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비로 산다는 것 / 명성황후 민씨
- 어릴 적부터 명석…1866년 왕비 책봉 개화·개방 정책 적극적으로 추진
- 쇄국주의 흥선대원군과 갈등 심화
- 농민군 진압 청일전쟁서 日 승리하자 견제 위해 러시아와 관계 강화 나서
- 1895년 경복궁서 일본군에 살해 당해
조선의 왕비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삶을 살다간 인물은 누구일까?
여러 왕비 중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년) 민씨를 지목하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정확히 100주년이 되는 1995년에는 명성황후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다양하게 진행됐다.
흥선대원군과 사사건건 맞선 센 며느리, 근대의 흐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권력가의 이미지에서 탈피해
근대 격동기에 다양한 외교적 노력으로 조선을 구하고자 한 왕비의 모습이 강하게 부각됐다.
명성황후 민씨는 여흥 민씨 민치록의 딸로, 1851년 경기 여주시 근동면에서 태어났다.
생가는 원래 인현왕후(숙종 왕비)의 부친인 민유중의 묘막(墓幕)으로 설치된 곳으로,
민유중의 후손 민치록이 이곳에 살면서 무덤을 관리했다.
53세에 낳은 딸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민치록이 직접 글을 가르쳤다.
명성황후는 어릴 때부터 기억력이 비상하고 역사와 정치에 해박했다고 한다.
1858년 8세 때 부친이 사망하자 명성황후는 한양 안국동의 감고당(感古堂)으로 갔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친정으로, 대대로 여흥 민씨 가문의 인물들이 살았는데 이런 연고로 이곳에 가게 된 것이다.
1866년 명성황후의 운명을 바꾸는 간택령이 내려졌다.
3월6일 삼간택에 선발된 왕비는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에서 왕비 수업을 받고 고종의 왕비가 됐다.
하지만 자식을 두지 못해 스트레스가 많았다.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도 갈등과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고 1874년 순종을 출산하면서 명성황후의 위상은 올라갔다.
명성황후는 친정 인물들을 요직에 등용하면서 고종보다도 큰 권력을 행사했다.
명성황후와 민씨 외척은 흥선대원군 시대의 대외 폐쇄보다는 개화와 개방을 위해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보수 세력의 반발을 가져왔고,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는 당시 충북 충주 장호원으로 피난했다.
다시 권력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선포하면서 며느리의 존재를 아예 없애버리고자 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통제에 불안을 느낀 청나라에서 흥선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해 가면서 명성황후는 8월 한양에 입성할 수 있었다.
명성황후가 장호원에 피난을 가 있던 시기에 그의 한양 입성을 정확하게 맞춘 무당 진령군은 이후 최측근이 된다.
1884년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 때도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경우궁에 감금되는 곤욕을 치렀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 의한 경제적 침투는 더욱 심해졌고, 1894년 농민군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했다.
농민군 반란 진압을 명분으로 청나라와 일본 군대가 조선에 들어와 충돌한 전쟁이 청일전쟁이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며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은 압도적으로 커졌다.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 러시아임을 인식하고 친일 세력을 축출한 후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명성황후의 친러 외교 행보에 일본은 이노우에 가오루의 주도로 왕비 살해를 계획했다.
1895년 10월7일 고종과 명성황후가 거처한 경복궁에 집결한 일본군은 그날 밤과 새벽에 왕비가 거처한
곤녕합을 습격해 왕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을미사변 이후 왕비의 국장과 무덤 조성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1895년 12월 현재의 동구릉에 소재한 현종의 숭릉(崇陵) 오른쪽에 무덤을 조성하고 숙릉(肅陵)이라 했다.
그러나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단행되면서 왕비의 장례식은 연기됐다.
1897년부터 명성황후의 장례식이 다시 추진됐고 장지는 청량리, 무덤 이름은 홍릉(洪陵)으로 정해졌다.
홍릉에는 명성황후가 평소에 쓰던 서책과 거울, 자기, 옷 장식품 등이 부장품으로 매장됐다.
1919년 1월21일 고종이 승하한 뒤에는 먼저 홍릉을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옮기고 이곳에 고종을 합장했다.
지금도 서울 청량리 일대에 ‘홍릉수목원’ 등 홍릉과 관련된 이름이 남은 것은 명성황후의 첫 무덤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금곡동에 자리 잡은 홍릉은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의 격식에 맞춰 석물을 조성해 다른 왕릉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신병주는…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KBS <역사저널 그날> 진행
▲KBS1 라디오 <신병주의 역사여행> 진행 중
▲한국문화재재단 이사
▲저서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 <조선의 왕으로 산다는 것> <조선 산책> 등 다수
첫댓글 '홍릉'이라는 지명이 생긴 역사가 명성황후 때문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