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47
10월18일[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연중 제28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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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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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Jsv8m_kkPo?si=kiBgRmeYF8NBPK3G
[도미니코수도회 배수판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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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저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이냐시오 주교님의 순교는 추억의 명화 ‘쿼바디스’나 ‘벤허’ 같은 영화에 등장하던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최후 장면과 거의 흡사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엄청난 규모의 종합 운동장이 당시 순교의 현장이었습니다. 콜로세움 안에는 이미 순교자들의 대학살을 직관하기 위한 수많은 군중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벌어질 순교자 처형 장면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메인 이벤트인 순교자 학살극이 벌어지기 전, 경기 장 내에는 검투사들의 목숨 건 격투가 한창이었습니다. 격투에 패배한 검투사는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경기장 안은 이미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최고조에 도달하면 드디어 순교자들이 경기장 한가운데로 끌려 나왔습니다. 이어서 육중한 철문이 하나 열리면 잔뜩 굶주린 사자 떼가 우르르 몰려나왔습니다. 허기진 사자들은 순교자들에게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물어뜯으며 포식을 즐겼습니다. 그 모습에 관중들은 환호하며 손뼉을 쳤습니다.
체포에서 순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참으로 잔인하고 혹독했지만, 이냐시오 주교님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당당히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체포된 주교님은 로마로 압송되어가는 과정에서 수인이라기보다는 영웅이요 개선장군 같은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압송되어가는 당신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고 통곡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냐시오 주교님은 오히려 그들을 따뜻이 위로했고 격려했습니다.
용기를 잃지 말고 힘을 내라고, 파이팅하자고 외치셨습니다.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냐시오 주교님께서는 안티오키아에서 로마로 압송되는 그 고통스러운 여정 중에도 머릿속은 언제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 양떼에 대한 극진한 사랑은 일곱 통의 편지 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저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저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저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두십시오. 저는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저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이 맹수라는 도구를 통해서 제가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 제물이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기도하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쾌락도 지상의 모든 왕국도 저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 극변까지 다스리는 것보다 그리스도 예수와 일치하기 위해 죽는 것이 저에게는 더 좋습니다. 제가 찾고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바로 그분이며 제가 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바로 그분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제 출생의 때가 가까웠습니다.”
“지금은 제가 살아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죽음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저의 지상적인 모든 욕망은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물질을 사랑하기 위한 불은 내 안에 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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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_IpPwVBJ6u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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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당연히 복음도 복음을 전하도록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는 내용입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저도 소공동체 반장님들을 파견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겪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바로 거절당하는 아픔입니다. 문을 열어주지도 않고 전화를 안 받고 심지어는 안 다닌다고 했는데 왜 괴롭히느냐고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절당할 때 오는 아픔을 이겨내는 힘입니다. 이 힘의 출처를 알지 못하면 선교를 계속 이어 나갈 수 없습니다.
영화 ‘라라랜드’에서 남자친구는 여자친구를 위해 오디션 기회를 한 번 더 얻어옵니다. 그러자 여자는 말합니다. “또 안 되면 어떡해? 이번에도 거절당하면 난 죽을 거야. 수백 번의 오디션을 봤지만,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어. 내가 연기를 해도 그들은 방해하고 비웃었어. 나 말고도 더 예쁘고 실력 있는 애들이 널려있고 아마도 난 그냥 충분하지 않은 거야.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 무언가 하고 싶어서 매일 꿈을 꾸지만, 결국 헛된 꿈이었단 걸 깨닫는 사람들. 나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인 거야.”
남자는 여자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음 날 데리러 나오겠다고 떠납니다. 여자의 거절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남자의 응원하는 마음에 무너집니다. 그러나 이 도전이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바로 그 남자를 사랑할 때까지만입니다. 누구도 혼자 힘으로는 거절당함의 고통을 계속 이겨낼 수는 없습니다. 그 거절당하는 고통을 상쇄해 줄 사랑하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거절당하기 연습』이란 책을 쓴 지아 장이 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의 거절과 실패로 실의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두려움을 극복해보기 위해 100일 동안 거절당하는 연습을 해 보기로 합니다. 경비원에게 100달러 빌리기, 햄버거 리필 요구하기, 하루 동안만 취직시켜 달라고 하기, 도넛으로 오륜기 만들어달라고 하기 등을 시도했습니다. 대부분은 거절당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들을 동영상으로 올리고 공유하지 않았다면 100일 동안 거절당하는 연습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동영상을 보는 이들을 기쁘게 해 준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지속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 포트’는 끈기와 인내로 장애인임에도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판매실적을 올렸습니다. 그가 다시 일어날 때 기뻐해 준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그에게 샌드위치 위에다도 끈기와 인내라는 글을 케첩으로 써줄 정도였습니다. 그는 실패하는 고통을 다시 일어설 때 어머니를 기쁘게 한다는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중국의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도 못하고 얼굴도 못나서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그가 존경하는 인물은 포레스트 검프입니다. 비록 영화의 주인공이지만, 불구의 몸으로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그의 모습을 존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윈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며 자신이 포레스트 검프와 비슷해지고 있다는 느낌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고 그 일이 그와 닮게 만든다면 그 기쁨이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장 큰 행복이 복음을 전하다 거절당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가장 닮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와 닮는 방법이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는 모습이라면 그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길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합시다. 그러면 거절당하고 실패할 때 다시 일어설 기회가 생긴 것에 묘한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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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정민 베르나르도 교수님의 ‘다산과 연암’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산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자세로 학문을 했고, 글을 썼다고 합니다. 격물치지는 흐트러진 것을 바르게 하면서 앎에 이른다는 의미입니다. 다산의 글은 그래서 늘 정갈하고, 정확했습니다. 다산의 대표작인 ‘목민심서(牧民心書)’는 관리가 행해야 할 책임과 사명을 제시하였습니다. 관리는 목민심서의 가르침대로 행하면 되었습니다. 그 책에서 더 보태거나 뺄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함을 추구하였습니다. 다산은 완벽함을 추구했기에 그를 따르는 사람은 창의적으로 먼가를 할 필요가 거의 없었습니다. 저도 다산과 같은 본당 신부님을 모신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신학, 문학, 음악, 건축, 언어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어떤 주제를 이야기하여도 막힘이 없었습니다. 제게도 ‘팡세, 그리스 철학사, 예수’와 같은 책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산보도 늘 같은 시간에 정확하게 하였습니다. 신부님의 뜻을 따르기만 하면 되었기에 좋았지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져서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연암은 ‘갈 길과 요령’의 자세로 학문을 했고, 글을 썼다고 합니다. 다산이 조선이라는 ‘틀’에서 격물치지를 했다면 연암은 조선을 넘어 동아시아의 ‘틀’에서 갈 길과 요령을 생각했습니다. 조선이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정책을 세운다면 위기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연암은 만주 벌판을 거닐면서 드디어 ‘울음’을 터트릴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첫울음’을 터트리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났기 때문이듯이, 연암은 끝없이 이어지는 만주벌판을 보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해 한번 ‘울음’을 터트려도 좋겠다는 포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연암의 ‘열하일기, 호질, 허생전, 양반전’은 다산의 격물치지는 아니지만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판단한 자신의 생각을 요령껏 기록한 것입니다. 연암이 다산처럼 기록했다면 당시 조선의 법정에서 유죄판단을 받을 수 있고, 자칫 죽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연암은 배고픈 이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이 아닌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안내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연암에게는 박제가, 이덕무와 같은 창조적인 문하생들이 있었습니다.
글을 쓸 때에 다산의 ‘격물치지’와 연암의 ‘갈 길과 요령’이 조화를 이룬다면 환상적인 작품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산의 격물치지를 따르기도 어렵고, 연암의 창조적인 갈 길과 요령을 배우기도 어렵습니다. 저 자신 매일 ‘묵상’을 나누지만 ‘갈 길’을 모르면 시간이 흘러도 글을 쓰기 힘들었습니다. 흐트러진 마음에서는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금이나마 흉내를 내려 할 뿐입니다. 오늘 교회는 ‘복음사가’ 루카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루카는 우리에게 두 개의 성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루카 복음서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입니다. 루카 복음이 우리에게 ‘갈 길과 요령’을 알려 준다면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격물치지’를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루카는 성령의 감도를 받아 글을 썼기에 ‘갈 길과 요령 그리고 격물치지’가 조화를 이룬 성서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인들에게 ‘갈 길’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요령’은 산상수훈의 가르침과 주님의 기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격물치지’는 겸손과 인내로 ‘칠죄종’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루가 복음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만남’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루가복음 1장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은총이 가득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도시도다.’라고 축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처럼 상대방을 축복하고,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하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순명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루가복음 23장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엠마오는 어느 시간과 장소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 엠마오입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시고,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엠마오입니다. 구원은 어느 곳을 향한 여정과 목적지가 아닙니다. 구원은 지금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 주님과 함께 삶을 살아가면 그것이 바로 순례이고, 그것이 바로 구원의 시작입니다.
이 모든 만남이 지향하는 곳은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축복과 은총, 사랑과 기쁨이 시작됩니다. 십자가의 끝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죽음의 길도 감사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나의 삶에 주어지는 ‘십자가’ 그것은 바로 은총의 길, 구원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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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1-9: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루카 복음사가는 바오로 사도의 동반자로서 복음서를 썼고 사도행전에서 교회 초기부터 바오로가 로마에 체류하기까지의 복음 선포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루카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의 내용의 목격자도 아니었다. 바오로와 같이 2~3차 여행에 수행하였고,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후에 희랍으로 건너갔다. 루카는 전승에 의하면 장가가지 않고 살았으며 84세에 하늘나라에 가셨다고 한다. 루카 복음은 소로 표상되는데 그것은 복음의 시작이 성전에서의 예절로 시작되기 때문에 제사 때 쓰인 소를 의미하는 것 같다. 성인은 화가와 의사의 수호성인이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고 복음을 전파하면서 그들이 지켜야 할 바를 말씀하신다. 우선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것들로 마음을 어지럽혀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여장도 가볍게 차리라고 하신다. 물품도 갖지 말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라고 하신다. 또한, 대접을 받으려 하지 말고 주기 위해서 떠나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은 자기 일에 충실해야지 사소한 일에 관심과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하신다. 또 수입을 바라고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고, 더 좋은 음식, 더 나은 숙소를 바라거나 찾아다녀서도 안 된다. 손님 접대는 당시에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거룩한 의무였다. 낯선 여행자가 마을에 들어왔을 때 손님 접대는 의무였고 풍습이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현세적인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의 전파만을 위하여 주님께 의지하며 헌신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신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기 위한 일꾼이 적다는 것이 예수님의 아쉬움으로 보인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2절) 그러면 우리는 오늘 똑같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어떠한 일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지금 상황으로는 성직자들도 부족하지만, 우리 신자들로서도 일꾼이 너무나 부족하다. 일꾼이 부족하면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며, 일꾼도 어떤 질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일꾼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서로의 축복과 구원을 위해 일을 할 사람이고, 그런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으니,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그래서 하늘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도록 일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더 많은 훌륭한 일꾼이 나오도록 우리 자신부터 먼저 투신하도록 하고 현재와 미래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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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삶’으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2-9)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날이 다가오는데 그 나라의 건설에 참여하는 사람이 적다.”라는 뜻이고, 다시 이 말씀은, “종말과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데 믿고 회개하는 사람이 적다.”, 즉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적다.”라고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사람들에게 회개와 구원의 길을 알려 주고, 사람들을 그 길로 인도하는 활동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참여하는 일꾼을 모집하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일꾼이라고 표현하지만, 그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이고, 동시에 자녀의 일, 즉 ‘나의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일하는 것은,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라는 말씀은, ‘기도하면서’ 복음 선포 활동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라는 말씀은, 복음 선포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박해와 고난을 겪을 수도 있음을 예고하시는 말씀인데, 이 말씀에는, 복음 선포 활동을 하다가 이리 떼 가운데에 놓여 있는 양들 같은 처지가 되더라도, ‘예수님의 양’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말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리 떼’는 박해자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기는커녕 신앙인들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박해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리 떼’는(박해자들은) 적이 아니라 ‘잠재적인 예비신자들’입니다. 회개시켜서 구원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복음 선포 활동이 바로 그 노력인데, 우리는 ‘말’보다 ‘삶’이 먼저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라는 말씀은, 세속의 물질에 의지하지 말고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에게만 의지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방법들 가운데에서 첫 번째는 그렇게 “하느님만 믿는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믿음과 삶이 하나가 되어야 복음 선포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속 일로 시간낭비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육적이고 세속적인 일에 매여 있지 않고 신앙생활에만 집중하는 모습은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두 번째 방법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라는 말씀은, 복음 선포 활동은 ‘주님의 참 평화’를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활동이기도 하다는 가르침입니다. <복음 선포와 평화 선포는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해 주려면 자신이 먼저 그 평화를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 안에 없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참 평화’를 누리려면, 이리 떼 가운데에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주님의 양’으로서 살아가야 하고, 세속의 물질에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 믿어야 하고, 허무하고 쓸데없는 세속 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참 평화’를 누리는 모습은,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세 번째 방법입니다.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복음 선포 활동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복음을 전해 주는 것까지만 신앙인이 할 일이고, 그 일의 결과는 주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들을(자녀들을) 당연히 먹이신다는 뜻입니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라는 말씀은, “주는 대로 먹어라.”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신앙인을 받아들여서 숙소와 음식을 제공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천사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 대접이 아주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별로 안 좋은 것일 수도 있는데, 어떤 대접을 받든지 간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믿고, 겸손하게,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라는 말씀은, 복음 선포는 곧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는 모습은,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네 번째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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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에 선포되는 복음은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의 선발과 파견, 그들을 위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루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앞서 9장 1-6절에서 열두 제자의 파견을 다루었는데, 여기에서 되풀이하면서 이 두 이야기는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파견받는 이들을 향한 가르침에서 많은 공통 요소가 발견됩니다.
예수님께 선발된 일흔두 명은 ‘사도’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를 뜻하는 그리스 말 ‘아포스톨로스’가 직접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보내다’ 또는 ‘파견하다’로 옮긴 그리스 말 동사 ‘아포스텔로’는 일흔두 명을 ‘사도’로 볼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10,3 참조). 루카 복음 9장 13절에서 사도의 대상이 ‘열둘’에 한정되었다면, 여기에서는 ‘일흔둘’로 확대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파견된 제자들, 곧 사도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이들(예를 들면, 군중)과 구별되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부여하신 권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권한’ 또는 ‘권위’를 뜻하는 그리스 말 ‘엑수시아’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루카 복음 10장 19절에서 언급된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일흔두 명의 사도에게 권한이 부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 권한을 받아 그분께서 보여 주신 것처럼 병자를 고쳐 주며 복음을 선포할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성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사도’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보여 주신 신비를 설교와 기록을 통하여 세상에 알리도록 루카를 선택하셨습니다(본기도 참조). 우리도 예수님의 ‘사도’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복음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사도로서 정체성을 확고하게 세워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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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하신 말씀을 오늘 복음에서 듣습니다. 오늘 축일을 기리는 루카 복음사가는 특이하게도, 내용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개의 제자 파견 사화를 전합니다. 하나는 ‘열두 제자’의 파견과 관련이 있고(9,1-6 참조),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에 해당하는 ‘일흔두 제자’의 파견 이야기입니다(10,1-12 참조).
후자는 루카 복음에만 나타나는데, 루카는 왜 열두 제자의 파견 외에 일흔두 제자의 파견을 또 이야기하였을까요? 그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하는 데에, 열두 명의 파견만으로는 그 수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더 많은 이의 파견으로 더욱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은 이미 믿음을 가지게 된 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계속 널리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복음 선포에 헌신할 일꾼들이 어느 시대든 늘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성소자들이 크게 감소하는 위기에 맞닥뜨려 있습니다. 물론 학령 인구 자체가 줄어든 영향도 있겠지만, 신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수는 해가 갈수록 큰 폭으로 줄어드는 실정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이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어련히 아시고 일꾼들을 부르시겠지.’ 하며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지녀서는 안 됩니다.
그 일꾼들을 주님께 청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할 이들을 지속적으로 키워 내는 일에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성소자 육성을 소홀히 생각한다면, 이는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일꾼들을 많이 보내 주십사 주님께 간절히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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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님]
<선교사들을 위한 복음사가, 루카>
마르코는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당신 목숨을 바쳐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신 예수님을 알아야 비로소 그분을 온전히 믿을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복음서를 썼습니다.
마태오는 십자가의 신비에 대한 마르코의 깨달음 위에서, 믿는 이들이 모인 교회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분의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상세히 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루카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한 선교적 안목에서 마르코와 마태오가 미처 전하지 못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루카는 이 세상에 출생하시는 첫 순간부터,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루카 복음 1장 35절), 구원자이시며 또한 주님이심(루카 복음 2장 11절)을 강조하였고, 성모 마리아께서만 아시는 출생의 신비 즉 성령으로 인한 잉태와 역시 성령의 개입으로 탄생한 세례자 요한과의 기묘한 만남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는 선교란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는 손길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뜻이 됩니다. 또한 마르코나 마태오가 하느님 나라 또는 하늘 나라로 소개하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가난한 이들이 들어야 할 복음으로 소개하였습니다(마태오 4장 18절-19절).
루카는 같은 이유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로 양성하시고자 부르신 열두 제자를 종종 ‘사도’라고 앞당겨 부릅니다. 이미 사도들이 활약하는 교회 시대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교회 안에서 수행해야 하는 임무 (루카 복음 9장 13절 ; 12장 41절-48절 ; 22장 14절-20절), 그리고 그들이 사명을 수행할 때에 도와줄 협조자들까지 고려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10,1. 그리고 8,2-3. 참조)
그래서 복음서들 사이의 차이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가르침이나 처신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태도와 처지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루카의 관점에서 사도란 단순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분을 뵙고 체험했으며 증언하는, 다시 말하면 그분처럼 복음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선과 용서, 기도와 자비가 강조되는 것도 다 같은 맥락입니다.
선교란 수동적으로 예수님을 마음속으로 믿는 것을 넘어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과 활동으로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교 활동은 사도직입니다. 세상은 사도직을 수행하는 믿는 이들의 삶을 통해서 복음을 듣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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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가시려는 고을과 고장으로 제자들을 보내시며”>
하느님의 계획은 높고 또 오묘하다는 사실을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의 삶을 보면서 더욱 느끼게 해줍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박해하던 유대교 신봉자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또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해서 온 삶을 바쳐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를 맡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오로는 서로 살아간 시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와 같이 감정도 있고 개개인이 처한 상황에서 감정의 갈등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콜로새 서간에서 ‘루카와 데마스’(4장 14절) 이름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티모테오에게 보낸 서간에서 데마스는 떠나고 루카만이 남아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의 서간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51년 경에 사도 바오로의 제2차 전교여행 때에 그를 수행했으며 3차 때에도 수행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61-63년까지 로마에 있으면서 수인이 된 바오로 곁을 지켰고 66년 바오로가 순교한 이후에 그리스로 건너간 것으로 보입니다.
80-90년 경에 이방인들을 위해 그리스에서 주님의 복음을 저술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승천으로부터 바오로가 수인 생활한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사도행전과 루카복음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초대교회에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선교여행을 떠나 안티오키아 공동체에서 지내며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펼칩니다. 그러나 2차 여행 때에는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갈라져 개인적인 활동을 하게 됩니다. 안티오키아로 돌아오는 길에 바르나바는 요한 마르코와 동행하려고 했지만 사도 바오로의 반대로 서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루카는 끝까지 바오로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와 공동체를 통하여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여러공동체의 모습들을 얻어 듣게 되었고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들을 자칫 잘못하면 신앙 안에서 길들여진 로봇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성격과 개성들이 있고 서로 일치하기도 하지만 갈라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치에서는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지만 그들의 불일치에는 눈살을 찌푸리기도 합니다. 주님의 공동체는 거룩하지만 그 안의 구성원들은 죄인들인 것입니다.
불안정하고 갈라지지 쉬운 죄스러움도 있지만 성령께서는 이러한 지체들을 하나로 묶어서 선으로, 사랑으로 살아있는 유기체로 이끌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루카는 선의 공동체 뿐 아니라 인간적인 흐름으로 갈등을 겪는 모습도 겪은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초대 교회의 믿음과 성모님에 대한 신심을 재조명하며 그가 사도 바오로와 동행하며 들었던 이야기들, 또 공동체에 전해오는 전승들을 토대로 그는 복음을 집필할 수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공동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치유와 말씀 그리고 그분의 삶과 어머니와 그 가족관계를 소상하게 전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사랑이 루카의 말씀과 기록을 통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루카 복음에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일흔 두 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당부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복음선포를 위한 진정한 일꾼이 되기를 주님께서는 간절히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돈주머니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사하지 말고 곧바로 복음선포에 전념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평화를 전하는 사도가 되기를 바라시며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알리라고 이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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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눈팔지 마라>
고등학생 때 자취생활을 하였습니다. 신부가 된 후에도 특수 사목에 종사하다 보니 자취 아닌 자취생활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안타까웠는지 많은 분이 맛있는 반찬도 해 주시고, 곰국도 끓여 주셨고 좋아하는 미역국도 준비해 주셨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가끔 냉장고에 있는 국을 꺼내 보면 국물에 기름이 떠올라 있습니다. 따뜻하게 데우면 어느새 기름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좋은 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콩깍지가 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잔소리가 시작됩니다. 불평불만이 늘어 갑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도 그렇습니다. 뜨거운 열정이 있을 땐 기도 시간도 많고 성경도 읽으며 성체조배도 하고, 활동도 적극적입니다. 열정이 식으면 내 것 먼저 챙기고, 하느님의 몫을 뒤로 밀치게 됩니다. 해야 하는 일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그다음에 하느님의 것을 챙기려 하니까 찜찜하기도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랑의 열정을 다시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뽑아 파견하시면서 분부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10,4).
이 말씀은 온전한 투신을 위해서는 한눈팔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선교 사명을 받았으면 그것에 충실해야지 돈주머니나 식량 자루,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장황하고 의례적인 인사에 허비할 틈도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안쓰러운 마음이 있지만 내 사랑이 그 안에 함께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요한15,9-10). 엉뚱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근본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분심, 잠념에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일상 안에서도 내 본업이 무엇이고 그것에 충실하고 있는가? 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다른 부업에 마음을 더 쏟는 것은 아닌지…….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그리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본분이 있고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실, 근본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입니다. 한눈팔지 말고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 혼자만의 구원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을 구원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10,2)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꾼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는 능력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선교의 사명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이 시대에도 기왕이면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은 채 더욱이 길에서 인사하느라 지체함도 없이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또 그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일꾼이 나오길 희망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한,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부자에게나 모든 계층과 연령의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온갖 뜻을 꾸준히 전파하도록 합시다!”(성 그레고리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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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신부님께서 신자들과 함께 있다가 갑자기 방귀를 ‘뽕’ 꾸고 말았습니다. 신자들 앞에서 소리가 났다는 민망함이 있었지만, 그래도 방귀 뀌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이해해 주겠지’라는 마음으로 웃으면서 “죄송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어이없는 소문을 들었답니다. ‘우리 신부님께서 신자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바지에 똥 쌌다.’라는 소문입니다.
사실 소문의 속도는 엄청나게 빠릅니다. 그리고 그 소문은 계속해서 살이 붙어서 사실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에 특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지요. 가장 재미있는 말이 ‘뒷담화’라고 하지만, 재미를 떠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느님 마음에 드는 ‘성인’의 길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어떻게 전하고 있었을까요? 분명히 엄청나게 빠른 전파 속도를 가지고 있는 ‘말’인데, 우리는 다른 부정적인 말에 대해서는 소문의 속도에 더하고 있지만 정작 주님의 기쁜 소식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과거의 우리 신앙 선조들은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으면서도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자유가 있는 지금을 사는 우리는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셔서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둘씩 보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일꾼이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이 소식은 우리 구원과 연결되어 있어서 빨리 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소식을 전하는 일꾼으로 살고 있을까요? 아니면 이 소식이 아닌 다른 소식을 전하는 주님의 반대자로 사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루카 복음사가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기록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성모님과 함께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더 가까이 그리고 생생하게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용감하게 세상에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쳐나게 하는 주님의 훌륭한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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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파견된 사람>
루카 10,1-9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파견된 사람>
가고픈 곳이
아니라
가라하는 곳으로
그리하여
보내시는 분께서
몸소 가시려는 곳으로
있고픈 곳이
아니라
있으라는 곳으로
그리하여
보내시는 분께서
몸소 계시려는 곳으로
하고픈 일이
아니라
하라는 일을
그리하여
보내시는 분께서
몸소 하시려는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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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지금 평화의 복음 선포가 절실하다>
여러 번 제가 말씀드린 바이지만 오늘 우리가 들은 루카 복음은 일흔두 제자 파견 얘기이고 열두 사도를 파견한 얘기와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파견된다는 면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가라는 것은 같지만 일흔두 제자 파견 얘기에는 “가거라”는 명령어와 인사하지 말라는 말과 평화를 선포하라는 말이 더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방인을 위한 복음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동족에게 가는 것보다 더 멀리 가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복음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이방인에게 가야 하기에 단호히 명하시는 걸 겁니다.
가는 길에 인사하지 말라는 것도 먼 길 가야 하고 이방인에게 가야 하는데 이별 인사하지 말고 한가롭게 동네 사람들과 노닥거리지 말라는 것일 겁니다.
열두 사도 파견과 비교해서 더 중요한 차이점은 평화를 빌어주라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평화를 빌어주는 것은 우리가 일본에 가서 평화를 빌어주는 것과 같고, 프란치스코처럼 전쟁 가운데 있는 적국에 가서 평화를 빌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프란치스코 시대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십자군을 일으키고 이슬람과 전쟁을 하고 있었는데 프란치스코는 그 와중에 평화를 가지고 술탄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처럼 이방인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방법도 평화로워야 하고 목표도 평화여야 합니다.
우리는 요즘 이러한 복음 선포가 왜 중요한지 절감합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에 전쟁이 확전 일로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강경파들이 연정을 펴고 있고, 하마스도 강경파 이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생각에는 평화가 없고 오직 전쟁에서 승리밖에 없습니다. 위기 상황을 조장하고 그러니 자기들을 지지하라고 국민을 압박하며, 군수 사업을 일으키고 군비 경쟁을 합니다.
그러니 이런 강경파와 군수업자들이 득세하지 못하도록 평화의 복음이 사람들 가운데 전파되어야 하고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그래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중동 전쟁을 걱정할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위험합니다.
이 정부는 힘들게 체결한 9, 19 군사합의를 깨겠다는 사람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하고 K-무기 수출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언론을 통해 여론을 조성하며 9, 19 군사합의의 파기를 반대하는 여론 조사가 높게 나오자 발표하지 않고 조사 자체를 중단합니다.
이 정부는 북한이 장사정포를 발사하면 그것을 요격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아이언돔과 같은 요격 체계를 갖추면 된다고 하며 그런 방어 체계 구축에 애쓰는데 물론 그런 노력도 해야겠지만 그 이전에 평화 체계를 구축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실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아이언돔이 수천 발의 미사일을 동시에 발사한 이번 하마스의 공격에 무력화되지 않았습니까?
아무튼 지금의 우리에게는 어떤 복음 선포보다도 평화를 평화롭게 전하는 복음 선포가 중요하게 되었으며,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하는 또 다른 루카 복음사가이고 일흔두 제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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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주님의 제자이자 복음 선포의 사도로-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시편 145,17).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답은 하나입니다. 교회에 속한 믿는 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교회의 사람,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으로,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이자 밖으로는 복음 선포의 사도인 선교사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성 루카 복음 사가 축일에 은혜로이 확인하는, 주님께 불림받은 자, 파견된 자로서의 우리의 복된 신원이자 존재이유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 역시 선택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원을 자각하여 하루하루 날마다 선택하여 살 때 아름답고 자유롭고 풍요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바로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기념하는 성 루카 복음 사가요, 제1독서 ‘티모데오에게 보낸 둘 째 편지’의 주인공 성 바오로요, 여기 독서에서 언급되는 오늘 기념하는 성 루카 복음 사가입니다.
그리고 10월 ‘묵주기도 성월’ 첫날, 10월1일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1873-1897)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예전에는 포교사업의 수호자 성녀 대축일로 지냈습니다. 성녀 탄생 150주년을 맞이한 올해 교황님의 53개 항목들로 이뤄진 “사도적 권고”중 감동적인 대목과 마지막 기도문도 나눕니다. 교황님이 얼마나 성녀를 귀히 여기며 사랑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오, 예수님, 나의 사랑, 나의 성소, 마침내 나는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나의 성소는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교회 안에서 내 자리를 발견했습니다. 나에게 이 자리를 주신 분은 오 나의 하느님 당신이십니다. 나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안에서 나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꿈은 실현될 것입니다.”
그대로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도 참 좋을 성녀의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열렬하고 한결같은 사랑이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인 우리의 우선적 자질이자 조건입니다. 이어 마지막으로 바치는 교황님의 아름다운 고백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 데레사여!
교회는 복음의 빛을,
복음의 향기를, 복음의 기쁨을 반사할 것을 필요로합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장미꽃들을 보내주소서.
당신처럼 되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안에 머물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날마다
당신의 거룩함의 ‘작은 길(little way)’을 닮게 하소서. 아멘”
오늘 기념하는 성 루카 복음 사가와 제1독서의 성 바오로 사도의 탁월한 주님 사랑 역시 참 놀랍습니다. 늘 주님과 함께 사셨던 성인들이요, 언제 어디서나 이들의 영원한 정주처는 주님이였습니다. 제1독서에 소개되는 바오로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주님과 깊이 결속된 친밀한 우정관계인지 깨닫습니다. 모두 다 사라진 뒤에도 끝까지 바오로와 함께 하신 주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늘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짧게 언급되는 구절에서 정말 성 바오로에게 루카는 얼마나 ‘의리의 협조자이자 동역자’인지 깨닫게 됩니다. 다시 안티오키아의 그리스인 의사였던 루카의 자랑스런 행적을 소개합니다. 말 그대로 지칠줄 모르는 복음 선포의 일꾼이었습니다.
성인은 51년에 있었던 사도 바오로의 제2차 선교여행을 수행하며 힘껏 도왔고, 57년까지 필리피에 머물면서 공동체를 지도한후 성 바오로의 제3차 선교여행때도 동반합니다. 성 바오로가 카이사리아의 감옥에 갇혔을 때도, 로마로 호송되어 감옥에 갇히고 재차 갇혔을 때도 늘 곁에 있었던 의리의 협조자 루카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인은 성모님을 만나 뵈었고 맨처음 성모님의 초상화도 그렸다 합니다. 그래서 루카복음서에서 성모님을 실감나게 묘사하는가 봅니다.
성인은 루카복음서에 이어 사도행전을 썼으며, 여기서 전반부는 성 베드로에 집중했고 후반부는 성 바오로에 집중하지만, 놀랍게도 정작 자신에 관한 구절은 하나도 찾을 수 없을만큼 겸손함을 견지한 성인이었습니다. 성인은 성 바오로의 순교이후 온갖 고난을 참아내며 주님을 섬기다가 84세를 일기로 순교로 마감했다는 전승입니다. 사실 성인들은 순교와 상관없이 한결같이 고난으로 점철된 순교적 삶에 항구했기에 모두 순교자로 인정해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성 루카는 복음서에서 자비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에 대해 특별히 강조했으며 의사와 화가의 수로성인으로 공경을 받습니다. 성경에 언급된 네 생물에서 유래한 상징에 의하면 성 루카는 황소의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성인의 침착하고 강인한 성격과 주님과 사도 성 바오로를 위한 희생과 충직함을 상징합니다.
언젠가 평신도 신학자인 김근수 요셉 형제님의 “신부님의 강론 스타일을 루카와 같습니다.”라는 극찬에 고무된 적이 있는데, “소(牛)띠”인 저이기에 마음 깊이 받아들이며 흡족해 한 기억이 선명합니다. 우보천리牛步千里, 호시우행虎視牛行은 제가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소와 소나무이고 저 또한 그렇습니다. 제가 소씨라면 성명은 무조건 소나무로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믿는 이들이라면 자주 확인하여 신원을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수도자로 하면 안으로는 제자, 밖으로는 사도,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입니다. 분리된 것이 아니라 관상과 활동처럼 한 실재의 양면을 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불림받아 주님곁에 제자로 머물던 일흔 두제자들이 세상에 파견됩니다.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수확할 밭은, 복음선포의 장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입니다. 수확할 밭의 일꾼을 청하기에 앞서 내 친히 주님의 일꾼이 되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살 때 주님은 선물처럼 당신 일꾼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이리떼 세상 가운데 양들 같은 순수와 열정의 주님의 일꾼들이자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주님의 일꾼이자 주님의 전사인 사도요 선교사는 하느님의 섭리와 이웃들의 환대에 의존한 ‘무소유의 전사’, 또 주님의 평화를 선사하는 ‘평화의 전사’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사도이자 선교사이며 주님의 전사인 우리들은 하느님 나라의 꿈을, 비전을 지닌 사랑의 전사임을 깨닫습니다.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 말고, 어느 곳에 머물든 그곳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말하여라.”
그대로 이는 하느님 나라의 꿈이 실현된 제자들인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죄도많고 병도 많고 이리떼 괴물들도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의 선포에 앞서 주님의 힘으로, 성령으로 완전무장하여 내 친히 내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가 되어 살면서 주님의 평화와 주님의 치유를 선물하는 것입니다.
주님 친히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된 우리를 통해 세상에 평화를, 치유를 선물하십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치유의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 모두 힐링하시어 세상에 당신 평화의 전사로 파견하십니다. 미사야 말로 주님의 참 좋은 힐링센타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시편145,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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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 10,2)
<예수님을 닮은 일꾼!>
오늘 복음(루카 10,1-9)은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일꾼이 적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9)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은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따라서 '일꾼이 적다.라는 의미가 우리 안에...
'예수님을 닮은 일꾼!'
'예수님의 마음으로 일하는 일꾼!'
'예수님의 일을 하는 일꾼!'
아픈 이들, 특히 '마음이 아픈 이들을 위해 일하는 사제들!' '성령의 흘러넘침인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일하는 사제들이나 수도자들!' 그리고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려는 신자들!'
바로 '이런 모습을 지닌 일꾼들이 적다.' 라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본당 사목자가 기뻐야 신자들도 기뻐합니다. 본당 사목자와 신자들이 기뻐야 세상 사람들, 곧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기뻐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사명, 곧 '예언직의 실현'인 '복음화'입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직업이 '의사'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치유자이신 주님', '너와 나의 마음을 낫게하는 사랑과 자비이신 주님의 모습'을 더 부각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사랑'이 되고 '자비'가 되고 '용서'가 되는 일꾼들, 그래서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 일꾼들이 됩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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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zttSAokm1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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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 10, 2)
출렁이는
가을 들판이
추수로 비워져
갑니다.
비움과 채움을
묵상합니다.
오늘 만나는
루카 복음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말씀을 구하고
갈등 안에서
기쁨을 찾습니다.
만남과 떠남이
있고
떠남은
오히려
더 큰 만남으로
이어집니다.
감동 없는
우리 마음을
뜨거운 사랑으로
다시 초대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아름답습니다.
사랑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새
우리도
사랑이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기쁨도 벅찹니다.
하느님께서는
루카 복음사가를
믿듯 우리를
믿어주십니다.
가장 뜨겁고
가장 아름다운
믿음은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믿음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행복을
보여줍니다.
즉석 만남이
아니라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만남이 됩니다.
부자와 라자로가
그렇고
마르타와 마리아가
다시 서로를
받아들이고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아버지를 다시
만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움을 안고
언젠가 돌아올
자식을
기다려주십니다.
돌아온
그 자체로
잔치를 베푸시는
넉넉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만납니다.
성 루카 복음사가는
오늘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지나가는
헛된 시간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만남의
진가를 오늘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느님 안에
살고 있는
순수한 기쁨
영원한 사랑을
만납니다.
최선을 다해
하느님 사랑을
전한 성 루카
복음사가께
감사드립니다.
복음의 빛은
우리모두를
기쁨으로
초대합니다.
자연스레
하느님을 생각하며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합니다.
사랑은 사랑의
일꾼을 필요로
합니다.
가장 좋은
하느님 사랑을
만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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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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