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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禪慧珠
문수경전연구회 임제록 강좌 제3강 -4(2009.07.06)
12-3 잡으면 곧 쓴다 道流(도류)야 把得便用(파득변용)이요 更不著名字(갱불착명자) 號之爲玄旨 (호지위현지)니라 山僧說法(산승설법)은 與天下人別(여천하인별)하니 祇如有箇文殊普賢 (지여유개문수보현) 이 出來目前(출래목전)하야 各現一身問法(각현일신문법)하되 纔道咨和尙(재도자화상)하면 我早辨了也(아조변료야)니라 老僧檼坐(노승온좌)에 更有道流(갱유도류)하야 來相見時(내상견시) 我盡辨了也(아진변료야)니 何以如此(하이여차)오 祇爲我見處別(지위아견처별)하야 外不取凡聖(외불취범성)하며 內不住根本(내부주근본)하야 見徹更不疑謬(견철갱불의류)니라 잡으면 곧 쓴다 그랬어요. 道流(도류)야 把得便用(파득변용), 잡으면 곧 쓴다, 이게 뭐여. 내가 말하면은 聲乃卽聞 (성내즉문)이라, 소리가 나면은 곧 들어. 物乃卽見(물내즉견)이여, 내가 손을 딱 이렇게 든다든지 뭐 물건을 하나 이것 좀 보십시오, 하면 곧 보는 거야. 그게 把得便用 이야. 잡으면 곧 쓴다. 어떤 상황이 나타나는 그 상황을 그대로 감지한다 말여. ‘견문각지’ 하죠. 見聞覺知. 파득변용. 참 아주 뭐 아주 명쾌합니다. 뭐 긴 말 필요없어요. 更不著名字(갱불착명자), 거기에 무슨 이름을 갖다 붙힐 거요? 거기에 무슨 비로자나불이라 할 거여, 무슨 뭐 노사나불이라 할 거여? 무슨 뭐 법신도 보신도 화신도 다 해당 안되는 거라. 전부 지어붙힌 이름이여. 不著名字니, 號之爲玄旨 (호지위현지)라, 그것을 이름해서 玄旨, 현묘한 뜻이라 한다. 아주 깊고 오묘하고 높은 그런 뜻이다. 뭐라고 이름 붙힐 수가 없어. 그 사실, 그 마음의 실체, 그 사실을 알지 못하면, 그걸 이제 현지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면 뭐라고? 不識玄旨(불식현지)하면 徒勞念靜(도로염정) 그랬어요. 생각을 고요히 가라 앉히고 가라 앉히고 화두 일념, 화두 일념, 잡아다 놓으면 도망가고 잡아다 놓으면 도망가 버리고 한 시간 앉아 있는 동안 여러 수십 번 도망가고 수십 번 잡아오고 수십 번 도망가고 수십 번 잡아오고 … 쓸데없이 그 장난만 하는 거야. 마음의 실체를 알아버리면은 그렇게 애써서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든지 어디에다 집중시킬려고 하는 그런 노력이 필요치 안해. 도로염정이라, 그래서 참 신심명 아주 멋지죠? 불식현지, 이 현묘한 뜻을 알지 못하면은 한갖 수고롭게 생각을 고요하게 하려고 그냥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건 사실은 헛수고다. 山僧說法(산승설법)은 與天下人別(여천하인별)하니, 산승의 설법은 천하 사람들하고 다르다 말여. 딴 선사들하고 같이 보지 말라 말여. 祇如有箇文殊普賢 (지여유개문수보현) 이 出來目前(출래목전)해서 예컨대 다만 저 문수 보현이라는 게 있어 가지고서 나타나가지고 눈앞에 떠억 이렇게 나타났다 이거야. 各現一身(각현일신)이라, 각각 한 몸을 떠억 이제 나타내서 問法(문법), 법을 묻되, 纔道咨和尙(자도자화상)하면, 막 이제 화상에게 묻겠습니다 라고 말하면. 정확하게 해석하면 그런 뜻입니다. 막 화상에게 묻겠습니다, 咨, 묻겠습니다 라고 말할 것 같으면. 我早辨了也(아조변료야)라, 나는 벌써 그거 알아차린다. 그 그냥 한 마디 뭐라고 하자마자, 뭐 묻는다고 하든지 뭐 법을 딴 걸 쓰든지 간에 다 그걸 내 분별해 버린다. 山僧檼坐(산승온좌)에, 산승이 편안히 앉아 있는 여기에, 更有道流(갱유도류)하야 , 다시 어떤 도류가 있어서, 來相見時(내상견시)에, 와서 서로 볼 때에, 我盡辨了也(아진변료야) 라, 문수, 보현만 내가 분별해 내는 것이 아니고 어떤 도류가 와서 나를 만난다 하더라도 역시 그 사람을 내가 분별해 버린다. 辨了(변료), 알아낸다 이 말이여. 何以如此(하이여차), 어째서 내가 그런 분별 능력이 있는가. 祇爲我見處別(지위아견처별)하야, 다만 나의 견처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 말이여. 딴 사람하고 다르다 이거여. 外不取凡聖(외불취범성)하며, 나는, 내 견처가 딴 사람하고 다른데 뭐가 다르냐. 밖으로는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것도 취하지 아니하고 內不住根本(내부주근본)이야, 안으로 근본에도 머물지 아니해. 그게 뭐 근본, 근본 하지마는 근본이라고 할 꺼리도 없어, 그게 사실은. 그래서 철저히 공한 자리죠, 그건. 거기도 머물지 아니해서, 見徹更不疑謬 (견철갱불의류)니라. 견해가 투철해서, 見徹(견철), 내 견해는 너무 너무 투철해서 더 이상 의심의 여지, 또는 뭐 오해의 여지가 전혀 없다. 참,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 자신있게 당당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은 우리가 임제 스님의 견해를 참 많이 살펴 봤는데 여러분들도 이쯤 이제, 비록 사량분별이지마는 견해가 서야 돼요. 견처가 있어야 돼. 한 마디로 견처가 확실히 있어야 된다고요. 그게 비록 투철한 것은 아니고 사량분별이라 하더라도 그 사량분별도 어차피 가당치 않은 것이지만 꼭 필요합니다, 사실은. 13-1 수처작주(隨處作主)하다 師示衆云(사시중운), 道流(도류)야 佛法無用功處(불법무용공처)요 祇是平常無事(지시평상무사)니 屙屎送尿(아시송요)하며 著衣喫飯(착의긱반)하며 困來卽臥(곤래즉와)라 愚人笑我(우인소아)나 智乃知焉(지내지언)이니라 古人云(고인운), 向外作工夫(향외작공부)는 總是癡頑漢(총시치완한)이라하니라 儞且隨處作主(이차수처작주)하면 立處皆眞(입처개진)하야 境來回換不得 (경래회환부득)하야 縱有從來習氣五無間業(종유종래습기오무간업)하야도 自爲解脫大海(자위해탈대해)니라 今時學者(금시학자)는 總不識法(총불식법)하고 猶如觸鼻羊(유여촉비양)이 蓬著物安在口裏(봉착물안재구리)하야 奴郎不辨(노량불변)하며 賓主不分(빈주불분)이라 如是之流(여시지류)는 邪心入道(사심입도)하야 鬧處卽入(요처즉입)이니 不得名爲眞出家人(부득명위진출가인)이요 正是眞俗家人(정시진속가인)이니라 그 다음 수처작주(隨處作主). 이게 이제 임제 스님의 법문 중에 또 아주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무위진인, 수처작주, 이런 말이 아주 대표적인 말이죠. 師示衆云(사시중운), 道流(도류)야, 佛法無用功處(불법무용공처)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用功處(용공처), 공부할 것이 없다 이 말여. 공부할 게 없다. 불법은 공부할 게 없다 말여. 참 좋지요, 편안하잖아. 뭐 애써서 공부해야 되고 용맹정진해야 되고 하면 힘들텐데 불법은 공부할 게 없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겁니다. 불법은 공부할 게 없다. 祇是平常無事(지시평상무사)니, 다만 평상대로. 뭐 욕심 나거든 욕심 부리고 슬프거든 뭐 울고 화 나거든 화 한번 내고 그냥 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그 사람에게는 크게 욕심낼 사람도 아니고 울 일도 없고 그렇습니다. 평상무사가 됩니다. 그래 여기 屙屎送尿(아시송요), 뭐라고? 똥 누게 되면 똥 누고 오줌 누게 되면 오줌 누고. 著衣喫飯(착의긱반), 옷을 입기도 하고 밥을 먹기도 하고. 이게 이제 일상사여 그냥. 困來卽臥(곤래즉와)여, 피곤하면은 곧 누워서 잔다. 이게 뭐, 그야말로 평상사죠. 평상무사의 일이지. 똥 안 누는 사람 어디 있고 오줌 안 누는 사람 어디 있으며 아 일어나면은 또 그 상황에 맞춰서 옷을 갈아 입기도 하고 또 식사 때 되면 식사하고 피곤하면 또 저녁되면 자고 뭐 저녁 안돼도 낮에라도 피곤하면 낮잠 자잖아요. 얼마나 평범하고 그야말로 보편타당한 것입니까. 진리는 보편타당한 것이거든요. 그런데 내가 그것이 진리고 불법은 그래서 더 이상 공부할 것이 없다, 이거 뭐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사람 버리는 것 아니냐. 그래서 愚人笑我(우인소아)여, 어리석은 사람은 저 처지도 모르고 말야, 허, 용맹정진하고 삼아승지겁을 닦고 정말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뭐 온갖 일과 다 하고 그래야 되는데 저거 천지도 모르고 저런다, 나를 비웃지마는 智乃知焉(지내지언)이라, 지혜로운 사람은 이에 안다 말여. 古人云(고인운), 向外作工夫(향외작공부)는, 밖을 향해서 공부를 짓는 것은 總是癡頑漢(총시치완한)이다, 밖을 향해서 공부 짓는 것은 모두 다 이거 어리석고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사람이다. 癡頑, 頑 자는 완악할 완 자 거든요. 아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 그 말을 치완한이라 그럽니다. 완 자는 아주 뭐 소 가죽, 막 잡아 가지고 그걸 약품 처리를 하지 않고 그대로 말라 버리면은요, 시골에서 더러 봤거든요, 우리는. 그 약품 처리 해서 하면 아주 부드러운데 그걸 약품 처리 하지 않고 베 가지고 그냥 던져 놓으면은 바싹 마르면은 이건 쇠보다도 더 강합니다. 쇠는 부러지기라도 하지 이건 부러지지도 않아. 돌보다도 더 강하고. 돌은 깨지지만 이건 깨지지도 않아. 완피달이라 그러거든요, 완피달. 이 완 자를 써 가지고. 그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게 그렇습니다. 사람이 좀 마음을 열고 문을 열고 이렇게 유연하게 생각을 좀 유연하게 이렇게 가져 가지고 남의 생각도 들어보고 남의 소견도 좀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그래야 되는데 그 좁디 좁은, 좁아터진 소견, 그거 하나 지킨다고 탁 옴짝달싹 못하는 그런 거, 정말 그건 제도불능이거든요. 정말 뭐 미륵이 천번 만번 출세한다 하더라도 제도하지 못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음을 제일 경계하지 않습니까. 불교에서. 그 대신에 이제 지혜를 제일 높이 숭상하고요. 총시치완한이라, 밖을 향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이건 정말 어리석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다른 신도들에게는 무슨 방편을 어떻게 쓰더라도 상황 따라서 또 근기 따라서 또 어떤 그 한국 불교적인 여러 가지 분위기 따라서 뭐 방편을 이리 쓰고 저리 쓰고 할 수는 있어요. 하지마는 우리 프로는 이런 사실을 환하게 알고 있어야 돼요. 알고 있으면서 이제 방편을 활용할 수 있어야 된다, 그렇게 이제 말씀드립니다. 儞且隨處作主(이차수처작주)하면 立處皆眞(입처개진)하야, 이런 말 전부 나는 저 염화실이라고 하는 카페에 다 올려놓으면은 신도들이 다 들어. 또 글로 녹취를 해가지고 올려 놓으니까 글로도 다 봐 버려. 그래서 이젠 비밀이 없어. 스님들끼리 뭔 소리를 했는지 환하게 다 안다고요. 좋은 일인지 뭐 안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세상은 그만치 드러나 버리는 그런 시대가 됐어요. 감출 수도 없고 감출 것도 없고. 그저 다 알고 지내는 거지. 그대들은 또한 隨處作主(수처작주)하면 立處皆眞(입처개진 )하야, 隨處作主 立處皆眞, 요게 이제 완벽한 표현이죠. 곳을 따라서 주인을 짓는다. 밖을 향해서 공부를 짓지 아니하면 뭐 제자리에 있는 거죠. 수처작주가 되는 거지. 그러면은 서 있는 그곳, 立處, 서 있는 그곳이 전부 진리의 세계다, 皆眞. 이 여덟 자가 아주 임제 스님의 법문의 대표적인 그런 법문이죠. 무위진인, 그것도 아주 대표적인 법문이고. 境來回換不得 (경래회환부득)하야, 그 정도가 되면은, 수처작주해서 입처개진이 될 거 같으면 어떤 경계가 오더라도 그 경계와 回換(회환), 바꾼다는 뜻입니다. 바꾸지 못한다. 뭐 천금 만금이 오더라도 거기에 까딱 않는다 이거여. 또 어떤 신기한 현상이 눈 앞에 벌어지더라도 거기에 나를 빼앗기지 않는다. 회환부득해서, 바꾸지 아니해서, 縱有從來習氣五無間業(종유종래습기오무간업)하야도, 비록, 從來, 과거부터 내가 익힌 업장 그리고 습기, 이것하고 또 무간지옥에 들어갈 다섯 가지 업, 오무간업, 그게 설사 있다 하더라도, 습기하고 무간옥에 들어갈 그런 업이 있다 하더라도 自爲解脫大海(자위해탈대해)니라, 그런 업을 가지고 있는, 무간지옥에 들어갈 그런 다섯 가지 업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解脫大海(해탈대해)야. 해탈의 큰 바다라. 그 업하고 아무 관계 없다 이겁니다. 습기하고도 아무 관계 없는 거여. 종래습기하고 아무 관계 없어. 그래서 종래 습기와 다섯 가지 무간옥에 들어갈, 무간 지옥에 들어갈 업이 있다 하더라도 저절로 이것은 해탈대해다. 今時學者(금시학자)는,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은, 總不識法(총불식법)하고. 옛날에 전강 스님 밑에 내가 두 철 살았는데 전강 스님은 계속 우리 보고, 수좌들 보고 학자, 학자 그래. 학자가 뭐 어쩌구.. 그러더라고요. 어록에 보니까 이렇게 수행하는 사람들을 학자라고 그렇게 했어요. 지금 우리가 ‘학자’ 하면은 무슨 학문하는 사람들, 문자를 가지고 어떤 學을 연구하고 하는 사람들을 학자라고 그러는데 진짜 공부하는 사람을 학자라 그랬어요. 마음 공부하는 사람을 학자라 그래요. 내가 그 때 들은 그 기억을 지울 수가 없어요. 전강 스님은 계속 우리 보고 학자, 학자 그랬어요. ‘우리는, 우리 학자들 중에는…’ 신도들에게 자랑할 때 수좌들 이렇게, 좋은 수좌들이 많이 모여 산다고 하면서 ‘아, 우리 학자들 중에는 이력을 마친 사람, 이력 종장도 몇이나 되고 뭐 ..’ 이렇게 해 가지고 신도들에게 이제 수좌들 자랑을 잔뜩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뭘 할려고 하는지 어쨌든 그렇게 자랑을 하더라고요. 허허허… 참 그 스님이 지금 인천 용화사, 거기 개발이 전혀 되기 전입니다, 그러니까 43, 4년 전쯤 됐나, 그 때니까 정말 그 전부 허허 벌판이고 높다란 언덕 위에 그냥 절 하나만 딱 있었어요. 언덕 위에 절 하나만 딱 있었는데 그 때 수좌들이 새벽 예불을 딱 끝내고 꼭 30분 씩 법문을 했어요. 천하의 명법문입니다, 그 때는. 누구한테도 그와 같이 그 스님과 같이 간절한 법문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정말 일구 수좌들, 참선 열심히 하는 공부인들에게는 정말 간절하게 그렇게 법문을 해요, 그 스님이. 딱 새벽 예불 실시하고 그대로 법상에 올라가서 한 30분 하는데 하~ 정말 간절하고 신심이 그냥 바로 그 순간에 돋고 그냥 뭐 바로 해치울 듯한 그런 어떤 기분을 줘요. 거기에는 아무도 없어, 우리 수좌들 뿐이야. 새벽에, 그때만 해도 새벽 예불 오는 신도들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무슨 초하루다 보름이다 해서 신도들 왔다 하면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낯 간지러워서. 그렇게 아주 다른 법문을 해요. 도저히 얼굴 들고서 앉아 있을 수가 없다고, 하여튼. 수좌들끼리만 있을 때 새벽 법문은 천하에 그런 명법문이었는데 신도 법회는… 허허, 그 참. 어떻게 그렇게 돌변해 가지고 다른 법문을 그렇게 하는지.. 얼굴 뜨거워서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아무 것도 아닌 우리를 그냥 하늘처럼 치켜 세워 가지고 하~ 이런 사람들이 와 있다고 서울 대학교를 나온 사람이 몇 명이나 되고, 이력 종장, 여기 전부 이력 종장이라 하고 막 그냥… 공부를 얼마나 잘 하는지 모른다고, 나는 못 따라 간다고, 이런 식으로 이야길 해요. 나는 두 철이나 살았어요. 용화사에서도 한 철 살고 용주사에서도 첫 철 중앙선원 개설했었을 때 그 때 조실 스님으로 전강 스님을 모셨어요. 그런데 지금도 그 권속들이 용주사 그대로 그 때부터 지금까지 용주사 사는데. 그 때 첫 철 개설했을 때 뭐 아주 기라성 같은 인물들, 거기서 이제 살았어요. 유명한 봉철스님, 영환스님, 중광스님, 뭐 월룡스님 등등 해 가지고 하여튼 그 한 철 굉장했어요. 총무원장 하는 정대스님이 그 때 원주 했어. 원주하는데 그 때 선방 원주 처음이야, 그 사람이. 얼마나 잘하는지 서비스가 좋고 그냥 원주가 .. 그 때 뭐 중광스님이니 영환스님이니 월룡스님이니 봉철스님이니 그런 스님들, 그런 스님들이 그 당시 수좌계에서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와 놓니까 얼마나 서비스가 좋고 공양을 뭐 진진찰찰로 그렇게 하는지. 그래 가지고 그 복으로 총무원장까지 했어 그래도. (대중 웃음.) 묘해 그게 아주. 선방 이야기 할라면 뭐 재미있는 이야기 참 많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스님을 잘 안다 하는 소리입니다. 내 이야기가 또 이제 그 쪽 권속에 들어가가지고 뭐라고 따질까봐 겁이 납니다마는, 좀… 내가 요즘 춘성이라는 책 있죠. 춘성 스님에 대한 일대기를 어떤 이가 주욱 이렇게 전해 내려오는 말만 모아 가지고 이렇게 모아 놨는데 거기 내가 어디서 이야기한 것도 또 떠억 갖다 놓고 그거 설명하고 광고하는데 무슨 목에 총을 들이대고 우리나라에 선지식 한 분을 구하라면 말을 하라면 춘성 스님을 말하겠다… 내가 이 소릴 했는지 안 했는지(대중 웃음) 어쨌거나 그 말을 했다고 거기다 떠억 책 선전 하는데 광고문안으로 계속 그거 해 놔가지고, 신문에 계속 그게 광고가 나는데 볼 때마다 좀 부끄러워요. 그런데 그와 유사한 것은, 내가 정말 그 당시 회상을 가지고 있는 선지식은 다 한 철 씩 두 철 씩 내가 살았어요. 걸망지고 다니면서 그래 살았는데 우리 나라에 중 하나 딱 꼽으라면은 춘성스님을 꼽는다 하는 이 말은 내가 항상 했어요. 지금도 그건 변함이 없습니다. 뭐 성철스님이다 탄허스님이다 무슨 전강스님이다 뭐 효봉스님, 동산 스님까지도 다 모시고 살았거든요. 구산스님, 여기 뭐 향곡스님, 저기 뭐 근래 돌아가신 저기 서암스님.. 그런데 그 많은 스님 모시고 살았는데 정말 괜찮은 스님, 춘성스님, 한 사람 꼽으라면 춘성스님. 두 사람 꼽으라면은 범용스님, 동화사 비로전에 계셨던 분이요. 참 그 스님 진짜 괜찮은 스님이라, 범용스님. 정말 괜찮은 선지식이라. 헛점이 없어, 그 스님은. 도저히 뭐 젊은 사람이 노장 볼라면 우리 스님들 다 노스님 모시고 살지마는, 그 노인들 뭐 젊은 사람 입장에서 보면은 헛점 투성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범용스님은 헛점이 없어. 야 정말 괜찮은 스님이야. 그래 춘성스님처럼 그렇게 선이 굵거나 아주 큰 그릇이거나 그렇지는 이제 못하지. 그래 그 스님 모시고 저기 저 동이산 태안사에 둘이 살았어요. 내가 그 스님 모시고 살고 싶어 가지고 그 스님 주지로, 태안사 주지할 때 내가 거기 일부러 찾아가 가지고 그 스님 모시고 살았는데 그 전에 딴 데에서 살 때, 스님, 저하고 같이 살면 하루 세 끼 국수만 삶아먹고 삽시다, 그랬어, 그런 적이 있어. 거기에 떠억 가니까 그 스님이 혼자 사시는 걸 알고 갔지. 가 가지고 정말 하루 두 끼만 먹었는데 국수만 먹었어요. 죽이 맞아 가지고. 둘다 국수 좋아해 가지고는 계속 국수 삶아 먹고. 아침에, 아침도 아니지 뭐. 느즈막이 이제, 밤도 낮도 없이 좌선 하니까. 한 방에 살았고 또. 그래 졸리면 누워 자고 잠 깨면 앉아서 좌선하고 그래 졸리면 누워 자고 잠 깨면 좌선하고. 그래 배 고프다 싶으면, 우리 뭣 좀 먹을까 하면 나가서 국수 삶아 먹고. 그런 세월을 보냈어요. 한 달 가 봐야 사람 하나 안 왔느니까 태안사가. 그런 시절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거기에 절도 많이 크게 지어놓고. 거기 옛날에 6.25 때 사람이 그 골짜기에 많이 죽어가지고 내가 새벽에 나가서 도량석을 하는데 얼마나 겁이 나는지. 항상 겁이 나는 거야. 이 요사채에 사람이 하나도 없어. 저 선원이라고 하는 그 방에서 노장하고 나하고 둘이 살고 절이 계속 텅텅 비어 있었거든요. 일꾼 하나 없고 공양주 하나 없고. 그래 놓니까 거기 6.25 때 사람 많이 죽은 줄 알고 해 놓니까 새벽에 도량석 하러 나오면 어떻게나 겁이 나는지. 그래서 좀 살다가 나왔죠. 또 혼자 놔두고, 저기 지선 스님이랑 또 어떤 스님들 오니까 터 보러 다닌다고 하면서 노장이 또 몇 일 나가버리고 나 혼자 떠억 있었네. 아, 정말 무섭드만. (대중 웃음) 어쨌든 그런 큰 선지식들을 참 덕택에 많이 친견하고 그렇게 살펴 보았습니다. 보았는데 정말 춘성 스님은 참 그릇이 커요. 아주 이력을 보는 데도 참 머리가 좋아서 그렇게 그릇이 크고 선이 굵은 스님인데 머리가 좋아 가지고 경도 그냥 외우는 경이 많고 그렇더라고요. 참 춘성 스님은 대단한 그릇이에요. 그래 내가 딱 중 하나 꼽으라면 춘성 스님을 꼽겠다, 그런 말은 했는데 뭐 목에다 총을 들이대고 뭐 어쩌고… 그런 표현을 썼더라고요. 그 스님은 팔십이 다 됐을 때도 자기 방 하나 없고 자기 이불 하나 없고 그랬어요. 큰 방에서 좌선 딱 하다가 저쪽 어간에서 좌선하다가 내가 그때 망월사에서 입성을 봤는데 좌선을 떠억 하다가 삼경 딱 치면은, 방선 죽비 치면은 어정 어정 걸어와 가지고 이 탁자 안에 가 가지고 목침 하나 딱 꺼내. 탁자 밑에 목침 하나 딱 꺼내고 당신 자리에 가 가지고 당신이 앉았던 방석, 배에 착 걸치고 주무셔. 팔십객이 그렇게 생활했어요. 대단하죠. 자기 방 하나 없고. 자기 이불 하나 없고 자기 요 하나 없고. 그래서 정말 중다운 중이다. 그 뭐 많이 들어봤죠. 사십 구재 재 지내달라고 돈을 보내 놨더니 어디다 가난한 사람들 거지들 다 나눠줘 버리고 어이, 재 잘 지냈다 하고 손 털털 털고는 올라와 가지고 그냥 법당에서 축원만 해 주고는 말았다 하는… 그래서 당신 평생에 제일 재 잘 지낸 재다, 그런 이야길 했었어요. 그만치 이제 자기 하는 어떤 법, 행위에 그런 소신이 있는 스님이라. 그 재 지낼 돈을 싹 다 갖다가 거지들 나눠 줘 버리고 는 ‘재 정말 잘 지냈다 오늘’ 그런 스님이라고. 참 그거 그런 도리를 안다 하더라도 정말 감히 그렇게 못하죠, 우리는. 참 그릇이 크고 자기 소신이 분명한 분이죠. 今時學者(금시학자)는 總不識法(총불식법)하고, 모두들 그 이치를 알지를 못하고, 법을 알지 못하고. 猶如觸鼻羊(유여촉비양)이, 觸鼻羊 하는 것은 이제 양은, 염소는 시력이 약해 가지고 입만 갖다 대면은 입에 닿기만 하면은 뭐든지 먹는 거야, 가시고 나무고 풀이고 할 거 없이 무조건 씹어먹는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마치 촉비양, 그런 양이, 蓬著物安在口裏(봉착물안재구리)라, 사물을 蓬著(봉착), 만나기만 하면은 口裏(구리)에다가, 입속에다 安在(안재), 갖다 집어 넣는다, 하는 거와 같아서, 금시학자는 그렇다 이 말이여. 이치를 알지 못해 가지고서. 奴郎不辨(노량불변)이여, 종과 주인을 가려 내지 못하고. 그러니까 이거 뭐 어느 도량이 영험이 있단다, 어디가 좋단다, 무슨 경이 좋단다, 무슨 진언이 좋단다 하면은 그만 뭐든지 취한다 이 말입니다. 마치 촉비양, 양이.이걸 염소라고 하는 겁니다, 촉비양이라고 양이라고 했지마는. 시력이 약한 염소. 입에다 뭐든지 갖다 넣는 것처럼 뭐 불법 좋다고 하면은 그냥 …그래서 이것도 해 봤다가 저것도 해 봤다가. 그 저, 신행 상담, 라디오 들어보면은 자기 기도하는 것을 이제 이야기하는데 아침에 일어나 가지고 천수경 몇 번 읽고 대다라니 몇 번 더 하고 그 다음에 뭐 관세음보살 몇 번 하고 지장보살 몇 번 하고 그 다음에 또 금강경 몇 번 읽고 누가 좋다고 하는 건 다 하는 거야. 그래 가지고 몇 시간 걸렸습니다. 스님 그렇게 기도하면 됩니까. 결국은 자기 자랑이거든. (대중 웃음) 그렇게 기도하면 됩니까, 자기 일과를 죽 이야기하는 거야, 들어보면은. 내가 그렇게 기도하는데 그렇게 기도해도 됩니까. 그렇게 이제 하는데 그야말로 좋다는 건 다 하는 거요 하루종일. 그거는 가지를 좀 쳐줘야 돼요, 그렇게 하면은, 가지를 딱 쳐줘. 한 가지를 하든지 아니면 뭐 한 두 가지만 하게 하든지. 여기 아주 임제 스님이 이런 걸 잘 알고 이야기했죠. 奴郎不辨 (노량불변)이여, 그리고 賓主不分(빈주불분)이여. 객인지 주인인지 나누지도 못해, 못하니라. 如是之流(여시지류)는, 이와 같은 류는 邪心(사심)으로 入道(입도)라, 삿된 마음으로서 도에 들어가 가지고서 鬧處卽入(요처즉입)이라, 아주 시끄러운 곳에 곧 들어가. 이게 이제 출가와 속가의 차이점이라고 하는 것은 내 중심에 늘 있느냐 아니면 바깥 경계, 주변에 있느냐, 하는 그런 차이죠, 사실은. 불교 외적인 일들. 불교 외적인 일들에 놀아나는 것. 이것이 요처즉입이라고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不得名爲眞出家人(부득명위진출가인)이요, 이름을 참다운 출가인이라고 말할 수가 없고 正是眞俗家人(정시진속가인)이다, 그게 이제 속가인이다 이 말이여. 뭐 중이 돼 가지고 잡다한 세속적인 거, 물론 뭐 소질도 있고 취미가 있으면은 뭐 꽂꽂이도 해 보고 글씨도 써 보고 그림도 그려보고 무슨 피아노도 해 보고 뭐 온갖 거… 또 요즘은 세상이 워낙 좋아서 그런 거 다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마는 그런 거 좀 가지 좀 치고 특히 스님들은, 프로는 불교, 여기에 매진해야 돼요. 이 불교만 잘 알면은 그것이 큰 재산이고 큰 무기라 사실은. 그런데 뭐 그림도 그리고 차도 하고 도자기도 해보고 세속적인 지식은 아주 파다하게 많아요. 그런데 뭐 하나도 쓸모있는 게 없는 거야. 나는 그래요. 스님들은 무조건 불법, 거기에 매진하라. 그거 아주 철두철미하게 잘 해 놓으면 그 이상 큰 무기가 없고 그거보다 더 좋은 그런 재산이 없다. 세속 사람들하고 뭘 겨룰 거요? 겨우 글씨를 써서 겨룰 거여 노래를 불러서 겨룰 거여 무슨 뭐 음악을 해서 겨룰 거여. 아무 것도 겨룰 게 없어. 열심히 해서 겨뤄보면 꼴찌야 항상. (대중 웃음) 꼴찌라고요. 그럴 수 밖에 없는 거야. 거기에 투자한 시간이 부족해, 없어, 얼마 안 되기 때문에 그래. 세상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 보면요 피나는 노력이 있고 그것만 했습니다. 거기에 올인한 거에요. 우리 스님들은 불법에 올인하기가 너무 조건이 좋은 거요. 그래서 특히 우리는 경전과 어록 공부에 일단은 경전 어록 공부에 아주 그 투철하게 어떤 그 자기 소신을 세워 가지고 열심히 정진하는 것, 이것은 큰 무기가 되고 큰 재산이 되고 정말 자기 자신을 버티게 해 주는 버팀목이 됩니다. 이건 뭐 불법 이치를 깨달아 가지고 무슨 안심미묘한 것 그런 차원은 놔 두고라도 정말 자기를 버텨주는 훌륭한 버팀목이 되고. 쓰일 데가 많아요. 요즘 불교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불교 공부 잘 해 가지고 완전히 그 이치를 꿰뚫어 가지고 정말 불교에 대한 이치는 누가 와서 무슨 질문을 하더라도 척척척 그냥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그런 자신감을 갖게 되면은 뭐 더 이상 좋은 일이 없죠. 오늘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라, 이 대목까지 공부하고 마치겠습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