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마르코 10,17-30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시느라고 많이 쓰셨습니다.
늘 하는 얘기지만 거룩한 땅은 본인이 오고 싶어서 오는 건 아니죠.
겉으로 보면 본인이 신청하고 날짜 잡아 거의 주도권이 본인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큰 착각이 되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떠나기 전날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거나, 아침에도 갑자기 몸이 아프거나 그래서 못 오는 수가 있습니다.
아직 그분은 여기 올 때가 안 됐다 그 뜻이겠죠.
그래서 하느님이 불러주셔야만 오는 곳이라는, 다시 말해 부르심에 대한 어떤 깊은 신뢰가 없으면 그냥 소풍 왔다 가는 겁니다. 야외 미사 하다가 가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천주교 신자가 된 것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겠죠.
부모님이 신자이기 때문에 어릴 때 아무것도 모르고 신자가 된 사람도 있고, 시집오는데 시댁이 천주교라 신자가 된 사람도 있고, 친구 따라 성당 온 사람도 있죠.
이렇게 다 동기는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이 세상 그 수많은 사람 가운데 주님이 나를 천주교에 신자로,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 내려온 자모이신 성교회의 신자로 나를 불러주셨다고 하는 신비감을 절절히 깨닫는다면, 우리는 절대 쉽게 냉담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냉담의 유혹이 오더라도 주님이 나를 오늘 이 자리에 이끌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 끝에 나를 이 자리에 불러주셨는데, 내 이런 문제 때문에, 보기 싫은 사람 때문에, 마음에 안 드는 신부님 때문에, 수녀가 한 말에 상처받아서, 대모님 때문에, 돈 떼먹고 안 주는 대녀 때문에 절대 냉담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해야죠.
오늘 여러분들은 이곳에서 은총을 받고 돌아가려면, 첫 번째 단추는 ‘주님이 나를 오늘 선택해서 이 자리에 불러주셨다’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그냥 왔다 가는 걸 겁니다.
그래서 저기 주차장에서 계단을 내려오면 빨간 벽돌이 있죠. 레드카펫입니다.
그 의미로 정말 한 거예요. 우리 무슨 영화제 하면 레드카펫 쫙 깔잖아요.
또 오른쪽에 뭐라고 적혀있는지 기억하세요?
알폰소 성인의 글인데, 세 줄. 아시는 분 크게 말해보세요.
내가 배티 있을 때도 똑같은 것 세워놨었어요.
첫 번째 줄 ‘온전한 마음으로 들어오라.’
두 번째 줄 ‘홀로 머물러라.’
그래서 보면 의자들도 얼굴을 바라보게 두지 않았죠.
혼자 머물면서 둘이 앉아도 앞을 바라보며 대화는 자연을 통해서 교감해라.
지금 여러분은 보조 의자에 많이 앉아계시지만, 성수 뿌리고 축성된 의자는 나무 의자예요.
12개의 십이사도 의자죠.
맨 앞에 베드로부터 안드레아까지 12개의 나무 의자가 있죠.
그 나무 의자 밑의 한쪽은 돌이 받쳐져 있고 한쪽은 나무가 받쳐져 있어요.
바위는 십이사도의 굳은 믿음을 나타내고 나무는 유연성을 의미하며 열린 교회를 나타내요.
이렇게 여기 있는 이 12개의 나무는 하느님을 바라보라고 만들어 놓은 의자예요.
또 느티나무 밑에 보면 돌의자가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연못을 바라보라는 의자.
이렇게 의자가 놓인 위치마다 다 메시지가 있죠.
그래서 ‘온전한 마음으로 들어와라.’
‘온전한 마음’이라는 것은 분심 없이 주님이 나를 이곳에 불러주셨다. 감히 이곳에 발을 디딜 자격도 없는 나를 오늘 주님이 불러주셨다는 것을 신뢰하는 마음이죠.
그리고 이곳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눈치채려면 시끄러우면 안 돼요.
이 안에서 다른 사람 뒷담화하면 그것은 마귀 장난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마음으로 들어와서 홀로 머물다 보면 축복을 받고, 나갈 때는?
세 번째 글 ‘다른 사람이 되어 나가라.’ Exite Alii(엑시테 알리)
오늘 여러분은 여기에 찾아온 게 아니라 여기까지 불러주신 거예요.
그러면 완전히 생각이 바뀌죠. 고생했던 것이 축복이었구나.
주님이 나를 이렇게 어려운 길을 통해서 불러줘서 여기까지 오게 하셨구나.
오늘 참 유명한 얘기가 나오죠.
‘부자가 천국 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게 더 쉽다.’
내가 피정과 강론에 여러 번 얘기했어요.
제 묵상 끝에 분명히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게 하는 방법이 있으니 예수님 입에서 이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고, 그러면 낙타를 바늘귀로 빠져나가게 하는 방법만 찾으면 우리들이 천국 가는 그 방향 길이 열릴 것이다.
그 방법이 무엇이었었죠?
첫 번째는 낙타를 죽여야 해요.
살아있는 낙타를 집어넣을 재간이 없죠.
‘안 됐지만 낙타야 나 천국 가기 위해서 네가 죽어야 해.’
여러분 마음 안에 펄쩍펄쩍 뛰는 낙타들이 있어요.
그 들고 날뛰는 낙타는 ‘상처’라고 하는 이름을 갖고 있는 낙타도 있고, ‘욕심’이라고 하는 이름을 갖고 있는 낙타도 있어요.
일단 내 안에서 들고 날뛰는 그놈을 죽여야 해요.
죽이고 난 다음에 두 번째는 뭐냐? 불에 태워야 하죠.
불에 한참 태우고 나면 살과 털이랑 가죽은 다 날아가고 뭐만 남을까요? 뼈.
뼈도 약한 뼈는 다 없어지고 뼈만 남아요.
그다음에 세 번째는 뭐냐? 그 뼈를 절구에 넣고 빻아야죠.
그래서 뭘 만들어요? 가루를 만들어야 해요.
아주 곱디고운 가루로 만들어야 해요.
그다음에 어떻게 되느냐?
바늘귀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깔때기를 만들어야 해요.
그리고 그 깔때기 끝을 바늘귀에다 대고 곱디고운 낙타의 뼛가루를 위에서 솔솔 흘러내리면, 바늘귀로 뼈가 빠져나가죠.
이렇게 해서 낙타를 집어넣는 거예요.
첫 번째 죽인다, 두 번째는 태운다, 세 번째는 빻는다, 그리고 네 번째는 깔때기에 넣는다.
깔때기는 교회를 나타내요.
교회 밖을 벗어나서는 우리 천국을 못 가요.
교회라고 하는 그 울타리 안에서 미끄럼 타고 쭉 구멍으로 빠져나가게 돼 있어.
구멍을 빠져나갈 때까지만 힘들죠.
내가 나 자신을 죽이는 게 얼마나 힘들어요.
또 나를 태우는 게 얼마나 뜨겁고 힘들어요.
또 누가 절구를 가지고 나를 찧는다고 생각해 봐. 정말 힘들죠.
하지만 그 구멍을 통해서 빠져나가면 그 구멍 밖에는 천국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지금 얘기한 것이 어찌 보면 우스갯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 내용을 깊이 묵상하면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죽인 다음에 태우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저 느티나무도 살기 위해서 어떡한다 그랬어요?
속을 계속 비워서 구멍을 만든다.
강풍이 불어도 구멍을 통해 바람이 돌아서 빠져나가면서 직접적으로 나무를 치지 않아요.
뿌리에 영향을 안 줘. 그리고 양분을 빨아올리더라도 힘이 버겁지 않아요.
저게 지혜란 말이에요. 비우는 것, 태우는 것, 죽이는 작업.
개신교에서는 이런 것을 무소유의 삶이라고 하죠.
그러나 우리 천주교 영성에서는 ‘텅 빈 충만’이라고 불러요.
텅 비어 있는데 가득 차 있어, 기쁨으로, 신덕, 망덕, 애덕으로 가득 차 있어.
얼마나 기쁠까?
내년부터는 당분간 제가 피정을 안 나갑니다.
지난번 구파발 성당에서 공개적으로 앞으로 남은 피정은 20일 우이성당, 그리고 11월 인천교구 부천 고강동 성당에서 하는 피정을 끝으로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모르지만, 이젠 나 자신도 능동의 삶에서 수동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죠.
예수님은 3년 동안 능동의 삶을 사셨죠.
수많은 사람 만나고 치유하고 대화하고 고쳐주고 그러다가 딱 잡혔어.
잡혀서 죽기까지 16시간 동안은 예수님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때리면 맞아야 하고, 침 뱉으면 침 받아야 하고, 채찍질하면 그 채찍질 다 맞아야 하고, 몸에 못 박으면 가만히 있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수동의 시간.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3년 동안 능동의 시간보다도 죽기까지 그 열몇 시간 동안에 더 하느님이랑 가까워졌다는 말이죠.
사제들도 한평생 활동하다가 은퇴 시기가 있죠.
또 일반 사람들도 직장 다니다가 은퇴 시기가 있어요.
하루도 보면 능동의 시간이 있고 수동의 시간이 있어요.
밤에 잠이 들면서 아니면 이제 모든 일 끝내고 난 다음 기도 시간.
그냥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안 하는 수동의 모습이지만, 하루 종일 일하고 봉사 다니고 한 것보다 훨씬 더 하느님과 가깝게 할 수 있는 수동의 시간이 있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누구나 수동의 시간을 자기 나름대로 가져야 해요.
자기만의 시간, 자기만이 하느님 만날 수 있는 어떤 골방이 있어야 한다 그 얘기죠.
그래서 내년에는 저도 이제 그런 수동의 시간을 좀 깊이 가져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42년 동안을 피정 지도를 했어요.
그래서 이제는 목한테도 미안해, 하도 떠들어서.
그리고 몇 년 전 코로나 앓고 난 다음에 후유증으로 성대를 많이 버렸어요.
노래도 예전처럼 나오지 않고, 그래서 이제 얘들 좀 쉬게 해야겠다.
아무튼 이런 모든 것이 사실은 죽이고 태우는 과정이죠.
가루를 만드는 과정이에요.
텅 빈 충만의 상태를 만드는 과정이에요.
사실 부자도 천국에 가는 부자가 있고 가난하게 살아도 지옥에 가는 가난뱅이가 있겠죠.
물질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느냐 적게 갖고 있느냐, 그런 양의 문제가 아니에요.
어떤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 부자는 정말 착한 부자들 많아요, 다른 사람 도와주고.
그런데 어떤 가난한 사람은 한평생을 세상 원망만 하다 끝나요.
부모를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저주만 하다가 가요.
가난뱅이라고 다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 부자라고 다 지옥 가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든 간에 주님이 얘기하시는 것은 물질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을 얘기하고 계시죠
태워야 합니다.
성령의 불이 내 안에 들어와 욕심을 태우고, 교만을 태우고, 허영심을 태우고, 사치스러움을 태우고.
이런 작업으로부터 천국의 길은 시작됩니다.
그래서 가루가 돼야 한다고 그랬죠.
태우고 가루를 만드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수 조건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얘기지만 제자들을 알아들어요?
놀라죠. ‘그러면 세상에 천국 갈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이야?’
그 아둔한 열두 제자는 무슨 말귀인지 못 알아들어요.
솔직히 열두 제자가 예수님 3년 동안 쫓아다니면서 알아들은 말은 몇 개 안 돼요.
그러니까 맨날 궁금하고.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제자들이 못 알아들은 것을 신부님들의 해설로 다 알아듣고 있잖아요.
얼마나 여러분들은 열두 제자보다 특권을 누리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알아듣기만 하면 뭐해? 사는 것이 똑같은데.
오늘 2 독서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쌍날칼 같아 관절과 골수를 쪼갠다고 그랬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피정하고 난 다음에 오늘 신부님 말씀 좋았어, 그러면 그다음 날 실행에 옮겨야 해요.
그러면 그 전날 피정에서 배운 것이 내 속에 꽉 들어차요. 돌에 새겨져요.
하느님의 말씀이 관절과 골수를 쪼개서 그 숨은 생각을 드러낸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좋은 소리 듣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냥 귓구멍만 고급이 되는 거예요.
말씀의 불감증이 되는 거예요.
가분수처럼 머리만 커지고 또 들은 것이 겸손의 재료가 되지 않고 교만의 재료가 돼.
그래서 누구를 항상 판단해요, 뭐 들은 게 있다고.
다 태워야죠.
벌써 예전에 돌아가셨지만 내가 그전에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제일 존경하는 분이 몇 분이 있다.
첫 번째는 우리 부친이에요. 신앙이고 뭐고 나는 우리 아버지의 10분의 1도 못 쫓아가요.
학문에 대한 열의,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난 어릴 때부터 우리 아버지가 롤모델이었기에 신학교 들어가서 예수님을 뵈어도 ‘우리 아버지가 이러셨는데’.
그래서 예수님을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두 번째로 존경하는 분은 소록도에 있었던 스테파노 아저씨.
세 번째로 존경하는 분이 명동성당 앞에 계셨던 배 베드로 할아버지.
아주 심한 뇌성마비였는데, 명동성당 앞에 통 하나 갖다 놓으면 사람들이 미사 후 돈을 줘요.
그러면 그 양반은 쪽방 하룻밤 자는 비용 2천 원, 먹는 것 2천 원을 빼고 전부 심장병 어린이 재단으로 보내요.
쪽방이 그리고 자는 비용 2천 원 그리고 먹는 거 2천 원 빼고는 전부 다 어디로 보내느냐 심장병 어린이 재단으로 다 보내요.
신부님들도 지나가다 그분한테 기도를 부탁했죠.
김수환 추기경님도 부탁하셨죠.
나중에는 명동성당에서 뒤쪽 조그마한 공간에 집을 조그맣게 지어주어 거기서 계셨어.
그러다가 꽃동네 오 신부님이 모시고 간 거야.
그래서 최귀동 할아버지와 둘이 꽃동네 행사하면 맨 앞에 계셨죠.
이렇게 우리보다 훨씬 가난하고 힘들게 살면서도 남을 열심히 도와주는 사람이 참 많아요.
오늘 복음 속에 나오는 청년은 부자죠.
십계명도 다 지키고 그래서 예수님 제자 되고 싶어 따라나섰는데,
예수님이 약점을 팍 찌른 거야.
‘네가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준 다음에 나 따라라’
그랬더니 제자는 쓸쓸히 돌아섰죠.
돈을 포기할 수가 없는 거예요.
성경에 유일하게 돈 때문에 예수님 제자가 못 된 제1번이 오늘 나오는 이 부자 청년이에요.
복음 속의 부자 청년은 온갖 계명을 충실히 다 지켜왔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진 재산까지 가난한 이들에게 다 나눠주라고 하셨죠.
아까 얘기한 대로 무소유의 삶, 텅 빈 충만의 삶, 비우고 난 다음에 나를 따라라.
여러분들, 루카 복음 19장 1절에서 10절에 유명한 자캐오 이야기가 나오죠.
자캐오는 세리 중에서도 제일 대빵, 세리 장이었었죠.
돈이 너무너무 많았어.
온몸을 비단으로 휘감고 매일 파티를 벌였어요.
그렇지만 그 많은 사람은 돈 때문에 내 옆에 있는 거예요.
그들이 떠나고 난 다음 가슴속은 구멍이 뻥 뚫어져서 찬바람만 휙휙 들어와.
너무 외롭고 힘들어. 길거리에 나가면 다 손가락질하잖아.
‘저 나쁜 놈, 매국노, 더러운 놈, 우리 피 빨아먹는 거머리 같은 놈.’
돈이 많으면 뭐 해요, 친구도 없고 너무 슬프게 살아.
그러던 어느 날 바람을 타고 자캐오의 귀에까지 어떤 얘기가 들려요?
자기네 동네에 죄인들의 친구라고 하는 선생님이 하나 온다는 거야.
그래서 자캐오는 비단옷을 입고 길거리로 나갔더니. 사람들이 인산인해.
그 한가운데 그분이 계시는데 뚫고 들어갈 재간이 없었죠.
또 자캐오는 덩치도 작았어요.
뚫고 들어가려니 팔꿈치로 치고 뒷발로 차고, 가다가 밟혀 죽겠는 거예요.
그래서 자캐오는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이 지나가실 만한 길을 앞서가 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요.
무화과나무 올라갈 때 비단옷을 입고 절대 못 올라가요. 왜? 미끄러워서.
비단옷을 훌훌 벗었죠.
그때부터 내려놓는 작업이 시작되었죠.
자기 몸을 감쌌던 부자의 상징을 훌훌 벗고, 그야말로 거의 속옷 차림으로 나무를 타고 올라가 가지 끝에까지 매달려 있어요.
두 다리를 꽉 나무에 끼고, 양팔도 꽉 끼고.
예수님이 사람들한테 밀려서 지나오시다가 봤겠죠?
예수님이 뭐라 그러세요?
자캐오는 예수님을 본 적이 없어요, 예수님도 자캐오를 처음 보는 거야.
그런데 ‘내려와’ 이것이 아니었죠.
이름을 불러줘요.
‘세상에, 저분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자캐오야 내려와.’ 그랬어요.
‘여보게 내려오시게’가 아니에요.
그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에 수만 볼트 전기에 감전된 듯, 짜르르.
‘세상에 저 어른이 내 이름을 알아!’
그리고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겠다 그러시죠.
그래서 자캐오는 내려와 예수님을 집에다 모십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리죠.
‘아유, 어떤 놈 집인지도 모르고 저 양반이 들어갔네, 매국노 집인데.’
예수님은 들어가시자마자 바로 이 집에 오늘 구원이 있으리라는 선포하지 않아요.
가만히 기다려요. 뭘? 자캐오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자캐오는 예수님이 원하던 말을 해주죠.
‘주님, 제가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동안 살면서 남을 속여 먹은 일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아주겠습니다.’
거의 자기 재산 다 포기하는 거죠.
한마디로 청빈 서약, 포기 선언이었어요.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오늘 이 집은 구원을 받았다.’
‘자캐오 네가 구원을 받았다’라는 게 아니라 ‘이 집 전체가 구원받았다.’
아무리 험악하고 살벌한 집안이라 해도 이 자캐오 같은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그 집안에 하나만 있어도, 하느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보고 그 집안 전체를 구원해 주신다는 겁니다.
식구들이 많다 보면 또 다른 식구들이 들어와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죠.
겉으로 보면 4대째 구교 집안인데 다 냉담자예요.
옛날에는 사제도 나오고 수녀도 나온 집안인데 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집안도 있어요.
그중에 한 사람이 정말 자캐오처럼 하느님 앞에 모든 걸 포기하겠다고 회개하면, 예수님은 ‘너만 구원시켜 주겠다’가 아니라 ‘오늘 너를 통해서 이 집에 구원이 있으리라.’
우리는 나누고 또 나누어서 가루가 돼야만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 바늘귀를 빠져나갈 때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부서질 때 아프고 불에 탈 때 뜨겁고 죽을 때 너무너무 힘들어도, 우리는 능히 참을 수 있다는 얘기죠.
이제 그러면 아주 애매한 우리 문제를 좀 짚고 넘어갑시다.
그러면 도대체 부자의 기준은 누구냐?
빌 게이츠 정도?
서울 강남에 아파트 한 채 있으면 당연히 부자겠죠.
그런데 여러분이 생각할 때 그 부자의 기준은 뭐예요?
평상시에 내가 쓰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을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을 정도?
오늘은 차 한 대사고, 내일은 비행기, 모래는 호화여객선 하나 사볼까?
그 정도야 부자인가요?
굉장히 주관적인 얘기죠.
누가 과연 부자일까?
우리는 이 질문에 누구나 본인은 아니라고 대답해요.
누구도 자신이 부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어요.
재벌 그룹의 회장도 자신은 부자가 아니래요.
옛날에 정주영 씨 살아계실 때 차를 같이 마신 적이 있었어요.
그 양반 살던 집은 정말 수십 년 된 집인데, 타일이 깨져도 수리를 안 해요.
워낙 검소하게, 대개 재벌 창업주들은 밑바닥부터 올라와서 그렇게 살아요.
3세대쯤 되는 애들이나 흥청망청 살죠.
그러면 누가 부자일까?
내가 한번 기준을 잡아봤어요.
예를 들어 내가 중고차 몰고 다닐 때 중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 사람보다 부자죠.
또 내가 중고 오토바이를 몰 때 녹슨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 사람보다는 부자죠.
내가 녹슨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 그것마저 없어 걸어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보다 부자죠.
내가 걸어 다니고 있을 때 선천적으로든지 사고든지 휠체어를 타서 턱 하나도 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내가 부자예요.
두 발로 걸을 때 한평생 목발을 짚고 다니는 사람에 비하면 나는 엄청나게 큰 부자예요.
우리보다 자꾸 높은 걸 바라다보면 손에 물처럼 다 빠져나가죠.
짠물은 먹으면 먹을수록 갈증이 나요.
그래서 결론은, 우리는 모두 다 부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정말 힘들게 사는 사람 너무너무 많아요.
예수님이 어부를 부른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어부들은 자기 것이 없어요.
농부들은 자기 땅이 있지만 갈릴리 호수는 자기 것이 아니잖아요.
낡아 빠진 그물과 삐그덕거리는 배와 건강한 자기 몸뚱어리가 전 재산이야.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하느님 따르는 데 힘들어요.
아마 농부들을 부르며 ‘나 따라오라’ 하면 ‘아이고 저를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주님, 내가 지금 한 100마지기 농사짓고 있는데,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잘 안 팔려요. 이거 팔고 난 다음 쫓아갈 테니까, 휴대폰 번호 하나 좀 찍어주시면 연락하겠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포기하는데 핑계가 많아.
그런데 어부들은 ‘따라와’ 하니 두 형제가 따라나섰죠.
그리고 따라갈 때 포기하는 내용이 또 달랐죠.
처음에 베드로와 그 동생 안드레아를 부르시죠.
그냥 그물만 버리고 따라나섰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두 번째 형제는 야고보와 요한. 그 두 사람은 버리는 게 조금 달라요.
삯꾼을 버리고, 아버지 제베대오 버리고 따라요.
사람마다 포기해야 하는 내용이 다르다 이거예요.
천편일률적인 게 아니죠.
아무튼 어부들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포기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이 가진 자일수록 분명 포기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려요.
유엔에서 나온 걸 보니까 지금 말하는 이 순간에도 1초에 5천 명씩이 굶어 죽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굶어 죽는 게 아니죠.
내놓지 않기 때문에 굶어 죽어요.
가진 자가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웃을 향하는 기도는 반드시 물질적인 자선 행위가 따라야만 됩니다.
내어줄 때 자세는 뭐라고요?
‘하느님 것을 하느님에게 되돌려 드린다’라는 마음이 들 때는 아까운 마음이 안 들죠.
‘애초 내 것은 없었어. 주님이 건강한 몸 주시고 좋은 머리 주셔서 이렇게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 돈 많이 벌었어. 오늘 저녁에도 내 심장 멈추게 하면 나는 가야 해.’
모든 것이 주님 것으로 생각하고 하느님께 되돌려 드린다는 것이 바로 봉헌의 정의에요.
그런 마음을 갖고 있을 때는 마음속에서는 성령의 소리가 들려요.
‘저 사람 도와줘.’ 그런데 또 한쪽으로는 마귀가 속삭여요.
‘아이고 그거 버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걸 왜 도와줘?’
어떤 교부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굉장히 가슴 아프기도 하면서 무서운 말씀이죠.
‘남이 필요로 하는 것을 네가 필요 이상 갖고 있다면, 너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 것을 훔친 것이다.’
내가 볼펜이 두 개인데, 저 사람은 하나도 없고 난 하나만 있으면 돼.
그러면 너는 바로 하나도 없는 그 사람 것을 훔친 것이다.
굉장히 진보적인 신학이죠.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니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가진 것을 적극적으로 쓰라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아멘
그래야 천국의 꿈을 우리는 이룰 수 있습니다.
아멘
부자도 태워서 가루가 되면 천국에 갈 수 있죠.
가난한 사람도 교만해서 태워지기를 거부한다면 지옥에 갈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가난하고 부자는 흑백 논리가 아니다.
예수님이 얘기하시는 것은 하느님께 받은 선물을 얼마나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쓰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보화를 쌓아봐야 아무 소용 없어요.
지난주에 경남 방장하던 자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한평생 꽃집 하며 매괴 장미도 자기네 옥상에서 화분에다 10년 이상 길렀다 보내주었죠.
연못에 있는 수련도 그 자매가 보낸 거죠.
준비된 죽음이 아니었어도 워낙 이쁘고 바른 사람이라 내려가서 미사 드려 주고 왔죠.
갑작스러운 죽음을 볼 때마다 ‘오늘은 너지만 내일은 내가 될 수도 있다’라고 하는 겸손한 마음은 우리를 비우게 만들죠.
그런데 그 약발도 한 달이 안 가.
그때는 슬프고 그래서 ‘좀 착하게 살아야지, 맞아 내 몫은 내 것도 아니야.’ 하죠.
그런데 한 달 지나 봐. 그다음부터는 기억도 안 나요.
그래서 우리는 자꾸 말씀을 거듭해서 들어야 하는 거죠.
나는 나 자신이 게을러지려고 할 때마다 내 강론을 굉장히 열심히 들어요.
들으면서 내가 은혜를 받거든요. 내가 회개하거든요.
오늘 우리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십계명은 다 지켰지만 가진 거 내놓으라는 말 한마디에 예수님과 등을 졌던 그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않도록, 늘 텅 빈 충만의 삶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
마태오 28,16-20
선교의 기본이자 시작: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 이름 말하기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시며 선교 사명을 주십니다.
그런 이들에게 당신께서 함께하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선교는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이자 명령입니다. 선교하지 않으면 사랑하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선교는 곧 사랑 실천입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강이 불어난 곳의 다리를 집에서 창문으로 보다가 다리가 끊기게 될 것 같아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재빨리 나가 차량을 통제한 적이 있습니다.
한 차량이 반대쪽에서 오자 손을 엑스자로 그리며 차를 막아섰고 그 차가 멈추었을 때 바로 그 앞에서 다리가 무너졌습니다.
이 사람이 집에서 TV만 보고 있었다면 과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곧 하느님 자녀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요? 예언자직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예언자직의 끝은 무엇일까요? 죽음입니다.
예수님도 예언자직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떤 가수가 공연하는데 사람들이 야유하며 다 떠나버린다면 마음이 어떨까요?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워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더는 가수가 아닐 것입니다.
사제가 강론이 두려워 미사를 꺼린다면 주님께 사제로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선교의 가장 큰 적은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미국 네브래스카주 한 시골 목장에 사는 12살 소년 ‘로건’이 휴스턴에 있는 크리스천 라디오 방송국에 전화해서 진행자인 마이크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소년은 울먹였습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아끼던 송아지가 몸이 약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전화한 것은 그 슬픔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왜 자신이 아끼던 송아지를 데려가셨는지 물었을 때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로건, 내 아들도 나에게 소중했단다.
하지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어야 했어.”
로건은 누구든 자신이 아끼는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항상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용기가 없는 이유는 하느님 체험이 없어서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은 한 번쯤 나가게 만드는 마중물에 불과합니다.
지속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먼저 한 번이라도 자신의 체험을 전하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개신교에서 전교로 유명한 분 중의 하나가 ‘고구마 전도왕 김기동 목사’입니다.
그가 목사가 되기 전에 아내와 딸이 주일에 교회 가지 못하게 하고 스키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사고가 크게 났고 불교 신자였지만,
하느님께 기도하여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목사님께 전도 연습으로 끌려 나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기도 중에 고구마에 대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사람들을 고구마로 보는 것입니다.
전도란 그저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찔러 보는 것이라는 것.
그는 “예수 믿으십니까?”, “그래도 믿으셔야 합니다.”, “믿으면 참 좋아요.”, “기도하겠습니다.”
라는 네 마디를 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 믿으십니까?”입니다.
“교회 다니십니까?”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와야 그다음이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8)라고 하십니다.
저도 한 선교왕을 아는데, 그분은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마다 “찬미 예수님!”을 합니다.
그런데도 1년에 30명씩 성당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예수님 이름에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선교하지 못해도 마음이 뿌듯하다고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으니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어떤 집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합니다.
먹을 것을 좀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욕을 먹고 매를 맞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찬미 예수님!”은 강론 전이나 어머니와 통화할 때 정도만 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모든 사람에게 인사할 때 예수님의 이름이 나오게 할 결심을 해 봅니다.
신자들과 길거리 선교를 할 생각도 있습니다. 그저 “찬미 예수님!”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 입에서 누구 앞에서건 예수님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하는 것, 이것이 선교의 시작일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28,16-20: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라.
오늘은 전교주일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선포이다. 복음 선포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음화되어 하느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변화를 이룩하기로 하는 날이다. 더욱이 우리는 분단의 현실을 갖고 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온 민족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을 기원하며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겠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선교 2항). 선교야말로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확실한 이유임을 분명하게 천명한 선언이다. ‘본성상 선교해야 하는 교회’라는 말 안에는, 교회는 “믿지 않는 만백성의 빛이 되고 구원이 되기 위해 파견된 자”임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교회는 예수님과 열두 사도의 복음 선교 활동에서 생겨났고, 그 활동의 당연한 결과요, 그 활동이 원한 것이며, 그 활동에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 활동에서 볼 수 있는 결과가 교회인 것”이다(현대의 복음 선교 15항).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과 같은 사명 완수를 위해 예수께로부터 파견되었으며, 「떠나셨지만 머물러 계신」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에 대한 명백한 표징으로 계속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 세상에서 계속 수행하기 위해 불린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파견의 연장(延長)이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신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는 성부의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의해 파견되며, 궁극적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신 성부의 「샘솟는 분출적 사랑」을 파견의 최종 근거로서 인식하며, 마르지 않고 끊이지 않는 샘물인 이 「원천적 사랑」에서 끊이지 않고 활력과 열성을 길어내는 것이다.
“선(善)은 자기 확산성(自己擴散性)을 지닌다.”(Bonum est diffusivum sui). “샘 같은(원천적)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자신(사랑)을 확산시켜 나가기를 바랄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왜 성부의 “원천적(샘 같은) 사랑”이 선교의 최종 근거가 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지 않은가? 조금 더 들어보자. “선은 자기를 확산시킨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선하면 선할수록 자신을 더욱 확산시켜 나가야 마땅하다. 따라서 하느님은 선의 최상의 결과를 위해서 자신을 최대한으로 확산시켜야 했다. 그런데 하느님이 할 수 있는 선의 최상의 결과는 무엇일까? 인류의 구원사업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최대한으로 쏟아부으며 최상의 결과를 기대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느님의 자기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기확산인 선교는 <선=사랑=하느님>에 너무 잘 어울리고, “기원을 갖지 않으시는 기원”이신 성부의 사랑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귀속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선교의 최종 근거는 결국 성부의 자기 확산적인 “분출적 사랑”에 귀착된다.
하느님은 만선의 근원이요 사랑 자체이시다. 지선(至善)하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본성상 선과 사랑을 확산시키지 않을 수 없는 분이시다. 선과 사랑은 합일시키고 합성시키는 힘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자신을 확산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최고선이요 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자기확산의 일환으로 하신 최상의 사업이 바로 만민 구원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만민 구원은 하느님의 샘 같은 사랑에서 나오고, 하느님은 당신 사업의 성취를 위하여 최고의 방법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시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파견이 이루어지고, 이로써 하느님은 선교하는 하느님이 되신다. 그러므로 선교라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확산시키는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우리와 같이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한 형제요, 자매로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갈릴래아에 나타나셔서 만민에게 세례를 베풀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침으로써 만민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까지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구약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1,23)이시다. 그러기에 교회는 모든 민족을 주님의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 자신의 본분과 책임, 의무를 다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기는 그것이 더 필요한 때이다. 특히 오늘 우리의 삶과 신앙의 현주소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복음화의 소명을 새롭게 하도록 하자. 이러한 모든 은총을 주님께 청하여야 하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미국의 심리학자 마트 셀리그만은 삶에는 세 가지 여정이 있다고 말합니다. 즉, 즐거운 삶, 적극적인 삶, 의미 있는 삶이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 최고 상위에 있는 삶은 당연히 의미 있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타인의 삶에도 기여할 수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냥 열심히 살면 될까요?
열심히 살면 즐거운 삶, 적극적인 삶까지는 접근 가능하지만, 열심히만 산다고 반드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삶의 방향성에 대한 적극적인 각성, 나의 노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자주 자문해야 의미 있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그냥 단순히 열심히 하면 의미 있는 신앙생활이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열심히 하면 즐거울 수는 있습니다. 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금세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항상 하시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는 열심히 했어. 최선을 다했어.”
열심히 하더라도 삶의 방향성이 명확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이 사라진 ‘열심’은 금세 지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반대로 주님께 맞춰진 ‘열심’은 의미를 발견해서 그 안에 오래 머물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기쁨과 적극성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뜻에 맞춰서 열심히 생활했던 제자들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그들의 열심과 적극성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뿔뿔이 흩어졌고, 다락방에서 벌벌 떨어 숨어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의미를 찾아 나갑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도 나오듯이 의심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족합니다. 하지만 이제 의미를 찾아 나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추고, 예수님의 말씀인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를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깨닫고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고 행동하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단순히 열심과 적극성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인간은 항상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세네카).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선교란 이념이나 세력의 확장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은
음모론이나 가짜뉴스 혹은 사이비 종교들처럼
하나의 토템이나 이데올로기가 되고
또 다른 우상이 됩니다.
선교는 교우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각 구성원들이 사랑으로 일치된 삶을
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내 안에 의심이 들면 선교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완전히 매료가 되고
예수님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해야
다른 사람도 안내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확신과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선교란 제자들이 또 다른 제자들을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안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변화된 제제들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체험을 나누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사제도 그리스도의 투영체가 되어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게 선교의 본질이고 핵심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복음
제1독서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산으로 밀려들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2,1-5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4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5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10,9-18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말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