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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해김씨 삼현파(판도판서공 휘 관파) 원문보기 글쓴이: 강남
김수로왕(1세) - 김관(49세)
金海金氏族譜序(김해김씨족보서)
번역 : 2009. 12. 19. 김 순대
金氏族譜譜金氏之族也金氏出於駕洛而自鼻祖首露王以下傳世歷九王合四百九十一年曁厥
김씨족보는 김씨의 씨족을 열거한 것이다. 김씨는 가락에서 나와서 조상인 수로왕이하 세대를 전하여 9왕을 지내고 합계 491년이 지났다.
國絶之後如羅朝有若角干公麗朝有若忠簡公在我朝有若節孝翁濯纓三足堂諸賢及各派之達官聞人其勳名爵業非不燁然相望於竹帛而亦無譜牒之可傳於世者不徒爲吾宗之一大欠事追惟我前代實有文獻莫徵之歎也
나라가 끊어진 후 신라 때에는 각간공(유신)같은 분이 있었고, 고려때에는 충간공(보)가 있었고, 우리 조선에는 절효옹(극일), 탁영(일손), 삼족당(대유)등 여러 현인과 각 파의 뛰어난 관리와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 공적이나 이름, 벼슬, 업적이 빛나지 않는 것이 없었고, 역사를 기록한 책(竹帛)에서 서로 우러러 보았다. 그러나 세상에 전해질 수 있는 보첩이 없어서 우리가 합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종족의 큰 결함이고, 우리의 앞 세대의 실제 있었던 문헌을 구하고자 하나 모을 수 없는 것이 한탄스럽다.
已粤在靑山公宇槩氏亦有志於斯而承其祖贊成公遺敎矣
이미 예전에 청산공 우개(1688~1750)씨가 계실 때, 역시 이 일에 뜻이 있어, 그의 조부인 찬성공(소전공 덕승,1595~1658)이 남기신 가르침을 계승하였다.
旣已蒐聚東史之所載又復博採諸派之私牒撰爲一秩藏在巾笥出示余語娓娓以仰述先志以卒其業不幸去歲公又舍世
이미 동국(우리나라)의 역사가 기록된 것을 모으고, 또 다시 여러 파의 개인들이 만든 보첩을 두루 모아, 한질의 책을 만들어 보자기로 싼 통에 보관해 오다가, 꺼내어 나에게 보이면서 친절하게 되풀이하여 돌아가신 선조의 뜻을 받들고자 하였는데 그 일을 다 끝내지 못하고 불행하게 세상을 떠나셨고 공 또한 세상을 버리셨다.
噫此乃先世遺托宗中大事而若謾過時日則固無可成之期自致前功之虧爲是之擢獨自任是役而先世之事蹟配位之某氏子孫之多寡官爵之有無名字之異同曾未稽考者閱譜牒以百數積年歲殆二紀參考互較採錄纖悉而立規設例
아! 선조께서 남기신 일은 종중대사이나 만일 시일이 늦어지고 경과되면, 이룰 수 있는 때가 없을 것이다. 이 일을 맡고부터 앞에서 해 놓은 일을 가려내어 혼자(익?)서 이 일을 맡게 되었다. 선조의 사적과 배위는 누구이고, 자손의 많고 적음과, 관작의 유무와, 이름이 다르고 같은 것 등, 일찍부터 생각에 머물렀던 것을, 수백부의 보첩들을 열람하여, 햇수로 거의 24년[1] 동안을 참고하고 서로 비교하여 자잘한 것까지 모두 채록하였으며 그리고 보규를 세우고 보례를 설정하였다.
[1]紀는 1년단위 또는 12년 단위이나 여기서는 12년 단위로 해석함
亦似得宜同宗鉉澤甫亦於是事專心一誠自金城來言嶺之豊角有刊本亂雜無統吾之四大家合附重刊
또한 화목이 이루어진 것인지 동종인 현택이 역시 이 일에 한 가지 정성으로 오로지 마음을 쏟아, 금성(나주)에서 찾아와 말하기를 영남의 풍각(대구에 있었던 지명)에 간행된 책이 있는 데, 난잡하고 통일성이 없어 우리의 4대 가문의 보첩을 합쳐서 다시 간행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凡他諸宗世系別附並錄之使故家世族咸知其祖先之立朝事君之道世守其忠節使遐苗徵裔咸知其系派之同源分流之共由各興其孝悌然後在家則可以爲孝子順孫在國則可以爲忠臣烈士
모든 다른 여러 종족의 세대의 계통은 같이 기록하고 별도로 첨부시키고자 하였다. 옛 가문의 세족이 그의 선조가 조정에 들어가 임금을 섬긴 일과 세세토록 그 충절을 지킨 것을 알고, 먼 후손들이 모두 그들의 계파가 같은 근원에서 분류되었다는 공통된 유래를 알면, 그 효도와 우애가 부흥된다. 그런 후 집에 있으면 효자와 순손[1]이 되고, 조정에 있으면 충신과 열사가 된다.
[1]順孫; 조부모를 잘 모시는 손자
夫如是則吾之譜非特爲壽後計也其於忠孝傳家之法亦可謂至矣盡矣
무릇 이와 같이 우리의 보첩은 특히 후손을 위해 계획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충효가 가문에서 전승되기 위한 방법도 역시 이것에 이르고 다한다고 할 수 있겠다.
要余當以並力齊聲期於刊布遂簡于諸宗廣聚各派系牒亟今合錄而於是始事于綾之白巖洞宗人家今旣告訖吾宗印本之譜出有日矣抑亦因此而有所感焉
나는 이일을 담당하여 보첩을 간행하여 배포할 때까지 힘을 모으고 같은 목소리를 내자고 하고, 드디어 여러 종친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각파의 계첩을 넓게 모아서 서둘러 지금 합록하자고 하였다. 이 일은 능주의 백암동[1]의 종인의 집에서 시작하여 지금 일이 끝났음을 알리니, 우리 종족의 인본된 보첩이 출판된 날이 되었다. 또 이것으로 인하여 소감이 있다.
[1]白巖洞 ; 현재 전남 화순군 능주면 백암리
竊嘗聞程夫子之言曰攝人心不忘本復<頂?>是明譜系我東譜牒之行莫盛於近世而敦睦之風未聞其由此而益篤是豈前賢之欺人哉
일찍이 들은 정부자[1]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것은 본래 보첩의 계통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보첩을 만드는 행위들이 근세에 들어와서 무성해졌고, 돈목의 풍속이 내가 듣기로는 이것으로 유래되었으며, 더욱 도타워지고 있으니 어찌 전의 현인들이 사람들을 속일 수 있겠는가.
[1]程夫子; 송나라 성리학자인 정호(1032~1085), 정이(1033~1107) 형제를 말함
然則是牒之行固爲吾宗之幸而若其推原本始敦行孝悌實在乎其人又奚以余言爲哉
그런즉 이 보첩을 만드는 것은 진실로 우리 종족의 행운이며, 만일 이 보첩을 추천하면 비로소 돈독한 행위와 효도와 우애가 있게 될 것이니, 그 사람 도 그랬듯이 또한 나로서도 말하고자 한다.
崇禎紀元後一百三十六年癸未二月日 後孫 瀷 謹序
숭정기원후136년(1628-1+136=1763) 계미년(1763) 2월 일 후손 익(瀷) 근서
凡例(범례)
- 惟我金氏肇自駕洛王傳世歷六十餘代名諱載在東史及源流譜故特爲載錄於譜冊之首以存愼重之義而各派舊譜中或有連系者或有中絶者世代久遠昭穆難序故各派中祖分門各編自此始計代數
생각해 보면 김씨는 수로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세대를 전하여 60여대에 이르고, 이름과 휘가 동사(東史)와 원류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특별히 보책의 수권에 기록하는 것은 신중히 모신다는 뜻이다. 각파의 구보중에는 혹 연계되어 있거나, 혹 중간에 끊어진 것도 있다. 세대가 오래되고 소목의 차례가 어지럽게 되어 있어, 각 파의 중조로서 각 편에 문중을 나누어 기록하니, 이로 부터 대수 계산을 시작한다.
- 本宗則始祖諱字上一書姓金氏而以下子孫不書姓字者所以示其同宗之義也外孫則必書姓字者所以別其異姓也
본종 즉 시조의 휘자위에 성 김자를 한번 쓰고, 이하 자손에는 성을 쓰지 않은 것은 동종이라는 도리를 보이기 위한 것이다. 외손은 반드시 성자를 쓴 것은 다른 성이라는 것을 구별하기 위한 이유이다.
- 同宗則勿限代數載錄而必書字號及初名改名者恐或名字之誤傳也書某年號某年生者以標行序也書某年月某日卒者以識其忌也享壽及某年登科文武官爵資級贈爵並書之而生存人有帶職者則曰今某官前{형行가운데金}則曰前某官以標其生存焉
동종은 대수를 제한하지 않고 기록하였고, 필히 자(字)와 호(號) 및 초명, 개명을 쓴 것은 이름자가 혹시 잘못 전해지지 않을 까 염려해서이다. 모년의 연호를 쓰고, 모년에 출생했다는 것을 써서 그 순서를 알도록 했다. 모년, 월 모일에 별세했다는 것을 쓴 것은 그 기일을 알기 위함이다. 돌아가신 나이와 모년에 등과하고 문과인지 무과인지, 관작과 자급(資級)과 증작(贈爵)을 나란히 기입하였고, 생존하는 사람은 현재 직책이 있으면 ‘금모관(今某官)’이라하고, 전직이 있으면 ‘전모관(前某官)’이라고 써서 생존을 표시하였다.
- 配位封爵及父名亦皆詳錄而如有達官聞人則必書某之後俾知其某閥且前後配則各書生幾子女與無后所以明其所出焉
배위는 봉작과 부친명도 역시 모두 상세히 기록하고 만일 뛰어난 관리나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누구의 후(某之後)라고 써서 그 문벌을 더하여 알도록 했고, 또 전후배(前後配)는 각각 몇 명의 자녀를 낳았는지, 또는 무후(無后)인지를 쓴 것은 그 출생한 바를 분명히 하기위한 이유이다.
- 墓山則書某邑某面某里某麓某向之原配位之合窆異穴皆爲備錄而有碑銘墓誌則書某之撰某之書者慮其後世代遠或有難尋之弊焉
묘소가 있는 산은 모읍, 모면, 모리, 모 산기슭, 모향(某向)과 배위를 합장했는지 따로 묘를 썼는지를 전부 준비하여 기록하였다. 또 비명(碑銘)이나 묘지(墓誌)가 있으면 누가 찬하고, 누가 썼는지를 기록한 것은 후손의 세대가 멀어져 혹시 묘소를 찾기가 어려운 폐단이 있을까 해서 이다.
- 先男後女之法遵用璿譜定例而惟其兄弟次序則不可..이후 복사누락...
남자를 먼저 쓰고, 여자를 나중에 쓰는 법도는 옛 보첩에서 정해놓은 예(例)를 준수한 것이다. 그 형제의 순서를 생각할 것 같으면 ...
- 王后嬪宮則空圈本行而敬書于極行上一字以示尊崇之義雖外外孫遠派亦必謹錄
왕후와 빈궁은 본행은 비워두고 공경하는 의미에서 가장 윗 행에 1자만 쓰서 존경하고 숭모하는 도리를 나타내었다. 비록 외외손이나 파가 멀다고 해도 또한 반드시 경근하게 기록하였다.
- 庶子則書於嫡女之後以存不敢先嫡之意
서자는 적녀의 뒤에 써서 적자가 먼저라는 뜻을 감히 훼손할 수 없도록 했다.
- 遐鄕同宗散處八路不得一統成譜者久矣凡我同宗執不慨然雖不知派分之所自而爲吾始祖之苗裔則一也豈可視若路人也今以駕洛之後爲系則雖未同源如源流譜萬姓譜姓苑叢譜所載者及其他諸派一並聯譜以廣其傳而且眎同宗百代之誼焉
먼 곳에 살고 있는 동종들이 8도에 흩어져 있어 하나의 통일된 보첩을 만들지 못한 것이 오래되었다. 비록 파가 어디서부터 나누어 졌는지는 알지 못하나 우리 후예들의 시조는 하나이니, 어찌 길가는 사람처럼 볼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 가락의 후예로서 이어지게 하여 비록 아직 동원(同源)이 되지 못하더라도 원류보와 만성보처럼 성들을 한곳에 모은 총보에 기록하고, 또 기타 여러 파들도 한곳에 나란히 연보하여 넓게 전하고자 하며, 이는 동종의 백대에 걸친 의의를 나타내고자 한다.
- 金海之金有金始興之派此則出於新羅敬順王之後而賜貫於金海者非我駕洛之後也勿許同譜以別他姓焉
김해김씨에 김시흥의 파가 있으나, 이는 신라 경순왕의 후에서 나와 본관을 김해로 하사받은 것이니, 우리 가락의 후예는 아니다. 따라서 동보를 허락하지 말고 타성으로 구별하라.
- 崇禎紀元後再丁丑七月日宗會于朗州西門外發通文收單子壬午十二月日始役于綾州白巖洞癸未二月日畢刊
숭정 기원후 재정축(1757년)[1] 7월일 종친들이 낭주(영암)의 서문밖에 모여서 통지문을 발송하고 단자를 모아, 임오(1762년) 12월일 비로소 능주의 백암동에서 일을 시작하여 계미(1763년) 2월일 간행을 마쳤다.
[1]숭정기원후 재정축은 1697년이나 여기서는 3정축(1757년)으로 보아야 한다.
발문
右金海金氏族譜凡三卷吾之金氏系出駕洛而蔓延於八路則古所謂自一人而爲兄弟自兄弟而爲緦功自緦功而爲塗人者正指此也悲夫一人之身而至於塗人吾譜之所以作也
오른쪽의 우리 김해김씨 족보는 3권으로 되어있다. 우리 김씨는 가락에서 나와 8도에 흩어져 있다. 옛말에 소위 한사람에서 시작하여 형제가 되고 형제에서 친척[1]이 되고 친척에서 길가는 사람이 된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를 가리킨 것이다. 슬프다. 한사람의 몸에서 길가는 사람에 이르게 되다니! 오리 보첩은 이런 이유로 만들어 졌다.
[1]시공(緦功); 시마(緦麻)의 복을 입는 친척과 소공(小功)이나 대공(大功)의 복을 입는 친척
肆我靑山公宇槩氏嘗慨然於斯自當費盡心力探根達幹則取諸宗誌尋流知源則證萬姓譜博考釐正亦有年所而功未綦成{辶+處}爾損世厥後則又無繼志者荏苒歲月遷就至此
마침내 우리 청산공 우개씨가 일찍이 이를 개탄하여 스스로 일을 담당하여 마음과 힘을 다하여 뿌리를 찾았다. 즉 여러 종친의 자료를 모으고 가지를 찾아 근원을 알고자 하여 만성보를 증거로 하고 넓게 상고하여 고치고 바르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역시 연세가 있어서 이 일을 이루시지 못하고 세상을 버리셨다. 그 후 이 뜻을 잇는 자가 없어 덧없이 세월만 흘러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同宗鉉澤甫病焉要余仍與之謀曰今世有氏族者必有譜有譜者皆有印本惟我之金有所闕焉其爲金氏之不幸執?大於此也
종친인 현택이 괴로워하며 나에게 요청하며 그가 생각하는 바를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 씨족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보첩이 있고 보첩이 있는 자는 모두 간행했는데 오직 우리 김씨는 없다. 이는 김씨들의 불행이니 이보다 큰 일이 있겠는가?”하였다.
嶺本雖出而亂雜無統圖所以復明刊傳經始於壬午歷數歲而功告訖何其難也
영남에서 보책이 나왔으나 난잡하고 통일된 체계가 없으니 다시 분명한 보첩을 발간하고자 하여 임오(1762년)에 일을 시작하여 여러 해가 지나 일을 끝냈음을 알리니 얼마나 그 일이 어려웠겠는가.
夫譜系之作盖將以謹昭穆之次序別支派之分流雖以曾南豊之爲江在著姓尙有譜不明之歎其難也
대개 보첩의 계통을 만드는 일은 소목의 순서를 경근하게 하고 지파의 분류를 구별하는 것이니 비록 증남풍[1]이 강서성의 두드러진 성씨로서 오히려 보첩이 있으나 불명확한 것을 한탄했는데 이와 같은 어려움이다.
[1]曾南豊; 송대의 학자인 증공(曾鞏)을 가리키며 字는 자고(子固)이고 江西省 南豊 출생이다.
如是況我金世遠族大偏邦文獻莫徵主斯役者雖或如子固之用心其盡精無訛又豈可必也哉此所以兢兢底愼閱數年乃成者也
이와 같이 비록 우리 김씨가 세대가 오래되고 나라 안에 널리 퍼졌으나 문헌에 증거가 없는 것이 큰일이다. 비록 자고(子固; 위의 曾鞏)와 같은 생각으로 전심전력을 다하여 그릇됨이 없도록 한다고 해도 어찌 그렇게 되기를 바라겠는가. 이 때문에 여러 해를 전전긍긍하고 철저하고 신중하게 여러 자료를 열람하여 이루어 낸 것이다.
凡我宗人之觀斯譜者相勉而語曰某賢我先祖也我不有?則沗<泰?>也某公我同宗也我不如則恥也於是而倍追慕之誠則孝悌之心可以油然而出矣詩曰無忝爾所生爲吾宗子孫者盖於玆念之哉
모든 우리의 종인 중에 이 보첩을 보는 사람은 서로 권면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모 현인은 우리 선조이시다. 우리에게 없다면 덧붙인 것이다(?). 모 선생은 우리와 동종이다. 우리가 이를 따르지 않으면 부끄러운 것이다.”라고 말이다. 이로서 조상을 그리는 정성이 배가되고 효도와 우애의 마음이 자연이 생겨날 것이다. 시경에서 말하기를 ‘조상을 욕되게 하지 말라.’하였으니 우리 종친의 자손들은 모두 이를 유념해야 할 것이다.
時癸未二月日後孫瀷謹跋
계미(1763년) 2월 후손 익 근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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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족보자료실 61번 참조
쉬운 일은 아니죠.
꼭 확인하고 싶은 계미보(176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