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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온 선교사들, 100년의 이야기
2022.05.20 한글 옷을 입고 온 복음, 조선의 빛이 되다
① 한글과 복음우리나라 처음 전해진 성경은
한글성경 아닌 한문성경
선교사들 들어오기 전 중국과 일본에서 한글성경 번역
조선 민초들 삶 속 '입말' 익히며 복음 전했던 언더우드
“조선인에 한글도 글이라는 생각 준 것은 예수교회외다”
“한글처럼 크라스토교 쉽게 전할 수 있었던 언어 없었을 것”
한글 재발견·보급은 복음 빨리 전파하기 위한 ‘고속도로’
조선 후반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과 전쟁,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르는 근현대사에서
크리스토교와 선교사들의 업적은 우리 역사의 주류였다.
즉, 크리스토교 정신이 오늘날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가 되었다.
크리스토교와 선교사들의 활동을 빼고는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논할 수가 없다는 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크리스토교 의 전래과정과 선교사들의 업적 및 활동상이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의 섭리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그 복음이
오늘날 ‘초일류 국가 대한민국’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제대로 알려야한다.
▲아펜젤러·게일·레이놀즈 등 선교사들과 한국인 번역위원들.
언더우드는 1887년 성경을 번역 출간하기 위해
한국상설성경위원회를 구성했다.
5백 년을 이어 온 조선 왕조가 쇠망해 가던 19세기 중후반기,
조선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외우내환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조선의 연해에 서양의 선박들이 자주 출몰하면서 통상 교역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
그때마다 조선을 빗장을 꼭곡 걸어 잠갔고,
근대 과학기술로 무장한 서양 강대국들은 군함을 몰고 와서 더욱 강하게 개항을 요구하며 압박하였다.
조선의 내·외부에서 터져 나오는 변화를 갈망하는 욕구는 당시 어느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이 되어 있었다.
이미 백성들 사이에서도 근대 의식의 각성이 일어나고 있었다.
백성들의 각성은 곧 언어를 통한 교육으로 가능했다.
여기에는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한글의 우수성이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한글의 재발견과 발전에 크게 공헌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이 땅에 복음을 전파했던 선교사들이었다.
우리나라에 처음 전해진 성경은 한글로 번역된 성경이 아닌 한문 성경이었다.
영어 성경을 최초로 한문으로 번역한 이는
영국 런던 선교회에서 중국에 파견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 이었다.
현재 우리에게 친숙한 성경 단어인 ‘천국’, ‘복음’, ‘사도’ 등의 말은 모리슨 선교사가 처음 한자로 만든 것이다.
성경을 처음 번역하는 일은 그쪽 문화권의 없는 성경적 용어도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매우 고된 작업이었을 것이다.
모리슨 선교사는 영국 성서공회의 도움으로 1813년 신약성경을 한자로 번역했고,
1818년엔 구약성경 번역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 한문 성경전서를 조선에 전한 이가
영국 군함 암허스트호를 타고 서해안을 탐사한 독일 출신 귀츨라프 선교사다.
그는 1832년 7월에 조서의 해안을 측량할 목적으로 황해도 서해안 최북단 섬인 백령도와 대·소청도에 정박했고,
그때 주민들에게 한문 성경을 건네줬다.
이는 시기적으로 볼 때 토마스 선교사가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평양에 왔던 1866년보다 34년이나 앞선 일이었다.
귀츨라프 선교사는 조선 최초의 선교 사역을 마치고 떠나기 전, 아래와 같은 기도문을 남겼다.
▲귀츨라프 선교사와 그의 기도문.
“이 모든 일은 내가 늘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간구한 결과 이뤄진 하나님의 역사다.
조선에 파종된 하나님의 진리(복음)는 사라져 버릴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머잖아 주님께서 예정하신 때가 되면 많은 결실이 있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쇄국정책을 제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할 것이다.”
귀츨라프 선교사의 기도 응답은 놀랍게도 34년 후인 1866년 토마스 선교사를 통해 이뤄졌다.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평양, 대동강변에 정박한 토마스 선교사는 26세의 꽃다운 나이에
제대로 복음 한번 전하지도 못하고,
조선 병사의 칼에 찔려 죽어가는 순간 그 병사에게 던져준 한문 성경으로 복음이 전해졌다.
◇조선 민초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살아있는 '입말' 익히며 복음 전했던 언더우드
이후 한문 성경이 한글로 번역된 것은 놀랍게도 비슷한 시기의 중국과 일본에서다.
즉, 이 당에 복음으로 무장한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한글 성경이 먼저 번역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먼저 중국 만주에서는 영국 선교사 존 로스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을 받고,
조선인 서상륜·이응찬·백홍준 등의 도움을 받아 1882년 최초 한글 성경인 ‘예수성교 누가복음 전서’를 발행한다.
이어서 1887년에는 우리말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서’를 합본해 간행했다. 이것이 한글로 간행된 최초의 성경이었다.
▲1887년 최초의 우리말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서’ 표지와 본문. /대한성서공회
일본에서는 조선 유학생 이수정이
미국 성서공회 일본지부 총무인 헨리 루미스 목사의 권유로
먼저 한문 성경에 이두로 토를 단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 1884년에 발간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885년엔 최초의 국한문 성경인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를 출간했다.
바로 이 책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일본을 경유해 조선으로 들어올 때 가지고 온 성경이다.
그 후,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1892년에 완성된 ‘마태복음젼’을 시작으로 1900년 5월에 신약성경 전부가 완역되었다.
이것이 국내에서 번역된 최초의 신약전서인 ‘신약젼셔’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국내에서 한글 성경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존 로스 번역본과 이수정 번역본이 중요한 모본이 되어 신약성경 번역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언더우드가 성서 개역 작업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한글에 대한 남다른 열정 때문이었다.
1885년 4월, 서울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두 달 뒤인 6월부터 천주교인 송순용을 어학 서생으로 채용해 오로지 한국어 공부에 매진한다.
송순용은 당시 가장 탁월한 어학 선생이란 평판을 얻을 만큼 명망있는 사람이었다.
언더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도도 할 겸 지방으로 가서 현지인들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조선 민초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살아있는 입말을 익혔다.
언더우드는 1887년부터 1889년까지 매년 3차가 걸친 지방으로 전도여행을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현지인들의 입말을 배우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심지어 1889년 3월, 릴리아스 호턴과 결혼한 직후에도 신혼여행을 겸한 제3차 전도여행으로
의주에 가서 33명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했다.
▲1889년 한국에서 결혼한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는 신혼여행을 겸한 서북지방 일대의 답사에 나섰다.
사진은 선교여행을 떠나는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왼쪽 세번째와 다섯번째)와 짐꾼들.
◇“한글도 글이라는 생각을 조선인에게 준 것은 실로 예수교회외다”
언더우드가 주로 신약성경 번역에 주력했다면,
윌리엄 데이비드 레이놀즈 선교사는 구약성경 번역을 도맡았다.
어학 실력이 출중했던 레이놀즈는 그의 어학 선생과 함께 강화도에 나가 한국말로 전도를 다녔다.
레이놀즈는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20분 정도의 한국어 설교가 가능할 정도로
어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영국성서공회 조선지부장 휴 밀러는 그에 대해 “최고의 한국어 실력 소유자”라고 평할 정도였다.
레이놀즈는 전주 서문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면서
1904년 10월부터 두 명의 조선인 조수와 함께 구약성경 번역에 몰두했다.
드디어 1910년 4월 2일 오후 5시, 레이놀즈는 구약의 마지막 구절 번역을 마치자마자
서울에 있던 영국 성서공회의 대리인인 휴 밀러에게 한국말로 “Punyuk ta toiesso(번역 다 됐소)”라는
전문을 보냈다. 구약성경 39권 중 예레미야서를 제외한 38권을 5년 5개월만에 마친 것이었다.
구약과 신약을 합쳐 총 66권의 한국어 성경 가운데,
신약의 고린도전·후서 두 권을 포함해서 40권이 그의 손으로 번역된 것이다.
한글 구약성경 번역에 있어 또 한 명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알렉산더 피터스다.
구약성경을 최초로 우리말로 번역해 준 '은인'은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목사이다.
한국명으로는 '피득'이라고 부른다.
그가 1895년 조선에 와서 3년간 한국말을 배운 후 1898년 시편의 일부를
우리말로 번역해서 '시편촬요'를 출간한 것이 역사상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이 된다.
알렉산더 피터스는 1871년 러시아의 정통파 유대인(Orthodox Jew)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히브리어를 배웠고,
히브리어로 된 기도문과 시편을 낭송하며 성장했다.
그가 자라났던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밝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극심해서 유대인들은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비교적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알렉산더 피터스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를 떠나기로 결단했다.
새롭게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집을 떠난 24세의 청년 피터스는
우여곡절 끝에 멀고 먼 일본 나가사키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가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를 붙잡았다.
양을 치던 아모스를 붙잡아 예언자가 되게 하고,
다마스쿠스를 향해 가던 파울로를 붙잡아 복음의 전파자가 되게 한 하나님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피터스 청년을 붙잡은 것이다.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을 접하고 세례를 받은 후,
크리스천으로 거듭나게 하고,
그의 발길을 당시 미지의 땅 조선으로 인도하였다.
당시 조선은 구약성경 번역을 절실히 필요로 하던 상황이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조선에 구약성경을 선사하기 위해 그를 러시아에서 불러낸 건지도 모른다.
1895년 조선에 와서 3년간 한글을 익힌 그는
1898년 시편 중 일부를 우리말로 번역을 했는데,
그것이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인 ‘시편촬요’다.
피터스 목사는 구약성경 개역위원회의 평생위원으로 위촉돼
한글 성경 작업에 주도적 역할을 감당한다.
개역 작업은 1938년에 끝이 났고, 그 해에 ‘개역성경전서’가 출판됐다.
▲구약성경 최초의 한국어 번역자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와 그가 한국어를 배운 뒤 3년만에 번역한 시편촬요(1898). 맨 오른쪽은 시편촬요에 수록된 시편 23편 내용이다.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
한편,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이광수는 1917년 7월, 잡지 ‘청춘’ 9월 호에 게재한
‘야소교의 조선에 준 은혜’ 제하의 글에서 성경의 한글 번역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한글도 글이라는 생각을 조선인에게 준 것은 실로 예수교회외다.
귀중한 신구약과 찬송가가 한글로 번역되어, 이에 비로소 한글의 권위가 생기고 또 보급된 것이요.
석일(昔日)에 중국경전의 언해(諺解)가 있었으나 그것은 보급도 아니 되었을뿐더러
번역이라 하지 못하리만큼 졸렬하였소.
소위 토를 달았을 뿐이었소.
그러나 성경의 번역은 물론 아직 불완전하지마는 순 조선말이라 할 수 있소.
아마 조선 글과 조선말이 진정한 의미로 고상한 사상을 담는 그릇이 됨은 성경의 번역이 최초일 것이요.
만일 후일에 조선 문학이 건설된다 하면 그 문학사(文學史)의 제 일항에는 신구약의 번역이 기록될 것이외다.”
◇“그렇게 짧은 기간에 크리스토교 사상·용어 쉽게 전할 수 있었던 언어는 없었을 것”
한글 확산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사람은 제임스 게일(1863~1937) 선교사다.
그는 1888년 토론토 대학교를 졸업한 후, YMCA 파송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그는 남다른 언어 구사력을 가진 선교사였다.
그는 성서 번역 외에도 한영사전을 만들고, 영어로 한국사와 한국문학을 번역해 세계에 소개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이러한 문학적인 재능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선을 복음화하기 위해 파송 받은 선교사였지만, 그렇다고 조선을 서구화하는데 치중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그런 토양에 어울리는 조선의 크리스토교가 꽃 피기를 염원했다.
‘춘향전’, ‘구운몽’, ‘심청전’ 같은 한국민족 고유의 정서를 담은 소설을 영어로 번역해
서구에 소개한 이도 바로 게일 선교사다.
게일 선교사는 크리스토교 고전인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는데,
천로역정에 삽화로 넣은 등장인물들을 모두 한복에다 갓을 쓴 조선 사람들로 묘사했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천사는 마치 우리 민족 고유의 선녀를 닮았다.
이런 이유로 천로역정은 당시 조선 사회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목사 7인 중 한 명이었던
길선주 목사는 천로역정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은 후 강력한 성령 체험을 하여 크리스토교인이 됐다고 전해진다.
▲제임스 게일 선교사와 그가 한글로 번역한 천로역정.
게일은 1892년에 한글로 ‘사도행전’을 번역해 출판하는 등 신약성경 번역에도 깊게 관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한영사전’을 편찬했다.
이 사전은 현대 사전이 간행되기 전까지 거의 50년 동안 유일한 한영사전이었다.
게일은 선교사끼리만 어울려 지내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선교사는 당연히 현지인들과 어울리며 그들 속에서 지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가 서울 연동교회 담임목사로 있을 때 사랑방에서
매일 7시간 동안 사람들과 어울리며 조선 음식을 먹고 조선 문화를 익혔다고 한다.
무엇보다 게일은 한글 보급에 힘썼다.
그만큼 한글을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게일은 1909년에 출판한 자신의 저서 ‘전환기의 조선’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한글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제일 간단하다.
서기 1445년에 발명되어 조용히 먼지투성이에 묻혀 자기의 세월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누가 그것을 알아주었겠는가?
그것이 너무 쉬웠기 때문에 결코 쓰여 지지도 않고 멸시만 당했다.
여자들조차도 한글을 한 달 조금 넘는 기간에 배울 수 있었으니, 그렇게 값싼 글자를 무엇에다 쓸 것인가?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에 의해
그것은 신약성서와 다른 크리스토교 서적을 위해 준비된 채 자기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이들은 이 신비롭도록 단순한 언어를 거의 배타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 이것은 모든 것 중에서 놀라운 섭리일 것이다.
이 언어는 시간이 시계를 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크리스토도의 모든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0년 영국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사 대회에서 게일은 한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아마 한국어 이외의 어떤 언어도 그렇게 짧은 기간에
크리스토교적 사상과 용어를 쉽게 옮겨 전할 수 있었던 언어는 없었을 것이다.”
◇한글 재발견·보급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 빨리 전하기 위한 ’고속도로‘ 역할
▲최초의 한글 신약 전서인 ‘예수셩교젼서’ 각권들.
이처럼 선교사들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한글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성경과 크리스토교 관련 서적, 신문 등을 발행함으로써,
크리스토교 복음은 짧은 기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 결과 선교사들이 한글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복음을 전했던 만큼 한글 또한 선교사들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너무 쉽다‘는 이유로 조선의 양반 지식인층으로부터
4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천대와 괄시를 받아왔던 한글은,
한글이 가진 본연의 가치에 눈을 뜬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마침내 조선 후기에 광명을 찾게 됐다.
한글의 재발견과 보급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빨리 전파하기 위한 ’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한글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또 한 번의 큰 시련에 맞닥뜨린다.
바로 ’한글 사용 금지‘, ’한글 이름 금지‘라는 일제의 조선 말살정책이었다.
선교사들의 열정과 조선 민초들의 복음에 대한 갈급함으로
인해 폭발적으로 확산되던 한글이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이다.
일제는 1936년 조선 사상범 보호관찰령,
1941년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을 일방적으로 공포하고 민족적인 단체들에 대해
’사상‘과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단속에 나났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기 위한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1942년 10월 1일부터 일제히 검거한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이중화, 장지영, 최현배, 이극로 등 핵심 인물 11명을
고문 끝에 취조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했다는 거짓 자백을 받아내 내란죄로 기소하고 사법 처리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어학회는 강제 해산당한다.
해방 후 1949년 9월에서야 지금의 한글학회로 새로 태어나게 되었다.
만약 일제가 패망하지 않았다면 한글은 또다시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지 모른다.
▲조선어학회 회원들. /나무위키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을 철저히 감행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자에게는 학교 입학도 금지시키고 취직의 길도 막아버렸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한글 사용은 금지됐다.
교회도 설교는 일본어로 해야 했다
. 그럼에도 조선 크리스토교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한글 성경과 찬송으로 예배를 드렸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저서 ’한국크리스교 문화운동사‘에서
“해방 직전까지 한글을 ’공공 용어(대중어)‘로 사용한 곳은 교회 뿐이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한글을 지킨다는 것은 신앙을 지키는 것이자 곧 조선 민족과 자신을 지키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조선 크리스토교인들은 한글 성경을 생명(목숨)처럼 여겼다.
게일 선교사는 ’전환기의 조선‘에서 그걸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조선에서는 흔히 신약성서가 여인이 허리끈에 매여 있다.
유쾌한 여행길에 있는 등산가의 짐 꾸러미 속에, 작은 마을에 있는 가정의 벽장에,
그리고 거실의 선반에 쌓여 있는 것은 예수를 말하고 구원해 줄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언문으로 씌어진 책들이다.
나는 나 자신이 그 번역에 참여했던 것을 가장 선택된 은총으로 생각한다.”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 중에서 ’한글운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감리교인 주시경 선생이다.
주시경 선생은 1908년에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의 전신)을 설립했는데,
이 학회의 주요 인사들도 대부분 크리스토교인 학자들이었다.
그의 제자이자 한글학회의 핵심 멤버였던
최현배는 평소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거룩한 뜻이 크리스토교에서 실현된 것”이라고 말했다.
즉,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근본 취지, 거룩한 뜻인 민중 교화가
크리스토교 유입과 선교를 통해 비로소 성취됐다는 뜻이다.⊙
신분차별을 철폐시킨 복음, 백정을 해방하다
② 차별철폐와 복음백정 박성춘, 아들의 출세 위해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 보내
왕의 주치의, 백정을 치료...백정에서 존귀한 하나님 자녀로
복음이 바꿔놓은 삶...왕손과 백정이 한 교회의 장로가 되다
백정의 아들 박서양, 세브란스 최초의 의사 돼...양반과 결혼
‘하나님 앞에 차별 없다’는 복음, 조선 사회 근본부터 흔들어
선교사 통해 전해진 복음, 500년간 꿈쩍 않던 조선을 깨우다
▲만민공동회 장면. 백정 박성춘은 차별철폐를 위해 만민공동회에서 연설을 했다.
차별은 어느 시대나 국가를 막론하고 늘 있었다.
역사상 처음 흑인 대통령을 배출한 미국에도,
무기징역을 받은 죄수가 백인들의 차별을 뚫고 대통령에 당선된 남아공에도 법이나 제도상으로 차별이 사라졌지만,
관행 혹은 편견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차별은 끈질기게 남아공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인도에서도 고질적인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건재하다.
유럽에서도 인종과 민족에 대한 편견이 아직까지 뿌리깊게 남아 있다.
지금부터 약 140여년 전인 조선 후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가장 부당한 차별을 받았을까.
바로 백정들이다.
백정은 흰 백(白)자에 장정 정(丁)자로, 원래 중국에서는 일반 백성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천한 사람의 대명사로 변질됐다.
조선 후기까지 백정들은 같은 마을에서도 외딴 곳에 살거나 따로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이들은 일반인들이 입는 옷이나 망건 같은 것들도 착용할 수 없었다.
만약 당시 백정이 일반인처럼 행세하면 어떻게 됐을까.
순조 9년인 1809년, 당시 개성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백정이 혼례식을 치르면서 ‘감히’ 두루마기와 갓을 썼는데
그것을 본 개성 사람들이 달려와 그 백성 집을 부수고 갓을 빌려준 사람까지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관아 앞까지 몰려가 돌을 던지며 백정을 처벌해 달라고 촉구했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 사회에서 백정처럼 지독하게 차별을 받는 부류는 없었다.
그들은 ‘천민 중의 천민’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94년에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하는 동학혁명이 발생하자,
당시 김홍집 내각은 정치·경제·사회 등 국가의 주요 정책에 대한
개혁( 1894년 갑오개혁)을 단행해 신분제를 포함한 각종 폐습 타파에 나섰다.
이때 신분제가 철폐됨에 따라 백정에 대한 차별도 공식적으로는 사라졌지만,
현실은 제도만큼 빨리 바뀌지는 않았다.
갑오개혁 이후에도 백정을 차별하는 냉혹한 현실은 그대로였다.
그런 가운데 크리스토교 의 복음을 접한 한 백정을 통해 좀처럼 꿈틀거리지 않던
조선의 낡고 오래된 차별제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너만은 신식 학문을 배워서 꼭 출세해라” 백정 아버지 박성춘의 꿈
▲조선 후기 전주의 한 백정 가정의 모습.
백정 박성춘. 그는 1862년 지금의 서울 종로구 관훈동인 관자골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번 백정은 영원한 백정일 수 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백정의 딸을 만나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이름은 박봉출. 아버지 박성춘은 아들 박봉출 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백정 신세를 면하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다 미국 선교사가 세운 학교가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는데,
바로 지금의 을지로 롯데호텔 자리에 위치했던 곤골당 예수교학당이었다.
이 학당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무어가 1893년 6월에 세운 학당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교회 안에 세운 일종의 초등교육기관이었다.
당시는 서양에 대한 의심과 반감이 컸던 때였음에도 박성춘은 아들 박봉출을 여기에 입학시켰다.
“너만은 신식 학문을 배워서 꼭 출세해야 한다”는 아버지로써의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다.
선교사가 학교나 병원을 세운 것은 교육과 치료를 위한 목적도 있지만,
이를 통해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곤당골 예수교학당도 교회 안에 세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학당을 통해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교회 예배에 참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박성춘은 아들의 주일예배 참석 만큼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신식 학문을 배워 출세하면 그만이지 ‘서양 귀신’에게 아들을 내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1984년에 청일전쟁과 동학혁명이 동시에 일어나 순식간에 조선을 휩쓸며 엄청난 희생이 일어나는데,
이 해에 극심한 콜레라까지 창궐해 조선은 아수라장이 됐다.
당시 서울에서만 하루에 300여 명이 죽어 성문 밖으로 실려 나갔다.
당시 서울 인구가 20만명에 불과했으니 상당한 인명 피해였다.
이때 박성춘도 콜레라를 피해갈 수 없었다.
지금은 콜레라는 예방접종 하나로 간단히 막을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콜레라를 귀신이 가져다 주는 병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콜레라에 걸리면 병원이 아니라 무당부터 찾아 푸닥거리를 하곤 했다.
물론 병원도 없었다.
콜레라에 감염된 박성춘도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하지만 차도가 없었고, 죽을 위기에 처했다.
◇왕의 주치의, 백정을 치료하다...‘천한’ 백정에서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의 의사이자 고종의 주치의 였던 에비슨 선교사. /연합
바로 그때 박성춘 앞에 사무엘 무어 선교사와 의사 에비슨이 나타났다.
무어 선교사는 곤당골 예수교회당을 만들어 운영하는 사람이었고,
에비슨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의 의사이자 고종의 주치의 였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크게 놀랄만한 일이었다.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백정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서양인 두 명이,
그것도 왕의 주치의가 직접 왕진 가방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두 서양인은 박성춘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말을 걸어왔다.
조선의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거나 손을 잡아주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데,
박성춘은 이들이 행동에 아마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예수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들이 전하는 예수라면 믿어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결국 박성춘은 콜레라에서 완치됐고, 아들 봉출의 예배 참석도 허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두 딸들도 에비슨이 막 시작한 여학교에 보내기로 약속했다.
박성춘 자신도 무어 선교사가 인도하는 곤골당교회 예배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895년, 박성춘은 세례를 받고 ‘천하디 천한’ 백정에서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의 교회 출석과 세례를 놓고 교회 내에서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곤골당교회에 출석하는 교인 20여 명은 대부분 조선 사회의 고위직 양반들이었는데,
그들이 박성춘의 교회 출석을 문제 삼기 시작했던 것이다.
‘점잖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에 감히 백정 놈이?’ 이런 심보였을 것이다
. 당시엔 양반과 백정의 신분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의식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인사동 곤골당 교회(현 승동교회, 1983년 창립).
고위직 양반 교인들은 무어 선교사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한다.
“박성춘이 교회를 나오지 못하도록 하시오. 안 그러면 우리가 교회에 안 나올 것이오.”
하지만 무어 선교사는 그런 양반들의 요청을 단호하게 물리친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박성춘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러분들과 똑같이 교회에 나와 예배드릴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자 양반 교인들은 다시 제안한다.
“그렇다면 좋소. 박성춘이 교회에는 나오되 같은 자리에 앉을 수는 없소.
양반 자리, 백정 자리를 따로 구분해서 앉게 해주시오.”
참으로 거부하기 힘든 현실적인 제안 앞에서 무어 선교사는 잠시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이내 “하나님 앞에서는 구분이 없는데, 왜 구분을 지으려 하십니까?”라며 또 다시 거절한다.
그러자 결국 양반 교인들은 곤당골교회를 나가서 ‘홍문수골교회’라는 교회를 따로 세웠다.
분립이후 곤당골교회는 박성춘의 열정적인 전도로 많은 백정들이 출석하는 교회가 됐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천한 백정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무어 선교사에게 큰 감동을 받은 박성춘은
수원, 평택, 양주, 포천 등지를 돌아다니며 열정적으로 백정들을 전도했다.
그 결과 수원을 비롯한 전국에 수십개의 백정 교회가 세워진다.
그러던 중 곤당골교회는 1898년 뜻밖의 화재를 당한다.
그러자 나름대로 자립 기반을 갖추며 성장을 거듭해 가던 홍문수골교회가 곤당골교회에 도움을 손길을 내민다.
그러자 곤당골교회 교인들은 그대로 장소를 옮겨 홍문수골교회 교인들과 함께 한 예배를 드리게 됐다.
결국 두 교회는 하나로 합쳐져 지금의 인사동 거리에 있는 ‘승동교회’로 태어나게 됐다.
◇복음이 바꿔놓은 백정의 삶...왕손과 백정이 나란히 한 교회의 장로가 되다
▲백정 박성춘은 1985년 “백정 차별제도 철폐를 다시 확인해 달라”는 탄원서를 내각에 제출했다.
그러자 당시 내부대신 유길준은 그해 5월13일 “백정들을 차별하지 말라”는 칙령을 다시 한 번 선포한다.
/KBS 영상 캡처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을 접한 박성춘의 변화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 장로가 되거나 교회 안팎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사람은 신분에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다 존귀하고 평등하다’라는 깨달음은
자신과 같은 백정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던 조선 사회 자체를 바꿔야겠다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1911년 승동교회에서 장로 선거가 있었다.
당시 장로의 자격은 만 30세 이상으로 세례를 받은 지 1년이 지나야 했다.
그리고 교인 3분의 2가 찬성해야 했다.
지금으로서도 쉽지 않은 기준인데, 승동교회에서 이 과정을 모두 통과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박성춘이었다.
박성춘이 양반과 상민, 백정들이 다니는 승동교회의 초대 장로가 됐던 것이다.
그는 이후 노회에서 임원을 맡아 교회안팎에서 지도력을 발휘했다.
박성춘이 승동교회 초대 장로가 된 지 3년이 지나서 또 하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흥선대원군의 친척이자 왕손인 이재형이 승동교회의 장로로 뽑힌 것이다.
백정과 왕손이 나란히 한 교회의 장로가 된다는 건,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복음은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당시 조선 사회는 갑오개혁으로 명목상 신분 차별이 철폐됐지만, 일상 속 차별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박성춘은 마침내 직접 나선다.
그는 1985년 4월 무어 선교사와 한국인 교사의 도움을 받아
“백정 차별제도 철폐를 다시 확인해 달라”는 탄원서를 내각에 제출한 것이다.
그러자 당시 내부대신 유길준은 이런 백성들의 탄원을 받아들여, 그해 5월13일에 “백정들을 차별하지 말라”는
내용의 칙령을 다시 한 번 선포했다.
그러자 백정들이 기쁨에 겨운 나머지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채 종로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조선왕조 500년만에 드디어 백정들에 대한 차별이 사라졌다는 감격이 그들을 휩쌌다.
박성춘은 한동안 도포와 갓을 벗지 않은 채 잠을 잘 정도로 감격스러워 했다고 한다.
박성춘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해 11월과 이듬해 3월, 또 다시 탄원서를 올린다.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백정들에 대한 차별을 없애달라는 내용이었다.
◇백정의 아들이 세브란스 최초의 의사가 되다...양반 가문 딸과 결혼도
▲1. 박서양을 포함한 세브란스 의학교 1회 졸업생들의 사진.
2. 에비슨 선교사와 백정의 아들로 최초의 한국인 의사 중 하나였던 박서양이 함께 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사진 우측이 에비슨, 가운데가 박서양
이런 활동들을 통해 박성춘의 이름은 천민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양반들 사이에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1898년 10월 28일부터 11월 3일까지 종로에서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에서 박성춘은 연설도 하였다.
신분 차별 철폐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그를 독립협회에서도 주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박성춘은 시민대표로 만민공동회에 나가 ‘충군애국’을 주제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다.
“이 사람은 바로 대한에서 가장 천한 사람이고 매우 무식합니다.
그러나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제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방도는 관리와 백성이 마음을 합한 뒤에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천막)에 비유하면, 한 개의 장대로 받치자면 힘이 부족하지만 만일 많은 장대로 힘을 합친다면
그 힘도 매우 튼튼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관리와 백성이 마음을 합하여 우리 대황제의 훌륭한 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영원토록 무궁하게 합시다.”
하나의 장대가 아닌 여러 장대가 천막을 받치듯이,
사농공상 할 것 없이 모든 백성들이 국가를 떠받치는 기둥이 될 때
국가의 힘은 더욱 공고해진다는 내용의 명 연설이었다.
이후 박성춘은 한동안 은행 관련 일을 하다가 1933년 하나님 품에 안겼다.
한편 백정 박성춘의 아들로 태어난 박봉출의 삶도 원래는 평생 백정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느 백정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갔다.
이름도 봉출에서 ‘서양’으로 바꾼 박서양은 1987년 양반 가문의 딸인 경주 이씨와 결혼핬였다.
이 당시엔 엄청난 뉴스거리가 될 만한 일이었다.
박서양은 세브란스 의학교 1회 졸업생 일곱 명 중 한 사람이었다.
조선인 최초의 신식 의사 가운데 한 사람이 됐다.
그리고 일제 치하인 1917년에 간도로 이주해 병원을 세우고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서양 의사로 활동했다.
그는 민족교육 기관인 숭신학교를 설립해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간도 지역에 세워진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국민회’의 일원으로 항일운동도 했다.
그는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의 유일한 군의(軍醫)였다.
◇‘하나님 앞에 차별 없다’는 복음의 평등사상, 조선 사회 근본부터 흔들어
▲1901년 김창식 목사 안수기념 사진.
박성춘과 박서양만이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 차별이 없다’는 복음의 평등사상은
천한 신분의 사람들을 눈뜨게 하고 조선 사회를 근본부터 흔들어 놓았다.
황해도 수안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머슴이 된 김창식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가난을 벗어나고자 무작정 가출해 머슴살이, 마부, 지게꾼, 장돌뱅이 같은 밑바닥 일을 했다.
그렇지만 가난의 굴레를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선 땅에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들을 데려다 지하실에 가둬 놓고 하나씩 잡아먹는다더라”는 소문이 퍼졌다.
김창식은 선교사들이 조선 아이를 잡아먹는 현장을 직접 확인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마침 올링거 선교사가 머슴을 구하고 있었고,
김창식은 그 집에 ‘위장취업’을 하였다.
김창식은 날마다 예리한 눈으로 선교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지만 선교사의 수상한 행동은 좀처럼 감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선교사는 정중하고 예의가 바를뿐더러 천한 신분의 자신에게 따뜻한 눈길마저 보냈다.
그는 결국 위창취업 2년 만에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던 그 서양 선교사에게 세례까지 받았다.
복음을 접한 김창식은 선교사와 함께 자신을 바꾼 그 복음을 더 많은 조선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
그런데 1894년 여름, 평양에 느닷없는 ‘크리스토교인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김창식도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
▲김창식 목사는 '조선의 바울'로 불리며 박해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키며 모범을 보였다. /KBS 영상 캡처
그는 “배교하면 풀어주겠다”는 말을 거부한 탓에 심하게 얻어맞고 풀려난다.
이 사건은 당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다른 조선의 크리스토교인들에게 엄청난 용기를 줬다.
이 일로 인해 김창식은 ‘조선의 바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 평양에서 이 사건을 목격한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관찰사는 교인들을 사형수 감방에 가두고,
마치 다음 날 사형을 시킬 것처럼 겁을 주고는 교인들을 끌어내 배교를 강요했다.
그때 우리 용감한 김창식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미땅하다’고 응답했고, 그로 인해 아주 심한 매를 맞았다. 그 무렵 평양 거리는 돌투성이였는데, 감옥에서 나온 직후에 돌 세례를 받으며 가까스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그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처럼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신실한 증인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후 김창식은 목회자 수업을 받은 뒤 1901년 한국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고
1924년 정년 은퇴할 때까지 영변, 수원, 해주 지방을 돌며 125개 교회를 개척했다.
◇선교사를 통해 전해진 복음, 5백 년간 꿈쩍도 않던 조선 사회를 흔들어 깨우다
▲1938년 5월 16일 진주교회서 열린 경남노회 직후 기념 사진. 이 교회당은 6·25전쟁 당시 폭격을 맞아 무너졌다.
1905년 커틀 선교사가 개척한 진주교회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서부 영남을 대표하는 고을 진주는 영남 동부의 안동에 뒤지지 않는 보수적이고 완고한 고장이었는데,
신분 차별 철폐운동을 계기로 백정들이 하나 둘 진주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자 일부 교인들이 반발한다.
“백정 놈들을 모조리 내보내소.” 하지만 커틀 선교사는 양반 교인들의 이 같은 요청을 거절했다.
1909년 5월 둘째 주일, 열다섯 명의 백정 교인들이 예배당으로 들어오자 교회에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수백 명 교인 중 선교사를 따르던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몽땅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 것이다.
일반 교인들과 백정 교인들의 분쟁은 결국 49일만에 백정과 일반 교인이 따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정리가 됐다.
하지만 이 사건은 교회를 넘어 진주 지역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한 형제입니다.”
이런 선교사의 설교를 듣거나 소문을 접한 진주 사람들의 마음속에 의문부호가 한 자락씩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백정이 뭐길래?’, ‘소 잡는 것이 그렇게 죄인가?’, ‘백정이 없으면 소고기는 어떻게 먹는단 말인가?’
이러한 움직임은 1923년 4월 진주에서 시작된 백정들의 신분 해방을 위한 단체인 ‘형평사(衡平社)’ 결성으로도 이어진다.
선교사를 통해 전해진 복음은 이 땅의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 처해 있던 백정들에게도 전해졌고,
복음으로 무장된 그들은 5백 년간 꿈쩍도 않던 조선 사회를 흔들어 깨우는 엄청난 나팔수가 되었던 것이다.
암울했던 조선에 복음 전파를 통해 새 날의 여명은 그렇게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남녀평등 사상을 담은 복음, 조선 여성의 권리를 되찾아주었다
③ 여성해방과 복음여자들은 해 져서 남자들이 집에 들어온 뒤에야
밖에 나올 수 있었던 조선
칠거지악(七去之惡)·조혼·약탈혼·축첩 등 온갖 악습에 고통받던 여인들
축첩제도에 ‘메스’ 들이댄 선교사들...대부흥서 교인들이 가장 많이 회개한 죄목
선교사들의 헌신과 돌봄으로 우리나라 최초 여성 의사·과학자 김점동 탄생하다
민족 여성 지도자 김세지의 증언 “조선 여자의 해방은 크리스토교로부터 시작”
“여성차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 크리스토교 자리잡기 시작한 1880년대부터”
▲새문안교회 여성 기독면려회원들(1934년 5월 13일 촬영).
기독면려회는 기독 청년의 신앙생활과 사회활동의 증진을 목적으로 조직됐다. /새문안교회 역사관
복음의 빛이 이 땅에 비치기 전, 조선은 그야말로 어둠이었다. 집집마다 가난 또는 전염병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어느 정도 잘 사는 집은 본처와 첩 사이의 갈등으로 가정은 행복과 거리가 멀었다. 더군다나 국내 정치의 불안과 주변 열강의 침략이 맞물리며 불안한 사회 분위기는 가뜩이나 약자인 여성들을 더욱 위축되게 만들었다.
이런 조사 사회가 선교사들에 의해 새롭게 바뀌고 변화되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진 복음은 조선 여성들의 권리를 되찾아 줬다.
◇여자들은 해가 져서 남자들이 집에 들어온 뒤에야 밖에 나올 수 있었던 조선
1886년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온 애니 엘러스 벙커는
인천 제물포에서 당나귀를 타고 서울에 들어가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앞뒤로 몸을 흔들며 곡을 하는 모습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집은 나지막하고 짚으로 지붕을 올렸으며 돌로 사방을 둘렀다.
개천에서는 악취가 나고 좁디좁은 길은 여기저기 흙덩어리로 덮여 있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걸까? 악몽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곡소리가 나는 이유를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콜레라 때문이지요. 마시는 물을 조심하세요!’ 문득 움막 같은 집에서 옹기에 담긴 물을 받아 마신 일이 떠올랐다!‘
1887년 조선 땅을 밟은 프랭클린 올링거는
“지구상 가장 오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아 개화되지 않은 땅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1890년에 조선에 온 로제타 셔우드 홀은 당시 서울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25세 때 조선에 올 무렵의 로제타 셔우드 홀.
“그들은 모두 머리에서 발끝까지 흰옷을 입고 있어서 마치 그림처럼 보였다. 우리는 남자들만 볼 수 있었다.
여자들은 해가 져서 남자들이 집에 들어온 뒤에야 밖에 나올 수 있었다. 진기한 풍속이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환경에 처해서 죽어가던 조선 사람들을 보며 선교사들의 마음속엔 강한 사명감이 샘솟았다.
1897년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온 마티 잉골드는 서울에 첫발을 내딛던 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제 상륙했을 때를 잊을 수가 없다. 짐을 들려고 다투던 순박한 사람들의 얼굴도 잊을 수 없다.
그들을 잔뜩 움츠려 있었다. 이토록 힘없고 불쌍한 사람들을 보니 눈물이 났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이런 삶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
이곳에 와서 그분의 사랑과 권능을 말하며 이 백성을 축복하고 구원하게 하신 것에 감사드렸다.”
◇칠거지악(七去之惡)·조혼·약탈혼·축첩 등 온갖 악습에 고통받던 조선의 여인들
조선의 여성들은 분명 비천한 신분의 백정과는 달랐지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투명인간 취급을 받아야 했다.
여자아이들은 학교 들어갈 무렵의 나이가 되면 집안에서 격리된 채 지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를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열 살이 조금 넘을 무렵이면 결혼을 하는 ‘조혼’ 풍습이 있었다.
결혼 후에도 여성은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으로 살면서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악법에 시달리며 남성 중심의 그릇된 결혼제도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칠거지악이란 남편의 일방적인 의사표시로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이유가 되는 일곱 가지의 허물을 가리킨다.
즉 시부모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 행실이 음탕한 것, 질투하는 것, 나쁜 병이 있는 것, 말이 많은 것, 도둑질을 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여자는 남자와 한상에서 먹는 게 금지되었기에
반드시 남편이나 시댁 식구가 밥상을 물린 다음에 그 남은 음식으로 식사를 해야 했다.
이렇게 힘겨운 결혼생활을 이어가다가도 남편이 죽으면 무려 3년간이나 상복을 입고 남편을 기려야 했다.
게다가 과부가 된 여성은 남자의 도둑질 대상이었다.
밤에 몰래 침입해서 데리고 가면, 그 길로 그 남자의 여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른바 ‘보쌈’이라고 하는 약탈혼이 합법화되어 있었다.
여성은 또한 남편이나 시부모를 평생 봉양하는 게 도리였던 만큼 온갖 가사가 따라붙었다.
세탁기, 냉장고, 식기세척기 같은 것들이 있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중노동이 바로 당시의 가사였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여사는 당시 조선 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한국 여성들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을 자매로 여기는 나조차도 이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슬픔, 절망, 고된 일, 질병, 무정함, 무시, 수치심이 이들의 눈을 흐리게 하고 얼굴을 굳게 하고 주름지게 했습니다.
스물다섯 살 된 여성에게서도 아름다움 비슷한 것도 찾아보기 힘들 지경입니다.”
심지어 서른 나이의 여성이 마치 50세 할머니처럼 보였고, 보통 40세 정도가 되면 치아가 빠졌다고도 한다.
무엇이 조선 여성들을 이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물론 당시 평균 수명이 40~50세였던 점을 감안하면 남성도 예외일 수는 없다.
가난으로 인한 부족한 영양에 온갖 질병의 창궐,
막중한 농사일과 가사에 억압된 사회 분위기까지 그들의 생명을 훨씬 단축시켰을 것이다.
그 중 특히 조선 여성들의 옥죄었던 것은 ‘조혼’과 ‘축첩’ 제도였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지 여자들은 그나마 이름이 있었지만, 여성들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다.
일반 가정집 여자들은 이름 대신 ‘OO네 셋째 딸’, ‘감나무집 큰딸’ 등으로 불렸다.
결혼을 하면 출신 동네를 붙여 ‘OO댁’ 이렇게 부르는게 곧 이름이었다.
▲조혼의 경우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제도다.
당시 여자를 그야말로 빨리 결혼해서 일을 시키거나 애를 낳아 기르는 도구 정도로 밖에 인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여성의 조혼제도는 선교사들이 이화학당 같은 여학교를 세웠을 때 큰 난관에 부딪힌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겨우 부모를 설득해 데려와도 1~2년 지나면 결혼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는 게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첩은 일종의 재산으로 인식됐다.
따라서 도덕의 잣대로 첩제도를 평가하는 이는 없었다.
관리(공무원)은 물론 교사, 학생마저도 첩을 두고 있을 정도였다.
‘첩=재산’이란 인식은 첩이 한 명이 아니라 서너 명에서 6~7명까지 거닐었다는 이야기다.
첩을 많이 갖는 것은 곧 능력 있는 남자의 상징이었다.
◇축첩에 ‘메스’ 들이댄 선교사들...대부흥운동서 교인들이 가장 많이 회개한 죄목
조선의 축첩제도에 대해 가장 먼서 메스를 들이댄 사람들은 바로 선교사들이었다.
1895년 감리교 연례회의(총회)에서 오랜 논의 끝에 선
교사들이 앞장서서 축첩을 하고 있는 예비신자 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의한 것이다.
반면 당시 장로교측은 좀 더 이 문제를 연구하고 토론하기로 하고 처리를 미뤘다.
사실상 거대한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지 못했던 것이다.
감리교회인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학원에서 1906년 발간한 ‘가정 잡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다.
“우리나라는 여인을 낮게 아는 까닭으로 천리(天理)까지 잘못 알았도다.
그러한즉 여인을 낮게 대접하는 것이 사회상이나 가정 상에 아무 폐단도 없는가?
폐단이 많이 있으니 잠깐 그 폐단을 말씀하오리다.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 줄 아는 풍속으로 인하여 생긴 폐단을 말씀하려면
이로 다 셀 수 없으나 그중에서 제일 큰 폐단을 말하면 두서너 가지 있으니 아래 기록한 것과 같도다.
첫째는, 첩 두는 폐단이니
당초에 하늘과 땅이 마련되고 만물이 생긴 중에 사람은 제일 신령한 영혼을 타서
한 사나이와 한 여인이 부부 됨이 천리에 합당하니,
여인이 두 남편을 두는 것도 옳지 않고
사나이가 두 계집을 두는 것도 옳지 아니하거늘,
우리나라는 여인을 낮게 아는 까닭으로
여인이 남편을 두셋을 두면 큰 변으로 알고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되어도 개가도 못하게 하되,
사나이는 장가든 후에 의례히 첩 두기를 시작하여 칠팔 명씩 첩을 두는 사람이 흔히 있고,
지금 세상에는 첩을 두지 아니한 사람은 몇 명이 없어 첩을 아니 두는 사람은 사나이가 아니라 하여
못생긴 사람으로 돌리니 첩을 두는 까닭으로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많이 있고 불화하여 그 집이 망하고야 말고,
첩의 소생으로 난 자식은 입명이라 지목하여 선천과 후천을 가리는 폐단이 우리나라에 어떠하였느뇨?”
아마 그 당시 우리나라 여성들의 현실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글이 아닐까 한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엄청난 사회적 차별을 감내해야 하는 세상,
또 그러한 차별을 당연시 여기는 세상, 그것이 바로 100년, 120년 전 우리 사회의 모습이었다.
▲한국의 전통 혼례식의 초례 장면. /한국관광공사
축첩은 이듬해 원산, 평양 일대로 번진 대부흥운동에서 교인들이 가장 많이 회개한 죄목이기도 했다.
그만큼 만연해 있었다. 또한 당시 여성은 교육받을 권리도 없었다.
여성이 교육을 받으면 혼삿길이 막히는 것은 물론 집안이 망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성들은 귀동냥으로 글을 익히든지 아니면 남장을 하고 서당을 다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선교사들의 헌신과 돌봄, 우리나라 최초 여성 의사·과학자 김점동을 탄생시키다
이런 암흑 같은 조선 사회에서 드디어 몇몇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김정동이다.
김정동은 이화학당 출신으로 ‘최초의 여의사’라는 타이틀을 가진 인물이다.
그녀는 남편 박유산의 성과 세례명 ‘에스더’ 때문에 ‘박에스더’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1984년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불티모어 여자의과대학(현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유학한 뒤,
1900년 10월 조선에 귀국해 의사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잡지 ‘신학월보’ 창간호인 1900년 12월 호에는 다음과 같은 그녀의 귀국 기사가 실려 있다.
“부인 의학박사 환국하심. 박유산 씨 부인은 6년 전 이화학당을 졸업한 사람인데,
내외가 부인 의사 로제타 셔우드 홀 씨를 모시고 미국까지 가셨더니 공부를 잘하시고 영어를 족히 배울뿐더러
그 부인이 의학교에서 공부하여 의학사 졸업장을 받고 지난 10월에 대한에 환국하였다.
(중략) 미국에 가셔서 견문과 학식이 넉넉하심에 우리 대한의 부녀들을 많이 건져내시기를 바라오며
또 대한에 이러한 부인이 처음 있게 됨을 치하하노라.”
▲해외에서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김점동의 모습. /이화역사관
최초의 여의사인 그녀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다.
김점동은 1877년 서울에서 김홍택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집은 아펠젤러를 비롯한 감리교 선교사들의 사택 근처였다.
이 때문에 김홍택은 선교사들에게 고용돼 일찍이 서양 문물에 눈을 뜨고 있었다.
그는 조선의 여학생들을 위해 1885년에 설립된 이화학당 얘기를 듣고
자신의 네 딸 중 비교적 총기가 있던 셋째 딸 김점동을 입학시켰다.
이화학당을 설립한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는 주로 버려진 아이, 가난한 아이들을 데려다 공부를 시켰다.
열 살 난 김점동은 이화학당의 네 번째 입학생으로 들어왔다.
당시 이화학당은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뜨개질과 옷 만드는 일 등 주로 가사와 관련된 것들을 가르쳤다.
당시만 해도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만연해 있었다.
서양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는 딸이나, 딸을 보낸 부모나 불안하고 두렵긴 마찬가지였다.
김정동도 어느날 스크랜턴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저 여자가 드디어 나를 삶아 먹으려나 보다’라고 생각했다고 하니
당시 그 두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김점동은 열다섯 살이던 1891년에 세례를 받고, 자신에게 주어진 세례명 ‘에스더’로 평생 불렸다.
그녀는 열일곱 살에 로제타 홀이 남편 윌리엄 홀의 조수로 있던 아홉 살 연상의 박유산과 결혼을 한 후
로제타 홀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1986년 10월 불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졸업을 불과 몇 주 앞두고 오랫동안 폐결핵을 앓고 있던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는 커다란 아픔을 겪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끝까지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1900년 6월 의대 졸업장을 받는다.
그녀가 귀국한 뒤 1903년 셔우드 홀이 죽은 그녀의 남편을 기념해 평양에 기홀병원을 세우자
김점동은 그리고 자리를 옮겨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녀는 평양을 기반으로 틈만 나면 황해도, 평안도 벽촌으로 진료를 다녔다.
10개월 동안 무려 3000명 이상의 환자들을 돌봤다고 하니 얼마나 헌신적으로 의사로서 직분을 다했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엄동설한에도 당나귀가 끄는 썰매를 타고 환자를 찾았다고 전해진다.
▲김점동(박에스더)의 진료기록에 대한 자료. /역사채널e 영상 캡처
그녀의 인술(仁術)과 수술을 통한 치료가 입소문이 나면서 ‘귀신이 재주를 피운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김점동은 인공관을 이용해 방광 질병을 치료하는 등 의료기술 보급에도 앞장섰다.
고종은 1909년 4월, 그런 김점동의 헌신적인 노력을 치하하며 은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중한 업무 때문에 폐결핵에 걸린 김점동은 1910년 4월 13일,
불과 서른다섯 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국립과천과학관 중앙홀 입구에 있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엔 우리나라 과학기술자로 큰 업적을 남긴 33인의 위인이 새겨져 있다. 그 중 단 한명의 여성이 바로 ‘김점동’이다. 거기에는 김점동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김점동은 무료진료를 베풀고 맹아학교와 간호학교 설립에 기여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사이자 여성 과학자이다.
그는 미국 선교사이자 여의사인 셔우드의 통역을 맡아 진료를 돕다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으며,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귀국해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전문병원 보구여관과 평양의 기홀병원에서
여성 환자를 대상으로 활발한 진료 활동을 펼쳤으며, 황해도와 평안도 등을 순회하면서 무료진료 활동도 했다.
김점동은 한국인으로서 초창기 서양의 과학적 의학을 제대로 공부한 선구자였으며,
특히 여성으로서 그런 일을 해낸 여결이었다.”
◇민족 여성 지도자 김세지의 증언 “조선 여자의 해방은 크리스토교로부터 시작”
김점동이 여자 의사로서 두각을 나타냈다면,
김세지는 사회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낸 여성이다.
그녀가 속했던 애국부인회는 1919년 6월 북장로교 여신도와 감리교 여신도가 중심이 돼 평양에서 조직한 단체다.
당시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고, 국내의 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회원이 100명이 넘었고, 전도부인(전도사)을 비롯해 상당수 여성 크리스토교인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그 단체에서 재무부 부부장 직책을 맡고 있었던 여인이 바로 김세지다.
그녀는 당시 여성들의 사회참여의 표상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865년 10월 평안남도 평원군 영유읍에서 딸만 넷 있는 집안에 막내로 태어나
16세에 정씨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했지만 2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5년을 홀로 지내다가
1888년에 김종겸과 재혼을 했다.
그리고 1896년 감리교 선교사 노블에게 세례를 받고 그때부터 ‘셰디(Sadie)’라는 세례명을 얻는다.
3년 뒤엔 전도부인으로 채용돼 전국을 돌며 전도 활동을 벌인다.
▲전도부인 시절 김세지.
그 여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배경을 보면 당시 시대상과 여성상을 엿볼 수 있다.
관료 출신의 김종겸은 당시 재산도 많고 학식을 겸비한 선비였는데, 사상도 개화되어 있었다.
윌리엄 홀이 평양에 문을 연 예수교학교에 전처소생의 두 딸을 입학시켰을 정도였다.
그는 일찍이 홀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접한 친척의 권유을 받았지만
“관청에 출입하는 사람이 종교를 가질 수 있겠는가”며 거절했었다.
그러자 그 친척은 김종겸의 부인에게 전도하면서 “만일 나의 말한 대로 예수 씨를 믿으면 집안이 평안할 것이요,
남편은 주색잡기를 버리고 살림을 힘써 하여 내외간 화순하게 되리이다”라고 말했고,
김세지는 이에 선뜻 교회에 따라 나가기 시작했다.
남편 김종겸은 당시 남자들이 그랬듯 외도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가 교회에 다녀오면 구타하고 감금했다.
그러나 김세지는 굴하지 않고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
마침내 남편 김종겸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등 어지러운 정국이 계속되자 ‘야소’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김세지는 1896년 10월 노블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 ‘셰듸’. 기록에 따르면 김세지는 그때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이름은 그의 부인이 지어 준 것인데 오랫동안 이름이 없이 살던 나는
주의 은혜를 힘입어 세례 받던 날로부터 여자 된 권리 중에 한 가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로 보면 조선 여자의 해방은 우리 크리스토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전도부인이 된 김세지는 헌신적으로 가정을 심방하고, 초상집을 찾아가 직접 시체를 염해주며 전도했다.
그 중에서도 과부나 기생, 무당, 고아 등 주로 여성들을 찾아다녔다.
선교사 보고에 따르면 김세지는 매년 2천~3천 회의 가정 방문을 했고, 매년 30여 명의 새신자를 전도했다.
무엇보다 여성운동사나 민족사적으로 김세지를 주목하는 것은 그녀가 보여준 여성조직 활동 때문이다.
그녀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교회 내 여성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마침내 노블 부인의 승낙을 얻어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1903년에 보호여회를 조직한다.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여선교회라고 할 수 있다.
여성에 의한 전도와 선교도 목적이었지만, 여성의 자기 개발과 각종 구제 활동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 거둔 회비로 전도부인을 파견하거나 만주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했다.
김세지는 또 1916년엔 교회 내 과부들을 위한 ‘과부회’ 조직도 만든다. 과부의 자립과 구제를 위한 것이었다.
보호여회나 과부회는 여성이 주체적, 자급적, 자립적인 존재임을 대내외에 선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활동으로 김세지는 당시 평양의 교계 여성 지도자로서 뿐 아니라
일반 여성 지도자로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녀가 3·1운동 직후 결성된 애국부인회 조직에 임원으로 참여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대한애국부인회 여선교회 임원들. 앞줄 중앙이 회장을 맡았던 김세지.
이처럼 여성은 제대로 인간 취급을 받을 수 없었던 조선 말 대한민국 초기에도 김점동과 김세지 같은 인물들은 여성운동 차원에서만 아니라 민족적 차원에서 역사를 견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복음으로 변화된 이들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대한민국의 새벽은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여성차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 크리스토교 자리 잡기 시작한 1880년대부터"
강민준은 저서 ‘한국 근대사 산책 3: 아관파천에서 하와이 이민까지’에서 신복룡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전한다.
“크리스토교가 우리에게 끼친 가장 큰 공헌은 그것이 한국의 민권의식을 높이는 데에 공헌했다는 사실이다.
본질적으로 한국 사상에는 평등의 개념이 없다.
유교적 애민사상과 불교적 자비가 있으나 이것은 평등의 유사 개념이지 동일 개념은 아니다.
한국의 개화 운동이 시대적으로 크리스토교의 전래와 때를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크리스토교의 평등사상을 통해 가장 큰 혜택을 본 계층은 여성이었다.
크리스토교가 전파되기 이전의 한국은 여성으로서는 저주받은 땅이었으며 그들의 삶은 비참했다.
보쌈이라는 약탈혼, 축첩, 종부(씨받이), 기처(棄妻), 은둔, 학대,
전(餞, 여자는 남자와 겸상을 못하고 남자가 물린 상에서 음식을 먹는 풍습) 등의 풍습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크리스토교가 자리 잡기 시작한 1880년대부터였다.”
▲여성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조선에 반드시 YWCA를 세워야 한다는 결의로 1922년 6월 13일부터 12일간
서울 충정로 협성여자성경학원에서 제1회 조선여자기독교 청년회 하령회가 열렸다. /한국 YMCA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은 ‘전환기의 조선(Korea in Transition, 집문당, 1999)’이란 책에서 비숏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여성에게 가정의 행복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다.
한국인들에게 집(house)은 있어도 가정(home)은 없다.
남편과 가정과는 동떨어진 나름대로의 삶이 있다.
남자는 우정이라든가 바깥나들이 같은 것을 집안에 알릴 필요도 없다.
즐거움이라면 남자 친구들이나 기생들과 어울리는 것이며,
결혼 관계란 양반들의 다음과 같은 대화로써 간단히 요약될 수 있다.
‘장가야 마누라에게 갔지만 재미야 소실만한가!’”
게일은 또한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내가 아는 한 한국 여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예수를 믿기 전까지만 해도 남편과 같은 방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알지도 못했지요.
남편은 사랑채에서 식사를 했고 나는 부엌 바닥에서 먹었으니까요.
그는 하인들 사이에서 나 오고 가는 말투로 내게 말했으며 모욕적인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흔했습니다.
화가 나거나 술이 취하면 두들겨 패는 것이 일쑤여서
크리스토를 믿지 않는 여염집 아낙네와 마찬가지로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토를 내 마음속에 받아들인 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남편이 예수를 믿은 후에는 저를 때리는 일도 없어요.
우리는 사랑채에서 함께 식사하고 함께 기도하며, 내게 대한 말씨도 친절해졌고,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나눕니다. 지난날은 참으로 악몽 같았어요. 오늘날에는 하늘나라에서 사는 맛이에요.’”
이처럼 복음은 조선의 여성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되찾게 해 준 것이다.⊙
복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조선 한센인들의 눈물을 닦아주다
④ 나환자와 복음가족·공동체로부터 퇴출 당했던 ‘천형(天刑)’ 나병,
1910년 약 2만명
부모 이어 한국 나병환자들 섬기기 위해 돌아온 맥켄지 선교사 가족
美선교사가 길가 버려진 나환자 극진히 치료했던게 애양원으로 발전
같은 민족도 감염될까봐 돌맹이 던지던 나환자들을 자식처럼 대해줘
현대식 병원 시설 갖추고 미국 등지에서 새로운 치료법 배워서 도입
하나님이 파란눈 선교사들을 통해 이 땅에 베푼 거룩한 사랑과 희생
▲1920년 광주나병원 환자들의 모습
‘한센병’, 말초신경이 점점 파괴돼 감각을 잃고, 손과 발, 얼굴이 짓뭉개지는 병이다.
한때 우리나라는 살이 썩어 문드러진다고 해서 ‘문둥병’이라고 불렀고,
이 병에 걸린 사람을 얕잡아 일컬어 ‘문둥이’라고 했다.
한센병은 성경에도 자주 등장한다.
문둥병(leprosy), 문둥이(leper)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리새인으로 문둥이였던 시몬도,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로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도
모두 문둥이로 예루살렘 근방의 베다니 마을에 살았다.
이 때문에 베다니를 당시의 나환자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근현대에 와서는 ‘나병’이라고도 불렀던 한센병은
1873년 노르웨이 의사 한센(Gerhard A. Hansen, 1841-1912)이 나균을 발견하면서
한센병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병은 흔히 주로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습한 열대 기후에 속한 지역에서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환자수가 약 2백만명 쯤 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지만,
통계에 잡히지 않는 환자들을 포함하면 실제 감염자 수는 천만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가족·공동체로부터 퇴출 당했던 ‘천형(天刑)’ 나병, 1910년 약 2만명
한센병은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천포창’ 등으로 불렸고, 조선시대에 와서 비로서 ‘나병’이란 병명이 붙었다.
나환자는 정부에서 도별로 엄한 격리 조치를 실시했다.
사람들에게 전염된다는 인식 때문이기도 했고, 사람 이하 취급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나환자가 생기면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하거나 사람의 장기를 먹이는 일까지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래야만 낫는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병은 천형(天刑, 하늘의 형벌)을 의미했고, 그것은 곧 가족 및 지역 공동체로부터의 격리 혹은 퇴출을 의미했다.
1910년 한국에 한센병 환자는 약 2만 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다 1980년도엔 2만7964명,
1990년도엔 2만3833명이었다가 2017년의 경우 활동성 환자를 포함한 관리 대상은 1만33명으로 줄어든다.
보건 당국은 활동성 환자의 경우 향후 5년 후에,
관리 대상자는 향후 20년 후에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한센병 치료를 위한 현대식 병원이 도입되기 시작한 지 100년이 넘어서야
이 땅에 한센병이 완전히 사라질 상황을 맞이했다.
◇부모 이어 한국 나병 환자들 치료하고 섬기기 위해 돌아온 맥켄지 선교사 가족
▲(맥켄지 선교사 부부와 두 딸 헬렌과 캐서린의 모습.
공포의 대상이자 미신적 주술의 대상이던 나환자들을 위해
최초로 조선에 서구식 나병원이 도입된 건 1900년 초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에 의해서다.
당시 나병원 밀집 지역은 주로 영남과 호남 이었는데,
나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사들의 의료사역도
부산, 대구, 광주에 집중됐다.
부산에서는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인 찰스 어빈(Charles H. Irvin, 1862~1935)이
1910년에 영국 구라선교회의 지원을 받아 나병원을 설립했다.
1912년에 선교사인 제임스 맥켄지(James Noble Mackenzie, 1865~1956)가
이곳 나환자병원 원장으로 취임해 병원 이름을 상애원으로 명명하고 은퇴할 때까지 27년간 나환자들을 볼봤다.
1910년 2월에 조선에 들어온 맥켄지 선교사는 간호사였던 부인 메리 켈리(Mary Kelly, 1880-1964)와 함께 1910년부터 1939년까지 주로 부산을 중심으로 나환자 돌봄과 목회 사역을 헌신적으로 펼쳤다.
나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 사역은 처음에는 20명으로 시작했으나,
나병원 설립년부터 1928년까지 18년 동안 무려 4260명의 나환자들을 수용하고 치료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맥켄지 부부는 환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생활 여건을 개선하는 한편,
다양한 치료법을 연구 개발해 나환자 사망률을 25%에서 2%로 감소시켰다.
맥켄지 부부의 두 딸인 헬렌 맥켄지(Helen P. Mackenzie, 1913~2009, 한국명 매혜란)와 캐서린 맥켄지(Catherine Mackenzie, 1915~2005, 한국명 매혜영)는
부산에서 태어나 평양외국인고등학교를 거쳐 호주에서 의대를 졸업한 뒤 의사가 간호사가 되어
부모를 이어 한국 사람들을 치료하고 섬기기 위해 돌아온다.
맥켄지 선교사 가족은 1938년 2월 18일 일제에 의해 쫓겨났지만,
두 딸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좌천동에 일신기독병원이
전신인 일신기독병원을 설립하고, 은퇴할 때까지 일평생을 한국에서 헌신한다.
맥켄지 가족이 설립해 운영하던 일신기독병원 홈페이지에는 지금도 설립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의 명령과 본을 따라 그 정신으로 운영하며, 불우한 환자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육체적 고통을 덜어줌으로써 그리스도의 봉사와 박애의 정신을 구현한다.”
여수 애양원과 부산 상애원에 이어 한국에서 세 번째로 설립된 나병원은 대구의 애락원이다.
대구 애락원은 1913년 3월1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인 아치볼드 그레이 플레처(Archibald Gray Fletcher, 1882-1970)가
초가집을 구입해 환자 20여 명을 수용하면서 출발한다.
▲플레처 선교사(Archibald Gray Fletcher, 1882-1970).
1882년 캐나다에서 태어난 플레처 선교사는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의학을 공부한 뒤
27세의 나이로 조선으로 와서 평북 선천에서 활동한 의료 선교사다.
그는 1910년 대구 제중병원 원장으로 부임했지만,
대구 거리에 나환자들이 많은 걸 보고 그들을 대상으로 진료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도 많은 다른 선교사들처럼 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을 당했지만
해방 후 다시 귀국해 나환자를 대상으로 한 사역을 이어갔다.
대구 애락원은 1949년에만 1750명의 환자를 수용했을 정도로 성장을 거듭했다.
또한 플레처 선교사는 경북 지역에 200개 정도의 교회를 세울 정도로 복음 전파에도 전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美 선교사가 길가 버려진 나환자 극진히 치료했던게 오늘날 애양원의 시작
영호남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나환자 병원은 여수 애양원이라 할 수 있다.
감동적인 일화도 많이 가지고 있는 애양원은 1909년 광주에서 처음 시작됐다.
미국 선교사가 우연히 길가에 버려진 여성 나환자를 발견해
극진히 치료했던 게 오늘날의 애양원으로 발전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광주 제중병원장이었던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로버트 윌슨(Robert M. Wilson, 1880-1963)이
광주 나병원을 설립했는데, 설립 배경에는 윌슨 외에도 오웬, 포사이드 등 두명의 선교사가 더 관련돼 있다.
우리슨 선교사는 1905년 5월 워싱턴 대학 의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의대 재학 시절 중국 난징 신학교 교수이자 나중에 옌칭 대학 초대 총장과 주중 대사를 역임한
존 레이튼 스튜어트(John Leighton Stuart, 1876-1962)로부터
“한번도 의사를 만나본 적이 없는 수백만의 중국인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연설을 듣고 중국 의료선교에 자원한다.
중국 선교사로 지원했던 그가 조선 선교사로 오게 된 건
클레멘트 오웬(Clement C. Owen, 1867-1909) 선교사 때문이었다.
광주 제주병원 소속이던 오웬 선교사가 남장로회 선교본부에 의사 충원을 요청해 윌슨의 선교지가 바뀌게 된 것이다.
오웬 선교사는 1867년 7월 미국 버지니아주 출생으로 햄튼 시드니 대학(Hampden-Sydney College, VA)을 졸업한 뒤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스코틀랜드 유학을 떠났다.
해외 선교지에서는 무엇보다 의술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그는 1896년 버지니아에서 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1898년 11월5일 미국 남장로교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왔다.
이듬해인 1899년 전남 최초의 서양 의료 진료소인 목포진료소를 개설한 그는
나중에는 의료 사역보다는 복음전도 사역에 집중했다.
목포를 비롯해 광주, 나주에 선교부를 세웠는데, 특히 순천 지역에만 40여 개 교회를 세웠다.
▲오웬 선교사(왼쪽)와 오웬 기념각(오른쪽).
포사이드(Wiley H. Forsythe, 1873-1918) 선교사는
1873년 12월25일 미국 켄터키 주에서 태어나 프린스턴 의과대학 재학 시절 무디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고
졸업 후 쿠바 군의관을 거쳐 1904년 8월 10일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왔다.
전주 선교부 소속으로 전주예수병원 의사로 사역하던 그는
한 마을에서 무장괴한에게 습격당한 사람을 치료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밤늦게까지 환자를 치료하고 그 집에 머물던 중
포사이드 선교사 역시 무장괴한에게 습격을 당해 두개골이 깨지고 온몸에 상처를 입어 거의 죽게 되었다.
급히 군산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상처가 깊어져 결국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회복한 포사이드 선교사는 이듬해인 1907년 다시 목표 선교부로 부임한다.
그렇게 사역을 해나가던 1909년 4월, 광주의 윌슨 선교사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다.
오웬 선교사가 열병으로 위독하니 급히 와서 치료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목표에서 광주까지는 100km, 당시 조랑말을 타고 들과 산을 넘어 급히 달려가던
포사이드 선교사는 목적지를 20km 앞두고 길가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다름 아닌 여자 환자였는데 머리카락은 온통 떡져 있고, 냄세는 코를 찔렀다.
거기다 손가락과 발가락은 퉁퉁 부은채 문드러져 있어 한 눈에 나환자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비록 동료 선교사가 위독하긴 하지만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나환자를 이대로 버리고 갈 순 없었던 포사이드 선교사는
그녀를 말에 태우고 자기는 말을 끌며 겨우 광주까지 도착했다.
하지만 위독한 상태에 있던 오웬 선교사는 이미 자택에서 숨을 거둔 뒤였다.
한시라도 시급한 상황에 포사이드 선교사를 애타게 기다리던 오웬 선교사의 부인 등 동료 선교사들이 웬 누더기 차림의 여자를 말에 태운 채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던 포사이드 선교사의 모습을 보고 어떤 심경이었을까.
오웬 선교사의 부인은 당시 목격담을 1909년 8월 ‘The Missionary’ 지에 다음고 같이 기고했다.
“그녀의 머리칼은 수개월, 아니 몇 년은 빗지 않은 듯했다. 옷은 넝마 조각처럼 더러웠고,
손과 발은 퉁퉁 부어 있었고, 상처투성이였다.
모든 게 견딜 수 없는 악취를 풍겼다. 발 한쪽엔 짚신이, 다른 발에는 두꺼운 종잇조각으로 덮여 있었다.
그녀는 걸을 때마다 절뚝거렸다”
▲포사이드 선교사가 여자 나환자를 돌봤던 가마터 기록 사진.
당시 오웬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그 나환자 여인은 무려 10년 동안이나 나병을 앓아 왔고,
수년 전 남편마저 죽는 바람에 물전걸식으로 연명해 오고 있었다고 한다.
동료 선교사들의 냉담한 눈초리를 의식한 포사이드는 고심 끝에 광주의 벽돌 굽던 가마를 생각해 냈고,
나환자를 그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쓰던 옷가지와 침구류를 갖다 준 후 날마다 그녀를 돌보며 칠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런 포사이드 선교사의 행실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을 떠올리게 한다.
지체의 높낮음을 떠나 조선의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뿐더러
행여 병이라도 옮길까 싶어 멀리하고 기피하던 나환자를 지나가던 파란 눈의 외국인 선교사가 치료하고 돌봐 준 것이다. 이것이 결국 광주 한센병원, 오늘날 여수 애양원을 꽃피운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같은 민족도 감염될까봐 돌맹이 던지고 멸시하던 나환자를 자식처럼 대해 주다
당시 나환자는 누구에게나 기피 대상이었다.
그런데 말끔한 신사복 차림의 서양인 선교사가 고름투성이인 나환자의 팔을 붙잡고 부축하는 모습을 본
광주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그 중엔 나환자들만 보면 돌로 쫓아버리곤 했던 최흥종(崔興琮, 1880-1966)이란 사람도 있었다.
포사이드 선교사가 나환자를 부축하는 사이,
떨어뜨린 나환자의 지팡이를 마침 옆에 있던 최흥종에게 집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최흥종은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포사이드 선교사가 그 지팡이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집어 들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젊은 최흥종은 큰 충격을 받았고,
그 일생 동안 신앙의 나침반이 되었다.
같은 민족이었던 사람들도 혹시라도 자기가 감염될까봐
돌맹이를 던지고 멸시하던 나환자를 마치 자식처럼 대해 주는 것을 보고
“저것이 바로 예수교의 힘, 바로 예수의 사랑이다.
예수를 믿으러면 저 의사분처럼 믿어야 될 것이야”라는 경외감을 갖게 됐다.
이렇게 포사이드 선교사와의 만남은 평생 그를 가난하고 평든 자를 위해 한평생 헌신하도록 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최흥종은 1932년 김병로, 송진우, 조만식 등과 함께 ‘조선 나환자 근절협회’를 창설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이 조직의 목적은 조선인 나환자 전원을 수용하는 시설을 짓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조선의 나환자들에게 밎진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지금도 광주 지역에서 ‘나환자들의 대부’로 통하고 있다.
포사이드는 ‘조선의 버림받은 나환자를 내버려 둬선 안 된다’는 강한 메시지를 남긴 채 목포로 돌아갔다.
이제 나환자 사역은 윌슨 선교사에게 맡겨졌다.
광주에서 윌슨이 나환자를 치료한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많은 나환자들이 광주로 몰려들었고,
이제 조그만 수용소에 몰려드는 환자를 다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그리하여 1912년 광주 봉선리에 병원 건물을 짓게 된다.
이때부터 나환자들 사이에서는 이 나병원이 선망의 대상이 된다.
말끔한 현대식 건물과 치료 도구를 갖춘 데가 인격적인 의사들이 진료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환자들은 나병원에 수용되는 걸 굉장한 특혜로 여겼다.
전국에서 나환자들이 몰려들고, 이들을 다 수용하지 못한 환자들이 거리를 배회하자 주민들의 민원이 쇄도한다.
그래서 지금의 애양원 자리엔 여수 신풍반도로 이전했다.
이후 ‘사랑으로 양을 키우는 동산’이란 뜻의 애양원이랑 명칭은 1935년부터 사용하게 됐다.
▲애양병원 광장에 조성된 애양원 설립자 윌슨 동상.
비슷한 시기인 1916년, 일제의 조선총독부도 전남 소록도에 자혜의원을 설립해 나환자의 치료에 나선다.
하지만 운영 방식은 애양권과 사뭇 달랐다.
‘엄격한 격리’와 ‘엄격한 운영’이 특징이었다.
폭력 등 비인격적인 처사가 만연했다.
반면 애양원은 환자의 자발적 퇴원, 일시적 귀가나 외출을 허용했다.
그리고 애양원교회를 통한 자치도 인정했다.
이 때문에 여수, 순천에는 애양원 입소를 기다리며 길거리를 배회하는 나환자들이 많았다.
애양원이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제임스 켈리 웅거(James Kelly Unger) 선교사, 김응규 목사에 이어
1939년 손양원 목사가 애양원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부터다.
애양원의 역사에서 손양원 목사의 행적을 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원래 애양원 원장은 목사만이 맡을 수 있었지만
“손양원 전도사가 비록 정식 목사는 아니지만 신앙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진정한 목사이며
애양원에 속한 영혼들을 맡을 자격이 있다”고 적극 권유한 웅거 선교사의 요청에 따라 부임할 수 있었다.
손 목사는 1938년 평야신학교를 졸업했지만,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목사 임직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손 목사가 원장에 부임하기 직전에 애양원에서는 큰 사건 하나가 터졌다.
당시 증세가 심한 환자를 격리해 놓은 시설에 들어갈 때는 일반인은 물론이고
간호사들조차도 병이 옳을까봐 신문지를 깔고 출입했다. 그
런데 이런 행동에 큰 모욕감을 느낀 환자 하나가 “우리가 짐승이냐”라며 간호사 한 명을 때려 죽인 것이다.
그만큼 애양원에서조차 환자와 정상인 사이의 벽은 높고 두터웠다.
그런데 손 목사는 부임하자마자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애양원의 중증환시설에 들어간다.
그리고는 간호사를 죽인 그 환자에게 다가가 잠깐 기도를 올리고는 직접 입으로 그 환자의 고름을 빨아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애양원에서는 “틀림없이 손 목사도 한센병에 감염됐을 것”이라며 감염 검사를 실시했는데,
결과는 양성이 아닌 음성이었다.
‘검사가 잘못됐다’며 연거푸 몇 차례 더 검사를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손 목사는 “내가 나병에 걸리면 그들과 똑같아질거고 그러면 환자들이 나에게 더 거부감 없이 대할 텐데...”라며 크게 아쉬워했다고 전해진다.
▲손양원 목사 기념관에 전시된 손 목사가 나환자를 돌보는 모습.
◇현대식 병원 건물·시설 갖추고, 미국·인도 등지에서 새로운 치료법 배워서 도입
이후 애양원은 손양원 목사의 철저한 신앙지도와 생활지도에 따라 굳건한 신앙생활 공동체로 발전해 간다.
그러다가 1950년 9월 손 목사의 순교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동안 방치되다
1959년 10월1일 미국인 스탠리 토플(Stanly C. Topple)이
손 목사를 이어 애양원 제10대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새롭게 탈바꿈한다.
에모리 대학교 의과학대 출신인 토플 선교사는 졸업 무렵 한국 애양원에 의료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27세의 나이에 한국 땅을 밟고 헌신하게 된다.
당시 한국은 전후 복구가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참혹한 상황이었다.
애양원엔 의료시설은 물론 수도, 전기시설 조차 갖춰지지 않았었다.
환자 치료나 수술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
토플 선교사에 따르면 당시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의지해 수술을 해야했다고 한다.
환자들의 처지도 말이 아니었다. 나
환자들은 한센병 이외에도 각종 정신질환에 안질 등을 심하게 앓고 있어 약물 남용이 심각했다.
그럼에도 토플 선교사는 포기하지 않고 환자 치료에 땀을 쏟았을 뿐 아니라
미국의 후원을 이끌어내 현대식 병원 건물과 시설을 갖추고, 미국과 인도 등지에서 새로운 치료법을 배워서 도입했다.
또한 일반 피부과 진료를 병행해 일반인과 나환자 사이의 벽을 허무는 데도 힘을 쏟았고, 소아마비 수술도 도입해 전국에서 소아마비 환자들이 애양원으로 몰려오기도 했다.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토플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난방, 전기, 수도시설이 모두 열악했지만, 함께 지내던 환자들과 의료 봉사자들의 마음이 너무 따뜻해서 견딜 수 있었어요. 사랑과 감사를 경험한 소중한 시간이었지요. 지금도 그 때를 회상하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한편, 한센병 완치를 위해서는 신앙과 치료 뿐 아니라 재활이 반드시 필요했다. 장기간 격리 생활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플 선교사는 한센인들을 위해 양장, 봉재 등을 가르쳤으며
농사나 가축을 기르는 일 등을 할 수 있도록 땅도 나눠줬다.
당시 한센병에서 완치된 환자들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토플 선교사의 한국 이름인 ‘도성래’를 따서 마을 이름을 ‘도성마을’이라고 붙였다. 지금도 한센인들은 도성마을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지난 2016년 한 기독교방송에 출연했던 당시 토플 선교사의 모습. /CGN TV 방송화면 캡처
토플 선교사는 애양원 환자들이 전부 완치되자, “이제 한국인이 애양원을 맡아야 한다”며 1982년 아프리카로 떠난다.
그리고 수많은 애양원 출신 나환자들은 그를 아직까지 손양원 목사에 버금가는 ‘한센인의 친구’로 기억하고 있다.
한센병은 천형(天刑)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병이다.
한센병 환자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돼야 했고, 가족들조차도 외면했기에
이들이 당하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아픔을 안고 절망 속에서 신음하는 한센병 환자들의 뭉뚱그려진 손을 잡아주고, 가족과 친구가 되어주고, 치료해주는 일은
크리스토교 정신의 핵심인 ‘사랑과 희생’ 아래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파란눈의 선교사들을 통해 이 땅에 베푼 거룩한 사역이었다.⊙
16 서양 의학을 통해 전해진 복음, 병든 조선을 치료하다
⑤ 서양 의학과 복음서양 의학 눈 뜨는 계기 된 갑신정변...서양식 왕립병원 ‘제중원’ 탄생
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모든 환자들 정성다해 치료해 감동준 선교사들
에비슨 선교사 헌신·기적같은 기부로 탄생한 최초 종합병원 ‘세브란스’
‘3·1운동 민족대표 석호필’ 등 조선독립에도 기여한 세브란스 선교사들
조선민중 희망 된 정동병원...여성위해 부인병원 세운 스크랜턴 선교사
의학 발전견인·차별철폐·복음전파 역할까지 했던 선교사들의 근대병원
▲선교사들이 세운 국내 최초 서양식 종합병원이었던 '세브란스 기념병원'의 1904년 최초 설립 당시의 모습. /위키백과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구한말 사람들은 병이 나면 어떻게 했을까.
지금 같은 병원이 없었던 그 시절엔 한의원에 가서 진맥을 하고 침을 맞거나, 탕약을 먹는게 고작이었다.
좀 심각하다 싶은 병에 걸린 사람은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픈 사람들도 많았고,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죽는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에는 오늘날 간단한 백신으로 해결이 가능한 말라리아, 매독, 천연두, 이질, 결핵, 각기병, 나병, 간질 등이 심각한 병으로 인식되었는데, 병원 원인도 치료 방법도 알려지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이런 병들에 걸리는 것은 곧 목숨을 잃거나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의미했다.
이런 질병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와 더불어 극심한 가난 속에서 처절한 삶을 살았던
조선 백성들에게 선교사들이 전파한 서양 의학은 구원의 손길이었다.
◇서양의학에 눈 뜨는 계기 된 갑신정변...서양식 왕립병원 ‘제중원’ 탄생하다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1884년,
우리나라 조정은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고 외국 문물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서양을 배척하고 기존 체제를 공고히 할 것인지를 두고 개화파와 수구파가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 중 개화파는 다시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로 나뉘어 다투고 있었다.
갑신정변은 바로 이러한 갈등의 결과였다.
조선인들이 서양 의술에 눈을 뜬 건 바로 이 갑신정변 덕분이었다.
1884년 12월4일 저녁, 당시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조선 주재 미국 공사관에서 근무하던 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은 진료를 마치고 집에 머물다가 조선 정부의 외교 고문인 독일인 묄렌도르프(Paul G Möllendorff, 1847~1901)로부터 급한 전갈을 받는다. 고종의 부인인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급진개화파로부터 습격을 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고종과 민비는 조선의 법과 제도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만을 받아들이자는 온건개화파 입장이었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화파는 서구의 근대적인 사상과 제도까지도 전면적으로 도입할 것을 주장했고, 이들은 외척 세력인 민씨 일가와 그들을 추종하는 관리들이 정치를 어지럽히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다며 그들을 타도대상으로 봤다. 민영익이 부상을 당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부상당한 채로 묄렌도르프의 집에 누워 있던 민영익은 급하게 도착한 알렌 선교사 혼자 힘으로 치료하기에는 상태가 심각했다. 일본인 의사와 영국인 의사까지 부른 알렌은 민영익의 상처 부위를 소독한 뒤 지혈을 하고 무려 27군데를 꿰맸다. 그리고 하얀 붕대를 감고 반창고를 붙였다. 이러한 치료법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처음 선보이는 낯선 풍경이었다. 알렌은 이후 석달동안 왕진을 하며 민영익을 돌봤고, 덕분에 민영익은 부상에서 회복됐다.
▲알렌과 민영익 - 1884년 12월 4일 알렌 박사의 민영익 자상 치료 역사기록화. /세브란스병원
갑신정변 당시 대부분의 서양 선교사들은 일본으로 피신했으나 알렌은 가족들과 함께 서울에 남아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고 한다. 알렌의 이런 용기있는 모습과 그가 선보인 서양 의학에 조선인들은 주목했고, 알렌은 이후 고종의 신임을 얻어 고종과 민비를 진료하며 벼슬도 받게 된다. 병원 건립을 통한 조선 선교를 꿈꾸던 알렌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듬해인 1885년 1월, 알렌은 고종에게 병원 설립 계획서를 제출하고, 그로부터 한 달만인 2월29일 병원 설립 허가를 받는다. 당시만 해도 서양 병원을 설립한다는 것은 많은 이들의 반대에 부딪혀야 하는 고단한 작업이었는데, 이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은 그만큼 알렌에 대한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병원 장소는 급진개화파의 거물인 홍영식의 집이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끝나 정변 가담자는 ‘역적’이 되었고, 정변에 가담했던 자는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홍영식처럼 처참하게 죽음을 당해야 했다. 홍영식이 죽고 그의 아버지마저 충격으로 자살하자, 조선 왕실은 알렌에게 그곳에 병원을 짓도록 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1885년 4월 14일, 마침내 한국 최초의 서양식 왕립병원이 개원한다. 병원 이름은 ‘널리 혜택을 베푼다’는 듯의 ‘광혜원’으로 정했다가, 2주일 뒤인 4월 26일 ‘사람을 구제하는 집’이란 뜻의 ‘제중원’으로 바뀐다.
◇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모든 환자들 정성다해 치료해 감동 안겨준 선교사들
제중원 개원 당시, 병원 공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써 있었다.
“현재 본원에는 남녀가 머물 수 있는 방이 있으니 질병이 있는 자는 누구나 내원하여 치료받으라. 약 값은 국가에서 지급한다. 이상을 잘 이해하여 의심하지 말고 치료받으라.”
당시 제중원은 국립병원이었다. 따라서 치료비는 무료였는데, “의심하지 말고 치료 받으라”는 말이 왜 들어갔을까. 그만큼 당시 조선인들이 서양 의학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이 강했기 때문이다.
▲운영 당시 제중원의 모습. /한국콘텐츠진흥원
제중원은 병실 7개와 진찰실, 수술실, 약국, 주방, 샤워실을 갖추고 있었다. 선교사들의 기록에 따르면, 설립 초기에 하루 평균 70여 명의 환자들이 진료를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제중원이 1년간 치료한 환자는 약 1만 400여 명이었고, 그 중 입원 환자는 256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후 제중원은 넘치는 환자들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돼 병원 설립 2년 만인 1887년 초, 현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자리로 이전하게 된다.
1886년 7월, 조선에는 치명적인 전염병인 콜레라가 창궐해 수없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간다. 이때 알렌을 비롯한 선교사들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밤낮없이 몰려오는 환자들을 치료한다. 환자 중에는 양반도 있었고, 일반 평민, 그리고 천민도 있었다. 선교사들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환자들을 정성스럽게 치료해 줬고, 그런 모습에서 조선 백성들은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게 된다.
그러나 제중원 초대 원장 알렌은 이후 선교 방식의 차이 등으로 동료 선교사들과 갈등을 겪게 되고 결국 1887년 9월, 선교사업을 중단하고 외교관으로 전향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알렌에 이어 존 헤론(John W. Heron, 1856~1890)이 제2대 제중원 원장으로 취임한다.
하지만 많은 선교사들이 그렇듯 헤론도 모든 것이 열악한 조선 땅에서 과중한 업무와 풍토병으로 고생을 해야 했다. 1888년 여름, 헤론의 둘째 딸이 태어나지만 아기도 아내도 건강이 좋지 못했고, 헤론도 덩달아 앓아눕게 됐다. 이를 본 언더우드 선교사가 잠깐 중국으로 건너가 쉬다 오라고 권했지만, 헤론은 거절한다. 자신의 몸조차 돌보지 않고 조선 선교의 사명에 불타고 있었던 헤론은 1890년 7월 26일, 과로로 인한 병으로 결국 순교하고 만다. 그리고 그는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묻힌 최초의 선교사가 됐다.
◇에비슨 선교사의 헌신과 기적같은 기부로 탄생한 한국최초 종합병원 ‘세브란스’
헤론이 사망한 후 후임으로 온 북장로교 소속 의료 선교사 찰스 빈턴(Charles C. Vinton, 1856~1936)이 제3대 제중원 원장이 됐는데, 제중원의 운영 방식을 두고 조선 정부와 갈등을 빚게 되면서 사실상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후 1893년 11월 제4대 원장으로 부임한 올리버 에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은 조선 정부와 미국 선교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던 제중원을 미국 북장로교가 단독으로 운영하도록 조선 정부를 설득한다. 그 결과 1894년 9월 왕립병원이었던 제중원의 운영권이 완전히 미국 선교부로 이관됐고, 제중원은 자유로운 사립 선교기관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에비슨은 선교사들과의 협의를 거쳐 제중원을 대규모 현대식 병원으로 개조하기로 결정한 후, 병원 건립기금을 모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1899년 봄 안식념을 겸해 고향인 캐나다로 간 에비슨은 토론토에 사는 친구인 건축가 헨리 볼드 고든(Henry Bauld Gordon, 1854-1951)을 만나 병원의 설계 도면을 무료로 기증 받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0년 4월말 미국 뉴욕에서 열린 만국 선교대회에서 ‘의료 선교에서의 우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면서 조선의 선교 상황을 알리고 병원 설립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에비슨 선교사와 백정의 아들로 최초의 한국인 의사 중 하나였던 박서양이 함께 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사진 우측이 에비슨.
그의 강연을 듣고 감동을 받은 미국 클리블랜드의 실업가 루이스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 1838~1913)가 병원 설립을 위해 1만 달러를 기부한다. 에비슨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감사를 표시하자, 세브란스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희 부부는 일년 전부터 어딘가에 병원을 세우고 싶어 계속 기도 중이었습니다. 마침 당신의 강연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아 바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기부를 받는 당신의 기쁨보다도 나의 기쁨이 더 크답니다.”
이렇게 해서 1904년 9월 남대문 밖 남산기슭의 복숭아 골(현재 서울역 앞 부근)에 기부자인 세브란스의 이름을 딴 한국최초의 종합병원, ‘세브란스 기념병원’이 건립되게 됐다. 이후 세브란스의 아름다운 기부는 대를 이어 계속됐다. 그의 아들 존 롱 세브란스와 딸 엘리자베스 역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세브란스 병원에 거액을 기부했으며, 존 롱 세브란스는 세상을 떠나면서 ‘세브란스 기금’을 만들어 현재까지도 계속 후원금이 계속 보내지고 있다.
한편 에비슨은 세브란스 병원 안에 설치된 의학전문학교의 교과과정을 통해 우수한 의료 인재의 양성에도 힘썼는데, 그 결과 에비슨이 1935년에 은퇴할 때까지 세브란스 병원에서 의사 352명과 간호사 165명이 배출됐다. 제중원을 설립한 것은 알렌 이었지만, 존폐 위기의 제중원을 소생시키고 국내 첫 의학 교육과 고등교육을 실시해 근대의학 지식을 갖춘 한국인이 직접 한국인을 치료할 수 있도록 하는 자립 시스템을 정착시킨 이는 에비슨이었다.
◇‘3·1 운동 민족대표 석호필’ 등 조선 독립에도 기여한 세브란스의 선교사들
세브란스 병원은 독립운동에도 직·접적인 많은 기여를 했다. 1916년 한국에 와 세브란스 의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가르쳤던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1889~ 1970) 박사는 한국 이름인 ‘석호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석호필(石虎弼)이란 이름은 ‘돌(石) 같은 굳은 의지로 호랑이(虎)의 기개를 갖고 약(弼)처럼 이웃에 필요한 존재가 되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석호필 박사는 정규 의학 수업과 별도로 ‘영어 성경반’을 조직해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자잔거를 타고 만세시위현장을 찾아가 사진을 찍어 해외에 알렸고, 3·1 운동 정신을 강조하며 일제의 비인도적 한국인 탄압에 맞서 일본인 고관들을 찾아가 항의하고, 해외 언론에 투고해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기도 했다. 특히 제암리 학살 사건을 현장에서 사진 촬영해 일제의 억압과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BS '역사채널e'
스코필드 박사는 외국이었지만 34번째 ‘3·1 운동 민족대표 석호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세브란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부속병원의 제약부에서 일하던 이갑성을 알게 된다. 이갑성은 나중에 3·1 운동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 된 인물인데, 그는 석호필에게 불행한 조선의 강제 합병을 이야기 해 주었고, 석호필은 함게 분통을 터트리면서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기로 결심하게 된다.
당시 3·1 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외국에 대한 정보들도 필요했는데, 스코필드 박사가 그 역할을 맡아 국외의 정황을 파악해 3·1 운동의 시점과 방법 등을 정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는 조선을 고립시키고 해외로는 조선이 동의해서 합방을 한 것으로 홍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3·1 운동을 해외에 알리는 것은 당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대한민국은 나중에 스코필드 박사의 공을 높이 사 외국인이지만 공로훈장을 수여했고, 국립현충원에 안장했다.
세브란스 병원과 인연이 있는 또 한 명의 외국인은 미국 네바다주 출신의 앨버트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 1875~1948)다. 그는 1897년 조선에 들어와 광산업과 무역업에 종사했고, 일본에서 영국인 배우 메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 1889~1982)를 만나 1917년 결혼해 서울 서대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메리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아들 브루스(Bruce T. Taylor, 1919~2015)를 낳은 것은 바로 1919년 2월 28일, 3·1 운동 발발 하루 전이었다.
그런데 이때 테일러 부부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다. 병원 간호사들이 알 수 없는 인쇄물을 가져와 침상 밑에 숨기는 것이었다. 그 인쇄물의 정체를 안 순간 테일러 부부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바로 ‘조선의 독립선언서’ 였기 때문이다. 앨버트 테일러는 당시 UPI와 AP통신의 임시 특파원으로 독립선언서를 처음으로 외신으로 타전했고, 고종 황제의 국장과 재판 과정, 그리고 제암리 학살 사건을 취재해 3·1 운동 소식과 함께 세계에 알리는데 앞장섰다.
1942년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테일러 부부는 일제에 감금됐다가 추방당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한국에 오려 했던 앨버트 테일러는 1948년 심장마비로 갑자기 숨을 거줬고, “내가 죽거든 한국에 묻어달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를 한국 땅에 안장했다.
◇조선 민중 희망 된 정동병원...여성들 위해 최초 부인병원 세운 스크랜턴 선교사
제중원이 한국 최초로 설립된 서양식 국립병원이었다면, 서양식 첫 민간병원은 정동병원이었다. 정동병원은 1895년 5월 서울에 도착한 의료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1856~1922)이 같은해 9월 자신의 집을 개조해 설립한 병원으로, 당시 서울에서 알렌이 세운 제중원과 더불어 근대의학의 한 축을 담당했다.
▲스크랜턴 선교사 모자(母子). 의사이자 목사로서 의료선교에 앞장선 윌리엄 스크랜턴(좌)과 감리교 첫 여선교사로서 이화학당을 설립한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우).
제중원이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면, 정동병원은 그야말로 가난한고 비천한 계급의 사람을 위한 병원이었다. 이에 고종은 스크랜턴의 우리말 이름인 ‘시란돈(施蘭敦)’의 베풀 시(施)자의 의미를 살려 ‘시(施)병원’이라는 이름을 하사해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름 그대로 가난한 환자들에게 무료진료를 베푸는 병원이었다.
한편 스크랜턴은 여성들만을 위한 병원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미국 북감리회 선교부에 여의사 파견을 요청한다. 여성 환자들이 남성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때 신체 노출을 꺼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1887년 10월 여성 의료선교사인 메타 하워드(Meta Howard, 1858-1932)가 내한해 정동에 여성전문병원을 개원하고 당시 소외 계층 여성들을 위한 진료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부인 병원이었다.
이듬해 고종은 이런 의료사업을 치하하고 격려하는 뜻으로 이 병원에 여성들을 보호하고 구하라는 뜻인 ‘보구녀관(普救女館)’이란 이름을 하사한다.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의 건강권과 인권 향상을 위해 누구도 가지 않던 길을 개척해 ‘여성을 위한 의료’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보구여관은 현재 이화여대 의료원의 전신이다.
한편 스크랜턴이 조선에 오게 된 경위는 이렇다. 1880년대 중후반 일본에서 활동하던 미국 북감리회 소속 로버트 맥클레이(Robert S. Maclay, 1824~1907) 선교사는 1884년 한국을 방문해 고종으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한 선교 활동을 허락받는데, 파송할 선교사가 필요해 미국으로 가서 스크랜턴을 만나 한국 선교를 권유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아마도 명문 예일대와 뉴욕의대를 마치고 바로 결혼한 뒤 클리블랜드에서 병원을 개업해 안정적인 생활을 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던 스크랜턴에게 한국 선교 제의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스크랜턴이 장티푸스에 걸려 심한 열병으로 앓아눕게 되었다. 이때 스크랜턴은 병상에서 ‘하나님, 내 병이 회복되면 곧 의료 선교사로 내 지혜와 경험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라고 서원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의 병이 곧 나아서 건강을 회복하게 된다. 기도로 병나음을 체험한 스크랜턴은 한국에 의료선교를 결심하게 되고, 1885년 5월 아내 메리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 1832~1909)과 두 살 된 딸과 함께 조선 땅을 밟게 된다.
◇30세 처녀로 가난한 환자들 사랑으로 돌본 잉골드 선교사가 세운 ‘전주 예수병원’
전주 예수병원은 호남 최초의 민간 의료선교병원으로, 마티 잉골드 선교사가 1897년 한국에 들어와 1898년 11월 3일 전주 서문 밖에 첫 진료소를 세우고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진료를 하면서 시작됐다.
▲예수병원을 설립한 마티 잉골드가 진료하기 위해 말을 타고 가는 모습. /연합
마티 잉골드는 1867년 5월31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르노아에서 출생해 1896년 불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1896년 이 의과대학 편람에 의하면, 마티 앙골드는 최종 시험에서 최고점을 받았고, 의학 이론과 실기에서도 두드러진 실력을 나타내 전무후무하게 두 개의 금메달 모두 혼자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그녀는 서른 살에 미국을 떠나 조선에 오기를 결심해 1897년 9월 제물푸에 도착했으며, 이때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루이스 테이트(Lewis Boyd Tate)의 영접을 받았는데 7년 후 테이트 선교사와 결혼해 함께 부부가 된다.
예수병원 설립자인 잉골드 선교사가 쓴 일기에 따르면, 당시 세균으로 감염 돼 피부가 빨갛게 변하는 ‘단독’이라는 병으로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의 민간 치료법이 ‘머리와 다리를 잘라낸 돼지의 배를 갈라 그 속에 집어넣고 꽁꽁 묶는 것’이었다고 한다. 30세 처녀의 몸으로 한국에 온 마티 잉골드는 무당의 주술과 미신만 믿고 죽어가는 가난한 환자를 사랑으로 돌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건강 악화로 58세의 나이로 미국에 돌아가기까지 28년간 의사와 전도사, 교사, 문서선교사 등 일인다역의 사역을 감당하며 이 땅의 영혼들을 위해 헌신했다.
한강 이남 최초의 의사인 마티 잉골드에 의해 설립된 전주 예수병원은 우리나라 최초 민간 이료선교병원으로 많은 생명을 살렸을 뿐 아니라 호남의 근대화에도 기여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의 참혹한 시련 가운데도 의료와 봉사로 지역민과 환자를 향한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우리나라 현대의학의 선구자 역할을 하며 의료의 본질적 가치와 기독교적 가치를 실천했다.
“나에게 무엇이 닥칠 것인가에 대해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다. 내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줄 수 있게 하소서.”
마티 잉골드의 이 기도문은 지금도 예수병원 로비에 있는 잉골드의 흉상 아래 적혀 있다.
◇의학 발전견인·차별철폐·복음전파 역할까지 한 서양식 근대병원들
선교사들이 세우고 발전한 서양식 근대 병원은 단순히 질병 치료에만 기여한 것이 아니다. 서양식 근대 병원이 첫째는 근대 의학의 전수를 통해 조선의 의학 발전을 견인했고, 둘째는 남녀와 빈부의 차별을 철폐하는데 공헌했으며, 셋째는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 전초기지의 역할도 담당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에비슨은 세브란스 병원 안에 설치된 의학전문학교의 교과과정을 통해 우수한 의료 인재의 양성에도 힘썼는데, 이를 위해 각종 전문 의학 서적을 한글로 번역해 편찬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08년에 김필순, 김희영, 박서양, 신창희, 주현칙, 홍석후, 홍종은 7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한다.
▲1908년 세브란스병원(제중원)의학교를 1회로 졸업한 최초의 면허 의사 7인. 제일 뒤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필순, 홍석후, 신창희, 박서양, 홍종은, 김희영, 주현칙씨. 가운데는 당시 외과교수였던 허스트 박사.
이들이 한국 의학 발전의 선구자들이 된다. 김필순은 세브란스 의학교 학감으로 임명되어 에비슨의 뒤를 이었고, 백정 출신의 박서양은 외과 교수로,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너 모습ㅇ 처량하다...’로 시작하는 ‘봉선화’를 작곡한 홍난파의 형인 홍석후는 안과와 이비인후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다.
서양 의학은 점점 조선 사회에 동화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한의학과 서양 의학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경지가 열리기도 했다. 고종 임금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던 1897년, 당시 궁중 선전관(宣傳官)으로 있던 노천(老泉) 민병호가 궁중에서만 복용되던 생약의 비방을 일반 국민에까지 널리 보급하기 위해 서양의학을 접목해 개발한 양약(洋藥)이 바로 ‘활명수’다. 당시 조선 백성들은 소화불량과 위장병을 많이 앓았는데, 탕약 외에는 마땅한 치료제가 없어 일찍 손을 쓰지 못하면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았다.
다행히 민병호는 궁중에서 사용하는 여러 비방을 잘 알고 있었고, 기독교를 접하면서 서양 의학에도 일찍 눈을 떴다. 그래서 아선약, 계피, 정향, 현호색, 육두구, 건강, 창출, 진피, 후박, 고추틴크, 엘멘톨의 11가지 생약 성분을 넣어 일반 백성이 달이지 않고 복용할 수 있는 신약을 개발했던 것이다.
서양식 근대병원은 당시 민중들에게 신분제도가 느슨해지는 현장을 체험하게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 제중원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전국에서 수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그 중엔 궁중에서 일하는 고위 관료들부터 걸인, 한센병 환자 등 조선 사회의 모든 계층이 있었다. 수백년 동안 엄격히 유지돼 온 신분제 질서가 이곳에서는 해체되는 상징적인 모습을 보였다.
한편,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에게 무료진료를 베풀었던 시병원은 여러 감동적인 일화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해 본다. 흔히 ‘스크랜턴 대부인(大夫人)’이라 불리던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구름떼같이 몰려드는 환자들 중 특히 집도 없고 가족도 친구도 없이 떠도는 환자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쏟았는데, 하루는 스크랜턴 대부인이 정동 근처의 성벽 위를 걷다가 추운 겨울의 길바닥에서 가마니 한 장만 덮고 신음중인 딱한 모습의 모녀를 발견한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한눈에 봐도 몹쓸 열병에 걸려 있던 두 사람을 즉시 일꾼들을 시켜 병원으로 데리고 온 후 그들에게 따뜻한 방과 음식을 제공하며 치료에 전념한다. 며칠이 지나자 모녀의 얼굴에 핏기가 돌면서 건강이 많이 회복됐는데, 이 두 사람이 바로 시병원의 첫 입원환자들이 된다. 당시 두 모녀를 태우고 온 일꾼들도 스크랜턴 대부인의 헌신적인 사랑에 큰 감명을 받아 수고비 받기를 한사코 거절했다고 한다.
▲스크랜턴 여사와 아이들. 스크랜턴 여사가 이화학당 학생들과 함께 촬영한 모습(오른쪽 사진 뒷줄 검은 옷 입은 사람이 스크랜턴 여사).
두 모녀의 사연을 들어보니 남편은 아내와 딸이 몹쓸 병에 걸리자 내팽개치고 어디론가 떠나버렸고, 버려진 모녀는 심한 전염성 열병을 앓으면서 가마니 한 장만 뒤집어쓴 채 차가운 길바닥에서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훗날 병이 완쾌된 엄마는 스크랜턴 대부인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패티(Patty)’란 세례명을 갖게 되었고, 감리회 선교부에서 일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버려졌던 4살 딸아이 ‘별단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에 두 번째로 입학하는 학생이 된다. 이화학당은 1886년 스크랜턴 대부인이 유교적 질서에 얽매여 있는 조선의 여성들을 개화시키면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인생관을 가질 수 있게 할 목적으로 설립한 여성전용 사립학교였다. 오늘날 이화여대의 전신이기도 하다.
한편, 윌리엄 스크랜턴(스크랜턴 대부인의 아들)은 민중이 있는 곳에 병원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서울의 중심인 정동에 있던 정동병원(시병원)을 가난하고 소외된 백성들이 많이 살고 있는 상동(현 남대문시장)으로 옮긴다. 아울러 병원 내 상동교회를 설립해 병원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한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억눌린 자에게 해방을, 병든자에게 건강을, 고통받는 자에게 평안을.”
스크랜턴은 이와 같은 복음을 전했는데, 바로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조선 땅에서 몸소 실천하고자 했다. 이처럼 시병원은 병을 치료하는 장소에만 그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전초기지의 역할을 톡톡히 감당했다.
이처럼 복음은 조선의 어둠을 비추는 환한 빛이었고, 병든 조선을 치료하는 백신이었으며, 조선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 희망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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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민중 희망 된 정동병원...여성들 위해 최초 부인병원 세운 스크랜턴 선교사
제중원이 한국 최초로 설립된 서양식 국립병원이었다면, 서양식 첫 민간병원은 정동병원이었다. 정동병원은 1895년 5월 서울에 도착한 의료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1856~1922)이 같은해 9월 자신의 집을 개조해 설립한 병원으로, 당시 서울에서 알렌이 세운 제중원과 더불어 근대의학의 한 축을 담당했다.
▲스크랜턴 선교사 모자(母子). 의사이자 목사로서 의료선교에 앞장선 윌리엄 스크랜턴(좌)과 감리교 첫 여선교사로서 이화학당을 설립한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우).
제중원이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면, 정동병원은 그야말로 가난한고 비천한 계급의 사람을 위한 병원이었다. 이에 고종은 스크랜턴의 우리말 이름인 ‘시란돈(施蘭敦)’의 베풀 시(施)자의 의미를 살려 ‘시(施)병원’이라는 이름을 하사해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름 그대로 가난한 환자들에게 무료진료를 베푸는 병원이었다.
한편 스크랜턴은 여성들만을 위한 병원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미국 북감리회 선교부에 여의사 파견을 요청한다. 여성 환자들이 남성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때 신체 노출을 꺼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1887년 10월 여성 의료선교사인 메타 하워드(Meta Howard, 1858-1932)가 내한해 정동에 여성전문병원을 개원하고 당시 소외 계층 여성들을 위한 진료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부인 병원이었다.
이듬해 고종은 이런 의료사업을 치하하고 격려하는 뜻으로 이 병원에 여성들을 보호하고 구하라는 뜻인 ‘보구녀관(普救女館)’이란 이름을 하사한다.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의 건강권과 인권 향상을 위해 누구도 가지 않던 길을 개척해 ‘여성을 위한 의료’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보구여관은 현재 이화여대 의료원의 전신이다.
한편 스크랜턴이 조선에 오게 된 경위는 이렇다. 1880년대 중후반 일본에서 활동하던 미국 북감리회 소속 로버트 맥클레이(Robert S. Maclay, 1824~1907) 선교사는 1884년 한국을 방문해 고종으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한 선교 활동을 허락받는데, 파송할 선교사가 필요해 미국으로 가서 스크랜턴을 만나 한국 선교를 권유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아마도 명문 예일대와 뉴욕의대를 마치고 바로 결혼한 뒤 클리블랜드에서 병원을 개업해 안정적인 생활을 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던 스크랜턴에게 한국 선교 제의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스크랜턴이 장티푸스에 걸려 심한 열병으로 앓아눕게 되었다. 이때 스크랜턴은 병상에서 ‘하나님, 내 병이 회복되면 곧 의료 선교사로 내 지혜와 경험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라고 서원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의 병이 곧 나아서 건강을 회복하게 된다. 기도로 병나음을 체험한 스크랜턴은 한국에 의료선교를 결심하게 되고, 1885년 5월 아내 메리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 1832~1909)과 두 살 된 딸과 함께 조선 땅을 밟게 된다.
◇30세 처녀로 가난한 환자들 사랑으로 돌본 잉골드 선교사가 세운 ‘전주 예수병원’
전주 예수병원은 호남 최초의 민간 의료선교병원으로, 마티 잉골드 선교사가 1897년 한국에 들어와 1898년 11월 3일 전주 서문 밖에 첫 진료소를 세우고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진료를 하면서 시작됐다.
▲예수병원을 설립한 마티 잉골드가 진료하기 위해 말을 타고 가는 모습. /연합
마티 잉골드는 1867년 5월31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르노아에서 출생해 1896년 불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1896년 이 의과대학 편람에 의하면, 마티 앙골드는 최종 시험에서 최고점을 받았고, 의학 이론과 실기에서도 두드러진 실력을 나타내 전무후무하게 두 개의 금메달 모두 혼자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그녀는 서른 살에 미국을 떠나 조선에 오기를 결심해 1897년 9월 제물푸에 도착했으며, 이때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루이스 테이트(Lewis Boyd Tate)의 영접을 받았는데 7년 후 테이트 선교사와 결혼해 함께 부부가 된다.
예수병원 설립자인 잉골드 선교사가 쓴 일기에 따르면, 당시 세균으로 감염 돼 피부가 빨갛게 변하는 ‘단독’이라는 병으로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의 민간 치료법이 ‘머리와 다리를 잘라낸 돼지의 배를 갈라 그 속에 집어넣고 꽁꽁 묶는 것’이었다고 한다. 30세 처녀의 몸으로 한국에 온 마티 잉골드는 무당의 주술과 미신만 믿고 죽어가는 가난한 환자를 사랑으로 돌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건강 악화로 58세의 나이로 미국에 돌아가기까지 28년간 의사와 전도사, 교사, 문서선교사 등 일인다역의 사역을 감당하며 이 땅의 영혼들을 위해 헌신했다.
한강 이남 최초의 의사인 마티 잉골드에 의해 설립된 전주 예수병원은 우리나라 최초 민간 이료선교병원으로 많은 생명을 살렸을 뿐 아니라 호남의 근대화에도 기여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의 참혹한 시련 가운데도 의료와 봉사로 지역민과 환자를 향한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우리나라 현대의학의 선구자 역할을 하며 의료의 본질적 가치와 기독교적 가치를 실천했다.
“나에게 무엇이 닥칠 것인가에 대해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다. 내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줄 수 있게 하소서.”
마티 잉골드의 이 기도문은 지금도 예수병원 로비에 있는 잉골드의 흉상 아래 적혀 있다.
◇의학 발전견인·차별철폐·복음전파 역할까지 한 서양식 근대병원들
선교사들이 세우고 발전한 서양식 근대 병원은 단순히 질병 치료에만 기여한 것이 아니다. 서양식 근대 병원이 첫째는 근대 의학의 전수를 통해 조선의 의학 발전을 견인했고, 둘째는 남녀와 빈부의 차별을 철폐하는데 공헌했으며, 셋째는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 전초기지의 역할도 담당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에비슨은 세브란스 병원 안에 설치된 의학전문학교의 교과과정을 통해 우수한 의료 인재의 양성에도 힘썼는데, 이를 위해 각종 전문 의학 서적을 한글로 번역해 편찬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08년에 김필순, 김희영, 박서양, 신창희, 주현칙, 홍석후, 홍종은 7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한다.
▲1908년 세브란스병원(제중원)의학교를 1회로 졸업한 최초의 면허 의사 7인. 제일 뒤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필순, 홍석후, 신창희, 박서양, 홍종은, 김희영, 주현칙씨. 가운데는 당시 외과교수였던 허스트 박사.
이들이 한국 의학 발전의 선구자들이 된다. 김필순은 세브란스 의학교 학감으로 임명되어 에비슨의 뒤를 이었고, 백정 출신의 박서양은 외과 교수로,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너 모습ㅇ 처량하다...’로 시작하는 ‘봉선화’를 작곡한 홍난파의 형인 홍석후는 안과와 이비인후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다.
서양 의학은 점점 조선 사회에 동화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한의학과 서양 의학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경지가 열리기도 했다. 고종 임금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던 1897년, 당시 궁중 선전관(宣傳官)으로 있던 노천(老泉) 민병호가 궁중에서만 복용되던 생약의 비방을 일반 국민에까지 널리 보급하기 위해 서양의학을 접목해 개발한 양약(洋藥)이 바로 ‘활명수’다. 당시 조선 백성들은 소화불량과 위장병을 많이 앓았는데, 탕약 외에는 마땅한 치료제가 없어 일찍 손을 쓰지 못하면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았다.
다행히 민병호는 궁중에서 사용하는 여러 비방을 잘 알고 있었고, 기독교를 접하면서 서양 의학에도 일찍 눈을 떴다. 그래서 아선약, 계피, 정향, 현호색, 육두구, 건강, 창출, 진피, 후박, 고추틴크, 엘멘톨의 11가지 생약 성분을 넣어 일반 백성이 달이지 않고 복용할 수 있는 신약을 개발했던 것이다.
서양식 근대병원은 당시 민중들에게 신분제도가 느슨해지는 현장을 체험하게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 제중원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전국에서 수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그 중엔 궁중에서 일하는 고위 관료들부터 걸인, 한센병 환자 등 조선 사회의 모든 계층이 있었다. 수백년 동안 엄격히 유지돼 온 신분제 질서가 이곳에서는 해체되는 상징적인 모습을 보였다.
한편,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에게 무료진료를 베풀었던 시병원은 여러 감동적인 일화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해 본다. 흔히 ‘스크랜턴 대부인(大夫人)’이라 불리던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구름떼같이 몰려드는 환자들 중 특히 집도 없고 가족도 친구도 없이 떠도는 환자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쏟았는데, 하루는 스크랜턴 대부인이 정동 근처의 성벽 위를 걷다가 추운 겨울의 길바닥에서 가마니 한 장만 덮고 신음중인 딱한 모습의 모녀를 발견한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한눈에 봐도 몹쓸 열병에 걸려 있던 두 사람을 즉시 일꾼들을 시켜 병원으로 데리고 온 후 그들에게 따뜻한 방과 음식을 제공하며 치료에 전념한다. 며칠이 지나자 모녀의 얼굴에 핏기가 돌면서 건강이 많이 회복됐는데, 이 두 사람이 바로 시병원의 첫 입원환자들이 된다. 당시 두 모녀를 태우고 온 일꾼들도 스크랜턴 대부인의 헌신적인 사랑에 큰 감명을 받아 수고비 받기를 한사코 거절했다고 한다.
▲스크랜턴 여사와 아이들. 스크랜턴 여사가 이화학당 학생들과 함께 촬영한 모습(오른쪽 사진 뒷줄 검은 옷 입은 사람이 스크랜턴 여사).
두 모녀의 사연을 들어보니 남편은 아내와 딸이 몹쓸 병에 걸리자 내팽개치고 어디론가 떠나버렸고, 버려진 모녀는 심한 전염성 열병을 앓으면서 가마니 한 장만 뒤집어쓴 채 차가운 길바닥에서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훗날 병이 완쾌된 엄마는 스크랜턴 대부인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패티(Patty)’란 세례명을 갖게 되었고, 감리회 선교부에서 일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버려졌던 4살 딸아이 ‘별단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에 두 번째로 입학하는 학생이 된다. 이화학당은 1886년 스크랜턴 대부인이 유교적 질서에 얽매여 있는 조선의 여성들을 개화시키면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인생관을 가질 수 있게 할 목적으로 설립한 여성전용 사립학교였다. 오늘날 이화여대의 전신이기도 하다.
한편, 윌리엄 스크랜턴(스크랜턴 대부인의 아들)은 민중이 있는 곳에 병원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서울의 중심인 정동에 있던 정동병원(시병원)을 가난하고 소외된 백성들이 많이 살고 있는 상동(현 남대문시장)으로 옮긴다. 아울러 병원 내 상동교회를 설립해 병원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한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억눌린 자에게 해방을, 병든자에게 건강을, 고통받는 자에게 평안을.”
스크랜턴은 이와 같은 복음을 전했는데, 바로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조선 땅에서 몸소 실천하고자 했다. 이처럼 시병원은 병을 치료하는 장소에만 그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전초기지의 역할을 톡톡히 감당했다.
이처럼 복음은 조선의 어둠을 비추는 환한 빛이었고, 병든 조선을 치료하는 백신이었으며, 조선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 희망이기도 했다.⊙
08.26 예수 사랑으로 목숨 건 선교사들, 조선의 결핵을 퇴치하다
⑥ 결핵퇴치와 복음조선후기 ‘폐결핵’ 가장 무서운 병...세브란스 호흡기환자 중 25%
목숨 잃어가며 결핵퇴치 헌신했던 선교사들...세살 난 딸까지 잃어
‘결핵 실’ 도입한 ‘평양 오마니’ 로제타 홀...양화진에 묻힌 홀 가문
정치를 떠나 北 결핵환자 돌보는 ‘유진벨 재단’...“진정한 통일 준비”
4대걸쳐 한국 사랑해준 유진벨·린턴 선교사 가문...하나님의 사람들
▲1928년 10월 해주에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요양원인 ‘구세요양원’을 설립한 셔우드 홀 선교사 부부(가운데)와 직원들의 모습.
통계청이 발간한 ‘2017 사망원인별 사망률’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사망원인 1위는 ‘암’이다. 지난 2017년 기준 한 해 동안 사망한 사람은 28만 5534명으로, 그 중 암으로 숨진 사람이 27.6%에 달한다. 사망원인 2,3위는 실장질환 10.8%, 뇌혈관질환 8% 순이었다. 10대 사망원인은 암, 심장질환, 뇌혈관질환, 폐렴, 자살, 간질환, 당뇨병, 만성 호흡기질환, 교통사고, 추락 순이었다.
또한 암 중에서도 폐암으로 사망한 사람이 10만 명당 35.1명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간암 20.9명, 대장암 17.1명, 위암 15.7명 등의 순이었다. 그만큼 암은 현대 한국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많이 퍼져 있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당시에는 어떤 병이 백성들에게 가장 치명적이었을까.
정확한 통계는 알수 없지만, 당시 선교사들의 보고서 등 각종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폐결핵’이 가장 무서운 병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조선 시대 광화군 때 1610년 허준이 지은 한의학서 ‘동의보감’에는 결핵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소년 시기 혈기가 왕성하기 전에 주색(酒色)에 상하면 열독이 몰리고 뭉쳐서 충(蟲)이 생긴다. ... 결핵은 환자나 의복, 음식을 통해서 전염되며 한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가까이 있던 또 다른 사람에게 감염이 되어 결국은 한 집안 가족 모두가 죽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기가 허하고 배가 고플 때 결핵를 앓는 집에 병문안을 가거나 조상(弔喪)을 가는 것을 금해야 한다. ... 추웠다가 열이 나고 식은땀이 나며, 용(聳) 혹은 복(腹) 중 덩어리 혹은 뒷머리의 양쪽에 덩어리가 생긴다.”
이는 오늘날의 결핵과 거의 일치하는 증상의 묘사다. 결핵의 원인도 그렇지만 감염의 치명성 때문에 병문안이나 조문 조차 금하고 있는 걸로 봐서는 조선 시대가 결핵을 아주 위험시 했음을 알 수 있다.
결핵은 거의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해온 오래되고 질긴 병이다. 잠복해 있는 데다가 전염까지 있기 때문에 왼전 퇴치가 쉽지 않다. 18세기 산업혁명 시기때 처음으로 영국에서 유행하다가 1800년대 초에는 동유럽으로 번졌고, 1800년대 후반에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퍼지게 된다.
▲알렌 선교사의 조선 환자들에 대한 건강 진료 보고서 첫 페이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했던 알렌 선교사의 ‘조선 정부 병원의 첫 번째 연례보고서(1886)’ 기록에 따르면 한 해 동안 호흡기 계통 질호나자 476명을 진찰했는데 그 중 10.5%인 50명이 폐결핵(phthisis) 이었다고 돼 있다. 제중원 원장으로 재직하다 1902년 근대식 종합병원인 세브란스를 건립한 에비슨 선교사의 연례보고서에서는 호흡기 계통 환자 80명 중 폐결핵이 25%인 20명이었다고 전한다. 이를 통해 구한말 상당수의 백성들이 폐결핵을 앓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목숨 잃어가며 결핵 퇴치에 헌신했던 선교사와 가족들...세 살 난 딸까지 잃어
이 땅의 결핵 퇴치를 위해 앞장선 분이 많지만 그중 ‘홀(Hall)’ 선교사 가족은 단연 첫손가락에 드는 인물들이다. 캐나다 출신인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5)과 미국 출신의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은 각각 중국과 조선 의료 선교사로 헌신했고, 두 사람은 1892년 6월 조선에서 결혼한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1991) 선교사다.
▲홀 선교사 가족. 가운데 남성이 셔우드 홀 선교사이고, 왼쪽 여성이 아내인 메리안 홀, 오른쪽 여성은 셔우드 홀의 어머니인 로제타 홀 선교사다.
윌리엄 제임스 홀은 평양선교 개척을 위해 1894년 평양에 들어갔다가 청일전쟁을 접하게 되는데, 전쟁터인 평양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하다가 전염병에 걸려 죽고 만다. 한국에 온지 불과 2년만에 안타깝게 순교했다. 심신이 지쳐있던 부인 로제타 홀은 둘째 출산을 위해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남편이 못다 이룬 조선 사랑을 이루라’는 하나남의 음성을 듣고 1897년 다시 조선 땅에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이듬해 세 살 난 딸 ‘에디스’가 이질로 사망하고 만다.
로제타 홀은 큰 슬픔에 잠겼지만 그렇다고 조선에서의 사역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남편과 딸을 잃은 슬픔도 잊은 채 로제타 홀은 평양 홀(Hall) 기념병원에서 밤낮으로 환자들을 돌봤다. 그녀는 병원일 뿐 아니라 여성 환우들을 위해 광혜여원을 열고, 어린이 병원, 시각장애인 소녀를 위한 점자 교육, 농아인 학교도 차례차례 시작한다.
하지만 그즈음 로제타 홀에게 충격과 슬픔의 시간이 또다시 찾아온다. 이화학당 시절부터 자신을 따라 의사의 꿈을 키우다 의사가 되어 조선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던 박에스더(김점동)가 35세의 짧은 나이로 숨을 거둔 것. 병명은 폐결핵이었다.
박에스더는 로제타 홀과 함께 미국에 건너갔다가 1896년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해 의학 공부를 했다. 하지만 4년의 힘든 공부 끝에 졸업을 앞둔 박에스더는 남편 박유산을 폐결핵으로 잃고 만다. 슬픔을 안고 귀국한 박에스더는 로제타 홀을 따라 평양 홀 병원에서 10개월 동안 무려 3000여 명에 이르는 환자를 돌볼 만큼 헌신적으로 일하다가 자신도 그만 폐결핵에 걸려 세상을 뜨게 된 것이다. 남편과 딸은 전염병으로, 제자인 박에스더와 그 남편은 폐결핵으로 떠나 보낸 로제타 홀은 남은 생을 조선 땅에 만연했던 결핵 퇴치를 위해 보내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왼쪽) 부부가 로제타 홀(가운데) 가족과 함께 촬영한 사진. 앞줄은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왼쪽)와 딸 에디스 홀. /이화여대의료원
그녀는 사람들의 무지와 오해, 그리고 결핵이라는 병균과 사투를 벌이며 1928년 해주에 국내 최초의 결핵 환자 요양소인 해주 구세병원을 짓는다. 그 개원식에서 로제타 홀은 “나는 큰 기쁨을 맛보았다. 이는 조선의 고통 받는 결핵 환자들을 위해 새로운 시대의 막이 열리는 극적인 순간인 것이다”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이후 요양병원이 들어서고 나서도 그녀는 결핵과의 치열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이란 책에는 당시 그녀의 심정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해주에서는 지금 결핵 환자들의 수가 지나치게 많다. 이들이 길에서, 상점에서, 공공장소에서 상당히 많은 병균을 퍼뜨리고 있으므로 매우 위험하다. 요양소에 격리시키려면 일반인들에게 전염될 걱정은 없어진다.”
“비로소 나는 무지와 미신이라는 단단한 장벽 앞에서 다시 도전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심한 좌절을 맛보았으나 조선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요양소를 지어야 한다는 나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당시 결핵은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20명에 한 사람꼴인 이 병이 이 나라에서는 5명 가운데 한 사람의 비율로 희생자가 생겼다. 조선이 구시대에서 신시대로 접어든 무렵인 그 당시 가장 활동력이 강했던 병균은 결핵균이었다. 새로운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이 생겨났던 때였으므로 병균은 고립된 시골에서 큰 도시로 전염되어 나갔다가 다시 시골로 되돌아와 전염되고 있었다.”
“이 무렵까지도 일반 조선인들은 결핵을 ‘부끄러운 병’으로 생각했다. 악귀의 기분을 상하게 한 사람이 운명적으로 받는 벌이라고 보았다. 결핵 크리스마스실을 사기보다는 오히려 환자가 ‘신령한 나무’(서낭) 밑에 쌓여 있는 돌무더기를 위해 돌을 몇 개 더 던져 올려놓는다든가 해서 귀신을 달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핵 크리스마스실’ 도입한 ‘평양 오마니’ 로제타홀...양화진에 묻힌 홀 가족들
결핵에 대한 올바른 인식 전환이 급선무라고 판단한 로제타 홀은 미국에서 막 확산되고 있던 ‘크리스마스실’을 조선에도 도입하기로 한다. 이를 위해 크리스마스실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미국 신문의 편집자도 만나고, 당시에는 젊은 화가였던 김기창 화백도 만난다. 그래서 생각해낸 실의 도안은 처음에 거북선이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던 일제는 거북선 도안이 새겨진 크리스마스실을 불허했다. 그래서 대신에 ‘숭례문’을 도안으로 한 조선 최초의 크리스마스실이 1932년에 발행되게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
이와 함께 로제타 홀은 결핵 환자의 완전한 치료를 위해 요양과 함께 자립할 수 있는 농장이 필수라고 보고, 미국의 농업 전문가를 데려와서 교육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조선 땅의 결핵 퇴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했다. 이런 그녀를 사람들은 ‘평양 오마니’라고 불렀다. 그녀는 진정한 조선 민중의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녀의 아들 셔우드 홀 선교사도 활약도 빼 놓을 수 없다. 이 땅에 최초의 크리스마스실이 나올 수 있었던 데는 그의 공이 컸다. 그는 10대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선교사들을 위한 주택을 짓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어머니의 선교 사역에 참여했다. 누구보다 친하고 정들었던 박에스더 누나가 어느 날 폐결핵으로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그 역시도 충격을 받고 결핵 퇴치를 위한 삶을 살기로 결단한다. 그리고 미국에 가서 의학 공부를 한 뒤 의사가 되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셔우드 홀은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을 당해야 했고, 그는 인도로 가서 거기서도 조선에서 한 것처럼 가난한 민중들을 돌보고 치료했다. 1953년 대한결핵협회가 창립된 것은 이처럼 결핵 퇴치에 앞장 선 홀 선교사 가족의 헌신을 기리고 이어받기 위한 것이었다. 윌리엄 제임스 홀과 로제타 홀, 그리고 3년이라는 짦은 시간 동안 이 땅에 살다간 그들의 딸 에디스, 1991년 캐나다에서 숨을 거뒀지만 자신의 유언대로 다시 한국에 오게 된 셔우드 홀까지, 이들은 모두 현재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묻혀 있다.
▲양화진 선교사 묘원의 셔우드 홀 가족들의 묘비.
◇북한은 세계에서 결핵 문제 가장 심각한 국가 중 한 곳...환자 10만명 추산
세계건기구(WHO)의 ‘2018년도 결핵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결핵 문제가 가장 심각한 세계 30개국 가운데 한 곳이다.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는 모잠비크,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앙골라 등 주로 아프리카 국가들이다. 2017년 기준 북한의 결핵 환자는 1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북한 인구 10만 명당 결핵 유병률은 513명으로 OECD국가 중 1위인 남한이 유병률 70명보다 6배 이상 많다. 북한보다 유병률이 높은 나라는 레소토(665), 필리핀(554명), 모잠비크(551명) 등이다.
북한의 결핵이 심각하다는 것은 탈북민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북한 주민의 질병관과 질병형태’(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5) 보고서에는 2000년대 초중반 남한에 들어온 탈북민들의 다음과 같은 생생한 증언들이 나온다.
“림프결핵이었는데 림프결핵이 터져버렸어요. 어떻게 치료했냐고 하니까 북한에서 뱀을 그 자리에 대면, 뱀이 화농된 고름을 빨아 먹고 뱀은 그 자리에서 즉사한대요. 결핵 환자가 산에 가면 절대로 독사가 접근을 안 한다고 합니다. 즉 독사도 결핵균에 전염될까 봐 겁낸다는 겁니다. 실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탈북하신 분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실제로 독사가 물게 해서 림프결핵을 치료했다고 하는데, 3년 후 재발했다고도 합니다.”(탈북민 증언)
“요양소 같은 데 가면 안내원들이 담배를 막 핀대요. 이거를 피워야지 균이 죽는다고 생각한답니다.”(대북 지원가)
“결핵도 돈이 있을 때는 결핵약을 사서 먹고, 돈이 없을 때는 결핵약을 안 먹는 거야. 결핵약이 도대체 얼마인가 알아봤고요. 해산하고 청진 쪽에서 마이신을 한 달 동안 맞은 게 1만 5000원 이래요. 북한 노동자 임금이 2000원에서 2500원 정도밖에 안 되는데, 마이신을 1만5000원 주고 어떻게 맞겠어요. 치료가 다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탈북민 지원가)
▲북한 평양의 결핵 환자들의 모습.
물론 고난의 행군 직후에 북한을 빠져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니까 지금은 상황이 개선되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제 사회의 대북제재가 계속되고 의약품이나 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을 감안하면, WHO 통계가 보여주듯이 북한의 결핵은 계속해서 심각한 상황을 벗어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상황 떠나 북한 결핵환자 돌보는 ‘유진벨 재단’...“진정한 통일 준비”
하지만 정치적 상황이 어떻든 변함없이 북한 결핵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단체가 있는데, 바로 미국과 한국에 사무실을 둔 ‘유진벨 재단’이다. 이 재단은 북한 식량난이 한창이던 1995년 대북 식량지원을 위해 설립된 기구다. 하지만 먹을 것을 찾아 유랑하는 북한 주민들을 돕다가 북한 당국자들로부터 “식량 지원은 지정된 장소에서만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안내받은 곳이 결핵 요양소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유진벨 재단은 대북 식량 지원 기구가 아닌 결핵 환자 지원 기구로 성격을 바꾸게 된다.
재단이 결핵 환자 지원사업을 시작한 1997년부터 10년 동안 북한 의료기관 70곳을 통해 치료 혜택을 본 북한 주민들은 약 25만 명에 이른다. 그리고 2008년부터 재단이 다제내성(잘못된 약 복용 또는 중단으로 인해 결핵의 내성이 커져서 일반적인 결핵 치료로는 완치가 불가능한 상태를 말함) 결핵 환자 치료 사업에 주력하게 되는데, 이들 환자는 1인당 약값만 500만 원이 넘게 드는 데다 치료 기간도 18개월 정도가 소요된다.
이처럼 다제내성 결핵 환자는 투입 대비 효과가 적다보니 북한 당국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의 지원도 외면 받는 분야였는데, 이 문제의 심각성을 간파한 유진벨 재단은 2008년부터 이들을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2013년에 평양을 비롯한 평안남도 등에 8개 다제내성 결핵치료센터를 설치한 데 이어 2015년에는 치료 센터가 12개로 늘어났지만, 수용 환자가 포화상태가 돼 현재는 조립식 패널 병동을 신축하는 사업을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스테판 린턴(Stephen Winn Linton, 한국명 ‘인세반’) 유진벨 재단 회장은 “북한 결핵 치료는 북한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코리안들의 미래를 더 밝게 하는 응급조치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통일 준비다”라고 말했다.
◇4대 걸쳐 한국 사랑해 준 유진벨·린턴 가문...예수님 명령 순종한 하나님의 사람들
유진벨 재단 앞에 붙은 ‘유진 벨(Eugene Bell)’이라는 이름은 조선 선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유진 벨 선교사(Eugene Bell, 1868~1925, 한국명 ‘배유지’)는 조선이 격동기이던 1895년 남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목포와 광주에서 많은 교화와 학교, 병원을 세우는데 앞장섰다. 이로 인해 호남의 첫 선교사로 더 잘 알려진 유진 벨은 “조선, 이 백성에겐 복음 외엔 희망이 없다”며 자신이 모든 것을 바쳐 이 땅에 복음의 씨를 뿌렸다. 특히 호남 지역 신학의 선구자로 광주 기독병원, 수피아여학교, 숭일학교, 목포 정명여학교, 영흥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유진 벨 선교사가 말을 타고 조선 전역을 돌며 복음전도 사역을 하던 중에 찍은 사진. 오른쪽 말 위에 탄 사람이 유진 벨 선교사다.
그는 또한 양동교회를 비롯해 호남 일대에 많은 교회를 세워 이 땅에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전도 활동 중 홀로 세상을 떠났고, 재혼한 부인도 교통사고로 먼저 보내야 하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유진 벨 선교사는 1925년 9월 28일 57세의 나이로 소천했지만, 그의 사위 윌리엄 린턴과 손자 휴 린턴(윌리엄 린턴의 셋째 아들), 증손자 스테판 린턴(인세반), 존 린턴(인요한)으로 이어진 후손들이 4대에 걸쳐 오늘날까지 한국에 대한 사랑을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그의 딸인 샬롯 벨(Charlotte W. Bell Linton, 한국명 인사례, 1899~1974)과 결혼한 윌리엄 린턴(William A. Linton, 한국명 인돈, 1891~1960)이 바로 스테판 린턴 회장의 할아버지다. 윌리엄 린턴은 전주 신흥고 교장으로 섬겼고, 한남대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부인 샬롯 벨은 전주 기전여고 교장을 맡았다. 그녀는 늘 학생들 앞에서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학생들에게 ‘조국인 조선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윌리엄 린턴은 일제강점기 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해 강제 출국을 당한다. 하지만 그는 해방 후 다시 대한민국에 온다. 그의 아들 휴 린턴(Hugh MacIntyre Linton, 한국명 인휴, 1926~1984)도 군산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라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전라남도의 섬과 벽지를 다니며 교회를 무려 200여 곳이나 개척하는 선교사로 활동했다.
▲윌리엄 린튼 선교사. /한남대
늘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그에게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검정 고무신’이란 친숙한 별명으로 불렀다. 그는 1960년대 전남 순천에 수해가 나고 결핵이 유행하자 부인과 함께 결핵 진료소와 요양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중간에 남편이 죽는 아픔 속에서도 그의 부인 루이스 린턴(Lois F. Linton, 한국명 인애자 1927~) 선교사는 35년간이나 우리나라의 결핵 환자를 돌보는데 일생을 바쳤다.
유진 벨 선교사의 조선 선교 100주년인 지난 1995년, 스테판 린턴 회장은 북한의 식량난을 돕기 위한 인도적 민간기구인 유진벨 재단을 설립한다. 스테판 린턴 회장은 1995년부터 현재까지 70차례 이상 북한을 오가며 아픈 북한 동료들을 어루만지고 있다. 벨과 린턴 선교사 가문은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자를 돌보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조선 땅에서 그대로 순종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09.16 불의와 거짓을 몰아낸 복음, 언론으로 조선의 불을 밝히다
⑦ 언론과 복음조정·관아서 동네곳곳 붙이는 벽보가 고작이었던 구한말의 ‘뉴스’
서적·잡지 대량 출판으로 우리나라를 외국에 적극 알린 선교사들
‘한국 더 사랑한’ 헐버트, 내부사정 서방세계 알리는 데 큰 공헌
“헐버트, 한국위해 분개하고 각국향해 한국 진정 발표해 준 사람”
발간과 함께 조선사회 큰 반향 일으킨 만백성의 대변지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 창간한 베델 “한국위해 싸우는 것, 하나님의 소명”
▲구한말 조선의 언론을 일으킨 선교사들과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우측 하단).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언론 매체가 등장한 것은 구한말에 이르러서다. 그때까지는 뉴스라고 해봐야 이따금씩 조정이나 관아에서 동네 곳곳에 붙이는 벽보가 고작이었다. 당시 5일이나 10일에 한번 서는 장날은 필요한 물건을 사고 팔기도 하지만 새로운 소식을 얻기 위해서도 중요한 날이었다. 이같은 정보의 빈곤은 신분을 막론하고 다르지 않았다. 전국 장터를 누비는 보부상들을 만나 단편적인 소식이라도 전해 듣는게 당시 백성들에게는 세상 소식의 거의 전부였던 셈이다.
구한말의 조선은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이권 쟁탈전과 조선 왕정 자체의 구조적인 모순 등으로 인해 그야말로 혼돈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국내외 정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국민들의 각성이 필요한 시기였다.
당시에 언론이 보편화 돼 있어서 지금처럼 국내외 정세를 알기 쉽게 풀어 주었다면 어땠을까. 즉, 당시의 세계적인 흐름에 대한 설명과 함께 청나라와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의도를 분석해주는 한편, 조선 조정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벌 다툼과 그로 인해 야기될 치명적인 폐해를 사람들에게 알렸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아마도 많은 국민들이 국내외 정세에 눈을 떴을 것이고, 각성된 국민들은 왕정 대신 의회를 중심으로 한 입헌군주제나 공화제를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일 만큼은 막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신기하게도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병원과 학교가 세워지고, 정치제도가 민주적으로 바뀔 뿐만 아니라, 건강한 언론이 세워졌다.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인 영국과 미국 같은 나라들이 민주주의를 세우고 유지하는 원동력은 각성된 국민들이며, 또한 그 국민들을 깨우는 것은 건강한 언론이다. 영국이나 미국이 건강한 리더십으로 세계를 리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언론의 역할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복음은 불의와 거짓을 몰아내고 정의와 진실을 추구한다. 언론의 역할이 꼭 이와 같다. 복음의 역할과도 잇닿아 있는 언론은 하나님이 세계를 경영하시는 도구 중의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 근대신문 ‘한성순보’...갑신정변 소용돌이 속 폐간
▲한성순실' 편집실(추정)과 창간호. '한성순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외교통상 사무 전반을 담당했던 통리아문 소속의 박문국에서 발간했다. 김인식, 장박, 오용묵, 김기준, 강위, 주우남, 현영운, 정만조, 오세창 등 박문국 주사와 사사(司事)들이 한국 최초의 기자였다. /전우용 제공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은 구한말의 ‘한성순보(漢城旬報)’다. 1883년 10월 31일 박영효 등 개화파가 주도해 창간한 정부신문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인 박문국에서 순보(旬報)라는 말 그대로 10일에 한 번씩 발간했다. 한성순보는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있었지만, 순한문으로 간행돼 널리 일반 백성들한테까지 퍼질 수 없었다. 이런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한성순보는 이듬해 12월에 발생한 갑신정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박문국이 불에 타 소실되면서 폐간되고 말았다.
그러나 신문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한 정부의 인식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구한말 정부는 ‘한성순보’를 다시 복간하는 형태로 이름을 ‘한성주보(漢城周報)’로 바꿔 1886년 1월25일부터 새롭게 발간을 개시한다. ‘한성주보’는 주보(周報)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일주일에 한 번씩 발행하는 주간지였다. 국한문을 혼용해 발간한 이 신문은 처음으로 한글이 쓰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성주보도 2년 6개월 정도 유지되다가 재정난으로 중단되고 만다.
당시 조정 내에서는 조선의 법과 제도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만을 받아들이자는 온건개화파, 서구의 근대적인 사상과 제도까지도 적극적으로 도입해 조선을 총체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급진개화파, 그리고 오로지 쇄국 정책만을 고수하는 수구파로 나뉘어 치열한 당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 세력들이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때그때 일본이나 청나라, 러시아, 미국 등 외세와 결탁하면서 조선의 앞날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런 와중에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주로 조선의 시스템은 그대로 두고 서양의 과학기술만을 도입하자는 온건개화파의 주장을 대변했다.
◇서적·잡지 등 대량 출판으로 우리나라를 외국에 적극 알린 선교사들
재정난으로 인해 정부의 신문 발행이 중단된 상황 속에서, 각종 서적 및 잡지 등의 대량 출판을 통해 우리나라를 외국에 알리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간 이들도 다름 아닌 선교사들이었다. 그 초석을 놓은 사람이 1887년에 내한한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프랭클린 올링(Franklin Ohlinger, 1845-1919)다. 올링거 선교사는 조선에 오기 전 중국에서 16년간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가 아펜젤러 선교사의 요청으로 서울 정동의 배재학당 교사로 부임한다.
무엇보다도 출판사업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올링거는 1890년 배재학당 안에 삼문출판사를 설립한다. 이 출판사는 당시 정부의 박문국 인쇄시설을 제외하고는 국내 유일의 인쇄소였는데, 한글·영어·중국어 세 가지 언어로 인쇄·출판되었기 때문에 삼문(三文)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올링거는 또한 1892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잡지 ‘The Korean Respository’를 간행한다. 이 잡지는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풍습, 언어 등을 해외에 알리는 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외국 사람들과 한국에 파송될 예비 선교사들에게 각종 정보를 사전에 제공했다.
▲올링거 선교사와 그가 저술한 'The Korea Repository' 5권 2호 (1898년 발행).
안타깝게도 올링거 부부는 1893년 초여름에 어린 두 자녀를 병으로 연달아 잃는 아픔을 겪는다. 두 자녀를 양화진에 묻은 후 같은 해 9월에 약 6년간에 걸친 한국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올링거는 1895년에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1911년까지 선교사로 헌신하다가 은퇴한다. 비록 한국에서의 선교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올링거는 한국 기독교는 물론 인쇄와 출판 및 교육 사업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한국 문서 선교와 출판 근대화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인보다 한국 더 사랑한’ 헐버트, 내부사정 서방세계 알리는 데 큰 공헌
구한말 언론을 언급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미국인이 또 있다. 바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으로 불리는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선교사다. 그는 미국의 매우 저명한 집안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학 총장이자 목사였고, 어머니는 아이비리그 대학 중 하나인 다트머스 대학 설립자의 후손이었다.
▲호머 헐버트 선교사와 그가 도입한 한글 띄어쓰기. /국가보훈처·SBS
헐버트는 1884년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대학 재학 중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만드는데 영어 교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1886년 7월5일 조지 길모어(Gilmore, G. W, 1857~?) 선교사, 달지엘 벙커(Dalziel A. Bunker, 1853-1932) 선교사와 함께 처음 조선 땅을 밟았다.
하지만 헐버트는 이내 조선의 교육 현실에 환멸을 느낀다. 당시 육영공원의 특성상 대부분의 학생들은 부패한 관리들의 자녀들이었는데, 이들이 학업에 열성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결국 1891년 12월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오하이오주 제인즈빌에 있는 퍼트남 군사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러나 미국으로 돌아간 후 조선에 대한 사랑을 저버릴 수 없었던 헐버트는 잠시 안식년 차 미국에 와 있던 아펜젤러 선교사로부터 조선에서 다시 봉사할 것을 권유받고, 1893년 9월에 교사가 아닌 감리교 선교사 자격으로 가족들과 함께 조선 땅을 다시 밟게 된다. 주위 사람들은 그에게 배재학당 교사를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하고 배재학당 내 감리교 출판사인 삼문출판사 운영에 자원한다.
언론의 역할과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헐버트는 올링거가 귀국함으로 인해 휴간됐던 The Korean Respository를 속간했고, 1899년에 동 잡지가 폐간되자 1901년 The Korean Review라는 이름의 영문 월간지를 새로 창간한다.The Korean Respository와 The Korean Review는 모두 소식지이자 학술지로서 한국 내부 사정을 서방세계에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The Korean Respository는 1897년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전했으며, The Korean Review는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 행위와 침략정책의 부당성을 규탄하는 기사를 꾸준히 게재했다. 결국 헐버트가 발행하는 The Korean Review는 일본 당국의 감시하에 놓이게 됐고, 1906년 12월 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되게 된다.
▲2015년 8월 12일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가 헤이그 밀사 파견에 관한 증언 등 헐버트 박사의 업적을 담은 기록을 공개하고 있다. /연합
헐버트는 국내의 다른 어느 선교사들보다 한국의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었으며,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서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육영공원의 교사로 재직 중인 1891년에 세계지리와 문화를 소개하는 내용의 교과서 격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한글로 출판했는데, 이것이 조선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사민필지’는 ‘선비와 백성이 꼭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으로, 세계 각국의 지리 및 사회가 소개돼 있다. 헐버트는 이 책의 서문에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해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아니하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 하리오”라고 썼을 정도로 당시 천대받던 한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헐버트는 또한 1896년에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 내려오던 ‘아리랑’을 역사상 최초로 서양 음계로 채보해 The Korean Respository에 실어 전 세계에 소개했다. 1905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역사서인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n)’를 출간했다.
◇“헐버트, 한국을 위해 분개하고 각국을 향해 한국의 진정을 발표해 준 사람”
1904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미국 공사관은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자국의 선교사들이 조선의 정치적 문제에 절대 개입하지 말 것을 지시한다. 이에 일부 선교사들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며 일본의 만행에 눈을 감았으나, 헐버트는 고통받는 한국인을 돕는 것이 ‘참선교’라며 적극적으로 외교문제에 개입한다. 대표적인 활동이 1905년 11월에 고종의 특사로 미국에 파견된 일이다.
▲헤이그 특사들과 헐버트 선교사. /국사편찬위원회·국가보훈처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헐버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불과 수개월 전인 1905년 7월에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이권 보장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각각 인정하는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The Katsura-Taft agreement)’을 이미 체결했던 미국은 헐버트에게 시간을 끌며 만나주지 않았다. 결국 같은해 11월에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조선의 외교권은 박탈되게 된다.
헐버트는 을사늑약 직후인 1906년에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를 간행해 구한말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이해관계와 조선이 현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서술했다. 헐버트는 이 책에서 특히 “한민족이 나라를 빼앗긴 주된 원인은 미국이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위반하고 친일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조국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1882년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제1조에는 “제3국이 체결 당사국의 어느 한 나라에 대해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 다른 당사국도 권고와 주선을 다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시하여야 한다”고 규정돼 있었다.
헐버트의 조선을 위한 국권 회복운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를 개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고종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이 회의를 통해 을사늑약 체결의 불법성을 알리는 외교적인 통로로 활용할 것을 권고한다. 이에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사람을 밀사로 파견했으며, 헐버트 자신도 헤이그로 함께 가서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본의 압력으로 특사들의 회의 참석은 끝내 무산되고 만다. 결국 일제는 헤이그 밀사 파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폐위시켰고, 헐버트 또한 일제이 압력을 받고 미국 정부의 소환 형식으로 조선을 강제로 떠나게 된다.
하지만 헐버트는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강연 및 기고와 저술 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 1909년 미국 포틀랜드 한 교회에서 그는 “나는 언제나 한국민을 지지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권리와 재산을 빼앗겼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들을 대변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또 1915년 12월12일자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는 “루스벨트 대통령은 정식으로 조약을 맺은 친구의 나라, 한국을 배신한 사람이다”라며 조선을 위해 자국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뤼순감옥에서 일본 경찰에게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헐버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헐버트는 이토가 혹독한 정략을 사용해 각국의 이목을 가리고 있을 때, 한국을 위해 분개하고 각국을 향해 한국의 진정을 발표해 준 사람이다. 한국을 위해 진력한 공은 몰각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인으로서는 하루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헐버트가 1934년에 모교인 다트머스 대학에 제출한 ‘졸업후 신상기록부(Post Graduate Data)’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남겨져 있다.
“나는 천팔백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왔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의 그러한 행동은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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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과 함께 조선 사회에 큰 반향 일으킨 만백성의 대변지 ‘독립신문’
▲순 한글과 영어로 찍어낸 독립신문.
헐버트는 1896년부터 발간된 ‘독립신문’ 출간에도 깊게 관여했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한글 신문이다. 서재필은 1884년에 발생한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한 사람으로, 이 정변이 실패로 끝남에 따라 가담자들과 함께 역적으로 몰려 가족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서재필 혼자만 가까스로 몸을 피해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하지만 서재필의 미국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혈혈단신인 데다가 영어가 서툴러 취업도 되지 않았다. 그는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청년회에 가서 영어 공부를 했다. 일요일에는 예배, 성경공부, 기도회 등 각종 교회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원래는 신앙심이 깊어서가 아니라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결국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나게 됐다.
서재필은 1890년 6월,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다. 그는 언젠가 조국으로 돌아가 봉사하려면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후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개화파 정부가 수립되어 서재필 등 갑신정변 주역들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지자, 서재필은 조선을 떠난 지 11년만인 1895년 12월에 귀국한다. 개화파 정부는 그를 외부협판(지금의 외교부 차관)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서재필은 이 같은 제의를 사양하고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그는 권력의 외부에서 미국 시민의 자격으로 신문을 간행해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다.
▲서재필 박사와 독립신문, 그리고 독립문.
그러나 서재필은 당시 한국 사정에 밝지 않았을뿐더러 신문 발행 경험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삼문출판사의 책임자인 헐버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헐버트는 ‘독립신문’ 발행이 한국인들에게 매우 유익할 것으로 판단해 인쇄 직원 두 명을 지원하는 한편, 자신이 운영하는 삼문출판사에서 ‘독립신문’을 인쇄할 수 있도록 흔쾌히 허락한다. 또한 헐버트는 ‘독립신문’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던 영문판 The Independent의 기사 작성 및 편집을 책임졌다.
‘독립신문’은 발간과 동시에 조선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순한글로 간행된 신문이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빈부귀천을 구분하지도 않고, 모든 조선 사람들의 대변지가 될 것을 분명히 한 점도 사람들이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서재필이 직접 지은 1896년 4월 7일 자 ‘독립신문’ 창간호 논설에는 다음과 같이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을 위하여 공평히 백성에게 말할 터인데, 우리가 한성 백성만을 위한 게 아니라 조선 전국 백성들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려 주려 함.”
이어서 서재필은 띄어쓰기를 도입하는 취지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남녀, 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하려 함이요, 또 구절을 떼어 쓰기는 알아보기 쉽게 하도록 함이라.”
최초로 한글에 띄어쓰기를 사용한 사례는 1877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로스(John Ross, 1842-1915) 선교사가 쓴 ‘조선어 첫걸음’이다. 그러나 서재필의 언급과 같이 우리말에서 띄어쓰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독립신문’을 발간할 때 부터다. 이때 띄어쓰기를 도입한 이가 바로 헐버트 선교사다. 헐버트는 순한글로 ‘독립신문’을 간행할 즈음에 주시경 등과 더불어 한글을 연구했고, 그 과정에서 띄어쓰기와 점찍기를 도입했다. 이후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나오면서 띄어쓰기는 보편화 됐다.
이처럼 ‘독립신문’ 출연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자, 이에 자극받은 개화파 지식인들의 주도 아래 1898년 새로운 민간신문인 ‘매일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이 잇달아 창간됐다. 비록 ‘독립신문’은 친러 수구파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아 1899년 12월에 폐간됐지만 다른 신문들이 우후죽순 간행되며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도 근대적인 신문제도가 정착하게 됐다.
▲제국신문.(1898년)
또한 이 시기에 신문 발행이 일반적으로 널리 확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구나 알가 쉬운 한글로 간행되었기 때문인 이유가 컸다. 즉, 한글의 보편화가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셈이다. 그 뒤에는 한국인들에게 한글의 우수성을 일깨우면서 널리 사용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고민했던 헐버트의 숨은 노력과 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매일신보’ 창간한 베델 “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다”
구한말 언론을 이야기 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외국인이 있다. 바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 1872-1909)이다. 베델은 1904년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던 Daily Chronicle의 특파원으로 처음 한국에 방문한다.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기사를 강요하는 신문사 방침에 반발해 사직하고, 그 해 7월 양기탁과 함께 순한글 신문인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데일리뉴스’를 창간한다.
▲어니스트 베델(좌)과 대한매일신보(우).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국립중앙도서관
당시는 일본이 국권침탈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시기였다. 1905년의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쟁취한 일본은 같은 해 11월에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이후,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한다. 아울러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더욱 강화하는 수단으로 언론에 대한 사전 검열도 실시했다.
이에 국내의 민족지들은 크게 위축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상황을 대내외로 널리 알리면서 일제의 침략 행위를 격렬하게 규탄하며 조선의 대변지가 되어준 신문이 바로 ‘대한매일신보’다. 이 신문은 베델 명의로 발행이 됐는데, 당시 영국인은 한국에서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베델 명의의 신문은 일제의 검열과 압수를 피할 수 있었다.
베델의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언론 탄압 속에서도 신속한 보도와 준열한 논설로 한민족의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오죽했으면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통감인 나의 백 마디 발모다 신문의 일필이 한국인을 감동케 하는 힘이 크다. 그중에도 일개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시책을 반대하고 한국인을 선동함이 계속되고, 끊임이 없으니 통감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어니스트 베델.
이 때문에 조선통감부는 1908년에 베델이 일본인을 배척하고 한국인을 선동한단는 이유로 영국 상하이 고등법원에 베델을 제소했고, 유죄 판결을 받은 베델은 상하이로 호송돼 3주간의 금고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베델은 서울에 돌아온 후에도 일제의 탄압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으며, “내가 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베델은 스트레스와 심장질환으로 1909년 5월 1일, 36세의 젊은 나이에 소천해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된다.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애도와 추모의 물결이 끊이질 않았다. 독립투사이자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을 역임했던 박은식은 다음과 같이 베델의 죽음을 탄식했다.
“하늘이 공을 보내고는 다시 데려갔구나. 구주의 의혈남아 동쪽의 어둠을 씻어내고자 삼천리 방방곡곡에 신문을 뿌렸네. 꽃다운 이름 남아서 다함없이 비추리.”
베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던 양기탁은 다음과 같은 추모의 글을 남겼다.
“대영 남자가 대한에 와서 한 신문으로 어두운 밤중을 밝게 비추었네. 온 것도 우연이 아니건만 어찌 급히 빼앗아갔나. 하늘에 이 뜻을 묻고자 하노라.”
베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조문객이 몰렸다. 이와 관련해 ‘대한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양화도(양화진) 장지로 가는 한국인 가운데 곡하는 자들이 상당수였고, 부인들도 배설 공(公)의 집 근처에서 통곡했다. 영국 목사 터너가 장례식을 인도하고 한국 목사 전덕기가 기도한 뒤 성분(관을 묻고 묘를 흙으로 쌓아 올리는 것)을 하였는데 많은 이들이 분상(봉분) 앞에서 절하며 그를 기렸다. 장지까지 따라온 인원은 내외국인 합쳐서 1000여 명이었다.”
▲베델의 장례식. 1909년 5월 2일 거행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의 장례식에서 수많은 조문객이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로 향하는 베델의 상여를 따르고 있다. 영국 ‘데일리메일’ 기자였던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1869~1931)가 촬영했다.
베델은 숨을 거두면서 “내가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여원히 살아남게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해 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대로 ‘대한매일신보’는 현재까지 ‘서울신문’이라는 이름으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웨스트민스터보다 한국땅 묻히기 원했던 헐버트, 양화진에 잠들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7월 1일,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백발의 미국노인이 워싱턴 D.C의 주미 한국대사관을 나서고 있었다. 그때 한 AP 통신 기자가 그 노인에게 다가가서 4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는 소회를 묻는다. 노인은 어린아이 같이 들뜬 표정으로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이 노인은 한국의 복음화와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헐버트 선교사였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 왕들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장소다. 왕실의 결혼식과 장례식도 이곳에서 치러지며, 내부에는 영국의 역대 왕들과 여왕들뿐만 아니라 각계의 유명인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정치가 처칠, 문학가 세익스피어·찰스 디킨스, 과학자 뉴턴·다윈, 음악가 헨들 등의 묘와 기념비가 있다. 즉,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다는 것은 영국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다.
그럼에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더 소원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했던 헐버트 선교사에게 한국 땅을 다시 밟는 것은 너무나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1949년 광복절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헐버트는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한 달여 만에 인천항에 도착한다.
▲1949년 7월 고종황제의 고문이며 이승만의 스승이자 평생 동지인 호머 헐버트박사가 대통령이된 이승만 박사의 초청으로 40년만에 인천항에 도착하는 모습. 헐버트박사는 3.1만세운동 1주년 기념일에 미국에서 10명의 미국인 독립투사들과 함께 대한민국 건국 첫번째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그러나 고령과 여독으로 곧바로 병원에 입원을 했고, 꿈에 그리던 한국 땅을 밟은 지 일주일 만에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헐버트의 장례는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으로 장엄하게 치러졌으며 그의 유해는 그가 바라던대로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 그리고 그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헐버트가 무엇보다 마음 아파했던 것은 광복 뒤 찾아온 분단 소식이었다. 헐버트이 아들 윌리엄 헐버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친께서는 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해방된 한국이 자유롭고도 독립된 국가가 되기를 40년 동안이나 염원하면서 살았으며, 일생 동안 그 소망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해방된 이후 한국은 핏줄이 같은 민족이면서도 타의에 의해 제멋대로 그어진 38선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었을 때, 당신께서는 깊은 실의와 슬픔에 빠졌었습니다. 통일된 한국이 그러한 역경을 딛고 일일서서 자신에게 그토록 소중하고도 찬란한 미래를 이룩하게 되는 것이 선친의 간절한 소망이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양화진의 헐버트의 묘비.⊙
11.14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 조선의 인재들을 일으키다
⑧ 교육과 복음(1)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처음으로 ‘근대교육 제도'의 미션스쿨 설립
빈부귀천와 신분고하 막론한 보편적 성격의 조선 교육의 ‘대혁명’
복음 전하는 조선 사역자 길러내고자 했던 아펜젤러의 ‘배재학당’
배재학당→독립협회→독립신문→만민공동회...민중계몽의 요람
조선 여성들 깨우친 최초의 여성교육기관, 스크랜턴의 ‘이화학당’
‘기독교 배척운동’·‘영아 소동’에 한때 위기 맞기도 했던 교육사업
두 사건으로 오히려 선교 더욱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길이 열려
전덕기·이상재·안창호·이승만·김구·최남선 등 민족지도자들 배출
▲현재 서울 중구 정동 34번지에 소재한 배재학당 외관 전경.
우리나라에 근대식 교육제도가 도입되기 전까지 조선의 교육 실태는 어땠을까. 당시 보편적인 교육기관으로 서향과 향교가 있었는데, 각각 오늘날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정도에 해당하는 교육이었다. 교육 내용은 유교의 기본 경전인 사서오경(四書五經) 중심의 인문교육을 숭상했으며 오늘날의 과학과 의학 등을 포함하는 기술과 실업 교육은 천시하는 분위기였다. 또한 당시 유교 교육은 일반 서민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양반 사대부층 자제들을 대상으로 조선의 관리 등용제도인 과거시험을 위한 교육에 치중돼 있었다.
유학 중심의 구식 교육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교육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과 함께 이어진 개항 이후다. 당시 개항지 중 한곳이었던 함경남도 원산의 주민들이 젊은 세대들에게 신지식을 교육해 외세에 맞설 인재로 키우기 위해 1883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인 ‘원산학사’를 세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가 민간인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세워졌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
그리고 2년 뒤인 1885년부터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서양식’ 근대 교육제도를 도입한 미션스쿨들이 설립되기 시작한다.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은 전통적인 교육 체계와는 다르게 남녀노소, 빈부귀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 교육의 대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1885년 제물포 통해 조선 입국한 아펜젤러, ‘배재학당’을 세우다
▲배재학당 최초 설립시 본관의 모습.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학교는 헨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가 세운 배재학당이다. 아펜젤러는 1882년 펜실베니아주의 프랭클린 앤 마셜 칼리지를 졸업하고, 뉴저지주에 위치한 감리교신학교인 드류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이후 1884년 미국 감리교 선교위원회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이듬해인 1885년 2월 3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해 두 달 만인 동년 4월 5일 부활절에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한다. 당시 27세의 청년이었던 아펜젤러는 제물포에 입항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적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 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안타깝게도 아펜젤러는 조선에 온 17년째 되는 해인 1902년 6월 목포에서 열릴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예기치 않은 선박 충돌 사고로 순교하고 만다. 44세의 이른 나이에 순교한 아펜젤러는 17년간 많은 사역을 감당했지만,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척박한 교육의 땅인 조선에 교회와 함께 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1885년 4월 5일,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한 아펜젤러는 처음부터 교육을 통한 선교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같은해 7월 서울 정동 언덕에 있던 의사 스크랜턴 선교사의 옆집 한옥 한 채를 사서 방 두 칸 벽을 헐어 서재 겸 교실로 만들고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첫 학생은 광혜원 의사가 되기 위해 영어를 배우고 싶어 하던 이겸라와 고영필이라는 두 청년이었다. 이렇게 ‘배재학당’이 그해 8월 3일에 시작됐다.
당시 수업료도 안 받고 담배나 쌀, 점심값도 학생들에게 공짜로 제공했지만, 학생들이 자꾸 중도에 포기하거나 도망을 치는 바람에 수업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개교 시절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 선교 학교는 1886년 6월 8일에 시작되어 7월 2일까지 수업이 계속되었는데 학생은 6명이었다. 오래지 않아 한 학생은 시골에 일이 있다고 떠나버리고, 또 한 명은 6월이 외국어 배우기에 부적당한 달이라는 이유로 떠나버렸으며, 또 다른 한 명은 가족의 상사(喪事)가 있다고 오지 않았다.”
▲아펜젤러 선교사가가 직접찍은 배재학당 초기 모습과 고종이 하사했던 배재학당 현판(오른쪽 위).
아펜젤러가 ‘1886년 6월 8일에 학교가 시작됐다’고 표현한 것은 그날이 바로 감리교 선교부의 공인을 얻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1887년 2월 고종은 나라의 인재를 배양하라는 뜻으로 아펜젤러에게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 간판을 하사해 국가공인 학교로 승인했다. 그러자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해, 늘어나는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건물이 필요했다. 뜻있는 미국인들의 후원으로 1887년에 르네상스식 벽돌 학교 건물이 완성된다.
당시 조선의 근대식 학교인 배재학당에서는 웃지 못할 광경들이 연출됐는데, 주로 20~30대 인 학생들은 대부분 결혼을 해서 자녀들을 몇 명씩이나 둔 경우가 많았다. 학생들은 쉬는 시간이면 밖에 나와서 도포에 갓을 쓴 채 긴 담뱃대를 입에 물고 담배를 피웠다. 양반 자제들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등교를 하기도 했는데 양반 체통을 중시하다 보니 학교에 와서도 각종 잔심부름을 하인들에게 시켰다. 심지어 체육 시간에 공을 차는 일도 하인들의 몫이 됐다. 이런 광경은 차츰 학교 측의 끊임없는 설득으로 사라졌다.
▲1887년 배재학당의 학생들.
아펠젤러는 기독교 정신에 따라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 當爲人役)’을 배재학당의 교훈으로 삼았다. 이는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마태복음 20장 26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아펜젤러는 단순히 근대 학문의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스스로가 조선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인 사역자를 길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1888년 아펜젤러가 미 감리교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1887년 9월부터 배재학당 내 신학부를 설치해 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쳤다.
배재학당은 그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조선의 인재들을 배출했다. 개화기 지식인 서재필과 윤치호,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한글학자 주시경,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의학자 오긍선 등이 있으며, 문인으로는 ‘물레방아’ 등으로 한국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소설가 나도향과, 시집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시인 김소월 등도 배재학당이 배출한 인재들이다.
◇배재학당의 인재들, 민중 계몽운동과 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다
▲독립협회의 멤버들. 이들 대부분은 배재학당 출신들 이었다.
배재학당은 우니라라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인 ‘독립협회’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배재학당 학상회인 협성회는 민주적 회의 진행 방식에 입각한 공개토론회를 매주 개최해 사회의식과 민주주의 의식을 함양한 청년들을 양성했는데, 이 청년들이 1896년 서재필의 주도 아래 설립된 독립협회의 주축이 됐다.
독립협회는 당시의 정부 정책을 비난하는 토론회와 강연회 등의 개최를 통해 적극적인 국민 계몽운동을 펼쳐 나갔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만민공동회’ 개최였다.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대중 집회에는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최초의 만민공동회는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개최됐는데, 약 1만 명의 서울 시민이 보였다. 당시 서울 인구가 17만 명 가량 됐음을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의 집회였다. 무엇보다 만민공동회는 단순한 집회가 아니라 정치 및 사회 현안의 공론화 과정을 통해 도출된 국민적 합의를 정책에 반영하고자 하는 참여 민주주의의 장이었다. 거의 날마다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시민들은 정부의 외세 의존 정책을 비판하고 의회정치의 실시 등 혁신적인 국정개혁을 요구했다.
그때까지 이 땅의 백성들은 어디까지나 왕과 지배층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였지 정치 참여자들이 아니었다. 지배층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참다못해 봉기를 일으켜 자신들의 불만을 표출하면 조정(朝廷)은 이를 난(亂)으로 규정하고 반역죄로 다스렸다. 그러나 이제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통해 세상이 돌아가는 판세를 이해하고, 그것에 맞게 자신들의 요구를 주장하는 대중 집회를 개최함에 따라 백성들은 더 이상 다스림을 받는 피동적 존재가 아니라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주체로 발전하게 됐다.
이러한 민중의 움직임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군대를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나 만민공동회를 통해 각성한 백성들의 근대적 민주 정신까지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훗날 민중들에 의한 독립운동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됐으며, 3·1 운동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배재학당에서 배운 학생들이 민족, 민주, 정의의 개념 등을 실제로 행동해 옮겼던 것의 결과들이었던 것이다.
결국 배재학당에서 독립협회가 잉태됐고, 독립협회가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간행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했으며, 민만공동회는 민주주의와 자유민권 사상을 시민들 사이에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는 배재학당의 근대식 교육을 통해 세상에 눈을 뜬 청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민중 계몽운동과 민족 독립운동의 요람이자 구심점이 됐던 배재학당은 오늘날 배재중·고등학교와 배재대학교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배재학당 신학부는 현재 서대문구에 위치한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모체가 됐다.
◇척박한 조선 땅에서 여성 평등 교육에 헌신한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
▲1910년대 이화학당의 저학년생들의 모습.
남성들을 위한 근대 교육기관으로 배재학당이 있었다면, 이와 쌍벽을 이루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여성교육기관으로는 이화학당이 있었다. 이화학당은 1886년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가 유교적 인습에 얽매여 배움이 기회를 얻지 못했던 조선 여성들을 깨우치면서 기독교적인 인생관을 가질 수 있게 할 목적으로 정동에 설치한 여성 전용 학교로. 오늘날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대이 전신이다.
메리 스크랜턴은 183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감리교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신앙심이 남달랐으며 해외 선교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1853년 W.T. 스크랜턴과 결혼했지만 19년만에 남편과 사별한다. 이후 외아들 윌리엄이 의료를 통한 조선 선교를 결심하자 자신도 선교사로 여생을 헌신할 뜻을 굳히고 1885년 5월 아들 부부 및 어린 손녀와 함게 조선땅을 밟게 된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52세 였다.
메리 스크랜턴은 조선에 첫 서양식 민간 병원인 정동병원을 세워 가난한 자들에게 무료진료를 베풀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를 도우며 척박한 조선의 땅에서 여성 평등 교육에도 헌신하며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그녀가 이화학당을 설립한 것은 조선 사회에서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받던 여성들을 당당한 교육의 주체로 세운 가히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당시 메리 스크랜턴은 학교 설립을 준비하며 많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학교 건물이 완성되어 학생들을 모집하면 배움에 목마른 여성들이 많이 몰려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학생 모집부터 쉽지 않았다.
이유는 먼저 당시 서양인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의심과 편견 때문이었다. 당시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의 어린아이들을 몰래 데려다가 잡아먹는다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에 무지했던 부모들은 선교사들에게 의심과 경계를 나타내며 아이들을 단속했다. 당시 메리 스크랜턴의 별명도 ‘서양 도깨비’였다. 서양인이 많지 않았던 시절 파란 눈의 금발 머리를 가진 메리 스크랜턴이 조선 사람들에게는 마치 도깨비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화학당 설립당시(왼쪽)와 설립자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
이화학당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가 된 김점동은 그녀가 10세 때 선교사의 일을 돕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이화학당에 처음 가서 스크랜턴 부인을 만났을 때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열 살 때 스크랜턴 부인을 처음 만나러 가게 되었다. 매우 추운 날씨여서 부인이 나를 난로 가까이 오라고 했는데 나는 부인이 나를 난로에 잡아넣어 태워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러나 부인의 친절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게 했다.”
이화학당 학생 모집이 어려웠던 두 번째 이유는 조선의 뿌리 깊은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의 굴레와 내외법(內外法) 때문이었다. 당시까지도 여자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을 뿐 아니라, 철저한 남녀유별 사상에 입각한 내외법으로 인해 여자들은 밤에만 외출할 수 있던 시대였던 것이다.
결국 학생 모집을 시작한지 약 1년이 지나서야 메리 스크랜턴은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이화학당의 첫 학생을 받게 된다. 언젠가 왕후의 영어 통역관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그 학생은 고위 관리의 첩이었는데, 병으로 석달만에 공부를 그만두고 만다.
이어 두 번째 학생으로 ‘꽃님이’라는 열 살배기 소녀가 왔다. 집이 너무 가난해 딸을 부양할 수 없었던 그녀의 어머니가 데려다 맡긴 아이였다. 그런데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얼마 후 아이의 어머니가 딸을 도로 데리고 가겠다며 찾아온 것이다. 주변에서 ‘처음에는 좋은 음식과 옷을 주지만 나중에 미국으로 데려갈 것’이라며 부추겼기 때문이다. 결국 메리 스크랜턴은 꽃님이를 미국으로 데려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써 주면서 어머니를 안심시킨 후에야 아이를 계속 이화학당에 데리고 있을 수 있었다. 이 꽃님이가 이화학당 최초의 영구학생(학교 과정을 중도에서 멈추지 않고 끝까지 마친 학생)이 된다.
두 번째 영구학생으로 ‘별단이’라는 아이가 들어왔는데, 못된 전염병에 걸린 채 길바닥에 버려져 있던 한 여인의 딸이었다. 그리고 네 번째로 들어온 학생이 훗날 조선 최초의 여의사가 된 박에스더(김점동)였다. 메리 스크랜턴은 처음에는 당시 양반집의 자녀들을 학생으로 구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가난한 집의 아이들을 학생으로 얻게 됐다.
이후 서양 선교사들을 바라보는 조선인들의 시선이 조금씩 바뀌면서 학생들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87년 명성황후로부터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학교명을 하사받으며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교육기관이 된다. ‘이화(梨花)’는 배꽃이라는 뜻으로,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으로 내린 이름이었다. 물론 당시 이화학당이 있었던 정동 일대가 배밭이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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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인정 받고 더욱 박차 가하려는 찰나 반포된 ‘예수교 전도 금지령’
▲명동성당이 준공될 무렵인 1898년의 모습. 당시 천주교 측과 고종은 명동성당 건립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등 미션 스쿨들이 차츰 자리를 잡아가던 중 예기치 않던 위기가 오게 된다. 국가로부터 교육기관으로 정식 인정을 받은 여세를 몰아 선교 활동과 교육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려는 찰나 조선 정부가 1988년 4월에 반포한 ‘예수교 전도 금지령’ 때문에 발목을 꽁꽁 묶이게 된 것이다.
당시 천주교 측과 정부는 명동성당 건립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고종이 건축 중단 요구를 천주교 측이 받아들이지 않자 이에 분개한 고종이 천주교를 탄압할 목적으로 ‘예수교 전도 금지령’을 반포한 것이다. 이로 인해 천주교뿐만 아니라 애꿎은 개신교 선교사들까지 선교 활동에 지장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약 한달여 뒤에는 조선 민초들 사이에서 선교사들을 몰아내자는 기독교 배척 운동이 발생한다. 이는 전도 금지령 후 선교사들이 대외 활동이 일절 금지된 1888년 6월,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 아이들을 유괴해 잡아먹고 눈알은 사진기 렌즈로 쓴다는 등의 해괴한 소문이 장안에 돌기 시작해 소위 ‘영아 소동(Baby Riot)’이라 알려진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 흥분한 민초들의 분노가 소요사태로까지 발전해 당시 선교사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 선교사들은 ‘서양 도깨비’ 등으로 불리며 조선 민중들에게 의심과 경계의 대상이었는데, 아이를 유괴해 잡아먹는다는 혐의까지 뒤집어썼으니 헛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은 민초들이 흥분해 과격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다. 민초들은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와 병원에 몰려가 아이를 내놓으라고 악을 쓰며 난동을 부렸다. 정동에 있던 이화학당과 배재학당도 무사할 리 없었다. 흥분한 군중들이 몰려가 사택에 돌을 던졌고, 선교사 집에 고용된 한국인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했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선교사들은 자국 공사관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했고,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 외국 공사관은 조선 정부에 엄중하게 항의하는 한편, 인천 제물포항에 주둔하고 있던 자국함대 장병들을 신속하게 서울로 이동시켜 무력시위까지 펼쳤다. 이에 조선 정부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라는 내용의 고시문(告示文)을 내걸며 강력한 단속을 시행해 소요사태는 겨우 진정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그런데 ‘영아 소동’은 표면상으로는 선교사들에 대한 근거 없는 괴소문이 확산되며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이면에는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과 연계해 추진되는 개화파 세력의 근대화 운동에 불만을 품은 수구파 보수 세력의 저항이 숨어 있었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한 1885년 이후 사회 분위기가 개혁 쪽으로 흐르는 것을 우려해 선교사를 모함하는 헛소문을 퍼뜨려 개화파 세력의 기세를 꺾으려 했던 것이다.
◇‘영아 소동’,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오해를 오히려 불식시키다
▲'영아 소동'으로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오해가 불식됐을 뿐 아니라 선교사의 지위 및 선교의 자유도 어느 정도 보장이 됐다. /CBS 화면 캡처
영아 소동은 약 6주일이 지나면서 진정되기 시작했는데, 선교사들에게는 조선에 들어온 후 겪는 가장 큰 위기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소동을 통해 얻은 수확도 적지 않다. 크게 두 가지로, 첫 번째는 조선 민초들이 헛소문 유포자 처벌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확인하면서 정부가 외국 선교사들을 보호한다는 자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기독교와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오해가 상당 부분 불식됐을 뿐 아니라 선교사의 지위 및 선교의 자유도 어느 정도 보장이 됐다.
특히 같은해 여름 서울 근교에서 전염병이 유행해 환자들이 많이 발생했을 때,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진료 활동을 목격한 사람들은 선교사들을 더욱 신뢰하게 됐고,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영아 소동’을 겪고 난 후, 스크랜턴 선교사는 1989년에 작성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는 가까스로 민중 시험기를 통과했습니다. 전에 우리가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하면 비웃기만 하던 그들이 이제 우리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단지, 한마음으로 자신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습니다. 그것을 볼 때 우리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또 기운이 나는지 모릅니다. 확신하는 바는 우리가 한국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아 소동을 통한 두 번째 수확은 훗날 한국 교회의 위대한 목회자로 활약하게 될 인물들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표적 인물이 ‘조선의 바울’로 불린 한국 최초의 목사 김창식과 교회사에서 대표적인 민중 목회자로 꼽히는 전덕기이다.
김창식은 황해도 수안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무작정 집을 떠나 전국을 떠돌며 살았던 그는 돈도 배경도 배운것도 없어 머슴살이, 마부, 지게꾼, 장돌뱅이 등 밑바닥 생활을 전전긍긍했다. 영아 소동이 일어났던 당시 남대문에 살고 있던 김창식은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괴소문의 진위를 밝히고 싶어 당시 조선에 온지 얼마 안 된 프랭클린 올링거 선교사 집이 ‘행랑아범’으로 위장 취업을 했다.
프랭클린 올링거 선교사는 배재학당 안에 삼문출판사를 설립해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잡지를 출간하고, 여러 전도문서를 출판하는 등 한국 기독교 문서선교이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김창식은 바로 이 올링거 선교사의 집에 일꾼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김창식이 올링거 선교사 부부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히 살폈지만 조금도 해괴망측한 일을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조선의 양반들과는 달리 하인에 불과한 그를 따뜻하게 가족처럼 대해주는 선교사 부부에게 깊은 감동을 받아 1890년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다. 훗날 김창식은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01년 김창식 목사 목사 안수 기념 사진.
“내가 맨 처음 일하던 집은 미국 사람 올링거 목사의 집이었는데 나는 그 집에서 일하는 동안에 주인 내외의 생활을 매우 주의하여 살펴봤으나 아무리 살필지라도 조금도 불의한 행동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몇 해 동안 그 집에서 일하는 가운데 그 집 내외가 가히 본받을 만한 사람인 줄 깨닫고 그들에게 감화를 받아 예수 믿기를 작정하였다.”
이후 김창식은 1892년 감리교 전도사가 되어 평야 선교 개척자로 활동했고, 1901년 5월 상동교회에서 조선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는다. 그뒤 1924년 은퇴하기까지 전국을 순행하며 복음의 불모지에 48개의 교회를 개척했으며, 125곳의 교회를 맡아서 섬겼다. 그가 조선의 바울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선교사에 감회돼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위해 일생 바치게 된 전덕기 목사
전덕기 역시 김창식과 비슷한 경험을 통해 기독교인이 됐다. 영아 소동이 발생한 당시 남대문에서 삼촌을 도와 숯 장사를 하던 그는 헛소문을 듣고 흥분한 군중들과 함께 정동으로 가서 선교사의 집에 돌을 던졌다. 이후 우연한 인연으로 스크랜턴 선교사의 집에서 요리사로 일하게 됐는데 하인 신분인 자신을 가족처럼 대해주는 스크랜턴 가족의 행동에 감화 돼 1896년에 세례를 받고 상동교회에 출석하게 된다. 이후 전덕기는 1907년 상동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 남대문 시장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헌신했다.
당시는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는데, 이러한 참상은 특히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 속에서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그 누구도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를 거둬 주겠다고 선뜻 나서지 않을 때, 죽은 사람이 교인이든 비교인이든 가리지 않고 팔을 걷고 나선 사람이 전덕기 목사였다.
연고 없이 오랫동안 방치대 있던 시체는 부패돼 냄새가 심할뿐더러 대개 시체 썩은 물로 방안이 흥건했다. 때문에 전덕기는 늘 마른 쑥과 나막신, 종이 관(棺)을 가지고 다녔다. 마른 쑥으로 콧구멍을 막은 후 나막신을 신고 방안에 들어가 종이 관에 망자를 묻어 줬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그대로 실천한 전덕기 목사로 인해 상동교회는 그가 담임목사를 맡은지 5년 만에 교인수가 약 3000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 전국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했다.
▲상동교회 제6대 담임목사인 전덕기 목사(왼쪽)와 1901년 완공된 상동교회 전경. /보훈처
아울러 전덕기는 이상재, 안창호, 이승만, 김구, 이회영, 이동녕, 최남선, 남궁억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민족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움직이며 소통과 통합의 리더십으로 이들을 상동교회로 모이게 했다. 독립운동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가 조직된 곳도,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세계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한 우국지사들이 모여 헤이그 특사 파견에 대한 모의를 진행했던 곳도 바로 상동교회 지하실이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최성모, 오화영, 이필주, 신석구 등 4인도 상동교회 출신이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그대로 실천했던 민중 목회자이자 항일민족운동 거목이었던 전덕기는 한일합방 이후 민족운동의 뿌리를 뽑으려는 일제에 검거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후 휴유증으로 1914년 3월, 39세의 나이로 순교하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명동성당 건립을 둘러싼 천주교 측과 조선 정부와의 갈등도 사용하시고, 정부 내 수구파와 개화파 세력들 간의 주도권 싸움에서 기인한 정치적 계략까지도 다 사용하셔서 선교 활동을 위협하는 영아 소동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어우러져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의도하신바, 즉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선교 활동을 더욱더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김창식과 전덕기 같은 걸출한 인물들을 부르시는 통로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11.16 조선의 여성‧고아들을 겨레의 스승으로 키워낸 선교사들⑨ 교육과 복음(2)조선 여성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여학교들 설립한 메리 스크랜턴
한국 최초의 고아원 설립해 거리 고아들 데려와 가르친 언더우드
1000개 교회‧300개 학교 세우고 수백명 목사 배출한 사무엘 모펫
임시정부 부주석 지낸 독립운동가 김규식도 선교사가 키운 고아
민족 지도자로 우뚝 섰던 도산 안창호 선생도 기독교 학교 출신
미션스쿨 ‘교육대혁명’,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에도 밑바탕 돼
메리 스크랜턴은 이화학당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후배 선교사들에게 학교 운영을 맡기고 1984년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과 함께 상동(현 남대문 지장)으로 거처를 옮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민간병원인 정동병원(시병원)을 세운 윌리엄 스크랜턴은 ‘민중이 있는 곳에 병원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서울의 중심에 있던 병원을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 상동으로 옮긴다.
이때 메리 스크랜턴도 함께 거처를 옮겨 아들을 도와 병원 내에 상동교회를 설립하고 시장 바닥의 여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한다. 그때까지도 조선시대는 남녀 구별이 엄격한 유교 사회였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접근하는 일은 여성들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여성 선교사들의 숫자는 너무 적었다. 그래서 메리 스크랜턴이 생각해 낸 것이 ‘전도부인’ 제도였다.
전도부인 제도는 한국 여성이 한국 여성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교훈시켜 앞장세웠던 제도였다. 성경교육을 마친 여성(전도부인)들이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안방의 부녀자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메리 스크랜턴이 1898년에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총 8명의 전도부인들이 그녀와 함께 동역하고 있었다. 전도부인들은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메리 스크랜턴은 상동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이화학당을 돌보며 유교적 가부장제의 억압 속에 살던 여성들에게 해방의 기쁨을 안겨줬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의 여성 교육을 향한 열정이 이화학당 설립 및 운영에만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여성 교육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상동교회 내 공옥여학교, 시흥의 무지리여학교, 이천이 여자매일학교(현 이천양정여자고등학교), 수원의 삼일소학교(현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등을 설립했다.
▲이화학당 학생들과 메리 스크랜튼 여사. /스크랜튼 기념사업회
또한 진명여학교(현 진명여자고등학교) 및 숙명여학교(현 숙명여자대학교)의 설립을 돕는 등 다양한 형태로 조선 여성들을 일깨우고 교육하는데 진력했다. 메리 스크랜턴은 상동교회(현재 남대문시장 내 위치)를 비롯해 아현교회, 동대문교회 등 서울의 주요 감리교 교회를 설립했고,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선교활동과 여성교육을 위해 살다가 1909년 10월8일, 75세의 나이로 하나님 품에 안겼다.
한국 여성 교육의 개척자이자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로 활동한 메리 스크랜턴은 본인의 희망에 따라 양화진의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고, 그녀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턴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를 뿌렸기 때문이다.”
◇“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하나님 음성 듣고 조선 오게 된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남성들을 위한 배재학당을 세우고, 메리 스크랜턴이 이화학당을 설립해 조선 여성 교육에 힘쓰고자 할 때, 길에 버려진 고아들을 눈여겨보고 이들에게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인 이가 있었다. 그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 한국이름 원두우) 선교사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5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했다. 1881년 뉴욕대를 졸업하고 뉴버런스웍(New Brunswick)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1884년 11월 장로교 목사가 됐다. 그는 목사 안수를 받은 지 한달 만에 바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885년 1월25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약 2개월 간 조선어 공부를 한 후, 1885년 4월 5일 장로교 소속 한국 최초의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는다.
그가 조선에 오게 된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원래 언더우드는 어렸을 때, 인도에서 온 어떤 사람의 설교를 듣고 그때부터 인도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가 신학교에 다니고 있던 어느 날, 1882년에 체결한 조약에 의해 문호가 개방된 ‘은둔의 나라’ 조선에 1200만~1300만 명의 사람들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의 언더우드 선교사의 모습.
문호가 개방된 지 1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교회가 선교를 위해 아무런 준비 활동도 하지 않고 있음에 격동한 언더우드는 직접 조선에 갈 선교사를 물색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당시는 ‘조선에 들어가기는 너무 이르다’는 인식이 퍼져있던 때라 아무도 지원을 하지 않았고,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하려는 교회도 없었다. 그때, 언더우드의 가슴속에서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라는 메시지가 울려 펴졌다.
그러나 자신은 인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고한 소명감을 품고서 인도가 필요로 하는 의학 공부를 하며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울림을 애써 외면한다. 때마침 뉴욕의 개혁교회로부터 의학 공부에 지장이 없는 조건으로 목사직 초청을 받았는데, 언더우드가 이를 수락하는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으려는 순간 “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에 따르기로 결심하게 된다.
결국 ‘은둔의 나라’로 부르시는 하나님께 순종해 조선 땅을 밟은 언더우드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제중원에서 약제사로 근무하면서, 제중원 내 의학교 학생들에게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 이처럼 제중원에서 교육과 선교 활동을 시작한 언더우드는 1886년 5월 정동에 있는 자신의 집에 한국 최초의 고아원인 언더우드 학당을 설립하고 거리의 고아들을 데려다가 돌보며 가르치기 시작한다.
▲초창기 언더우드 학당.
이듬해 9월에는 자택의 사랑방에 교회를 설립했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장로교 교회인 새문안교회다. 그후 고아원은 새문안교회에서 운영했으며, 초기에는 언더우드 학당,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 구세학당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1905년 현재의 경신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신학교로 바뀌게 됐다. 이어 1915년 4월 언더우드의 노력으로 경신학교 대학부가 설립됐는데 이 대학부를 모체로 2년 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가 설립된다.
◇언더우드가 극진히 간호해 살려낸 네 살 아이가 임시정부 부주석이 되다
언더우드 학당에서도 뛰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됐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규식이다. 김규식은 언더우드와 개인적으로도 각별한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어느 날 남자 하나가 네 살배기 아이를 고아원에 데리고 왔다. 관직에 있던 아이의 부친은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귀향을 갔고, 모친은 사망해 돌봐 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가 너무 어려서 도저히 맡을 수가 없었던 언더우드는 그 아이를 다시 친척들에게 돌려보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가 매우 아픈데도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자신의 몸 상태가 매우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강원도 홍천까지 그 아이를 찾아간다.
당시 아이는 너무 굶주린 나머지 필사적으로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내어 삼키려고까지 했다. 이대로 두면 곧 죽을 것이라고 직감한 언더우드는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극진히 간호해 살려낸다. 이후 아이는 언더우드 학당에서 서양식 근대교육을 받으며 훌륭하게 성장했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영어를 익히는 등 어릴 때부터 그 총명함이 남달랐다. 이 아이가 바로 김규식이다.
▲언더우드의 고아원에 들어왔던 당시의 김규식의 모습.
김규식은 언더우드 학당을 마친 후 서재필이 경영하는 ‘독립신문’에서 근무하다가 1896년에 서재필의 권유와 언더우드의 지원을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04년에 귀국한 김규식은 언더우드의 비서로 일하며 새문안교회와 YMCA를 중심으로 선교와 교육 활동에 힘쓰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곳에서 김규식은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해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참석했으며, 임시정부 부주석으로 주석 김구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오늘날 김규식은 김구, 여운형, 이승만, 신채호, 안창호, 조만식 등과 함께 한국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언더우드의 사랑으로 그의 생애가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창호 선생 등 국민들 일깨우는 정신적 지도자들 키워냈던 언더우드 학당
김규식 뿐만아 아니라 언더우드 학당에 입학해 신학문과 기독교를 접한 후 민족의 지도자이자 겨레의 스승으로 우뚝 선 인재가 있었다.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1878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선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안창호는 1895년에 발발한 청일전쟁이 각국의 예상을 깨고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신학문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곧 상경해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구세학당(언더우드 학당)에 입학한다. 신학문을 습득하는 것이야말로 나라와 민족을 위한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서당에서 한문만 익혀오던 안창호에게 거기서 접한 세계사, 과학, 산수, 지리 등 교과 과목은 너무나도 신기하고 새로운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구세학당에서 기독교적 민족주의를 배운다. 즉, 편협한 민족주의는 집단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아 전쟁을 야기하는 반면, 예수님의 사랑에 기초한 민족주의는 모든 민족을 섬기기 위해 자민족의 자존과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인류의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안창호이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는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안창호는 1897년 서재필이 창립한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당시 독립협회는 서민과 학생들을 포함한 각계각층 사람들을 모아 ‘만민 공동회’라는 대중 집회를 열었는데, 안창호도 이 집회에 참여해 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민족계몽과 교육의 중요성을 호소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독립협회 평양지회 회원으로 활동할 때의 도산 안창호(가운데)의 모습.
안창호의 위대함은 늘 그의 신념을 삶 속에서 실천했다는 점이다. 그는 1899년 불과 22세의 나이로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에 최초의 남녀공학인 점진학교를 설립한다. 그리고 자신도 더 많은 학문을 배우기 위해 1902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안창호는 교포들의 계몽과 교육을 위해 힘쓰면서 한인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던 중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국권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귀국해 전덕기 목사, 이승만, 김구, 이회영 등과 함께 신민회를 결성하고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선다.
이승만이 외교활동에 중점을 둔 독립운동을 강조하고, 김구 등은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을 때, 안창호는 보다 긴 안목에서 국민들을 교육하고 계몽함으로써 독립을 이루고자 했다. 그는 1907년 평양에 대성학교(大城學校)를 설립하고, 민족 계몽을 위한 활발한 교육 활동을 전개한다. ‘대성(大城)’이라는 학교명처럼 크게 성공할 인물들을 양성해 민족 독립을 위한 중심세력을오 키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는 말을 실천한 인물이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1878. 11. 9.~1938. 3. 10.)
안창호 사상의 핵심은 교육을 통해 민족 혁신을 이루는 것이었으며, 민족 혁신은 자아 혁신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자아 혁신은 바로 인격 혁신이라는 것이었다. 즉, 각자가 인격 혁신을 이루면 이것이 곧 민족 혁신으로 이어져 민족의 독립과 번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그 바탕에는 기독교 사상이 깔려 있었다. 아울러 안창호는 자신의 신념을 평생 몸소 실천했으며, 그의 삶 자체가 교훈이었기에 겨레의 스승으로 일컬어진다.
이처럼 언더우드 학당에서 교육을 받은 인재들은 평생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국민들을 일깨우는 정신적인 지도자들로 키워졌다.
◇선교사들, 서울‧평양‧원산‧개성‧공주‧대구‧목포‧부산 등에 미션스쿨 세워
도산 안창호 선생의 경우에서 보듯, 청일전쟁 직후 한반도 전역에 신교육에 대한 향학열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청나라가 일본에 패했다는 사실은 몇백 년 동안 중국과 종속관계를 맺어왔던 조선 사람들에게 그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계관의 대변혁을 일으키는 사건이었다.
따라서 청일전쟁 이후 러일전쟁을 거쳐 1910년 한일합방이 될 때까지 기독교 신자만 늘어난 게 아니라 신교육을 가르치는 미션스쿨의 수도 급격히 증가했다. 선교사들은 1905년 을사조약 전후까지 서울, 평양, 원산, 개성, 공주, 대구, 목포, 부산 등지에 기독교 학교를 세웠으며, 이러한 조선의 근대교육은 주로 미국 감리교와 장로교에 의해 주도됐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비롯해 서울의 공옥학교(1896)와 배화학교(1898), 개성의 호수돈여학교, 공주의 영명학교(1905), 평양의 광성학교(1894), 맹아학교(1894), 정진학교(1896) 등은 감리교 계통의 학교였다. 장로교는 경신학교를 시작으로 평양에 숭덕학교(1894), 숭실학교(1897), 평양신학교(1901), 숭의학교(1903)를 세우고, 부산에 일신여학교(1895), 목포에 정명학교(1898), 원산에 진성여학교(1904), 대구에 계성학교(1906) 등을 세웠다.
국권피탈 직전인 1910년 초반까지 한반도 전역에 퍼져 있는 미션스쿨 수는 비록 통계마다 차이는 있으나, 천주교와 개신교 계열의 학교를 모두 합쳐 대략 800-950여 개 정도 존재했으며, 그중 500-600여 개가 장로교 계통이고, 150-200여 개가 김리교 계통의 학교였다. 이처럼 구한말 미션스쿨들이 전국 방방곡곡에 폭발적으로 들어설 수 있었던 데는 고종의 적극적인 후원과 미국 선교본부의 지원이 맞아떨어지며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배재학당 화학수업 광경. 기독교인과 근대국가 인재 양성을 추구한 배재학당에서는 성경과 영어 뿐 아니라 인문‧사회‧자연과학 등 근대교육 교과목을 가르쳤다.
한편, 당시 헐버트 선교사는 기독교 계통이 학교들이 크게 늘어난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한인들은 기질 면에서 보면 기독교의 접근에 대하여는 특히 호의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모든 종교 중에서 가장 합리적이고도 동시에 가장 신비주의적인 기독교가 한국인과 접촉하면서 합리성이나 이상주의적인 면에서 매우 친근함을 발견한다는 데에 한인들의 그와 같은 특수한 감성을 엿볼 수가 있다. ...(중략)... 이와 같은 이론이 옳건 그르건 간에 개신교 선교사에 의한 기독교의 감화는 한인들에 의해 쉽사리 수용되었으며, 10년 동안에 교회와 교회 계통의 학교가 전국의 방방곡곡에 점찍은 듯이 세워졌다.”
즉, 교회가 들어서는 곳마다 미션스쿨도 함께 세워졌던 것을 알수 있는데, 미션스쿨이 늘어날 수 있었던 데는 당시 조선 교육 시스템의 병폐도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교육 시스템의 특징을 짧게 세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로 일부 특정한 계층(양반)만을 위한 교육이었고, 둘째로 교육의 내용이 오직 입신양명을 위한 유학 위주였으며, 셋째로 여성과 천민들은 교육의 기회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설립한 미션스쿨은 특정 계층뿐만이 아니라 가장 비천한 백성들조차도 교육받을 권리를 가졌고, 남성들만이 아니라 여성들도 동일하게 교육의 대상이었으며, 무엇보다 다양한 교과 과정을 통해 다방면의 인재를 양성하는 합리성을 추구했다. 이런 특징들이 잘 어우러져 상승효과를 일으킨 것이 당시 한반도 전역에 미션스쿨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주된 이유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다시 말해 미션스쿨이 추구하는 교육의 이념 및 운영 방식이 남녀노소, 빈부귀천,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열린 개방성과 보편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으며, 또 전국적으로 퍼져 나갈 수 있었다.
이처럼 교육 대혁명의 파도가 한반도 전역을 휩쓸면서 자유, 정의, 평등, 평화, 민주 정신도 함께 퍼지게 되었고, 이러한 정신들은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에도 밑바탕이 됐다. 아울러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우리나라가 신생 독립국 중에서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국가로 발전하는데 원동력이 됐다.
◇26세에 들어와 조선의 복음화‧독립 위해 일생 바친 ‘마포삼열’ 선교사
▲사무엘 모펫(마포삼열) 선교사.
자신의 나라보다 조선을 더 사랑한 미국 출신의 사무엘 모펫(Samuel A. Maffett, 1864-1939) 선교사는 1901년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취임해 근대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는 1890년부터 1936년까지 한국에서 활동하며 1000개의 교회와 300개의 학교를 세우고 수백 명의 목사를 배출했다. 사무엘 모펫 선교사는 한국 이름 ‘마포삼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 인디애나주 매디슨 출생으로 1884년 하노버 대학 신학과에 입학했으나 대학원에서는 화학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박사 과정을 마친 뒤 복음 전파의 사명감을 느끼면서 많은 해외 선교사를 길러낸 매코믹 대학에 1885년에 입학한다.
그가 선교를 위해 한국 땅으로 건너올 당시 조선은 각종 질병이 난무하고 외국인에 대한 배척 또한 심한 상황이었다. 당시 상황을 최초의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알렌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조선의 거리에는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파리, 모기, 날파리들이 떼를 지어 득실거리고 있었으며, 더러운 개천에는 온갖 병균이 들끓고 있다. 또한 집집마다 파리 빈대, 벼룩이 없는 집이 없다. 천연두, 매독, 회충 등은 흔해빠진 병이었고, 종기나 무좀 같은 피부병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을 알고도 모펫 선교사는 조선 선교를 결심했다. 그리고 선교사로 임명받은 뒤 모펫은 1890년 1월 인천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이후 그는 조선을 ‘사명의 땅’으로 생각해 모든 일생을 바쳤다.
모펫 선교사는 1893년 이후에는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또한 1918년-1928년까지 10년 동안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했고, 평양에서 현 숭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숭의여학교를 설립하는 등 많은 학교와 교회를 세웠다.
▲1907년 숭의여학교 학생들의 모습. /숭의학원
1912년 ‘105인 사건’으로 한국의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자, 모펫 선교사는 매큔(George S. McCune, 1872-1941), 에비슨 선교사 등과 함께 이 사건이 사실무근의 날조사건이며 고문 등 비인도적 방법이 자행되고 있다며, 당시의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항의하고 미국의 장로회 본부에 일제의 만행을 보고해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조선을 찾아와 오직 조선민족의 복음화와 독립을 위해 모든 정성을 쏟았던 사무엘 모펫 선교사는 1934년, 70세의 나이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로부터 은퇴하고도 계속 조선에 머물면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서 싸우다가 1936년 일제에 의해 추방됐다. 조선 땅에 묻히기를 바랐던 그는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고 미국으로 귀국했으나 1939년 10월 24일 75세의 일기로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했다.
생전에 “나를 한국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로 한국 땅에 묻히기를 간절히 소원했던 그의 유골은 이 땅을 떠난 지 67년 만인 2006년에 다시 한국 땅에 들어와, 유가족들이 지켜보난 가운데 자신이 설립한 장로회신학대학교 도서관 앞 교정에 묻혔다.⊙
12.26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의 산파가 된 선교사들
⑩ 독립운동‧건국과 복음남편 사망 슬픔에도 30년간 충청지역 전도하고 교회세운 앨리스 샤프 선교사
영명학교 세워 유관순 등 독립운동과 민족재건 일꾼 길러내는 못자리판 역할
美선교사 설립한 교회‧학교서 인쇄한 태극기로 역사적 아우내 장터 만세 시위
노마리아 등 해방후 각 분야서 대한민국 기초 닦았던 인물들 영명학교서 나와
영명학교는 로버트·앨리스 샤프 선교사 헌신과 윌리엄스 선교사 부부의 합작품
윌리엄스, 농촌 우물 개량하는 등 다양한 농촌 개량사업 펼쳐 많은 성과들 거둬
62세때 연합국사령관 맥아더로부터 美군정청 농업 고문으로 돌아온 윌리엄스
윌리엄스 아들 우광복(禹光復)도 2차 대전 군의관·통역장교로 6.25 참전 공헌
우광복, 언더우드 아들 원한경 등 일제 후 한반도 정책 영향 미친 인물들 소개
원한경, 조선신학교·연희전문학교 교장 역임·한국관련 교육서 저술 등 전문가
우광복이 추천한 신실한 크리스천들, 대한민국 수립시 각 분야서 건국에 기여
조선 복음화 위해 젊음 바쳤던 하나님의 사람들, 영명동산 선교사들 묘로 남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 2019년 공주 영명중학교에 세워진 유관순 열사(왼쪽)와 로버트 샤프 선교사(가운데)와 부인 앨리스 샤프 선교사의 동상.
로버트 샤프(Robert A. Sharp, 1872-1906) 선교사는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으로,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교역자로 사역하다 1903년, 31세의 나이에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조선 땅을 밟는다. 처음엔 서울에서 황성기독청년회(YMCA) 초대 이사로 헐버트, 언더우드, 에비슨, 게일 등이 선교사들과 함께 기독교 청년운동을 활발하게 펼쳤고,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했다.
그해 엘리스 해먼드 샤프(Alice H. Sharp, 1871-1972) 선교사와 결혼했고, 2년 뒤 감리교 공주 선교부 책임자로 임명을 받고 공주로 내려온다. 앨리스 샤프는 로버트 샤프 선교사와 같은 캐나다 출신으로 1900년 미국 북감리회 해외여선교회 소속으로 조선에 파송을 받았다. 그녀는 서울에서 스크랜턴 선교사를 도와 이화학당에서 교사로, 상동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와 순회 전도자로 사역했다.
전통적인 도시가 그렇듯 공주도 역시 보수적인 곳이어서 직접적인 전도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시작한 것이 학교였다. 로버트 샤프는 남학생을 위한 명설학당을, 앨리스 샤프는 여학생을 위한 명선학당을 열었다. 이것이 나중엔 영명학교로 이름이 바뀌었고, 지금의 영명중·고등학교의 모체가 됐다.
1905년 11월, 두 사람은 언덕 위에 지하 1층, 지상 2층짜리 예쁜 서양식 건물을 지었다. 일종의 선교부 사무실이자 사택이었다. 이 건물은 지금도 원형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당시 공주 사람들은 이 신기한 건물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었는데, “목사, 당신은 천당에 갈 필요가 없겠소. 이렇게 깨끗하고 좋은 집에서 사니 천당인들 이보다 더 낫겠소?”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조선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신기하고도 멋진 양옥 건물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정작 로버트 샤프 선교사가 이 ‘천당보다 나은’ 사택에 산 기간은 3개월도 채 되지 않는다.
▲1906년 충남 공주 영명학교의 전교생의 모습.
당시 공주는 충청권 지역의 선교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었는데, 선교사들은 공주를 중심으로 인근 논산, 천안은 물론 홍성, 진천, 보은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 도시가 아닌 농촌의 특성상 순회전도는 불가피했다. 1906년 2월 말, 그날도 로버트 샤프 선교사는 사경회 인도 차 논산의 은진 지방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퍼붓는 진눈깨비를 피하느라 한 집에 들어갔다. 거기는 마침 상여를 보관하는 ‘곳집’이었다. 며칠 전 전염병 ‘이질’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실어 나른 상여가 보관된 곳이었다. 그걸 만진 게 화근이 된 로버트 샤프 선교사는 이질에 걸려 그만 3월 15일, 3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만다. 이제 막 제대로 된 사역을 펼치려는 중에 일어난 날벼락 같은 사건이었다. 그렇게 로버트 샤프 선교사는 영명학교 뒷동산에 묻혔다.
가장 충격과 슬픔에 빠진 사람은 당연히 부인 앨리스 샤프 선교사였다. 샤프 부인은 충격 속에서 명선학당을 동료 스웨어러(Wilbur C. Swearer, 1871-1916) 선교사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떠난다. 샤프 부인이 떠나는 날, 학당은 울음바다가 됐다. 샤프 부인의 슬픔도 컸지만 그를 떠나보내는 공주 사람들의 슬픔도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하지만 앨리스 샤프 선교사는 2년뒤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다. “남편이 하던 일을 계속하겠다”며 그녀는 남편 로버트 샤프 선교사가 했듯이 충청지역 곳곳을 다니며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운다. 그 일을 무려 30년이 넘도록 하게 된다. 강경 만동여학교, 논산 영화여학교가 모두 그녀의 헌신으로 세워진 것이다.
◇앨리스 샤프 선교사 양녀가 된 유관순...11세 때 공주 영명학교에 입학
남편 로버트 샤프 선교사와의 사이에 자녀가 없었던 앨리스 샤프 선교사는 가난한 집 자녀들을 후원하고 돌보는 일을 사명처럼 생각했다. 당시 천안 병천에 살던 유관순도 그렇게 해서 앨리스 샤프 선교사의 보살핌을 받게 됐다. 앨리스 샤프 선교사는 유관순이 부모를 설득해 유관순을 양녀로 삼았다. 그리고 유관순은 11세 때인 1913년 경에 공주 영명학교에 입학한다.
▲영명학교 재학시절 13세의 유관순 열사로 추정되는 사진.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앨리스 샤프 선교사가 세운 영명학교는 충청지역 독립운동을 넘어 민족 재건의 일꾼을 길러내는 못자리판 역할을 했다. 영명학교를 떠받치는 두 기둥은 신앙과 애국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의 사회적 실천이라는 감리교의 정신과 맥이 닿아 있다. 영명학교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크나큰 질곡을 거치는 동안 무수한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이름 그대로 영명학교는 ‘캄캄한 시대를 오래도록 환하게 비추고 있는 빛(永明)’이 되었다.
1916년, 앨리스 샤프 선교사는 유관순을 자신이 교사로 재직했던 이화학당 보통과 학생으로 입학시킨다. 가난했던 유관순을 배려해 전액 장학금 혜택을 줬다. 그리고 2년 뒤, 유관순은 이화학당 고등과에 진학한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을 다니면서도 방학 때면 고향에 내려와 모교인 영명학교를 찾아 문맹 퇴치에 앞장섰다.
1919년 3월 1일, 서울‧평양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만세 운동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남대문 시위에도 직접 참여했던 유관순은 일제에 의해 이화학당에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으로 내려와 천안‧연기‧청주 등지의 교회와 학교를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모아 서울 등 주요 도시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을 설명한다. 그리고 미국 감리교 선교사가 설립한 공주 제일교회와 영명학당에서 태극기를 몰래 제작, 준비했다.
드디어 4월 1일 충남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 장날, 장터 어귀에서 몰래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사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정오가 되자 많이 모여든 군중 앞에서 유관순은 열변을 토했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그림. /독립기념관
“여러분, 우리에겐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놈들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방하고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 사람들에게 갖은 학대와 모욕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0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찾고 살아왔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 세계의 여러 약소민족들은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어서고 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을 어찌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
태극기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가 설립한 공주제일교회, 그리고 영명학교에서 인쇄한다. 마침내 수천 명이 참여한 역사적인 아우내 장터 만세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체포된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 옥중 만세운동 등을 하며 끝없이 저항하다가 출옥을 3개월 앞둔 1920년 9월28일,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영명학교 1회 졸업생 황인식, 美군정 고문·충남지사·해양대학 초대학장 등 역임
유관순 열사 뿐 아니라 해방 후 각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았던 걸출한 인물들이 영명학교에서 나왔다. 동경 2‧8 독립선언을 주동한 윤창석, 유관순 열사의 오빠로 공주지역 3‧1운동을 주도했던 유관옥, 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 박사, 전 주일대사 정한범, 연세대 재단 이사장을 지낸 변홍규, 홍콩 총영사 이요한, 충남 도지사를 지낸 황인식,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경찰서장 노마리아, 무의탁자들의 보호자로 불렸던 전밀라 등이 모두 영명이 배출한 인물들이다.
여기서 좀 더 짚어야 할 인물이 황인식 선생이다. 그는 공주의 양반 가문 출신으로 소년 시절 서양문물을 접한 뒤, 충격을 받고 1905년 영명학교에 입학해 1909년 영명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된다. 그리고 당시 조선 최고의 학교이던 평양 숭실학교로 진학한다. 1912년 숭실학교를 졸업하지만,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 공직의 길을 가는 대신 고향으로 내려와 영명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일찌감치 일제로부터 ‘불령선인’(不逞鮮人, 제강점기 식민지통치에 반대하는 조선인을 불온하고 불량한 인물로 지칭한 용어)이란 낙인이 찍힌 그는 끊임없이 일제로부터 감시를 당한다. 그는 1919년엔 공주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기도 한다.
▲영명학교가 배출한 인재 황인식 선생. /공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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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식은 1921년엔 미국으로 건너가 덴버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컬럼비아 사범대학에 진학한다. 그리고 1927년에 귀국해 다시 영명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리고 윌리엄스 교장이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을 당하자 교장 직무대리로 영명학교를 지키는 데 앞장선다. 그것은 생명을 내놓는 일이었다. 그는 1930년부터 윌리엄스 교장이 강제출국을 당한 1940년까지 10년간 무려 세 번이나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른다.
일본 학생에 의한 조선 여학생 성희롱 사건으로 촉발된 1929년 10월 광주학생운동 동맹휴학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구금됐다가 혐의없음으로 풀려났지만, 2년간 교사 자격을 박탈당해야 했다. 또 한번은 1937년 평양 숭실학교 음악 교사였던 안신영이 수업 시간에 ‘불온한 창가’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구속되는데, 여기에 가담했다고 해서 일본 경찰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한다. 그리고 1940년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집에서 잠을 자다가 부인과 함께 끌려가기도 했다.
해방과 함께 황인식 선생에게 빛이 찾아와 미 군정의 고문, 충청남도 도지사, 해양대학 초대 학장을 차례로 역임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신앙과 신념에 따라 일제에 맞서 굽히지 않는 독립운동을 해 왔다.
이처럼 공주의 작은 한 시골 학교인 영명학교는 숱한 독립운동가를 길러내는 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됐다. 당연히 일제도 영명학교와 앨리스 샤프 선교사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결국 앨리스 샤프 선교사는 1940년 일제의 선교사 강제철수 조치에 따라 이 땅에서 쫓겨내고 만다. 남편의 죽음 후 2년간 미국에서 지냈던 시간을 제외하고, 그녀는 38년간이나 조선 땅에서 교회와 학교를 세워 꿈과 희망이 없던 사람들을 복음의 빛 가운데로 이끌며 올바른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승화시켰다.
69세의 나이에 조선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돌아간 앨리스 샤프 선교사는 1972년 LA의 파사데나 지역에 있는 은퇴선교사 양로원에서 101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앨리스 샤프 선교사의 헌신을 기억하는 한인들이 샤프선교사기념사업회를 만들어 그의 헌신적인 삶을 기리기로 한 것이다.
▲로버트 사프 선교사(좌)와 엘리스 샤프 선교사(우) 부부.
사업회는 현재 앨리스 샤프 선교사의 유해를 공주로 가져와 남편 로버트 샤프 선교사와 합장하고, 공주 지역에서 사역했던 미국 선교사들의 사역과 선교지를 돌아보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한국의 기독교 선교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일 등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미국에 있는 한인 청소년들을 공주를 비롯한 국내의 선교 유적지에 보내 민족의 역사와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을 배우도록 할 계획이다. 이역만리 낯선 조선에서 남편을 잃은 충격과 슬픔에도 묵묵하게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연약한 한 여성 선교사의 삶은 이 땅에 아름다운 열매들을 남기게 됐다.
◇영명학교, 로버트·앨리스 샤프 선교사와 후임 윌리엄스 선교사 부부의 합작품
“지금부터 110년 전, 16살 된 어느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길가에서 ‘윌리엄스’라는 당시 공주 주재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됩니다. 윌리엄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영명초등학교를 늦은 나이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협성신학대를 졸업한 후 원산에 있는 감리교 선교사들이 설립한 루씨학교의 성경 교사 겸 조선어 교사로 부름을 받게 됩니다. 이 소년의 이름은 ‘전희균’으로, 제 조부가 되는 분입니다.”
감리교 감독회장을 지낸 전용재 목사의 말이다. 공주에서 사역했던 프랭크 윌리엄스(Frank E. C. Williams, 1883-1962) 선교사를 언급하고 있다. 프랭클 윌리엄스 선교사는 미국 콜로라도주 출신으로 1906년 덴버 대학을 졸업하고 앨리스 윌리엄스(Alice B. Williams, 한국명 우애리시)와 결혼한 뒤 곧바로 선교사로 파송받아 조선의 공주에 들어오게 된다.
윌리엄스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전염으로 먼저 천국에 간 전임 선교사 로버트 샤프의 사역을 대신 맡게 된다. 그는 우선 로버트 샤프 선교사가 순직한 뒤 중단됐던 명설학당을 다시 열었다. 1906년 가을, 윌리엄스 선교사는 한국인 몇 명과 함께 명설학당을 확장한 ‘중흥’이라는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1909년에는 학교명을 ‘영명’으로 다시 바꾼다. 이후 1932년에 영명과 명설학당이 합쳐쳐져 영명학교가 됐다. 하지만 1942년 일제의 강제 폐교 조치로 문을 닫았다가 해방후인 1949년 다시 문을 열게 된다. 결국 영명학교는 로버트 샤프 선교사와 부인 앨리스 샤프 선교사의 헌신, 후임인 윌리엄스 선교사 부부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공주에 영명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에 헌신한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 /한국선교유적연구회
앨리스 샤프 선교사가 1940년 일제의 선교사 강제철수 조치로 미국으로 돌아가고, 윌리엄스 선교사 부부 역시 그해 12월 일제에 의해 추방된다. 하지만 그들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도로 갔다. 그들은 한국을 그리워하며 한국에 다시 오고 싶어 했다. 윌리엄스 선교사가 선교본부에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깊은 한국 사랑을 느낄 수 있다.
1941년 6월30일 인도에서 미국 선교본부에 보낸 편지에서 윌리엄스 선교사는 “한국에 있을 때보다 한국인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1945년 1월 11일 편지에서는 “극동지역에 밝은 전조의 해가 밝았다. 한국행 길이 열린다면 다시 가족 모두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고, 또 다시 1945년 6월 27일엔 “한국이 열리고 요청받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고 싶다. 그 희망의 끈을 포기한 적 없었다”고 밝혔다.
1945년이면 윌리엄스 선교사의 나이가 62세 때다. 당시 현역에서는 진작 은퇴했어야 할 때인데도 그는 ‘대한민국 선교사’로서의 강렬한 열망에 불타고 있었다. 같은 편지에서 그는 “이 나이에 꼭 선교하려는 열정은 아니더라도 원하는지는 물어보고, 불러준다면 기꺼이 한 텀(term) 더 일할 용의가 있다”며 간곡하게 한국 선교사를 맡고 싶어 했다.
그러던 1945년 가을, 연합국 최고 사령부 사령관 맥아더로부터 그에게 전보가 온다. 주한 미 군정청 하지 사령관의 농업 고문으로 임명됐으니 빠른 시일 내에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때의 심정을 윌리엄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누가 추천했는지 모르지만 이런 일이 어떻에 나에게...꿈도 꾸지 못했던 일...”
◇하지 장군 보좌관으로 한국 각 분야 참모 소개한 윌리엄스 선교사 아들 우광복
▲윌리엄스 선교사 부부와 아들 우광복(앞줄 가운데)의 가족 사진. 오른쪽 소녀는 공주 영명동산에 묻힌 우광복의 여동생 올리브다.
윌리엄스 선교사가 한국으로 다시 오게 된 이유는 아들 조지 윌리엄스(George Z. Williams, 1907-1994) 때문이었다. 그는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의 아들로 인천에서 태어났다. 한국 이름은 우광복(禹光復)으로, 조선의 광복을 염원한 아버지의 열망이 그 이름에 고스란히 담겼다.
우광복은 14세까지 공주에서 자랐다. 식물과 곤충 채집, 동물 관찰을 좋아했던 그는 영명학교를 졸업한 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는 미국 콜로라도로 건너가 덴버 대학교에 입학한다. 화학을 전공했고, 이후 콜로라도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세포를 연구했다. 그는 이 분야에서 뛰어난 연구 성과를 발휘해 1930년 ‘생화학 저널’에 ‘비타민 B의 다양성’이란 주제의 논문을 싣기도 했다. 이후 비타민과 간질환, 결핵 등에 대해 꾸준히 연구했고, 버지니아 의학교 병리학 교수로 일하기도 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때 해군 군의관이자 통역장교가 되어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1945년 9월 8일, 그날은 우광복을 태운 미국의 해군 군함이 인천에 상륙하는 날이었다. 배가 인천항에 다다르자 우광복은 갑판 책임자인 대령에게 상륙 보고를 하러 갔다. 그 대령에게는 한국인 통역들이 세 명이나 있었지만 서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과 싸운 지하 독립운동가이며, 하지 중장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다고 예기하고 있습니다.”
▲트럼펫 연주하는 우광복과 이승만 대통령.
우광복의 통역을 들은 대령은 깜짝 놀라 “자네가 어떻게 한국어를 알지?”라고 물었다. 우광복은 “저기 보이는 언덕 위 검은 지붕의 붉은 벽돌집이 제가 태어난 곳입니다”라고 답변했다. 부하 장교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말에 대령은 깜짝 놀랐다. 우광복, 그는 당시 한국어를 제대로 아는 유일한 미군이었다.
대령은 우광복을 하지 중장에게 소개해 줬고, 그때부터 우광복은 하지 장군의 보좌관으로 복무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각 분야 참모가 필요하다는 하지의 말에 우광복은 자신의 아버지 윌리엄스 선교사를 비롯해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 한국명 원한경, 1890-1951) 등 여러 사람을 하지 장군에게 소개했다. 그리하여 윌리엄스는 미군정청 농업정책 고문으로, 원한경은 교육정책 고문으로 각각 임명됐다. 이 밖에도 여러사람이 우광복의 추천에 의해 일제 이후 미 군정의 대 한반도 정책에 영향을 끼치게 됐다.
그런데 선교사이자 목회자이며, 학교 설립자였던 윌리엄스가 어떻게 농업정책의 고문으로 임명된 것일까. 그것은 그가 공주에 있을 때 펼쳤던 여러 가지 농촌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윌리엄스는 일반적인 기독교인 양성보다는 농촌지도자 배출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래야만 일제 이후 한국을 제대로 재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농촌의 변소와 우물을 개량하는 등 다양한 농촌개량사업을 펼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1932년에는 영명학교를 농촌 실정에 맞는 실업교육을 통해 농촌 지도자를 배출해야 한다는 취지로 영명실수(實修)학교‘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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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온 선교사들, 100년의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