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작가가 그린 우리 그림책 한 권. 깊고 어두운 숲 속에 서 있는 한 아이와 숲 밖에서 그 아이를 쳐다보고 있는 아이. 두 아이의 거리가 아득합니다. 연필로 짙게 그린 숲은 숲 바깥의 밝은 빛에 대비되어 아련한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마음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표지를 열고 이야기에 마음을 내딛습니다.
겨울 내내 집 안에 갇혀 있다가 봄이면 제일 먼저 숲에 나타나던 삐비라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갇혀 지내야 하는 아이의 외로움이 네모 칸 구석에 웅크린 삐비의 모습에서 그대로 전해집니다. 환한 햇살 아래 어울려 노는 아이들과 다르게 혼자 숲속에만 있었고, 나뭇가지를 한 웅큼 주워들고 자기 머리를 때리며 걷던 삐비. 그런 삐비에게 관심이 생긴 한 아이가 삐비의 친구가 됩니다. 같이 고요한 숲을 걷고 풀이 몸을 휘감듯 스치는 감촉을 느끼며 숲속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하지만 시간은 하나이던 두 아이를 둘로 갈라놓습니다. 학교에서 새 친구를 사귀게 된 아이, 아직까지 숲속에 혼자 있는 삐비. 아이들에게 놀림만 받는 삐비에게 아이는 더 이상 가까운 친구일 수 없습니다. 삐비를 모른 척 지나고 도망치기도 합니다. 삐비를 다시 혼자가 되게 만든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깊은 숲을 지납니다. 이제 삐비가 그 숲 위를 나는 자유로운 새가 되었기를 바라며……. 어둠이 내린 숲 위를 나는 새 한 마리에 가슴 한 구석이 저려옵니다. 그 저린 마음으로 어렸을 적 삐비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려 주는 아이는 이제 한 아이의 아빠입니다.
책을 다 읽고 그 아픔을 전해받고 나니, 앞뒤 면지 그림들이 아린 추억의 상징처럼 여겨집니다. 삐비가 제 머리를 때리고 다니던 나뭇가지들, 그리고 이제는 새가 되어 놀림 없는 세상에서 마음껏 날고 있기를 바라는 희망처럼 흔날리는 새의 깃털들. 삐비 이야기가 새삼 마음에 쏘옥 안겨옵니다.
지나간 기억, 흑백사진처럼 검은 연필심으로 꼼꼼하게 그린 그림이 추억을 잘 그려 보여주고 있습니다. 삐비에 대한 미안함을 대신하듯,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라도 하는 듯, 세세한 손길로 그렸습니다. 다만, 너무나 단정한 나무들, 세월의 변화를 느낄 수 없는 숲이 아쉽고, 좀더 추억속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이야기를 들려 주었더라면 바람도 남지만, 우리가 멀리 내모는 우리 곁의 친구들에 대해 한번 더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우리 그림책입니다.
책 소개
아이들과 함께일 수 없었던 정신지체아 친구 삐비와의 가슴아린 추억을 돌아봅니다. 아빠가 자식에게 지난 일에 대해 들려주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가고 있습니다.『아기 너구리네 봄맞이』『괭이부리말 아이들』들에 그림을 그렸던 송진헌 그림작가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첫번째 그림책입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녹여 내었습니다. 정교한 연필 데생으로 아이의 마음을 잘 그려 담고 있습니다.
삐비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삐비는 겨울 동안 집 안에 갇혀 있다가 봄이면 숲에 제일 먼저 나타났습니다. 숲 근처에서 숨바꼭질 놀이를 하던 아이는 숲 속에 숨었다가 삐비를 보게 됩니다. 나뭇가지만을 주워 그 나뭇가지로 자기 머리를 때리며 걸어가는 삐비. 아이는 그 삐비에게 관심이 생겨 삐비 곁에 머물면서 삐비의 단 하나 친구가 됩니다. 하지만 학교에 들어가고 할 일이 많아지고 삐비에 대한 놀림이 잦아지면서 아이는 삐비를 멀리하게 됩니다. 이제 어른이 된 지금, 그 숲에 아이를 데리고 와 삐비에 대한 추억을 들려줍니다.
작가 소개
송진헌
1962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린 책으로는 『아기너구리네 봄맞이』『괭이부리말 아이들』『아주 특별한 우리 형』『감자꽃』『내 이빨 먹지마』『성냥팔이 소녀』『너하고 안 놀아』『휠체어를 타는 친구』『돌아온 진돗개 백구』『너도 하늘말나리야』등이 있습니다. 경기도 파주에 살면서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출판사 편집자의 말
내가 어렸을 때, 저 숲에 삐비라는 아이가 있었어. 겨우내 집 안에 갇혀 지내다 봄이 오면 숲에 나타나곤 했던 아이. 몸도 마음도 불편했던 삐비와는 아무도 놀아 주지 않았어. 놀려대기만 할 뿐. 하지만 나는 그 애와 숲에서 노는 게 정말 좋았어. 지금 삐비는 어디에 있을까…….
미디어 서평
국민일보/어머니께 드리는 귓속말 삐비는 자폐아지만 소중한 나의 마음속 친구
“따악, 따악” 숲에서 주운 작은 나뭇가지로 자신의 머리를 연신 때리며 돌아다니던 아이는 삐비라고 불리던 자폐아였지요. 그 아이의 이름은 따로 있었겠지만 삐비라는 별명만 기억날 뿐입니다. 동네 아이들은 삐비를 피해 다니며 놀려댔죠. “저 걸음걸이 좀 봐. 절름발이 같잖아.” “이상한 소리만 내. 벙어리인가 봐.” “저렇게 머리를 때리니까 멍청이가 되지.”
병이 옮을지도 모른다며 아이들이 피해다니는 통에 삐비는 늘 측백나무 숲에 숨어 먼 발치로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지요. 숨바꼭질을 하던 날,숲속으로 들어가게된 나는 우연히 삐비와 마주쳤습니다. 그날도 삐비는 나뭇가지로 머리를 때리며 있었지요. 해가 져 엄마손에 이끌려 갈 때까지 삐비는 숲속을 돌아다녔지요. 나는 용기를 내어 삐비를 따라 숲속 깊숙이 들어가 보았습니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삐비와 단짝이 된 기분이 들었어요. 삐비와 함께 있으면 깊은 숲속도 무섭지 않았죠.
그러나 긴 겨울을 지나 학교에 가게 되자 많은 게 달라졌습니다. 새 친구들을 사귀게 된 것이죠. 소나기가 쏟아지던 날, 우산을 펴들고 집으로 가던 나는 숲 속에서 비를 맞고 있는 삐비를 보았지만 나도 모르게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것은 무척 바쁜 일이거든. 친구들과 할 일도 많고.” 그날 이후 나는 삐비를 만나지 못했어요.
『삐비 이야기』는 신체·정서적 장애를 지닌 아이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소외된 외톨이 아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스쳐 지나간 짧은 기억이지만 어느새 마흔을 훌쩍넘긴 작가는 그 옛날 삐비에게 다가가지 못한 죄책감으로 그날의 소나기를 맞고 있답니다. 삐비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가만 귀를 기울이면 삐비가 “딱 딱” 머리를 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군요. 연필화에 담긴 선 하나, 점 하나마다 작가의 아픈 기억이 스며있습니다.
2003.05.09/정철훈 기자
한겨레 신문/우리집 책꽂이
『괭이부리말 아이들』에 정감어린 삽화를 그린 송진헌씨가 처음 낸 그림책. 아이들의 따돌림으로 점점 더 외톨이가 되어가는 한 자폐아 친구와 나눈 짧고 안타까운 어릴 적 추억을 담았다.
무채색의 흑백그림들과 감정을 최대한 눌러 쓴 절제된 문장이 가슴 한켠을 아파오게 한다. 주인공인 ‘나’는 아이들이 모두 피해다니는 자폐아 ‘삐비’를 우연히 만나 함께 숲속을 탐험한다. 아이들은 ‘나’까지도 따돌리고, ‘나’는 다시 삐비를 멀리한다.
2003.05.05
경향신문/어린이책 “미안해…… 외롭던 널 모른척해서”
왜 주인공의 이름이 ‘삐비’일까 생각했다. 아마도 삐비는 말을 하지 못하고 대신에 “삐비, 삐비……” 하고 똑같은 음을 내면서 다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이름은 따로 있었겠지만 그 동네아이들은 ‘삐비’라는 이름을 조롱의 뜻으로 불러댔을 것이다.
1960~70년대 한동네에 하나쯤은 있었을 법한 장애아나 정신지체아들은 이런 왕따의 대상이 되곤 했다. 한참 놀이에 재미를 붙이고 서로의 장·단점을 눈여겨보기 시작하면서 조직사회에 눈을 떠가는 대여섯 살 무렵의 아이들은 자기와 다른 아이들을 놀리고 조롱하는 ‘이지메’ 혹은 ‘왕따’에도 큰 죄의식없이 참여하게 된다. 사회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동류집단 압력(peer group pressure)’이라고 지칭한다. 끼고 싶지 않지만 자신도 왕따가 될까봐, 혹은 손해를 볼까봐 이 ‘비겁한 결사’에 동참하는 것을 사람들은 아주 어릴적부터 배우는 것이다.
이 그림책은 이런 경험을 가진 저자의 어린시절 ‘고해성사’와 같다. 추운 겨울만을 제외하곤 늘 외톨이로 숲속을 떠도는 ‘자폐아’ 삐비에게 호기심을 느낀 어린시절의 저자는 삐비를 따라 다니기 시작한다. 저녁때 엄마가 부르러 올 때까지 머리를 나뭇가지로 툭툭 치면서 숲을 구석구석 누비며 다니는 삐비와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고 든든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 둘을 함께 왕따시킨다.
그래도 개의치 않던 저자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삐비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다른 아이들의 왕따를 더 크게 의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는 애써 합리화시킨다. ‘학교에 다니는 것은 무척 바쁜 일이거든. 친구들과 할 일도 많고’라고 자위하면서. 그러나 소나기가 쏟아지는 하교길에서 만난 삐비를 애써 모른척 외면한 것은 두고두고 죄책감을 가지게 만들었던 것 같다. 이 책을 내지 않고는 못배길 만큼.
저자는 삐비를 여전히 외면하지만, 숲가를 지날 때마다 귀를 기울인다. 다시금 혼자가 된 삐비가 머리를 나무로 때리는 ‘타닥’ 소리가 계속 들리는지를. 그러나 삐비는 점점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는지 이후로 등·하교길에서 볼 수가 없게 됐고, 삐비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도 저녁마다 점점 더 멀어져 갔다.
흑백의 연필화는 그림책 그 자체로도 단편영화 한편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두 아이가 함께 숲을 거닐거나 마주쳤을 때를 제외하고는 클로즈업 없이 먼 데서 보고 있는 듯한 시선으로 그림을 처리한 것은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는 저자의 현재 시점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삐비에 대한 고해성사’와도 같은 이 그림책을 펼치면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통증을 느낄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범죄’에 공범이 되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므로…….
2003.05.03/이무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