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9일, 열사의 27주기를 맞아
9월 19일은 김순석 열사의 27주기이다. 1984년 열사는 ‘거리의 턱을 없애 달라’는 장문의 유서를 서울시장 앞으로 남기고 자결했다. 27년이 지난 오늘, 거리에는 드문드문 전동휠체어가 돌아다니고, 지하철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고 도심에는 저상버스도 달린다. 그러나 여전히 중증장애인들은 서울시청 역사에서, 수원역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 중이다. 김순석 열사의 삶을 되돌아본다.
▶ 열사의 삶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난 김순석 열사는 다섯 살 때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된다. 열여덟 살(1970년)에 서울로 올라온 열사는 강동구 거여동의 조그만 금은세공 공장에서 일하며 기술을 배우고, 남다른 손재주로 9년 만에 공장장이 된다. 이 시기에 부인 김동심 씨를 만나 결혼하고 아들 경남 씨가 태어났다.
그러나 열사는 1980년 10월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두 다리에 철심을 박는 중상을 입는다. 3년간의 투병생활 끝에 83년 10월 수동휠체어를 타고 퇴원한 열사는 강동구 마천동 월세방 옆에 조그만 금은세공 작업장을 차린다.
남대문시장에 자신이 만든 액세서리를 납품하며 재기를 위해 몸부림쳤던 열사의 의지는 당시 곳곳에 막아서던 도로의 턱들과 사람대접을 하지 않는 당시 사회적인 시선 등에 의해 좌절된다. 결국 서른다섯 살의 나이로 열사는 부인과 다섯 살배기 아들을 남겨두고 1984년 9월 19일 오전 10시 서울 강동구 마천2동 지하셋방 한구석에서 자결한다.
▶ 유서
열사는 검은색 볼펜으로 편지지 5장을 빽빽하게 채운 유서를 당시 염보현 서울시장 앞으로 남겼다.
"시장님,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또 우리는 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지나는 행인의 허리춤을 붙잡고 도움을 호소해야만 합니까"
"택시를 잡으려고 온종일을 발버둥치다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읍니다. 휠체어만 눈에 들어오면 그냥 지나치고 마는 빈 택시들과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저렸읍니다."
"그까짓 신경질과 욕설이야 차라리 살아보려는 저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다져보게 해주었읍니다. 하지만 도대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는 서울의 거리는 저의 마지막 발버둥조차 꺾어놓았읍니다. 시장님, 을지로의 보도블록은 턱을 없애고 경사지게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밖에는 시내 어느 곳을 다녀도 그놈의 턱과 부딪혀 씨름을 해야 합니다. 또 저같은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화장실은 어디 한군데라도 마련해 주셨습니까?"
"장애자들은 사람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대우를 받아도 끝내는 이용당합니다. 조그마한 꿈이라도 이뤄보려고 애써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는 저를 약해지게만 만듭니다."
▲김순석 열사의 자결 소식을 보도한 당시 조선일보 기사(1984년 9월 22일자) |
▶ 죽음 그 이후
김순석 열사의 죽음은 당시 한 중앙일간지에 크게 보도되며 사회적인 파장을 낳는다. 당시 염보현 서울시장은 관계 직원들에게 “장애자들의 통행 편의가 증진될 수 있도록 항구적이고 면밀한 대책을 수립하라”라고 지시했다. 염 시장은 9월 23일 간부회의에서 “조간신문에 눈물겹도록 기막힌 얘기가 씌어 있다”라며 “교통, 건설, 보사국 등 관련 부서간에 충분한 협의를 거쳐 횡단보도나 건축물에 장애자들의 편의를 도울 수 있는 시설을 단계적으로 갖추도록 대책을 세우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후 청년 장애인들의 조직적인 대응이 이어진다. 1984년 10월 6일 정립회관 운동장에서는 8회 전국지체부자유학생체전 개회식이 열렸다. 개회식의 마지막 순서로 동국대부고와 서울고의 지체부자유자 축구선수들이 시범경기를 벌이고 있었고 본부석에는 권이혁 문교부(현 교육부) 장관과 국회의원, 서울시교육감, 보사부(현 복지부) 사회국장 등이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리고 운동장 한쪽에서는 지체장애 대학생들로 구성된 대학정립단 회원들이 김순석 열사의 ‘위령제’를 진행했다. 이들은 ‘최근 장애자에 대한 사회의 차별대우에 항의하여 자살한 한 신체장애자의 죽음을 추도한다’며 모조관과 향을 갖다 놓고 제를 올렸다. 그리고 대학정립단 회원 중 한 명이 본부석으로 올라가 권 장관에게 김순석 열사 영정에 분향해달라고 요구하다가 주최측 직원들에게 끌려나갔다. 주최측은 축구경기를 중단시켰고 ‘내빈’들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러한 대학정립단의 위령제 투쟁은 김순석 열사의 죽음이 한순간의 ‘동정적인 사건’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하게 한 첫 번째 조직적 저항이었다.
이후 27년이 흐른 지난 2001년, 오이도역 추락참사를 계기로 장애인이동권연대가 출범하고 지하철 점거, 버스타기, 단식농성 등 가열찬 투쟁을 통해 관련 법과 제도가 일정 정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서울 시청역과 경기도 수원역에서 천막농성이 진행되고 있듯이 가장 기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이동권 문제에 대한 투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9월 19일은 김순석 열사가 야만적인 세상에 항거하며 세상을 떠난 지 스물일곱 해가 되는 날이다. 이동권과 교육권과 노동권, 그 모든 생존의 문제를 짊어지고 먼저 떠난 김순석 열사. 그의 어깨를 짓누르던 그 무거운 짐들을 지금 우리가 나누어지고 가고 있다. 스물일곱 해를 지나며 열사를 우리 가슴에 새기고 다시 한 번 되돌아봐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