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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이해
I. 서론
바울의 '율법이해'에 관한 문제는 그의 사상을 다루고자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사안으로서, 많은 학자들에 의해 다루어져 왔다. 하지만 그 해석에 있어서, 보편적인 합의에 이르지 못한 난해한 테마 중의 하나이다. E.P. Sanders은 율법에 대한 긍정적인 진술과 부정적인 진술이 바울에게 있다고 한다. 즉, 바울의 '율법'이라는 용어는 사람이 어떻게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구원에] '들어가는가'를 논의하는 문맥과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율법을 지키면서) 행동하는가를 논의하는 문맥에서 각각 상이하게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1]. 다른 한편 H. Räisänen은 설명하기를 바울은 율법에 관해 체계적인 사유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2]. 이와 달리 어떤 학자들은 바울의 율법에 대한 사고는 변화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3]. 이같은 다양한 주장들을 고려해 볼 때 H.-J. Schoeps가 일찌기 "바울의 율법관은 그의 신학 중 가장 복잡한 가르침이다" 라고 한 말이라든가[4], P. Stuhlmacher의 이에 대한 동의는[5] 충분히 수긍할 만 하다고 하겠다.
바울의 율법이해에 대해 이 같은 다양한 평가가 이루어지게 된 근본 원인은 바울 자신에게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저술이 편지라는 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사색가, 사상가, 저술가라기 보다는 복음전도를 위해 여러 곳을 전전했던 활동가(선교사)였다. 그리고 그의 편지들은 그러한 활동의 결과로서 세워진 각각의 교회에, 그곳의 교인들이 보낸 질문에 답하거나, 그곳에 문제가 생겨 자신의 뜻을 알리고 권면해야 할 사안이 생겼지만 직접 방문할 수 없는 까닭에 대신 보내진 글이다. 따라서 그의 편지들은 우선적으로 '수신교회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읽혀져야 한다. 각 편지에서 다루어진 어떤 주제의 내용이 바로 이에 대한 바울의 전체적이고 체계적인 사고와 일치한다고 단순히 보아서도 않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한 공동체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현재 그곳에서 문제가 되는 사안에 집중해서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난해한 주제인 바울의 율법이해를 고찰함에 있어서 본 논문은 갈라디아서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여기서 우선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과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동기를 충분히 고려하고자 한다[6]. 다음으로, 조사된 그곳 교회의 상황과 저술 동기들을 염두에 두면서 바울은 율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 지에 대해 살펴본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것으로 보았는지, 그리고 율법 자체를 저주라고 생각했는지의 여부, 그리고 왜 율법으로는 아니라고 했는지 그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율법에 대해 바울은 어떻게 해석을 하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어 결론에서는 갈라디아서에서 나타난 바울의 율법관에 대해 요약, 정리를 시도하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내려진 결론은 바울의 전체적인 율법 이해를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것이다.
II. 본론
A.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과 갈라디아서 저술동기
갈라디아서의 수신인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 공동체들 (1:2; 참고 고전 16:1) 혹은 ‘갈라디아인들’이다 (3:1). 그들은 아마도 지방 이름인 갈라디아에, 즉 현재의 앙카라 근처에 (북갈라디아설) 살고 있었다[7]. 이 교회들은 바울에 의해 설립되었다 (4:13). 그 후 바울이 타 지역으로 간 사이에 경쟁자들이 이 곳에 들어왔다 (참고1:6). 이들의 활동 결과 갈라디아인들은 바울의 복음으로부터 떠나 (1:6; 참고 3:3; 4:9) 율법에 지배를 받는 삶을 다시 살기 시작했다 (6:12f; 참고 3:1f). 바울이 갈 1-2장에서 집중적으로 자신의 사도성이 인간에 의해서가 아닌 신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을 볼 때, 아마 갈라디아에서의 바울의 경쟁자들은 바울의 복음과 사도성에 대해 의심을 품었고 이를 폄하했던 것 같다. 바울이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사고인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을 선포했고, 그가 부활절 이후 최초의 제자 그룹에 직접적으로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고 고전 15:3ff) 더욱 대적자들의 험담은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경과할수록 갈라디아에서 바울의 복음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이곳에서 이방인 선교를 위해 노력했던 지금까지의 수고가 헛되게 될 (2,2)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같은 좋지 못한 상황에 직면하여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명백하게 자신의 복음과 대적자들의 복음 사이에 선을 긋는다: 그는 자기 복음의 신적인 근원을 강조한다 (1:1,11f,15f). 바울의 복음이해에 따르면 사람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 (2:16ff). 그 결과 신자들은 영을 받으며 (3:2; 참고 5:16ff), 새 에온(시대)에 속하게 되며 (1:4), 참 자유인이 되며 (5:1) 새 피조물이 된다 (6:15). 이러한 관점에서 바울은 율법에 사로잡힌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이방세계로의 퇴보라고 (4:8ff; 참고 3:3) 선언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경쟁자들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도 (참고 1:6-9; 3:1-5,10-14) 그들 스스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라고 (6:12f) 그들의 정체를 폭로한다. 이로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서 일어나는 배신의 움직임을 저지하고 갈라다인들의 바울 복음에 대한 신뢰성을 다시 회복시키려고 한다.
B.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이해
1. 단어 '율법'의 사용용례
'율법 (no,moj)'이라는 단어는 갈라디아서 내 25개의 절에서 32회[8] 사용되고 있다. 이를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a.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
a-a. 율법의 행위 vs. 그리스도를 믿음: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evx e;rgwn no,mou)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dia. pi,stewj VIhsou/ Cristou/) 의롭게 된다 (2:16 2회).
a-b. 율법 vs. 그리스도
a-b-a.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된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은 것이다 (2:21b).
a-b-b. 율법에서 의롭게 되는 자는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진다 (5:4).
a-c. 율법 vs. 은혜: 율법에서 의롭게 되는 자는 은혜로부터 끊어진다 (5:4).
a-d-a. (선언적으로) 율법 안에서는 하나님 앞에 누구도 의롭지 못하다고 한다. (3:11)
a-d-b. 율법은 살게 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았을 것이다 (3:21b).
a-d-c. (a-a에 대한 근거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 (시 143:2) (2:16).
b. 율법 vs. 믿음: 율법은 믿음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다 (3:12a; 위 a-a 참고)
c. 율법 vs. 하나님: 율법을 통해 (dia,) 율법에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산다. (2:19a)
d. 율법 vs. 성령
d-a. 성령과 능력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고 행한 것이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다 (3:5).
d-b. 성령으로 인도되면 율법 하에 있는 것이 아니다 (5:18)
e. 율법 하의 그리스도: '율법 vs. 그리스도'는a-b 참고; 또한 h. 율법 = 저주 참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율법 하에 태어 나시게 하셨다 (4:4) 그럼으로써 율법 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아들의 명분을 주셨다 (4:5). ('h. 율법 = 저주' 참고)
f. 율법 < (아브라함에 하신) 약속
f-a. 430년 후의 율법이 미리 정한 약속을 무효화할 수 없다. (3:17)
f-b. 유업은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3:18)
f-c. (결론적으로) 율법은 약속을 거스르지 않는다 (3:21)
g. 율법 = 행해야 하는 것
g-a. 할례를 행하는 자는 전체 율법을 행해야 한다 (5:3)
g-b. 이것들을 (즉, 율법의 요구들) 행하는 자가 이것들 안에서 산다" (3:12b)
참고: 행하라는 율법에 머무르지 않는 자는 (신 27:26) 저주 아래 있는 자이다 (3:10b h-b 참고)
h. 율법 = 저주
h-a. (선언적으로) 율법의 행위에 의한 자는 저주 아래 있다 (3:10)
h-b. (근거로서) 행하라는 율법에 머무르지 않는 자는 (신27:26) 저주 아래 있는 자이다 (3:10a).
h-c.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했다. (3:13)
참고: 'e. 율법하의 그리스도'
i. 율법의 (제한적인) 기능
i-a. 범법함을 위하여[9], (하나님이 아닌) 천사들로 말미암아, (하나 만을 위하지 않은) 중보자의 손을 빌어,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 까지 (3:19)
i-b. 믿음이 오기 전까지는 율법의 감시 하에 있다. (3:23)
i-c.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3:24a)
참고: 'e. 율법하의 그리스도'
j. 대적자들 (혹은 갈라디아인들)을 지칭
j-a. 율법 하에 있으려는 자들아 율법을 (구약을) 모르느냐? (4:21)
j-b. 할례를 한 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할례케 함으로써 자랑하려 한다 (6:13).
k. 율법 = 사랑, 그리스도
k-a: 전체 율법은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완성된다 (5:14)
k-b: 서로 짐을 져 그리스도의 법을 완성하라 (6:2)
l. 기타: 온유와 절제를 금지할 법이 없다 (5:23)
이상의 사용용례를 분석해 보면, 우선 갈라디아서에서는 전체적으로 '율법'이라는 용어에 대해 매우 부정적임을 알 수 있다: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 (a). 율법은 믿음에 (b), 하나님에 (c), 예수 그리스도에 (a-b, e), 성령에 (d) 반대되는 개념이다. 율법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보다 열등한 것이다 (f). 율법은 행해야 만 살 수 있는 것이며 (g) 율법은 저주스러운 것이다 (h).
그리고 율법은 제한적인 것이다 (i): 시간적 제한 (믿음이,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한 분이신 하나님이 아닌 천사들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다. 율법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언명들은 일차적으로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 내에 나타난 할례 받을 것을 권유하며 (6:12; 참고 2:3) 율법의 계속적인 유효성을 주장한 바울의 적대자들 때문이다 (j). 바울은 이들과 신학적으로 대결하면서 '율법으로가 아님'을 강조하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내에서는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논조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됨'은 이 서신 곳곳에서 율법(의 행위)과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극히 예외적으로 갈라디아서의 두 곳에서 바울은 율법을 긍정적으로 다룬다 (k): 율법을 이웃사랑으로 (레 19:18) 요약하기도 하고 (5:14; 참고 롬 13:8ff) 그리스도의 법이란 (to.n no,mon tou/ Cristou/ 6:2)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2.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인가?
W.G. Kümmel은 일찌기 자신의 한 저서에서[10]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바울에게는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고 하는 자책이나 번뇌가 없었다[11]. 롬 7장에 나오는 '나'는 바울 자신이 아닌 (125), 랍비문헌이나 필로에게서 보듯이 일반적인 사람을 일컫는 문체의 형식이며 (127, 131f)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비기독교인을 묘사한 것이다 (138).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노력을 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의롭지 못한 자신의 번민과 고뇌를 기술하고 있다는 식의 이해는 루터를 전제로 하여 바울을 보려는 잘못된 시도의 결과이다 (1)".
이상과 같은 그의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다[12]. 바리새인으로서의 바울은 갈 1:13f와 빌 3:5f[13]를 참고해 볼 때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고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율법의 요구를 지키지 못해서 번민했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적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즉, 바울은 루터와 달리 어떻게 의로워질까 하는 문제와 씨름하다가 기독교의 복음을 수용한 것이 아니다. 이는 다시 말해 '인간이란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사고를 바울은 갖지 않았다는 뜻이다[14]. 이같은 사고는, E. P. Sanders에 의하면, 바울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율법과 관련한 자아의식과 일맥상통한다[15]. Sanders에 의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랍비문학에서는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요구도 없었다[16].
a. 갈 3:10[17]
"행하라는 율법의 책에 기록된 모든 것에 머물지 않는 사람은 모두 다 저주를 받을 것이다"는 갈 3:10은 인간이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임을 반영하는 바울의 대표적인 구절로 이해되기도 한다[18]. 여기서 바울은 신 27:26을 인용한다. 신 27:15-26은 구약학자 G.von Rad에 따르면 세겜의 12계명 (금지조항)이며 이는 초기 여호와신앙의 정신과 제의적 형식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19]. 15-25절 까지 11개의 저주들은 특정한 신적인 법 의지를 위반한 것에 대해 다룬 것임에 비해, 12번 째 저주는 (26절) '이 율법의 모든 말씀들'을 경시한데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앞의 저주들과 달리 26절은 부정적인 구성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후대의 권면적인 추가라고 볼 수 있다[20].
바울은 LXX의 구절 "이 율법의 모든 말씀들" (pa/sin toi/j lo,goij tou/ no,mou tou,tou)을 "율법의 책에 기록된 모든 것" (pa/sin toi/j gegramme,noij evn tw/| bibli,w| tou/ no,mou)으로 바꿈으로서 신 27:26을 "구약성서 전체 율법 중 한 가지라도 못 지키면 저주를 받는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여기서 그는 "행하라는 율법에 머물러 있지 않는 자는 저주 하에 있다"는 갈 3:10b를 "율법의 행위에 의한 자는 저주 하에 있다"는 10a절 주장의 근거로 삼음으로써 (ge,graptai ga.r o[ti) 인간이란 율법의 요구를 모두 행하지 못하므로 저주 하에 있는 존재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어느 정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첫째, 하반절이 상반절의 근거가 되기에는 논리적으로 매끄럽지 못하다[21]. 다시 말해 "율법의 책에 기록된 모든 것에 머물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A), "머물지 못했다"(B),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에 있는 자는 저주 하에 있다"(C) 의 논리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B) 부분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둘째, 율법의 행위에 있는 자들이 저주 하에 있는 근본 원인은 o[ti- 로 시작하는 11절에서 ("율법 안에선 누구도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하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제시되고 있다는 점을[22] 주목해야 한다[23]. 따라서 10절을 근거로 해서 바울은 '인간이 전체 율법을 지키기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 구절은 그러므로 실제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율법을 모두 지키며 살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던 갈라디아서의 수신자들, 이방인인 갈라디아인들을 향한 바울의 경고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바울 당시 이방인들 가운데 일부는 유대교에 호감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24]. 이들 중에는 적극적으로 할례와 세례 그리고 율법준수의 서약을 통해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이 있었고 (소위 prosh,lutoi = rGE) 다른 한편으로 여러 가지 이유때문에 할례와 율법준수 서약을 매우 부담스러워 하여 개종은 하지 않았지만 회당 중심의 유대교 모임에 참석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 후자의 부류를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fobou,menoi to.n qeo,n 행 13:16,26)",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 (sebo,menoi to.n qeo,n 행 16:14; 17:17; 18:7)", "경건한 헬라인 (sebo,menoi [Ellhnej 행 17:4)"이라고 칭한다[25]. 바울의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은 이들에게 매우 큰 공감을 일으켜,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을 수용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비시디아 - 행 13:48; 데살로니가 - 행17:4; 베뢰아 - 행 17:12; 이고니아 - 행 14:1; 고린도 - 행18:4). 갈 3:10은 이처럼 율법준수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이방인들의 일반적인 태도를 염두에 두면서 '율법으로 산다는 것'은 저주임을 말하는 것이지, 여기서 바울이 인간이 율법을 실제로 지킬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6절 이하 약속과 믿음을 통한 아브라함의 축복 이야기를 10절 이하와 함께 연관시켜 볼 때, 율법의 행위에 의한 자가 저주 하에 있는 것은 인간이 율법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의 길은 오로지 축복인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11b절)[26].
b. 갈 5:3
그 외에 갈라디아서 어디서도 바울은 "인간은 율법의 요구를 모두 지킬 수는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갈 5:3에서 할례를 행하는 자는, 다시 말해 구원을 위해서는 율법이 아직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전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27]. 이 같은 언명은 위 '3:10' 부분에서 지적한 것처럼,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지킨다는 것이 이방인인 갈라디아인에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상기시킴으로써 할례를 권하는 '다른 복음'에 미혹되지 말라는 경고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 뒤이어 (4절) 바울은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식으로 논거를 전개하지 않음을 제시할 수 있겠다. 바울은 다만 율법으로 의롭게 된 자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지고 은혜로부터 떨어지기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율법을 통한 길은 그리스도에게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이며, 은혜와 무관한 것임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계속적인 유용성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나온 '할례를 행하는 것'은 무용하다는 것이다. 갈 2:21b의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된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은 것이다"라는 구절도 갈 5:4와 같은 맥락이다.
바울은 이처럼 두 가지 길을 (율법을 통한 길과 그리스도를 통한 길) 제시하면서, 이들은 서로 배타적이며, 양자택일적인 성격으로서, 후자의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이 과연 율법을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는 전혀 논의가 되고 있지 않으며, '인간은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지킬 수 없다'는 사고도 발견되지도 않는다.
c. 갈 6:13
갈 6:13에 따르면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대적자들은 할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진 후에도 율법의 유효성을 계속 인정) 율법은 지키지 않고 단지 갈라디아인들을 할례케 함으로써 이를 자신들의 자랑거리로 삼고 있다. 여기서 할례를 한 자는 전체 율법을 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갈5:3의 내용을 은연 중에 반영하고 있다. 대적자들은 바울의 지적처럼 할례를 했고 이를 남에게 권유한다는 점에서 전체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를 가진 자들이다[28]. 하지만 이들은 이 의무를 실제로는 이행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이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대적자들의 신학적인 자체모순을 폭로하고 있다: "할례를 고수함으로써 율법의 유효성을 주장하지만 그들은 실제 율법을 지키고 있지 않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점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전체 율법의 요구를 지킬 수 없는 존재이다"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요약하면 바울은 갈라디아서 어디서도 "인간이란 행하라는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이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29]. 바울은 이 편지에서 "인간이 율법의 요구를 지킬 수 없으므로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다" 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율법이 아닌 믿음을 통해서 구원의 길이 주어지며, 율법으로 의로워지려는 자는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2:16; 3:21; 참고 2:21b; 5:4).
3. 율법은 저주인가?
'저주'라는 뜻을 가진 어근 kata,ra[30]는 갈 3:10,13 두 절에 한정되어 각각 2회, 3회 등장한다. 이 단어는 율법과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Osoi ga.r evx e;rgwn no,mou eivsi,n( u`po. kata,ran eivsi,n\ ge,graptai ga.r o[ti evpikata,ratoj pa/j o]j ouvk evmme,nei pa/sin toi/j gegramme,noij evn tw/| bibli,w| tou/ no,mou tou/ poih/sai auvta), V. 10; Cristo.j h`ma/j evxhgo,rasen evk th/j kata,raj tou/ no,mou geno,menoj u`pe.r h`mw/n kata,ra( o[ti ge,graptai\ evpikata,ratoj pa/j o` krema,menoj evpi. xu,lou( V. 13.
a. 갈 3:10
바울은 3:10a절에서 율법의 행위에 의한 자는 저주 하에 있다고 단정하고 그 이유로 (ga.r)[31] 신 27:26을 인용한 o[ti- 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들을 행하라는 율법의 책에 쓰여진 모든 것에 머무르지 않는 모든 사람은 저주 하에 있다 (10b절). 본 논문 B.2에서 잠시 밝힌 것처럼 "율법 하에 있는 자는 저주 하에 있다"는 사실을 (10a절) 말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 하에 있다"는 (10b절) 점 외에도, 인간은 전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32]을 지적해야 한다는 점에서 갈 3:10은 그 내용이 논리적으로 불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떤 학자들은[33] 10절을 해석할 때 '인간이란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전제하면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앞 장(B.2)에서 살폈듯이 10절의 논지는 '인간은 율법을 요구를 모두 다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데 있지 않다[34].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갈 3:10-12는 3:6-14이라는 하나의 단락 속에서 3:6-9 의 '믿음을 통해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의 경우'에 대비되는 부분에 해당된다. 따라서 10절은 전체 단락 내에서, 특별히 3:6-9과 연관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3:1-5에서 바울이 제시한 '율법의 행위로 부터'와 (evx e;rgwn no,mou) '믿음을 들음으로' (evx avkoh/j pi,stewj) 간의 대비는 이제 6-9절에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함께 믿음으로 축복을 받은 이'와 10-12절의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자' 간의 대비로 발전된다. 6절에서 아브라함이 등장하는데 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여겨진 자이다. 따라서 (a;ra) 믿음으로 인한 자들은 (oi` evk pi,stewj) 그의 자손이 된다 (7절). 하나님은 믿음으로 이방인을 의롭다고 하실 분이시며, 아브라함으로 인해 모든 이방인이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미리 약속하셨다 (8절). 그러므로 (w[ste) 믿음으로 인한 자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함께 축복을 받는다 (9절). 여기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한 전형이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자신을 통해 온 민족이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그와 함께 축복을 받는다고 설명되고 있다. 즉,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면서 '믿음을 가진 자' = '축복이 주어짐' 이라는 도식을 이끌어 낸다.
이와 반대로 갈 3:10-12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의 상태에 관한 설명이다. 그들은 저주 하에 (u`po. kata,ran) 있다 (10a절). 10b절에서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앞에서 언급했듯이 미흡한) 이유가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어째서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하에 있는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는 11절 이하에서 등장한다: "율법 안에서 아무도 의롭게 되지 못하며,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 (11절). 12절에서는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며 행해야 사는 것임을 말한다. 이처럼 10-12절은, 믿음을 가진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며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을 받는 데 반해 (6-9절), 율법에 속한 자는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함으로[35]) 저주 하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36].
즉, 10절에서의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자들은 저주 하에 있다"는 바울의 지적은 그가 율법 자체가 저주의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바울에 따르면 믿음은 축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며 (6-9절), 믿음이란 사람을 살게 해주는 것이다 (11b절). 이에 비추어 볼 때 믿음의 반대 개념인 '율법'은 (11. 12a절) 인간에게 저주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율법' = '저주'라는 바울의 도식은 '믿음' = '축복'이라는 아브라함의 예를 반대로 생각했을 때 유추되어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축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율법은 저주라는 의미이지, 바울 자신이 율법 자체에 대해서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37]. 만일 바울이 율법 자체에 대해 저주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갈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과 갈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둥과 같은, 율법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구절 들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b. 갈 3:13
갈 3:13에서도 율법은 저주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나무에 달려) 저주가 되심으로 율법의 저주[38]에서 우리를 (이방인들을)[39] 속량해 주신 분이시다 (13절). 그럼으로써 (i[na) 이방인들에게 아브라함의 축복이 미치게 하고 믿음으로 영의 약속을 받게 한다 (14절). 바울은 앞의 세 절과 (10-12절) 이곳 두 절을 (13-14절) 가지고 두 종류의 사람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다. 한 부류는 '율법의 행위'가 삶의 근간이 되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가 산다는 점에서 (11b절) 그리고 '믿음' = '축복'이며 따라서 믿음의 반대인 율법은 저주라는 점에서 (6-9절), 저주 하에 있는 자들이다 (10a절). 다른 부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에 의해 (geno,menoj u`pe.r h`mw/n kata,ra 13a절)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된 자들이다 (13a절). 바울은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사건을 구약 신명기 27:26; 21:23을 인용하여 '저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께서 저주가 됨으로써 우리의 저주는 풀려졌다고 본다 (13a절). 그리스도의 이같은 구속행위에 의거하여[40] 아브라함의 축복이 이방인에게도 미치며 (14a절)[41] 우리는 믿음을 통해 (영의) 약속을 받게 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갈 3:6-9에서는 아브라함을 예로 한, "믿음", "의" 그리고 그에 따른 "축복" 등이 핵심 단어이고 3:10-12에서는 그 반대 개념인 "율법(의 행위)"과 그에 따른 "저주"가 중심 표제어이다[42]. 바울은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는 아브라함과 함께 축복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9절)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반대로 저주 하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지[43] (10a절), 율법의 요구를 다 지킬 사람은 하나도 없고, 율법의 요구를 지키지 못한 자는 저주 하에 있다는 점에서 율법의 행위에 속한 사람들은 저주 하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13a절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했다"고 할 때에도 율법 자체가 인간을 저주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믿음이 축복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율법은 저주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바울은 율법 자체를 저주라고 보고 있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축복을 받는다는 시각에서 볼 때 믿음의 반대 개념인 '율법'은, '율법의 행위'는 저주라는 것이다.
4. '율법으로'가 아닌 이유
바울이 파악한 율법은 '행해야 사는 것 (레 18:5 인용)'이다 (갈3:12b; 참고 3:10b; 5:3). 따라서 그는 '율법의 행위 (to, e;rgon no,mou)'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바울이 '율법'이 아니라 '믿음'을 말한 것은, 그가 율법 자체에서 어떤 결함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다[44]. 바울은 율법의 성격을 규정함에 있어 (예: "율법은 살게 하는 것이 아니다" 3:21b; "율법은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다" 3:23; 4:5) 율법 자체에 대해 숙고하여 그 같은 결론을 도출해 낸 것이 아니다[45]: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이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하는 문제 (롬7:12f.14)[46], 율법이 죄를 알게 해 준다는 생각 (참고 롬 3:20b; 7:7f), 죄가 계명으로 기회를 삼아 악한 역할을 한다는 사고 (롬 7:8ff,13)[47],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고 (롬 3:9-18,23; 참고 갈2:15), 그리고 분열된 인간과 이에 각각 상응하는 두 종류의 율법에 대한 사상이 (롬 7:22-8:2) 발견되고 있지 않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인식에 기초하여 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았다고 선언적으로 주장하면서 "율법은 살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3:21b). 바울은 '율법 자체가 사람을 속박하는 것이다'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그리스도를 통해 온 믿음'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율법은 믿음이 오기 전 까지 우리 인간을 구속했다고 (Pro. tou/ de. evlqei/n th.n pi,stin u`po. no,mon evfrourou,meqa 3:23) 보는 것이다. 또한 율법 하에 있는 인간들의 상태에 대한 진술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하의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라는 관점 하에서 서술되고 있다 (4:4f). 이러한 맥락에서 바울은 율법에 대해 (그리스도에 대한 극단적 대비로) 부정적인 선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된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은 것이다 (2:21b)", "율법으로 의롭게 된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다 (5:4)". 즉, 바울은 율법을 율법 자체로 독립시켜 다루지 않고, 믿음의 입장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관점에서 다룬다. 이때 율법은 부정적인 것이요 ("율법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산다" 2:19a),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에 의해 극복되어 져야 하는 그런 것이다 (3:13a; 4:5a)[48].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또한 바울은 "인간은 율법의 요구를 모두 행할 수 없으므로 율법으로는 않된다 (율법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배제)"는 식으로 자신의 논지를 펼치지도 않는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어느 곳에서도 "인간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 혹은 없다"에 대해 논구하지 않는다. 바울은 단지 구약 인용을 근거하여 인간은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기 때문에 (합 2:4 인용) 율법 안에서 하나님 앞에 누구도 의롭지 못하다 (3:11)", "모든 육체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못하므로 (시 143:2) 율법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2:16c,d)".
"율법은 행해야 사는 것이므로 믿음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다 (3:12)"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믿음'은 '율법'의 반대말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이므로 (dia. pi,stewj VIhsou/ Cristou/ 2:16) 믿음에 반대되는 율법은 그리스도와도 극단의 배타적인 관계에 있다 (2:21b; 5:4). 인간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저주가 되심" 3:13a; 여인에게서 나심 4:4b, 율법 하에 나심 4:4c; 참고 1:4b) 믿음을 통해 (dia. [th/j] pi,stewj 2:16a; 3:14b,26) 율법에서 (하의 처지에서) 구원되었다 (3:13a; 4:4f).
요약: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 자체에 대해 사변적으로 논구하지 않는다. 그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을 거부하는 이유는 율법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도 아니며 (즉, 율법 자체가 부정적인 성격을 띄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율법이 요구를 모두 지킬 수 없기 때문도 아니다. 율법이 부정되는 이유는 율법이 아닌 믿음을 통해서 만이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율법 자체는 그 본질 상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믿음의 입장에서,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볼 때, 율법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올바른 길이 아닌 것이다[49].
5. 율법의 존재 이유
믿음이 온 이후 (갈 3:25; 참고 3:23) 믿는 자들은 더 이상 율법 하에 있지 않고,영의 시대에 (갈4:6; 참고 3:3) 살고 있다 (갈 5:18; 참고 2:19a). 이를 달리 표현하면 "율법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갈 3:23; 참고 3:13; 4:4f). 따라서 바울로서는 율법은 과거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에 따르면 한편으로 '율법'은 '약속'보다 열등한 것이다: 율법은 한시적으로 주어진 것이요 (갈 3:19b,25), 율법은 약속보다 시간적으로 (갈 3:17) 후대의 것이며, 율법은 한 분이신 하나님에 의하지 않고 천사들로 말미암아 하나가 아닌 중보자의 손을 통해 주어졌다 (갈 3:19d,20). 그런 의미에서 율법은 약속과 대비되는 등가의 개념이 될 수는 없다 (갈 3:21a). 왜냐하면 율법에는 살리는 능력이 주어져 있지 않았기에,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3:21b). 바울에 따르면 율법은 무엇보다도 범법함을 위하여[50] (tw/n paraba,sewn ca,rin) 주어졌다 (3:19b). 범법이란 (para,basij) 율법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말로서 '적법한 혹은 법적 효력을 가진 요구나 의무의 위반'이라는 의미로[51], 다시 말해 구체적인 신적 계명의 위반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52]. 여기서 율법의 기능은 인간으로 하여금 계명에 대한 위반을 유도케 하는 데에 있다. (참고 롬 4:15b; [5:13],20; [7:7f,13]).
비록 율법이 믿음과 약속에 반대되는 것이고 따라서 그리스도와도 배타적인 관계이지만[53] (갈 2:21b; 5:4), 바울은 또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의 율법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오실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설명을 한다[54]. 바울에 따르면 율법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고 부담을 준다: 성경(h` grafh,)은[55]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 (갈 3:22a)[56]; 율법은 사람을 매어놓는다 (갈 3:23); 율법은 사람에게 몽학선생이 된다 (갈 3:24a).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이 사람에게 이처럼 악역을 담당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고 있다: "죄 아래 놓음으로써 약속이 주어지고" (갈 3:22b), "매어 놓음으로써 믿음을 갈구하게 하고" (갈 3:23), "몽학선생의 역할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로 이끈다" (갈 3:24).
이같은 사실은 다음의 진술을 가능케 한다: 그리스도 이전의 율법은 결과적으로 악한 존재가 아니다[57]. 즉, 인간에게 저주도 아니며 (참고 갈 3:10,13), 단지 인간을 죄 아래 두려는 목적 만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참고 갈 3:22). 인간이 율법 하에 있다는 것이 인간에게 어떤 비극적인 숙명을 의미하지 않는다 (참고 갈 4:1ff; 특별히4.5a절). 구원이라는 목적론적인 의미에서 율법은 인간을 위기에 처하게 하며, 속박하고 고통을 겪게 한다. 율법의 이러한 역할은 결국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게 한다. 따라서 율법은 광의로 해석할 때, 믿음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로서는 이 순서가 (율법 → 믿음) 바뀌어서는 않되는 것이다 (3:3). 지금은 영의 시대요 (갈 4:6; 참고 5:18), 믿음과 (갈 3:23,25) 그리스도의 시대인데 (갈 4:4) 다시 율법의 시대도 되돌아간다는 것은 바울에게는 어불성설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관점에서 보면 율법은 이제 자신의 소임을 다 하고 무대에서 퇴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58]. 이런 점에서 옛 방식 그대로 율법의 계속적인 유효성을 주장하는 것은 바울이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2:18).
III. 결론
사도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이미 복음을 전한 지역에 들어와 그의 복음이해에 반대하면서, 신앙 생활을 하는데 율법의 행함이 계속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입장에 동조하게 된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다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에, 그리고 율법은 믿음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더 이상 아니라는 식의 논지를 전개한다. 즉,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새로운 구원의 길로서의 믿음을 선언적으로 말하고 있다.
바울은 '왜 율법으로가 아닌지'의 이유를 율법 자체에서 찾지 않는다: 율법 자체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인간 스스로가 율법의 요구를 다 못 이루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율법 자체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그가 "율법이 저주다"라고 하고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율법 자체가 실제로 '저주'이기 때문이 아니라, 약속이 '축복'인 것에 비교할 때 반대 개념인 율법에 대해 상대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또한 이방인으로서 율법의 모든 요구에 부담을 느끼는 갈라디아인을 겨냥한 발언이기도 하다. '약속', '믿음', '그리스도'와 '율법'을 비교할 때 율법은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적극적인 의미로 율법을 평가할 때 율법은 악역을 수행함으로써 ("범법함을 위해 3:19", "죄 아래 가둔다 3:22", "몽학선생이 되어 3:24") 오히려 인간들을 구원으로, 믿음으로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구원사의 관점에서 볼 때, 율법은 악한 역을 담당함으로써 적극적인 의미에서 복음에 봉사한다.
갈라디아서에 한정한 본 논문을 통해 볼 때, 바울은 율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이후에 율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인간에게 궁극적인 구원의 길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그리스도와 대비된다는 점에서 나쁜 것이지,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니다 (율법은 저주가 아니다).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도록 돕는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악역을 담당한다. 약속이, 믿음이 그리고 그리스도가 오자 율법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 그 후 율법은 궁극적인 구원과 관련되고 이에 의해 규정된 한에서 (o` no,moj tou/ Cristou/) 계속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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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P. Sanders(김진영 역), 바울, 율법, 유대인,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8 (= 1994) 31 (이하 E.P. Sanders, 바울). 이와 비슷한 관점을 가진 학자들에 관해서는 E.P. Sanders, 바울, 210f과 그곳의 주 5번 - 8번을 보라. H. Hübner, Das Gesetz bei Paulus. Ein Beitrag zum Werden der paulinischen Theologie, FRLANT 119, 31982, 25-39, 특별히 27,31는 (이하 H. Hübner, Gesetz) 하나님의 의도, 율법의 내재적인 의도와 율법을 주신 이의 의도를 구분하는데 F. Vouga, An die Galater, HNT 10, 1998, 93 도(이하 Vouga, HNT 10) 이에 기본적으로 동의를 한다. Vouga는 경험론적으로 율법은 악한 것이나 목적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선한 역할을 한다고 이해한다.
[2] H. Räisänen, Paul's Theological Difficulties with the Law, in; Studia Biblica 1978 Vol.3, Papers on Paul and Other New Testament Authors, 1980 (JSNT Suppl. 3), 301-20, 303ff. 이에 대해 E.P. Sanders, 바울, 208ff도 동의한다.
[3] 이에 대한 대표적인 학자로 H. Hübner, Gesetz, 33,39를 들 수 있다. 율법을 포함하여 바울 사상에 변화를 다룬 책으로는 U. Schnelle, Wandlungen im paulinischen Denken, SBS 137, 1989이 있다.
[4] H.-J. Schoeps, Paulus. Die Theologie des Apostels im Lichte der jüdischen Religionsgeschichte, Tübingen 1959 (= 1972) 174 (이하 H.-J. Schoeps, Paulus)
[5] P. Stuhlmacher, "Das Ende des Gesetzes." Über Ursprung und Ansatz der paulinischen Theologie, in; ders., Versöhnung, Gesetz und Gerechtigkeit. Aufsätze zur biblischen Theologie, Göttingen 1981 166-91 (= ZThK 67, 1970 14-39), 187; P. Stuhlmacher, Das Gesetz als Thema biblischer Theologie, in; ders., Versöhnung, Gesetz und Gerechtigkeit. Aufsätze zur biblischen Theologie, Göttingen 1981 136-165 (= ZThK 75, 1978 251-280), 157
[6] 이는 본 논문에서 바울의 율법이해를 다룰 때, 로마서에서 등장하는 율법에 관한 언명들을 전제로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H. Hübner도 그의 저술에서 (Gesetz, 39) 갈라디아서 부문을 다룰 때 이같은 원칙을 세운바 있다.
[7] D.H. Lietzmann, An die Galaterbrief, HNT 3, 1910, 227f (이하 Lietzmann, HNT 3); H. Schlier, Der Brief an die Galater, KEK 7, 61989, 16 (이하 Schlier, KEK 7); A. Oepke, Der Brief des Paulus an die Galater, ThHK 9, 41979, 23ff (이하 Oepke, ThHK 9); F. Mußner, Der Galaterbrief, HThK 9, 51988, 6ff (이하 Mußner, HThK 9); U. Borse, Der Brief an die Galater, RNT, 1984, 7f; H.D. Betz, Der Galaterbrief. Ein Kommentar zum Brief des Apostels Paulus an die Gemeinden in Galatien, München 1988 (Original; Galatians, Philadelphia: Fortress, 1979), 38f (이하 Betz, Galaterbrief); D. Lührmann, Der Brief an die Galater, ZBK.NT 7, 21988, 10 (이하 Lührmann, ZBK.NT 7); J. Becker/ H. Conzelmann/ G. Friedrich, Die Briefe an die Galater, Epheser, Philipper, kolosser, Thessalonicher und Philemon, NTD 8, 171990, 1f; J. Rohde, Der Brief des Paulus an die Galater, ThHNT 9, 1989, 6ff (이하 Rohde, ThHNT 9); W. Marxen, Einleitung in das Neue Testament. Eine Einführung in ihre Probleme, Gütersloh 41978, 57f; W.G. Kümmel, Einleitung in das Neue Testament, Heidelberg 211983, 258ff; H. Conzelmann, Geschichte des Urchristentums, NTD Ergänz. 5, 41978, 75f; G. Lüdemann, Paulus, der Heidenapostel Bd.I: Studien zur Chronologie, FRLANT 123, 1980, 172; Ph. Vielhauer, Geschichte der urchristlichen Literatur. Einleitung in das Neue Testament, die Apokryphen und die Apostolischen Väter, Berlin u.a. 41985, 105ff.
[8] no,moj는 갈라디아서 외에 로마서에서 74회, 고린도 전서에서 9회, 빌립보서에서 3회 등장한다.
[9] 본 논문 주 49 참고
[10] W.G. Kümmel, Römer 7 und die Bekehrung des Paulus, in; Römer 7 und das Bild des Menschen im Neuen Testament. Zwei Studien, Theologische Bücherei 53, 1-160 (= Diss. Leipzig 1929)
[11] 참고 R. Bring, Der Brief des Paulus an die Galater, Berlin u.a. 1968, 113 (이하 Bring, Galater)
[12] W.G. Kümmel의 견해에 H. Ridderbos, Paulus. Ein Entwurf seiner Theologie, Wuppertal 1970 (Original: Paulus, Kampen 1966), 98f; H. Conzelmann, Grundriß der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UTB 1446, 41987, 256; Ch. Dietzfelbinger, Die Berufung des Paulus als Ursprung seiner Theologie, WMANT 58, 1985, 85; R. Bultmann, Römer 7 und die Anthropologie des Paulus, in: E. Dinkler (Hg.), Exegetica, 1967 198-209 (= Imago Dei. Beiträge zur theolog. Anthropologie, 1932, 53-62), 198f (이하 R. Bultmann, Römer 7) 등이 동의한다.
[13] 참고 R. Bultmann, Römer 7, 199
[14] 참고 Betz, Galaterbrief, 264
[15] 참고 E.P. Sanders, 바울, 60f; E.P. Sanders, On the Question of Fulfilling the Law in Paul and Rabbinic Judaism, in; Donum Gentilicium. New Testament Studies in Honor of David Daube, Oxford 1978 103-26, 126 (이하 E.P. Sanders, Question); Bring, Galater, 113
[16] 랍비(Tannaitic)문헌에서는 구원을 위해 율법을 51% 지키면 된다고 한다 (E.P. Sanders, Question, 109). mishnah Kid 1:10에서는 "한가지 계명을 지키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할 것이고 그의 생명을 (days) 늘릴 것이며 그는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 그리고 계명 하나를 지키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지 않은 것이며 그의 생명을 더 이상 늘리지 않을 것이며 그는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라고 한다 (E.P. Sanders, Question, 109). Mek. Beshallah 6 (33b; 114; i.253 [ch.7]; on Exod. 14:31) 에서도 "실제 한 계명이라도 믿음으로 수용하는 자는 그의 위에 머무는 성령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설명한다. (E.P. Sanders, Question, 114). 하지 말아야 할 죄를 열거한 후 결론으로 계명들을 지키는 자가 의로우며, 그가 살 것이다라는 내용의 겔 18,5-9에 대한 랍비의 주석에서도 (B. Sahn. 81a) R. Akiba는 이것들 중 하나를 행하는 자도 살 것이라고 한다 (E.P. Sanders, Question, 118).
[17] 이 구절의 좀더 자세한 이해를 위해서는 저자의 졸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갈 3:10(6-14)에 대한 한 고찰, 신약논단 9(2002) 697-723을 참조하라
[18] H. Hübner는 (Gesetz, 20,26,39) 이 구절을 근거로 해서 '인간은 율법의 요구를 모두 지킬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라는 사고를 바울은 가졌다고 주장한다.
[19] G.v. Rad, Das fünfte Buch Mose Deuteronomium, ATD 8 1964, 119 (이하 Rad, ATD 8)
[20] Rad, ATD 8, 119f
[21] Lührmann, ZBK.NT 7, 55 "logisch schwierig (논리적으로 난해한)". Lührmann에 따르면 (ZBK.NT 7, 55) 바울은 율법의 책에 기록된 모든 것에 머무는 자는 축복 하에 있지 않다는 구절을 구약에서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27,26의 구절을 원 뜻에 비해 심하게 변형시켜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
[22] 10절을 경험적인 이유에서 나온 논지라고 보고 11절을 새로운 논지로 보는 U. Luz (Das Geschichtsverständnis des Paulus, BEvTh 49, 1968, 150)도 10절과 ("율법을 지키지 못하기에 저주 하에 있다") 11절 이하 간의 사고전개가 불분명함을 인정하고 있다. 그의 책 151에서 심지어 그는 11절 이하도 새 논지가 아니며 10절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율법 하에 있는 것이 저주인 까닭은 (누구도 그것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23] Schlier도 주석책에서 (KEK 7, 132) 갈 3,10a의 무게는 poih/sai에 있다고 보면서, 여기서 바울은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하반절의 구약 인용은 단지 율법에 의한 인간은 저주 하에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이는 바울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어서 나오는 11절에서 10a.b절에 대한 병행언명이 ("율법 하에서는 아무도 의롭지 못하다") 나온다고 Schlier는 본다. 즉 그에 따르면 바울은 여기서 인간이 율법을 모두 지키지 못함으로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24] J.D.G. Dunn, The Incident at Antioch (Gal 2:11-18), JSNT 18, 1983 3-57, 21
[25] K.G. Kuhn, Art. prosh,lutoj, ThWNT 6, 727-45, 731,12ff
[26] "저주"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본 논문 B.3 참고
[27] H. Hübner는 그의 저서에서 (Gal 3,10 und die Herkunft des Paulus, KuD 19, 1973 215-31) 갈3,10.22을 근거로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의 바울은 엄한 샴마이학파에 속했다고 본다. 이에 대해 E.P. Sanders는 (Question, 126)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야 구원된다는 사고는 바울이나 당시 랍비주의에서 발견되지 않음을 밝히면서 Hübner의 견해에 반대한다.
[28] 할례는 여기서 전체 율법의 요구를 대표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해 할례의 유효성을 주장하는 자들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전체 율법의 요구들도 계속 유효함을 인정하는 자들이다.
[29] G. Klein도 그의 논문에서 (Art. Gesetz III, TRE 13, 1984 58-75, 72,11f) 바울은 "율법의 요구를 지킬 수 없음"을 설정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30] 단어 kata,ra는 갈라디아서 (3회) 이외에 히, 약, 벧후에서 각 1회 씩 등장한다.
[31] W. Bauer, Griechisch-deutsches Wörterbuch zu den Schriften des Neuen Testaments und der frühchristlichen Literatur, Berlin u New York 61988, ga,r, s.v. 1 (이하 W. Bauer, Wörterbuch)
[32] 율법의 관점에서 말하면 "율법은 인간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 참고 Vouga, HNT 10, 74
[33] 예를 들면 Lietzmann, HNT 3, 241; Oepke, ThHK 9, 105; Rohde, ThHNT 9, 141; Mußner, HThK 9, 225f; J.B. Lightfoot, The Epistle of St. Paul to the Galatians, Michigan 1957 (= 1865), 137; H.J. Schoeps, Paulus, 183-85; E. De E. Burto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ICC, 1971 (= 1921), 164; U. Luz, Geschichteverständnis, 149; H. Hübner, Gal 3,10, 215; 홍인규, 바울의 율법과 복음,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6, 74 (이하 홍인규, 율법); 김창락, 갈라디아서 (대한기독교서회 창립100주년기념 성서주석 38),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278
[34] Schlier, KEK 7, 132도 이에 동의한다.
[35] 이 말은 율법의 행위를 온전히 이룰 육체가 없으므로 따라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울은 구약에 근거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선언하며, 따라서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36] Schlier, KEK 7, 132
[37] U. Luz도 Geschichteverständnis, 15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라는 관점에서 3,10이 논증되고 있음을 인정한다.
[38] "율법의 저주 (kata,ra tou/ no,mou)"라는 용어는 Betz (Galaterbrief, 269f)에 따르면 바울의 편지 내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그 의미를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율법의 행위에 근거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를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율법은 저주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믿음에 의한 자에게 주어지는 아브라함의 축복과 상관없게 되기 때문이다". Mußner, HThK 9, 233 Anm. 105에 의하면 evk th/j kata,raj tou/ no,mou에서 속격 tou/ no,mou는 gen. auct. 이다; 홍인규, 율법, 70는 주격적 소유격으로 (subjective genitive) 본다.
[39] 이 구절에 따르면 이방인들도 율법의 저주 하에 있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와 달리 비록 이방인들은 율법 없이 죄를 지었다고 한다 (2,12a).
[40] 그의 이같은 대속적인 구원행위는 갈4,5b-6에 언급된 내용과 동일한 것이다: evxape,steilen o` qeo.j to.n ui`o.n auvtou/( geno,menon evk gunaiko,j( geno,menon u`po. no,mon( i[na tou.j u`po. no,mon evxagora,sh|( i[na th.n ui`oqesi,an avpola,bwmen)
[41] 3,7.9에서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그와 함께 복을 받았다고 했다.
[42] 10절 ({Osoi ga.r evx e;rgwn no,mou), 11절 (o[ti de. evn no,mw|), 12절 (o` de. no,moj) 거의 모두 율법과 관련되어 시작한다.
[43] Betz, Galaterbrief, 262도 이에 동의한다; Schlier도 그의 주석에서 (KEK 7, 132) 하나님의 축복에 저주가 대비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Burton에 (ICC , 163) 따르면 바울은 여기서 율법 하에 있는 자람은 저주 하에 있음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
[44] 율법 자체에 대해 갈라디아서 보다 비교적 더욱 많은 언급을 한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율법이 악한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롬 7,12f.14).
[45] 로마서와 비교할 때 갈라디아서에서 이같은 특징은 특별히 더 두드러 진다.
[46] 성경이 모두를 죄 아래 놓는다는 사고는 갈라디아서에 있다 (3,22a).
[47] 계명은 범법함을 위해 주어졌다고 갈라디아서에서 (3,19b)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 논문 B.5 참고.
[48]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는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볼 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빛에서 더 적극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선 본 논문 B.5를 보라.
[49] 하지만 율법은 부정적인 역할을 통해 궁극적으로 믿음에 공헌한다. 이에 대해선 다음 장 (B.5)을 보라.
[50] ca,rin은 여기서 목적을 표시한다: W. Bauer, Wörterbuch, s.v. 1; Betz, Galaterbrief, 296; Rohde, ThHNT 9, 154; 홍인규, 율법, 75
[51] J. Schneider, Art. parabai,nw ktl. ThWNT 5, 733-41, 736,16ff, 744,10ff
[52] Rohde, ThHNT 9, 154; T. Zahn, Der Brief des Paulus an die Galater, KNT 9, 1990 (= 31922), 174 (이하 Zahn, KNT 9)
[53] 이에 대해선 본 논문 B.4를 보라.
[54] 참고 Bring, Galater, 115
[55] Oepke, ThHK 9, 119; Rohde, ThHNT 9, 160은 h` grafh, = o` no,moj 라고 본다. 이에 반해 Schlier, KEK 7, 164, Anm.3; Zahn, KNT 9, 182f; Mußner, HThK 9, 253 등은 h` grafh, ≠ o` no,moj 라고 본다. 하지만 Schlier, KEK 7, 164 Anm.3에 따르면 두 단어 간의 의미 차이는 별로 없다. 비록 o` no,moj가 아닌 h` grafh,가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갈라디아에 율법의 기능은 모두를 죄 아래 가두는 역할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에 비해 로마서에서는 죄가 스스로를 더욱 죄로 드러나고 (7,13ba) 죄되게 하기 위해 (7,13bb) 계명을 이용한다 (7,8.11). 따라서 갈라디아서의 율법 이해가 로마서의 그것보다 더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 3,19b "율법은 범법함을 위하여 주어졌다") 한편 Vouga, HNT 10, 85에 따르면 no,moj는 수동적인 목적어로 여겨지는 데에 반해 grafh,는 능동적인 것으로서 의인화되어 사용된다. 또한 grafh,는 일반적으로 성서의 어느 곳을 (인용으로서) 지시한다 (시 143,2 혹은 신 27,26).
[56] 갈의 다른 곳에서도 바울은 grafh,의 말을 인용한다: 3,8; 4,30.
[57] 율법이 악한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법을 완성하자" (갈 6,2)는 바울의 말은 전혀 이해될 수 없다.
[58] 혹은 그리스도에 의해 규정되고 조건 지어진 형태로 율법은 존재한다: o` no,moj tou/ Cristou/ 갈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