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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광해군‧인조‧효종‧현종‧숙종 6대 조선 국왕과 시대를 함께 하며 83세까지 장수한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1685). 임진왜란 직후에 태어나 격랑이 휘몰아친 조선 역사의 5분의 1을 경험했다. 서궁에서 죽은 듯이 유폐 생활을 했고, 인조를 저주한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생사를 넘나들기도 했다.
세상에 선과 악의 싸움은 드물다. 선과 선의 싸움이 대부분이다. 정치 투쟁으로 얼룩진 조선은 ‘선’이 ‘선’을 죽이는 사회였다. 정명공주는 과연 이 험난한 파고를 어떻게 헤쳐 나갔을까?
1602년 음력 7월 13일 선조가 김제남(金悌男, 1562~1613)의 딸을 계비로 맞아들이니 그녀가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이다. 당시 선조의 나이 51세, 인목대비의 나이 19세였다. 열 달 후인 1603년 음력 5월 19일 정릉동 행궁에서 정명공주가 태어났다. 인목대비의 측근 내인이 썼을 것으로 추정하는 [계축일기(癸丑日記)]는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계묘년(1603년) 왕비께서 공주를 낳으셨다. 왕자에 대한 기대가 컸던지 소식이 잘못 전달되어 대군 아기씨가 태어났다고 전해졌다. 실망한 유자신(광해군의 장인)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공주마마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그제야 반색하며 축하 예물을 올렸다. 얼마나 왕비마마를 미워했으면 그렇게 했을까.- [계축일기] 1권
정명공주가 태어난 지 3년 후인 1606년(선조 39)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이 태어났다. 55세의 늦은 나이에 적장자를 얻은 선조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공빈 김씨 소생인 광해군에게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선조가 언제 자신을 내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인목대비가 낳은 영창대군은 광해군의 왕위 계승권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1608년 선조는 즉위한 지 41년 되던 해에 승하했다. 영창대군은 세 살배기 어린아이였으므로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을 잘 돌봐 달라는 유명(遺命)을 남겼다.
광해군은 34세의 나이에 제15대 왕으로 즉위했다. 광해군은 선조가 살아 있을 때와는 달리 영창대군을 본체만체했다. 하지만 정명공주는 받들어 올렸다. [계축일기]에는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하루는 대군이 ‘대전 형님(광해군)이 보고 싶다.’라고 보채어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나란히 인사시켰다. 상감은 정명공주에게 ‘이리 와 보라.’라며 만져 보기도 하고 ‘참 영민하고 예쁘구나.’라고 칭찬하기도 했으나, 대군에게는 말도 붙이지 않고 본 체도 하지 않았다. 대군이 어려워하자 인목대비께서 ‘너도 상감 앞으로 가 보거라.’라고 일러 주셨다. 대군이 일어나 임금 앞에 가서 섰지만 여전히 본 체도 아니 하시니 대군이 나가서 울음을 터뜨리셨다. ‘대전 형님이 누님은 귀여워하시고 나는 본 체도 아니 하시니 나도 누님처럼 여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무슨 일로 사내아이가 되었는고.’라며 종일 우시니 불쌍하시어 차마 볼 수가 없더라.- [계축일기] 1권
1614년 2월 영창대군은 역모를 꾸몄다는 ‘7서의 옥’에 연루되어 외할아버지 김제남의 뒤를 이어 처형당했다. 인목대비의 입장에서 광해군은 자식이면서도 친자식을 죽인 원수였다. 두 사람은 한 궁궐 안에서 함께 지낼 수 없었다. 1615년(광해군 7년) 4월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두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광해군은 1618년 인목대비를 ‘서궁’으로 격하한 후 경운궁에 유폐했다. 경운궁(옛 정릉동 행궁)은 광해군이 있던 창덕궁의 서쪽에 있어 서궁이라고도 불렸는데, 인목대비를 후궁으로 낮추면서 그녀의 궁호도 ‘서궁’으로 정해졌다. ‘서궁’은 경운궁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창덕궁 서쪽에 있는 후궁’을 의미하게 됐다. 광해군은 ‘서궁’ 인목대비가 있는 서궁 주변에 높은 담장을 쌓고 초소를 두어 무관에게 감시하도록 했다.
정명공주도 인목대비와 함께 서궁에 유폐되었고, ‘공주의 봉급과 혼인은 옹주의 예에 의한다.’라는 폐비절목(廢妃節目)에 따라 옹주로 강등되었다. 폐비절목의 규정은 예외적인 조항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실상 서인(庶人)으로 강등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절망에 빠진 인목대비에게 마지막 남은 가족은 딸 정명공주뿐이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이 공주의 소식을 물어올라치면 “이미 죽었다.”라며 둘러댔다.
정명공주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남자가 쓰기에도 힘에 부친다는 한석봉의 필법을 수련하는 데 정진했다. 정명공주는 서궁에 유폐된 동안 ‘화정’을 비롯한 많은 서예 작품을 썼다. 모녀가 처한 비극적 상황은 정명공주를 조선 최고의 여류 서예 작가 반열에 올려놓는 바탕이 되었다.
[화정]은 글자 하나의 사방이 각각 73cm나 되는 대작이다. 연약한 여성의 체력으로 이런 글씨를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술사가로부터도 타고난 명필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문한(文翰)은 부인들이 할 일이 아니다.’라는 유교적 습속 때문에 정명공주는 자신의 작품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이 때문에 정명공주가 글씨를 잘 쓰고 문장에 능하다는 사실은 세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화정]은 정명공주가 죽은 후 막내아들 홍만회(洪萬恢, 1643~1709)가 물려받았다. 홍만회는 혹시라도 [화정]이 사라질까 두려워 여러 벌의 탁본을 떠서 친인척과 주변 지인들에게 나눠 주었는데, 그들 중 남구만(南九萬, 1629~1711)에게는 발문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조선 후기의 문장가이자 서화가인 남구만은 저서 [약천집(藥泉集)]에서 정명공주의 필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공주의 막내 아드님인 무주군이 공주가 서궁에 계실 때 쓰신 ‘화정’이라는 두 대자를 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는 선비(先妣, 돌아가신 어머니)의 필적입니다. 선비께서 평소 겸손해 하신 뜻을 지킨다면 남에게 보일 필요가 없겠으나 자손들이 선비를 사모하는 마음을 지닌다면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은 우환의 즈음에 쓴 것이고 화려한 날에 쓴 것이 아님을 밝혀 주십시오.”
이에 나는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주는 안으로는 밝으시지만 밖으로는 감추고, 재능이 있으시지만 그 명예를 사양하여 심덕의 온전함이 일부분만 나타났소. 공주의 글씨를 받들어 보니 마치 선조 대왕의 필법에서 나온 듯하오. 필적의 기상이 웅건할 뿐만 아니라 온화하면서도 두터워 규중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소. 그 필법에서 심획(心劃)을 얻었고, 그 성정에서 감동하는 교화를 얻었으니 가문이 엄숙하고 화목한 바 없이 그러하겠소.”- [약천집] 27권, 신사년 (1710년, 숙종 27년)
서인 세력을 등에 업은 인조는 광해군이 명을 배신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이유로 반정을 일으켰다. 인조는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인 정원군의 장남이고, 정원군은 선조가 총애했던 신성군의 동생이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에게 즉위 교서를 내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존호를 복원한 인목대비는 공주로 복권된 정명공주와 서궁 유폐 생활을 끝내고 창덕궁에 들어왔다. 인조는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반정의 명분으로 삼았으므로 인목대비와 나이 어린 고모 정명공주를 깍듯이 대우했다.
21세였던 정명공주는 서궁에 유폐되어 있느라 하가(下嫁)하지 못한 상태였다. 인목대비는 정명공주의 혼사를 서둘렀다. 반정이 성공한 지 나흘밖에 지나지 않은 1623년 3월 16일(음력) 예조(禮曹)에서 정명공주의 부마 간택을 속히 시행하자는 건의를 올렸다. 인목대비의 마음을 헤아린 인조가 이를 즉각 허락하면서 부마 간택이 급물살을 탔다. 8월쯤 혼례를 치르기로 계획하고 부마 단자(單子)를 받기로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기한이 다 되도록 겨우 아홉 명만이 단자를 올렸다. 무엇보다 공주의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정명의 나이가 21세였으므로 부마의 나이는 적어도 20세 내외가 되어야 하는데, 그 정도 나이의 남자들은 대부분 혼인한 상태였다. 어쩔 도리 없이 정명공주의 부마 단자 접수 기간을 늦추고 나이도 낮출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예정에서 벗어난 음력 8월 11일에야 초간택을 치러 아홉 명을 선발했고, 음력 9월 12일 재간택을 거쳐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 홍영의 아들 홍주원(洪柱元, 1606∼1672)을 부마로 간택했다. 홍주원의 나이는 정명공주보다 세 살이나 아래인 18세였다. 음력 8월에 치르기로 했던 혼례는 음력 12월 11일에야 비로소 치러졌다.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에게 정명공주의 결혼은 정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행사였다. 정명공주의 결혼은 인목대비와 인조의 배려 속에 이루어졌다. 인조는 정명공주의 신혼집을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안동별궁에 마련해 주어 정명공주가 궁궐을 출입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현재 안국동 풍문여고 자리에 마련된 정명공주의 살림집은 정명공주방(貞明公主房) 또는 영안위방(永安尉房)으로 불렸다. 갑신정변 때 서광범은 우정총국에서 가까운 별궁을 방화해 거사의 신호로 삼으려 했지만 별궁의 소중함을 깨닫고 중단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632년(인조 10년) 인목대비는 49세의 나이로 인경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인조는 인목대비의 초상을 치르는 데 열중하여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폐해졌다. 인조가 초상을 치르던 중 인경궁에서 백서삼폭(帛書三幅)이 발견되었다. 비단에는 “왕을 폐위하고 세우는 일과 같았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인조는 인목대비가 자신을 폐위하고 다른 누군가를 왕으로 세우려 했던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인조의 의심은 선조의 유일한 적통 정명공주에게까지 미쳤다. 인조는 몸이 아플 때마다 특유의 의심증이 도져 결정적 증거가 없는데도 정명공주가 자신을 저주한다고 생각해 공주를 핍박했다.
1639년(인조 17) 인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다. 인조는 자신이 이번에도 저주로 인해 병에 걸렸다고 믿고 저주물(咀呪物)을 찾게 했다. 때마침 원손(元孫)이 거주할 향교동 본궁에서 저주할 때 쓰는 물건이 발견되었다. 인조는 사건의 배후로 정명공주를 지목했다. 하지만 최명길을 비롯한 대신들은 정명공주의 일이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양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반정공신에게 정명공주는 반정의 명분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저주 의혹은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지만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과 같았다.
인조와의 10년간의 밀월이 인목대비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고, 정명공주는 17년 동안 악몽을 꾸어야 했다. 악몽은 인조가 승하하고 나서야 지나갔다. 그 후에도 정명공주는 36년을 더 살았다.
정명공주는 남편 홍주원 집안의 재력에다 인조의 시혜로 수많은 부동산과 재물을 모을 수 있었다. [경국대전]에는 공주의 집이 50칸을 넘지 못하도록 정해져 있지만 영안위방은 200칸이 넘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경상 감사 박문수가 1728년(영조 4년)에 “영안위방이 경상도 내에서 절수 받은 토지가 8,076결이나 됩니다.”라고 보고한 대목도 있다. 8,076결을 지금의 평수로 환산하면 약 5천만 평에 달한다. 경상도뿐 아니라 전라남도의 하의삼도(荷衣三島)라고 불리는 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등 여러 섬에도 정명공주의 절수지가 있었는데, 하의도는 훗날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35세였던 정명공주가 강화도로 피난 가서 고려산 적석사에 있었다는 기록이 강화군 군사편찬위원회가 출간한 [신편 강화사(新編 江華史)]에 실려 있다.
정명공주가 강화도 갑곶나루로 건너가려 할 때 이미 공주의 재화를 실은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피난 온 백성들이 몰려와 서로 배를 타려고 아우성이었다. 정명공주가 아랫사람에게 “재화들을 다 내리고 백성들을 먼저 배에 태우라!”라고 명했다. 백성들은 앞다투어 배에 오르며 “과연 정명공주로다. 마음 씀씀이가 저러하니 후손들은 반드시 번창할 것이다.”라고 저마다 한마디씩 말했다고 한다.
정명공주와 한 배로 피난을 간 백성들이 축원한 대로 후손들은 저마다 역사의 한편을 장식할 정도로 번창했다. 정명공주는 7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정명공주의 장자홍만용(洪萬容)은 숙종 때 이조 판서와 예조 판서를 역임했다. 정조의 수호자 홍국영(洪國榮), 홍봉한(洪鳳漢)과 그의 딸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洪命熹)도 정명공주의 후손이다.
실록에는 숙종이 정명공주에게 먹을거리와 옷감을 내리라고 명하는 대목이 무려 열세 차례나 나온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은 자연 재해로 흉년이 들었는데도 인조반정 60년을 기념해 정명공주에게 은전을 베풀어 주기를 청하기도 했다.
정명공주는 천수를 누리고 83세에 세상을 떴다. 숙종은 정명공주가 죽어서도 예우를 다했다. 실록에도 ‘숙종이 정명공주의 죽음을 애도하고 녹봉도 3년을 기한해 그대로 주도록 했다’라는 대목이 따로 나올 정도다. 정명공주와 거의 동시대를 함께했던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정명공주의 묘지(墓誌)에 이렇게 썼다.
“공주는 부인의 존귀함에 걸맞게 겸손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후덕해 오복을 향유했다.
송시열의 묘지 글대로라면 정명공주에게 오복은 ‘존귀함, 겸손, 공손, 어짊, 후덕’이었다. 정명공주는 계축옥사,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두 번의 예송, 경신 대기근 등 역사의 굴곡을 직접 겪기도 하고 거쳐 가기도 했다.
인조가 승하한 후 36년간은 지난 47년의 고난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순탄한 나날이 이어졌다. 현종과 숙종은 정명공주에게 빚을 진 적이 없지만 최고의 예우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인목대비와 정명공주에게 빚을 가장 많이 진 인조는 17년이나 정명공주를 무고 혐의로 괴롭혔다.
광해군과 인조는 한때 정명공주를 도탑게 보듬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정치적 입장 차이 때문에, 귀가 얇은 인조는 의심증 때문에 정명공주를 죽음의 고통까지 몰고 갔다. 정명공주는 일관성 없는 두 남자로 말미암아 내내 속을 감추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화정]이다. ‘화정(華政)’에서 화(華)는 꽃 혹은 빛을 의미하고, 정(政)은 다스림을 의미한다. 따라서 화정은 ‘화려한 정치’ 혹은 ‘빛나는 다스림’으로 해석할 수 있다. ‘화정’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정명공주의 글이 남아 있다.
내가 원하건대 너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었을 때 마치 부모의 이름을 들었을 때처럼 귀로만 듣고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입에 올리고 정치와 법령을 망령되이 시비하는 것을 나는 가장 싫어한다. 내 자손들이 차라리 죽을지언정 경박하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말이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1682년(숙종 8년) 정명공주가 80세가 되던 해에 막내아들 홍만회에게 써 준 글이다. 홍만회는 글씨를 탁본하여 자위수택(慈闈手澤,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작품)이라고 표제를 붙였다. 정명공주의 당부를 잘 지켜서 그랬는지 후손들은 조선 최고 명문가의 명성을 이어 갔다.
네이버 포스트 <화정>의 주인공 정명공주의 삶을 이해하는 7가지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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