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화실 오바.
벌써 한 달 째 이 정물화에 매달리고 있다. 끝날 것 같으면서도 안 끝나고 다음엔 완성해야지 하는데도 영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연필파스텔의 꼼꼼하게 색 만들기.
하루는 밑그림, 하루는 소파와 식탁 위 과일, 하루는 꽃병과 뒤에 있는 이젤, 하루는 다듬기, 또 하루는 다듬기...
밥을 금방 먹어서인지 원본 사진 구멍나도록 뚫어지게 관찰해서 그런지 눈이 뽑힐 것 같이 아프다. 근데, 내 친구는 심취해서 조용히 그림만 그리고 있다. 걘 확실히 진도가 빠르다. 오늘 색을 들어간 그림인데 반은 그린 듯 싶다.
내가 안 볼 때 여분의 도구를 사용하나?
화실 안의 공기는 솔솔바람 정도? 내가 늘 앉는 화실 창문과 일직선상에 위치한 선풍기 옆 황금자리에 앉아 에어컨 바람과 선풍기 바람에 적잖이 몸을 맞기고 있다.
라디오는 팝송이 나오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Cause’ 밖에 안 들린다. miss you랑. 눈도 피곤하고, 팝송 가사 좀 들어보려고 하던 걸 잠시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젤 도화지 위에 이마를 갖다 댄다. 편안하다.
그치만 역시 영어가사는 ‘Cause와 miss you만 들린다.
‘들려라, 들려라, 들려라.’
아야, 아야!
누가 머리를 잡아당긴다.
“누구야? 어,어,어·”
여긴 도화지 속인 것 같다. 믿기진 않는 사실이지만, 상상은 해 봤었다. 정말 날실과 씨실로 엮은 것처럼
되어 있는데 벽처럼 높아 꼭 나무로 만든 미로 같다.
멋진 걸~.
그런데 이 미로를 어떻게 뚫고 어디로 가남?
내 왼손에는 그림 그릴 때 사용하던 연필파스텔 열한 자루와 오른손에는 물한컵이 있다. 목이 마르니까 물 한 모금 먹고 시작하자.
‘아, 맛있다.’
뭐부터 할까? 이 속은 종이결로 되어 있으니까 파스텔연필로 분명 칠해질거고, 그래 벽부터 치우자.
물 한모금을 입에 담은 후, 하나둘센 360도 돌면서 분사했더니 벽이 스물스물 무너지기 시작한다.
‘됐어, 됐어.’
이제 밤하늘을 그려도 되겠다. 검은, 남, 흰색 파스텔을 들었다.
난, 얼굴도 타지 않고 상쾌한 바람이 부는 여름밤이 좋더라.
시원한 밤빛하늘을 그리고 운치 있게 구름 몇 점을 그렸다.(비가 올 검은 먹구름은 빼고, 밤하늘의 밋밋함과 공포스러움을 없애줄 단정하고 귀여운 구름으로) 아참, 달이 숨겨진 구름은 하이라이트로! 주황과 노랑으로 달도 그렸다. 보름달, 하트모양의.
땅은 넓은 사막색으로 그렸다. 평소 사막을 가고 싶었는데, 이 김에 낙타도 한 마리 그려야지. 아싸~ 전갈 같은 것 오지 못하게 공중에 떠 있는 긴 의자 하나 그리고, 안 돼, 안 돼. 공중은 무서우니까 다시.
바닥은 흙, 동글동글한 모래가 밟히는 시원축축한 흙에(벌레는 올 수 없는 장치를 부착한) 긴의자가 있다. 나무 의잔데, 우리 동네 개천가에 있는 것 같은 것으로(물론 거추장스러운 손잡이는 없어야 하고)
거기에 흰색으로 우유가 듬뿍 들은 우유맛 아이스바를 하나 그려 집어든다.
나무 의자에 쭉 뻗고 누워 우유맛 하드를 한입 한입 먹으면서 바람을 맞는다.
‘아, 근데 하늘에 별이 없다.’
하드를 입에 물고, 노랑색으로 주황색으로 하늘색으로 별을 100개쯤 그렸을까. 아, 별똥별도 그려야지. 보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별똥별을 난 31 평생에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별똥별 5개를 그려 넣는다. 소원 5개 중 한 가지 소원은 평생 ‘소원’을 빌 때마다 다 들어지는 것.^^
배가 고프긴 하지만, 위산이 올라올지도 모르고 혼자 밥먹기도 그렇고 그냥 눈을 감는다. 아무래도 오늘은 난생처음으로 밖에서 노숙을 해야할 듯 싶다. 베게와 난로, 그리고 오리털 이불도 그렸다. 때아닌 물건들이 내 옆에 있지만 아무도 내게 뭐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여기, 혼자니까.
양치질을 해야 하는데, 이 썩으면 안 되는데, 오늘은 그냥 자기로 한다. 아까 일기에 적진 않았지만 그 우유맛 하드는 무설탕이고 자알리톨이 함유된 제품이었다고 말하면서.
쫌 그래서 물로 헹궜다. 입을 물로 헹궜더니 좀 편안하다.
‘Cause, miss you~, 아까 그 영어 가사가 들린다. 몇 개 더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저거, 저거, “I love!"
짱그르릉 ~. 색연필 열한 자루가 동시에 떨어졌다.
화실사람들이 다 날 힐끗힐끗 쳐다본다.
‘왜 그러지? 난, 또 왜 화실이지? 그럼 나 혼자만 다녀온 거였어?’
시화는 어깨가 아프다고 자리에 일어나 서 있다. 내 오른손에 두모금 먹고 남은 물컵이 있었고, 그림은 약간 축축하게 젖어 있다.
‘도대체 뭐지? 그 밤하늘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그 우유맛 하드는?’
“시화야~, 시화야~”
“왜?”
“근데...근데...”
“야, 넌 왜 이렇게 묻히고 그리냐? 발바닥에도 묻히고, 입술엔 왜 흰색을 묻히고... 뭐 먹었지?”
“어?”
“수상한데? 온통 묻었잖아. 뭐야? 나 그림 그리고 있는 사이에 어디 다녀온거야?”
“아니, 저기...”
도화지를 가리키는데 꽃병 안으로 내 머리카락 하나가 보인다.
‘아까, 네가 잡아당긴 거였니?’
자세히 보니 종이 속으로 머리카락 하나가 단단히 잡혀 있는 것 같다.
‘안 되겠다, 뽑아야지. 왠지 위험할 것 같아.’
하나둘 셋, 머리카락을 잡고 푹 뽑았다. ‘똑’ 소리와 함께 빈 구멍이 하얗게 생겼다.
구멍을 메꾸기 위해 흰색, 파란색, 하늘, 녹색, 고동색까지 칠했다.
‘그 누구도 이 구멍을 찾지 못할 거야.’
“선생님 이거 픽사티브 뿌리면 절대 파스텔 가루 안 날라가는 거죠?”
“글쎄요, 날라갈걸요.”
이런, 아무래도 액자를 사서 꽉꽉 넣어놔야겠다.
제발, 그림 속 구멍이 쏙쏙 감춰져 있기를 바라면서
2009. 8.8,9 선혜
첫댓글 푸핫...유쾌한 서네님~~!
서네~ 님 생생하게 살았는 사진이 멋져~~~요^^ 요즘 자유 드로잉은 계속 하는지 궁금하당~~~ 결국은 자신이 만든 드로잉이 최고의 작품이 된다는것 잊지마세요.
서네님의 표정이 더 재미나 보입니다..크게 한번 웃고 갑니다..
하하하. 하하하. 서네님. 너무 재미있으시당. 하하하.
서네님 표정이 정말 너무 멋져서 그림은 눈에 안들어오는데요^^*
엇.. 수업일기에 올리려구 같이 찍으셨군요.
분위기 만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