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3일 수업
***플랑드로의 바로크 회화
1550년 경에는 네델란드 전 지역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더욱이 북부 네델란드가 신교 지역이 되자 카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한 스페인이 탄압을 심하게 하였다. 이에 북부 네델란드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남부 지역은 북부 지역보다 비교적 부유하고, 카톨릭 지역이었으므로 스페인에 대한 적개심이 덜한 편이었다.
1576년에 북부 네델란드군에 패한 스페인군은 남으로 내려와서 중심 도시인 안트와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안트와프는 폐허가 되었다.
17세기로 접어들자 도시는 안정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옛 명성을 되찾자 다시 미술도 활기를 띄었다.
이 지역을 출신 무대로 하여 활동한 대표적 화가로는 루벤스, 안토니 얀 다이크, 야코 요르단스, 브뤼겔(형--브뤼겔의 큰 아들로 정물화를 전문으로 그렸다.)
1. 루벤스 (1577-1640)
1577 -- 독일의 지젠에서 출생, 아버지는 대공의 부인의 법률
고문이었으나, 사적인 문제와, 스페인과의 전쟁을 피해서 독일로
이사하였다. 부모는 캘빈파 교도였으나 나중에 카톨릭으로 개종한다.
1587 -- 아버지가 죽자 10세가 된 루벤스는 어머니를 따라서
안트와프로 돌아온다.
1590 -- 백작 부인의 시동이 되어서 궁정에 출입하면서 궁정 법도를
경험한다.
1591 -- 풍경화가 페르테히트의 도제가 되었다.
1598 -- 안트와프 화가 조합에 가입--화가로서 생활을 시작한다.
1600 -- 이태리 여행을 하면서 베네치아에 들린다. 베네치아 화파의
화려한 색상을 받아들인다. 만토바에 가서 궁정화가 겸 보좌관이
되어서 외교관으로 활약한다.
더욱이 티치아노의 색채와 육체 표현은 루벤스에게 평생 동안
영향을 준다.
1601 -- 로마에 갔다. 이때의 그림에는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틴토레토,
카라바지오의 영향이 두루 나타난다.
1603 -- 만토바의 스페인 사절의 일원으로 스페인을 방문한다.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서 갖고 가던 그림이 많이 훼손된다. 루벤스가 수리를
하거나, 새로 그리기도 하였다. 이 그림이 스페인에서 루벤스의 명성을 드높였다. 특히 사절
단장 레르마ㅣ 공작이 많은 그림을 주문했다.
1608 --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어머니가 이미 별세 그의 소문이
고향에까지 퍼져서 많은 주문을 받았다.
1609 -- 인문학자인 dis 브란트의 딸 이사벨라와 결혼 알베르트 대공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1611 -- 십자가에 메달림
십자가에 내려짐
이 두 작품은 루벤스의 대표적인 종교화이다.
1616 -- 이후 5년 간 가장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신화적 소재로도 그렸다.
1621 -- 펠리페4세 즉위, 유럽 30년 전쟁 시작(독일의 신, 구교 종교전쟁)
1622 -25 -- 마리 데 메디치의 생애를 다룬 21점 연작을 그리다.
(마리 데 메디치의 자료를 보충할 것)
1626 -- 아내 이사벨라 흑사병으로 사망
1630 -- 상인의 딸 ‘푸르망’과 결혼 , 37세의 나이 차이가 남
1637 -- 브뤼셀 근교에 스테인 성 구입( 반 다이크로부터)
정원 생활을 즐겼다. 말년에는 생활에 만족해서인지 그림의 질이
조금 떨어진다고 한다.
1640 -- ‘모피를 두른 여인’ 제작
이 해에 사망하였다.
루벤스의 미술
그는 이태리에 머물면서 그곳 화가의 장점을 받아 들인다. 티치아노의 색채, 카라바지오의 빛, 미켈란젤로의 역동성, 틴토레토의 미적 표현 등을 받아 들였다.
따라서 루벤스의 미술은 극적이고, 역동적이며, 화려한 색채 사용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빛의 사용은 카라바지오의 무대 조명과 같은 빛과는 다르다. 색채로 구성된 하나의 물질로서 받아들인다. 조명으로서가 아니고 색감으로 빛을 표현할 뿐이다. 어둠도 단순히 빛에 대비되는 단순한 어둠이 아니고,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자체의 기능을 가진다.
티치아노의 색채가 그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주므로, 루벤스의 피부는 따뜻하고, 풍만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십자가에서 내려짐”
안트와프 성당의 부속실에 있는 그림으로, 초기 작품이다. 예수의 얼굴은 생명을 잃은 모습이다. 예수를 내리는 사람과, 받는 사람에게 예수의 체중이 강하게 느껴진다.
3명의 마리아도 표정으로 적절하게 표현하였다고 한다.
“ 리옹에서 만난 ‘마라 드 메디치’와 앙리 4세”
마리 드 메디치의 주문으로 4년 동안에 24작품을 연작으로 그렸다. (마리의 일생이라고 한다.)
마리는 메디치가의 딸로서 27세의 나이에 앙리 4세와 전략적인 결혼을 한다. 1600년 10월 프렌체 성당에서 왕의 대리인가 결혼식을 올린 후에 앙리 4세와는 리옹에서 처음으로 만난다. 마리는 정치적 성향이 아주 강한 여인으로 아들 루이 13세가 10세 때 앙리 4세가 암살당한다. 이때 마리 연루설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섭정을 하면서 아들인 루이 13세와도 사이가 나빠서 두 번이나 추방당한다.
루벤tm는 마리의 그림에서 정치색을 없애기 위해 제우스와 헬라가 만나는 그리스 고전 신화를 응용하였다. 마리도, 루이 13세도 만족했다고 한다.
“모피를 두른 여인”
두 번째 아내 푸르망을 모델로 한 그림으로서, 판매가 목적이 아니고, 푸르망을 위해서 그림 그림이다. 유언에도 팔지 말고 푸르망을 주라고 되어 있다.
이 그림은 루벤스의 화풍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약간 통통하지만 아주 풍만하고, 육감적인 몸매와 부드러운 살결의 표현은 루벤스 회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루벤스의 그림은 티치아노--루벤스--와토--르노아르로 이어지는 하나의 맥을 이룬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고대 미술의 고상함에서 에로틱한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지만 고전주의 예술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 그의 한계라고 한다.
이 작품의 주요 메시지는 지적이기보다는 관능적이고 로맨틱하드는 것이다.
“스테인 성”
루벤스는 말년에 브뤼셀 근교에 성을 사서 정원 생활을 하였다. 이 그림은 그때의 생활을 그린 풍경화이다. (반 다이크로부터 샀다)
당시에는 풍경화를 회화 분야에서 그리 높이 인정하지 않았다. 루벤스는 아주 치밀하게 구성하여 그리므로 지금은 유럽 풍경화의 선구적인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101. 아담과 이브 1599
102. 레르마 공의 기마 초상 1603
103. 루벤스 형제와 친구들 1605
104. 브리지다 시피놀라 초상 1606
105. 카리오 도리오의 초상 1606
106. 후작 부인의 초상 1607
107. 루벤스와 이사벨라 1609
108. 성조지와 용 1607
109. 교황과 성자들 1607
110. 십자가에 매달림 1610
111. 십자가에서 내려짐 1614
이 두 그림으로 루벤스는 유명화가의 반열에 올랐다.
112. 프로메테우스 1612
113. 주노와 아르고스 1612
114. 파리스 심판(2장) 1612
115. 레키우스 딸들의 능욕 1618
116. 미셀 오포비우스 초상 1619
117. 짐수레가 있는 풍경 1616
118. 최후의 심판 1616
119. 삼손과 데리라 1609
120. 클라라 세레나(루벤스 딸) 1616
121. 술 취한 헤라컬레스 1613
122. 메두사 머리 1618
123. 밀짚 모자 1630
124. 안젤리카와 헤르미트 1630
2.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
바로크 회화에서 초상화 분야에서 명성을 날린 화가이다.
안트와프의 비단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주로 초상화를 그렸다. 안트와프의 미술학교를 어린 나이에 입학하여 미술 공부를 하였다. 16세인 1615년에 독립하여 화실을 열고 화가 조합(길드)에 가입하여 루벤스의 제자가 아닌 조수격으로 같이 작업하면서 배웠다.
루벤스는 제자 겸 조수인 반 다이크의 재능에 위협을 느끼고 초상화에 주력하라는 충고를 주었다는 말도 전해온다. 그러나 반 다이크는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고, 종교화, 재단화도 많이 그렸다.
그러나 역시 초상화에 재능이 뛰어나서 1620년 경에는 초상화가로 전 유럽에 이름을 날렸다. 1621년에는 영국 -- 이태리로 여행을 떠났다. 이태리 여행을 하면서 ·1626년까지 제노아에 머물렀다.
이태리에 머무는 동안에는 베네치아에서 티치아노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제노아의 귀족이나 유력인사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얼굴과 손을 모델 앞에서 그린 후에 나머지 마무리는 스튜디오에서 했다고 한다.
26세 때에 안트와프로 되돌아 온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르벤스의 라이벌이라고 말하며서 루벤스를 의식하고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에는 티치아노의 영향이 많이 보인다고 한다.
1628년에 이사벨라 궁정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1632년에 플랑드로에서 성공을 거둔 그는 영국에 가서 찰스 1세의 궁정화가가 되어서 그곳에서 평생을 보냈다.
그는 영국에서 제자들에게 둘러싸여서 수많은 작품을 제작하였다.
영국 왕으로부터 기사의 작위도 받고 살다가 1641년에 죽었다.
“사냥하는 찰스 1세” 1635 19-39
135. 자화상 1622
136. 엘레나 초상화 1622
137. 남자 초상 1618
138. 안티오페에게 사는 사틸로스 1630
139. 레이디 초상 1623
140. 아고스티노 초상 1622
141. 로메리니 가족 1623
142. 듀크 공작 초상 1632
143. 찰스 1세 초상 1635
3. 야코브 요르단스(1593 – 1678)
야코프 요르단스(1593년 5월 19일∼1678)는 벨기에(플랑드르)의 화가다.
1593년 안트베르펀에서 출생하였다. 루벤스와 같이 판 노르트의 문하생이었으나 후에 루벤스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한 사람의 조수가 되며, 프랑드르 바로크의 회화에서 루벤스·반 다이크에 이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그의 주요한 테마는 향연에서 가장 잘 나타나는 민중생활 속에 있는 향락적인 측면이었다. 과장된 표정의 화중의 인물에 충만한 삶의 기쁨은 그의 종교화와 초상화, 또 신화에서 소재를 취한 작품까지 화면에 나타나고 있다.
그는 앞의 두 화가와는 다르게 이탈리아에 가서 오래 동안 미술 공부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는 플랑드로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태리 양식의 그림도 그의 개인 양식 속에 걸러져서 그의 양식의 그림으로 그려졌다.
1640, 1641년에 루벤스와 반 다이크가 죽자 그가 플랑드로 화단을 이끌었다.
144. 그의 가족과 – 자화상 1622
145. 농부와 사틸로스 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