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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29일(주님 수난 성지 주일 ) 마르 14,1-15,47 우리가 왜 죄인인가 오늘 우리는 마르코 복음서가 전하는 수난사에서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분이 하신 모든 일이 허무로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하나의 패배로, 그분을 따랐던 제자들의 기대가 절망으로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어 두 번의 재판을 받았습니다. 유다 최고회의의 심문과 로마 총독 빌라도의 재판입니다. 유다 최고회의는 로마 제국이 식민지에 허락하는 자치 기구였습니다. 지방 유지인 원로들과, 대사제와 중견 사제들, 그리고 율사 대표들로 구성된, 전체 인원 71명의 의결 기관입니다. 이 회의에서 예수님은 거짓 예언자라는 선고를 받습니다. 그 최고 회의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한 이야기가 그분이 거짓 예언자로 단죄된 사실을 입증합니다. 그들은 그분의 얼굴을 가리고, 때리면서 누가 했는지 알아맞히라고 놀렸습니다. 유다 최고회의는 사람을 사형에 처할 권한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보내어, 그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하였습니다. 최고회의가 그분에게 내린 거짓 예언자라는 죄명은 총독의 관심을 끌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최고회의는 예수를 정치범으로 둔갑시킵니다. 그들은 예수가 유대인의 왕으로 행세하였다고 고발합니다. 이 사실은 총독 관저에서 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한 장면이 입증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운 다음, 그 앞에 경례하며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외칩니다. 식민지에서 왕으로 자처한 인물이 점령군 군사들로부터 받는 조롱입니다.
예수님의 남다른 생각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유다 지도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는 하느님이 죄인을 엄하게 벌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면 당연히 겪을 수밖에 없는 병고, 가난, 실패 등을 모두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자비하지도, 용서하지도 않는 분이었습니다. 무자비한 인간이 상상해낸 무자비한 하느님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단죄하면, 하느님도 당연히 단죄하고 벌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유대교 당국이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불온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죄인으로 낙인찍고, 소외시킨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과연 죄인도 사랑하신다면, 유대교 지도자들이 가르쳐 온 것은 거짓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여 그들의 권위를 보장하고자 하였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종교 집단 혹은 비 종교 집단을 막론하고, 한 집단의 기득권자들은 자기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희생시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며 도전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합니다. 예수님이 제거된 경위 그 시대 유대 사회 실세들의 눈에 예수님은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시골 한 목수의 아들입니다. 종 교적 신분은 평신도이며, 재산과 지위도 갖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안식일을 잘 지키지 않을 뿐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기지 않았다”(마르 2,27)고 공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대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을 크게 존경하지도 않았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당신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고 폭언까지 하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율법과 더불어 누려 온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는 인물이었습니다. 요한 복음서는 대사제 가야파의 말을 전합니다. “한 사람이 이 백성을 위해 죽고 온 겨레가 멸망하지 않는 것이 더 이롭다.”(요한 11,50) 자기들이 만든 질서와 기득권을 보존하기 위해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이 대사제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회에서 그렇게 제거되셨습니다. 유다 최고회의는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이 평소에 적대시하던 로마 총독의 협조까지 얻었습니다. 그들은 동족인 예수님을 로마제국을 거슬러 음모한 정치범으로 만들어 고발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쓰는 편법입니다. 가까이에 있는 친구를 제거하기 위해 멀리 있는 원수의 협조를 얻는 편법입니다. 미움은 그 대상을 제거하는 데에 온 힘을 쏟게 하고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총독 빌라도는 진리에 관심이 없고, 식민지 유대를 무난히 통치하고자 하는 로마 고위 공무원입니다. 통치자인 그에게 식민지 청년 한 사람의 생명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빌라도가 군중의 비위를 맞추기로 작정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였다고 말합니다. 빌라도에게는 식민지인 유대아의 군중과 우호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나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신 예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유대 최고회의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데에는 그들의 권위주의와 옹졸함이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처형한 것은 그가 진리에는 관심 없고, 인간 생명을 소홀히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권위주의, 옹졸함, 생명경시 등의 죄는 인류가 항상 범해 온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죄와 무관하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신’ 예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이라고도 고백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대의를 위해 투신하면, 그 생존은 보장되지 못합니다. 그 대의가 신앙이면 순교, 그것이 국가라면 순국, 그것이 직장이라면 순직입니다. 자기 일신의 안일을 생각하지 않고, 온 몸을 바쳐 대의를 추구하다 목숨을 잃는 경우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이 자기 목숨보다 하느님의 일을 찾고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역사 안에 남겼습니다.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이라는 신앙고백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남긴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최후를 지켜본 백인대장의 입을 빌려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하느님의 생명을 사신 예수님이었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생명이 발생시키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예수님의 삶에서 읽어내어 그것을 실천하라고 가르칩니다. 신앙은 자기 한 사람 잘 살겠다고 열심히 비는 소인의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사랑하십니다. 그 자비와 사랑이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대의입니다. -서공석 신부님 (요한 세례자) 사제 밴드를 함께 한다는 것은... 제가 사는 이야기를 조금 들려 드릴까 합니다. 저는 동료사제들과 음악밴드를 만들어 각 본당을 돌며 ‘이야기 음악회’ 형식의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제주교구 사제 밴드 "더로드"의 이름에는 "The Lord" 주님, "The Road" 그 길; "주님께서 가신 길을 저희도 따라 가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저희에게는 두 가지 지향이 있습니다. 첫째로 어린이, 청소년들이 저희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제, 수도자 성소를 키워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둘째는 전 세대 신자들과 함께 성가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부르며 축제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짧은 강연을 하며 강론시간에 다루지 못했던 주제를 신자들과 나눕니다. 신학생 시절, 지금의 드럼을 맡고 있는 신부님이 "우리 신부가 되면 사제 밴드 결성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왜 밴드를 만들자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신부들이 같이 모여서 뭔가를 한다는 것이 좋아서 동의했습니다. 결성 뒤 2년 동안 교구 행사뿐만 아니라 요청을 하는 여러 곳에서 기꺼운 마음으로 찬조공연을 하고, 청년들을 대상으로 ‘이야기 음악회’ 정기공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멤버 중 두 신부가 유학과 선교를 떠나면서 저희들의 시간은 멈췄습니다. 거의 해체 위기에서 1년 정도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시작해 보자는 얘기가 나오면서 무엇보다 사제 밴드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을 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누군가는 함께 모이는 것이 좋아서, 누군가는 청소년 밴드 활성화의 목적을 가지고, 누군가는 인문학 강의와 함께하는 작은 음악회를 꿈꾸며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강한 동기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성소가 부족한 시외 본당을 다니면서 우리들의 모습을 보며 성소를 키워 나갔으면 하는 바람과 전 세대가 함께 모여 음악과 이야기를 통한 축제의 장을 만들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작년에 저희는 7개 본당을 순회하며 이야기 음악회를 열었고 올해도 7개 본당에 방문할 계획이 있습니다. 자랑을 조금 하자면 각 본당에 갈 때마다 신자분들이 성당을 가득 채워 주시고 공연이 끝나면 마치 피정을 한 것처럼 너무 은혜로웠고 행복했다는 소감을 전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은 더욱 보람을 느끼고 신바람이 납니다. 오늘 주님 수난 성지주일을 맞아 예수님의 수난 말씀을 저희들의 모습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 36)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 놓으신 것처럼 저희들에게도 공동의 지향을 위해서 때론 양보와 배려가 요구됩니다. 같이 연습을 하다가 서로 템포가 맞지 않거나 음악적인 의견이 다르면 자존심이 강한 신부들끼리 티격태격합니다. 어떤 때는 서로 기분이 나빠서 연습을 중단하기도 합니다. 공연 곡을 선정할 때도 스타일이 각자 다르기 때문에 자신이 추천한 곡을 해야 될 당위성에 대해서 끝까지 얘기합니다. 결국은 다수의 의견에 따라 결정하지만 내심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이렇게 10인 10색이고 자존심과 주장이 강한 신부들끼리 함께 해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죽이는 때가 필요합니다. 우리 삶 안에서 공동체가 의견을 조율해야 할 때, 서로 합심하여 일을 해야 할 때 공동의 뜻을 위해서 더 나아가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자신의 뜻을 비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시고 끝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닮아갈 것을 다짐하며 그 은혜를 청해 봅니다. -우직한 신부님 (안젤로) / 제주교구 정난주 본당 주임. 사제밴드 "더로드" 단장 [생활 속의 복음]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 계절 탓인지 아니면 한 방송에서 들은 “태양을 쬐는 시간이 적어서” 생긴 증후군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 굉장히 피곤합니다. 약속을 잊거나 물건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생깁니다. 새삼 나이가 들어간다는 느낌이 들고 ‘나는 어디에 관점을 두고 살았는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나는 무엇을 붙들고 살아왔는가?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묻는 질문에 ‘건강’(43.5%)과 ‘가족’(33.5%)이라고 응답한 분들이 ‘종교’라고 응답한 신자(15.6%)보다 월등하게 높게 나와서 충격을 줬습니다. 사제에게 이런 질문이 던져진다면 어떤 답이 나올까요? ‘부모ㆍ형제, 대한민국 민주화, 정의, 신자 분들의 올바른 신앙생활, 하느님 나라’ 등 여러 대답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과연 무엇이 가장 소중한 가치라 생각하고 있을까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집중한 것은 바로 ‘어린 나귀’(마르 11,7)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어린’이라는 단어가 없지만 공관 복음 전체는 ‘어린 나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왜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멋지고 커다란 말이나 마차를 타지 않고 ‘어린 나귀’를 타셨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특히 요한 복음에는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예수님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라자로를 보려고 모여들었고 예수님을 믿었다”(요한 12,9-11)고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을 희망의 왕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 엄청난 능력을 지닌 예수님이 ‘멋진 말’이나 ‘병거’(兵車)를 타고 오셔야 하는데 농민들이 이용하는 보잘것없고, 볼품없고 나약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즈카르야서(9,9-10)에서는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분은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시고 전쟁에서 쓰는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는 예언을 확인시켜줍니다. 바로 유다 민족에게서 이러한 것들을 제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적이 아닌 유다에게서 말입니다. 어떻게 군대와 무기도 없이 독립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돈, 명예, 가족, 건강 등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내려놓고 진정한 겸손과 사랑을 통해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평생 말씀하시고 실천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다 민족 백성들과 나는 무엇이 다를까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콩고물이라도 얻어먹고 한 자리를 차지하려 하다가 배반한 제자들과 나는 어떤 점에서 다른가 생각해봅니다. 세상의 유혹 속에서 살면서 유다의 왕들이 “반드시 평생토록 날마다 읽고 명심하라”고 한 내용을 함께 읽어봅시다. “임금은 군마를 늘리거나, 그것을 늘리려고 백성을 이집트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 또 임금은 아내를 늘려 마음이 빗나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고, 은이나 금을 너무 많이 늘려서도 안 된다(신명 17,16-17).” 누구를 위하여 기도를 드리는지요? “호산나,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 -박재식 신부님(토마스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16> <16> 봉사하지 않고 지배하는 돈은 안 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속담이 있다. 여러 가지 경우에 사용된다. 일반적으로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되는 행동 양식을 정당화하기 위한 말이다. 먹고 살기 위해 비굴한 행동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상사의 몰상식한 행위가 모욕적이고 밉살스럽고 눈에 거슬려도, 꾹 참을 수밖에 없다는 분노도 담겨있다. 그렇다고 이 속담을 빌미로 비도덕적이고 악한 행위를 정당화할 수도 없고 그리되지도 않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물질 세계의 지배를 강력히 받고 있는지 잘 드러내고 있음은 틀림없다. 웅변적으로 인간이 무엇이고, 어떤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동물적 본능을 지닌 존재이고, 윤리와 도덕률 그리고 엄존하는 법체계 속에 살아간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윤리이고 법률이다. 하물며 부자들이 하는 도둑질과 비도덕적 행위들은 얼마나 비난받아 마땅하고 처벌 수위가 높아야 하는지는 말할 나위가 없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올바른 법치를 세워야 하는 국가 권력이 비윤리적인 경제 체제를 수립하고 악법을 제정한 뒤, 이를 부추긴다면, 그야말로 재앙이 밀어닥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법규에 충실하며, 그 사회를 위해 예언자적 소명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의 위치에서 그 역할을 다하고자 한다. ‘새로운 독재’의 출현으로 규정하고 단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경제 활동과 산업 분야에서 ‘윤리’가 살아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현대 사회에서 우상화된 ‘돈’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교황의 이와 같은 지적을 매우 위협적으로 여기고 있다(57항). 사람들은 이미 수정되어 한 인간이 된 ‘배아’를 마음대로 조작하고 상품화하여 자본주의 시장에 내어 놓고자 한다. 엄청난 가치와 효용성이 있다고 여기며 여기에서 발생하는 비윤리적인 문제에 슬그머니 눈 감으려 하고 있다. ‘윤리’와 ‘하느님에 대한 거부’가 이런 태도 뒤에 깔려 있다(57항). 인간을 조작하고 타락시키면서까지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감행하려는 사회적 경향의 죄악성을 분명하게 인식시켜 주고 있다. 하느님을 거부한 인간은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고 인간에게 맡겨진 대자연까지도 오염시키고 파괴하여 그 자체로 징벌의 결과를 맞게 됨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바른 정신이 사회적 경향을 형성시키기 위해 서로 연대해야 함을 각성시키고 있다. 교황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들에게 맡겨진 봉사 임무에 최선을 다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전에 맞서도록 촉구합니다. 돈은 봉사해야지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교황은 … 부유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을 돕고 존중하고 북돋워 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깨워 줄 의무가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심 없는 연대성을 지니고 경제와 금융에서 인간을 이롭게 하는 윤리로 되돌아갈 것을 권고합니다”(58항). 모든 인간이 지닌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자신만을 위한 삶과 끝없는 소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무자비한 자율시장 독재의 권력으로, 약자들의 재화와 생명을 약탈하게 된다.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58항, 성 요한 금구의 라자로에 관한 강론). -홍기선 신부님(히지노) 제물과 나귀와 겉옷과 혼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란 영화입니다. 미국과 영국군은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시행합니다. 작전은 성공했지만 많은 군인이 죽었습니다.
이 때 군입대한 라이언 4형제 중 3형제가 전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결국 오늘이면 아들 셋의 전사 통보를 받을 어머니를 위해 막내아들 라이언을 귀환시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전투 베테랑인 밀러대위는 상부로부터 얼굴도 모르는 라이언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경험 많은 동료들과 라이언이란 군인을 찾아 나서고, 그 찾기까지도 계속 매복해 있는 독일군들에게 형제와 같은 동료를 잃어갑니다.
결국 천신만고 끝에 라이언을 만납니다. 그러나 전투 끝에 밀러대위와 함께 왔던 모든 사람이 죽고 결국 밀러대위도 다리를 폭파하려다 총탄을 맞고 죽어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 때문에 함께 왔다가 죽어간 전우들의 처참한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라이언에게 이 한 마디를 합니다.
“라이언 잘 살아야 돼!”
밀러대위는 다가오는 탱크를 막기 위해 권총을 꺼내 힘없이 쏩니다. 예닐곱 발 째 쏘는데 탱크가 터집니다. 아군비행기의 P-51의 폭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아군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군의 지원 병력이 온 것입니다. 독일군은 후퇴하고, 라이언은 살게 됩니다.
수십 년 후 백발노인이 된 라이언 그는 가족들과 함께 국립묘지에 왔습니다. 그는 밀러대위의 묘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묻습니다.
“여보 나 잘 살고 있지?” “그럼요.”
오늘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사람들이 깔아주는 겉옷을 밟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예루살렘을 구원하라고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었습니다. 나귀는 결국 죽음으로 새 생명을 구하게 될 희생제물을 나르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나귀가 의미 있게 등장하는 첫 구절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기 위해 모리야 산으로 가는 장면입니다.
모리야 산이란 예루살렘의 시온산을 의미하고 나 중에 그 위에 성전이 세워집니다. 이때 희생제물과 나무를 운반하는 역할을 나귀가 합니다. 오늘 예루살렘 입성과 같은 장면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사악 대신 숫양 한 마리를 마련하여 희생제물이 바쳐지게 됩니다. 나귀는 겸손의 상징이고 겸손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그분은 당신의 피로 먼저 우리 성전을 정화시켜 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나귀는 겸손 되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임을 당할 하느님의 어린양을 나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귀에 탄 그 제물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가 판관기에 나옵니다.
한 레위인이 베들레헴 여자와 혼인하였다가 그 여자를 데리고 베냐민 지파가 속한 기브아를 지날 때였습니다.
하룻밤을 그 동네에서 묵었는데 불량배들이 그 베들레헴 여자를 능욕하여 결국 죽고 맙니다. 그 죽은 여인을 나귀에 태우고 돌아와서는 열두 조각으로 시신을 나누어 각 지파에게 보내어 결국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지파 간에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자만하고 있던 베냐민 지파는 나머지 지파들에게 거의 멸살을 당하게 됩니다.
마치 아벨의 피가 뿌려진 땅에서 더 이상 그 피를 흘리게 했던 카인의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되었던 것처럼 나귀에 얹힌 제물은 결국 이 세상에서 죄를 없애기 위해 하느님께서 일부러 내어놓으신 희생양인 것입니다.
그 희생양의 피가 우리 땅에 뿌려지게 되면 우리 땅에서 죄가 사라지게 됩니다. 나귀는 이 세상에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싣고 우리 땅으로 들어와 그 피를 뿌려 우리에게서 죄를 없애게 만드는 도구인 것입니다.
사울이 이미 폐위될 운명에 처해졌을 때 기름부음 받은 다윗이 사울에게 보내졌습니다. 사울은 이제 사라져야 할 또 다른 왕인 것입니다. 그때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 다윗의 아버지는 나귀에 ‘빵과 포도주’를 실어 다윗 편에 사울에게 보냅니다.(1사무 16,20)
사울이 다윗을 맞아들이고는 악령이 물러갔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결국 악령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한 사울은 멸망하고 그 땅에 빵과 포도주의 제물인 다윗이 왕으로 등극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나귀가 나르는 것은 악을 없애는 하느님의 희생제물,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오늘 나귀를 타고 성전으로 입성하시는 것은, 우리가 매 미사 때마다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오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나귀는 그렇다면 바로 그런 신비가 이루어지는 도구, 곧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희생이 이루어지게 하겠고 그 희생의 제물로 우리 땅에 죄를 없애시고 당신의 왕국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나귀로서 그리스도를 등에 메고 우리 각자의 성전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시는 그리스도를 모셔옵니다. 그런데 그분이 성전 안으로 들어오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겉옷’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이들이 ‘겉옷’을 나귀 위에 얹고 그 겉옷을 깔았다는 것을 되새겨야합니다.
성경에서 ‘겉옷’은 자신의 ‘전부’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전부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입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자신의 모든 능력을 부여해 줄 때 그에게 자신의 겉옷을 입혀줍니다. (1열왕 19,19)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으로 물을 치자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1열왕 2장) 마치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듯이, 계약의 궤로 요르단강 물을 갈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듯이, ‘겉옷’은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의 능력을 상징하는데 그 능력으로 주님이 들어오실 문을 열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물과 물을 가르셨고 그 안에 동물들과 아담이 살게 하셨습니다. 물과 물을 나눈다는 것은 아담이 살 공간을 마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담은 신랑이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루살렘은 신부이고 하와입니다.
마치 성모님께서 당신 안에 가득하신 은총으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시며 당신 마음의 성문을 열어 신랑인 그리스도를 당신 안으로 맞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자신을 내어드려 그분을 새로운 왕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예부터 왕을 맞이할 때는 자신들의 겉옷을 까는 풍습이 있었는데(2열왕 9,13) 팔마가지를 흔드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 왕이 오실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겉옷을 벗어 그분의 길 앞에 까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을 버리는 완전한 순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나귀 위에 탔다는 것 자체가 당신 전부를 희생한다는 의미이고, 그분을 맞는 신부도 자신의 전부인 겉옷을 깔아야만 그것을 밟고 들어오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혼인 의복은 하느님께서 직접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의복으로 신랑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 의복으로 신랑을 맞이하는 장면이 바로 성전입성입니다.
그분이 우리 성전 안으로 들어오시려면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전부 내어놓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혼인이 요한 묵시록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과 천상 예루살렘이 혼인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종결지어지게 태초부터 계획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나귀에 탄 희생제물로서 우리를 위해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모신 성령의 힘으로 내 자신을 내려쳐서 그분의 뜻이면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순결한 신부의 모습을 갖추는 것만 남은 것입니다.
겉옷을 깔지 않으면 신랑은 돌아가 버립니다.(아가 5 참조) 그리고 그 겉옷은 파수병들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내 겉옷을 깔 용기를 내야합니다. 그러면 신랑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가는 곳에 너희들이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오늘 복음 중간에 보면, 베드로와 제자들이 ‘스승님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힘주어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잡히시고 끌려가시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을 끝까지 함께 걷지 못했던 걸까요? 아마도 다음의 세 가지가 부족했기 때문일 거 같습니다.
먼저 사랑이 부족해서입니다. 부족하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니죠.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님과 함께 전도 여행을 다녔을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랑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더 크고 충만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길은 가장 큰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두 번째로 믿음이 부족해서입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친구가 어떤 기막힌 사업을 구상하고 나보고 함께 하자고 합니다. 얼마를 투자해야 할까요? 그 친구의 사업을 신뢰하는 만큼 투자 금액이 달라지겠죠. 그 친구의 사업이 영 못미더우면 성의 표시만 하거나 정중하게 거절할 거고, 반대로 그 친구의 사업이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여겨진다면 더 많은 금액을 투자할 겁니다.
그리고 정말 확실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올인 하겠죠. 그러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얼마만큼 믿음을 두었을까요? 많은 투자를 했지만, 올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죽어야 산다.’ 는 그 말씀에 자신을 내어 던지지 못합니다. 그 앞에서 주저하다가 결국 돌아서 버립니다.
세 번째로 기도가 부족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괴로워하시며 산에 올라가 기도하실 때에 베드로와 다른 두 제자는 피곤하여 잠이 들어 버리곤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기도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일어나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였던 예수님은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라고 말씀하시며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지만, 기도하지 않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 버립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부족함이 우리의 부족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우리의 노력과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먼저 신앙공동체 안에서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성사에 참여하고 친교를 나누는 가운데, 사랑과 믿음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만으로 부족한 것들이 있습니다. 나의 힘으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고, 나의 의지만으로 화해가 불가능한 상황도 있습니다.
또 나의 믿음으로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임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은 성령님의 도우심입니다. 나의 사랑과 믿음을 온전하게 해 주십사고.. 또 나의 부족한 사랑과 믿음을 충만하게 채워주시기를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큰 사랑과 믿음으로 나아가 주님이 걸으신 그 길을 따라 걸을 수 있을 겁니다.
제자들이 성령강림 이후에 목숨을 걸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던 걸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도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다면 가지 못할 곳이 없고, 실천하지 못할 일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나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작은 노력을 시작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모금을 나가면 새벽미사를 할 때도 있는데, 추워서 잠바를 입고, 사람이 없어서 고해실 근처에 앉아 기도를 하고 있으면,
가끔 전례 담당하시는 자매님이 다가오셔서, 이런 말을 하신다. “세례 받으셨어요? 오늘 독서 좀 해 주실 수 있나요?”
-인천교구 밤송이(김기현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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