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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9.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목요일. - 나는 어떤 사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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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9.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나는 어떤 사람?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그 잎이 푸르고 줄곧 열매를 맺는다.”
오늘 예레미야서를 바탕으로 의지와 신뢰의 차이를 묵상해봅니다.
누구에게 의지하는 것과 누구를 신뢰하는 것의 차이 말입니다.
의지의 문제점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기대어 서기에 스스로 지탱하거나 설 수 없습니다.
지팡이에 의지하면 지팡이 없이는 서 있거나 걸을 수 없습니다.
술에 의지하면 술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술 중독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지하는 그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 서지 못합니다.
의지하는 그 사람이 다행히 좋은 사람이면 다행이지만
좋은 사람인 줄 안 그가 그렇지 않으면 큰 문제겠지요.
그에 의한 행복이 그에 의한 불행으로 바뀔 것이고,
나의 인생과 나의 행불행이 그에 의해 좌우되고 그에게 매입니다.
그렇다면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자기를 믿고 자기 힘에 의지하는 사람 말입니다.
자기 인생과 자기 행복을 남에게 맡기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훌륭하고,
불교의 경우 이런 면에서 훌륭한 가르침을 주는 종교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오늘 예레미야서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라고 얘기하듯
자기를 과신하거나 아무도 믿지 않는 곧 과신과 불신의 자기 믿음이라면
다른 얘기일 것이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보다 더 문제일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과신이 타인 불신으로 이어지고
타인 불신이 단절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과신은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문제이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문제이고
하느님과도 단절하게 하기에 더 큰 문제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물가의 나무처럼 싱싱하고 열매를 많이 맺지만
자기를 과신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단절되어
생명의 물과 단절된 사막의 나무와 같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믿으면 엽니다.
사람을 믿으면 사람에게 열고,
하느님을 믿으면 하느님께 엽니다.
그러니 믿는 것은 과신이나 불신보다 낫고
앞서 봤듯 의지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라자로 얘기를 볼 수 있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루카 복음은 다른 복음과 비교할 때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해 특별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라자로가 가난해서 천국에 갔다고 하는데
실은 돈만 없어서 천국에 간 것이 아니라
의지할 돈도 의지할 사람도 없어서 천국에 간 것입니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하느님께만 믿음을 둔 것이고
하느님밖에 믿을 곳이 없어서 하느님이 계신 천국에 간 것입니다.
반면 부자는 라자로와 정반대 지점에 있고 그곳이 실은 지옥입니다.
지옥이란 돈도 있고 사람도 있는데 하느님이 없는 곳이 지옥이고
불타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과 영원히 단절된 곳이 지옥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부자입니까? 가난한 사람입니까?
의지하는 사람입니까? 신뢰하는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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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9.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화가 앨리스 카하나는 15살에 독일군에 의해 가족과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이때 앨리스 카하나는 뼈아픈 기억을 하나 만들게 되었습니다.
수용소로 끌려갈 때, 앨리스 카하나는 여덟 살인 남동생과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신발 한 짝만 신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에 의해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신발이 벗겨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주의한 동생이라는 생각에 “넌 왜 그렇게 바보 같니! 너 자신의 물건 하나도 제대로 못 챙기니?”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수용소로 끌려가며 닥친 혼란 속에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동생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생은 다른 트럭으로 끌려갔고, 그 후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라고 한다면 과연 미움과 저주의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삶의 끝에 서면 후회되는 것이 얼마나 많을까요? 나의 말과 행동으로 타인에게 주었던 아픔과 상처가 오히려 내게 되돌아와 나를 힘들게 합니다.
그런 후회를 더는 만들지 않기 위해 깨어 있는 삶이 필요합니다. 특히 사랑에 집중하면서 받는 사랑이 아닌 주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후회를 줄여나갈 수 있게 됩니다. 특히 마지막 심판 때에는 우리가 얼마를 벌었는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라갔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사랑의 실천에 얼마나 온 힘을 기울였나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바로 그 시간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온갖 호화로운 생활을 했고, 라자로는 너무나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둘의 상황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에 머물고,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 부자가 고통을 받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악행을 저질렀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즐겁고 호화롭게 살면서, 가난한 라자로를 보살피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개가 다가와 라자로의 종기를 핥을 정도로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무관심했습니다. 그 무관심이 그를 저승의 고통으로 이끈 것입니다. 또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부자의 이름은 전혀 알 수 없고, 가난한 이인 라자로의 이름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기억하는 사람은 이 세상 안에서 풍요와 안정을 누린 사람이 아닌, 어렵고 힘든 삶을 산 사람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억하는 사람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사랑 실천이 중요합니다. 나중에 후회할 일을 더는 만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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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가장 지적인 종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가장 강한 종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는다(리언 메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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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9.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극단적인 두 인물의 대조된 모습을 통해, 불신과 재물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하느님의 말씀에로 초대합니다. 이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부자는 가련한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자신과 라자로 사이에 골짜기를 파놓고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승에서 파놓고 건너가지 않은 그 분리의 골짜기는 저승에서도 그가 건너갈 수 없는 분리의 골짜기가 되고 맙니다.
사실, 이 부자는 특별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고, 타인에게는 무관심하고 인색했습니다. 곧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대문 앞에 누워있는 가난한 라자로를 무시하고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니라, 선행과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곧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야고 4,17)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임을 말해줍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자비를 입어 부자가 되었으니,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에게 한 말, 곧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6,24)라는 간청은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 라는 간청으로 바뀌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부자가 대문 앞에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로 누워있어도 못 본 것은 자신의 호사스러움과 즐거움, 탐욕과 인색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형제들 사이에, 또 가난한 이들과의 사이에, 냉대와 무시와 무관심의 골짜기를 파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저승에서의 골짜기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라자로’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라자로가 구원을 입은 것이 그의 가난하고 고통 받은 삶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과 자비를 입은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호의와 사랑을 입고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그렇습니다. 라자로가 은총을 입은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승에서 처지가 뒤바뀐 부자는 자기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
부자는 이승에 살고 있는 자신의 형제들의 회개를 위해서 라자로를 보내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브라함은 이승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말씀이 있으니,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덧붙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사실, 우리가 당신을 믿지 못함은 기적을 보지 못했거나 듣지 못했거나 체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고 보고 체험하고도 받아들이지를 않는 완고함 때문일 것입니다. 곧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되다.”(루카 11,28).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주님!
마음의 눈을 열어 타인의 처지를 볼 줄 알게 하소서.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고,
자신의 혀만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게 하소서.
재물을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않게 하시고,
탐욕에 빠지지 않고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악을 저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시고,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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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9.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천국 본향에 대한 믿음
천국에 대한 희망은 어떠한 시련의 십자가도 이겨낼 힘을 줍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 본향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세상과 타협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희망은 온갖 환난을 이겨내는 힘이며 능력입니다. 현세의 이익과 행복을 뛰어넘는 고달픔을 차지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지만 결국은 관리를 하다가 하느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매 순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뻐합니다. 천국 본향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부와 가난을 견주어 ‘복이 있는 사람’, 복이 없는 사람, 혹은 ‘팔자가 좋은 사람,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은 그 생각을 바꾸도록 안내합니다. 부자는 잠시 호화로운 삶을 즐기다가 영원한 고통을 안게 되었고 반면 라자로는 잠시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특별히 어떤 잘못을 범했다거나 선행을 하여서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살다 보니까 한 사람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한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하느님께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이렇게 다릅니다. ‘부’라는 것이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습니다’(마르10,25).
잠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분명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혹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에 겨워 이웃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살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관심이 죄입니다.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누구의 가르침도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시련도 유혹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됩니다”(집회2,5). 예기치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깨어서 주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천국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지금 여기서 주님의 마음에 들게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보다 세상을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앵무새를 키우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앵무새도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고 따라했습니다.
젊은이는 살기가 너무 힘들어 신부님을 찾아 상담하기로 작정하고 앵무새를 안고 사제관으로 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사제관에도 앵무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젊은이의 앵무새가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제관의 앵무새가 답례를 하였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 “내 힘들다!”고 낙심하지 말고,
거꾸로 “다들힘내!”라고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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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9.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어원은 이렇습니다. “1347년, 칼레는 영국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지만, 더 이상 원병을 기대할 수 없어 결국 항복하게 됩니다. 후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하는 칼레시의 항복 사절단이 파견됩니다. 그러나 점령자는 ‘모든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누군가가 그동안의 반항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라며 ‘이 도시의 대표 6명이 목을 매 처형받아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칼레시민들은 혼란에 처했고 누가 처형을 당해야 하는지를 논의했습니다. 모두가 머뭇거리는 상황에서 칼레시에서 가장 부자인 ‘피에르’가 처형을 자청하였고 이어서 시장, 상인, 법률가 등의 귀족들도 처형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음날 처형을 받기 위해 교수대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임신한 왕비의 간청을 들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죽음을 자초했던 시민 여섯 명의 희생정신에 감복하여 살려주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역사가에 의해 기록되고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노예와 다른 점은 단순히 신분이 다르다는 게 아니라, 사회적 의무를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지내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습을 종종 보곤 합니다. 본당에 교무금 제도도 없고, 헌금도 그리 많이 내지 않지만, 본당을 위해서 후원하는 부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 그 자녀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후원하는 부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복지 제도가 마련되어 있어서 가난 때문에 의료혜택을 못 받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정부에서의, 식, 주에 대해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듣곤 합니다. “미국에서 살려면 아주 잘 살거나, 아주 못살아야 한다.” 중산층은 세금에 대한 의무는 많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혜택은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도 신문사를 운영하면서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4달 동안 급여를 받지 않고 일하였습니다. 직원들도 몇 년 동안 임금 인상 없이 근무해 주었습니다. 신문사를 떠나면서 후원금을 내고 왔습니다. 제가 5년 동안 뉴욕에서 잘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자리를 마련해 준 신문사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후임 신부님이 신문사를 운영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시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시니,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에서 벗어난 부유한 사람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곤 합니다.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믿고 종업원들에게 막말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민의 의무인 입대를 피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부당하고 부정한 청탁을 받는 사람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그런 부당하고 부정한 청탁의 결과로 우리 사회에 부정과 부패가 독버섯처럼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수사권과 공소권을 남용해서 이득을 챙기려는 일부 검사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사회적인 약자와 억울한 피해자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는 권력과 정치인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는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살았다면 살아서도 행복했고, 죽어서도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재물의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부유할지라도, 가난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2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은행이라는 곳간에 재물을 쌓듯이, 천국이라는 곳간에도 재물을 쌓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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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9.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나! 이제 너랑 끝이야!’라고 한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둘의 관계가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단절’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금방 들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너랑 끝이다.’ 혹은 ‘저 사람 다시는 안 본다.’라는 말해 보셨습니까? 혹시 속으로는 해 보셨습니까? 안 해보신 분들도 계시지만 많은 분은 ‘해보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라자로와 부자가 나옵니다. 부자는 좋은 옷에 맛있는 먹을거리로 자신의 삶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자로는 그렇지 못했지요. 먹지도 못해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려 했으니 말입니다. 온몸에는 종기가 나 있었으니, 그가 입은 옷이 멀쩡했을까요? 헤지고 떨어진 것 이외에 고름으로 젖어 있었겠지요!
이런 라자로와 부자 사이에는 대문이 있었습니다. 넘을 수 없는 커다란 장벽이었습니다. 라자로에게는 말입니다. 라자로는 그 대문에 막혀 먹고 싶어도 못 먹었고, 따뜻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문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굳게 닫힌 대문은 대문이 아니라 바로 부자의 냉정함, 또는 사랑이 없는 마음을 나타내는 상징이지요.
부자는 그렇게 무관심이라는 대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고는 그곳으로 자신의 나가지도 않고 들어오게도 하지 않았습니다. 건널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부자와 라자로. 그들이 하느님이 만들어 놓으신 죽음이라는 문을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또다시 건널 수 없는 구렁이 놓였습니다.
이 구렁은 바로 부자가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자기 삶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베풀지 않고 살았는데, 평생을 남들과 웃으며 지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늘에 가서 갑자기 변해 사랑을 베풀고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곧 하늘입니다. 우리의 삶이 곧 하늘에서의 삶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문을 연다면 하늘의 문도 열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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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이라는 향기로….
완벽을 원하지만 가능할까요?
늘 틈은 존재합니다.
틈의 다른 말이 바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다 준비됐을까요?
틈 없이 완전할까요?
그렇다면 오히려 준비된 길을 가지 마십시오.
틈 있는 길이 진짜 길이기 때문입니다.
틈을 만나는 것이 우리 길이기 때문입니다.
숨과 숨 사이에도 틈이 있는데
어찌 우리 삶에 틈이 없을까요?
어찌 내게, 그리고 다른 이에게 틈이 없을까요?
틈은 곧 인생이고 삶의 향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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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9.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도 행복도 선택이다!”
-회개의 일상화-
삶은 선택입니다. 의식적, 의지적 선택이자 은총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천국도 지옥도, 회개도 사랑도 선택입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요 사랑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장입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연옥이, 지옥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선택에 따라 전개되는 현실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천국을, 행복을 선택해 살아야 죽어서도 천국의 행복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타고난, 바꿀수 없는 부정적 요소도 많지만 날마다 새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무궁무진합니다. 주님을, 희망을, 사랑을, 행복을, 감사를, 기쁨을, 평화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주신 하루에 감사하며 주님을 삶의 중심으로 선택하여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다산의 어록중 다음 내용도 우리에게 선택의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더 가고 싶을 때 절제하고, 두려울 때 한걸음 나아간다. 탁월함이란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고요할 때 텅 비면 밝고, 밝으면 통한다. 움직일 때 곧으면 공정해지고, 공정하면 넓다. 이러한 상태는 탁월함에 가깝다”
얼마전에는 군에서 전역후 귀농하여 새로운 삶을 선택해 힘차게, 희망차게, 의욕적으로 살아가는, 저를 삶의 멘토라 부르며 따르는 60대 중반의 ‘이용민 요아킴’형제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2005년 봄에 만났으니 무려 20년째 교류를 계속중인 분입니다. 이분이 선물한 “신중년의 비상(飛上)”이라는 책 제목도 멋졌고, 날마다 비상의 삶을 선택하여 사는 모습도, 또 서문의 감사로 끝나는 끝말도 아름다웠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응원해주고 지지해 준 아내 임영자 여사, 나의 인생 노트에 적어 놓은 글을 잘 정리해 준 아들 형록이와 딸 민지에게 감사하고 이 책을 바친다.”
작년 8월15일부터 시작한 선택-훈련-습관화의 도식에 따라 기상하자마자 시작한 만세육창 기도-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됩니다. 주님도 천국도 행복도 선택임을 확인하는 다음 제 ‘예닮기도’ 일부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희망,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의식적, 의지적, 의도적 선택이, 회개의 선택이, 회개의 일상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은총의 사순시기는 말그대로 깨어 회개하며 사는 시기입니다. 회개를 통해 가아(假我)가 아닌 진아(眞我)의 참나를 사는 시기입니다. 사순시기뿐 아니라 매일미사중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거의 모두가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답도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서 후반부 말씀 역시 우리를 뒤돌아 보게하는, 또 회개를 촉구하는 충격적 말씀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알리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이 말씀을 보면 구제불능의 사람이요, 성선설보다는 성악설에 가깝습니다. 사실 오늘날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 현실을 보면 인간에게 ‘과연 희망이 있는가?’ ‘이렇게 인간이 사악하고 잔인할 수 있을까?’하는 회의도 들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원판불변의 법칙’이니 ‘사람은 고쳐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라는 말도 회자되나 봅니다. 이런 부정적 숙명론에 도저히 주저앉을 수는 없기에 이래서 회개의 선택이, 회개의 일상화가 참 절박합니다. 인간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창세기 노아 홍수후에도 나옵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창세8,21)
바로 이런 부정적 인간상의 전형이 오늘 복음의 이름없는 무명의 부자입니다. 이름이 없는 부자, 존재감 없는 아무것도 아닌 무와 같은 존재를 상징합니다. 오늘날도 복음의 부자처럼 부에 매몰되어 자기를 잃고 사는 무지의 헛된 유령같은 삶을 살다가 제대로 살아보지고 못하고 죽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모르고 살다가,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세상을 떠나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복음 서두의 묘사가 참 충격적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부자는 오직 자기만 알고 라자로라는 존재는 관심도 없고 안중에도 없습니다. 자기와는 다른, 사람이 아닌 물건이나 짐승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라자로야 말로 부자에겐 구원의 문이요, 회개의 표지로 부자를 심판하지만 무지한 부자는 전혀 알길이 없습니다.
이름없는 무명의 존재감 없는 어떤 부자와는 달리 가난한 이는 이름이 있습니다. 진짜 하느님 앞에 살아 있는 존재임을 알리듯 라자로는 이름도 ‘하느님께서 도와 주신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흡사 제1독서의 예레미야서가 부자와 라자로의 내면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없는 소금땅에서 살리라.”
생각없이, 영혼없이 몸의 욕망따라 살아 온, 주님 탓이 아닌 스스로 자초한 업보의 화입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부자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동시에 우리의 회개와 더불어 “내 중심”인지 “주님 중심”인지 우리의 선택을 촉구합니다.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후자의 주님 중심의 모습은 그대로 라자로의 내면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여러분의 내면의 실상은 어느쪽입니까? 외관상 가난하고 초라해 보여도 이런 내면을 지닌자가, 하느님께 날로 깊은 믿음의 뿌리를 내려가는 자가 정말 그 누구도 부러울 것 없는 부자요 행복한 사람이요 자유인입니다. 참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향기로운 사람입니다. 새삼 이 두 부류의 인간상, 우리의 회개를, 선택을 촉구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 중심의 삶을 살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어떤 부자와 라자로는 사후 그 처지가 완전히 반전됩니다.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구렁이가 가로놓여 있는 데, 이것은 살아 있을 때부터 형성되어 고정된 단절의 구렁이입니다. 내 중심의 삶들을 살기에 각자는 고립된 섬처럼 되고, 참으로 모두가 하느님 중심의 삶들을 살 때 하나로 연결됨으로 서로간 단절의 구렁도 사랑으로 메꿔질 것입니다.
이래서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부단한 회개의 선택, 회개의 일상화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일상화를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 찬미와 감사, 희망과 기쁨, 자유와 평화의 참행복한 하늘 나라 삶의 실현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지상 천국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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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9.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와 나>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19-20)
네가 늘
내 앞에 있거늘
나를 닫으면
너는 없고
너를 있게 하신
하느님마저
계실 수 없으니
나를 있게 하신
같은 하느님과
나조차
함께할 수 없지
네가 늘
내 앞에 있기에
나를 열면
네가 있고
너를 있게 하신
하느님께서
계실 수 있으니
나를 있게 하신
같은 하느님과
나 또한
함께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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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9.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루카 16,19-22)
자선을 베풀지 않은 부자
자주색 옷을 입은 그 부자는 탐욕을 부렸다거나 남의 재물을 빼앗았다거나 간음을 했다거나 다른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저지른 유일한 악은 교만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가장 사악한 자여, 그대 몸의 한 지체가 그대 집 대문 앞에 누워 있는 것을 보면서도 가없은 마음이 일지 않소? 그대 눈에 하느님의 율법이 아무것도 아닌 듯이 보이더라도, 최소한 그대 자신의 처지를 가련히 여기고 두려워할 일이오. 그대 신세가 그 사람처럼 될수 있오. 그대가 낭비하고 있는 것을 그대 지체한테 주시오. 그대 재산을 모두 버리라는 말이 아니오. 그대가 내버리는 것,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말이오.
-히에로니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3 피조물은 하느님이다
피조물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곳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이 되신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교회 안에 늘 설치되어 있는 자선 헌금함을 향해 이 설교를 했을 것이라고 엑카르트는 말한다. 그런 다음 그는 이 설교를 알아들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엑카르트는 유머 감각, 지신과 자신의 일을 즐기고, 자신이 한 말과 창조 행위와 설교를 듣고 웃을 줄 아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것으로 보건대 우리는 그가 얼마나 자유로운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기쁨을 어느 정도 맛볼 줄 알았고, 이러한 음미의 능력을 하느님의 창조 행위로 돌릴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하느님이 만물 속에서 스스로를 누리는 것이 사실이기에, 엑카르트는 자신이 설교한 것을 그대로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엑카르트는 자신의 일, 곧 밖으로 흐르게 함과 동시에 안에 머물게 하는 것에 지나치게 매달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느님께 말을 거는 데는 유머만한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128)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4장 오직 고통뿐
가정 환경
루치아의 기족들이 그녀를 몰인정하게 취급하는 것을 - 비록 큰 손해가 있었지만 - 단순한 이해 관계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다. 비록 안토니오는 열심치 못하다 해도 마리아 로사와 그 딸들은 열심한 신자들이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은총을 내리실 때 우리가 그 은총에 합당한 자이기를 원하시기에 아마 마리아 로사와 그 딸들을 통해 루치아가 성모님의 발현을 받을 만한 성녀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려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단순한 사람들은 정직하고 평화스런 시골 아낙네들의 생활을 어지렵게 하는 이 사건에 온전히 당황했고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루치아가 책임을 느끼고 어떻게든 바로잡고 싶은 것이 바로 이 일이었다. 사건이 진행됨에 따라 알게 되듯이 산토스의 집은 특별히 청렴하였고 조금도 언색한 데 없는, 이해문제에서는 완전히 초월한 사람들이었다.
실상 그들은 순례자들이 자기네 소유인 호랑가시나무 주위에 던지고 간 많은 금전의 산더미를 보았다.
그들은 가난한 마르뜨네보다 더 금전적 곤란을 당하면서도 동전 한 푼 손대지 않았다. 또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농작물에 대한 손해 배상금으로 일전 한 푼 사유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 헌금을 도난에서 보호한 것은 모이타 마을의 어느 가족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레이리아에 주교가 부임했을 때 고스란히 주교의 손에 넘겨 주었다.
어느 날 이웃의 어떤 사람이 루치아가 손님한테서 돈을 받았다고 터무니 없는 말을 어머니께 고해 바쳤다. 즉시 책망이 떨어졌다. 다행히도 언니 카롤리나와 다른 몇 소녀들이 루치아와 손님의 대화에 함께 있었던 관계로 사실을 입증해 주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큰일이 날 뻔 했다.
루치아는, “내가 입고 있던 옷의 먼지가 다 떨어질 정도로 매를 맞았습니다.” 라 고말했다.
1921년 레이리아의 주교는 고바 다 이리아의 대지를 사들였다. 루치아의 집에서는 매도인 중에서 제일 싼 값을 요구했다. 호세 다 실바 주교는 고바 다 이리아의 순례와 파티마의 성모 공경을 인가하는 교서(1939)에서 이 가정의 욕섬 없는 숭고한 마음씨를 공적으로 칭찬하였다.
발현 후 25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안토니오 도스 산토스의 자녀들과 마르뜨의 가족의 생존자는 겸손 질박한 무명의 노동자로 일하면서 고바 다 이리아를 찾아가서 성모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성모님이 자기네 아이들을 통하여 모든 사람 위에 널리 내리신 축복을 찬미하는 순례자들의 틈에 섞여 생활하고 있다.(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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