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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보살(文殊菩薩)의 게송(偈頌)
1.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평론(評論)
이 때 여래(如來)께서 ‘문수사리’ 법왕자(法王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지금 이 이십오(二十五)명의 무학(無學)인 대‘보살’들과 ‘아라한’들의 이야기를 전부 다 들었다. 제각기 최초에 도(道)를 이룬 방편(方便)을 말하였는데, 모두 진실(眞實)한 원통(圓通)을 닦은 이야기로서, 그들의 수행(修行)에는 우열(優劣)이나 전후(前後)의 차별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제 ‘아난’으로 하여금 도(道)를 깨닫게 하려면 이 스물다섯 가지 수행(修行)중에서 어느 것이 그의 근기(根機)에 가장 적당하겠느냐?
또 내가 없는 후세(後世)에 이 세상의 중생들이 ‘보살’승(菩薩乘)에 들어가서 위없는 무상도(無上道)를 구하려면 어느 방편(方便)을 사용해야만 쉽게 성취할 수 있겠느냐?”
‘문수사리’ 법왕자(法王子)가 부처님의 자비하신 뜻을 받들어,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처님 발에 절하고 부처님 위신(威神)을 받들어 게송(偈松)으로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각해(覺海)의 성품(性品)이라 맑고 두렷해,
두렷한 맑은 각(覺)이 원래 묘(妙)한데,
원명(元明)이 비추면서[照] 소(所)가 생기고,
대상[所]이 생기면서 조성(照性)없어져,
미망(迷妄)에 난데없이 허공(虛空)생겨나,
허공(虛空)을 의지하여 세계(世界)생기니,
생각이 가라앉아 국토(國土)가 되고,
깨닫고 아는 놈은 중생(衆生)이라네.
허공(虛空)이 대각(大覺)에서 생겨난 것이,
바다에 한 물거품 생긴 것 같네,
먼지 수만큼 많은 유루국(有漏國)들도,
모두가 허공(虛空)에서 생긴 것이네,
물거품 사라지면 허공(虛空)없거니,
하물며 삼계(三界)인들 존재하리까.
근원(根元)엔 두 성품이 본래 없지만,
그러나 방편(方便)에는 문(門)이 많다네.
성인(聖人)의 성품(性品)에는 모두 통하여,
순역(順逆)이 모두 같은 방편이지만,
초심자(初心者)가 삼매(三昧)에 들어갈 적엔,
더디고 빠른 것이 같지가 않네.
색진(色塵)은 망상(妄想)이 맺혀서 된 것,
정료(精了)로 투철하게 요달(了達) 못하네,
분명하게 꿰뚫어 알지 못하니,
어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나.
음성(音聲)이 섞이어서 언어(言語)가 되나,
언어는 명구(名句)와 의미(意味)로 된 것,
하나가 전체를 포함(包含) 못하니,
어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나.
냄새는 코에 닿아 알 수가 있어,
비근(鼻根)에 안 닿으면 원래 없는 것,
안 닿으면 냄새를 맡질 못하니,
어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나.
미진(味塵)은 본연(本然)한 성품(性品)아니라,
맛보는 순간(瞬間)에만 존재(存在)한다네,
한결같지 아니한 그 성품으로,
어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나.
촉감(觸感)은 부딪칠 때 분명히 알고,
부딪침 없어지면 알 수가 없다,
붙고 떨어지고 일정치 않아,
어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나
.
법진(法塵)은 마음에서 일어나는데,
법진(法塵)을 의지하면 소(所)가 있으며,
능소(能所)가 벌어지면 변섭(徧涉)안되니,
어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나.
안근(眼根)은 툭 트이어 잘도 보지만,
앞만 보고 뒤는 보질 못하는구나.
사방(四方)에서 뒤쪽은 보지 못하니,
어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나.
비근(鼻根)은 들이쉬고 내어쉬므로,
교차(交叉)되는 순간에는 호흡이 끊겨,
끊어지면 비근(鼻根)과 교섭(交涉)없으니,
어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나.
설근(舌根)이 맛 아는 것 대상(對象) 있으니,
오미(五味)를 인연하여 깨달아 안다,
오미(五味)가 없어지면 각료(覺了)도 없어,
어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나.
신근(身根)은 촉진(觸塵)과 같은 것이니,
둘이 다 원만한 각관(覺觀) 아니다.
한계(限界)가 있으므로 회통(會通) 안되니,
어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나.
의근(意根)은 난사(亂思)와 섞여있어서,
담료(湛了)한 그 성품을 볼 수 없는데,
상념(想念)을 벗어날 수 없는 중생이,
어떻게 원통(圓通)을 얻을 수 있나.
안식(眼識)은 세 가지가 섞여서 된 것,
근본을 따져보면 실상(實相) 아닐세.
정(定)해진 자체(自體)가 원래 없는데,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나.
심문(心聞)이 시방계에 통연(洞然)한 것은,
큰 인연(因緣)의 힘으로 생긴 것이라,
초심(初心)은 들어갈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나.
비단백(鼻端白)을 보는 것도 방편이라서,
마음을 거두어서 머물게 하네,
머물면 마음이 주(住)하게 되니,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나.
설법(說法)은 말과 글로 희롱(戱弄)하는데,
개오(開悟)를 먼저 이룬 자(者)가 쓴다네,
명구(名句)는 기멸(起滅)있어 무루(無漏)아니니,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나.
지계(持戒)는 신체만을 단속하는 것,
몸 아닌 다른 것은 단속 못하네,
원래가 온갖 곳에 두루 못하니,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나.
신통(神通)은 전생(前生)에서 닦은 과보니,
불법(佛法)을 분별(分別)함과 관계가 없다.
염연(念緣)은 사물(事物)들을 못 여의는데,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나.
만약에 땅의 성품(性品) 관찰해 봐도,
굳세고 막히어서 통달 못하네.
유위(有爲)는 성인(聖人)들의 성품(性品) 아니니,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나.
만약에 물의 성품(性品) 관찰해 봐도,
물이란 상념(想念)은 진실(眞實) 아니고,
여여(如如)는 각관(覺觀)과는 다른 것이니,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나.
만약에 불의 성품(性品) 관찰해 봐도,
유(有)를 ‘싫어함’은 ‘여읨’ 아니며,
초심자(初心者) 구제하는 방편(方便)아니니,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나.
만약에 바람 성품(性品) 관찰해 봐도,
움직임 고요함이 상대적(相對的)이다.
상대(相對)는 무상각(無上覺)이 될 수 없으니,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나.
만약에 허공 성품(性品) 관찰해 봐도,
혼둔(昏鈍)은 애초부터 각(覺)이 아니다.
각료(覺了)가 없는 것은 ‘보리’(菩提)와 달라,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나.
만약에 식(識)의 성품(性品) 관찰하여도,
관(觀)하는 식(識)이 또한 상주(常住)아니며,
마음을 두는 것이 허망(虛妄)한 건데,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나.
제행(諸行)은 생멸(生滅)하니 무상(無常)하다네,
염불(念佛)하는 성품(性品) 또한 생멸심(生滅心)이며,
원인(原因)과 같지 않은 결과(結果) 얻으니,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나.
제가 지금 세존(世尊)께 사뢰옵니다,
부처님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하시니,
이 세계에 사용하는 참된 교체(敎體)는,
청정(淸淨)이 소릴 듣는 문(聞)에 있다네.
<강의> 문수‘보살’님이 ‘사바’세계는 이근(耳根)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라고 하시면서, 이근(耳根)을 통한 삼매수행을 권한다. 흔히, 「귀는 신생아가 출생하면서부터 바로 소리를 들으나, 눈은 생후 두서너 달이 지나야 비로소 볼 수가 있다.」고 설명하는 것을 보면, 「교체(敎體)가 소리를 듣는 이근(耳根)에 있다.」는 문수‘보살’의 말씀이 이해가 된다.
그러나 전생에 안근(眼根)이나 의근(意根)등으로 공부를 많이 했던 사람은 꼭 이근(耳根)공부에 구애될 것은 아니라 하겠다.
‘삼마제’(三摩提)를 닦아서 얻으려 하면,
반드시 문중(聞中)으로 입류(入流)해야만.
고통(苦痛)을 여의고 해탈(解脫) 얻으니,
정말로 좋구나, 관세음(觀世音)이여.
<강의> 앞에서 불생불멸하는 진심(眞心)을 설명하는 ‘사마타’에서는 ‘보는 견(見)’을 가지고 이야기 소재로 삼았는데, 지금 삼매(三昧)를 닦는 ‘삼마제’공부에서는 ‘듣는 문(聞)’을 방편으로 삼아서 공부하기를 ‘문수’‘보살’이 권장한다.
본래 견(見)이나 문(聞)이나 모두 마음의 작용이니 결국 같은 공부방법이기는 하나, 안근(眼根)은 800공덕이고 이근(耳根)은 1200공덕이니, 이근(耳根)이 원통(圓通)하다는 말씀이시다.
“반드시 문중(聞中)으로 입류(入流)해야만 한다”는 것은 앞에서 나왔듯이, 성진(聲塵)인 ‘소리’를 듣지 말고, ‘듣는 성품’인 문성(聞性)을 대상으로 공부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실제로 문성(聞性)은 아무 흔적도 소리도 없으니, 「‘무엇을’ ‘어떻게’ 걷어잡고 이근원통공부를 짓느냐?」가 문제이다. 이 문중(聞中)은 견문각지(見聞覺知) 사성(四性)의 문성(聞性)이니, 실은 견성(見性)이나 같은 놈이다. 이 공부는 견성(見性)·문성(聞性)·각성(覺性)·지성(知性)을 제대로 파악한 수행자만이 할 수가 있다.
‘갠지스’ 강(江) 모래 수만큼 많은 겁(劫) 동안,
미진수(微塵數) 불국토(佛國土)에 드나들면서,
크고도 자재(自在)하신 신력(神力)을 얻어,
무외(無畏)로 중생에게 베푸신다네.
묘음(妙音)과 중생소원 관세음(觀世音)으로,
범음(梵音)과 희유하신 해조음(海潮音)으로,
세간을 구호(救護)하여 편안케 하며,
세간을 벗어나서 상주(常住)얻게 해.
제가 이제 부처님께 사뢰옵니다.
관음보살(觀音菩薩) 말씀과 같사옵니다.
비유컨대 사람이 정거(靜居)할 적에,
시방(十方)에서 동시에 북을 친다면,
시방 소리 일시(一時)에 두루 듣나니,
이것이 이근(耳根)의 원진실(圓眞實)이네.
눈으로 장외(障外)를 보지 못하고,
입도 코도 모조리 마찬가지며,
신체는 촉진(觸塵)과 만나야 알고,
생각은 분잡하여 두서(頭緖)가 없네.
담장이 막혔어도 소리는 들려,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 들리네.
오근(五根)들은 이근(耳根)만 같지 못하니,
이것이 이근(耳根)의 통진실(通眞實)이네.
소리의 성품이란 동(動)과 정(靜)이라,
문중(聞中)에는 있기도 없기도 하네.
소리가 없으면 무문(無聞)이라나,
듣는 문(聞)은 문성(聞性)이 없지 않다네.
소리가 없을 적에 멸(滅)하지 않고,
소리가 있을 적에 생(生)하지 않아,
생(生)과 멸(滅) 두 가지를 모두 여의니,
이것이 이근(耳根)의 상진실(常眞實)이네.
자면서 꿈을 꾸고 있을 적에나,
‘생각하지 않을 때’도 없지 않다네.
각관(覺觀)은 사유(思惟)를 벗어났으니,
마음과 몸으로는 미칠 수 없네.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는,
소리 내어 말을 해야 뜻이 통하니,
중생들이 문성(聞性)을 알지 못하고,
소리만 따라다녀 유전(流轉)한다네.
‘아난’도 기억력이 뛰어나지만,
사사(邪思)에 떨어짐을 못 면(免)했으니,
경계에 빠져서 따라갔다네.
듣는 성품 돌이키면 망심(妄心) 없는 걸.
2. ‘문수’‘보살’(文殊菩薩)의 가르침
‘아난’아. 이 법문을 새겨들어라,
내가 이제 부처님 위력(威力) 받자와,
금강왕(金剛王)의 환(幻)과 같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불모(佛母)인 진삼매(眞三昧)를 설명하리라.
그대가 미진수(微塵數) 부처님들의,
일체의 비밀(秘密)법문(法門) 들었더라도,
욕루(慾漏)를 먼저 제거(除去) 못했던 탓에,
다문(多聞)만 모아서 허물되었다.
부처님의 불법(佛法)은 듣고 지니며,
어찌하여 ‘듣는’ 문성(聞性) 듣지 않느냐.
‘들음’은 자연(自然)히 생기지 않고,
소리로 인하여서 ‘듣는다’하네.
선문(旋聞)하여 소리를 벗어버리면,
벗어난 ‘그 놈’은 무엇이던가.
일근(一根)이 본원(本源)으로 되돌아가면,
육근(六根)이 해탈을 이루게 되네.
견문(見聞)은 병난 눈에 헛것과 같고,
삼계(三界)는 허공 꽃과 같다고 한다,
문성(聞性)을 되돌리면 눈병이 낫고,
육진(六塵)이 사라지면 각(覺)이 원정(圓淨)해.
청정(淸淨)함이 지극하고 광(光)이 통달(通達)해,
고요함[寂]과 비춤[照]이 허공(虛空) 품었다,
되돌아서 세간(世間)을 관찰해 보니,
꿈속에 보던 일과 다름이 없다.
‘마등가’도 꿈속의 환각(幻覺)이거늘,
누가 있어 그대 몸을 붇들었더냐.
세상에 재주 있는 요술쟁이가,
환술(幻術)로 지어놓은 남자 여자네.
비록 모든 육근(六根)이 움직이지만,
하나의 기틀이 이끌어가네.
기틀이 쉬게 되면 고요해지고,
모든 헛것 본래 성품(性品) 없는 것이네.
육근(六根)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하나의 정명(精明)에 의지(依支)한지라,
나누어져 육화합(六和合)이 이뤄졌다네.
여섯 중에 하나라도 휴복(休復)한다면,
여섯 작용 한꺼번에 불성(不成)이 되네.
육진(六塵) 번뇌(煩惱) 단번에 없어지면서,
원명(圓明)하고 정묘(淨妙)함을 이루게 되네.
육진(六塵)이 남았으면 유학(有學)들이고,
밝음이 지극하면 여래(如來)님일세.
대중(大衆)과 ‘아난’은 들어 보아라.
성진(聲塵)만 듣던 문기(聞機) 되돌이켜서,
능히 듣는 네 문성(聞性)을 반문(反聞)하여라.
<강의> ‘선여도문기 반문문자성 旋汝倒聞機 反聞聞自性’은 반문(反聞)공부법을 명시한 것이다. 즉 ‘삼마제’를 닦으려면 “문기(聞機)를 되돌려 문성(聞性)을 관조(觀照)하라.”는 말씀이다.
‘선여도문기旋汝倒聞機’를 통설은 “전도(顚倒)하게 듣는 기틀을 돌이켜라.”고 새긴다. 나는 ‘전도(顚倒)하게 듣는 기틀’이란 것은 사람들의 문기(聞機)가 외부의 성진(聲塵)만 들으려 하는 것을 말하므로, 알기 쉽게 의역(意譯)하여 “바깥 소리인 성진(聲塵)을 듣는 문기(聞機)를 되돌이켜 들어라.”고 새겼다.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을 운허스님과 탄허스님은 “들음을 돌이키어 자성(自性)을 들으면”이라고 새기시고, 각성스님은 “듣는 자성(自性)을 돌이켜 들으면”으로 새기시는데, 문성(聞性)이 곧 자성(自性)이니 그 의미는 같다. 의역하면 “능히 들을 줄 아는 네 문성(聞性)을 반문(反聞)하라.”는 뜻이 된다.
그 성품(性品)이 무상도(無上道)를 이룰 것이니,
진실로 원통(圓通)이란 이러합니다.
이것이 미진수(微塵數) 부처님들이,
‘열반’(涅槃)의 문(門)에 들던 외길이라네.
과거(過去)의 모든 여래 부처님들도,
이 법문을 통하여서 성취하셨고,
현재(現在)의 세상 모든 ‘보살’님들도,
지금 각각 원명(圓明)에 들어가시고,
미래(未來)에 도(道)를 닦을 수학인(修學人)들도,
마땅히 이 법문을 의지하리니.
문수(文殊) 또한 그렇게 증득했나니,
관세음(觀世音) ‘보살’만의 방편(方便)아니다.
3.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선택
부처님 세존(世尊)께서 저에게 친히
그 모든 방편(方便)들을 질문하시니,
말겁의 모든 중생(衆生) 구제하시고
출세간(出世間) 하려는 자(者) 구원하시네.
‘열반’(涅槃)의 마음을 성취하려면
관세음(觀世音) 이근원통 으뜸입니다
그 밖의 여러 가지 다른 방편(方便)은
모두 다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으로
임시(臨時)로 진로(塵勞)를 끊는 것일 뿐
근기(根機)가 얕고 깊은 모든 사람이
언제나 닦아 배울 법문(法門)아니다.
안 새는 무루(無漏)라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여래장(如來藏)인 부처님께 정례(頂禮)합니다.
미래의 중생에게 가피(加被)하시어
이 법문에 미혹(迷惑)하지 않게 하소서.
성취하기 쉬운 방편(方便) 이근(耳根)원통은
‘아난’과 말겁중에 헤매는 중생(衆生)
가르쳐 수행하기 적당하오니
오로지 이근(耳根)으로 수행을 하면
원통(圓通)이 무엇보다 뛰어납니다.
진실한 제 마음은 이러합니다.
[출처] 문수보살(文殊菩薩)의 게송(偈頌)|작성자 월해
<문수보살(文殊菩薩, skt. 만주슈리/Manjushri)>
문수보살은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의 약칭이다. 구역은 만수시리(曼殊尸利)이고 신역은 만수실리(曼殊實利)이며, 의역은 묘길상(妙吉祥)이다.
문수(文殊)와 만수(蔓殊)는 묘(妙)의 뜻, 묘(妙)는 부처님 무상(無上)의 지혜를 말하며, 사리(師利)와 시리(尸利), 실리(實利)는 복덕이 많다, 덕(德), 길상(吉祥)의 뜻이다.
따라서 합쳐서 묘덕(妙德), 묘수(妙首), 묘길상(妙吉祥)으로 번역된다. 그래서 문수보살을 묘길상보살이라고도 한다. 길상(吉祥)은 온갖 덕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문수'는 훌륭한 복덕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경전에 의하면, 문수보살이 일찍 성불했으나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돕기 위해 일시적인 권현(權現)으로 보살의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즉, 이미 오랜 옛날에 성불해서 용존상불(龍尊上佛)⋅대신불(大身佛)⋅신선불(神仙佛) 등의 명호를 가진 분이라는 것이다.
또한 미래에 성불하면 보견여래(普見如來)로 불릴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문수보살은 머리에 대일여래의 5지(五智)를 상징하는 오계관(五髻冠)을 쓰고 있으며, 동자형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보통 보살님의 모습으로 바른손에 지혜의 칼을 들고, 왼손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청련화(靑蓮花)를 쥐고 있다.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는 것은 일체중생의 번뇌를 끊는다는 뜻이고, 왼손에 청련화를 쥐고 있는 형상은 일체 여래의 지혜와 무상(無相)의 지덕(智德)을 맡아서 제법에 물들지 아니해 마음이 머무르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때로는 경권(經卷)을 손에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화신(化身)이다.
지혜가 완성됐다는 것은 곧 마음에 아무런 분별심이나 차별의식 등이 없는 한없는 고요 속의 밝음이다.
※권현(權現)---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화해 나타나는 것. 권화(權化), 화신(化身)도 같은 말이다.
※오계(五髻;다섯 상투)---머리카락을 전 ․ 후 ․ 좌 ․ 우 그리고 중간에 볼록 솟아나게 묶은 형상을 말한다. 오발관(五髮冠)이라고도 한다.
경남 하동의 쌍계사(雙磎寺) 국사암(國師菴) 주련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걸려 있다.
입문견문수(入門見文殊) 출문견보현(出門見普賢)
군심약사아(君心若似我) 환득도기중(還得到其中)
산문에 들어서면 문수를 보고 산문을 나서면 보현을 만난다.
그대 마음이 이와 같다면 반드시 중도에 다다르리라.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고 보현보살은 행원(실천)을 표방한다. 좌선하고 있을 때야 지혜를 닦는 데 전념해야겠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실천행을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문수보살의 지혜와 보현보살의 실천이 있어야 부처님이 되는 것이다.
원효(元曉)대사는 <발심수행장>에서 「행지구비 여차이륜(行智具備 如車二輪)」이라 했다. 지혜와 실천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는 것이다.
문수보살은 석가모니 입멸 후 인도에 실재했던 인물이라고 하며, <문수사리반열반경(文殊師利般涅槃經)>에는 사위국(舍衛國-코살라국) 다라취락범덕(多羅聚落梵德)이라는 바라문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문수보살은 <반야경(般若經)>을 결집,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문수설 반야경(文殊說般若經)>의 원명이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所說般若波羅蜜經)>이다.
중국 남조 양(梁)나라시대인 AD 506∼520경 승가바라(僧伽婆羅, Samghapãla, 479~524)가 번역했으며, 반야바라밀과 일행삼매를 설했다.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의 제7회 만수실리분(曼殊室利分)과 번역 술어에서 차이가 있을 뿐 내용상의 차이는 없다. 일행삼매를 설명함에 있어서, 일상평등(一相平等)의 법계만을 생각하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했다. 그래서 문수보살은 <반야경>의 내용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보살이다.
※일상평등(一相平等)이란 원융(圓融)한 마음, 한결같이 굴절이 없는 부드러운 마음을 말하는데, 달마(達磨)대사는 일상평등무별문(一相平等無別門)을 말했다. 원융(圓融)한 마음은 하여금 깨끗하게 할 수 있으나, 만약 그 마음에 편견(偏見)을 일으키면 곧 생멸(生滅)이 있다. 그러한 가운데 기억하는 망상은 삿된 생활을 짓는 것이며, 진리를 찾아서 업을 헤아리나 잊혀지지 않고, 굴림에 더러움이 더해지면 마음은 궁극에 이르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경전에 따르면 단순히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 등장하기도 해서 그 역사적 실재성은 분명치 않다. 따라서 문수보살이 석가모니불과 같은 실존인물이 아니라 상상으로 창작된 가상의 보살로 보고 있다. 문수보살이 석가모니불의 지혜를 상징하는데, 지혜를 알기 쉽게 하기 위해 인격화해서 문수보살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지혜를 근본지(根本智)와 방편지(方便智)로 나눌 때, 문수보살을 근본지, 보현보살은 방편지를 상징한다고 한다.
근본지(根本智)는 무분별지(無分別智) 혹은 반야지(般若智)라고도 한다.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떠나, 모든 존재의 있는 그대로 진실한 모습을 밝게 파악하는 지혜이다.
일체현상은 본질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아는 지혜로서 모든 분별을 버리고, 집착하지 않는 지혜이다.
그리고 방편지(方便智)란 부처님께서 중생의 근기에 응해서 분별(分別)해서 법을 설하는 중생 교화의 지혜를 말한다. 즉,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데 거기에도 여러 가지 분별할 일이 있을 때 이에 필요한 수단으로서의 지식이란 말이다.
문수보살은 모든 보살의 으뜸이며, 중생제도를 위해 수시로 형상을 바꾸어 현신한다고 알려져 있다. 문수보살은 동자로 나타나거나 임신한 젊은 여인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노인이나 동물로도 나타나 문수보살과 인연이 깊은 사람만이 그를 알아본다고 전해진다. 사자나 공작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의 지혜가 용맹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문수신앙과 관련이 깊은 문수보살의 상주처(常住處)는 신라의 고승 자장(慈藏)이 문수보살을 만나기 위해서 기도를 드렸던 중국 산시성(山西省) 청량산(淸凉山, 일명 五臺山)으로, 현재 1만 명의 보살과 함께 있다고도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수행자들이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을 찾았다.
우리나라에서도 강원도의 오대산이 예로부터 문수보살의 처소로 알려져 있다. 자장(慈藏) 율사는 중국의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중 문수보살로부터 범어로 된 사구게(四句偈)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아침에 한 노인으로부터 게송의 해석을 들었으며, 부처의 사리와 가사를 받았고, 우리나라의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상주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643년 선덕여왕 때 귀국해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웠으며, 오대산에 적멸보궁과 상원사를 건립해 문수신앙의 중심 도량으로 삼아 문수신앙을 소개했다.
그리고 자장율사가 울산을 지나던 중 문수산의 모습이 너무 깨끗하고 성스럽고 중국에 있던 청량산과 닮아서 청량산이라 이름하고 문수암을 세웠다고 한다. 울산 태화동에 자장율사가 태화사를 창건하고, 강 이름을 태화강이라 불렀으며, 전라북도 고창 청량산 문수사도 자장율사가 선덕왕 13년에 창건했다고 한다.
고려 말 공민왕 때 신돈이 문수회를 만들어 문수법회를 여는 등 왕실의 후원을 입어 후대에까지 전승됐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엔 세조(世祖)가 오대산에서 문수동자의 도움으로 몸 전체에 퍼진 부스럼을 고쳤다는 전설까지 생겨났다.
이렇게 해서 오대산 신앙을 낳았고, 그 외에도 문수보살과 관련 있는 사찰이 많이 있다. 우리나라 문수 3대 도량은 오대산 상원사, 고창 문수사, 북한산 문수사, 이렇게 셋을 꼽는다.
그 외에도 경북 봉화의 청량산과 문수산, 춘천의 청평사(淸平寺), 금강산 문수봉 등도 문수신앙과 관련이 있다.
문수보살은 대승불교에서 굉장히 위상이 큰 보살임에도 불구하고, 위상에 비하면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민중에게 인기가 적다. 민중들이 보기에 당장 지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아서인 듯하다. 보살들 중에서도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의 인기에 비교하면 많이 부족할 정도이다. 하지만 일본이나 티베트 불교에서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인기가 많고, 특히 티베트 불교에서는 대중적으로도 중요한 보살로 여겨 문수보살 진언을 흔히 외우곤 한다.
<화엄경> 속에서 문수보살은 보현보살과 함께 비로자나불의 양쪽 협시보살(좌우에서 모시는 보살)이 돼 삼존불의 일원을 이루고 있다. 보현보살이 세상 속에서 실천적 구도자의 모습을 띠고 행동할 때 문수보살은 사람들의 지혜의 좌표가 돼있다.
문수보살도 다른 보살들처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10대원을 세웠는데 다음과 같다.
➀ 모든 중생이 부처님의 지견을 성취하게 하고 갖가지의 방편으로 불도에 들게 한다.
➁ 문수를 비방하며 미워하고 죽음을 주는 중생이라도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➂ 문수를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깨끗하게 행동하거나 나쁜 짓을 하거나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➃ 문수를 속이거나 업신여기며 삼보를 비방하는 교만한 자들도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➄ 문수를 천대하고 방해하며 구하지 않는 자까지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➅ 살생을 업으로 하는 자나 재물에 욕심 많은 자까지 모두 보리심을 내게 한다.
➆ 모든 복덕을 부처님의 보리도에 회향하고 모든 중생이 복을 받게 하며 모든 수행자에게 보리심을 내게 한다.
➇ 육도의 중생과 함께 나서 중생을 교화하며 그들이 보리심을 내게 한다.
➈ 삼보를 비방하고 악업을 일삼는 중생들이 모두 보리심을 내어 위없는 도를 구하게 한다.
➉ 자비희사와 허공같이 넓은 마음으로 중생을 끊임없이 제도해서 보리를 깨닫고 정각을 이루게 한다.
----문수보살(文殊菩薩) 친견 사례----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 무착(無着文喜, 821~900) 선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문수보살 성지 오대산(五臺山)으로 갔다. 그런데 오대산 자락에서 소를 몰고 가는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 노인이 문수보살인 것을 몰라보고 이야기만 주고받다가 이 절에 스님이 몇 분이나 계시느냐고 물었을 때,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지” 그랬다.
무착은 노인의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무착은 노인에게 하룻밤 쉬어가게 해줄 것을 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밖에 나와 시중드는 동자에게 물었다.
“아까 노인께서 '전삼삼 후삼삼'이라 하시던데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러자 동자가 갑자기 큰 소리로 불렀다.
“스님!” 그 소리에 무착은 엉겁결에 대답했다.
“왜 그러느냐?”
“그 수효가 얼마나 됩니까?”
동자가 다그쳐 물었다. 무착은 또 다시 말문이 막혀 동자를 보고 말했다.
“이 절의 이름이 무엇이냐?”
“반야사(般若寺)라고 합니다.”
동자가 말하며 가리키는 곳을 보니, 웅장했던 절은 어느새 간 곳이 없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동자도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사람과 절이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허공에서 게송 한 구절이 들려왔다. 문수보살이 무착에게 내리는 게송이었다.
면상무진공양구(面上無瞋供養具) ― 성(화)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구리무진토묘향(口裏無瞋吐妙香) ―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심리무진시진보(心裏無瞋是眞寶) ―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보배요,
무염무구시진상(無染無垢是眞常) ― 언제나 깨끗해 물들지 않고 걸림이 없음이 진여로다(부처님 마음일세).
시중드는 동자도 절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자리에 다만 오색구름 가운데 문수보살이 금빛 사자를 타고 노니는데, 홀연히 흰 구름이 동쪽에서 와서 감싸버리고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무착이 게송을 읊었다.
온 누리가 그대로 성스러운 가람일세(廓周沙界聖伽藍). 눈에 가득히 문수보살 만나 말을 나누었으나(滿目文殊接話談)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니 어찌하랴(言下不知開何印). 고개 돌려 바라보니 옛 산과 바위뿐일세(廻頭只見翠山巖).
무착은 문수보살을 직접 뵙고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면서 수행에 더욱 힘쓰다가 앙산(仰山, 840~916) 선사의 문하에서 대오 각성해 앙산의 법을 이어받고 어디에도 거리낄 바 없는 대자유인이 됐다.
그 후 어느 해 겨울 동짓날 무착이 팥죽을 쑤고 있는데, 김이 무럭무럭 나는 죽 속에서 문수보살이 거룩하고 장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문수보살이 옛날 오대산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시키면서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무착은 그동안 무고한가?”
그러자 무착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갑자기 팥죽을 졌던 주걱을 들어 문수보살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문수보살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
“이보게, 무착, 나일세, 내가 바로 자네가 만나고 싶어 하던 문수라네, 문수!”
무착은 이 말을 받아서 대꾸했다.
“문수는 네 문수고, 무착은 내 무착이다(文殊自文殊 無着自無着), 문수가 아니라 석가나 미륵이 나타날지라도 내 주걱 맛을 보여줄 테다.”라고 하자,
내가 삼대겁을 수행해오는 동안(爾三大劫修行)
오늘에야 노승의 괄세를 받아보는구나(還被老僧嫌疑)
쓴 호박은 뿌리까지 쓰고(苦琥連根苦)
단 참외는 꼭지까지 달구나(甘苽徹疐甘)
문수보살은 이런 게송을 남기고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문수보살을 친히 뵈려고 오대산 금강굴에서 삼년동안이나 기도하며 문수보살을 원불(願佛)로 모시고 다녔던 무착인데,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문수보살이 몸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호령을 하며 주걱으로 얼굴을 갈긴 것이다. 왜 그랬을까?
남들이 다 문수를 찾으니 나도 문수를 찾았지만 깨닫고 보니 문수는 문수고 나는 나다, 이 말씀이다. 내 자신이 문수가 되고 부처가 돼야지 나 밖의 문수를 아무리 찾아봐야 내가 될 수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나 밖의 부처, 문수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문수보살의 팔자진언(八字眞言)----
문수보살의 팔자진언(八字眞言)은 가장 수승하고 큰 위덕을 지닌 진언이며, 모든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나타내는 진언이다. 이를 팔자문수(八字文殊)라고도 하는데, 여덟 글자를 진언으로 하는 문수보살 대위덕심주(文殊菩薩 大威德心呪)이다.
「옴 아미라 훔 카자라(唵阿尾啰吽佉左洛)」
----문수팔자법(文殊八字法)----
문수보살의 권속으로 문수팔대동자(文殊八大童子) 또는 팔지존(八智尊)이라고 부르는 동자 8명이 있다. 이들은 팔자문수(八字文殊)의 공덕을 상징하고 표시한다. 그리하여 문수보살을 본존(本尊)으로 모시고, 위의 팔자진언(八字眞言)을 외움으로써 천재지변, 전쟁, 질병(疾病) 일식(日蝕), 월식(月蝕) 등으로 인한 재액(災厄)을 없애는 밀교에서 하는 기도법이다.
그 외에도 선남자 선여인이 팔자진언을 외면 많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한 번 외우면 곧 자신을 지킬 수 있고,
두 번 외우면 친구를 지킬 수 있으며,
세 번 외우면 사는 곳을 지킬 수 있으며
네 번 외우면 처자를 지키고,
다섯 번 외우면 모든 권속(가족)을 지키며,
여섯 번 외우면 모든 성읍과 중생의 온갖 고난을 구제한다.
일곱 번 외우면 모든 악한 독과 재난을 없애며,
특히, 세수할 때 맑은 물에다 일곱 번 외우고 나서 씻으면 중생들이 우러러보게 되며, 잘못된 견해를 가진 이들이 모두 항복하며, 사람들마다 공경하게 돼 나쁜 마음을 없애고 환희심을 낼 것이라고 했다.
[출처] <문수보살(文殊菩薩, skt. 만주슈리/Manjushri)>|작성자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