 적이 저 첫사랑 그 아이 말고 또 있었던가.
여자는 인간관계에 있어 그리 열정적이거나 사교적이지 못하다. 그런 여자에게 통신은 세상으로 통한 통로였으며 여자에게 말을 걸어오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물론,여자 역시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사람들을 만난다.그러나 여자는 번번이,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넌더리를 내며 결국은 흐지브지한 사이를 만들어 놓기 일쑤였다.
그 얼마 안되는 인간관계에서 조차 그녀는 배신과 실망도 경험했다. 그러는 동안 지혜도 생겼다. 여자는 이제 누구와의 사귐에도 마음을 통채로 열어 보여주거나 보려고 하지 않는다. 헤어질때 힘들지 않을만큼 예의바르게 사귀고 가볍게 헤어진다. 그녀는 타락하고 만 것이다.
관계가 복잡해 질수록 진솔한 마음은 없어졌다. 거짓말이 늘고, 숨기고 덧씌웠다. 더러는 나좋자고 하는 거짓말도 있고, 더러는 쓸데없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사실을 숨긴다. 또 그것들을 은폐하기 위해 또다른 거짓말을 덧대기도 하면서 여자는 자신이 타락했음을 알았다. 그런 타락을 보면서 여자는 여자가 한 때 한없이 진실하였던 옛날이 그리워 이따금 마음이 쿡쿡 쑤셨다.
여자는 이제 더이상 관계에 연연하지 않는다.
접속만 하면 친구는 얼마든지 있었다. 굳이 식구중 누군가에게 버림받았다고 푸념할 필요도 없었다. 연상의 남자와 연하의 애인이 발에 채일만큼 많았다. 마음만 잘 먹으면 말이다.
여자는 하루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살았지만 대화에 굶주리지 않았고, 한달 내내 사람을 만나지 않고도 외롭지 않았으며,몇달인가를 외출하지 않았음을 깨닫지 못했다.
통신은 여자에게 애인이며 남편이고 딸이며 아들이고 친구고 이웃이었다. 즐거움도 행복도 불행도 슬픔도 다 그 안에 있었다.
통신은 여자의 마흔일곱이란 나이에도 트집잡지 않았다.
통신의 익명성이 여자의 나이를 훌륭하고도 완벽하게 커버해 주었다. 얼마간의 시간만 투자하면 몇번의 클릭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언제라도 빠져나올 수 있다. 언제든 자신의 세계로 복귀가 가능한 것이다. 여자가 통신에 빠져든 장점 중의 장점이었다.
여자는 또 이 쉐도우랜드의 한모퉁이에 글을 써 올리기도 한다.
여자의 글을 좋아해 주는 독자도 꽤 많이 생겼다. 여자가 글을 써올리면 그날로 조횟수 100회를 넘어가는 빠른 반응에 여자는 흠뻑 매료되어 있었다. 물론 조횟수와 좋은글이 비례하는건 아니다.
하지만 공들여 쓴 글을 올리고 난 뒤 조횟수가 올라가면 기분이 좋았다. 상당한 격려도 되었다. 아무도 시비걸지도 않는다. 읽히지 않는 글을 써놓고 여기저기 지면을 기웃거리는 짓을 할 필요도 없다. 통신글의 특성으로 내일이면 곧 저 아래로 떼밀려 가는 외로운 몸짓에 불과할지라도 여자는 그 외로운 울림조차도 그즈음에는 한줄기 빛이었다.
여자는 쉐도우랜드에서 최연장자 마을로 찾아간다.
"무픙지대" 그 마을은 통신을 하기엔 좀 민망할정도의 연령들의 동호회였다. 캐나다,시카고,엘에이,뉴질랜드, 호주 등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밤마다 모여들어 유쾌하게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50대가 대부분이고 60대도 드물지 않으며 그녀의 마흔일곱살은 영계에 속했다. 그곳 유령들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그곳에서 만났으므로 그들끼리는 유령이라고 하기엔 부당할 만큼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끔 그들 중 하나가 외국에서 귀국하면 "번개"를 하여 실제모임을 갖기도 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사람들은 제분야에서의 자부심도 갖고있었고,통신이 주는 가벼움이나 부정적 견해에 대하여 나름대로 힘껏 저항해 보려 하기도 한다.
컴맹인 여자의 남편은 한 때,그녀가 통신을 한다는 이유로 그녀가 당장 불륜을 저지른 것처럼 싸움을 걸어온 때가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통신이라고 하여 통신밖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이 일어나진 않는다는 거다. 세상이든 통신이든 조심하여 살지 않으면 지키고 싶은 것을 못지키게 된다는 점에서 아무것도 다를게 없다.
"무풍지대"엔 그날도 낯익은 유령들이 붐비고 있었다.
모세,바다,솔.들꽃,대장,등 저마다 대화명을 달고 방안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의 통신에서 터득한 언어의 생략과 단축의 묘미를 즐겼다. 가령,안녕하세요,어서오세요,반갑습니다.
잘지내시죠? 이렇게 기나긴 인사말을 단 두글자로 단축하여 썼다.
어떤 유령은 헉헉!으로,어떤 유령은 학학!으로, 어떤 유령은 헥헥!으로....이런 식이다. 세종대왕이 아시면 대노하시겠지만, 한사람이 등장하면 화면이 몇바퀴 바뀔 때 까지 인사하느라 나중엔 무슨 얘기를 하고 있던 중이었는지 조차 잊어버릴 정도였으니,그들도 궁여지책 짜낸 경제적 발상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여자는 헉헉!을 치고 대화실로 들어간다.
한동안 화면은 헉헉과 학학과 헥헥과 허걱과 흐어억이 뜨고,곧장 원래의 주제로 돌아간다. 그들은 새회원을 파악하기 위해 일명 "진시리"를 하고 있었다. 새로 가입한 회원을 불러다가 집중적으로 돌아가면서 질문을 퍼부어 통신의 익명성에 힘껏 저항해 보려는 게임이었다.
"진실게임"을 잘만 하면 인격,교육수준,취향,성격,신체사이즈까지 한사람의 신상명세를 파악하는데 그리 어렵지 않다.
여자는 늦게 들어갔으므로 한동안 방한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는다.
질문1: 요즘 무슨 생각하며 사십니까?
답: 어떻게 하면 이 난세에 처자식 안굶기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질문2: 일과 사랑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면 어떤걸 하고싶으세요?
답: 일요. 멋진일을 하고 있으면 사랑은 절로 찾아드니까요.
질문3: 숨겨둔 애인이 있나요?
답: 아뇨, 하지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질문4: 애인이 생기면 뭘 할건데요?
답: 글쎄요...아마 다시 한번 불같은 사랑을 하게되지 않을까요.
질문5: 잘생겼나요?
답: 예에.
그의 예에,란 거침없는 대답에 모두 푸하하하~폭소가 터진다.
대놓고 저렇게 망설임없이 자기가 잘생기고 잘났다고 선전할 수 있는 곳이 통신말고 또있을까. 남자들은 물어보지도 않는데도 자신이 "금상첨화의 남자"라고 자신을 서슴없이 광고한다.
금상첨화에 대하여 부연하자면,남자의 페니스(이하 거시기)도 크면 금상첨화, 코가 크고 거시기가 작으면 유명무실,코는 작은데 거시기가 크면 천만다행,코도 작고 거시기도 작으면 이건 설상가상으로, 이젠 통신안에서는 고전이 되어 버린 야설이다.
그런데 남자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들어오기만 하면 자신이 금상첨화라고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여자는 묻는다. 그래서? 쏘 왓?
그남자가 설상가상이든 금상첨화든 도무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사람들은 그로 하여 마구 폭소할 수 있다.
어쩌면 오늘 하루 중 처음 웃어보는 웃음일지도 모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하루종일 고단하게 보낸 하루의 피로를 폭소로 마감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질문은 갈수록 색이 짙어진다. "숙제"는 잘하고 있느냐,혹 밤마다 베개들고 벌서진 않느냐고 뻔뻔스런 질문도 거침없이 나온다. 어떤 남자유령은 빨리 질문하라고 다그치는 동료유령에,
- 지는 질 문은 없는디유. 요도만 있는디유.-
해서 한동안 화면이 스톱상태가 되었다. 모두들 웃느라 자판을 칠 수가 없었던 거였다.
이윽고 자정도 지나고, "무풍지대"의 유령들도 하나 둘 마을을 떠났다. 제가끔 현실의 자리로 돌아가서 잠시동안 버려두었던 아내, 혹은 남편의 옆자리를 열고 그들의 잠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 조심스레 잠을 청할 것이었다.
여자는 아직 잘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일을 할 기분은 더 아니었다. 여자는 "무풍지대"를 떠나 중앙의 큰마을로 나가 본다.
go chat. 중앙대화실.
거긴 아직도 교신할 상대를 찾지못한 유령들로 대기실은 초만원이었다. 여자는 습관적으로 엔터키를 탁탁치며 삼삼오오 혹은 단둘이,들어앉아 있는 대화방들의 이름들을 보고 있었다. 방이름은 원색적이고 감각적일수록 사람들이 몰려든다.
-나는 오늘 낮에 당신이 한 짓을 알고 있다.-
-오라오라오라.-
-어쩌면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사랑이 될른지 모릅니다.-
- 오늘밤,당신의 황짜밤을 확실하게 책임진다!-
여기서 황짜밤은 황홀하고 짜릿한 밤이란 뜻이다.
뭐니뭐니 해도 20세기가 인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뭐니뭐니 해도 집집마다 한 대씩 놓여진 컴푸러일 것이다. 한때 어떤 시인이"컴푸러와 씹할 수 있다면"이란 시를 써서 독자들을 놀래켰지만,지금 저 대화방 안에는 수상한 남녀들이 컴푸러 앞에 앉아 몇마디의 의성어와 의태어와 말없음표와 느낌표,혹은 사랑해, 따위의 짧은 몇글자로 완벽한 올가즘에 도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띡!하는 단음과 동시에 쪽지가 날아든다.
- 999번 대화실에서 (sky1)님이 초대하고 있습니다. 비밀번호는 777입니다.-
천재였다. 여자가 통신을 시작하면서 만나 통신초보인 그녀를 통신도사가 되게 도와준 남자였다.
그들은 약 2년 동안 밤마다 만났다.
그가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하여 문제가 되기전까지,여자는 그에게서 상당한 에너지를 공급받았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소중한 존재가 되고있다는 느낌은 여자를 얼마나 살맛나게 했던가. 식구들이 잘 들으려고 하지 않던 얘기,남편과 잘되지 않던 얘기,통하지도 않고 통하고 싶지도 않던 얘기들을 천재와 얘기하면서 그들은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다.
화나고 억울하고 쓸쓸하고 고독하여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그들은 모니터 앞에 나와 서로를 기다렸다.
35살의 천재가 아직도 독신으로 지내는 까닭을 얘기하던 밤은 일주일 내내 폭우가 쏟아지던 여름이었다. 천재는 휴가중이었고 그들은 거의 매일 함께 새벽을 맞았다.
- 내 어머니는 나를 낳기전에 딸 하나를 데리고 우리 아버지에게 시집을 왔지. 정이누나는 나보다 5살 위였어. 나는 태어나자 마자 과수원집 일에 치인 엄마 대신 그녀 손에서 더 많이 자랐지.
그녀의 알뜰한 보호아래 마루끝에 앉아 동화책을 읽고 햇빛쏟아지는 사과나무 사이를 뛰어 놀았어. 아무도 없는 고요한 한낮의 과수원 나무아래 나란히 누워 그녀의 가슴도 만져보고... 정이누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기고 제일 멋진 남자가 바로 나라고 말했지. 얼굴이 하얀 정이누나는 몸이 약했어. 그녀가 코피를 흘리며 머리를 뒤로 젖혀 내게로 몸을 맡겨오면 나는 그녀에게 무엇이든 되어주고 싶어 가슴이 미어졌지.
내가 다 자라서 고향을 떠나 고등학교와 대학에 들어갔지만 나는 명이누나가 내여자임을 잊은 적이 없었어. 방학이 되어 한달음에 과수원으로 달려가면 그곳엔 전보다 얼굴이 더 희어진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군입대하기 전 날,나는 밤중에 그녀의 방에 침입하여 반듯하게 누워있는 그녀의 몸위로 올라갔어.그녀도 저항하지 않았어. 꼭 한번이었지만 그것으로 그녀가 나를 기다려야 한다는 무언의 언약이었지. 그런데...-
천재는 힘이 드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자신의 얘기를 하는동안 뭔가 감정에 북받친 것같았다.
- 힘들면 얘기하지 마라,천재. 안들어도 돼. -
- 아냐. 얘기 할거야. 잠깐 나 물 좀 먹고 올게. 기다려, 가지말고. -
잠시 천재가 물마시러 간 사이 여자도 화장실을 다녀왔다. 얼마 후,다시 천재가 얘기를 계속했다.
- 어디까지 했지? 응,그래...내가 군에 간 사이,그녀는 시집을 간거야. 것두 그녀가 몹시 서둘러서. 그리곤 얼마후,명이누나는 스스로 죽었어. 들으니 시집가자마자 배가 불렀던게 문제였어...그게 내 사랑의 끝이야. 난 결혼할 수 없었어...나 때문에 한여자가 그렇게 됐는데...한번도 행복해 보지도 못하고 죽었는데...나도 행복할 수 없었어......근데,요즘 으뜸이 널 만나면서...꼭 그녀를 만나고있는 느낌이 든다...
행복해 지고싶단 생각이 들어...-
그런밤이면 그들은 그들 둘로서 충분했다.
- 으뜸이 남편은 어떤 사람인감? -
천재가 물었다. 어떤사람? 여자는 자신의 남편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한 사립 여자고등학교의 생물선생,주말마다 캔버스를 메고 풍광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좋은 취미를 가진 쉰 살의 남자. 이미 너무 늦어 보이는데도 어떻허든 그림으로 깃발을 날리겠다는 꿈을 버리지 못하는 남자. 초중고등학교때 지방의 경연대회를 휩쓸었던 자신은 틀림없이 피카소적 소질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남자. 그의 소원은 어서 빨리 퇴직하고 그림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일이었다.
여자남편의 주변에는 늘 여자들이 따라다닌다. 여자들은 대개 젊고 예쁘고 귀여운 여자들이다.
생물교사로 불리기 보다 예술가, 혹은 한화백으로 불리우기를 좋아하는 여자남편은 언제부턴가 그의 아내인 여자와 말 통하기를 거부했다. 유감이지만 여자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남자는 하루 세끼 따뜻한 밥을 먹게해 주고, 아침마다 건네주는 새하얀 와이셔츠에 대하여 한번도 고마운 뜻을 비친적이 없다.
그러나 여자의 남편은 월급을 축내지 않으며,그가 낳은 아들딸을 끔찍히 여기고 가정을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 그가 젊은여자들을 몰고 산과들로 스케치여행을 떠난들! 여자는 상관없다. 말 쯤은 다른 사람과 얼마든지 통할 수도 있고, 안통하는걸 억지로 통하고자 애쓰고 싶은 마음이 여자에게도 없었다.
어느날 밤. 천재는 느닷없이 그녀가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 야, 자존심 치우고 말해. 행복한 건 아니잖아. 그렇지? -
- 허허~천재여. 행복이 뭔진 잘 모르겠다만 설령, 내가 불행하다고 치자, 그게 너랑 뭔상관이 있는감? -
- 그런말 하지마. 네가 불행하다면 단연코 행복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거다.나랑 같이.-
- 네가 뭔가를 크게 오해하고 있나본데,난 크게 불행하지 않다. 또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내행복을 네게 의탁할 만큼 약하지도 않고. -
- 안다,알어. 요는 니가 잘났다는 말 아니겠냐. 너 잘난 줄은 잘 안다.
밤마다 네가 내게 가르친 것만도 얼만데 내가 너 잘난거 모르겠냐? 하지만 두고 봐라. 나두 그리 호락호락한 인간은 아니다. 널 얻는데 내모든걸 걸어야 한다면 한번 걸어봐야겠지. 아...할말이 너무 많아. 손가락으론 안되겠어. 으뜸아. 너 전화기 들고 밖으로 나와! 전화 좀 하라구! -
- 아니. 난 할말이 없어.-
-음...-
- 미친짓하지 마라,천재. 난 네가 준다는 행복은 이것으로 충분하고 더는 필요도 없어요.-
- 네가 뭐라고 해도 좋아. 나도 대한민국굴지의 상사맨이다. 견적 안뽑아보고 뎀비겠냐? 사랑은 자신을 얼마나 버릴수 있는가의 다른 말이라고 네가 말했지? 난 너 사랑해...지금 이런말 하기 매우 불리한 시간이지만 난 널 사랑해.-
그녀는 비로소 그녀가 너무나 쉽게 시작한 거짓말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 뭘하자고 하는가. 그녀는 천재가 알고있는 것처럼 5살짜리 딸하나를 둔 서른다섯살이 아니다. 여자는 마흔일곱살이나 되어 군에간 아들과 대학생 딸을 둔 중년이었다.
그들이 처음 만나던날, "천재"라는 대화명을 달고 서른다섯살이란 소개에 여자도 "으뜸"이란 대화명으로 동갑나기의 대한민국"으뜸"주부라고 인사한 것이 시작의 발단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밤마다 천재와 정들면서 부터 여자는 점점 정직해질 수 없었다. 또 통신은 통신일 뿐이란 생각이 여자로 하여금 진실을 실토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어쨋든! 결과적으로 그녀는 서른다섯살의 순수한 청년을 2년이나 데리고 논 것이 되고 말았다.
천재가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때부터, 여자는 통신접속을 자제했다.
중도에 포기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으므로 곧 시카고로 떠나게 될거라고, 천재와의 이별 준비를 한 것이다. 물론 거짓말이었지만,그것은 그녀를 위하기 보다 천재를 위한것이었다. 진실을 말하여 천재의 2년을 그런식으로 분노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건 그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다.
접속을 하면 하루도 빠짐없이 천재로부터 메일이 와 있었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심각해지는 그의 갈증에 대해,도무지 맘대로 되지 않는 그의 그리움에 대해,그가 요즘 드러내는 파격에 대해,그들의 엇박자에 대하여, 답답하고 갑갑하고 미칠 것 같은 그의 고백들은 그가 불면으로 지새운 밤을 호소했다.
여자는 천재가 초대한 방으로 들어갔다.
파아란 모니터 위에 천재가 친 하얀 글자가 톡톡 올라온다. 여자의 가슴이 싸~하게 아프다. 오랜만이었다.
- 어서 와.-
- 안녕. 오랜만이야.-
- 네가 날 피했으니까.-
- 피하긴...바빴던 거지.-
- 그래...바쁠테니까 용건만 간단히 하자. 나 내일 서울간다. 사흘간 결근계 냈어.-
여자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는 전에도 몇번인가 여자를 보러 온다고 계획했었다. 그때도 물론 여자의 완강한 반대에 뜻을 꺽었다. 이런일을 미리 예감한 건 아니지만 여자는 처음부터 신분에 대한 정보중 아무것도 노출하지 않았던 자신이 자랑스럴 만큼 다행스러웠다.
- 이번엔 니가 나올 때 까지다. 결근계는 사흘이지만 네가 안나오면 한달이 되기도 하겠지.-
- ...넌 주기적으로 병이 도지냐? -
- 장난 하려고 하지마! 내가 할 일없어 장난으로 결근내고 여자 만나러 가겠냐?-
- 그걸 누가 원하는데? 난 너 안만나! 오던지 말든지 난 너 안만난다구. 알어? -
- 왜? 무조건 만나기 싫다는 이유외에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 그러면 나도 이러지 않는다구! 알아들을 수 있어! -
- 만나서 뭐할 건데? 할게 없는거 뻔히 알면서 뭐하러 부산서 여기를 왜 온단거여? -
- 사랑하잖아! 내가 사랑한다구. 난 널 보고 뭔갈 결정해야 해. -
- 푸하하하하~-
- 웃지마! 넌 정말이지 사람 맘 몰라주는덴......좋아,암튼 내일 간다.아파트 정문에 네가 나타나면 좋겠지만 안나타나도 기다려야지.잘들어.아파트 정문이다.-
- 난 안나가.-
- 맘대로!-
- 미쳤군.-
이라고 여자가 자판을 치기전에 천재는 후다닥 접속을 끊고 나가버렸다. 여자는 망연자실 천재가 쳐놓은 하얀 글자들을 보며 한동안 앉아 있었다. 멍했다.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온다고 했으니 천재는 올 것이다.
여자의 집에서는 정문이 보이지 않는다. 여자는 아침부터 정문이 내려다 보이는 1301호 쪽 복도를 서성거렸다. 머그잔 가득 커피를 뽑아 그곳에 서서 마시고,광고투성이인 여성잡지를 갖고 나가 훑어 보았으며 냉면그릇에 잡동사니 반찬과 밥을 한꺼번에 담아 1301호 복도난간에 올려놓고 정문에 눈을 고정시킨 채 점심을 먹었다.
정문은 여느때나 다름없이 조용하다. 이 아파트에는 문이 두 개가 있었지만 50평 60평짜리의 대형평수가 있는 쪽을 정문이라고 불렀다. 이따금 자동차가 경사진 길을 급하게 올라오거나 운동하러 가는 여자들이 차를 몰고 정문에서 사라지거나 뭔가를 배달하러 드나드는 사람들 외에는 달리 움직임이 없었다.
오후 세 시가 지나고 있었다.
'오지 않으려나...'
여자는 얼마간 안심하고 또 얼마간 서운한 감정이 동시에 스치고 지나갔다. 참 알 수 없는 마음이라고 여자는 실소한다.
그때였다. 검정색 택시 하나가 불쑥 경사길을 올라와 정문으로 들어선다. 택시가 정지하고,안에서 남자 하나가 내렸다. 천재다! 여자는 그가 천재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후리후리하고,웬지 운명적으로 외로울 것같은 이미지였다.
택시가 가버리자 천재는 쨍한 햇빛이 눈부신 듯 인상을 쓰고 아파트를 한바퀴 몸을 돌려가며 둘러본다. 그리곤 고개를 잔뜩 뒤로 꺽고 아파트 윗층들을 둘러보았다. 행여 창안에서 그를 보고있을 어떤 존재를 의식하는듯한 몸짓이었다. 천재가 그녀쪽으로 시선이 올 때 여자는 급하게 난간 아래로 몸을 숨겼다.
정문엔 그늘 하나 없는 뙤약볕이다. 잘 가꾼 주목과 회양목 따위의 정원수들은 햇볕을 가려주지 못했다. 천재는 난감한 듯 한시간 동안 이리저리 서성거리며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뿐인 듯 노상 담배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가 한시간쯤 그러고 있을 때 5동 경비가 그에게로 다가가는게 보였다. 경비와 천재가 함께 경비실로 들어간다.
그밤.
그녀는 접속을 시도했다. 뜻 밖에 천재로부터 메일이 들어와 있었다.
- 으뜸.여긴 너의 아파트앞 인터넷카페 유토피아다. 오늘 정문에 한시간쯤 있었다. 물론 너도 보았으리라. 경비아저씨에게 불려가서 너에 대한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했는데 허사였다.
널 설명하려고 했지만 서른다섯살에 5살난 딸아이 말곤 아는게 너무 없어 그만두었다. 그런 널 찾아 기다리는 중이라고 하면 미친놈이라고 하겠지. 난 서둘지 않겠다. 그리고 참,정문은 안되겠더라. 너무 불편해서. 놀이터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어. 208동 아래 놀이터다. 경비아저씨는 고향이 부산이라고 하면서 날 되게 좋아하더군. 내일은 마음을 바꿔 나와보는게 어떻겠냐? 뭐 안바꿔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럼 잘 자....너의 천재로부터.-
놀이터는 그녀의 집에서 바로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내밀고 내려다 보면 천재가 금방 그녀를 알아볼 위치였다. 그녀는 이번에는 1309호쪽 복도로 가서 천재를 훔쳐봐야 했다.
다음날 천재는 오전 10시에 나타났다.
놀이터는 정문에서 보다 훨씬 가까이 볼 수 있다.
밤마다 만나왔던 천재의 실제모습을 그녀는 창문틀에 몸을 숨긴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한눈에도 성실해 보이는 청년이다. 그러나 그성실함에는 세상의 30대가 품고 있을 법한 야망이나 욕망에 대한 공격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의 몸짓에는 무슨일이 일어나든 그게 뭐 대수냐는 듯한 관조적 조용함이 있었다. 그는 대화실에서도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앞뒤의 군더더기 수사를 짤라버리고 본론만 얘기하므로 그의 말은 언제나 짧고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천재는 어제와는 달리 준비를 많이 해왔다. 신문과 책,잡지까지 준비한 모양이다.캔음료수가 든 비닐봉투도 불룩했다. 놀이터에는 아무도 놀지 않는다. 오전에는 4-5세 아이들조차 유아원에 가서 영어나 컴푸러를 배워야 하는 동네다. 천재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걸 잊은 듯 책에 빠져들어 있다. 어디선가 그녀가 자기를 보고 있는 것을 확신이라도 하는듯,그는 가끔 시선을 들어 아파트를 빙 둘러보며 담배를 피웠다. 하루종일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천재를 보며 여자는 고통스러웠다.
이튿날저녁 무렵,
아파트 주민들이 "어제부터 아파트를 서성거리는 수상한 남자"를 주목하고 한번씩 창밖으로 목을 빼고 내다 보기 시작했다.
여자는 천재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여자는 전원일기의 김혜자처럼 편안한 얼굴을 하고 그에게로 내려갔다.
- 송화 만나러 온 젊은이 맞나요? -
천재가 눈을 들어 여자를 본다. 몹시 놀란 눈이다.
- 이아래 내려가면 지하철 오른쪽에 "햄릿"이란 카페에서 만나요. 곧 내려갈테니.-
서쪽 하늘 빌딩숲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 방배길을 내려오면서 여자는 다시 한번 그녀가 한 짓의 심각함을 깨닫는다.
흰바탕에 자잘한 꽃무늬의 긴치마와 하늘색 긴 가디건을 걸친 중년차림의 여자가 밤마다 자기와 낄낄거리던 "으뜸'이라고 천재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햄릿"에 들어서니 시끄러운 락음악이 귀청을 찢는다.
여자는 천재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그에게 무엇이든 좋은 것을 먹여주고 싶다.
- 커피보다 저녁을 먹죠. 시간도 저녁시간인데...-
- 네.전 좋습니다만. 그런데, 으뜸인 안나옵니까? -
- 네.하지만 걔 때문에 나온거니까 얘긴 할 수 있을거에요.-
-네에...-
여자는 천재를 데리고 일식집"오사카"로 들어갔다. 유니폼을 입은 웨이트리스에게 그들이 안내된 방은 작고 정갈한 다다미방이었다. 여자는 생선초밥과 정종을 문했다. 웨이트리스가 나가자,그녀는 비로소 천재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자전거마크인 베이지색 사파리가 그에게는 헐렁하다. 조용하고 담백한 눈,유분도 수분도 한방울 나오지 않을것같은 그의 피부,이마위 몇가닥의 굵은 주름,그 모든 것에서 누이를 사랑하다
훼손된 남자의 공허가 맡아졌다. 천재는 침묵했다. 으뜸이 대신 난데없이 출현한 중년여자에 대하여 몹시 혼란스러을텐데도.
- 통신이름 천재님이죠?-
여자는 다시금 가면을 쓰고 거짓말을 시작 했다.
완벽하게 해내야 할 마지막 한판이었다. 작은 헛점이라도 보이면 그동안의 모든 거짓말이 순간에 들통나고 말것이다.
- 나는 으뜸이 이모죠. 좋은 우정이라고 줄곧 듣고 있었어요.-
- 아,네에...근데 으뜸인 안오는 건가요? -
- 도망갔어요. 천재님이 무섭다고.-
- ...............................-
- 도망가면서 내내 걱정했죠.-
- 그럼 저도 이모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모님.한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
- 그럼요. 얼마든지요....내가 천재편이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
- 이모님 맞습니까? 제가 몇 번 통화해 본 으뜸이하고 목소리가 너무나 똑같아서요.-
그녀는 아뿔사,했다. 단 두번,간청하는 천재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해 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거의 일년전의 일이었다. 그때의 목소리를 천재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거였다.
- 네.맞아요. 많이 닮았어요.
걔는 지엄마보다 나를 더 닮았죠. 생김새도 거의 같은걸요. 송화를 봤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거에요.-
거짓말을 성사시키시 위해 여자는 표정연출까지 완벽해야 했다. 감정을 배재한 으뜸의 이모로서의 표정.
- 나도 한가지 물어보죠. 왜 그렇게 으뜸이를 만나야 한다고 그러죠? 우정도 좋지 않나요?-
- 네에...저는 곧 서른여섯이 됩니다. 이젠 결혼하고 싶어요. 편안하고 따뜻한 가정이라는 울타리안에서 성실하고 세상의 모든남성들 처럼 살고싶죠. 으뜸이가...행복하지 않다면 같이 행복하게 살고싶습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지 어떤지 그것만 보고싶어요. 으뜸이와 얼굴 마주보고 그런 얘길 한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여자는 또다시 마음이 아프다.
이 좋은 청년에게 여자는 대체 무슨짓을 하고 있는가.
- 천재님.제가 충고할 수 있다면 한가지만 할 수 있을까요?-
- 그럼요. 물론이죠. -
- 통신은 통신일뿐, 통신을 통해 알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어요. 진실은 더더욱 그렇죠. -
여자는 돌통나지 않기위해 서둘러 자리를 뜨고싶다. 그와 얘기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천재여,내가 바로 으뜸이다."라고 해버릴 것 같아 두렵다.
- 아파트에서 천재님이 수상한 자로 몰려있는거 모르시죠?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나온거에요.-
천재는 어이없다는 표정이다가 그것마저 그만두었다.
둘은 다시 컴푸러 앞에 앉았다.
-..................-
-..................-
둘다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 그만 들어가자...-
견딜 수 없어진 그녀가 먼저 그렇게 말하고 천재를 들여보낸 후 그녀는 편지를 썼다.
- 천재여.
몹시 추운날 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로 사랑을 했단다. 사랑하는 암놈이 추위에 떨고 섰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던 수놈은 자기의 체온으로 암놈을 따뜻하게 해주려고 가까이 다가갔지.
그런데 몸을 대기만 하면 둘은 서로의 가시에 찔려 둘다 고통스러운거야. 결국 안으면 안을수록 나중엔 피투성이가 될거란걸 둘은 알게 됐어. 그후,그들은 아무리 추워도 서로의 가시에 상처받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 서서 늘 바라보는 것으로 행복을 느꼈지.
비록 자신의 체온으로 상대의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그렇게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지켜 봐 줌으로써 행복했던 거야... 천재여. 우리가 만일 사랑한다면 우리의 사랑도 이와같아야 해...-
그리고 여자는 최후로 거짓말 하나를 더 보탰다.
- 다음주에, 가려던 시카고로 떠난다. 그곳에 가서 세상으로부터 나를 단절시키는 법을 배운대로 실행해 볼 참이다. 천재...2년동안 너로하여 나는 진정 정신없이 행복하였고,진심으로 고마웠다. 모쪼록 잘 살어!... -
그런 후 여자는 조용히 초기화면으로 가서 아이디를 해지 했다. 1997년 5월27일이었다.
그것이 1년전의 일이다.
얼마전 군에서 제대한 아들이 쉐도우랜드에 아이디를 개설했다. 여자는 아들의 아이디로 쉐도우 마을에 접속하여 살며시 천재의 프로필을 쳐보았다.
pf sky1. 엔터.
이럴 수가... 천재는 그의 프로필을 통해 그제도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 5.27...
5+30+31+30+31+30+31+28+31+30+31+5+=375일...1년하고 열흘.
들판 가운데 무너진 초가엔 아직도 귀소하지 않은 새를 기다리는 한 영혼이 살고 있습니다. 그 새의 화려한 귀소의 날을 꿈꾸며...-
이런!
천재는 여자가 마지막으로 접속을 끊은날로부터 하루하루 날을 꼽으며 여자의 있을리 없는 귀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는 접속을 끊고 나왔다.
둔중한 통증이 여자의 가슴 저 아랫쪽에서 다 둔중하게 울려 왔다. (*)
첫댓글 낭화 님이 직접 쓰신 작품인가요?
저가 쓴글이 아닙니다,,퍼온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