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광주이씨(십운과공 장흥계 사복시정공 후손) 역사실 원문보기 글쓴이: 행복한사랑
이종훈은 동학,천도교의 지도자로서 민족의 독립과 근대화를 위한 활동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동학농민전쟁, 2.1우농에서의 활약, 고려혁명위원회 활동 등을 통해 민족독립의 염원을 실현하고자 했다. 또한, 갑진개화운동과 1920년대 천도교 혁신운동에 참여하면서 문명개화를 통한 민족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이종훈의 강직하고 일관된 삶에 대한 세인의 존경심은 그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 기사에서 앞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천도교의 장로로 또한 종법사 고문을 역임한 정암 이종훈씨는 금 2일 오전 3시 40분 향년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씨는 일찍 기미년 민족운동에 참가하였던 33인 중의 최고령자로 그는 본래 성정이 강직하여 한번 굳게 정한 뜻이라면 변한 일이 없다고 한다. (『동아일보』1931년 5월3일 자)
독립운동가로서의 이종훈의 막중한 업적에 비해, 그의 구체적인 행보를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동학농민전쟁, 갑진개화운동, 3.1운동, 고려혁명위원회 등을 다룬 자료에 그의 이름이 간간히 등장하는 수준에 그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종훈의 행보와 업적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활약했던 민족 운동과 근대화 운동의 흐름을 재구성하고, 그 가운데 이종훈의 위상과 역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의 삶을 조명하고자 한다.
동학농민전쟁에서 북접 지도자로 활약하다.
이종훈은 1856년 3월 2일 경기도 광주 관촌면 유사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동학에 입도한 것은 1883년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1892년부터 1893년에 걸쳐 일어난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에 참가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도부 명단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교조신원운동이란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처형된 뒤 그 억울함을 벋고 동학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고 동학교단이 벌인 공개적이고 집단적인 운동을 말한다.
동학지도자로서의 이종훈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2차 봉기 과정에서 부상하기 시작한다. 동학농민전쟁은 호남지방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동학농민군의 방봉건,반침략 투쟁으로 크게 고부민란,1차봉기, 집강소 시기, 2차 봉기의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고부민란은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항의하여 전봉준이 주도한 민란이었다. 이어 전봉준이 동학접주 손화중을 설득하여 전라도 일대의 동학교도들이 일제히 봉기하니, 이것을 1차 봉기라고 한다. 농민군은 황토현과 정성 전투에서 승리한 뒤 전주성에 입성하여 정부군과 화약을 맺고 전라도 일대에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고 대민행정업무를 처리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경복궁을 강제 점령하고 친일 정권을 수립하자, 농민군은 추수기가 지나기를 기다려 1894년 10월 2차 봉기를 일으켰다.
1차 봉기를 거치면서 동학은 호남에 기반한 남접과 호서에 기반한 북접으로 분화되었다. 그런데 남북접의 분화는 지방만이 아니라, 당파에 근거한 것이기도 했다. 최시형이 북접대도주 혹은 북접법헌의 명의로 동학 지도자들에게 임명장을 발행하던 관행에 근거해 현상 유지를 원하던 최시형계를 북접으로, 정치 변혁을 도모한 전봉준계를 남접으로 부르게 된 것이었다. 1차 봉기에서 최시형을 중심으로 북접은 소극적인 태도로 협조하지 않았다. 또한 집강소 기간 동안에 최시형은 계속 남접의 행동을 견제했다. 북접 계통의 호남, 영남 동학교도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단속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이러한 남북접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었다. 북접의 지시를 받는 호남의 동학교도는 결코 봉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전봉준이 최시형의 지시를 무시하고 직접 접주와 접사를 임명하는데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정부군이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북접 동학교도를 토벌하면서 북접 지도부는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군은 동학교도와 난민, 북접과 남접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비도라고 지목하여 탄압했다. 견디다 못한 북접 동학교도들이 최시형에게 봉기를 요구했다. '지금 관리의 참학이 심하여 우리부모처자로 하여금 구렁에 떨어지게 하니 이것이 그치지 않으면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를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이 의(義)에 의지하여 포(包)를 일으켜서 저 화를 제거하고자 하니 선생은 허락하고서' 라고 간청했다. 당시 북접 내 동학교도는살 길을 찾아 동학이란 이름을 빌려 들어온 농민, 상인, 천민 등이 대부분으로 반정부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즈음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청일전쟁 등으로 배외사상이 고조되면서 유생, 퇴직 관리 등을 주도하는 의병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교조신원운동 당시 척왜양을 외치며 반침략의 차원에서 저항의식을 표출한 바 있는 최시형은 손병희, 손천민 등의 최측근이 봉기할 것을 청하자, 결국 보국안민을 기치로 2차 봉기에 합류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최시형은 곧바로 총동원령을 내렸다. 이제 전라도 각지의 동학농민군은 남북접을 따지지 않고 접주 중심으로 모였다. 북접통령에 임명되어 최시형에게 통령기를 받은 손병희는 충청도는 물론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까지 망라한 각 포에 일제히 동원령을 내렸는데, 10만 대군을 모였다고 한다.
이 때 이종훈은 경기도 광주 출신의 북접 지도자의 일원으로 손천민, 박인호 등과 함께 활약을 펼쳤다. 그는 충주의 홍재길,이용구,신재연,수원의 김내현, 음죽의 박용구,권재천, 안성의 임명준,정경수, 양지의 고재상, 여주의 홍병기, 임순호,신수집,임학선,이천의 전규석,전창진,이근풍,양근의 신재준,지평의 김태열,이재연,광주의 염세환,원주의 이화경,임순화,횡성의 윤면호,홍천의,차기석,심상현,오창섭의 포,즉 경기,충청,강원을 망라한 20여개가 넘는 포를 지휘했다.
북접의 동학농민군은 보은 장내리에 모여들었다. 이종훈 휘하의 이용구,신재현,홍재길,정경주,박용구 등이 거느린 동학농민군은 충주 무극장터에 모여 보은으로 향하던 중, 괴산에서 정부군,일본군을 만나 접전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패한 일본군은 충추로 후퇴했고 이종훈 휘하의 부대는 괴산읍을 점령한 뒤 다음날 보은으로 향했다. 충청도의 손천민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청주 쌍고장터에서 정부군과 접전을 벌인 뒤 보은으로 향했다. 권병덕과 청주의 임정준 등은 문의를 거쳐 보은에 모여들었다. 이처럼 충청도 내륙과 강원도,경기도,경상도에서 출발한 북접의 동학농민군은 일제히 보은 장내리로 향했다.
북접의 동학농민군은 보은 장내리에 모여 대오를 정비했다. 선봉에는 청색 깃발을 든 정경수포가 나섰다. 이용구 포는 우익으로 흑색 깃발을 들었다. 이 때 이종훈 포는 좌익으로 백색 깃발을 들고 나섰다. 전규석 포는 후군으로서 적색 깃발을 들었다. 손병희는 황색 깃발을 앞세운 중군을 지휘했다.
이후 북접은 대오를 갑을로 나누어, 갑대는 영동 옥천을 거쳐 공주로 향했다. 을대는 회덕에서 청주병영군을 전멸시킨 뒤 연산을 거쳐 논산에 이르렀다. 논산에서는 남접 지도자 전봉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봉준은 일찍이 북상하여 강경에 머물다가 논산으로 나와 북접군이 합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논산에서 전봉준과 손병희가 만나면서 남북접 연합군이 만들어졌고, 동학군의 대본영이 설치되었다.
남북접 연합군은 세 방향으로 나뉘어 공주로 향했다. 동학농민군은 공주에서 정부군,일본군과 혈전을 거듭했으나, 상대방의 막강한 무기와 화력에 밀리면서 우금치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고 결국 논산,금구,태인 등으로 물러났다. 전봉준은 순창에서 재기를 도모하다가 배반자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손병희,손천민,이용구,이종훈 등의 북접 지도자들은 태인까지는 전봉군과 행보를 같이 하며 연합군의 명목을 유지하다가 결국 북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최시형이 임실에 은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합류해서 북쪽으로 내달았다. 그 과정에서 북접군은 무주에서 유생들이 이끄는 민보군과 한바탕 접전을 벌였다. 북상하는 길에 보은 북실에서는 청주병영군의 습격을 받고 달아나야 했고, 충주 외서촌에서는 정부군의 습격을 받아 충주 무극시장에서 접전을 벌여야 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북접의 지도자들은 이후 피신생활에 들어갔다. 이종훈은 손병희와 함께 충청도를 배회하며 은거 생활에 들어갔다.
문명개화를 위한 민회운동을 전개하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피신 생활을 계속하던 최시형은 1896년 1월에 김연국, 손병희, 손천민에게 각각 구암, 의암, 송암의 도호를 내리는 공동전수식을 거행하고 3월에 지방 두령을 임명하는 등 본격적인 조직 재건에 착수했다. 1897년 12월에는 손병희에게 북접대도주의 도통을 전수했다. 손병희가 제3대 동학교주에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 다음해인 1898년 4월에 최시형은 결국 원주에서 체포되었다. 최시형이 원주에서 피신생활을 하는 동안 이종훈은 논 10마지기를 팔아 돈 200량과 옷 한 벌을 마련하는 등 최시형을 돌보는 데 헌신했다. 손병희는 최시형의 옥바라지도 이종훈에게 맡겼다. 동학 지도자 대부분이 사실상 수배 대상인 것에 비추어 볼 때, 이종훈이 최시형의 옥바라지에 전념한 것은 대단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이종훈은 먼저 간수 역할을 하는 포졸 김준식과 형제의 인연을 맺는 등 교분을 쌓았다. 그리고 그를 통해 최시형에게 의복과 음식을 몰래 차입했다. 이종훈만이 아니라, 홍주의 동학교도인 김주열도 밭 10마지기를 팔아 옥바라지 비용을 댔다. 최시형은 죄수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것을 보고 측은하게 여겨 이종훈에게 돈 50량을 마련하도록 하여 죄수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또한, 이종훈을 통해 동학교도들에게 마음을 편히 하고 도를 닦는 일에 힘쓰라는 훈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종훈은 최시형의 사후에도 그에 대한 예를 다함으로써 동학교도, 천도교인에게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최시형은 체포된 지 두달 만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종훈은 그날 밤 폭우를 무릅쓰고 김준식과 함께 광희문 밖 공동묘지에 가매장된 최시형의 시신을 거두어 광주 송파에 있는 이상하 소유의 산에 가매장했다. 그리고 다시 이종훈의 주도로 1900년 5월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에 있는 천덕산에 이장했다.
최시형 사후 손병희, 손천민, 김연국 등 3인방은 교권은 물론 활동노선을 놓고 갈등했다. 김연국이 충남의 동학교도가 모두 그와 연결되었다고 장담할 만큼 가장 강력한 세력기반을 갖고 있었다. 교조신원운동 시절부터 종교 활동에 전념할 것을 주장했던 온건파를 대표하는 김연국.손천민과 전봉준의 노선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지만 동학농민전쟁 당시 북접의 통령으로 활약한 손병희 간의 갈등도 상당했다. 충청도 해안 지방을 기점으로 동학 조직 재건에 맹활약을 했던 박인호를 끌어들여 춘암 도호를 내리는 조치 등을 통해 지도력을 확보해 나간 손병희는 마침내 1900년 7월 풍기에서 거행된 설법식에서 법대도주에 추대되면서 교권 경쟁의 최후 승자가 되었다.
손병희는 교권을 장악하자 문명개화노선으로의 방향전환을 도모했다. 손병희가 방향전환을 모색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동학농민전쟁 이후 서울이나 개항장인 원산, 혹은 변경 도시를 배회하면서 시세의 추이를 탐색하고 동학 재건책 마련에 골몰했던 시기부터 모색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동학과 달리 합법적인 정치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선도했던 독립협회의 경험에 주목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근대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하기 위해서는 대세에 조응하여 문명개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손병희의 방향전환은 직접 문명개화의 진수를 체득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그는 1901년 이종훈을 비롯한 박인호,홍병기,이용구 등 측근에게 교단을 맡기고 '외국을 유람하여 문명성질과 세계형편을 자세히 알고 현대문명을 수입할 필요가 있다'며 외유를 단행했다. 미국행을 놓친 손병희의 최종 귀착지는 일본이었다. 손병희는 외유에 앞서 교단의 결속을 강화한다는 차원에서 측근인 이종훈에게는 정암, 홍병기에는 인암(仁菴), 손병흠에게는 강암(剛菴), 이용구에게는 지암(智菴), 엄주동에게는 용암(勇菴)이라는 도호를 내리는 의례를 시행했다.
손병희의 문명개화로의 방향전환은 정치방면으로의 적극적인 진출을 의미했다. 이종훈을 비롯한 동학 지도부는 동학의 합법화와 국정개혁을 요구하는 정치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망명객 손병희는 문명개화파 망명정객인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 등을 동학에 끌어들여 대한제국 정부에 저항하는 반정부투쟁을 전개했다. 동학 지도부의 정치투쟁은 우선 대한제국 정부에 국정쇄신을 호소하는 상소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손병희는 동학 간부인 이인숙을 통해 1903년 의정대신 윤용선과 법부대신 이윤용 앞으로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요지는 국회를 설립하고 종교를 반포하며 재정을 정리하고 정치를 개선하며 유학을 장려하라는 것이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일본의 승전을 예상하고 곧바로 일본 육군성에 1만원이라는 거액을 헌납했다. 국내의 동학교도에게는 일본군을 원조할 것을 지시했다. 손병희는 일본 당국과 밀약을 맺고 일본을 도와 러시아를 치고, 친러정부를 타도하여 정권을 쟁취한 후 정치 개혁을 실시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정부는 손병희가 반일,친러의 성향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손병희는 상소운동이 실패하자 1904년에 이종훈을 비롯한 40여인의 동학 지도부를 도쿄로 불러 들여 독립협회의 민회운동 방식을 도입한 대동회를 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동학 지도부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계속 회합하며 대동회를 중립회라 고쳤으며 그 해 9월 최종적으로 진보회를 조직하여 경향 각지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갑진개화운동이라 부른다. 진보회를 결성할 당시 총괄을 맡은 것은 이용구였다. 이종훈은 박인호, 엄주동, 홍병기, 송병준, 나용환 등과 함께 그를 보좌하여 활동했다. 진보회는 '황실을 존중하고 독립기초를 공고히 할 것, 정부를 개선할 것, 군정.재정을 정리할 것,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할 것' 등의 4대 강령을 내걸고 정치개혁을 위한 민회운동을 전개했다. 손병희가 진보회에 걸었던 기대는 16만원이라는 거액을 결성 자금으로 내놓을 만큼 높았다. 하지만, 16만명이나 동원된 대대적인 시위운동은 그들을 '개화한 동학당'으로 파악하며 위험시하는 정부의 강경 탄압에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더욱이 진보회원들이 문명개화를 상징한다며 흰옷 대신 검은 옷을 입고 상투 대신에 짧은 상고머리를 하고 다니면서 진보회의 민회운동에 대한 대중적 거부감도 적지 않았다. 이 때 이종훈도 솔선하여 단발하고 색의를 입으며 민회운동을 이끌었다. 결국 진보회는 송병준을 주축으로 독립협회 출신 등이 함께 결성한 일진회에 합병되었다.
이처럼 상소운동, 외세 활용, 민회운동 등 여러 방식을 동원한 동학의 합법화와 국정 개혁을 요구하는 정치투쟁은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다. 재야단체인 일진회를 통해 정치적 발판을 확보한 것이 유일한 성과였다. 그런데, 일진회가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외교권을 위임해야 한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했고, 실제로 곧바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일진회의 이러한 정치 행보는 손병희의 동학교단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었다. 손병희는 신변안전을 보장받자, 곧바로 귀국했다. 그는 귀국에 앞서 동학에 입도한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 등의 문명개화파와 함께 동학 개편 방안을 마련했다. 그것은 단순한 개조가 아니라 천도교의 창건으로 가시화되었다. 이종훈은 동학 지도부로서 일진회의 친일 행보에 가담하지 않고,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 창건을 주도하며 천도교 지도자로 거듭났다.
민족 독립을 염원하며 3.1 독립 선언에 뛰어 들다.
천도교의 창건은 종교적 차원에서 문명개화로의 방향전환을 천명한 것이었다. 손병희는 귀국 직후 천도교중앙총부를 설치하고 전반적인 체제 정비에 착수했다. 우선 「천도교대헌」을 반포하고 중앙총부 산하에 각 부서를 설치했다. 교단 지도부는 대도주 이하 성도사,경도사,신도사,법도사 등의 도사, 교장,교수,도집,집강,대정,중정 등의 육임, 대교령,중교령,소교령 등의 연원대표로 구성되었다. 전국적으로는 대교구-중교구-소교구가 설치되었다. 또한 4년여에 걸쳐 포접제에 기반한 연원조직을 완전 장악하면서 명실상부한 교주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친일행각을 벌이는 일진회 간부들은 출교당했다. 일진회는 천도교에 대응하기 위해 시천교를 창건했다. 이종훈은 천도교 창건 당시부터 중앙총부의 고위 간부로 활약했다. 처음 맡은 직책은 육임 중 하나인 집강이었다. 이어 서응관장, 현기사장, 혜양과장 등의 직책을 두루 역임했다.
국망 직후 대한협회와 일진회를 비롯한 모든 정치단체는 해산되었지만 종교단체인 천도교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천도교인의 수가 국망을 기점으로 급증했다.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기억과 함께 정서적으로 박래품인 기독교를 수용하기 어려웠던 지식인과 민중에게 천도교는 위안과 희망의 전도사로 받아들여졌고 그것은 폭발적인 천도교 입교 선풍을 몰고 왔다. 가파른 상승세는 차츰 둔화되었지만 천도교세는 1910년대 내내 꾸준히 배가되는 양상을 보였다. 박은식은 천도교의 이러한 교세신장에 대해 '신도가 날마다 증가하여 300만을 헤아린다. 그 발전의 신속함은 거의 고금의 종교계에 일찍 없는 일이다' 라고 평가했다.
1910년대 무단통치하에서 민족운동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는 전혀 불가능했다. 하지만, 민족 진영 지도자들은 국내외를 불문하고 외교론,실력양성론,무장투쟁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운동 방략을 모색하고 있었다. 문명파가 주도하는 천도교 지도부는 대한제국기 이래의 실력양성노선에 입각해 교육운동에 주력했다. 그들은 일단 무단통치하에서는 천도교를 보존하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준비론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천도교 내에는 소수파지만, 천도교가 무장투쟁 등을 통한 항일운동에 뛰어들 것을 요구하는 지도자도 있었다. 최시형의 장남인 최동희의 경우, 손병희에게 제1차 세계대전 와중인 1916년에 항일운동 전개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손병희 이상으로 최시형에 대한 경외감과 충성심을 갖고 있던 이종훈은 개인적으로는 최동희와 가까이 지냈지만, 교주인 손병희의 준비론적 인식에 동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10년대에 들어와서는 대종사장에 이어 도사실 최고직인 장로에 임명되었다. 명실상부한 천도교단의 최고 어른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1913년 손병희는 74인의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공동전수심법식을 거행했다. 이 때 참여한 지도자 중 이종훈은 서열상 박인호 다음인 2위를 차지했다. 천도교의 원로로서 그는 책 읽기를 즐기며 의친왕 이강공, 윤치소 등과 더불어 가회동에 있는 취운정에서 활쏘기를 하며 지냈다고 한다.
1919년 천도교는 조직적으로 3.1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대표 중 천도교인은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은 천도교를 이끄는 핵심간부들로 각 기관이나 연원 대표의 자격으로 서명에 참여했다. 손병희는 천도교 기관의 총대표로, 권병덕은 천도교중앙총부 대표로, 최린은 보성학교 대표로, 이종일은 천도교월보사 대표로 참여했다. 그리고 중앙교단의 원로인 장로 이종훈, 홍병기와 도사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 임예환, 홍기조, 나용환, 나인협, 김완규, 박준승 등이 서명에 참여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15명의 천도교 지도자 모두는 동학농민전쟁, 갑진개화운동, 대한협회 혹은 일본 유학생 단체의 간부로 활약한 정치 경력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이종훈은 2월 25일 오세창의 집에서 권동진과 오세창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독립 선언 참가 제의를 받고 수락했다. 재판정에서 그는 판사가 '조선 독립에 대해 크게 갈망하고 있으며 한일병합에 극렬히 반대하였냐'고 묻자, '조선 민족으로 어찌 그 마음이 없겠소'라며 당당히 응수했다. '독립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조선민족이 자유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독립하려고 하였다'고 대답했다. 그는 2년형을 선고 받았고 1921년 11월 4일에 홍병기, 나용환, 나인협, 박준승, 임예환, 홍기조, 권병덕, 김완규 등과 함께 출옥했다. 그는 출옥 직후 천도교의 기관지인 『천도교회월보』1921년 12월호에 '복당강시(福堂降詩)'라는 장문의 한시를 실어 송구영신의 뜻을 빌어 자신의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천도교는 3.1운동 직후 일제의 탄압으로 존폐의 위기에 처하지만, 또한 3.1운동에서의 활약 덕분에 정치적 위상과 사회적 영향력은 일층 제고할 수 있었다. 천도교 지도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촉발된 3.1운동에서 이종훈 역시 영어의 몸이 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며 당당히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대표 중 최고령자였다.
천도교 혁신파를 후원하며 민족 운동에 가담하다.
1920년대 초반 문화운동과 계급운동의 여파로 사회전반에 민주주의, 특히 자유와 평등을 구가하는 시대풍조가 확산되면서 천도교 내에서도 '중앙집권에서 지방분권으로, 독재에서 중의로, 차별에서 평등으로'의 방향 전환을 촉구하는 혁신운동이 일어났다. 혁신운동의 중심에는 최시형의 장남인 최동희가 있었다.
최동희는 '시대의 요구와 정의의 공론'이라는 취지를 내세우며 본격적으로 지지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1921년부터 천도교의 제도와 인사에서 본격적인 혁신의 바람이 불었다. 제일 먼저 의사기관인 의정회에 관한 규정이 반포되었고 전국적으로 60개 구역에서 의정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의정원 선거는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했고 빈부에 관계없이 18세 이상의 교인 누구에게나 1표를 부여하는 보통선거 방식을 채택했다. 공선된 60명의 의정원 중 약 1/3 정도는 중앙에서 명망성과 영향력을 갖고 있는 소장급 지도자들이었다.
그해 말 3.1운동으로 투옥되었던 이종훈을 비롯한 천도교 지도자들이 잇달아 출옥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전도사회가 결성되었다. 전도사회는 혁신운동을 지지하고 또한 주도했다. 이번엔 이종훈 역시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아들인 최동희의 편에 섰다. 전도사회는 중앙기구는 종법원, 종무원, 종의원으로 삼권이 분립하는 방향으로 개편하고 교주선거제를 실시하며 연원제는 개정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한 공화제적 개혁안을 내놓았다. 그러자, 절대군주체제와 유사한 기존의 교단을 장악하고 있던 보수파가 이 개혁안을 교단 권력 찬탈 음모로 이해하며 적극 저지하기 시작했다. 보수파는 혁신파가 상당수의 지방 천도교인과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대의기구인 의정원 설치에는 동의했으나, 교주선거제와 연원제 개정에 대해서는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혁신파는 전도사회의 지지하에 보수파는 물론 천도교청년회 간부 등 100여명이 참여하는 간친회를 개최하고 공개적으로 교단 민주화 방안의 취지를 설득했다. 또한 병석의 손병희가 혁신안이 시대에 순응한 개혁안이라며 찬동을 표시하면서 대세는 혁신파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마침내 보수파와 혁신파가 타협하여 교주선거제 실시, 연원제 폐지, 중앙기관의 '3권 분립' 등을 내용으로 공화제를 지향하는 「천도교종헌」을 마련했다. 혁신파의 교단 핵심부로의 진출은 교화를 담당하는 종법원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종법사 18명 중 혁신파 혹은 혁신운동의 동조자는 이종훈을 비롯하여 홍병기, 이병춘, 임예환, 홍기조, 정계완, 나인협, 권병덕, 오지영, 윤익선, 박봉윤, 김문벽 등 13명에 달했다.
보수파는 기득권을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자, 병석의 손병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교주 선거제와 연원제의 폐지는 교단 존립의 구심력을 파괴하는 것으로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결국 손병희가 시기상조론에 동의하면서 순항하던 혁신운동에 제동이 걸렸다. 이종훈 등의 전도사회가 나서서 손병희를 설득했지만, 손병희는 자신의 권위에 감히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천도교대헌」체제로의 복구를 명령하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혁신운동에 대한 여론의 지지에 고무된 상당수의 의정원들이 혁신파에 가담해 손병희의 권위에 도전했다. 전도사회도 혁신운동의 지속적인 추진을 다짐하는 회맹식을 가졌다.
혁신파 대 보수파의 파쟁이 격화될 조짐을 보이자, 오세창, 권동진, 최린 등이 중재를 자임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보수파에 가담하고 말았다. 마침내, 보수파 주도로 「천도교대헌」 체제로의 복귀를 골자로 한 손병희의 친명서가 발표되었다. 그리고 최린, 권동진, 오세창 등이 주도하여 혁신파의 중진인 조인성과 김봉국은 물론 이종훈.홍병기,정계완,오지영 등의 원로급을 교단의 체면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교적에서 제명하고 출교시켜 버렸다. 혁신파에 대해서는 총공세를 펼치며 언론매체 등을 통해 '최동희 일파는 겉으로는 문명의 간판을 붙이고 있지만 속에는 야심을 갖고 있다'고 비난했다. 당시 천도교 내분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는 최고 어른 대접을 했던 이종훈.홍병기와 같은 장로마저 분명하지 않은 이유를 들어 제명한데서 드러난다. 이종훈의 입장에서 보면 더할 나위 없는 치욕이었다.
교단의 분규가 파국으로 치닫던 1922년 5월 손병희가 사망했다.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손병희 사후 천도교의 차세대 지도자로 기대를 모은 이는 권동진, 오세창, 최린, 정광조, 이종린 등이었다. 당시 중앙교단 간부로 활동하고 있던 그들이 선택한 위기타파의 묘책은 '혁신파의 사상적 경향성을 불문에 부치고 지방 천도교인의 동요를 막기 위해 무조건 합동한다'는 것이었다.
보수파는 임시 교인대회를 개최하여 전격적으로 무교주제를 의결하고 나용환, 정광조, 최린 등 42인의 대표위원을 선출한 뒤 교무 전반을 일임했다. 대표위원들은 먼저 이종훈을 비롯한 혁신파에 대한 출교를 취소하고 그날로 혁신파와 일괄타결에 성공했다. 양자 모두 무교주제에 찬동하고 있었으므로 협상은 예상외로 쉽게 타결되었다. 그리고 교주제의 완전폐지와 종리사에 의한 집단지도체제를 명기한 「천도교교헌」이 반포되었다. 이어 실시된 종리사 선거에서 공교롭게도 전원 보수파가 당선되고 말았다. 대세가 보수파로 기울면서 이종훈을 비롯한 홍병기, 정계완 등 혁신파 23명이 보수파에 가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혁신파는 천도교혁신단을 결성하고 '신구분리'를 선언한 뒤 「임시약법」을 공포했다. 그리고 1922년 12월 별도의 단체인 천도교연합회를 창설해 천도교단을 이탈했다.
이처럼 혁신파의 원로뿐만 아니라 중도파까지 혁신의 대세를 거부하고 보수파에 가담하게 된 것은 혁신파의 사회주의적 경향 때문이었다 최동희는 1919년 6월에 러시아로부터 모종의 지시를 받고 독립운동을 위해 귀국한 혐의로 체포당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혁신파 소장그룹 역시 천도교청년회 내 급진적인 성향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좌파 그룹에 직접 가담해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3.1운동으로 인한 옥고의 고통이 채 가시지 않은 천도교 지도자들에게는 점차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혁신파가 미약한 세력기반에도 불구하고 천도교 계파의 하나로 인정받게 된 것은 1926년 12월에 발생한 고려혁명당사건 덕분이었다. 고려혁명당은 1926년 4월 5일 중국 길림에서 만주의 정의부 계열과 국내의 천도교혁신파,형평사가 연합하여 결성한 민족유일당운동의 선구격인 통일전선체였다. 고려혁명당이 국내외 조직의 연합.합작을 통해 지향한 것은 만주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이를 지원하기 위한 국제 연대를 모색하는 민족유일당이었다. 천도교 혁신파의 영수였던 최동희가 바로 고려혁명당의 창당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고려혁명당에 참여한 혁신파는 최동희가 국내에서 조직한 비밀정치조직인 고려혁명위원회의 간부들이었다. 고려혁명위원회는 천도교 혁신운동이 한창이던 1922년 7월에 결성된 천도교 내 지하 독립운동조직이었다. 고려혁명위원회의 구성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고문 이종훈, 위원장 홍병기, 부위원장 최동희, 비서 송헌, 외교부장 최동희, 해외조직부장 이동락, 해외선전부장 김광희, 해내조직부장 이동구, 해내선전부장 김봉국, 재정부장 박봉윤 -
이처럼 고려혁명위원회는 혁신파에 가담했던 천도교단의 원로.중진.소장급 지도자 대부분을 포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혁신파의 입장에서 보면, 고려혁명당은 고려혁명위원회의 후계조직이기도 했다. 하지만 1926년 12월 고려혁명당사건이 터져 혁신파 간부 대부분이 투옥되고 최동희마저 1927년 1월 상해에서 폐병으로 사망함으로써 고려혁명당 내에서 혁신파의 위상은 완전히 무력화되고 말았다.
이종훈은 출옥 후 천도교 원로로서 혁신 운동을 지지하고 도왔지만, 최린, 이종린 등 새로이 부상한 천도교 지도자들이 보수 전선을 형성하고 자신이 출교의 치욕을 겪게 되자, 결국 그들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위상을 무시할 수 없는 천도교 주류 세력은 그에게 오세창, 권동진, 나용환, 오영창, 홍병기 등과 함께 장로로 대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도교 원로로서의 그의 위상에는 적지 않은 손상이 갔고, 점차 비주류의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1925년의 그의 처지를 언론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천도교종법사로 계신 이종훈씨는 금년에 일흔 하나인가 됩니다. 지금 사시기는 동대문 밖 상춘원에 부속된 조그마한 집에 계신데 여생을 오직 천도교에 받치시고 늙어가는 세상과 같이 검은 머리카락을 헤아리고 계신답니다. 아들 되시는 분은 지금 일본 동경에 가 계신데 돈도 벌고 공부도 하노라고 여간 고생이 아니랍니다. 늙고 남으신 몸을 이어가며 아들의 금의환향이나 바라신답니다만은 덧없는 세상이라 하염없이 지으시는 한숨이 끊이지를 않는답니다. (『동아일보』 1925년 9월 30일 자)
동학농민운동, 갑진개화운동, 3.1운동에 헌신했던 독립 운동가 이종훈은 천도교 혁신 운동이 실패한 뒤에도 장로의 대우를 받으며 천도교 내에서 최린 주도의 신파가 득세하면서 신구파 분화가 일어나고, 구파가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에 참여한 뒤, 양자가 합동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말년을 보내고, 1931년 5월 2일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제공 : 국가보훈처]
안보단체 블루유니온에서
출처 만주독립운동사, 한국학 중앙연구원, 삼일운동기록,
손병희전기, 최시형평전, 권동진평전
주, 고려 혁명 위원회(高麗革命委員會)
천도교 교주 손병희(孫秉熙)가
죽은 직후 1922년 천도교 간부들이 애국정신을 계승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그 조직체로서 이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고문에 이종훈(李鍾勳), 위원장에 홍병기(洪秉箕),
부위원장에 최동희(崔東曦)를 선임하고, 다음과 같이 각 부서를 결정하였다. 비서 송헌(宋憲),
외교부장 최동희, 해외조직부장 이동락(李東洛), 해외선전부장 김광희(金光熙),
해내조직부장 이동구(李東求), 해내선전부장 김봉국(金鳳國), 재정부장 박봉윤(朴奉允)이었다.
이와 같이, 부서를 구성한 뒤에 최동희·김광희·김홍종·강희도는 연해주방면으로 이동락·김봉국·이동구는
만주방면으로 건너가 각 민족단체와 연락하여 활동하기로 하였다.
고려 혁명 위원회(高麗革命委員會)는 만주로 건너간 이동락·김봉국·이동구 등은 각지의 단체 대표들을 규합하여
, 1926년길림(吉林)의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민족운동 지도기관으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결성하고 나중에는 독립군 정의부와 함께 무장독립운동을 하였다
고려혁명당은 정의부(正義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활동하였다
. 주, 해월 최시형의 지도하 손병희.이종훈 이용구
진봉준등의 동학혁명/표영삼(출처, 천도교사)
1894년 9월 18일(양 10월 16일)에 신사 해월 최시형(神師 海月 崔時亨, 1827년. 이하
海月선생으로 약함)이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기포령을 내리자 호서 지역에서도 일제히 일어났다.
처음 기포한 곳은 음성군 만승면 광혜원(廣惠院, 당시는 鎭川郡)이었다.
얼마 후 음성 삼성면 황산(黃山)에 있는 충의포 도소(忠義包都所, 大接主 孫秉熙,
1861년. 혁명당시 34세)로 옮기면서 본격적인 혁명운동을 시작하였다.
손병희 대접주는 10월 6일 괴산전투를 치루고 보은으로 갔다가
10월 12일에 청산(靑山縣, 옥천군 청산면)으로 내려가 해월 선생을 만났다.
해월 선생은 손병희에게 통령의 직임을 주고 , 이종훈(李鍾勳), 홍병기(洪秉箕), 이용구(李容九), 임학선(林學善),
이승우(李承祐), 최영구(崔榮九) 등과 논산으로 가서 전봉준 장군과
합류하여 일본군을 물리치라는 명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손병희 이종훈(李鍾勳), 홍병기(洪秉箕), 이용구(李容九), 임학선(林學善),
이승우(李承祐), 최영구(崔榮九) 등이 는 논산으로 떠나 10월 16일에 전봉준 장군과 합류함으로써
호남·호서 동학군은 하나가 되어 공주성 공략을 벌이게 되었다.
동쪽의 곰티에서 서쪽의 우금티에 이르기까지 30리에 걸친 전선에서 10월 23일부터 혈전의 막은 올랐다.
그러나 무기의 열세로 많은 희생자를 내고 11일에 노성까지 물러서게 되었다.
손병희 통령은 전봉준 장군과 생사를 같이하여 논산,
전주를 거쳐 원평에 이르러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고 11월 25일에 다시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역시 무기의 열세로 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태인, 정읍, 순창 복흥을 거쳐 임실 갈담(葛潭)으로 넘어왔다.
여기서 해월선생을 모시고 장수, 무주, 영동, 황간을 거쳐 보은 북실에 이르렀다.
11월 17일 밤부터 18일까지 민보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세칭 북실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 여기서 다시 패하여 금왕 되자니로 가서 마지막 전투를 벌인 다음 호서 동학군은 끝내 해산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손병희 통령이 광혜원에서 기포한 이후의 행적과 전투과정을
개관해 보기로 한다. 1. 충의포 황산서 기포 해월 선생은 보은 대도소에서 9월 18일(양 10월 17일)에
기포령을 내렸다. 이에 앞서 호남 호서 동학지도자들은 9월 11일부터 12일까지 이틀간 전라도
삼례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한 재기포 여부를 놓고 격론을 벌인 끝에 재기포(再起包) 하기로
의견을 모은 바 있다. 이에 따라 해월 선생도 기포령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백범일지(白凡逸志)}에 의하면 "후보(後報)가 들어왔다.
어떤 고을 원이 도유(道儒)의 전 가족을 잡아 가두고 가산을 강탈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를 들으신 선생(海月)은 진노하는 낯빛을 띠고 순 경상도 사투리로 호랑이가 물러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워야지 하시니 선생의 이 말씀이 곧 동원령이었다.
각지에서 와 대령하고 있던 대접주들은 물 끓듯이 상기를 띠고 물어가기 시작하였다. 각각 제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싸우자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7월경까지만 해도
해월 선생은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여왔다. "근일 교도가 혹 가탁 관리하고 탁명 수간( 奸)하야 도처
사악(肆惡)에 경외의 심이 불소하니 틈심해당(闖甚駭 )한지라 성훈에 왈 인시천(人是天)이라 하고
우왈 타인(打人)이면 타천(打天)이라 하였으니 피아를 물론하고 균시(均是) 천주를 시(侍)한
동포이니 설혹 유과(有過)할지라도 절물(切勿) 구타하고 자관(自官) 재결함을 유지하라"고 타일렀다 한다.
이러한 해월 선생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판다놔여 결단을 내린 것이다.
백범은 황해도로 내려가다 광혜원에 들렸을 때
동학군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즉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벌써 곳곳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이고 평복에 칼찬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되었다.
광혜원 장거리에 오니 만 명이나 됨직한 동학군이 진을 치고 행인을 검사하고 있었다. 가관인 것은
평시에 동학당을 학대하던 양반들을 잡아다가 앉히고 짚신을 삼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증거를 보이고 무사히 통과하였다"고 하였다. 김구(白凡) 일행이 광혜원을
지난 것이 22일쯤이므로 이 곳 동학군들은 9월 20일경에 모이기 시작한 것 같다. 이 때 일부 관원과
유림세력들은 동학도를 가혹하게 탄압하여 생존을 위협하고 있었다.
진천군의 허문숙(許文淑)과 조백희(趙百熙), 지평(砥平)의 맹영재(孟英在)를 꼽을 수 있다.
맹영재는 8백 명의 토병을 모아 강원도 홍천, 횡성, 지평, 원주 지역에서,
허문숙과 조백희는 토병 5백을 모아 진천, 괴산지역에서 동학도들을 학살하였다 한다.
한편 김홍집 내각도 9월 22일(양 10월 20일)에 신정희(申正熙)를 도순무사(都巡撫使)로 임명하고
순무영(巡撫營)을 창설하게 하였으며,
각 군현에는 민포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초멸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두황(李斗璜)을 죽산부사로 임명하는 한편 장위영(壯衛營) 영관으로 임명하였고
성하영(成夏泳)을 안성군수와 경리청(經理廳) 영관으로 임명하여 출동시켰다.
그리고 일본군도 출동준비에 들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포한 동학군은
우선 무장을 갖추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양호우선봉일기}에 의하면 9월 25일에 음죽(陰竹) 관아를 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였다 하며
29일에는 진천 관아를 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였다 한다. 진천 관아에 쳐들어 간
동학군은 안성과 이천 동학도하 하였다.
안성과 이천 관아 무기는 벌써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에서 기포한 동학군들은 3개소에 모여 있었다. 진천, 이천, 안성, 여주, 음죽 동학군들은 광혜원에,
손병희 충의(忠義)대접주 휘하 동학군과 강원도 일부 동학군들은 황산(黃山, 현 음성군 금왕읍 황새마을)에,
충주 신재련(辛在蓮, 載淵) 접주 휘하의 동학군들은 보들(洑坪, 현 금왕읍 도청리, 신평리 일대)에 모여 있었다.
이들은 10월 초에 충의대도소(忠義大都所)의 대접주 손병희의 지휘를 받아 움직이게 되었다.
{천도교회사초고}에 의하면 황산에 모인 인물은
광주의 이종훈,
황산의 이용구,
충주의 홍재길(洪在吉)과 신재연(辛載淵),
안성의 임명준(任命準), 정경수(鄭璟洙),
양지의 고재당(高在堂), 여주의 홍병기(洪秉箕), 신수집(辛壽集),
원주의 임학선(林學善), 이화경(李和卿), 임순호(林淳灝),
이천의 김규석(金奎錫), 전일진(全日鎭), 이근풍(李根豊),
양근의 신재준(辛載俊), 지평의 김태열(金泰悅), 이재연(李在淵),
광주의 염세환(廉世煥), 횡성의 윤면호(尹冕鎬), 홍천의 심상현(沈相賢), 오창섭(吳昌燮) 등이라고 하였다.
이 밖에 음죽의 박용구(朴容九)를 비롯하여 여러 명이 있었다. 이들이 이끌고
온 동학군은 수만 명이라 하였으나 약 1만 명은 되었다고 여겨진다.
2. 호남·호서 동학군 합류 황상 도소에 수만 동학군이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조선좡조의 선유사(宣諭使) 정경원(鄭敬源)이 10월 4일경에 포병군 5백 명을 이끌고 황산으로 출동하였다.
5리 밖인 사창(社倉)에 주둔하게 되자
경기도 의병장(편의장)인 이종훈은, 적진에 찾아가,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 물러서자고 담판을 벌였다.
정경원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동학군 측은 당초 계획대로 보은으로 이동하였다.
허문숙과 맹영재도 출동했으나 동학군이 엄청난 것을 보고 물러가고 말았다.
충의포 손병희 이종훈(李鍾勳), 홍병기(洪秉箕), 이용구(李容九), 임학선(林學善),
이승우(李承祐), 최영구(崔榮九) 등이 동학군은 10월 6일에 황산을 출발, 괴산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괴산읍 인근에 이르자 수성군과 일본군이 총격을 가해 왔다.
동학군은 이들의 저지를 받고 몇 시간을 교전하였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보은군 장내로 왕할 차로 괴산으로 향할새 괴산 쉬( )가 충주에 주둔한 일병
수백 명을 요청하여 도중을 시살( 殺)하니 피차에 살상이 막심하였다.
일병이 충주병참으로 귀하거늘 도중이 일제히 괴산읍내에 입하여 일야를 경하고 익일에 보은 장내로 출발할새
괴산 쉬 본군 거 서접주 모를 포착하여 군민으로 하여금 타살한지라
기자 13세 아가 부수(父讐)를 복키 위하여 읍내에 방화하니
관청과 민사 수백 호가 회신(灰燼)하였더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이와는 달리 "지난(11월) 3일(음10월 6일) 원전(原田)
소위가 2개 분대를 인솔하고
충주에서 괴산지방까지 정찰하던 중 적군 약 2만 명을 만나 격전을 벌이다 겨우 다음날(4일)
오전 6시에 충주로 돌아왔고 원전 소위 이하 4명이 부상, 사병 1명이 즉사했다고
가흥병참사령부로부터 전보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 전투는 저녁 때에 벌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일본군의 피해는 5명의 사상자에 지나지 않았으나
동학군 측도 심중(甚衆)한 사상자가 있었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10월 6일에 이르러
동학도 누 만 명이 두 길로 나누어 살분(殺奔) 입경하였다. 이때 일본군 25명이
지나다가 북쪽에서 동학도가 오는 것을 보고 다가갔으며 남쪽으로 들어오는
적은 수성군이 맞아 싸웠다. 동학도는 많고 수성군은 적어 버틸 수가 없어 남쪽 전투는
불리하게 되었고 북쪽에서도 역시 패하여 일본군 1명이 사망하였다.
수성군과 부민도 11명이나 죽었으며 창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중상을 입은 자도 30여 인이나 되었다.
그리고 읍하 5동의 민가도 5백여 호가 불타버렸고 관아 공해들도 모두 부서졌으며 오직 객사만 남았다.
군기나 즙물, 문부는 불살라졌고 환곡 40석과 공전 8천여 금도 빼앗겼다"고 하였다.
7일 아침 일본군이 철수하자 동학군은 괴산에 들어가 하루를 쉬고 8일에 보은 장내리로 갔다.
여기에 있는 민가 200호와 인근 마을에 있는 민가로 분산하여 하루 밤을 자고 다음날 옥녀봉 아래
천변 일대에 4백여 개소의 초막을 치고 유숙하였다. 다시 충경포(忠慶包, 보은 동학군)와
문청포(文淸包, 문의 및 청주)
동학군이 합류하여 2만여 명으로 늘어나자 12일에는
해월 선생이 있는 청산으로 내려 갔다. 이 지역 동학군과 영동, 옥천 동학군까지 동원되어 대기하고 있었다.
근 3만 명에 이르는 동학군은 청산일대 여러 마을에 포진하고 있었다.
해월 선생은 각 포 두령에게 "지금은 앉아서 죽움을 당하기 보다 일어나 일체로 용진할 때라"는 유시를 내리고
손병희에게 통령을 임명하고 논산으로 가서 전봉준과 합류하여 일본군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였다.
12일부터 식량을 비롯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고 13일에는 전투병력의 편제를 정하였다.선봉은 전경수, 후진은 전규석, 좌익은 이종훈, 우익은 이용구, 중군은 손병희가 맡았다.
그런데 호서 동학군의 뒤를 따라 내려 오던 이두황(李斗璜) 관군은
15일 늦게 보은 장내에 도착하였다. 2백호의 민가는 거의 비어 있고 겨우 남아 있던 20여 인도
관군이 오자 산으로 도망쳤다.
관군은 400여 개의 초막에 불을 지르고 보은읍으로 돌아갔다가 16일에 회인으로 떠나버렸다.
전라도 동학군이 북상하므로 돌아 오라 하여 돌아간 것이다. 전봉준 장군은 10월 14일 삼례에서 출동하여
논산, 노성 일대에 진격하게 하였다. {전봉준공초}에 재기포한 날자가 10월 12일(양 11월 9일)이라 하였으므로
아마도 14일에는 논산으로 가 있었다고 보인다.
한편 손병희(1861년생) 통령, 이종훈(李鍾勳), 홍병기(洪秉箕), 이용구(李容九), 임학선(林學善),
이승우(李承祐), 최영구(崔榮九) 등이 은 14일에 청산을 출발하였다. {기문록}에는 "14일
저녁 때에 6∼7만 대진이 청산으로부터 (본읍, 영동에) 왔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손병희 통령이
이끄는 호서 동학군은 약 5천 명이었고 14일에 청산을 따나 영동 심천(深川)과 진산(珍山)을
거쳐 16일에 논산에 당도하였다.
한편 옥천, 황간, 영동 동학군 2만여 명 중 1만 명은 회덕(懷德) 지명(芝明)으로 가서 관군과
교전한 다음 공주군 장기면(長岐面) 대교(大橋, 한다리)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호남·호서 동학군이 공주를 공격할 때 금강 북쪽에서 위협하도록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동학군이
공주를 목표로 삼은 것은 북상하는데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점일 뿐만 아니라 지형적으로 산이
성처럼 사방으로 둘러있고 북서쪽에는 금강이 감싸고 있어 방어하기에 뛰어난 곳이었기 때문이다.
전봉준 장군은 공초에서 "공주감영은 산이 막히고 강이 둘러있어 지리가 뛰어나 이 곳을 차지하고 굳게
지킨다면 일본군도 쉽게 빼앗지 못할 것이므로 공주에 들어가 일본군에 격문을
보내 버텨보고자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이 먼저 차지하여 당초 계획은 빗나가 버렸다.
10월 16일 전봉준 장군은 손병희가 이끄는 호서 동학군이 도착하자 양호창의영수(兩湖倡義領袖)
명의로 충청감사에게 일본군을 같이 물리치자는 서한을 보냈다. 즉 "일본 원수가 트집을 잡아 틈을
내어 군대를 움직여 우리 군부를 핍박하고 우리 민중을 어지럽히고 근심케 하니 어찌 말하지 않으랴 …
각하는 맹성하고 의로써 같이 싸우자"고 하였다. 당시 논산에는 여산, 익산, 논산, 노성, 부여, 공주
동학군들도 모여들어 2만여 명에 이르렀다. 20일부터는 행동을 개시하여
노성(魯城)일대와 경천(敬天)일대로 진출하였다.
{전봉준공초}에 의하면 공주 공격은 10월 23일부터라 하였다. 그리고 전투를 시작한 것은 23일부터이다.
공주로 들어가는 길은 많은데 동쪽은 효포를 거쳐 참새골, 남다리를 지나 금강을 끼고 장기대 나루로
가는 길이 있고, 효포(新基洞)에서 서쪽 산을 타고 곰티(熊峙)로 넘어가는 길이 있다.
그리고 동남쪽은 가마울을 거쳐 능선을 넘어 공주 금학동(金鶴洞) 큰골로 넘어가는 길과 남쪽
오실동(梧實洞) 뒷산을 넘어 금학동 하성다리로 가는 길이 있다. 다음은 남쪽 우금티로 넘어가는 길이 있으며
우금티 서쪽 견준산(犬 山)과 공주 서쪽 봉황산(鳳凰山) 사이에 있는 새재를 넘어 봉황동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으며,
서쪽 금강을 따라 저대와 한산을 거쳐 봉황동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1차 공격은 효포 쪽과 이인 쪽으로
나누어 들어갔다. 호남 동학군은 효포 쪽을, 호서 동학군은 이인 쪽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그러나 일부병력은 호서동학군이 효포 쪽으로, 호남 동학군이 이인 쪽으로 뒤섞여가기도 하였다
. {시천교종역사}에는 "이인역에 이른 이용구는 옥녀봉에서 경병과 전투하였으며 경병은 패해 달아났다"고 하였다.
경리청 대관 백낙완(白樂浣)도 {남정록}에 손화중이 참전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손병희를 손화중으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공방전이 벌어진 지점은 동쪽 효포(孝浦, 龍溪面 新基里)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길목인
웅치(熊峙, 곰티, 용계면과 공주시의 경계) 일대와 남쪽 우금티 길목인 이인 일대였다.
호남 동학군은 23일에 널티(板峙)를 넘어 효포에 이르러 관군을 물리쳤다.
{남정록}에 의하면 22일에 동학군이 경천에 왔다고 하자 경군 280명을 효포에 배치하여 파수케 하고,
280명은 부내에서 방수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23일에 동학군이 널티를 넘어 효포를 향해 올라가자
효포에 배치되었던 관군은 겁을 먹고 도망쳐버렸다. 즉 "효포를 파수하던 장졸(280명)이 …
놀라 겁내어 … 금강을 건너 도망쳤다". 그래서 호남 동학군은 전투를 하지 않고 효포 일대를 장악하였다.
전봉준 장군은 24일 새벽에 4천 명의 정예병력을 투입하여 곰티 산줄기에 뻗어 있는
여러 갈래의 능선으로 기어오르게 하였다. (후일 전봉준 장군과 공주성 공격을 다룰 때 자
세히 소개키로 함). 관군은 2개로 나누어 곰티 아래와 위에 배치하고 급히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홍운섭이 이끄는 관군과 모리오(森尾)가 이끄는 일본군은 서둘러 24일 저녁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곧 금강진두(錦江津頭)와 봉수재(月城山)에 1개 소대씩 배치하고 방어에 들어갔다.
{순무선봉진등록}에 의하면 안성군수 홍운섭(洪運燮)과 대관 조병완(曺秉完)은 1개
소대 병력으로 금강진두를 수비하였고, 참령관 구상조(具相祖)는 1개 소대병력으로
봉수재를 방어하게 하였다. 25일에는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은 계속 곰티를 방어케 하였고,
구상조와 일본군 30명은 남쪽에 있는 동학군의 좌측을 공격케 하였으며 홍운섭과 조
병완은 동학군의 북쪽 우측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한다리에 진주하였던 동학군은
24일에 관군의 기습을 받고 힘없이 무너져 협공작전은 차질을 가져 왔다. 관군은 한다리로
바로 가지 않고 북쪽 25리 지점에 있는 수촌(壽村)으로 돌아서 한다리 배후로 접근하였다.
한다리 뒷산 숲과 들에 포진하고 있었던 동학군은 서쪽과 남쪽만 경계하고 있었다.
뜻밖에 북쪽 산 숲속에서 관군의 기습을 받게 되자 당황한 나머지 한나절만에 패하고 말았다
. {순무사정보첩}에 의하면 "옥천포 동학도 수만 명이 동쪽 30리 지점에 있는 한다리에 모여 전봉준과 회합하려한다.
… (24일) 첫 닭이 울자 곧 출발하였다. 25리 정도 돌아서 수촌에 이르러 조반을 먹고 한다리 뒷길을 따라
20리를 전진하였다. 멀리 바라보니 마을 뒤에 작은 골짜기 숲 속에 수천 명이 모여 있었다.
들에는 깃발을 둘러 세우고 수만 무리가 모여 있었다. 몰래 배후로 접근하여
숲 속의 적을 먼저 기습하였다. 조금 후에 산 아래서 포를 쏘며(ㅈ항하던 동학군은) 들에 있는 적들과 합류하였다.
숲이 있는 골짜기를 탈거(奪據)하자 서로 총을 쏘며 한나절 전투를 벌였다. 적 20여 명을 사살하였고 생포도
6명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동학군은 관군과 일본군이 배치되어 있는 맞은편 계곡이나 능선에 올라 대치하고 있었다.
전봉준 장군은 곰티에서 직접 지휘하여 공격에 들어갔다. {순무선봉진등록}에 의하면 "적세는 듣던 대로
산과 들에 가득 덮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소위 우두머리인 전봉준은 휘장을 드린 가마에 타고
깃발을 흔들고 태평소를 불며 벌떼처럼 둘러싸고 공격해 왔다"고 하였다. 곰티만 넘으면 공주이므로
전봉준 장군은 관군의 지원병력이 늘어나기 전에 곰티를 넘으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지형이 험준하여
2주야를 잠도 못 자고 공격했으나 좀처럼 전진할 수 없었다. 식량과 탄약도 떨어지고 피로도 겹쳐 할 수 없이
30리 후방인 경천으로 철수하였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은 다음과 같다.
1,22일(음 10월 25일) 오전 6시 공주 동면 능치치(陵峙峠, 곰재) 월성산(月城山) 등을 수비케 했던
경리영병으로부터 우세한 적군(대략 3백여 명)이 공주 동편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으며
3천여 명은 냉천(冷泉) 뒷산으로 진격해 오고 있다고 보고해 왔다.
2, 이러한 상황하에 공주에 있는 적도 정토대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 일본군 제2중대(1소대와 2분대),
한국군 810명.
3, 오전 8시 30분 중대가 능암산(陵庵山)에 이르러 적의 정세를 정찰해 보았더니
적도 약 3천여 명이 능암산에서 약 1천m 전방에 있는 냉천 뒷산에 있으면서
능치산과 월성산 등의 한국군과 교전 중이었다.
그리고 적군 몇 명이 우리의 우익인 능암산 기슭으로 나와 이 산을 점령하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니시오까(西岡) 조장에게 2분대를 이끌고 가서 능암산을 점령하려는 적도를 격퇴하고 또 냉천 뒷산에
있는 적도의 인원수를 정찰케 하였다.
4, 여기서 우리 군대를 월성산과 능암산과의 중간에 배치하여 적의 측면과 배후를 향해 몇 번의 일제사격을
시도했지만 탄착점이 보이지 않고 거리가 맞지 않아서 사격을 중단하였다. 이렇게 서로 대치한 상태에서 오후 1시가 되었다.
5, 오후 1시부터 냉천 뒷산의 적이 뒷쪽 산 위로 퇴각하였다. 그래서 한국군으로 냉천 뒷산을
점령하고 경계하도록 맡기고 중대를 이끌고 공주로 철수하였다.
6, 적은 일몰에 이르러 결국 퇴각하여 경천지방에 집합한 듯하였다.
7, 적정을 정찰토록 파견했던 니시오까 조장이 이끄는 분대의 병졸 스스기(鈴木善五郞)가 적
의 유탄에 맞아 오른쪽 정강이에 부상을 입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의하면
곰티를 공격하던 동학군 중에는 40명 정도의 청국군이 끼어 있었다고 하였다.
즉 "11월 27일(음 11월 1일)자 재 공주 모리오(森尾)대위의 필기보고에 의하면
11월 21일(음 10월 24일)에 공주에 도달하여 동남에 있던 수만의 적도와 교전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다음날 22일(음 10월 25일) 미명부터 적도는 재차 공격해 왔으나 우리 군대가 이를 막았고
오후 1시경 이들을 격퇴하였다. …
일몰에 이르러 적도는 경천, 정산(定山) 방향으로 퇴각하였으며 그 중에는 청국군 40명 정도가 있었다"고 하였다.
아마도 동학군 중 일부가 양총으로 무장한 것을 보고 청국군으로 오인한 것 같다. 한편 우금티의 길목인
이인 쪽을 담당했던 손병희 통령 휘하 호서 동학군은 23일에 이인으로 진출하여 우금티로 진출하려 하였다
. 관군은 성하영(成夏永) 휘하 경리청 대관 윤영성(尹泳成)과 참모관 구완희(具完喜)가 이끄는 관
군 약 350명이었고 일본군은 스즈끼(鈴木) 군조가 이끄는 약 30명이었다. 동학군은
지형이 유리한 산(翠屛山)으로 올라가 포진하고 공격에 나섰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동학군이 회선포(回旋砲)를 쏘아 관군의 공격을 저지하였다고 하였다. 동학군 일부는
신식무기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나절을 대항하던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군에
밀려 우금티로 후퇴하고 말았다. 일부 동학군이 이인 뒷 쪽으로 돌아가 포위작전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관군과 일본군은 소수병력으로 출전하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공주를 방어하는 데
치중하였다. 동원된 관군병력은 대략 810명이었고 공주 관영군은 약 4∼500명 정도,
그리고 일본군은 1개 중대(1개 소대와 2개 분대가 빠진 140명 내외)였다고 추측된다.
이인에 진출했던 동학군도 역시 노성으로 철수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11월 3일에
이르러 관군은 널티와 이인에 경리청 소대를 파견하여 동학군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하였다.
동학군측에서도 10여 일간이나 공격하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증원병력의 보충과 식량 확보, 화약 비축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추운 날씨에 싸우자면 솜옷도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전투지역에는 인가가 모두 비어있었고
날씨가 몹씨 추원 솜옷을 마련하는 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었다. 3. 피의 우금티 공방전
2차 공격은 11월 8일부터 재개되었다. 이번에는 약 3만 명이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공주를 지키는 관군병력도 늘어나 2천 명 정도였고 일본군은 140명 정도였다.
{순무선봉진등록}에 의하면 판치에 나가 있는 구상조로부터 "8일 오후에 …
동학도 몇 만 명이 혹은 정천점(敬天店)에서 바로 올라오고, 혹은 노성 뒷쪽
봉을 넘어 포위하며 올라오고 있다. 포성이 진동하고 깃발이 어지럽고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진격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하영도 "동학도 몇 만 명이 논산에서
곧바로 고개를 넘어 밀려오고 있으며 또한 몇 만 명은 오실(梧室) 산길을
따라 뒤를 끊고 에워싸고 있다"고 하였다. 적은 병력으로 막아내기 어려워
지형이 유리한 효포와 곰티 고봉 요새로 진지를 옮겨 … 동태를 살피고 있다"고 하였다.
이인에 나가 있던 관군은 밀려오는 동학군을 막지 못하고 우금티로 후퇴하였다.
{남정록}에 의하면 140명의 관군을 거느리고 이인 남쪽에 있는 취병산에 있던 관군은
동학군에 포위되어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하였다. "11월 7일에 이인역 취병산에서 파수하고 있었는데
저녁 때에 동학군이 대군을 몰아 취병산을 둘러샀다. 포성은 우레와 같고 탄환은
우박 내리듯 하여 움직일 수 없었다.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밤중에 안개가 자욱히 산록을 뒤덮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자 겨우 빠져
나와 공주로 달려왔다"고 하였다. 관군과 일본군은 공주 산봉우리 요지를 지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반면 동학군은 험준한 산으로 공격해 올라가는데 온 힘을 기우렸다. {순무선봉진등록}에 의하면
"9일 날이 밝자 적의 진세(陣勢)를 살피니 각 진에서 서로 보이는 봉우리마다 온갖 깃발을 꽂고 있었다.
동쪽 널티 후봉에서 서쪽 봉황산 후록까지 30∼40리에 연달아 산상에 진을 치고 마치 사람으로
평풍을 두른 듯이 기세가 대단하다"고 하였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나타난 전투상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12월 4일(음 11월 8일)오후 4시 널티 지역을 맡고 있던 경리영병으로부터 오후 3시에 우세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자 점차 공주로 퇴각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2. 그 당시 공주에 있던 관군은 다음과 같다.
(일본군) 중대병력(1개 소대와 2개 분대가 빠졌음). 한국군 810명. 3. 위와 같은 보고서에 따라 한
국군(통위영병) 250명에게는 월성산에 가서 요지를 점령하여 적을 막게 했으며 한국군(경리영병
) 280명에게는 향봉 부근에서 월성산과 연락을 취하면서 적을 막게 하였다. 이인에 있던 경리영병
280명은 점차 우금치산으로 퇴각케 하였다. 2중대가 우금치산을 점령하였다.
오후 5시 20분 스즈끼 특무조장에게 그의 소대와 이인에서 퇴각해 온 한국군을
이끌고 우금티산과 이인가도를
수비케 하였다. 대위 모리오는 제3소대(2분대 빠짐)를 대리고 향봉 부근에 있었다. 4. 향봉에 이르러
적의 정세를 정찰하니 향봉산 위로부터 약 1, 400m 떨어진 산 위 일대에 적도가\
무리로 모여 있었다.(약 2만 명).
활활 불을 지피고 동남쪽을 포위하면서 계속 총과 포를 쏘아댔다. 이렇게 해서
다음날 아침까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 5. 5일(음 11월 9일) 오전 10시 이인 가도와 우금치산 사이 약 10리에 걸친 곳에
적도가 대략 1만여 명이 나타나
우리의 우익 서쪽을 향해 급진해 왔다. 그 기세가 맹렬하였다. 우금치산은 공주의
요지로서 이 곳을 잃으면 다시
공주를 지킬 방도가 없다. 이와 동시에 삼화산(三花山)의 적 (1만여 명)도 오실(梧實) 뒷산을 향해 전진하였는데
그 정세가 매우 급하였다. 그리고 이 곳 역시 공주의 요지로 천연의 험지이다. 그래서 나가노(中野) 군조에게 1
개 분대와 한국군 1개 분대를 이끌고 오실 뒷산을 단단히 지키도록 하였다.
오전 10시 40분 우금치산에 이르러 적의 정세를 정찰하니, 적이 우금치산 전방
약 5백m에 있는 산 위로 전진해 왔다. 이 때 스즈끼(鈴木) 특무조장은
다음과 같이 배치하였다. ⑴ 1개 분대를 견준산(犬 山)의 산허리,
또 1개 분대를 우금치산 산허리와 이인가도 오른쪽(전방 도로를 막을 수 있는 곳).
⑵ 한국군(경리영병) 280명을 봉황산(전면과 오른 쪽 방어를 말함).
⑶ 나머지 2개 분대는 우금치산. 여기서 제3소대를 우금치산에 증파하여 일제사격으로서 전방 산 위
약 8백m가 되는 곳에 군집한 적을 대적케 했으며 경리영병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적을 향해 사격토록 하였다.
그러나 적은 교묘하게 지형물을 이용, 약 2백여 명이 우금티산 꼭대기에서 약 150m 되는 산허리로 진격해 왔다.
그 선두의 5∼6명은 몇 m 앞 사각지점에 육박했고 앞산 위에 있던 적은 더욱더 전진해 왔다.
수 시간 동안 격전했는데 우리 군대가 가장 힘써 사웠다.
6. 오후 1시 40분 경리영병의 일부(50명)를 우금치산 전방 산허리로 진격시켜 우금치산
산꼭대기에서 140∼150m의 산허리에 걸쳐 있는 적의 왼쪽을 사격케 하였다.
그래서 적은 전방 약 5백m의 산꼭대기로 퇴각하였다. 오후 1시 20분
우금치산의 우리 군대를 그 전방 산허리로 진격시키고 경리영병에게 급사격을
시켰으며 적이 동요하는 것을 보고 1개 소대와 1개 분대로써 적진에 돌입케 하였다
. 이에 이르러 적이 퇴각했으므로 경리영병에게 추격을 맡기고 중대는 이인가도로 나가
적의 퇴로를 다가가려고 하였다. 7. 중대는 이인가도로 나가 급추격,
드디어 이인 부근에 이르러 그 일대의 산허리에 불을 지르고 몰래 퇴각하였다.
그러나 동남쪽의 적도가 여전히 퇴각하지 않으므로 한국군에게 우금치산,
오실 뒷산, 향봉, 월성산 등의 경계를 맡기고 기타 대원은 공주로 철수하였다.
이 때가 오후 8시였다. 당시의 병력배치를 보면 통위영병 250명은 동쪽 월성산에,
경리영병 280명은 향봉 부근에 배치하여 월성산과 연락을 취하며 막게 하였다.
이인에 나가있던 경리영병 280명은 우금치산으로 철수시켜 배치하였다.
그리고 일본군 100명 정도는 우금치산 일대에 배치하였다.
나머지 40명은 향봉 부근에 배치하였다. 이에 비해 동학군 3만 명은 맞은편 봉우리마다
수백 명 씩 배치되어 있었다. 숫적으로 절대 우세하였으나 무기는 고작 유효사거리 30m
정도인 화승총으로 무장하였으므로 사거리 300m의 신식무기를 당해 낼 재주가 없었다.
그래서 제대로 접근할 수 없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피아간의 전투는 11월 9일
12시경부터 시작되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의하면 "(12월) 5일(음 11월 9일)
오전 10시 우금티 산에서 약 10리 떨어진 이인가도에 적도 1만여 명이 나타나
우익 서방을 향하여 다가왔다"고 하였다. "이와 동시에 이화산(二花山)의 적(약 1만명)은
오실 뒷산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었다 하며 10시 40분 경에는 우금티에서 500m 떨어진
산상까지 이미 전진하여 왔다"고 하였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동학군이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아, 저 비류 기만명의 무리들이 40∼50리에 걸쳐 둘려 쌌으며,
길이 있으면 쟁탈하고 고봉이 있으면 점거하고, 동쪽을 치는 척하고 서쪽을 치고
좌측에서 번득이다가 어느새 우측에 나타나 기치를 흔들고 북을 치면 이에 따라 죽음을 무릅쓰고
산에 먼저 오르려하니 그들의 의리는 어떤 것이며 그들의 담략은 어떤 것으로 설명하랴.
그 상황을 생각하면 등골이 떨리고 마음이 섬뜩해진다"고 하였다. 12시경에 동학군 2백여 명은 교묘하게
지형을 이용하여 우금티 전방 150m까지 접근하였다. 그 중 5∼60명은 몇 미터까지 다가왔다.
그러자 피아간의 공방전은 치열하게 벌어졌다. {갑오관보}에는 동학군의 공격모습을
"산등에 늘어서서 일시에 방포하고 산 안쪽으로 몸을 숨겨버렸다. 적이 봉우리를 넘으려
하면 (관군은) 다시 산등에 올라 총을 발사하기를 40∼50차례나 하니 시체가 산에 가득히
쌓였다"고 하였다. 수세에 몰렸던 일본군과 관군은 1시 40분경에 역공으로 나왔다.
경리영병 50명을 전진시켜 140m 내지 150m 떨어져 있는 동학군의 좌측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동학군은 즉각 산상으로 후퇴하여 응전하자 이때 일본군도 엄청나게 집중공격을 퍼부었다.
소비탄약이 2천 발이라 하였으니 집중공격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동학군은 움츠러들었고
2시 20분경에 일본군은 정면으로 공격하여 왔다. 손병희가 이끄는 호서 동학군은 이 때 우금티
서쪽과 봉황산 일대에서 공격전을 벌였다.
{천도교서}에 의하면 이종훈(李鍾勳), 홍병기(洪秉箕), 이용구(李容九), 임학선(林學善),
이승우(李承祐), 최영구(崔榮九) 등이 측근에서 할동하였다 한다.
{시천교종역사}에 의하면 "드디어 봉황산으로 진격하자 경병과 일병이
산을 따라 사격하여 왔으며, 교도들은 죽움을 무릅쓰고 전진하여 양군은
10여 차례나 교전을 벌였다. 이용구는 정강이에 총상을 입었으며 일본군이 압박하
자 힘이 딸려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다. 논산까지 물러가 다시 모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렇게 맹열히 공격하던 동학군은 어째서 멈칫거렸을까. 일본군과 경리영병의
집중사격으로 많은 전사자가 생긴 탓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탄환과 화약이 떨어진 것이
주요 원인이 아닌가 싶다. 이 때를 놓지지 않은 일본군과 관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여유를 주지 않고 맹렬히 추격하였다. 이인쪽으로 10리 가량 후퇴하였을 때
그들은 추격을 포기하고 산에다 불을 지르고 몰래 돌아갔다.
그러나 곰티와 향봉 쪽 동학군은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이 곳에서는 11일 정오까지 피아간의 공방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 {순무사정보첩}에 의하면 "적도 수천은 험준한 곳을 지키며 나오지 않아 격파할 계책이 없었다.
정오에 이르러 교장 이봉춘이 정병 10명으로 하여금 군복을 벗고 비류로 위장한 후 살며시 전진하였다.
적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산으로 올라가 앞에 나타나 일제 사격을 가하자 4∼5명이 쓰러졌다.
무리들은 무기를 버리고 몸만 빠져 달아났다. 고군(孤軍)이 될 염려가 있어 추격하지 못하고 총만 연달아 쏘았다. …
적의 동태를 탐지하니 흩어진 여당들은 곧 계룡산 등지로 갔다"고 하였다
. 관군 10명이 기습하자 도망쳤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허황된 기록은 관군기록에 가끔씩 나타난다
. 노성으로 물러난 호남·호서 동학군은
12일에 창의소의 명의로 충청감사에게 척왜척화(斥倭斥華)를 위해 동심협력하자는 글을 보냈다. 요지는 "
도는 다르나 조선사람끼리 척왜와 척화는 그 뜻이 같으니 두어 자 글로 의혹을 풀어 알게 하노니 각기
돌려보고 충군우국지심이 있거든 곧 의리로 돌아와 상의하여
척왜척화(斥倭斥華)하여 조선으로 왜국이 되지
않게하고 동심합력하여 대사를 이루게 하자"고 하였다. 이 글을 받아본 충청감사의 반응은 감감했다.
4. 원평서 마지막 전투 동학군은 노성에서 항전해 보려고 수습해 보았으나 사기가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식량과 탄환도 여의치 않아 논산으로 다시 후퇴하였다. 논산 소토산(지금의 대건고등학교)에 일단 진지를
구축하였다가 여의치 않아 다시 전주로 후퇴하였다. 이 때 최난선(崔蘭善)이 이끄는 여산과 논산·강경,
익산지역 동학군 1천여 명이 달려와 이 곳에 진을 쳤다. {여산종리원연혁}에는 "본군 대접주 박치경 외 최난선 …
등이 미륵리에 집강소를 설하다. … 11월에 경병으로 더불어 공주, 논산 양처에서 교전하다"고 하였다.
김의환(金義煥)은 {혁명투사 전봉준}에서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군이 후퇴하고 있을 때
강동(江東, 江景)방면으로부터 1천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공주전투를 후원하기
위해 달려오던 여산 접주 최난선은 … 은진 황화대로 모아 추격해오는 관군과 최후의 혈전을
시도하였다"고 하였다. 이 전투는 여산 접주 최난선이 이 지역 동학군을 이끌고 와서
치룬 전투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전봉준 장군과 손병희 통령은 11월 15일에
논산을 떠나 18일경에 전주로 들어갔다. 견고한 성을 이용하여 저항해 보려 했으나 군
량미 마련이 여의치 않아 22일에 다시 금구 원평으로 떠났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의 요지를 보면 "전봉준이 성에 있으면서 주민을 선동하고 있다 하였다. …
정면은 일본군이, 그 뒤는 교도대가, 그리고 장위영·통위영 관군은 사방에서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본대가 10리쯤 전진했을 때 척후가 돌아와 말하기를 적군은 전날밤(22일)에 성을 버리고
금구로 도주하여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다. 금구 원평으로 간 것은 김덕명 대접주가 있으므로
군량미 조달과 화약을 확보하기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재기포 이후 용계장(龍溪丈, 金德明)은 동학군의
군수물자를 마련하는 일을 전담하였다. <김덕명판결선고서 designtimesp=7907>에
도 "금구지방에서 취군성당(聚群成黨)하야 관고의 군물을 찬탈하고 민간의 전곡을 약탈했다"고 하였다
. {순무선봉진등록}에도 "원평점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공곡과 공전을 거두어들이며 평민을 학대했다"고 하였다.
바로 원평(大都所)에서 김덕명은 동학군 군수물자 조달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23일부터 다시 대오를 정비하고 항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