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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보물 | |
지정번호 | 보물 제569-1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개인소장 |
제작시기 | 1910년(순종 융희 4) 2월 |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은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라는 뜻이다. 인내를 강조한 내용으로 선현들의 구전글귀중 하나이다. "한결같이 부지런히 일하는 세상에는 어려움이 없다(一勤天下無難事)"와 짝을 이루는 말이다.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말미에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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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569-2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
소재지 | 서울 중구 필동3가 26번지 동국대학교 박물관 |
제작시기 | 1910년(순종 융희 4) |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은 논어에 나오는 말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뜻이다.
말미에 "경술3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평생의 경구가 될 만한 말이다. 안중근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속에 가시가 돋을 것이라는 지극히 쉬운 얘기를 애써 순국 전에 조선민족에게 남겼으니 배움에 대한 철저한 사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쓰다가 중단한 동양평화론은 평생을 간직한 그의 이런 사상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아쉬움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이런 배움의 뿌리는 어머니로부터 비롯되었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거사 이후 1910년 2월 7일 재판을 시작하자마자 7일 만에 사형이 선고되는 졸속재판의 희생자가 된다.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안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즉시 연락을 취하여 “목숨을 구걸하는 것처럼 보일 염려가 있으니 아예 항소를 포기하라”고 권유한다. 이런 어머니가 있었기에 안중근 같은 거인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모든 어머니들이 이런 경우에 하루라도 더 살도록 자식의 항소를 권유했을 것이라는 통념을 단 한마디로 배제한 위대한 어머니의 가르침이다. 더구나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公憤)을 짊어지고 있는 것”임을 갈파한 어머니의 뜻에 따라 안중근은 항소를 하지 않고 담담히 사형을 받아드린다. 현대의 형법은 사형이 선고되어 피고인이 항소를 포기하더라도 자동항소가 되도록 되어 있다. 생명이 걸린 문제를 1심에서 끝내는 것은 자칫 인권유린이 될 수 있다는 배려에서다.
그러나 일제는 40일 만에 전격적으로 처형한다. 안중근은 사형이 집행되기 전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을 만나 “내가 죽으면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두었다가 조국광복의 그날 고국으로 옮겨 묻으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러나 일제는 안 의사의 시신을 유가족에게 인계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감춰버린다. 많은 이들이 사형이 집행된 여순 감옥의 동남쪽 야산인 동산파(東山坡) 지역에 묻혔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에 대하여 중국의 양해를 얻어 남북공동유해조사단이 현장조사를 벌린바 있으나 유해는 찾지 못하고 매장지일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이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일본정부의 협조가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이제라도 일본은 안중근의사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살피고 외교관례에 따라 과거사에 대한 사과의 뜻에서라도 안 의사 유해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책임있는 일본정부의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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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569-3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리움미술관(이건희소유) |
제작시기 | 1910년(순종 융희 4) 2월 |
년년세세화상사 세세년년인부동(年年歲歲花相似歲歲年年人不同)은 '해마다 계절따라 같은 꽃이 피건만 해마다 사람들은 같지 않고 변하네' 자연의 섭리는 그대로이나, 세월따라 사람들은 변하고 있다는 당시의 암울한 현실을 걱정하는 구절이다.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말미에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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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569-4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청와대 |
제작시기 | 1910년(순종 융희 4) 2월 |
치악의악식자부족여의(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은 '궂은 옷, 궂은 밥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의논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 가난하고 천한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 안의사의 인생관이 반영된 말이다.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말미에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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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569-5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1-1번지 숭실대학교 박물관 |
제작시기 | 대한제국 순종 융희 4년(1910년) 3월 |
동양대세사묘현유지남아기안면화국미성유강개정략불개진가련(東洋大勢思杳玄有志男兒豈安眠和局未成猶慷慨政略不改眞可憐)은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로 칠언절구의 자작시를 쓴 것이다.
"암담한 동양의 대세를 생각해보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기개있는 남아가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가 없구나, 게다가 아직 동양 평화의 시국을 이루지 못한 것이 더욱 개탄스럽기만 한데, 이미 야욕에 눈이 멀어 정략 즉 침략정책을 버리지 못하는 일본이 오히려 불쌍하다"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이것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소장의 유묵에서
“ | 동양을 보존하려 한다면 우선 일본의 정략을 고쳐야 하니, 때가 지나 기회를 놓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 욕보동양선개정략시과실기추회하급(欲保東洋先改政略時過失機追悔何及) | ” |
라고 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뜻깊은 내용이다. 나중에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함께 세계침략전쟁으로 변질돼가는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발판으로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던 1910년 경술년(庚戌年) 당시, 노골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침략정책의 잘못을 지적하여 고칠 것을 촉구하였으며, 일본인 집정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2]
이들 내용과 관련하여 안 의사는 옥중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지었다. 그중 자서전인 안응칠역사는 완성되었지만, 논설 동양평화론은 '서문'과 '전감 1'만 지어졌고 나머지 '현상 2', '복선 3', '문답'은 목차만 제시된 채 미완성으로 남았다. 당시 안 의사가 이를 집필하기 위해 사형집행 날짜를 한 달쯤 늦추도록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에게 청하여 그의 쾌락을 받았으나 결국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동양평화론의 서문에서 안 의사는
若政略不改 逼迫日甚則 不得已寧亡於異族 不忍受辱於同種 議論湧出於韓淸兩國人之肺腑 上下一體 自爲白人之前驅 明若觀火之勢矣. 然則…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지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 황인종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는 의론이 한국·청국 두 나라 사람의 마음속에 용솟음쳐 위ㆍ아래가 한 몸이 되어 스스로 여러 사람 앞에 나설 수밖에 없음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
이라 하여 일제의 침략정책을 경고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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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569-8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1-1번지 숭실대학교 박물관 |
제작시기 | 1910년(순종 융희 4) 2월 |
인무원여 난성대업(人無遠慮 難成大業,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3]은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말미에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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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569-9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수동 72-1번지 홍익대학교 박물관 |
제작시기 | 대한제국 순종 융희 4년(1910년) 2월 |
오로봉위필청천일장지삼상작연지사아복중시(五老峯爲筆靑天一丈紙三湘作硯池寫我腹中詩)는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로 자작시 오언절구 한 수를 쓴 것이다.
시에 나오는 오로봉은 다섯 명의 노인이 나란히 서있는 듯한 중국 여산 근처의 산이며, 삼상은 중국 남부의 양자강·상강·원강의 세 강을 가리킨다. '오로봉·청천·삼상과 같은 광대한 자연을 필기도구로 삼아 마음속의 시를 쓰겠다'는 포부이다. 당나라 이백의 망여산오로봉이란 시에서 차용한 것이지만 대한 남아의 기개를 꺾지 않았던 안 의사의 활달한 기개와 원대한 흉금을 느끼게 한다.
말미에는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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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569-12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1-1번지 숭실대학교 박물관 |
제작시기 | 1910년(순종 융희 4) 3월 |
장부수사심여철의사임위기사운(丈夫雖死心如鐵義士臨危氣似雲)은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장부는 비록 죽더라도 마음은 쇠와 같으며, 의사는 위태로움에 닥치더라도 기운은 구름과 같다'라는 뜻이다. 즉,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염원하는 자신은 죽는다 하더라도 쇠처럼 단단한 마음을 가질 것이며, 어떤 곤란과 위험에 처한다 하더라도 구름처럼 초연할 것이라는 스스로의 다짐이었을 것이다. 큰 장부이요 의로운 선비의 꿋꿋한 모습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유묵이다.
앞쪽에 '증맹경시(贈猛警視)'라 쓰여있는데 '타케시'라는 일본 경관에게 써준 듯하다. 말미에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謹拜'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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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569-13호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
제작시기 | 1910년(순종 융희 4) 3월 |
박학어문 약지이례(博學於文 約之以禮,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하라)는 안중근 옥중에서 남긴 글씨로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에 이토 히로부미을 사살하고 여순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옥중에서 많은 붓글씨를 남겼으며 이 글씨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 글은 박학어문 약지이례(博學於文 約之以禮)[4]의 여덟 글자이며 가로 약 33cm, 세로 약 138㎝ 크기의 족자로 되어 있다.
글 왼쪽에는 '경술삼월어여순옥중 대한국인안중근서' 라쓰여 있어 1910년 3월에 여순감옥에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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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569-14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1-1번지 숭실대학교 박물관 |
제작시기 | 조선시대 말기 |
제1강산(第一江山)은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가볼 수 없는 조국강산에 대한 그리운 심정이 나타나 있다. 안중근이 금강산을 비롯한 조국강산을 천하제일의 강산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이 글씨는 평양 대동강 가의 연광정에 걸려있던 제일강산(第一江山) 편액을 기억하고 쓴 듯한 필치이다. 말미에는 '경술2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낙관이 쓰여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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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569-19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종 산1-86 |
제작시기 | 1910년(순종 융희 4) 3월 |
극락(極樂)은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로 더없이 안락해서 아무 걱정이 없는 경우와 처지 또는 그런 곳을 바라는 마음으로 "극락(極樂)"을 쓴 것으로 보여진다. 흔히 극락은 죽어서 가게되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살아서 생각할 수 있는 극락은 과연 무엇이고 안중근이 생각하는 극락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게 하는 글씨이다.
말미에 "경술3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대한민국의 보물 | |
지정번호 | 보물 제569-20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 172-1번지 |
제작시기 | 1910년(순종 융희 4) 3월 |
운재(雲齋)는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운재(雲齋)'라는 재호(齊號)를 쓴 것인지는 알길이 없으나 운재(雲齋)는 구름이 걸려있는 누정(樓亭,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의미)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름날 비온 뒤에 가끔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모습이다.
운재라는 이런 모습은 운치있게 보여 사람들의 아호(雅號)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누정으로 보인다. 안중근이 옥중에서 창가로 보인 누정일 수 있고 고향을 그리면서 써 본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조국을 그리면서 아름다운 모습중에 하나인 운재를 늘 마음속에 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말미에 '경술3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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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569-21호 (2000년 2월 15일 지정) |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126번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
제작시기 | 1910년(순종 융희 4) 3월 |
욕보동양선개정략시과실기추회하급(欲保東洋先改政略時過失機追悔何及)은 1910년 3월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이 유묵(遺墨:살아있을 때 남긴 글이나 그림)은 러일전쟁(露日戰爭) 당시 전의(典醫:대한제국 때 태의원에 딸린 주임의 벼슬. 네 명이 있었음)로 종군했다가 전쟁이 끝나자 만주 여순(旅順:중국식 발음으로는 뤼순) 감옥으로 전근되어 근무하던 오리타 타다스(折田督)가 1910년 3월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친필을 옥중에서 받아 간직해오던 것을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그의 가족들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조카인 오리타 간지(折田幹二)에게 넘겨주었으며 이것이 오리타 간지의 손에 의해 1989년 2월 20일 단국대학교에 기증된 것이다.
이 유묵에는 “동양을 보존하기를 바란다면 우선 침략정책을 버려야 한다. 때가 지나고 기회를 잃으면 후회한들 무엇하랴!”라는 내용을 담아, 일본 정책의 잘못을 지적하여 고칠 것을 촉구하였으며, 일본인 집정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이것은 중국 안위성 선성현에서 만들어진 품질이 우수한 선지(宣紙)에 2행 16자를 쓰고, 그 왼쪽에 “경술삼월(庚戌三月) 여순옥중(旅順獄中)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서(安重根書)”라고 묵으로 쓴 글씨와 장인(掌印:손바닥으로 찍은 도장)이 찍혀 있다. 오리타 간지는 일본 대학병원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알려진 오카야마 대학(岡山大學)병원의 암 진료 권위자로, 1989년 2월 20일에 천안의 단국대학교 병원 개원을 위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당시 단국대학교 장충식 총장에게 기증되었던 유목이다. 장충식 현재 단국대학교 명예총장은 “오리타 간지 씨를 단국대학교 병원 개원 기념으로 초청하자 고마움의 인사로 유묵을 기증했다”며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개인이 소장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이렇게 해서 중국 뤼순감옥의 안 의사 유묵은 일본을 거쳐 단국대학교에 오게 됐다.
장충식 단국대학교 명예총장은 이것을 “정치권력에 단 한 번도 아부하지 않은 의연한 대학”에 안 의사의 담대한 영혼이 찾아온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안중근 의사는 적국이었던 일본에서 숭모의 대상이 되어 있다. 한시준 단국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100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매 달 정기적으로 모여 토론을 하는 모임이 있을 정도다. 현재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것은 안중근 개인사 및 독립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대한민국 문화재정보센터[5], 단대신문(1260호) 2009년 10월 14일 (수) 6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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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569-22호 (1993년 1월 15일 지정)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가 471번지 안중근의사기념관 |
제작시기 | 1910년(순종 융희 4) 3월 |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는 안중근이 1910년 3월 옥중에서 쓴 행서 글씨 두 폭이다. 그 가운데 한 폭은 오른쪽 위에 "증안강검찰관"이라 쓰여 있듯이 안중근 의사가 이곳에 있을 때 자신의 취조를 담당했던 여순검찰청 야스오카 세이시로 검찰관에게 써준 것이다. 야스오카는 사망하기 직전 이 유묵을 큰딸 우에노에게 물려주었고, 그 뒤 동경 국제한국연구원의 최서면 원장을 통하여1976년 2월 11일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되었다.
선지에 모두 여덟 글자를 한 줄에 썼는데, 내용은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라는 뜻이다. 말미에 "경술년 3월 여순 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이라 낙관하고 왼쪽 손바닥으로 장인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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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569-23호 (1993년 1월 15일 지정)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가 471번지 안중근의사기념관 |
제작시기 | 1910년(순종 융희 4) 3월 |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은 안중근이 공판정을 왕래할 때 경호를 맡았던 일본헌병 치바 도시치 간수에게 써준 것으로 전한다. 치바는 안중근 의사가 처형된 뒤 자진하여 제대했는데, 그가 사망하자 안 의사의 유묵은 그의 부인과 조카딸 미후라에 의해 보관되었다가1980년 8월 23일 도쿄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을 통해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되었다.
내용은 '나라를 위해 몸바침이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뜻이다. 여덟 글자를 한 줄에 쓴 것으로 낙관·장인은 앞의 것과 같고 다만 낙관 말미에 '삼가 올림'을 덧붙였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