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범부이면서 부처님”의 글
持名一法,
乃「即凡心而佛心」之一大法門也。(增廣上.覆吳希真居士書二)
명호를 집지하는 이 한 법은
“범부의 마음이면서 부처님 마음”인 하나의 큰 법문이다.
(증광상. 오희진거사에게 보내는 글2)
【범부이면서 부처님】
당신이 지금 범부인 동시에 당장 부처님과 한 몸이 되는 것을 “범부이면서 부처님(即凡而佛)”이라 부릅니다. 또, 지금은 비록 범부이지만 나중에 반드시 성불하게 되므로, 이를 “범부이면서 부처님”이라고 부릅니다. 또, 범부는 미혹해있고 부처님은 깨달아 계시므로, 범부이면서 부처님이란 곧 “미혹해있으면서 깨달아있음(即迷而覺)”이기에 따로 깨달음을 찾을 필요 없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은밀하게 부처님의 지혜와 통한다.”라는 것이지요. 또, 범부는 오염되어 있고 부처님은 항상 청정하므로, 범부이면서 부처님이란 곧 “오염되어 있으면서 청정함(即染而淨)”이기에 따로 청정함을 찾을 필요 없습니다. 이에 대해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시길 “범부의 탐진 번뇌마음 가운데 능히 청정한 원왕생심을 낼 수 있다.”라고 하셨지요. 또, 범부는 번뇌이고 부처님은 열반이므로, 범부인 동시에 부처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담란대사께서 말씀하신 “번뇌를 끊지 않고도 열반의 몫을 얻음”입니다.
명호를 집지하는(持名) 이 한 법은 아주 간단해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고 부르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지명 한 법이란 모두 믿음과 발원을 갖춘 염불을 말하지 “오직 행지만을 중시하고 믿음과 발원이 없는” 그런 걸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만 하면 바로 “범부의 마음이면서 부처님 마음”이 될 수 있으므로 이 법문이 이처럼 수승합니다!
왜 “범부의 마음이면서 부처님 마음”이라고 부를까요? 우리가 믿음과 발원을 갖추고 염불하는 이 신원의 마음이 바로 아미타부처님의 대자비심이고 아미타부처님의 지혜심이라는 것인데요. 앞서 “과지의 깨달음을 인지의 마음으로 삼는다.”라고 했는데, 과지의 깨달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고, 인지의 마음이 바로 범부의 믿음과 발원을 갖춘 마음입니다.
【일심불란】
《아미타경》에서 “일심불란”을 말씀하셨는데, 우리 범부의 마음이 아미타부처님의 마음과 하나로 합해져 하나의 마음이 된 이후에는 당신의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지만, 두 마음이면 쉽게 흐트러집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이인동심, 기리단금(「二人同心,其利斷金)”이라, 두 사람이 한마음 한뜻이 되면 그 날카로움이 금속도 절단할 수 있다는 뜻인데요. 만약 이 두 사람이 말없이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이라면, 남들이 아무리 이간질해도 그 둘 사이는 아주 좋을 것입니다.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마음속으로 아미타부처님을 의심하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미타부처님, 당신은 정말로 저를 구해주실 건가요? 제가 이렇게만 하면 정말로 왕생할 수 있나요? 부처님은 저를 싫어하지 않으실까요?” 이처럼 우리에게 아직 수많은 의심이 있는 데다가 남들이 타종파의 교리를 가지고 방해하는 인연을 만난다면 필연코 마음이 흐트러지게 될 것입니다.
“일심”은 어떠한 일심일까요? 믿음과 발원이 바로 일심입니다.
아미타부처님께서 우리를 구제하시는 데는 육자명호로써 우리를 구제하십니다. 따라서 이 육자명호가 바로 아미타부처님 구제의 마음으로, 부처님의 자비심과 지혜심의 저장 장치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모종의 사물을 통해 표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곧 아사 직전인데 우리가 이 사람을 도울 마음이 있다면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음식을 꺼내주는 겁니다. 이 음식이 바로 우리가 그를 구하려는 마음을 실제로 표현해낸 것입니다. 아사 직전인 이 사람이 계속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는 이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이 음식 자체에 두 가지 방면을 포함하고 있는데, 한 편으로는 내가 그에게 음식을 줘서 그의 목숨을 구하려는 것은 내 마음이고, 또 한 편으로 그가 이 음식을 보고 먹게 된다면 이 음식이 그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음식에는 두 가지 방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미타부처님의 육자명호는, 한 편으로는 부처님의 대자비심, 대지혜심이고, 부처님께서 우리를 구제하시려는 원심, 즉 “내가 너희를 구제하려 하는데, 어떤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 육자명호로 너희를 구제하겠다.”라는 것이고, 또 한 편으로는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에 귀명하면 이 육자명호가 우리의 신원심이 되어 이 신원으로 이 명호를 집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육자명호 자체는 부처님 마음과 범부 마음이 하나로 결합 되어 “범부의 마음이면서 부처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쪽에서 보면 부처님 구제의 마음이고, 범부 쪽에서 보면 우리의 귀명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귀명하는 마음이 있게 된 것은, 아미타부처님께 우리를 구제하려는 마음이 있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께 귀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다른 사람에게 귀명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이 당신을 구제할 수 없으니까요!
그럼, 당신은 왜 아미타부처님께 귀명하는 겁니까? 아미타부처님은 당신을 구제할 수 있으니까요!
당신은 왜 법문을 바꾸었습니까? 그건 당신이 아미타부처님을 잘 알지 못해 아미타부처님이 당신을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기는 반드시 삼악도에 떨어질 사람이고 오직 아미타부처님만이 우리를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이 마음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나무아미타불에 귀명할 것입니다.
따라서 귀명하는 마음과 구제하려는 마음은 하나의 마음입니다. 범부 쪽에서 말하면 바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에 귀명하는 마음이고, 부처님 쪽에서 말하면 아미타부처님께서 우리를 구제하려는 마음으로, 이른바 “범부의 마음이면서 부처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바로 육자명호를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신원과 귀명, 누구에게 귀명합니까? 나무아미타불에 귀명합니다. 구제는, 무엇으로 구제합니까?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전부 한 가지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곧 침몰할 섬에 있다가 누군가 배를 몰고 우리를 구하러 왔을 때, 우리가 오를 이 배와 선장이 몰고 온 그 배는 동일한 배이고 똑같은 일인 것과 같습니다.
아미타부처님께서 우리를 구제해주시는 명호와 우리가 부르는 “나무아미타불”이 하나가 되었을 때, 이것을 “범부의 마음이면서 부처님 마음”이라 부릅니다. 이 얼마나 자재합니까!
앞서 “인지는 과지의 바다를 포괄하고, 과지는 인지의 근원까지 관철한다.”라고 말씀드렸는데, 우리의 신원심 가운데 이미 아미타부처님의 대각해를 포함하고 있어, 부처님의 구제심, 부처님의 자비심, 지혜심 속에 갖추고 있는 모든 공덕 역시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성불할 수 있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