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터넷 방송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18세 이하의 청소년 절반이 경제적 능력만 된다면 성형수술을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많은 청소년이 자기 신체 대한 불만족 그리고 여기서 오는 불안이 있음을 보여주는 설문조사였습니다.
사실 성형수술로 얼굴을 얼마든지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웃지 않는 얼굴을 웃는 얼굴로 바꾸기는 힘들다고 합니다. 물론 얼굴 뼈 수술을 하면 가능하기는 하지만, 이 역시 웃고는 있는 것 같은데 부자연스러운 웃음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따라서 웃는 얼굴은 인공적인 성형이 아닌 본인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웃지 않는 사람은 대체로 너그럽지 못하고, 어둡고 부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 분위기가 전달되어서 상대방도 나와 똑같은 분위기를 보입니다. 그 상대방을 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자기입니다. 고스란히 나에게 다시 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내가 먼저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 역시 상대방의 얼굴을 통해 웃음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아주 간단한 진리인데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자기는 원래 그렇다면서 스스로 철벽을 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어린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에는 많이 웃었습니다.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며 계속 웃었습니다. 아주 썰렁한 농담에도 폭소를 터뜨립니다. 사랑하면 세상의 밝은 모습만 보게 되어서 웃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모르면서도 당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을 두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지금으로 치면 어떤 사람일까요? 성당에 다니지는 않지만, 윤리적으로 바르게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들이 성당 다니지 않는다고 무조건 반대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이 땅에 오셨던 것처럼,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모두가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종교를 갖고 있다고 해서 인상 쓰고 배척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에게는 구원이 전혀 없다는 생각으로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나의 뜻과 다르다고, 나와 함께하지 않는다고 거리를 두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그들에게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가야 했습니다.
오늘의 명언: 실패하지 않고 성공할 수 없다. 하지만 같은 실패를 두 번 하면 성공할 수 없다(조지 버나드 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