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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9월 18일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실험실서 폭발사고, 대학원생 세 명 사망
▲폭발사고가 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실험실 현장
1999년 9월 18일 오전 11시40분쯤
서울대학교 공학관 31-1동 원자핵공학과 실험실인
조립식 가건물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폭발음이 들리자 논술고사를 보던 수험생들과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서울대생들이 학교 밖으로
대피하는 소동이 벌여졌다.
사고가 난 실험실과 연결된 31동 건물 1층에는
방사성 동위원소가 저장돼 있었으나 방사능
누출사고는 없었다.
이날 이 실험실에는 1999년 6월 J기계상사로부터
의뢰받은 폭발물 실험으로 재래식 화약을 이용한 다이너마이트를 대처할 수 있는 미세한 알루미늄
가루를 이용한 플라즈마 기법의 폭발물 실험이 진행중이었다.
불이 나자 소방차 35대 특수구조차 4대 등이 출동,
20분 만에 진화했다.
이 사고로 실험중이던 대학원생 3명 박사과정
김태영(29) 김영환(25) 석사과정 홍영걸(23)씨가
중화상을 입고 한강성심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19일과 20일 전후로 3명 모두 사망했다.
서울대는 숨진 대학원생 3명의 시신을
서울대병원으로 옮기고 9월 21일 영결식을 가졌다.
▶2016년하계 패럴림픽이 폐막
▶2015년애국지사 박상유 선생 별세
▶2015년가수 이미자, 노래 인생 첫 기록 전시회 개최
▶2015년인도적 대북 지원 앞장선 박창득 몬시뇰 선종
▶2004년허명숙, 아테네 장애인올림픽 첫 메달
▶2004년‘스타 이혼 전담 변호사’ 미국 마빈 미첼슨 사망
▶2002년경의선과 동해선 철도 및
도로 연결을 위한 착공식, 남북 동시 거행
▶2000년경의선 복원공사 기공
1945년 9월 11일 서울-신의주간 운행을 마지막으로 단절된 총연장 486km 경의선 철도 연결을 위한 문산-장단역간 12km 구간 복원공사 기공식이 2000년 9월 18일 임진각에서 거행됐다.
기공식에는 55년간 끊어졌던 남북 철길을 다시 잇는 역사적 의미에 걸맞게 김대중 대통령과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과 3부 요인, 외교사절, 실향민 대표 등 각계인사 1000여명이 참석했다. 복원공사가 마무리되면 남으로 대양축인 경부선과 연결되고 북으로 압록강을 건너 중국횡단철도(TCR) 및 시베리아 횡단철도(TSR) 등 프랑스 파리까지 이어지는 대륙횡단철도망과 연결됨으로써 유라시아 대륙 진출의 발판 역할을 맡을 것으로 전망됐다.
총연장 486km 경의선의 남측 구간은 서울-문산간 46km로 이번에 복원되는 12km 구간은 토목공사 11km외에 710m, 폭 4.4m의 임진강 다리와 290m 문산터널 보강공사 등이다.
▶1999년쌍방울 최태원
국내 최초 623경기 연속 출장 신기록
▶1996년좌초된 북한 잠수정, 강릉해안 5km 지점 해상에서 발견
1996년 9월 18일 새벽 1시반 쯤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해변에 좌초된 정체불명의 잠수함이 택시운전사에 의해 발견됐다.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군과 경찰은 좌초된 잠수함이 북한이 비정규전에 활용하는 대남공작선임을 확인, 군·경·예비군 합동으로 강릉해안과 산악지대를 3중으로 봉쇄, 무장간첩 수색작전에 돌입했다.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임곡1리 청학산 정상 부근에서 숨진 채 발견된 북한 무장간첩 11명의 시체가 처참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다
이날 오후 4시 45분 무장간첩 중 한 명인 이광수가 모전리에서 생포됐으며 오후 5시 강동면 청학산에서 간첩 11명이 자살한 시체로 발견됐다. 이어 이광수의 진술을 통해 침투간첩의 전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후 군당국의 수색작전이 본격 전개, 22일 칠성산에서 2명을 추가 사살했으나 이후 작전은 서서히 장기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군은 50일간의 추격작전 끝에 무장간첩 26명 가운데 1명을 제외한 25명을 생포하거나 사살(11명 자살)했고, 이 과정에서 군장병과 민간인 등 16명이 희생됐다. 북한 잠수함 동해안 침투사건은 1968년 울진삼척무장공비사태 이후 최대 규모의 간첩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1994년이형철 WBA 주니어밴텀급 세계챔피언 획득
▶1990년국제올림픽위원회,
1996년 올림픽 미국 아틀랜타시서 개최키로 결정
▶1988년정치가 우양 허정 사망
▶1985년스티브 잡스가 애플 컴퓨터를 그만둠
▶1985년제4차 남북경제회담 개최
▶1982년현대시조의 선구자 노산 이은상 별세
이은상 1903-1982. 시조작가. 사학자. 가곡 '고향생각', '가고파', '성불사의 밤' 등의 작사자.
▶1982년서베이루트내 팔레스타인 난민
1천8백여명 대량학살
▶1981년프랑스 하원, 사형제도 폐지안 의결
▶1981년정부, 소득별 정률(定率)공제 및
법인세율 낮추기 위한 세제개혁안 발표
▶1973년한국-인도네시아, 국교수립
▶1973년동서독 유엔 동시가입
▶1962년소련, 북극에서 대기권 핵실험
▶1962년17차 유엔총회 개막. 104국 대표 참석
▶1961년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이
콩고 내전의 해결을 위해 아프리카로 가던 중에
잠비아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
▶1959년흐루시초프,
유엔총회서 군비전면폐지 목표로 하는 군축안 제안
▶1958년영국, 프랑스지역 금수(禁輸) 철폐
▶1957년가짜 이강석 구속
“나 이강석인데...” 1957년 8월30일 밤8시쯤, 한 청년이 자신이 이강석이라며 대뜸 경주 경찰서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국회의장 이기붕의 장남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였던 이강석의 갑작스런 출현에 화들짝 놀란 서장은 청년이 있다는 다방으로 달려갔다. “귀하신 몸이 어찌 홀로 오셨나이까” 황송해하는 서장의 인사에 청년은 “아버지의 밀명으로 풍수해 상황을 시찰하고 공무원의 비리를 내사하러 왔다”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법정에 선 `가짜 이강석`의 범인 강성병씨
자유당 정권이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리고 있을 때, 이강석은 거리의 무법자였고 또 하나의 작은 권력이었다. 때문에 이 청년 앞에 ‘꿈같은 3일’이 펼쳐졌다. 경주는 물론 영천ㆍ안동ㆍ봉화 등지를 돌며 경찰서장과 군수로부터 향응과 칙사대접을 받았고 46만환이나 되는 거액도 챙겼다.
9월1일 밤, 청년은 경북 도지사의 아들이 이강석과 고교 동기동창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도지사 관저에 여장을 풀었다. 결국 이강석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용돈이 궁해서 꾸민 연극인데 그렇게 굽실거리고 쩔쩔맬 줄 몰랐다”고 둘러댔지만 9월18일 구속돼 징역 10개월을 살아야 했다.
진짜 이강석이 자살한 3년뒤, 가짜도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죽음까지도 진짜를 따라하는 기이한 인연을 맺었다.
▶1957년고 딘 디엠 월남대통령 방한
▶1954년북한, 중공군 40만명 철수를 발표
▶1954년대한영화제작인협회 창립
▶1953년공산주의 운동가 이현상 사망
▶1951년한국-일본 항로를 허가
▶1950년미국-영국-프랑스 외상회의 재개(뉴욕)
▶1950년소련, 유엔안보이사회서 일본가입 거부
▶1949년서울시, 특별시로 승격
▶1948년일본 전학련(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 결성
▶1947년미국 중앙정보국(CIA) 발족
미국 워싱턴 D.C.에서 포토맥 강변을 따라 서쪽으로 20분쯤 자동차로 달리면 버지니아주 랭글리라는 지명이 나온다. `미국을 실제로 움직이는 기관`이라는 별명이 붙은 미국 중앙정보국(CIAㆍcentral intelligence agency)본부가 있다는 곳이다. 본관 건물에는 순직한 직원들을 기리는 기념물이 있다. 대부분의 이름은 익명이다.
미국 버지니아주 랭글리 소재 CIA 본부 전경
평일 새벽 6시. 3대의 승용차가 어김없이 이 건물을 빠져나간다. 이들의 목적지는 백악관, 국무부, 그리고 국방부. 차안에 탑승한 사람들은 CIA 고위관리들. 그들의 손에는 16절지 5∼7장 분량의 서류가 들려있다. 바로 대통령 일일보고서다. 24시간 동안 CIA가 전세계 첩보망을 통해 수집 분석한 비밀정보의 결정체다.
CIA는 1947년 9월 18일 트루만 대통령에 의해 창설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설치된 전략업무국(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의 후신이다. 전쟁이 끝난뒤 미국은 승패를 면밀히 분석한 후 CIA를 설치했다.
미국 육·해·공군을 총괄하는 국방총부도 이때 설립됐다. 1960년대 초반까지는 동서냉전 격화에 힘입어 황금기를 구가했다.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임명한 덜레스 국장에 의해 조직이 확대되기 시작, 능력 자금 등에서 세계 최강 정보조직으로 발돋움했다. 이란과 과테말라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어 성가를 높였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쿠바 피그만 상륙작전을 배후조종했다가 실패하고, 마피아 조직을 동원해 카스트로를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민심을 잃었다. 1975년 사이공 함락은 CIA치부를 드러낸 더러운 공작이었다. 냉전이 끝나자 적을 상실한 CIA는 새로운 적을 찾아 나섰다. 조직과 예산을 축소하라는 국내 요구에 대한 대응책이기도 했다. 1997년 테넷 국장은 각국의 경제정책, 첨단기술의 개발상황 분석 뿐만 아니라 미국 기술 불법유출방지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1947년영국, 노동력통제령 공포(12.12 시행)
▶1935년중국 항일구국동맹 결성
▶1934년소련, 국제연맹에 가입
▶1931년만주사변 발발 - 일본, 대륙 침략에 나서다
1931년 9월18일 밤10시20분쯤, 중국 랴오닝성의 펑텐(奉天ㆍ현 瀋陽)역 부근에 있는 류탸오거(柳条溝)에서 남만주철도의 일부가 폭파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선로와 침목의 일부가 파괴됐을 뿐 큰 사고는 아니었다.
일본군이 철도파괴 직후, 펑톈성(城)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관동군은 중국의 항일 군벌 장쉐량(張學良)군의 소행으로 발표했지만 사실은 관동군 장교들이 본국과의 사전 협의없이 일방적으로 꾸민 모략이었다. 이튿날 관동군은 ‘자위(自衛)를 내세워 일제히 군사행동을 개시, 장쉐량군이 주둔하고 있는 북대영(北大營)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조선 내 일본군도 국경을 넘어 만주를 침공해 들어갔다. 만주사변이 시작된 것이다.
관동군이 속전속결로 펑텐ㆍ창춘(長春)에 이어 지린(吉林)성의 거의 전 지역을 점령해 들어가자 본토의 내각도 사건을 확대하지 않는다는 당초의 방침에서 후퇴하고 추인(追認)으로 돌아섰다. 정부가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나쁜 선례를 남긴 것이다. 일본군은 11월에 동북 3성 전지역을 장악하고 이듬해 3월 괴뢰국 만주국까지 세워가며 만주점령을 기정사실화했지만 중국은 국제연맹에 제소만 했을 뿐 적극적인 저항은 보이지 않았다.
- 산해관(만리장성의 기점)을 점령한 일본군
▶1914년여성운동가 이태영 출생
▶1911년표트르 스톨리핀 피살
▶1909년아프리카 가나의 초대 대통령 콰메 은크루마 출생
▶1907년넵투늄(초우라늄원소)을 발견한
미국의 핵물리학자 맥밀런 출생
▶1905년청, 과거제 폐지. 신교육제 채택
▶1899년경인선 철도 한국최초로 개통(인천~노량진)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1897년 3월 22일부터 공사에 들어가 1899년 9월 18일 개통됐다. 개통당시 철로 길이는 노량진-제물포 간을 잇는 33.2km였다. 영국철도가 1825년 9월 세계에서 처음으로 기적을 올린지 74년 만이었다.
경인선은 1889년 주미 대리공사였던 이하영이 귀국하면서 철도 모형을 가져 온 것이 철도부설의 중요한 계기가 됐다. 조정은 처음 민족자본에 의한 자발적인 철도건설을 시도했으나 자금난 등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1896년 미국인 모스가 고종 황제로부터 경인철도 부설권을 받게됐다. 모스는 인천의 미국인 거상 타운센드와 함께 한국개발공사를 설립하고, 1897년 3월 22일 인천 우각리 쇠뿔고개에서 인부 350명을 모아놓고 역사적인 기공식을 가졌다.
그러나 자금난에 봉착한 모오스는 부설권을 놓친 일본의 집요한 매수공작까지 더해지자 1898년 12월, 170만원을 받고 부설권을 일본인들의 경인철도인수조합으로 넘기고 말았다. 일본은 1899년 4월 23일 인천역에서 제2차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속도를 높여서 9월 18일에 경인철도 가영업을 시작했고, 1900년 11월 12일에 서대문에서 개업식을 가졌다.
개통당시의 경인철도는 탱크처럼 생긴 미제 ‘모갈’형으로 증기기관차 4대, 객차 6량, 화차 28량 이었고 1일 2왕복 주행시간 1시간 30분이었다. 경인철도를 처음 주행한 기관차는 미국 브룩스사의 탱크기관차. 기차가 내뿜는 불똥으로 철로변 민가에는 화재가 빈발했다고 한다. 9월 19일자 독립신문은 철도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화륜거의 소리는 우뢰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차의 굴뚝연기는 하늘높이 솟아오르더라. 차창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움직이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경인선의 개통은 근대적 교통기관의 도입과 함께 일본의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침투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경인선은 조선식민지배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 러시아 침략을 위한 바란으로 일본이 해외에 부설한 첫 철도였다. 일본은 인천과 노량진간의 개통에 이어 노량진과 서울역 공사를 서둘러 1900년 7월 8일에 전구간을 개통시켰다.
월미도행 ‘꽃열차’ ‘경인통학생 열차’ 등으로 유명했던 경인선은 일제하, 광복 공간, 한국전쟁 등 급변하는 역사 속 철길을 숨가쁘게 달리면서 증기기관차에서 디젤기관차, 전철로 모습을 바꿔왔다. 경인선은 1965년 9월 18일 복선에 이어 1974년 8월 15일 전철화됐다.
임진각에서 열린 경의선 연결 기공식에 참석한 김대중 대통령 내외와 건교부장관, 전두환 전대통령, 이만섭 국회의장 등이 기념버튼을 누르고 있다
▶1894년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초등교육기관인
관립 교동소학교(교동초등학교 전신) 개교
- 교동공립보통학교 졸업식 (1918년)
▶1883년조선 보빙사 방미. 아더 미국 대통령 면담
▶1810년칠레 자치정부 수립
▶1402년조선, 지진 피해
▶96년제11대 로마제국 황제 도미티아누스 암살
▶53년제13대 로마제국 황제 트라야누스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