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라는 실체를 설명하거나 입증하기는 어렵다. 여러 종교나 철학적 사유에서는 이를테면 영혼과 같은 존재를 인정하고, 육체와 영혼의 결합(삶)과 분리(죽음)로써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는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없어 과학적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죽음은 다만 살아있지 않은 상태로 표현되거나 증명할 수 밖에 없다. 개체가 살아있다는 것은 살아있는 세포의 총화로 표현되므로 죽는다는 것도 여러 수준에 걸친 과정을 통하여 나타난다. 따라서 죽음을 간단하게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죽음은 보통 어떤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incident)으로 표현되나, 사실은 어느 기간에 발생하는 과정(process)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사회적으로나 법률적으로는 편의상 어느 순간(몇날 몇시 몇분)에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한다.
내적 요인이나 외부 요인이 생체에 작용하면 여러 반응계가 작동하여 생체는 동적 평형(動的平衡)상태로 항상성(恒常性)를 유지한다. 그러나 내부 또는 외적 요인이 생체가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날 정도로 작용하게 되면 동적 평형 상태는 깨지고 결국 생명활동은 불가역적(不可逆的, irreversible)인 변화를 시작한다. 즉, 자극에 대한 반응성은 감소하고 운동성은 약해지는 방향으로 치달아 마지막에는 완전히 없어지고 동시에 물질대사능력도 영원히 정지하고 만다. 죽음이란 개체의 생명활동이 불가역적으로 영원히 정지하여 소실한 상태라 할 수 있다.
(permanent cessation of vital reactions of individual)
1. 삶에서 죽음까지의 과정
가. 가사 (假死, suspended animation, apparent death)
전신의 생명 기능이 극도로 약해져서 객관적으로 살아있다는 징후(徵候, sign)를 증명하기 어려운 상태를 가사상태라고 한다. 얼핏 진짜 죽음과 구별하기 어려워 사망한 것으로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 가사로 오인하기 쉬운 상태로는 익사(溺死, Badenfall), 간질(癎疾, Epilepsie), 알코올중독(Alkoholintoxika tion), 혼수(昏睡, Coma), 뇌출혈(腦出血, Hirnblutung), 외상(外傷, Trauma), 감전(感電, Elektrizit t), 약물중독(Narkotika) 들로 이들의 독일어 첫글자를 따서 BEACHTEN이라고 한다. 이런 때에는 죽음으로 오판하거나 소생술(蘇生術)을 단념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나. 장기사 (臟器死, organ death)
개체의 기능은 주요 장기를 중심으로 여러 장기들의 생명활동이 집적된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주요 장기의 활동이 오랫동안 멈추면 그 장기가 속한 기관계는 물론이고 다른 기관계의 기능도 결국 멈추어 개체로서 생명활동도 멎게 된다. 특정한 주요 장기란 개체의 생명활동을 직접적으로 지탱하는 것으로 심장(心臟), 폐(肺), 뇌(腦)가 이에 속한다.
이들 장기 가운데 하나가 기능을 멈추면 곧 (길어야 5분 이내에) 다른 장기도 멎는다. 예컨대 심장이 멎으면 곧이어 중추신경계나 호흡기능이 멈추고 만다. 이와같이 심장, 폐, 뇌(특히 腦幹) 가운데 어느 하나가 불가역적으로 기능을 멈추면 개체는 반드시 생명활동을 영구히 정지<終止>한다.
이처럼 장기(臟器) 수준의 죽음이 직접 개체의 죽음에 관계되는 것을 장기사(臟器死)라 한다. 장기사는 이들 세 장기의 불가역적인 기능 정지, 즉 장기 그 자체의 죽음을 의미하기보다는 개체의 죽음에 직접적인 요인이 되는 개념이다. 세 장기 가운데 먼저 심장의 박동이 종지하여 결국 개체가 죽는 경우를 심장사(心臟死, cardiac death), 호흡정지가 먼저 나타나면 폐사(肺死, pulmonary death), 뇌 특히 뇌간(腦幹)의 기능이 종지하면 뇌사(腦死, brain death)라 한다.
다. 개체사 (個體死, somatic death, individual death)
호흡과 심장 박동이 불가역적으로 완전히 정지하고, 뇌 기능이 멈추어 그치면 개체로서 생명활동은 필연적으로 종지한다. 이를 개체사라 한다. 개체의 죽음은 바로 한 개인의 죽음으로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사망을 일컫는다. 이에 대하여서는 뒤에서 기술한다.
라. 세포사 (細胞死, cell death or molecular death)
개체는 죽었더라도 전신의 조직이나 세포의 생명활동이 한꺼번에 정지하지는 않는다. 소화관의 연동(peristalsis)이나 점막 상피세포의 섬모운동처럼 조직과 세포의 기능이나 정자(精子)와 백혈구의 운동성, 근육조직의 자극흥분성은 개체가 죽은 지 수 시간 이상 남아있을 수 있고, 피부나 뼈 조직은 며칠 동안 살아 있다. 그러나 결국은 모든 세포
의 기능이 완전히 멈추어 비로서 삶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최종단계에 다다르며 이를 세포사라 한다. 생명의 기본 단위가 세포이고, 세포의 총화가 개체이므로 모든 세포가 죽었을 때 비로서 개체가 죽었다고 해야 하지만, 모든 세포의 죽음을 확인할 방법은 없으며 주요 장기가 죽으면 필경 다른 모든 세포도 결국은 죽으므로, 주요 장기의 죽음
을 개체의 죽음으로 인정한다. (개체가 죽더라도 아직 세포는 살아 있으므로 필요한 장기를 떼어내어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면, 그 장기는 아직 살아 있다.)
2. 죽음(個體死)의 진단
의사는 사람의 사망을 진단하고 이를 선언해야 할 책무가 있다. 이는 주로 앞에서 기술한 개체의 사망을 임상적으로 확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체의 사망을 임상적 사망*(clinical death)이라 할 수 있다. 임상적으로 개체의 사망을 진단하려면 죽음의 판정 기준이 있어야 한다.
예부터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판정 기준은 다음과 같다.
가. 임상적인 죽음의 판정 기준
⑴ 호흡기계통 기능 정지: 자발적인 호흡 운동의 정지
⑵ 순환기계통 기능 정지: ①어느 동맥에서도 맥박을 감지할 수 없음
②심장 박동(또는 심장음)의 정지
③혈압이 측정 않됨 (인공적 유지 불가능)
⑶ 중추신경계통 기능 정지: ①의식 소실, 자극에 대한 반응의 상실
②동공 확대: 각막 및 동공 반사 소실
이와 같은 증상이 15~30분 동안 지속하면 사망을 진단할 수 있다. 가능하다면 심전도(心電圖)나 심부 뇌파(深部腦波)도 중요하고 객관적인 판단자료가 된다. 물론 나중에 기술할 조기 사후변화(早期 死後變化)는 사망을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다.
나. 개체사의 개념과 정의
위에서 나타낸 판단 기준 가운데 호흡정지, 심장박동정지, 동공확대는 이른바 죽음의 3대 증상이라고 한다. 심장, 폐, 뇌의 세 장기 모두가 불가역적으로 기능을 상실하면 개체가 사망한다는 개념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개체의 생명활동은 이 세 장기의 기능이 서로 의존하고 연결되어 지탱하고 있다. 이 세 장기 가운데 어느 것이라도 기능을 잃
으면 곧이어 다른 두 장기도 사멸하고 말아 필연적으로 개체는 죽게 된다. 이렇게 보면 세 장기 가운데 하나가 죽으면 그 개체는 죽게 된다는 개념도 성립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개념의 기본은 이들 세 장기가 각각 독립한 기능을 가지며, 개체의 생명 유지에 대한 기여도는 대등하다는 관점에 바탕을 둔다.
심장 박동은 자동성(autonomy)을 지니고 있어, 다른 장기 기능에 영향 받지만 심장 스스로 뛰고 있다. 호흡은 그 기능을 가스교환과 호흡운동 둘로 나눈다. 가스교환 기능은 폐의 본래 기능으로 다른 두 장기와도 독립된 기능이지만 호흡운동은 폐 자신의 기능이 아니라 뇌간의 기능에 바탕을 둔다. 따라서 폐의 가스교환 기능이 살아있어도 뇌간이
죽으면 호흡운동이 멎는다. 꺼꾸로 호흡운동이 멎으면 뇌간이 기능을 잃었다고 볼 수도 있다. 또 가스교환 기능이 소멸하여도 뇌간이 정상이라면 호흡운동은 단시간 지속하여 사람은 스스로 숨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일시적으로 심장박동이 정지하여도 뇌기능이 남아있으면 자발적인 호흡을 볼 수 있다. 자발적으로 호흡하는 동안에는 사람이 아직 살아있다고 느끼는 것이 일반적이며, 그런 사람을 이미 죽었다고 하기에는 사람의 감성으로 용인하기 어렵다. 더욱이 최근에 의료기술의 진보로 심장이나 폐의 가스교환 기능도 인공적인 방법으로 대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폐와 심장이 원래 기능을 잃어도 적절한 의술로 이들 기능을 인공적으로 보완해 준다면 뇌가 살아 있는 한 개체의 생명은 유지된다고 할 수도 있다. 심장과 폐가 기능을 잃어도 인공폐나 인공심장을 달면 뇌가 기능을 가지고 있는 한, 개체가 죽었다고 할 수 없다는 말도 된다. 예컨대 현재의 의료기술이 실증한 사실을 고려하면 전체 뇌의 불가역적 기능 정지(뇌의 죽음)으로 개체의 생명은 소멸한다는 말도 가능하다. 따라서 뇌의 죽음, 혹은 폐와 심장의 죽음에 바탕을 둔 뇌의 죽음이 바로 개체의 죽음이라는 정의도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특수한 의료관리가 아닌 일반적인 의료관리에서는 임상적으로 뇌의 죽음을 증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일반적인 진료에서는 뇌의 죽음을 완전히 증명하려면 심장박동이 불가역적으로 정지하고, 뇌기능의 소실 증상이 증명된다면 뇌의 죽음을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기왕에 사용되던 죽음의 3대 증상을 바탕으로 사망을 판단한다면 뇌의 죽음이 완
전한 사망의 증명이라는 정의와 모순될 것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