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삿갓 시(詩) 천 장거무집(天長去無執)
관북 천리(關北千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는 이 태조(李太祖)의 건국 설화가 서려 있는 명소요,
길주(吉州) 명천(明川)은 수많은 고관대작들이 유배를 갔던 역사의 고장이 아니던가.
그러나 당장 시급한 문제는 우선 오늘 밤 잠자리였다.
불영암(佛影庵)에 유숙할 때는 잠자리 걱정도 끼니 걱정도 없었다. 그러나 공허(空虛) 스님과 헤어진
오늘부터는 모든 것을 그날그날의 운수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날은 저문 데 깊은 산속에 오막살이 한 채가 나온다. 사립 문도 없는 단 칸 두옥(斗屋)이다.
다행히 혼자 사는 노파가 반갑게 맞아 주면서 화로에 불을 피워 들여오고, 저녁 걱정을 하며 부엌으로
나간다. 방 안을 둘러보니 천장에는 거미줄이 잔뜩 쳐져 있고, 화로에서는 겻불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김 삿갓은 여기에서 또 희시(戱詩) 한 수를 읊는다.
天長去無執(천 장거무집) : 하늘은 높아 잡을 수 없고
花老蝶不來(화로접불내) : 꽃은 늙어 나비가 오지 않네.
*천장 거푸집 = 천장 거미집
화로 접불래 = 화로 겻불 내
천장의 거미줄과 화로의 겻불 냄새를 비슷한 한문 글자에 맞춰 보니 제법 그럴듯한 시가 되었다.
그래서 혼자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노파가 소반에 국수 한 사발과 지령(간장) 반 종지를 놓아 가지고
들어와서 먹기를 권한다. 김 삿갓의 장난기 어린 시재(詩才)가 다시 이어진다.
菊樹寒沙發(국수 한 사발) : 국화꽃이 찬 모래밭에 피어
枝影半從池(지령반종지) : 그림자가 연못에 반쯤 비치네.
국수를 먹고 나니 노파는 산 너머 김 부자 집에서 잔치 음식을 가져왔다면서 소반 위에 귀한 음식을
담아 내온다. 소반에는 강정, 빙사과(유밀과 <油蜜菓>), 대추, 복숭아 등이 놓여 있다.
음식 이름을 그대로 주워 맞추니 또 한 수의 시가 된다.
江亭貧士過(강정빈사과) : 가난한 선비가 정자 옆을 지나다가
大醉伏松下(대취복 송하) : 술에 취하여 소나무 아래 엎드렸소.
강정빈사과 = 강정 빙사과
대취복송하 = 대추 복숭아
음식을 먹고 나자 노파는 개를 불러 과 줄 부스러기를 던져 주었다.
개는 지금까지 뒷간에서 똥이라도 먹다 왔는지 몸에서 구린 내가 풍겨 오고 있었다.
김 삿갓은 이를 바라보다가 또 한 수의 희시(戱詩)를 생각해 냈다.
月移山影改(월이산영계) : 달이 옮겨 가니 산 그림자 바뀌고
通市求利來(통시구리 내) : 사람은 장거리에서 돈을 벌어 오네.
월이산영계 = 월이 산영개
통시구리 내 = 통쉬 구린내
통쉬 란 뒷간의 사투리이다. 아무튼 그처럼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모두 시로 바꾸어 놓고 보니
보고 느끼는 것이 그렇게도 즐거울 수가 없었다. 세상이란 본시 각박하기 짝이 없는 것이 아닌가.
이론에 치우치면 모가 생기고, 정에 약하면 흘러가 버리고, 고집이 세면 살기가 거북스러운 것이다.
하여간 김 삿갓이 장원 급제한 사람이긴 해도 순발적으로 떠오르는 시상은 어찌 그렇게 빠르며
한자음을 우리말로 바꾸는 재치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우리말과 비슷한 한자를 찾아 의미가
같게 하기가 그리 쉽겠는가? 정말 천재 시인이 옳다.
<쇠뭉치 생각>
<옮긴 글>