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족 자살의 사회심리
2007. 06. 26 00:25
지난 3월 수 천만원으로 불어난 사채독촉에 시달리던 30대 남성이 아내와 생후 13개월 된 딸과 함께 일가족 자살을 기도했다고 한다. 다행히 동생에게 발견돼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 25일 알려졌다. 단 돈 1백만원의 사채를 빌린 것이 1년 반만에 수 천만원으로 불어났다니 참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지난 4월 26일에도 서울 홍제동에서 빚을 갚지 못해 일가족 4명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IMF 때보다는 덜할지 몰라도 우리사회에서는 여전히 일가족 자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왜 사람들은 일가족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힌트는 일가족 집단 자살이 오래전부터 문제가 되었던 일본 사회에 있다.
합의심중과 무리심중
일가족 집단 자살은 일본에서는 절대 드문 사건이 아니다. 일가족 자살을 의미하는 일본말인 무리심중(無理心中)이란 말이 하도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다보니 이미 일상어가 되어 버렸을 정도이다,
집단 자살은 일본인에 고유한 멘탈리티로 여겨져 왔다. 적어도 무리심중, 그 증에서도 모친에 의한 모자심중(母子心中) 만큼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본 고유의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지만 적어도 서구사회에서는 일본인의 모자심중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무리심중이 타살이지 어찌 자살이냐는 것이다.
몇 년전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 여성이 자식들과 함께 자살한 모자심중이 미국 사회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사실 일본사회에서 모자심중이란 다른 자살과는 달리 “오죽하면 그랬을까”라는 동정심과, "나라도 그런 처지라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라는 공감을 얻는 것이 보통이다. 이 점은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미국 매스컴의 반응에서는 이러한 공감과 동정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명백한 타살일 뿐이라는 냉랭한 반응이었다.
일본인들의 심중은 합의심중과 무리심중이라는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합의심중이란 가족들이 모두 동의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일가족 자살이다. 이에 비해 무리심중이란 가족들의 동의 없이 이루어지는 일가족 자살이다. 여기에는 분명 살인이라는 성격이 포함된다. 부모가 자식을 죽인 후 마지막으로 자신이 자살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살이라는 성격 때문에 서양문화에서는 일가족 집단자살을 자살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일본인의 무리심중은 80%이상이 모친에 의한 모자심중이라는 데에 큰 특징이 있다. 심중으로 희생이 되는 어린아이는 만 4세 이하인 경우가 많으며 가해자인 모친의 경우 25세에서 34세의 젊은 여성에 많다. 또한 모자심중은 남편이 집에 없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진공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자포자기 심리가 원인
일본의 경우 무리심중은 20세기 들어 급격하게 늘어났다.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던 때에는 지금의 우리와 같이 생활고로 인한 무리심중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경제가 좋아지면서부터는 모친의 정서장애로 인한 것이 훨씬 많아졌다. 전통적인 대가족제도가 붕괴되고 핵가족화가 진전되면서 일어나게 된 현상이다.
도시에서 핵가족이란 일종의 진공상태이다. 특히 지방에서 도시로 이주한 핵가족의 경우, 주위에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가사와 육아를 전담해야하는 여성의 경우, 자식과 자신의 인격을 분리시키는 것이 어렵다. 다시 말하면 내가 아니면 이 아이를 누가 돌보아주겠느냐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우울증 등의 정서적인 장애에 빠져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자살을 결행할 때 결국 자식까지 살해하고 만다. 또 일본이라는 사회에는 모계중심경향이 상당히 강하다는 것도한 몫을 한다.
우리사회에서 다발하는 일가족 자살은 생활고로 인한 것이 대부분이다. 간혹 아이들의 성적 때문에 일가족이 자살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상당히 특수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생활고에 빠진 이들이 일가족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목숨의 끈을 놓아버리는 이면에는, 의지할 데라곤 아무도 없는 진공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자포자기적인 심리가 있다. 자살의 마지막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야말로 바로 이 진공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자포자기 심리인 것이다.
지금같은 식이면 일가족 자살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일가족 자살이란 우리사회의 사회 안전망이 너무나 미비되었고 또 세상이 너무나 각박해졌기 때문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사실 우리사회에서는 공적인 사회안전망보다는 부모, 형제, 친구 등에 의한 사적인 사회안전망이 더 큰 역할을 해왔다. 개인이 생활고에 빠졌을 때, 정부, 은행보다는 가족의 원조가 큰 힘이 되어 왔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사회복지란 허울 좋은 개살구일 뿐인 것이다.
일부 계층을 뺀 대다수의 우리 사회 구성원의 경우 사적인 사회안전망이 완전히 붕괴됐다. 물론 인간관계 자체가 각박해져 형제, 가족, 친구 관계가 예전보다 건조해진 면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된 데에는 정부와 금융기관의 책임이 가장 크다. 금융기관은 담보나 연대보증이라는 전근대적인 방식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고, 정부는 그것을 나 몰라라 방치해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담보나 연대보증에 의한 대출시스템에서는 돈을 빌린 누군가가 망하면 다른 가족도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대개 연대보증을 하는 것이 가족이나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연대보증을 해주고 잘못되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가족 전체가 심각한 피해를 입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 결과 어려움에 빠진 사람에게 도움의 손을 뻗어줄 가족이나 친구가 없어져 버린다.
지난 수 년간의 경기침체로 대부분의 가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상위계층을 빼놓고는 살기가 빡빡하다. 또 집마다 막대한 빚을 안고 있다. 내 코가 석자이다 보니 마음은 굴뚝같지만 누구를 도와줄 여유가 전혀 없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곤경에 마주친 사람은 사채업자를 찾을 수밖에 없다. 사채업자를 찾으면 끝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돈을 빌리는 것이다. 사채를 빌리면 빚독촉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악랄하고 더러운 사채독촉으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은 내가 죽으면 누가 내 아이들을 돌보아주겠냐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이 더러운 세상에 아이들이 남아서 고생하느니 함께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것이다. 주위의 도움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진공상태에 자신이 놓여졌다는 것을 절감한 결과이다. 더 이상 어찌 해볼 수 있는 길이 없다면 남은 것은 자포자기밖에 없다. 결국 일가족 자살이라는 극단적 수단을 택함으로써 목숨의 끈을 놓는다.
지금같이 체감 경제가 바닥을 기고 공적 사회안전망이 있으나마나 한 상태라면 우리들은 앞으로도 계속 일가족 자살사건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가만 있을 수만은 없다. 누군가가 지금도 진공상태에 놓여진 수많은 사람들에게 손을 뻗어, 우리 사회가 그렇게 살 가치가 없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일가족 자살을 막을 수 있다. 진공상태에 놓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이다.
이 사회에 희망과 비전을 줄 수 있는 것은 우선은 정치인이다. 그러나 책임있는 정치인들은 이런 데에는 눈꼽만큼의 관심도 없다. 오로지 대선에만 혈안이 되어 모두가 미쳐 날뛰고 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니 돈없고 불쌍한 사람만 죽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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